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루스(phallus)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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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쑵니다.
저의 소개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뻑.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라 욕하지 마시고 당황스런 저의 난감함을 혜량해 주십시오. 언젠가 중국의 베이찡 거리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손짓발짓 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의 눈만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했던 것만큼 갑갑합니다.
오! 이타카의 왕이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딧세우스로부터 다이달로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에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 그리고 로마의 황제를 역임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까지.
근래 캔디와의 스캔들로 뭇 여성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테리우스(오, 나의 사촌 형님 ㅡㅡV) 그리고 열락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카바레의 죽돌이가 되어 우쑤 가문에서 파문당했던 제비우스(형! 왜 그랬어. 카바레가 그렇게 좋은 거야) 이 우쑤 가문의 영광을 빛냈던 우리의 조상 형님들 앞에서 저 허리우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저의 난감함이란 베이찡 거리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도 느꼈다는 사실일 겁니다. 타인의 언어를 모르면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진정을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입죠. 그것은 여성의 언어도 모르면서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진정성을 얘기하려는 어리석음일 수도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떠드는 이 현상의 핵심은 ‘정신병이 범죄의 원인이냐? 아니면 여성혐오가 원인이냐?’ 정도이더군요. 저의 당혹스러움이란 이 이분법적 논쟁의 핵심이 마치 생물학적 문제이냐 문화적 정치적 경향의 문제이냐를 따지는 듯한 느낌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런지요.
이것은 이분법적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형님께서는 간파하셨지만 그것은 사실의 명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가련한 동물이죠.
아뇨. 인간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동물성을 이성적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외면하기보다는 직시하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혹은 이성적이어야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동물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핵심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만, 생물학적 차원과 문화적 정치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분들이 자신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했던 점입니다.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친척과 직장동료를 비롯한 아는 사람이죠. 여성분들이 당한 추행과 성폭력의 내용들은 대체로 그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크고 작은 성추행이나 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이 외면할 뿐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지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단지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린이에게도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약자들이 당하는 일들입니다. 강자들의 지배와 권력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현상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 억눌렸던 약자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얘기들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 얘기들을 겸허히 듣지 못하고 어떤 남성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말라는 핏켓을 들고 나온 일은 겁 많은 남성의 찌질한 행동이라고 귀엽게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전 이 문제가 남성과 여성의 혐오의 문제로 구별하기보다는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한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입니다만, 이것 또한 여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한 일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뻬이징 거리의 중국인을 대하는 당혹스러움입니다.
폭력적 지배의 혐오라는 문제로 본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권력의 폭력적 지배에 취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물학적 차원의 동물들의 세계에서 남성성이라는 팔루스(phallus)가 있다면, 아! 전문용어 나왔군요.
팔루스. 죄송합니다. 쿨럭, 넵, 팔루스는 페니스(pennis)라는 생물학적 자지와는 다른 용어로 흔히 남근으로 번역되더군요. 권력이고 폭력입죠. 상징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권력과 폭력이지만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동물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인류의 역사는 이 팔루스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무사(武士)에서 문사(文士)로의 변화, 그러니까 무(武)라는 폭력에서 문명이라는 문(文)으로의 전환이 핵심이 아닐까 싶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남녀의 대립의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야만의 폭력성과 문명의 문화성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가하는, 네 그런 얘기입니다. 여성들의 성토는 아마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의식하지 못하는 야만의 폭력성에 대한 성토일 수 있습니다. 네, 아직 남자들은 문명의 문화성으로 진화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간들입죠. 물론 이 사회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입니다. 직시하자는 것이죠.
문득 동방불패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영화에는 강호의 최절정 고수가 되어 절세 무공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적힌 비서(秘書)가 나오죠. 규화보전(葵花寶典)입니다. 규화보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작용은? 여자가 되어 한 남자를 지배하고 독점하려는 질투와 원한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규화보전은 원래 한국에서 전해진 것으로 원문은 한글이고 번역본이 한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한문은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를 한글 원문으로 이렇게 해석하더군요. “좇 빠지게 연마하라.” 단언컨대 이것은 날조된 사실입니다. 거세후연마(去勢後鍊磨). 이 말은 한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규화보전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적합한 비법입니다. 때문에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화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팔루스의 폭력적 지배가 아닌 여성성의 헌신입니다. 핵심은 남성성을 죽이고 여성성을 강화해야한다는 사실입죠. 전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세 무공의 핵심은 여성성의 강화이다. 폭력적 지배보다는 부드러움의 헌신이다. 그렇습니다. 여성성은 이제 인류를 주도할 핵심 키워드가 될 것입니다.
여성성의 핵심이 바로 거세(去勢)입니다. 이 거세는 성기를 절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문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勢)를 제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들은 어떤 세를 제거해야 할까요? 기세, 권세, 위세, 힘쎄. 남자들은 자신의 세(勢)를 가지고 명령하고 과시하고 공격하고 주도하고 지배하고 규정하고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부드러운 방법을 모릅니다. 현실을 다룰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를 모으려고 몰려다니며 으쌰으쌰 술만 마십니다.
제거해야할 것은 성기가 아닐 줄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勢)를 과시하려는 남성적 동물성이고 세를 가지고 지배하려는 팔루스입니다. 갱년기는 여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남자들도 갱년기를 겪는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근력이 저하됩니다. 눈물이 많아진다고도 하구요. 애처로운 일이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화된다고 하더군요. 전 이미 술과 담배로 쩌든 몸이라서 팔루스가 발기되지도 않지만,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제 남자들은 규화보전을 연마할 시기는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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