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다시 누드를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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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가 벗는 걸 좋아하긴 해도 아무 때나 벗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옷에 크게 신경을 쓰지도 못하는데, 그건 구보씨가 구(舊)세대라서 그런지 모른다. 구보씨가 자랄 때만 해도 단정함 이상으로 옷차림에 관심을 갖는 건 그리 칭찬 받을 일이 못 되었다. 옷을 잘 차려 입고 다닌다는 말은 겉치레를 앞세운다는 뜻, 내면이 실(實)하지 못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다 못살던 때의 얘기다, 라고 하면 분명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다. 근검절약의 강조야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항상 있기 마련인 도덕의 기본메뉴다. 내면의 가치 운운하는 것은 그 이면(裏面)의 보완물 격이다. 그런 가치가 실제로 있느냐 하는 건 천당이 실제로 있느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선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있다. 겉으로 차려 입지 못하는 형편이라면 내면의 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겠는가.

구보씨가 옷차림에 짐짓 무관심한 것에는 그런 ‘문명’의 세례 탓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옷차림 때문에 그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일종의 현혹(眩惑)일 뿐이다. 우리는 겉모습에 놀아나서는 안 되고, 화려한 치장 밑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구보씨가 자꾸 누드를 내세우는 데에는 이런 구시대의 교육이, 다시 말해 산업화 이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한 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

겉은 가짜고 속이 진짜다, 라는 건 본질주의의 구태(舊態)다, 라고 해도 거기엔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물론, 겉과 속을 나누고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생각하는 데에는 사태를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그건 본질이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일 때의 얘기다. 그 본질이라는 게 실재(實在)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익(便益)에 봉사하는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본질이라고 내세운 것에 이미 이해관계가 묻어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삶의 의미, 역사의 의미, 의미의 의미 따위가 바로 그런 것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당신네 철학자들이 제시해 줘야 하는 게 그런 삶의 의미 같은 것 아냐?”

학교의 구내식당에서 만난 한 선생님이 반쯤은 힐난이 섞인 듯, 또 반쯤은 도움을 바라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들어 머리가 부쩍 더 세버린 그 선생님은 이제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잘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밥을 떠올리는 숟가락에도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 양파 껍질 같은 거지.”

구보씨는 요령 있게 발을 빼고 싶었다. 사람들은 과연 삶의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 실망하거나 좌절하는가. 그렇기보다는, 일상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애꿎게 그 탓을 ‘삶의 의미’에 돌리는 것이 아닌가. 마음먹은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든지, 경제적으로 쪼들린다든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든지 하는 따위가 대부분 실제 원인이지 않은가.

구보씨는 짐 자무쉬의 최근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 영화에선 거의 말이 없는 한 흑인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킬러다. 그 남자는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에 여러 경로를 거치고 여러 사람을 만난다. 영화 속에서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며 트럭도 탄다. 그런데 그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작은 트럭의 뒷면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LA VIDA NO VALE NADA”(인생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화 [리미츠 어브 컨트롤]의 한 장면

“그 영화 첫머리엔 랭보의 시구가 나와요. ?취한 배?의 앞부분. ‘유유한 강들로 접어들자 이젠 선원들 없이도 될 것 같았어…’ 암튼 재미있어요.”

“구보 선생이 추천하는 영화는 대개 졸리더라구. 이 영화도 그렇겠지?”

“뭐, 보기에 따라선… 어떻든 영화니까요.”

“야한 장면도 있어?”

“누드 씬이 있긴 한데, 야하진 않아요.”

“그래?”

“요새야 누드라는 게 별 거 없잖아요. 그래선지 이 영화에선 투명한 비닐 옷만 걸친 여자가 나와요. 그 여자가 다 벗기도 하죠. 그게 그거니까…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건지도 몰라요.”

“일종의 허무야?”

“글쎄요, 허무도 여러 종류니까요. 게다가 순수한 허무란 건 없잖아요. 이 영화에서도 킬러가 결국 목표를 달성하거든요. 좀 황당한 방식으로긴 하지만…”

“황당한 방식?”

“예. 상식적인 인과성을 뛰어넘어서요. 무장한 부하들이 밖에서 지키고 있는 건물 안의 보스를 죽여야 하는데, 어느 순간 킬러가 그냥 방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어떻게 들어 왔냐고 물으니까, ‘상상력’을 통해서라고 대답하죠. 뭐, 어차피 영화니까요. 어떤 걸 바라느냐는 게, 그 바라는 걸 표현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영환 허무주의적인 건 아니에요. 오히려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걸 강력하게 보여 주죠.”

“그럼 말이야, 구보 선생. 원하는 게 이뤄질 수 없는 경우는 어떤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면 말이지. 그건 허무 아니야?”

“영화에서 말예요?”

“아니, 영화에서건 현실에서건.”

“글쎄요, 바라는 데 이뤄질 수 없는 건 허무라기보다 슬픔이겠죠.”

“슬픔? 슬픔이라…”

그 선생님은 좀 어두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서 꼭 슬픔으로 귀착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때로 분노하고 미워하기도 하니까. 그런 게 힘에 부치고 아무 소용없다고 여겨질 때 찾아오는 게 슬픔일 거다. 장애를 물리치려는 반응의 표출이 분노라면,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에 부딪혀 나타나는 위축의 느낌이 슬픔인 셈이다. 물론 순수한 슬픔은 찾기 어렵다. 많은 경우 슬픔은 분노와 섞여 저주나 원망 따위를 낳는다.

슬픔이 진해지고 무거워지면 이루고자 했던 목표마저 삼켜버린다. 그래서 그것은 자칫, 있지도 않은 허무와 만날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은 치명적인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대부분의 병이 상한 몸의 회복을 위해 휴식과 안정을 강요하는 것이듯이, 과도하지 않은 대부분의 슬픔도 장애와 손실에서 물러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반면에 허무주의에는 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다. 허무주의는 파괴적 공격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공격이 전방위적(全方位的)이라는 데 있다. 허무주의는 세상에 만연한 가식(假飾)과 위장(僞裝)을 들춰내지만, 수명이 다한 가치와 의미들뿐 아니라 때로 이제 막 자라나는 싹마저 짓밟는다. 허무주의자는 황량한 폐허가 이루어낸 평등의 지평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 세상이 허무(虛無)하다면 더 이상 억울해 할 필요도, 더 이상 구차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 우리 구보 선생은 어떤가. 요즘 즐겁게 잘 지내지?”

마주 앉은 선생님이 수저를 내려놓고 입 주위를 닦으며 묻는다. 어느새 이 양반도 이제 예순이 가까운 나이다.

“웬걸요. 저야 늘 슬프죠.”

구보씨는 멋쩍게 웃는다.

“그게 뭔 말이야? 요새 뭐하고 사는데?”

“그냥 책이나 읽고 있죠. 가끔 누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허허, 웬 누드? 누드라는 게 별 거 없다면서…”

“그러게 말예요. 혹시 그래도 아직 별 거 있는 누드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저기, ?누드모델?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벌써 한 20년쯤 전 영환데, 그거 4시간짜리 DVD를 다시 봤어요. 늙수그레한 화가가 젊은 여자 모델을 벗겨놓고 계속 그리죠.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그리고, 그러다 포기하고, 또 다시 그리고… 그런 과정이 4시간 동안 이어져요. 그런데 그렇게 지루하진 않아요.”

“그래서 그림은 완성하고?”

“그렇죠. 영화에선 완성하는 것으로 나와요. 물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진 않죠. 화가는 그 그림을 벽 속에 넣고 발라버려요. 그리고 새로 그림을 그려 그걸 공개하죠. 진짜 그림은 영원히 숨겨진다는 얘긴데, 이런 아이디어는 사실 낡은 거죠. 발자크의 단편에서 따온 거라고 해요.”

“그게 다야?”

“그러니까요. 그게 다란 생각을 안 하게 하는 게 문제인 거죠. 겉치레를 다 벗겨내고 벌거벗은 몸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거예요. 영화하고 별개로 말이죠.”

“허허… 그래서 구보 선생은 뭘 좀 찾아냈어?”

“아직요. 찾아내면 말씀 드릴게요.”

“구보 선생도 진짜는 벽 속에 숨겨놓고 가짜만 말해 주려고?”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숨길 게 없으면서 숨기는 척 하는 것은 사기겠지만, 이미 숨겨진 것을 끝없이 찾아다녀야 하는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역시 사기일까. 구보씨는 그 선생님과 헤어져 혼자 걸으면서 생각했다. Y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고 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그녀도 생각이 바뀔 날이 있을 거야.

실재(實在)와 우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과 어쩔 수 없는 어긋남이 있지만 그걸 향한 추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반복되는 진부함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달리 어떻게 하겠어? 문명의 확장 사이클이 요즘처럼 문제를 키워갈 때 내파(內破)의 싹이 눈에 띄게 자라지 못했다면, 반성의 수단으로 들이댈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사고방식들일 거야. 그게 비루하게 현실을 쫓는 구차함이나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허무함보다는 낫지 않겠어?

벌거벗은 몸은 이런 모색의 메타포, 적어도 그 일부일 거야. 그렇더라도 오늘날의 누드에는 어떤 슬픔이 깔려 있어. 상업성에 물든 누드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 일종의 비타협적인 슬픔 같은 것, 그게 누드의 정체처럼 여겨지는 거야. 그건 왜일까. 구보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벌거벗은 하얀 몸뚱이를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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