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우리집은 아파트인데도 남들 선호하는 로얄층이 아니라 2층이다. 얼마전 딸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는 “하나는 왜 낮은 곳에 살아요?”하지 않겠는가. 이 동네는 아파트 단지이다. 비싸고 살기 좋은 로얄층은 10층 이상임을 아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응…종은아 베란다 창을 봐. 나무들이 보이지?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 거야.” 아파트 창밖으로 시원한 하늘과 까마득히 멀리 지나가는 성냥갑만한 자동차를 보는 게 전부였던 그 아이에게 나의 답이 과연 설득력을 가졌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기에.
어쨌든 2층이라고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리기 어려운 계단 보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 허비하는 일 없어 좋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발견한 1층과 2층 사이 계단 벽에 있는 낙서가 재밌다. “구준표♡금잔디 / 첫 날 밤”라는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다. 어른이 써 놓지는 않았을 것 같고, 고등학생들은 유치하다 할 것 같고, 아마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써 놓았을 법한 낙서엔 사춘기 인간의 설레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사춘기 인간. 소년, 소녀도 아니고 꼬마도 아닌 인간.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어린 인간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라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책임 등이 뒤엉켜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질풍노도의 인간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에서 유래한 이 말은 F.클링거의 희곡 『질풍노도』(1776)에서 유래한다. 당시 여러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 단연 으뜸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과 고뇌.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믿거나 말거나 이 작품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하여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지금까지 전 세계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목숨마저 버리게 할 만큼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칸트에게 있다. ‘보편적 인간 이성에 대한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칸트는 계몽주의자이지만 주관을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수동적인 존재인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칸트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칸트의 대표작을 흔히 3비판서라 부른다.『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한계에 대하여 밝힌다. 또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의지의 규정과 의지의 자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마지막 『판단력비판』은 미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칸트는 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인식의 세계인 자연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인 자유세계의 결합가능성에 관해 논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태어나서 맞닥뜨리는 세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세계,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정신의 세계. 그런데 이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무한해서 도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펼쳐진 두 세계는 영원히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가 될 수밖에 없다. 뭐든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철학자들에게는 있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가 일종의 편견이라고 비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명쾌한 해답이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판단력이라고 하였다. 수학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무한히 자유로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능력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미적 대상을 만날 때 인간 안에서 작동한다. 장미꽃은 일정한 형태와 향기를 갖춘 대상이고 우리는 앞에 놓인 꽃을 인식한다. 아직은 아름답다는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의 상상력을 잡아다 장미꽃과 연결시킨다. 인간은 장미꽃의 형태를 넘어 그로부터 연상되는 우주의 조화로움, 사랑, 그리움 등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꽃을 찬미한다. ‘알 흠 답 다!’ 어느 배우의 발성을 흉내내서 적어본 것이지만 아름답다를 멋지게 소리내어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순간 정지하는 호흡과 내면이 우주로 확장되는 듯 소름 돋는 느낌. 어떤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혹은 듣더라도 아마 그로부터 받는 느낌은 비슷할 것 같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판단은 반드시 개인의 사적 이익과는 무관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사적인 마음이 개입되어 있을 때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어렵다. 모나리자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그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 것 네 것을 따질 때는 이미 사라져버린다.
칸트는 이렇게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미적 심미안을 탄생시켰다.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은 현실 대상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다. 또 관념에만 존재하는 영적 대상의 신비로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 ‘우주와 인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일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예술관은 독일낭만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에서는 괴테, 철학에서는 셸링을 출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문득 나에게 천국은 과연 무엇일까하고 곱씹어본다. 사실 최근에는 늘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천국같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 로또 1등, 논문 완성, 백점맞는 아이 엄마, 베토벤 합창교향곡 음악회에서 듣기 …. 어쨌든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천국을 경험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로테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감지하고는 모든 게 불행이고 지옥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물질의 많고 적음과 삶의 비루함에서 오지 않고 마음에서 왔던 것이다.
괴테부터 예술의 척도는 고전주의가 지향했던 규범과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주관성이다. 창조적 주관성은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사랑과 고뇌를 읽는 이들은 모두 이전의 문학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느꼈다. 그 무한한 정신세계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손익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진정성, 인간행위의 동기만이 주인인 세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이들을 외쳐 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진정한 사랑? 그게 밥 먹여주냐?” 그러나 베르테르는 밥도 안 먹여주는 진정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 죽었고, 그런 베르테르를 읽은 독자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다.
다시 글 앞에서 물었던 ‘왜 사람들은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을까?’ 나는 그 답이 칸트에게 있다고 했다. 베르테르가 죽은 이유, 베르테르를 따라 사람들이 죽은 이유. 그것은 칸트가 미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소통 가능성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들으며 나눌 수 있는 소통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의 모든 의미를 잃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은 잊는다. 눈에 콩깍지 씌웠다고 욕먹으면서도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을. 그리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심정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편지로 전하는 글이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면 누구에게도 말하려 하지 않지만 진리 혹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환희를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그 사실을 함께 말하고 싶었던 이는 로테였겠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인. 진정한 사랑 혹은 진리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이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주권의 확립으로 구성된 인간 주체는 오롯이 그 자체 완결된 인간이었다. 이렇게 원자화된 인간은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소통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칸트가 희망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로 이해하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어 진실을 말하건대 진실로 이해하는 관계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칸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은 그도 나의 생각에 동조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 타인에 대한 고려가 전제된다. 타인에 대한 고려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공통감’이라고 했다. 이제 칸트의 미학은 소통의 정치학을 꿈꾼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판단하듯 나의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을 놓고 서로 소통하고자 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이란 바로 정치적인 것들이다. 정의, 도덕, 평등, 공동체 등등.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이들에 대해 소통하는 장은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정치, 함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정치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을 꿈꾸는 것이 철학이라면 나에게 철학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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