“전 공익 다녀왔습니다” – 병역비리 문제 [썩은뿌리 자르기]
[썩은뿌리 자르기]
“전 공익 다녀왔습니다”
?- 병역비리 문제 –
최성문(서울시립대학교 학부생)
남자들 사이에서 첫 통성명 후에 등장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군대다. “군대 어디 다녀오셨어요?” 라고 물으면 나는 “예, 전 공익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2008년 5월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시작해 2010년 6월에 소집해제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말을 조심해야한다. 왜냐하면 소집해제가 아닌 제대라는 단어를 쓰면 심한 상대의 경우 적확한 단어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 달의 군사훈련 끝에 2년을 부당한 대우와 호소할 곳 없는 환경에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 현역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욱 고달팠을 현역들에게 감히 악수를 청한다.
첫 건강검진의 결과는 1급이었다. 곧 공군에 지원했으나 훈련소에서 받은 검진에서 건강이상이 의심되어 귀가조치를 당했다. 이듬해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니 4급에서 5급에 해당하는 판정이 나왔다. 왜 4급이면 4급이지 5급이 왜 나올까?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병무행정이란 것이 그 해에 군 지원자가 많으면 기준이 느슨해지고, 지원자가 적으면 엄격해지는 고무줄이다. 따라서 4급과 5급 사이는 운만 조금 따라준다면 해당 시기의 분위기를 봐서 공익근무 혹은 병역면제를 약간이나마 스스로 점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개인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애 2년을 통째로 날려버린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익근무를 선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왜냐하면 군대에 다녀오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실격이라 간주하는 주변의 시선 앞에 나 자신은 무력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타협을 필요로 했고 주변에서도 그 편을 권유했다. 어차피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단서가 붙은 면제이기에 아쉬운 마음은 떨쳐버리고 공익근무를 선택했다. 대다수 현역 보다야 편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시 했던 고민은 꽤 심각한 것이어서, 몇날 며칠을 컴퓨터 앞에서 병역관련 자료를 살펴봤는지 모른다. 법이 강제하지 못하는 범주에서는 사회가 그 역할을 대신해준 격이다. 이러한 고민과 행동은 징병제국가로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훈련소에 입소하여 한 달 여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살던 곳으로 ‘복귀’했다. 자신이 살던 곳을 숙소로, 관청을 본 업무지로 삼아 공익근무요원으로써의 병역을 시작했다. 현역 앞에서는 미안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이러한 생활도 참 힘들다. 2년을 시급 740원으로 노동해야했던 것 외에도 의무라는 미명 아래 온갖 잡일을 떠맡기던 공무원들과, 우습게도 그 안에서 연공에 따른 계급을 만들어 자신의 편의를 도모했던 같은 공익근무요원 선임들의 틈바구니에서 병역의무의 참맛을 알아갔다. 담당공무원은 공익근무요원관리의 편의를 위해 선후임 관계를 장려했다. 호소할 곳 없던 나는 으레 예비역들이 말하는, 인내를 배울 기회라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최소한 나의 공간에서나마 내가 믿는 상식을 관철시키리라 결심했고 이내 행동으로 옮겼다. 먼저 담당공무원에게 업무배분의 부당함을 따졌다. 공무원에게만 허락된 책임 있는 업무를 공익근무요원에게 떠넘기지 말 것이며 업무선택에 있어 개인의 희망을 고려할 것과 선임과 후임의 계급관계를 장려하는 행위를 멈추라고 큰 소리로 요구했다. 돌아온 것은 욕설과 고함이었지만 오히려 호기라 여긴 나는 멈추지 않았다. 며칠을 걸러 계속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하루는 선임의 호출을 받았다. 온갖 위협적인 언사와 함께 몰매가 쏟아지는데, 난 그때 본인의 위치를 자각했어야 했다. 두 사람을 때려눕히고 속은 시원했지만 그날 이후로 근 1년이 가시밭길이었기 때문이다.
저항을 크게 하면 할수록 상대는 조용히, 하지만 더욱 심하게 나를 옥죄였다. 따돌림은 기본이고 온갖 일상적인 잡무에 병역법이 허락하는 업무강도의 한계선까지 나를 몰아댔다. 너무 지쳤던 나는 결국 기약 없는 저항을 포기하고 조용히 귀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패가 수그러들지는 않았으나 나의 심지는 거기까지였다. 과거 고래고래 난리치던 모습과 갑작스레 조용해진 지금의 대비가 주변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전전긍긍하는 매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자 선임들은 모두 제대를 하고 공무원들의 인사이동으로 내 옛 모습도 서서히 잊혀져갔다. 어느새 나는 부서에서 착실한 공익근무요원이자 가장 맏 선임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느꼈던 병역의무의 부당함은 잊은 채 그저 살기 편해졌다는 것에 자족하며 빠르게 제도화되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을 대하는 법이라던가 일 대신 요령을 배우며 소위 사회생활을 착실하게 예습했다.
1년여가 흐르고 나에게도 첫 후임이 배정되었다. 첫 인사 나누며, 이 친구를 어떻게 부려먹어야 내가 편해질까 고민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애써 그 욕심 달래며 후임과 약속을 한 가지 했다. 공무원들은 우리에게 계급을 강요하지만 우리끼리는 호형호제 하며 어려운 병역의무를 서로 편하게 마치자고. 결국 처음 목표했던 상식의 관철은, 담당공무원이라는 실체로 대변되는 병역의무와 나의 의지 사이에서 타협을 한 셈이다. 난 안타깝게도 징병제국가의 의도대로 권력 앞에서 가져야할 태도를 배워버린, 한국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어버렸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공익근무요원들의 사이가 이후 동네 형과 동생처럼 편해졌다는 것이다.
소집해제 후 다시 이전의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확실히 과거와 지금의 내가 많이 달라짐을 느낀다. 의사를 전달할 때 직접 하기보다는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잦아졌다. 일을 할 때 내용 보다는 그 겉보기나 완성도에 치중하며, 일에 들이는 노동력의 절감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아직 병역을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선배라는 의무감이 들며 상대의 미래에 대해 괜한 훈수가 늘었다. 혹 상대가 나보다 권력관계로 우위를 점한다면 태도가 그렇게 유순해질 수가 없었다. 덕분에 주변으로부터 예전과 달리 인간관계를 중시하며 나이 먹은 티가 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재는 저 험난한 경쟁사회를 어떻게 헤쳐 나갈까에 대한 어린 날 고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고민을 의지로써 극복하는 것이 아닌, 내가 고민에 녹아들어버린 셈이다.
좀비영화가 생각난다. 좀비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로, 산 사람을 물어서 그 역시 좀비로 만든다. 감염성이 기하급수적이라 영화 속에서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소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소수는 고달프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좀비를 열심히 피하지만 대개 붙잡혀 좀비가 되고 만다. 다수가 가해자의 입장이 되면 도망치느라 겪을 괴로움은 없다. 오히려 여러모로 편하다. 하지만 과거 저항했던 나라는 한 인간을 떠올려본다. 나는 좀비 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선택권이 없는 지극히 온건해진 스스로를 대비하며 새삼 괴로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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