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는 왜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고전은 숨쉰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시대 김종직(金宗直)이 세조찬위를 풍자하여 쓴 글이다.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이란 뜻으로 서초패왕 항우(項羽)를 세조에, 의제(義帝)를 노산군(魯山君)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다. 이 글 때문에 김일손 등 많은 사림들이 죽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되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의 역린(逆鱗)을 잘못 건드리면 지식인은 화를 당하거나 알량한 생계를 잃게 되고 민간인은 불법사찰을 받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싶다.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했던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한나라 군사의 포위망에 갇힌다. 이때 한나라 병사들은 초나라 병사들을 항복시키려고 그들 진영을 향해 초나라 민요를 연주한다. 이것이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이에 항우는 홀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포위망을 뚫고 말을 달려간다.
항우가 오강(烏江)에 이르렀을 때 오강의 정장(亭長)은 강동이 비록 작은 땅이지만 오강을 건너가 그곳 왕이 되어 후일을 기약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항우는 하늘이 망하게 하는데 강을 건너가면 무엇 하며 수많은 젊은이를 죽게 했는데 그들의 부모형제를 볼 면목이 있겠느냐며 웃으며 거절한다.
항우는 정장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랑하는 말 추(?)를 주고 혼자서 한나라 군사 수백 명과 싸우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자신의 시체를 천금만호로 사려는 유방에게 팔라며 시혜를 베풀 듯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영웅인가 고집불통인가
진리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음이란 더욱 그러해서 그 주위만 뱅뱅 맴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근거한 진실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항우의 최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강을 건너가 살 수 있었음에도 건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것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영웅으로 칭송하는 이도 있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다. 송나라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는 이런 시를 썼다.
살아서도 사람 중에 호걸이더니(生前做人杰)
죽어서도 귀신 중에 영웅이구나(死亦爲鬼雄)
지금까지 항우를 그리워함은(至今思項羽)
강동을 건너가길 마다했기 때문이라네.(不肯過江東)
항우는 명문가 출신으로 자부심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망에 넘쳤던 사람이었다. 진시황의 순행 행렬을 보고 “저것을 빼앗아 대신할 만하다.”라고 외칠 정도였다. 그게 지나쳐 자만으로 흘러 휘하의 인재들을 의심하여 잔혹하고 비정한 짓들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유방(劉邦)은 너그럽고 인재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모택동은 “항우는 정치가가 아니다. 유방이 고단수의 정치가이다.”고 평했으며, 항우가 사면초가를 당하여 지은 ‘해하가(垓下歌)’ 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내는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다.” 고집불통이란 말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이런 고집불통을 못내 안타까워한다.
?제오강정(題烏江亭)?의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로서도 기약할 수 없으니(勝敗兵家事不期)
수치를 감싸고 견디는 것이 사내인 것을(包羞忍恥是男兒)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江東子弟多才俊)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왔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捲土重來未可知)
두목은 개인적인 수치를 감내하고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진정한 남아(男兒)이지 못했던 항우를 탓하고 있다. 무엇이 이청조와 두목, 두 사람의 시선을 갈라놓았을까. 왜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았을까.
항우가 죽기 전에 우희 앞에서 노래했던 ‘해하가’를 보자.
힘은 산을 뽑고도 남음이 있었고 기백은 천하를 덮었노라!(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한데 오추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時不利兮?不逝)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不逝兮可奈何)
우희야, 우희야, 너를 어찌한단 말이냐!(虞兮虞兮奈若何)
항우는 ‘어찌할 수 있겠는가(可奈何)’라고 말한다.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을 섬기는 자는 눈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정의 요동이 없이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서 운명처럼 편안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최고의 덕이다.”(自事其心者, 哀樂不易施乎前,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장자가 말하는 ‘어찌할 수 없음’(其不可奈何)은 항우의 표현과 동일하며 이 말은 ‘부득이(不得已)’함을 말한다. 이 어찌할 수 없음을 명증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장자는 최고의 덕이라 평한다.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은 이유를 먼저 이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부득이함의 결단
『주역』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정이천은 이 문헌을 ‘결의(決疑)’라는 말로 규정한다. ‘의심을 결단한다.’는 뜻이다. “고대인들이 점을 친 것은 의심을 결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점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 운명이 잘 될 것인지 못 될 것인지를 헤아리고 자신이 잘 살 것인지 못 살 것인지를 살피려고만 드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청조는 왜 항우를 영웅시했을까. 『주역』에는 ‘결단’에 대한 괘가 있다. 쾌(?)괘이다. 쾌괘는 둑이 무너져 물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으로 이미지화된다. 쾌괘 바로 앞의 괘가 익괘(益卦)인데, 가득 찬다는 뜻이다. 물이 둑에 가득 차면 어찌되는가. 둑이 무너져 내린다. 가득 참이 극에 이르면 둑이 무너져 내리듯 결단을 내린 후에 ‘그친다.’ 여기서 쾌(?)와 결(決)과 쾌(快)의 문자적 유사성에 주목하자. 쾌(?)괘란 결(決)단으로 멈추니 마음이 쾌(快)적하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린 후에 그친다고 했는데 이 ‘멈춤’에 관한 괘가 간괘(艮卦)다. 간괘란 멈춰야만 할 때 멈추는 모습을 상징한다.
이형기의 ‘낙화’라는 시의 첫구절은 이렇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야할 때를 알고 등을 돌리는 모습, 이것이 간괘가 상징하는 가장 적절한 모습이다. 이청조가 항우를 영웅으로 평가하는 이유를 이 괘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멈춤’을 상징하는 간괘에 달린 괘사(卦辭)는 이렇다.
“그 등에 멈추어 그 몸을 보지 않는다. 정원에 가더라도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허물이 없다.(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정이천은 ‘등을 지고 몸을 보지 않는 것’을 자기에게 ‘합당한 몫’[分, moira]에 편안한 마음으로 멈추는 것으로 해석한다. ‘순리이합의’(順理而合義)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자연적 필연성에 따라서 이해관계나 개인적인 욕망과 무관하게 자신에게 합당한 몫으로서의 올바름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후회도 분노도 원망도 아쉬움도 없다. 주어진 몫이 해로운 것이든 이로운 것이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복종한다.
그래서 마음이 ‘안중견실(安重堅實)’하다고 정이천은 해석한다. 마음이 ‘편안(安)’하고 ‘진중(重)’하며 ‘견(堅)고’하고 ‘진실(實)’하다는 말이다. 쾌괘에서 말했던 결(決)단하여 마음이 쾌(快)적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항우는 마지막 순간에 왜 자살이라는 결단을 했을까. 항우는 마지막 순간 서초패왕이라고 착각했던 어리석음과 오만을 깨닫고서 권력을 향한 자신의 욕망이 자초한 모든 결과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스스로 자초한 결과에 대한 명증한 이해를 통해 그것이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어찌할 수 없음을 자신에게 ‘합당한 몫’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우는 자살하는 순간에 이 ‘어찌할 수 없음’에 직면했고 부득이한 필연성을 결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단은 이것보다는 차라리 저것을, 나쁜 이것보다는 더 좋은 저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부득이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것이다. 항우는 오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도 건너지 않았던 것은 강동으로 갔을 때의 이해(利害) 관계를 따져보고 나서 보다 더 좋은 것을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것만을 할 수밖에 없는 그 필연성을 따랐을 뿐이다. 이청조가 그리워했던 영웅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항우의 광기
그러나 항우는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하고 쾌적했을까. 두목은 왜 항우를 안타깝게 생각했는가. 『주역』에는 또한 대장(大壯)괘가 있다. 굳센 양(陽)의 힘이 강성하게 성장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항우의 삶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 괘의 마지막 상육(上六)은 무모한 돌진을 경계하고 있다. 마지막 효(爻)는 이렇게 묘사한다.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 물러날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다. 좋을 것이 없다. 어려움을 알고 신중하면 길하다.(?羊觸藩, 不能退, 不能遂, 无攸利, 艱則吉.)”
진퇴양난이다. 항우가 왕성한 힘을 펼치며 파죽지세로 나가다가 사면초가를 당한 형세와 유사한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대장괘의 ?상전(象傳)?에서는 이런 형국에 이르게 된 원인을 ‘주도면밀하고 신중한 헤아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진퇴양난에 몰렸을 경우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물러서야 한다. 그래서 ‘어려움을 알고 신중하면 길하다’ 했던 것이다.
항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오강을 건너 스스로 자초한 추악한 결과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후일을 신중하게 도모했어야 했던 것이다. 두목의 생각과 유사하다.
그러나 왜 신중하게 헤아리지 못했을까. 정이천은 이렇게 해석한다. “자질이 나약해서 자신을 이기고 의로움을 취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물러서지도 못하고, 용감하게 나가려는 욕망에만 차 있지만 나약하기 때문에 결국 좌절하고 위축되어 나가지도 못한다.” 정이천의 해석에 의하면 나약했기 때문이다. ‘수치를 감싸고 견디’며 물러날 수 있는 신중한 용기는 ‘역발산기개세’를 과시하며 수 백 명의 군사와 싸우려는 무모한 광기와는 다르다. 두목은 이런 광기에서 그의 나약함을 보았던 것이다.
스스로 서초패왕이라고 생각했던 항우의 오만은 뜻하지 않았던 어려움에 직면해서 좌절했고 서초패왕이라는 믿음에 의심의 균열이 일어났다.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에 무의식적으로 직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주체는 자신이 나약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는 과장된 행위를 하게 된다. 자신의 시체를 시혜를 베풀 듯이 유방에게 팔라고 소리치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던 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는 과장된 행위가 아닌가.
스스로를 처벌하듯이 자살하는 것이 항우의 진실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나약함에 직면하여 그것을 부정하려는 광기가 항우의 진실이었을까. 나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처벌할 수밖에 없어서 그 부득이함에 따르고야 마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매저키스트적 복종으로서 자기를 학대하는 사디스트적 폭력이며,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약한 주체가 자신을 버린 하늘에 대해 분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용맹을 세상에 과시하는 사디스트적 광기는 자신의 시체를 시혜 베풀어주듯이 포기하는 메저키스트적 절망이다.
자기 학대와 자기 포기가 곧 자포자기(自暴自棄)다. 결국 사도매저키즘적인 잔혹극이 바로 항우의 마지막이 아닐까.
심의용(서울예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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