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의 첫걸음, 재벌 딸과 노동자 아들 결혼부터![철학자의 서제]
사회주의의 첫걸음, 재벌 딸과 노동자 아들 결혼부터![철학자의 서제]
조지 버나드 쇼의 <쇼에게 세상을 묻다>
김정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대선이 끝났다. 주어진 결과에 대해 누군가는 안도와 함께 환호할 테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넘어 절망에 가까운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또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겠다. 정당한 절차에 따른 결과인 만큼, 일단 결과는 인정하고 볼 일이다. 이제는 승리한 진영과 실패한 진영 모두 결과에 대한 분석과 과제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저마다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내게는 이런 분석에 힘을 보탤 능력이 없다. 단지 유권자들이 어떤 경위로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모든 유권자는 후보들을 정책적으로 따져보고,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까? 정말 세대와 지역의 갈등만으로 설명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정치를 왜 알아야 하나?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버나드 쇼의 만년 저작 <쇼에게 세상을 묻다>(김일기·김지연 옮김, 뗀데데로 펴냄)가 눈에 띄었다. 거의 100년을 살았던 영국의 극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쇼는 풍자와 독설로 유명한 인물이다. 극작가의 정치론답게 책은 첫머리부터 정치와 관련된 이 책이 지루하다면 차라리 추리 소설이나 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쇼는 토지와 정당 제도, 민주주의의 기원과 불평등이 나타난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야말로 ‘정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하기 위해 각 분야 별로 상당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쇼는 본인이 만년에 정치에 관련된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정치적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요즘에는 누구나 정치에 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대부분이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우리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과 다르다. 그 ‘조금’의 차이가 평화롭고 합헌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국토의 절반을 폐허로 만드는 내전을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쇼가 말하는 ‘조금’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선거 때만 다가오면 우리는 저마다 후보들을 평가하고 논쟁한다. 그러나 저마다 평가의 잣대는 일정하지 않다. 대부분 일부만 보고 정치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려 든다.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벌이지만, 결론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할 몫이 되어버린다. 선택권의 행사는 잘 했지만,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수도 없이 보았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조금’도 몰랐던 탓이 아닐까.
유권자의 선택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경험에 따른 선택 기준이 개인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보들의 정책을 냉정하게 살피고 투표를 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단순히 고향이 같아서 찍고, 누구는 특정 후보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후보를 찍는다. 혹은 특정 정당만 보고 찍는 경우도 있다.
물론 경험의 다양성은 어쩔 수 없다. 자라온 환경, 가지고 있는 재산과 규모, 소속된 일터의 성격, 사회적인 명성과 위치 등 수많은 요소들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선거의 흐름에 따라 감정적으로 투표를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정책의 성격과 방향을 보고 선택한다. 이런 경향은 진보와 보수, 지역과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경험의 다양성에 비해 찍을 수 있는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던진 한 표 한 표는 모두 동등하며 소중하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정치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갈등의 원인 : 소득의 불평등
쇼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결국 평등을 의미한다. 자연이 부여한 각자의 재질과 능력은 다르지만 신체적인 욕구는 모두 같다. 따라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는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같은 계급의 선원은 같은 돈을 받는다. 여기에 개인의 자질이나 재능의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자질이나 재능은 돈으로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에 따라 쇼는 소득의 평등화를 주장한다. 소득의 평등화는 (단순히 모두의 소득이 동등해지는) 수학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일정 단계에 이르면 수학적 평등이 무의미해진다. 1년에 수백 파운드도 못 버는 계층과 수천 파운드를 버는 계층의 차이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두 계층 사이에 결혼이 제한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사회는 민주적 사회주의이다. 쇼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모든 국민이 충분한 소득과 평등한 기회를 누리며 누구나 계층에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필수품과 사치품이 우선순위에 따라 생산되고, 돈에 매수된 변호사들이 사법 정의를 흔들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그러한 사회가 가능해질 것이다. 소득 평등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다. 현재의 사회 계층이 전체적으로 상향 조정되면,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소득과 계층에 관계없이 결혼할 수 있는 사회’라니. 가능하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참 꿈같은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충분한 소득을 보장하는 일은 찾기도 쉽지 않고,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포기해야할 지경에 놓인 21세기 초 한국 젊은이들의 상황을 보면 쇼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소득의 불평등이 해소되면 다음과 같은 단계로 이어진다.
“1년에 수천 파운드를 버는 A는 1주일에 고작 몇 파운드 버는 B에 대해 거의 전제 군주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겠지만, B도 수천 파운드를 벌게 되고, A는 한 10만 파운드쯤 번다면 B가 A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 누구든 사회 계층에 관계없이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우리 모두가 정치적으로 평등해질 것이다.”
소득 불평등 해소의 기준으로 ‘결혼의 가능성’을 지적한 점은 지금 봐도 탁월하다. 이 땅의 젊은이들은 ‘결혼’이라면 경제적인 부분 말고도 따질 부분이 많아 상상만 해도 피곤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 외에도 경제적인 측면과 계층적인 측면까지 결합되어 있다.
쇼가 말하는 ‘소득의 평등’은 오늘날 주장되고 있는 ‘기본 소득’ 개념과도 비슷하다. 사람으로서 최소한 누려야 할 수준의 소득을 보장하자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쇼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소득의 평등이 곧 정치적인 평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단순히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다. 소득의 불평등이 해소되면, 계층과 갈등 자체가 사라지게 될까? 쇼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사회주의 체제에도 계층이 존재할까? 정당, 종교, 노동조합, 전문가협회, 클럽, 정파, 파벌에 더해서 새로운 전문가 집단까지 존재해야 할까? 물론이다. 아마도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겠지만 항상 대화하고 서로 혼인할 수 있는 조건, 그러니까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엄청나게 많은 계층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계층 간 갈등이 있다고 해도 갑을 관계의 갈등이 아니다. 평등한 관계를 전제한 갈등이다. 누구나 어느 계층에 속해 있고, 외부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며 토론할 수 있다. 다만 쇼가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점진적인 단계에 따라 소득의 평등화를 이뤄야 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사실 소득 불균형은 비정규직 문제, 비현실적인 최저 임금 문제만 제대로 해결되어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여가와 미학적 인간
쇼는 19세기의 사회주의가 가난을 해소하는 데 지나치게 집착한 반면 여가와 문화를 향유하는 데에는 지나치게 소홀했다고 평가한다. 바로 소득의 불평등을 해결한 다음 단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소득의 평등은 곧 여가를 가져온다. 최소한의 시간만 노동에 투자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에, 굳이 애써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여가의 활용이다.
“인간은 자연에 예속된 존재라는 것은 초당파적인 대전제이다. 따라서 노동이라는 짐을 분담하고 여가라는 이득을 나눠가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최대한도의 복지를 누리도록 인간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를 갖지 못하는 반면 10퍼센트의 사람들은 늘 여가를 즐기고 전혀 또는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실현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얼마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지는 체감하기 어렵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리려면 여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가의 활용은 미학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로 이루어져야 한다.
미학이라니? 예술을 말하는 건가?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저런 배부른 소리를 꺼내는 것 자체가 어이없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여가를 제대로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배우려고 한다. 이들에게 미학적인 취미는 사치에 불과하다. 쇼는 이런 생각은 오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술에 대한 그러한 오해가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계급이 토지를 전용하면서 임금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생겨났고, 이 임금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바쁜 나머지 문화와 여가와 용돈은 꿈도 못 꾸는 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이다.”
쇼는 계층과 소득 불평등의 기원을 토지 문제로부터 설명해 나간다. 미학적인 취미를 만족시킬 수 있으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60년 전에 한 말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심지어 우리는 여가가 있어도 어떻게 쓸지 제대로 배운 적조차 없다. 우리에게도 미학 교육이 필요한 까닭이다. 단순히 시험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쇼가 말하는 미학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다.
“우리는 취향을 가진 수백만의 관중, 청중, 감식가, 비평가, 애호가를 길러내야 한다.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한 줌의 프로페셔널을 길러내는 한편 수많은 아마추어들도 양성해야 한다.”
사람들을 모든 분야의 천재로 길러내는 교육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학 교육을 통해 누구나 취향에 맞는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제공할 수 있다. 꼭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다. 쇼가 보기에 가난, 무지, 고된 일, 배고픔은 재능과 천재성을 가로막는 벽이다. 공평한 출발선이 주어지면 천재성은 스스로 드러나고, 발현될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격변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이념의 대결과 지역 간 갈등이 이어졌고, 이제는 세대 간 갈등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비해 다양한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로막는 제도의 개선과 사회의 여러 불평등한 요소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 영국과 21세기 초 한국의 상황은 동일하지 않지만, 쇼의 정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겉으로 드러난 세대와 지역의 갈등 이전에 근본적으로 소득 불평등의 측면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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