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 회장과 연구협력위원장의 2013 새해인사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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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민(한철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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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 옆을 둘러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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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서 바람의 웃음소리만 들려오는
해골의 언덕을 보았네.
슬픔과 탄식밖에 보이지 앉았지.
그러면 꿈의 즐거움은 어디로 떠나갔나?
우리 잠 속의 빛나는 광채는 어디로 숨었나?
그 빛의 이미지는 어떻게 사라졌나?
그 갈망의 그림자는 잠과 함께 돌아갈 때까지
영혼은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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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에서 저는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에서 그가 내뱉는 한탄스러운 마음과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브란이 이 시에서 그러한 것처럼 반성적으로 지난 시간을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지브란의 시를 좀 더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자신의 영혼이 가꾼 나무에서 수확한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결국 그것이 썼다는 것을 알고는 사람들의 입술에 저주를 내렸다고 자조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의 나무를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심은 나무는 눈물과 피를 뿌려주면서 정성스럽게 키웠고 자신이 맛보아도 달콤했지만 이젠 사람들이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자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제 영혼은 항해를 시작합니다. 바다를 떠다니는 것이 지루해 일곱 색채로 치장을 한 배를 타고 예언자의 모습으로 항구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을 해주었지만 아무도 그 배에 오르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배는 그 화려함과 달리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의 항해에서는 세상의 온갖 값진 것들을 가득 싣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환영은커녕 사람들은 오히려 조롱할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의 항해로 그 전에 배를 치장하였던 일곱 색채가 씻겨나가 그 배는 초라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지브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반성적 사유의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반성적 ‘형식’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시를 끝까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은 영혼이 그 배를 버리고 ‘주검의 도시’로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덤 한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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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골짜기 위를 나는 비둘기와 지빠귀를.
새들과 함께 날 그대의 날개는
밤의 두려움으로 더 강해지지 않았는가?
보아라, 목자가 우리에게서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푸른 풀밭으로 따라가려는 그대의 바램을
밤의 그림자가 재촉하지 않았는가?
보아라 포도밭으로 서둘러 가는 젊은 청년과 아가씨를.
일어나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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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일어나서 새벽과 함께 움직여라.
밤이 지나가고 그 두려움은
검은 꿈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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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그들의 목소리를 실어버려라.
새벽에 함께 노래부르지 않는 건
어둠의 자식 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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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지브란은 ‘찾아 떠나기’를 통해 ‘다시 돌아오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슬픔과 탄식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영혼은 고립성을 벗어나 강해져 다른 영혼과 조우할 수 있게 되며 어둠에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희망’, ‘긍정’과 같은 수식어가 아닌 확정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목적을 가지지 않는 목적성을 따라 탐험하고 출발점으로 돌아가기’라는 방법으로 읽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고정된 목적을 가지지 않기에 유랑의 항로는 자유로우며 둘째, 그러한 자유로움은 무한의 가능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생성의 힘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출발점은 이전과 동일하지 않는 ‘낯선 것’이 됩니다. 곧 낯선 것은 이전의 것을 뚫고 들어가 파괴와 부정의 힘이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지속적 과정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무엘 베케트가 한 말처럼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를 외칠 수 있게 하는 실천성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과 복잡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자 시작한 이야기가 신년사에 적합할지 모르겠으나 아무쪼록 2013년 계사년(癸巳年)은 모두가 자유로운 항해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천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면서 인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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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의 시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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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하지 않음이 완전함을 향해 나가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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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 웅(한철연 연구협력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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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의 임기를 가진 제3기 연구협력위원회 체제가 출범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절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앞서서 저와 같은 길을 갔던 선배님들이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그분들이 겪었을 고독, 그분들이 보여줬던 건망증이 훨씬 더 잘 이해됩니다.
신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마음의 짐을 덜고자 하는 목적을 갖겠지요. 배설이 정화와 한 쌍이듯이, 토해내지 않으면 안정을 찾기 어려운 때가 가끔씩 옵니다. 특히 해가 바뀌는 때는 ‘비 오는 날 막걸리 두 잔 먹고’ 나를 반성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강제력을 발휘합니다. 대중매체에서도, 주변에서도 과거를 돌아보라고 부추깁니다. 뭔가를 토해내라고 합니다.
몇 달 전, 한 후배의 질문에서 제가 미처 성찰하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 질문을 버린 적은 없지만 깊이 생각해서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얘기한 적은 아주 먼 과거였던 것 같습니다. 한철연 사람들은 모여서 뭐하는 거야? 무엇을 해야 하지? 우리는 이해관계보다는 이념지향성으로 뭉친 사람들이야. 무슨 이념을 갖고 있는데?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강한 이념지향성은 때때로 배제를 낳았습니다. 저의 경우, 완전함이란 아무 것도 없음과 동의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저 완전함을 향해서 나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신은 완전한 존재지만 신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집에서 기르는 개만도 못한 존재겠지요.
새해를 맞으면서 제가 작심한 것은 완전함을 먼저 내세우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면 비판해댈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음이 완전함을 향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늘 가슴 속에 새기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한철연은 여느 연구단체와는 다른 특수한 조직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대학이나 다른 연구단체에서는 ‘아주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종종 보거든요. 한철연은 월 회비를 내는 회원만 해도 120여 명에 이릅니다. 20여 년 동안 인건비를 지출하면서 연구실을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시대와 철학]은 논문 인용지수 1위입니다. 애정뿐만 아니라 자부심까지 가져도 될 듯합니다.
우리는 견뎌내야 할 5년을 또 다시 마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 5년 이후 역시 완전함과는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협은 힘이 균형상태일 때 있는 일이 아니라 강자가 주도해서 만드는 일이랍니다. 약자에게 타협은 굴종인 셈이네요.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빈 공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정면으로 응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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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0일
연구협력위원장 이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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