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주체는 무엇을 소비하는가[청춘의 서재]

소비주체는 무엇을 소비하는가[청춘의 서재]

지젝 <믿음에 대하여>

 

김종곤(건국대학교 강사)

 

신혼여행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대합실에서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있는데 아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주변 사람들을 보란다. 우리의 목적지가 신혼 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 중 하나이기에 많은 신혼부부들이 그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우리가 같은 신혼부부로만 보였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아내는 한명한명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들이 들고 있는 가방과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같은 ‘물건’들을 설명해준다. 아내의 설명 요점은 그것들이 모두 고가의 ‘명품’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내의 설명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할 때 난 비로소 아내가 하려는 말이 ‘신혼여행=명품소비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게이트 앞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무엇인가를 사고 있었다. 나도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이 있으면 골라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내의 손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공항 외부 면세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임을 알았다.

몇 백 만원에서 몇 천 만원까지 하는 가방, 시계와 물건은 또 다른 몇몇 가지의 물질을 가공한 구성물이다. 그것은 나름의 실용성에 바탕을 둔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명품 소비는 그 실용성을 욕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잡동사니를 담는 물건, 시간을 측정하는 물건에 그렇게 열광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소비는 그것을 넘어 ‘다른 무엇’을 욕망하는 듯 보인다. 지젝은 이러한 소비의 형태를 자신의 책 『믿음에 대하여』(최생열 역, 동문선)에서 ‘잉여 향유’(plus de jouir)라 부른다. 즉, 오늘날의 소비에 있어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은 것은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더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지젝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의 소비주체는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그릇된 상상의 잉여”(37)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 슬라보이 지젝, 최생열 옮김, 동문선

잉여는 환상적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한 자동차 광고를 보자.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그 친구는 ‘육체’를 통해 나오는 음성 대신 옆에 세워져 있던 고급 세단을 향해 리모컨을 누른다. ‘비육체’적인 검은색 자동차는 “뽕뽕”하고 비언어적 소리를 낸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 광고를 보고 있는 우리는 자동차의 비언어를 이해하면서 리모컨을 눌렀던 친구의 대답을 듣는다. 그 대답 속에는 그 친구의 지난 과거와 현재가 담겨있다. 고급 세단을 살 만큼의 화폐를 축적했으며 그래서 지금 세단의 평가등급 만큼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맑스가 말하는 물신숭배(fetishism)를 발견한다. 비육체적인 물질과 교환되는 화폐량이 곧 그것의 가치 전부를 대변하면서 육체(생명)들 간의 사회적 관계는 물질과 물질 간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맑스는 이것이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달라붙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소비주체가 소비하고자 욕망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에 달라붙어 있는 바로 ‘잉여’가 아니겠는가? 지젝이 그러한 것처럼 충동의 목적(goal)과 목표(aim)를 구분해서 보자면(101), 여기서 충동의 목적은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이지만, 목표는 그것을 통해 얻는 쾌락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외설적 초자아(superego)의 부름에 부흥한 안도감이면서 기쁨이다. 이것의 의미는 오늘날의 소비 사회를 진단하는 지젝의 말을 단초로 해서 찾아진다.

“‘소비 사회’에 해당하는 후기 자본주의는 더 이상 영웅적 행위를 통해 한계를 뛰어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질서가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의 일반화된 잉여에서 위반 자체가 권장되었고, 우리는 매일 우리로 하여금 남용을 일삼게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잉여를 직접적으로 장려하고 유혹하는 발명품들과 사회 형태들에 의해 세계를 받는다.”(28)

초자아는 이드(id)의 충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법, 도덕 기능을 한다. 하지만 소비사회에서 초자아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형제들을 잡아먹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 법적 질서와 도덕적 규범을 위반하는 외설적 아버지이다. 오늘날 소비사회는 죽음에 맞서 자신의 충동에 충실한 안티고네를 넘어서, 제우스가 죽인 자신의 외설적인 아버지 크로노스를 되살리고 있다. 아이폰 광고에서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폰을 가지지 않는 것은 남들이 하는 이것저것을 할 수 없는 ‘바보’가 된다. 그것은 마치 옆 집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인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꾸지람과 같다. 이제 필요에 따른 소비 혹은 절제된 소비는 외설적 초자아 앞에서 ‘우둔함’이 된다. ‘미덕’은 경계 없는 소비이면서 다시 순환해서 돌아오는 소비이다.

그런데 이 외설적 아버지는 어디로부터 귀환했는가? 죽은 자를 다시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향락이 가져다주는 짜릿함은 ‘자본의 욕망’이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오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우리를 뚫고 들어온 그것은 우리의 몸 속에서 기생하며 우리의 몸을 지배한다. 마치 영화에서 괴물이 사람들의 몸에 들어가 그들을 지배하듯이 말이다. 이제 이 기이한 괴물은 인간이 먹는 것을 받아먹는다. 인간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고 허기진다. 굶주린 인간은 좀비와 같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에게 남는 것은 단지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느끼는 잠시 동안의 즐거움, 텅비어있는 기표의 소비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비욕망은 라캉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다.

입으로 들어간 것이 있으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분명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배출하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의 몸속에 있는 괴물의 배설물이다. 배설물은 입으로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일그러지고 혐오스럽다. 그 “외부화된 배설물은 인간 몸체를 식민화하는 이방적 괴물에 정확히 상응”(69)한다. 그것은 항문적 대상으로서 똥이기에 누군가가 보기 전에 변기에 물을 내리듯이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괴물의 배설물이라는 것,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소비행위가 자신의 자율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A를 누르고, 원하지 않는다면 B를 누른다. 역설은 우리가 선택의 욕구를 끊임없이 분출하고 성적 욕구나 민족 정체성과 같은 ‘자연적’ 특성들이 선택의 문제로서 경험되는 전통 사회 이후의 ‘반사적 사회’에서는, 그간 철저히 배제되었던 요소들이 근본적이고 진정한 선택으로 간주된다는 점에 있다.”(37)

이는 라캉의 믿음 공식, 즉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지젝은 그것을 그의 다른 책(『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등)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①고급 세단이 나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해준다고 믿는다. ②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는다. ①의 믿음은 ②에 의해 부정된다. 지젝은 이를 냉소적 이성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①의 믿음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잉여항략이 ①의 믿음을 ③의 믿음과 같이 전복시켜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 초자아의 기대에 형성된 타인의 믿음이다. 타인의 믿음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의 소비선택은 나의 자율적 행위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렇듯 외설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외설성은 자신의 타율성을 우리의 자율성으로,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믿게끔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사회의 생명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여기서 벗어나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방법은 외설적 초자아를 몰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라는 또다른 과제를 남긴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새 역사를 준비하는 청춘의 몫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