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랄리스트 이창동[철학적 인간극장]
모랄리스트란?
‘모랄리스트(moralist)’와 ‘도덕주의자’는 서로 다른 말이다. 도덕주의자란 자신을 일정한 도덕적 규범의 지배하에 두려는 사람을 말한다. 그에게 주요한 것은 규범을 지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정한 규범을 지키지 못할 때가 실제로 더 많다. 그러면 그는 그때마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 의외로 느껴지겠지만, 도덕주의자는 자신의 도덕규범의 합당한 근거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의 도덕규범은 대체로 종교적 믿음이나 사회적 관습에서 유래한다. 합당한 근거 없이 특정 도덕에 집착하는 도덕주의자의 모습에서 어떤 병적인 징후를 읽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반면 모랄리스트라고 한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합당한 도덕규범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그는 도덕적 의식을 지닌다. 그러기에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지켜야 할 확고한 도덕규범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도덕규범을 결정할 원리 자체가 의심스럽다. 그는 자신의 삶에 적합한 도덕원리를 발견하려고 여전히 노력하는 가운데 있다.
도덕적 의식을 지니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나 원리를 알지 못한다는 데서 모랄리스트의 고통이 시작된다. 모랄리스트는 행동에 앞서 항상 주저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랄리스트가 행동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삶 자체가 끝없는 도덕적 결단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 마치 주사위를 던지는 심정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행동한 이후 모랄리스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해 자신을 지니지 못한다. 후회와 죄의식의 감정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는 행동하는 것이 정말 두렵다. 그런데 모랄리스트를 모랄리스트로 만드는 것은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는 행동에 이미 서있으면서도 행동의 근거를 의문시하는 자이다. 행동에의 결단과 행동에 대한 회의 사이의 내면적 갈등으로 그의 얼굴은 항상 창백하다.
모랄리스트를 유혹하는 악마가 있다면 그것은 곧 이런 갈등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항상 단순한 신념에서 즐거이 노래하는 자와 행동을 단념하고 마음이 평정한 사람을 부러워한다. 도덕의식이 결여된 현실주의나 광신적인 도덕주의, 그 모두가 모랄리스트에게는 악마가 된다. 모랄리스트에게 그런 태도들은 모두 일종의 도피이다. 모랄리스트적인 삶이란 이런 도피적 삶과의 싸움을 말한다.
모랄리스트 이창동
모랄리스트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이창동 감독이야말로 모랄리스트적인 작가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그는 이미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등에서 이런 모랄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박하사탕』에서 그는 순수한 인간을 군화발자국처럼 짓밟는 사회현실을 묘사하면서 인간이라면 이런 현실 앞에 어떤 삶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는 이미 순수라는 도덕적 규범을 회의한다. 그것은 실현하기 불가능한 꿈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수라는 꿈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끝내 돌아가고 싶은 그 순수를 찾아서 기나긴 시간여행을 떠난다.
이어 『오아시스』에서 이창동 감독은 사랑이 도대체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다. 물론 그는 현실의 사랑이 거짓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너무나 때 묻어 있어서 다시 꺼내보기도 싫은 사랑이라는 동전을 그는 장애인의 사랑이라는 기적을 통해 깨끗하게 닦아내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그 기적이 성공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감독에게서 중요한 것은 닦아내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양』에서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적 용서라는 도덕을 다룬다.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자기 자식을 죽인 자를? 자신이 용서한 적이 없는데 신이 먼저 용서해 버린다면, 용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영화 속에서 회의하고 투쟁할 뿐,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런 영화들 속에서 이창동 감독은 순수와 사랑 그리고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리고 이를 관객에게 설득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다만 모랄리스트로서의 삶이다. 그의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랄리스트로서 싸움 속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런 싸움을 피해 현실에 안주하거나 도덕적 신념으로 도피하려는 악마의 유혹과 싸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오직 싸울 뿐이다.
시인과 모랄리스트
이창동 감독이 새로 만든 영화 『시』 역시 이런 모랄리스트로서의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시에서 자신의 아바타로서 할머니를 내세운다.
할머니는 어느 시골 도시에서 산다. 할머니는 시청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과 다른 노인을 수발하는 간병인으로서의 수입으로 살면서, 이혼한 딸이 맡긴 손자를 기른다. 할머니는 손자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아는 평범한 할머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아직도 소녀 시절의 꿈을 버리지 않은 모습이다. 할머니는 꽃무늬 치마를 걸쳐 입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하며, 노래방에서는 아직도 감상적인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그런 할머니이다.
그런 할머니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자신이 치매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머지않아 닥쳐올 죽음을 예감한 할머니는 돌아오던 중 시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할머니가 어릴 적 꿈 하나를 이루어, 의미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랐던 것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는 시청에서 문화프로그램으로 개설한 시인 학교에 가기도 하고, 이 도시에서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시를 배운다. 시인학교의 선생은 할머니에게 시를 잘 쓰기 위한 아주 단순한 원리만을 가르쳐 준다. 그 원리란 곧 먼저 사물에게 다가가서 사물을 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사물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며, 시는 이런 느낌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할머니는 선생의 말대로 사물에게 의식적으로 다가간다. 할머니는 아파트 앞에 있는 큰 나무 밑에 앉아 나무에 비추이는 빛과 바람에 스쳐 나뭇잎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할머니는 화단에 핀 핏빛 맨드라미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살구를 주워 그 짙은 향기를 맡아 보기도 한다.
이렇게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는 시인의 마음은 모랄리스트의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사물을 보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어떤 추상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에 다가서기 위해서 즉 사물을 더 잘 보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을 덮고 있는 추상적 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사람의 눈을 덮고 있는 추상적 관념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신념이거나 경직된 도덕적 관념이다.
모랄리스트 역시 도덕적 의식을 지니되, 주어진 도덕을 회의하는 자이다. 그러기에 모랄리스트는 현실에 안주하지도 않으며 추상적 도덕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는 구체적인 사물에 적합한 도덕적 규범을 발견하기 위해 사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하며 그리하여 사물 자체를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모랄리스트로서의 태도를 이 영화에서 시인의 마음에 유비했다고 생각된다.
할머니는 시를 쓰면서 아니 어쩌면 그 전에 이미 시인으로서 마음을 가졌기에 사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간병하던 할아버지 그리고 자기에게 성적인 욕구를 호소하던 할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또한 지금까지 멀리서만 지켜보고 그저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하던 손자, 소녀의 성폭행에 가담하고 소녀를 결국 자살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 손자에게로 할머니는 다가간다. 또한 할머니는 딸을 잃고도 어찌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돈의 유혹을 받아들여야 하는 죽은 소녀의 어머니에게로 다가간다.
영화에서 할머니의 마음이 열려 시가 태어나는 것은 아마도 자살한 여학생이 투신한 다리를 찾아갔을 때가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다리 위에 서서 소녀의 마음을 느끼려 한다. 그때 할머니의 모자가 다리 위에서 할머니를 대신하여 떨어진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고, 할머니는 비를 맞으면서 자신이 간병하던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요구하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벌과 용서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어느 도시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 그것은 여러 남학생들이 한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그 때문에 여학생이 자살한 사건이다. 이창동 감독은 할머니의 손자를 이 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고 설정한다. 모랄리스트 이창동 감독을 대신하는 시인 할머니는 이제 이 사건의 진실에 부딪혀 간다.
이창동 감독은 이 사건에 관계하는 사회적 힘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생들은 학교의 명성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지방언론 기자들은 가해자의 아버지들이 전해주는 대가를 받아들여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가해자 학생들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의 행위를 성장기의 일시적 일탈로 치부하고 자식의 미래를 위해 은폐하려 한다. 이때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힘들을 무기로 한다.
가해자 편에서 움직이는 한국사회의 모습들은 전형적인 모습대로 그려내어 진다. 이에 못지않게 이창동 감독은 피해자의 어머니의 모습을 냉혹하게 그려낸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하고 삶에 찌들었으며 결국 가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처지에 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아무도 피해자인 여학생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는 가운데, 유독 할머니만은 피해자인 여학생에게 다가가려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며 모랄리스트의 마음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여학생이 성폭행 당했다는 학교 교실을 찾아가기도 하며, 여학생이 마침내 물에 투신한 다리 위에 올라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여학생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보기도 한다.
이런 과정 끝에 할머니는 점차 여학생의 마음을 느끼게 되며, 이런 느낌을 통해서 할머니는 모랄리스트로서 현실에 적합한 도덕적 규범을 찾으려 한다. 이창동 감독은 현실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하여 결론를 내린다.
할머니는 학생의 어머니에게 보상금을 전달한다. 이를 위해 할머니는 자신이 간병하던 할아버지와 담판을 하기도 한다. 돈을 전달한 바로 그날 할머니는 자신의 손자를 경찰에 자기 손으로 고발한다. 마지막 경찰에 끌려가기 전날, 할머니는 정성들여 손자의 발톱을 깎아 준다. 그리고 할머니는 한편의 시를 써서 꽃다발과 함께 시인학교의 선생에게 남기고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가운데 하나의 행동이 결론이 아니다. 이 모든 행동의 복합체가 바로 이창동 감독이 모랄리스트로서 나름대로 이런 문제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런 현실적 문제에 대한 모랄리스트로서 이창동 감독이 나름대로의 고투를 통해 발견한 도덕적 결정이다. 이창동 감독은 그가 제시한 도덕적 결정을 확고하게 믿고 이를 관객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랄리스트로서의 삶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다. 사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모랄리스트의 태도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창동 감독은 할머니의 시를 소개한다. 첫 연이 지나면서 시의 화자는 여학생 자신으로 바뀐다. 그것은 할머니와 여학생의 마음이 하나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창동, 아네스의 노래, 마지막 연)
이병창(동아대학교,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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