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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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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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소음성 난청 환자인 정부

6월 14일 ‘사커시티’에서 개막한 남아공 월드컵에는 ‘부부젤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커시티’가 위치한 요하네스버그의 남서쪽 타운십(South West Townships, 약자 Soweto)은 흑인 집단거주지로서 이번 월드컵의 개막전과 폐막식이 열리는 곳이다.

그런데 1976년 6월16일, 같은 장소에서 ‘부부젤라’대신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당시에 강제적 언어정책에 반대하던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던 것은 흑인을 물도록 훈련받은 개와 무장한 백인 경찰들이었다. 그 속에서 13살의 헥터 피터슨이 사살되었다. 피터슨을 죽였던 총소리는 월드컵 기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는 ‘부부젤라’에 묻히고 말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대표팀이 탈락하기 전까지 월드컵의 ‘부부젤라’ 소리가 우리의 삶 곳곳에서도 날마다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청력이 좋은 사람은 40만 가지의 소리를 구별해낸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은 4대강 삽질의 소음에 너무나 장시간 노출된 탓에 청각기관의 세포가 손상되었는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정부가 40만 가지의 소리를 듣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일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정부가 이제 사람의 소리조차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뜩이나 난청환자인 정부가 언론 정책까지 정부의 입맛대로 재편함으로써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길조차 막아서고 있다. 다시 말해서, 4대강 삽질의 ‘부부젤라’ 소리에 이미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MBC 장악, KBS 수신료인상 등을 통해 언론까지 장악함으로써 아예 귀를 막아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자본은 각기 나름대로의 ‘부부젤라’를 불어댄다. 그 속에서 이 땅의 ‘노동자이면서 노동자 아닌 존재들’의 외침 또한 ‘부부젤라’의 소리에 가려져 버렸다. 현 정부는 국민의 그 어떤 목소리와도 소통하지 않고 ‘단절젤라’를 불고 있다. ‘2010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정부는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5.8%에 달할 것이며 150억 달러의 흑자를 낼 전망이라는 나팔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6월14일 대국민 연설에서 6.2 지방 선거를 통해 드러난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은 “하루라도 빨리 투자를 시작해야 하는 기업들에게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며 “4대강 살리기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만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몇 년 뒤면 그 성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였다. 여전히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수난당하는 자들’을 확산시킬 뿐이다. 그런데 마치 정부의 정책에 맞장구치듯이, 6.18일 경영계는 최저임금 10원 인상이라는 ‘십원젤라’로 추임새를 넣었다.

이러한 것이 MB말하듯 “대한민국은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있는 것인가? 접입가경이다. 또한 서울 양천경찰서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소위 ‘통닭구이’, ‘날개 꺾기’라는 고문이 자행됐음이 밝혀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의 추억’이다. 공포의 정치이다. 이들이 불어대는 것이 싸구려 중국산 ‘부부젤라’이기 때문인지 그 소음은 국민의 삶에 더욱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들려온다.

정부는 공포의 정치를 동반하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주창자인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삶에서 ‘죽음의 손’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최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에서 2000원을 내면 ‘발칸 사격 체험장’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의 상황을 보편서, 그 총부리가 우리들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Paria)

복지의 축소와 노동의 유연화로 집약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이 ‘죽음의 손’은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목줄을 옥죄고 있다. 그리고 난청환자가 되버린 정부는 대학 시간강사들의 죽음의 소리, 대학 내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질곡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정규 교수’이면서 교원이 아니고 고등교육법 적용 대상이므로 비정규직 노동자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청소용역 노동자들 역시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의 낭떠러지로 몰아붙이며 ‘배제젤라’를 힘껏 불어대고 있을 뿐이다.

약 7만 명의 시간 강사 중 대학 강의의 약 절반가량을 담당하는 80%는 평균 주 4.2시간의 강의로 월 평균 40만 6,000원의 강의료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대학 내 미화노동자는 파견근로법 시행 이후 하청업체의 소속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점심 값을 위해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바로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파리아(Paria)이다.

파리아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힌두교의 카스트 계급제도에서 그 모든 계급 보다 아래에 속하는 하층민들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노동하며 살아가지만 노동자 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학 내에서의 ‘노동자 아닌 노동자들’이 우리 삶의 ‘파리아’인 것이다. 파리아가 인도에서 길거리 청소, 구식 화장실 변 처리를 하듯이 미화노동자들도 학교에서 같은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결국 “이들의 삶의 형태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다.” 라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모순의 형식은 ‘A는 B이면서 동시에 非B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모순을 규정하는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자본과 노동처럼 양 극단에 있으면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만을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 극단의 존재가 부정하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은 모순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극인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필요로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난청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개인적 단자로 만들어 연대의 힘을 파괴할 뿐이다. 과거 남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이라는 인종분리정책을 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마땅히 생존을 보장받아야만 하는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국민을 만들어내는 ‘국민분리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 배제의 정책 속에서 버림받은 자들 중 하나가 대학의 파리아들이다.

이러한 배제의 정책 속에 내재하는 현실의 실재적 대립, 그 모순의 핵심에는 노동과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모순을 자본과 노동으로 파악할 때만이 노동이 적대성을 띠어야 할 대상이 자본임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노동자계급일 뿐이다. 이러한 적대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적대성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 쟁취라는 보편적 이념을 견지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탈락하기 전까지 연일 월드컵 응원의 광고로 “Shouting korea”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Shouting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비판의 외침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은 참여연대의 천안함 사건의 안보리 검토 요구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 한다. 또한 국무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명박의 BBK사건을 블러그에 올린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이들은 ‘처벌벨라’를 불어댄다.

난청환자인 정부와 한나라당의 귀에도 희한하게도 ‘비판의 외침’은 잘 들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여전히 인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난청환자들이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 난청을 치료하는 방법은 소음을 줄이는 것이다. 줄여야할 소음은 국토를 가득채운 삽질의 소음, 자본의 수탈의 굉음이다. 이것이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치료받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처방전은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난청을 치료하는 다른 한 가지는 약물 치료를 하는 것이라 한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민중의 외침에 귀 막아버린 권력에게 약물은 역설적으로 인민의 외침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들, 이들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존재이다. 이러한 모순의 규정자는 노동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이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 없이 증식할 수 없다. 마치 식중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세균과 달리 감염력이 뛰어나지만 자체 증식이 불가능해서 반드시 숙주가 있어야 증식·전파할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건강한 세포와 암세포의 모순 사이에서 건강한 세포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암세포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에서 버림받은 파리아들은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파리아로 만든 존재가 바로 암세포이며 죽여야할 존재이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한 노동자일 뿐이다. 모든 저항의 힘은 결핍에서 온다. 노동자이지만 실질적인 노동자가 아닌 ‘결핍’, 그 ‘결핍’을 메우는 길 위에 우리 모두는 함께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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