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계속 누드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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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는 검소한 편이다. 눈에 띄는 사치(奢侈)라고 할 만한 건 평생 해 본 적이 없다. 그럴 형편도 못 되지만, 그럴 마음이 생겼던 때도 거의 없지 싶다. 그거야 철학자라면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더구나 구보씨처럼 근검절약이 강조되었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치란 일종의 염치없음을 범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염치없음. 레비나스 식으로 말한다면 뻔뻔한 찬탈(簒奪)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근래에는 구보씨에게 자그만 사치라고 할 만한 습관이 생겼다. 한 호텔 목욕탕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요금이야 만원이 채 안 되고 그것도 이러저런 할인을 받으면 5000원 남짓이니까 별 것 아니지만, 어떻든 시설이나 분위기로 보면 일반 목욕탕과 격이 다르다. 무엇보다 천장이 높고 돔 형식의 유리로 되어 있어, 실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적다. 채광이 자연스레 잘 되고 목욕탕 안에 김이 서리지 않는다. 더구나 노천탕도 있어 그렇게 춥지 않은 날이면 발가벗고 바깥 공기를 쐴 수 있다.

 

구보씨는 발가벗고 활보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한동안 이곳에 자주 들락거렸다. 무언가를 걸치는 게 아니라 벗어던지고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최고의 사치란 이렇게 발가벗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물과 공기와 햇볕 아래 자유로운 몸과 감각. 구보씨는 긴 의자에 발가벗은 몸을 누이고 눈을 감는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온 몸의 피부가 한 장의 눈꺼풀 같다.

이것이 사치인 이유는, 이러한 누림에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많건 적건 간에 배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 이 같은 발가벗음은 가짜일 수 있다. 목욕탕 안에서의 발가벗음은 진정 벗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욕탕이라는 시설과 장소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 안의 사람들은 발가벗은 채 당당할 수 있다. 이때의 발가벗음은 벗겨냄이 아니라 덧붙임이다. 목욕탕에서 사람들은 때를 벗겨내지만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박탈의 느낌을 수반하는 벌거벗음이 있다. 옷 입은 자들 앞에서, 옷 입은 자들의 장소와 그들의 시선 앞에서 벗고 있을 때가 그렇다. ‘벌거벗은 생명’. 근자에 유행하는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가 여기에 적절하다. 이런 벌거벗음은 갖추어야 할 것이 박탈되었음을 보여주는 부(負)의 표시다. 한 사회의 규칙, 제도, 권리 따위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지시하는 게 이런 벌거벗음이다. 옷 입은 자들은 이렇게 벌거벗은 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상성(正常性)을 확보해낸다.

이때의 벌거벗음은 무방비의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털을 깎고 이빨을 뽑아버린 짐승의 모습과도 같다. 그 벌거벗음은 위험에 대해 직접 노출되어 있음을 뜻한다. 털 없는 피부 말고는 외부의 시선과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벌거벗은 자는 움츠리고 두려워하며, 무엇보다 수치심을 느낀다.

벌거벗음과 수치심 사이에는 벌거벗음을 감싸는 관념들의 피륙이 있다. 이 관념들은 맨 몸뚱이의 취약함을 감추고 가리는 장치들과 관계하여 짜인다. 그러니까 수치심은 우리의 취약함을 헤집는 시선과 관련이 있다. 수치를 모르는 자는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지경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 자다. 도덕이란 우리의 취약함을 보완하여 덮는 속옷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이 찢기거나 헤졌을 때 우리가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는 눈에 희망을 걸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치심을 통해 취약함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물론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돌아본다면 그런 생각이야말로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수치란 아마도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옷 입은 이들은 벌거벗은 자들을 놓고 그들이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벌거벗겨 놓은 경우라 해도 말이다. 그들은 옷을 입고 싶어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수치심을 없애고자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옷 입은 자들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문을 할 때 대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벌거벗기기인 것은, 고문을 당하는 이가 스스로 무력하며 박탈당했음을 절감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사실상 노예의 처지에 있음을 확인시키고 저항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스스로 옷을 벗어던지는 자들이 나타나면 옷 입은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옷이 그저 짜인 피륙에 불과하며 언제든지 벗겨질 수 있는 것임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옷을 벗어던지며 벌이는 시위가 때로 위력적인 것은 그래서이다. 실제로 박탈당하고 있고 실제로 벌거벗기고 있는 자들이 겉치레에 불과한 옷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사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그런 걸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라고 해요.”

“파르헤지아라면 진실한 말하기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알다시피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지요. 나는 그걸 ‘노출’과 관련해서 쓰고 있어요.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건, 단순히 취약함에 노정되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아감벤처럼 벌거벗음을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는 건 옳지 않아요.”

사진: Dina Al-Kassim

“그런데 디나, 당신이 예로 든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나체 시위는 결국 실패로 끝난 것 아닌가요? 잠시 동안만 불도저가 집을 허물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고, 결국 그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고 새로 지어준 집으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나요? 그건 당신 말대로 일종의 스캔들이었을 뿐 아닌가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비록 당장의 저항은 잦아들었지만, 그 스캔들의 의미는 계속 남거든요. 그들은 대중 앞에서 수치를 범한 셈이고, 그건 그들과 그들의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요. 그 여자들은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들을 겪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사회의 통념화한 이야기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구성해 나갈 바탕이 될 수 있어요. 적어도 그녀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체험했잖아요. 그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거예요.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 말이지요.”

“그런 얘긴 얼핏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노예가 그 위협 앞에 전율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뚜렷이 의식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노출과 수치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대상화와 거리두기를 통한 자기의식의 계기가 마련된다는 건데, 그렇다고 죽음의 위협을 체험한 모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수치의 경험이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이죠.”

“그렇담, 당신이 말하는 노출에 의미부여를 하는 데 큰 제한이 있을 법해요. 헤겔의 경우 노예에서 더 중요하고 적극적인 계기는 노동이잖아요. 그런 거에 해당하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글쎄요. 내가 말하는 노출의 특성은 적극성에 있어요. 헤겔에서의 위협처럼 그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죠. 그래서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도 이런 말하기의 주체적인 면을 놓치고 있다는 거구요. 버틀러는 이 노출을 응답이나 책임과 관련지어요.”

“버틀러라면, 주디스 버틀러 말이죠?”

“예, 주디스는 제 선생님이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응답이나 책임이라면 레비나스 용언데…하긴 버틀러는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 같은 말도 차용해서 씁디다만…”

“네. 노출은 상처입기 쉬움을 무릅쓰는 행위죠.”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상처입기 쉬움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거죠.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말예요. 그건 단지 일시적으로나 미봉적으로 우리의 피부를 가리고 있을 뿐이고, 그래도 상처입기 쉬움은 항존하죠. 그러니까 옷은 우리의 피부를 가리면서 우리가 상처입기 쉽다는 사태를 가리고 있는 거구요. 레비나스라면 ‘노출’이 이러한 사태를 깨우쳐주고 거기에 응답하게 한다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래요. 저도 레비나스가 노출과 벌거벗음에 대해서 많이 논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언제 그런 얘길 좀 나누죠.”

“예. 근데, 이번엔 부산에 어떤 일로 오셨나요? 지난번에 다녀가신 지 몇 달이 채 안 되었는데…”

“아, 이번엔 부산국제영화제 구경 왔어요. 캘리포니아 대학의 학생들 몇 명 하구 같이요. 저랑 공부하는 한국학생들도 좀 있거든요. 영화제 오시면 혹 극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군요. 전 부산에 살면서도 가기가 쉽지 않던데… 역시 제3세계 영화를 주로 보시겠죠? 그런데, 참, 이 목욕탕엔…?”

“네, 여기가 좋다는 얘기 듣고 잠시 쉬러 왔어요.”

“어, 그런데, 여긴 남탕인데, 어떻게 들어오셨죠? 어라, 그러고 보니 다 벗고 계시네. 음마, 나두…어, 저기 Y도 있네. 그럼, 여기가 여탕이야?”

구보씨는 흠찟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목욕탕 의자에 누운 채 잠시 졸았나 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십여 분 잔 듯했다. 에이, 그런 꿈은 조금 더 꾸어도 괜찮은데… 구보씨는 못내 아쉬워하며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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