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존재를 믿어야 할 이유 – 영화 <곡성>과 악에 대한 성찰 [톡,톡,씨네톡]
한상원(한철연 회원)
영화 <곡성>은 곳곳에서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부활한 후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성흔을 보여주는 예수를 다룬 서두의 복음서 인용이 그렇고, 영화 말미에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내 곁에 있으면 모두가 살아나고 악마들이 질 것이라고 알려주는 무명(천우희)의 대사가 그렇다. 후자는 닭이 울기 전에 세 차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모두 믿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무덤에서 깨어난 예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끌려갔을 때 그와의 관계를 부인하였다. 영화에서 주인공 종구(곽도원)의 믿음이 흔들린 순간,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곡성>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다룬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곡성>은 그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기한다. 믿어라. 왜 믿지 못하는가. 무엇을? 신의 존재를? 아니다. <곡성>이 믿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악의 존재, 세계의 악이다.
그 메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종결부다. 한 편에서 종구가 수호신 무명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교차편집을 통해 동시간적으로 양이삼 부제(김도윤)는 악마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만난다. 죽은 외지인은 3일만에 부활한 채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모습과 마찬가지다. 낫을 들고 악마를 벌하러 간 부제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외지인이 다시 묻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부제는 말한다. 악마다. 왜 말을 못 하는가. 외지인이 말한다. 자네가 이미 말했잖나.
이 대사는 요한 수난 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빌라도는 예수에게 추궁한다. 그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는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하고 답한다. (요한 18,37) 나를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여라, 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도 나약한 인간 빌라도는 그를 스스로 처단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 그의 처분권을 이양한다. 믿음이 약한 부제는 마치 빌라도가 예수를 끝내 자기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외지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외지인이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를 살려주고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은 외지인으로 넘어간다. 그는 자신이 악마라는 사실을 부제가 왜 믿지 못하는지 추궁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난 성흔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내 몸을 만져보아라. 수난당한 뒤 부활한 그리스도를 완벽히 재현해내면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나약한 부제를 조롱한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장면에서 내가 느낀 건,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냐고 우리에게 묻는 (신이 아닌) 악마의 목소리가 외지인의 입을 통해 나온다는 것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너희들은 나, 즉 악마의 존재 역시 부인한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계는 악하지 않다고 말한다. 보아라. 나는 악하고, 너희가 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안 너희는 악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고 시초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 반면, 악은 선의 결핍으로, 선이 부재한 곳에 자리잡은 어둠으로 정의내렸다. 악은 따라서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악을 창조하지 않았다. 악은 신이 창조한 선의 빛이 닿지 못하는 곳에 자라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헤겔은 선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은 그것의 대립물인 악의 부정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악은 선을 규정하는 데 불가피한 요소다. 만일 우리가 헤겔의 논의를 확대해본다면, 악에 대한 존재 증명은 동시에 선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선과 악이 상호 대립하지만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념쌍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에 대해서는 인색해 왔던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세계에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비정한 세계, 냉혹하고 차가운 현실 속에 고립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선’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가 공감할 사실이다.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우리가 ‘선’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는 만큼이나 ‘악’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아우슈비츠와 대학살, 거대한 살육전쟁 등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거대한 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에 악은 세계에서 소멸했는가? 세계는 더 이상 악의 지배를 받지 않는가? 악은 종교인들이 현대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규제할 때 사용하는 보수적인 슬로건에 불과한가? 오히려 한나 아렌트가 말한대로, 악은 ‘평범성’의 모습을 띄고, 우리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악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자들은 악마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영화 <곡성>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희생물로 바쳐질 자들의 옷을 입고 쪼그려 앉아서는 우리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주의를 끄는 미약한 메시아가 우리에게 하려던 말 역시 악이 존재한다는 것, 악이 부활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 죽은 듯 숨어 있다가도 부활을 기다리는 악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약한 인간에게 ‘성흔’을 보여주며 존재를 과시할 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악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악에 대한 믿음과는 다르다. 오히려 악의 존재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그러한 악으로부터 현혹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과 악에 대한 교리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태초에 신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으나 선이 모자란 자리에 악이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은 악이며, 부재하는 선은 바로 그 악에 대한 대항으로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악이 존재한다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인간이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각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 영화 세편이 모두 극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세 편을 통해 계속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요. 끔찍하고 불행한 일들은 이유없이 벌어지고 행해지지 않게 인간이 더 인간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악에 대한 성찰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는 메시아와 손잡을 수 있는 방법은, 그 이전에 악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악의 존재를 믿는 자만이 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다. 선은 미약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힘으로 악과 부딪힘으로써. 미약한 선의 꺼질듯한 촛불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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