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Q 선생의 閑談]
[Q 선생의 閑談]
최초 여성해방론자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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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규성 (e-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화여대 교수)
1922년(26세)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평남 용강출신)는 「일체의 世慾을 斷하고」라는 글을 통해 “슬프고 아프던 때는 사라져 버렸다”고 선언하고, 자신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를 통렬히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결의를 다음과 같이 표명한다. “내 인격을 후욕(?辱)하고 내 이름을 더럽히던 속상(俗尙)에서 나는 뛰어나왔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허영도 다 ? 버렸다. 나의 행동을 변호해 줄로 믿었던 소위 재래의 모든 전통적 사상을 파괴한다는 사회주의자 무리에서도 나는 뛰어나왔다. 아! 나는 절실한 개인주의자가 되었다. 개인주의!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 말인가? 나를 이제부터 살리고 나를 완성해줄 이는 오직 신개인주의 밖에 없다.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데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김원주는 1920년 도쿄 영화(英和)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여 그해 4월 재산이 있었던 남편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 잡지 『신여자』를 4호까지 발행한다. 남편 이노익(李老翊)과의 결혼(1918년∼1921, 4년간)은 김원주의 회고에 의하면 사랑 없는 무의미한 생활이었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만든 최초의 잡지는 무의미한 생활의 청산(자유이혼)과 이로 인한 재정결핍으로 좌절된다. 그 후 김원주는 경제적 독립을 여성해방의 선결조건으로 절감한다. 당시 일본의 다이쇼(大正) 생명주의 시기에 민주주의와 여성해방론과 연관하여 유미주의적 개인주의 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여성해방론은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ey)의 진화론적 모성주의와 아동보호론을 배경으로한 ‘연애의 자유(freedom of love)’가 거친 ‘자유연애(free love)’로 중국과 한국에 유포되었다. 김원주를 비롯한 당시 신여성들은 엘렌 케이의 개인의 존엄성에 바탕한 연애론에서 인격존중에 의거한 연애와 충실한 사랑이 없는 결혼의 무의미성 및 자유이혼론을 수용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건적 가부장 문화를 배경으로 한 조기 강제결혼을 비인간적인 처사로 인식하게 했으며, 여성의 자각적 주체성을 모색하게 했다.
일엽 김원주(一葉 金元周, 1896∼1971)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두 가지 개인주의 사조(엘렌 케이의 합리적 개인주의와 오스카 와일드류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의 흥기를 목격한 것으로 보이며, 도쿄에서 김명순과 동거하다가 귀국한 노월 임장화(蘆月 林長和)와 1923년 경부터 1925년까지 동거생활을 한다. 김원주는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경쟁적 개인주의가 아닌 내적 인격의 형성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를 지향한다. 예술지상주의적 개인주의 철학을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보들레르,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통해 수용한 임장화와의 만남을 통해 그와 공유하는 개인주의를 심화한다. 김원주의 개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장화의 사상과 연계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임장화의 사상이 그의 고백체 소설 전체가 그렇듯 관능성과 퇴폐성을 보여주는 반면, 김원주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강한 의지적 노력을 보여준다. 임장화가 순간적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부르주아적 규범에서 탈출하려는 분열된 자아를 향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김원주는 엘렌 케이의 영향으로 보이는 ‘영육일치(靈肉一致, unity of soul and senses)’의 정신에 바탕하여 자아의 형성과 구원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원래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영향 아래 사적인 감각인상에 몰입하거나 기성제도성에서 탈주하려는 개별성(singularity)을 절대시하기 때문에 자폐적 나르시즘이라는 비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주의도 멋부리기(댄디즘)나 반항적 글쓰기를 통해 나름의 사회적 소통을 추구했다. 김원주는 스스로 ‘영원한 저주’로 본 ‘서러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사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인격존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때’에 ‘충실’한 태도를 갖고자 한다. 그는 고백을 담은 서간체 형식의 글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사회적 소통을 찾는다. 김원주는 근대적 산업체제에서 나온 효용주의적(utilitarian)인 개인주의나 집단적 실천이 아닌 인격적 관계의 확산을 통한 보편적 유대의 길을 찾는다. “인생이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다 ? 같이 완성되고 세계가 한없이 자유롭고 아름답게 될 때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세계를 창조하고 향락하기 위하여 남의 생활을 간섭치 않으며 또는 자기의 생명과 인격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남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적 확신은 예술지상주의의 주요 특징인 내적 자기분열의 고뇌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파괴적 소외를 극복하고 이를 지배하는 결단을 동반한다. 이 결단은 “자기 생명가운데 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가운데 자기 인격의 존엄을 보게 될 거인적 개인주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 역사적인 결의가 된다. 김원주의 신개인주의는 유미주의적 개인주의가 갖는 유아론적 성향을 벗어나려는 예술 정치학을 포함한다.
김원주의 ‘거인적 개인주의’는 ‘나의 부드러운 정서’와 ‘내 본성에 깊이 파묻힌 겸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움 쌓인 한 줄기 희망’으로, ‘따듯한 한 줄기 일광’으로 받아들인다. 서구의 유미주의적 개인주의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서 나타나듯 부르주아의 산업주의와 가부장적 규범주의에 반항하는 탈주행위가 주는 악마적 자기 파괴성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반항적 탈주의 강도가 약할 때는 부르주아에게 귀여운 응석받이가 되었다가 도를 넘을 때는 퇴출과 감옥행을 겪는다(오스카 와일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소외를 관능적으로 즐기는 퇴폐성과 부르주아적 도덕규범에 저항하는 악마성에 집착하거나, 내적 망명을 택하여 신비주의 철학에 몰입하거나, 현실을 떠나 부랑(浮浪) 지식인이 되거나 예술프로레타리아가 된다. 근대적 합리적 자아의 이면에 있는 가공할 분열성이 낭만주의적 유미주의에서 새어 나왔다. 가장 무서운 허무주의는 랭보(A. Rimbaud)의 도망이다. 랭보, 그는 어떤 인간이었는가? ? 신경쇠약자, 하릴없는 건달패, 갈 데까지 심성이 비뚤어진 위험인물, 떠도는 어학선생, 길거리 장사꾼, 써커스단의 인부, 부두노동자, 농장의 날품팔이, 선원, 네델란드 군대의 지원병, 기사, 탐험가, 잡상인 따위로 지내다가 아프리카 어디에서 전염병에 걸려 마르쎄유의 어느 구호병원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37세의 나이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 사나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존엄을 함몰시키는 산업사회에 대한 저항은 세계상실과 인본주의적 자아의 상실을 특징으로 갖는다. 세계는 허공에 떠있고 당당한 계몽적 주체성은 죽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예술지상주의가 경험한 세계와 인간의 종말은 근대산업의 분업체계가 낳은 산물이었으며, 그들 이전 선배들의 고상한 낭만주의가 뿌린 씨앗의 결과였다.
나혜석(1896~1948)
김원주의 지적 동료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해방의 기치를 들었던 여류인사들 가운데 김명순은 정신병에 걸려 일본 정신병원에서 객사하고 아들은 자살한다. 나혜석은 이혼을 당하고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고향에 큰 농장이 있었던 임장화는 1920년에서 25년까지 5년간 지적 활동을 하다가 잠적하여 그의 생몰연대도 불확실하다. 이들은 자유로운 사랑의 주체성을 사회해방의 신호로 인식했으며, 그 결과 온갖 추문과 함께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임장화는 동인지 『영대靈臺』의 원고료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도 받았다(당시 문인들 사이에서는 원고료와 술값을 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원주가 신개인주의를 분명히 내걸며 추문을 퍼뜨리는 지성계를 통렬히 비난한 것도 자유이혼론에 따라 남편 이노익과 이혼한 직후의 일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자아의 형성과 구원을 향한 의지를 확인한다. 의지는 ‘외로운 나’와 ‘충실한 생활’을 연결한다. 이러한 삶은 ‘형극이 많고 도정이 먼’ ‘순례의 길’이다. “나는 가슴을 헤치고 넘치는 기쁨으로써 인생을 맞아들이겠다. […] 인생은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잔혹하였다. 소녀시대에 부모를 잃고 형제를 영별한 나는 철모르게 청춘시대를 맞아 개성의 눈 뜰 새도 없이 나한테 아버지뻘이나 되는 이와 이해 없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차차 개성의 눈을 뜨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때에는 나는 단연히 이때 애인도 돈도 없이 앞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단지 대담한 일만 하였다. 그러나 요행히 모 잡지사 경영인의 호의로 지금까지 생활비만은 얻어 쓰게 되었다.”
이러한 궁핍의 위협에도 김원주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를 ‘신생’의 ‘지평선’으로 바라본다. “나의 가슴을 쓰리게 하던 전반생은 자취도 없이 다 ? 사라져버렸다. 나의 청춘을 완전한 사랑의 경지로 인도해줄 한 줄기 빛이 무한한 지평선 위를 빛 날리며 나에게 신생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아 ? 미쁜(진실한) 신생의 길이여. 나는 그대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지키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자아완성은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노선은 1923년 만공선사(滿空禪師)의 법문을 듣고 감동받고, 1933년 수덕사 덕숭산문(德崇山門)에 입문하게 되는 예후가 된다. 그 사이 1928년에는 『불교佛敎』의 필진으로 활약하던 중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불교이론에도 조예가 있었던 백성욱과 만나 동거하게 되면서 불교의 ‘절대적 사랑’,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는 사랑’의 이념을 심화하여 종교적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다. 조실부모한 서러움과 함께 사물의 무상함과 무근거함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1920년 『신여자』의 발간 이전부터 그를 떠나지 않는 제2의 천성이었다. 입센의 노라가 당시 신여성에게는 여성이면서도 진정한 독립적 인간성을 집약하고 있는 해방의 모델이었다. 김원주는 「노라」(1922)에서 ‘우리 조선 여자 사회에 나타난’ ‘노라라는 여성’은 ‘잠을 깨어 자기의 의식을 분명히 알게’하는 ‘새벽빛’이다. ‘각성치 않은 노라’는 ‘인문 발달상에 방해가 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이 사회는 고만한 암흑한 지옥’이 된다. 김원주는 ‘우리 여자 사회도 무수한 노라가 쏟아져 나오길 충심으로’ 바란다. 김원주의 노라가 동양의 일엽선사로 변화되는 것은 무상과 자아완성에 대한 관심 속에 이미 그 징후가 있었다. 이는 오스카 와일드가 서구 신비주의 철학과 장자(莊子)의 ‘지인무기(至人無己, 초인은 자기가 없다)’의 철학을 선호한 것과 유사성을 갖는다.
수덕사
표면상의 차이로 보면 김원주의 생애와 사상은 대체로 『신여자』발간기(1920∼1921)의 여성해방론, 『신여자』 폐간 후 여성해방론과 연계된 신개인주의론과 불교적 자아론(1922∼1933), 덕숭산문에서의 수도시기(1933∼1960), 그리고 다시 문예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임장화나 다른 신여성들과는 달리 김원주의 생애에는 무정한 세상과 서러움을 이기는 창조에의 포부가 일관된 흐름으로 있다. 그의 자아는 인격적 사랑과 예술을 형성하는 창조적 활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교에 입문해서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는 창조성으로 가득한 우주적 자아의 본체이다. 우연이지만 그의 스승 만공선사의 법명은 ‘가득 찬 공[滿空]’으로 일엽선사는 이 개념을 자신의 불가적 세계상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충만의 철학은 빔을 통과해서 도달된다. 빔은 우주 삼라만상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한다. 우주가 부처[佛]인 바, ‘님’인 부처를 향한 사랑이란 다름 아닌 우주와의 일치이다. 잃어버린 세계, 분열된 자아는 우주와의 일치에서 회복되고 구원된다. 사바세계 속에서의 애욕의 대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의 합일에서 비로소 통일된다. 대립의 통일, 이것이 사랑의 절대적 이념이다. 일엽선사는 과거 자신의 연애가 비록 거기에 사랑의 이념이 불완전한 형태로 현현되어 있었지만 상대적 대립을 면치 못한 미로였다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되찾는 사랑에서 무대립의 평안과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했다. 여성해방과 신개인주의 철학은 충만과 공의 철학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된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자유 그리고 창조는 대립의 초극에서 결실에 도달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세계지혜는 그에게 차가운 세계였던 겨울 ‘밤’의 여로를 통과한 것이다.
김원주의 님을 향한 사랑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함께 20세기 한국 불교철학의 두 금자탑이다. 한용운의 절대적 사랑은 부재 가운데서 애달픈 동경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반면, 김원주의 절대적 사랑은 침묵 속의 선 수련을 통한 자각의 순간에 현전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른바 1920년대 연애담론이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전략이라는 정치적 자장(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를 통한 문화적 동화정책) 속에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원주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주의 특유의 비정치적 사고를 고집한데에도 기인한다. 그들의 실천은 추한 외부세계로부터 내부로 망명한 개인의 상상력과 문예활동을 통해 조선의 상황을 구제한다는 예술 정치학이었다. 동학혁명에 두 번이나 가담했던 한용운은 민중과의 평등한 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변혁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김원주의 개인주의적 사고는 봉건유습에 저항하는 저항성을 갖지만 식민지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담했다. 그는 유미주의적인 실존적 퇴폐성과 분리되지 않는 문예활동을 현실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이를 초극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선가(禪家)의 용어로는 ‘향상(向上)’의 길에 주력했다.
김원주는「단장斷腸」(1927)에서 화자인 나를 통해 임장화의 퇴폐적 감각을 연상시키는 발언을 하고 있다. “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이 고통을 어찌 차마 견디나. 아! 모두 잊어버리자. 무슨 기억이고, 생각이고 하여서는 무엇하랴. 그저 모두들 모르고, 모두들 잊어버리고, 그저 어제 모양으로 혼몽 천지로 지냈으면 오죽이나 좋으랴. 나 같은 놈은 내 정신, 내 의식만 돌아오면 쓰리고 아리고, 매운 고통뿐이니 ……. 아아, 술 가운데 세상도, 사회도, 집도, 나도, 고통도, 기쁨도, 사랑도, 미움도, 아무것도 없는 오직 술 가운데만 살고 싶어라.” 세계의 실재성이 가하는 자아 분열적 고통은 세계를 혼몽 천지로 보고 싶어 하는 유아론적 공상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적 착시가 보는 환상 세계에는 구체적 감정들의 기복이 없다. 여성해방론에서는 영육을 갖춘 인격의 독립성이 세계의 본질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이제 나는 세계 밖으로 축출된 비본질적인 우연적 존재로 격하된다. 퇴폐적 관점을 상징하는 술은 세계의 실재성을 파괴하는 무기이지만, 세계를 붕괴시킨 대가로 건실한 인간적 주체의 파멸이 다가 온다. 김원주는 서구 근대성에 잠재된 그리고 결국 낭만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통해 드러난 이러한 허무주의적 결말을 원하지 않는다. 술이 맨 정신으로 세계를 환상으로 보는 불교적 자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절대적 사랑의 자아에서는 세계는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 경험되고 감정들은 순화된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김원주의 사상은 (1) 여성해방론 (2)신개인주의론 (3) 만공(滿空)의 철학으로 나누어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관된 관심은 개인주의와 개인의 창조적 완성이다. 그리고 개인은 사랑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진화에 의해 성숙한다. 사랑은 오늘의 인류가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한 심연으로 남아있다. 사랑은 김원주에게 아마도 누구에게나 현실에 대한 불만과 대립의 고통을 구성하게 하는 어렴풋한 선험적 이념이며, 따라서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찾게 하여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하는 상상력의 원천일 것이다. 사랑은 미망의 원천이자 이로부터의 해방의 추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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