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최종덕의 책과 리뷰] -17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필자의 홈페이지(http://eyeofphilosophy.net)

 

생활미신으로서 창조과학

 

오늘의 서평 책 : 스티븐 로(윤경미 옮김),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 2011

                          Stephen Law, Believing Bullshit: How Not to Get Sucked into an Intellectual Black Hole, 2011

 

 

 

신비한 듯, 미지의 것에 대한 믿음을 빙자하여 어이없는 확신감을 갖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과 상식을 부정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 관습적으로 믿어 왔던 것만을 믿을 뿐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습관에 의존하여 오도되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믿음을 우리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확증편향의 자기함정을 형성한 사람들은 자기가 믿어 왔던 내용과 다른 사실과 지식 모두를 부정하거나 일부러 무력화시킨다.

 

온갖 고정관념과 타성들, 나아가 은폐와 음모에 빠지는 오도된 믿음들의 사례를 모아서 <확증편향>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준 책이 있었다. 이미 몇 년 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지만 온갖 비리와 몰상식이 횡행하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지금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이 책은 영국의 대중철학 잡지 <Think>의 편집장인 스티븐 로가 쓰고 윤경미가 옮긴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사실과 지식을 무력화시키는 확증편향의 함정을 ‘지식의 블랙홀’이라고 불렀다. 한국사회에서 확증편향을 행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위 지식인이나 과학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이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확증편향이다. 이들의 확증편향은 개인의 심리적 성향만으로 그치지 않고, 은폐와 기만 그리고 자가발전의 권위의식을 통해서 자기권력 형성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사회적 병증으로 이어진다. 이 책은 그들의 은폐된 편향성을 거의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요즘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수많은 확증편향 중에 단연 으뜸가는 것은 “창조과학”의 횡행이다.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창조과학의 배경이 되는 믿음체계로서 <젊은 지구 창조론>의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젊은 지구창조론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역사를 6,000년에서 7,000년 정도로 단정한다. 현대과학의 검증된 사실 가운데 하나로서 140억 년의 우주 나이와 47억년의 지구 나이는 단적으로 무시된다. 구약성서에 나온 대로 6천년의 지구 나이와 창세기에 쓰여진 6일 창조론에 기반한 교리의 믿음체계를 창조신앙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나 서평을 쓰는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신앙에 대해 시비를 따지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갖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신앙은 종교의 굳건한 믿음체계이고, 거꾸로 그런 믿음 체계를 통해 종교가 형성되었고 신앙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신앙체계를 과학적 지식으로 둔갑시키려는 미신적 조작이다. 믿음을 지식으로 둔갑시키는 조작은 일종의 미신이며 주술이다. 불행히도 미신을 지식처럼 조작하는 주술전략이 한국 사회에 이미 크게 유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창조과학”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수많은 화석 증거들, 지구 지표면 전체에서 드러나는 지각판과 지질 단층의 증거들, 퇴적물의 증거들, 암석층의 분석증거들을 단 칼에 거부하고 비난하며, 새로운 억지 주장들을 내놓는다. 창조과학은 성서 문자로만 나타난 종교적 상황으로서 ‘대홍수 사건’(a religious appearance)을 마치 역사적 사실 같은 ‘대홍수 이론’(the flood theory)으로 만듬으로써,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 사실을 조직적으로 유포한다.(책 115쪽) 창조과학은 창조신앙과 다르게 이미 신앙의 체계에서 벗어나 지식과 과학의 영역까지를 지배하려 든다.

 

과학은 교리체계의 구성인 노아의 방주처럼 ‘대홍수 사건’의 종교를 거부할 필요가 없다. 노아의 방주는 신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은 노아의 방주에 태운 동물들 중에서 북극의 북극곰과 호주 대륙의 주머니쥐가 어떻게 같이 배를 탈 수 있었는지, 지구 90만종의 곤충을 어떻게 모았고 어떻게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태웠는지, 지구의 거대한 산맥들을 꽉 채울 정도로 엄청난 홍수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런 이야기 모두에 대하여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책 118쪽)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창조신앙을 과학으로 위장시키려는 창조과학자들은 거의 모든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고 변형시키거나 조작하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정보국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공룡의 생명종의 역사까지 조작하거나 생물학의 기본인 암수 양성번식까지도 왜곡시킴으로써 건강한 기독교인까지 혼란에 빠트린다.(책 119쪽) “창조과학”이 과학적 사실을 끝까지 부정하고 거부하는 이유는 의외로 종교 밖에서 찾아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창조과학을 믿는 일부 창조 주술가들은 창조과학을 ‘도덕적 십자군 운동’으로 믿는다고 표현한다. 중세가 아닌 현대과학의 시대에서조차 창조과학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을 거부하고 소수자 평등주의마저 강하게 공격한다. 현대생명과학에서 진화론을 부정하면 창조신앙은 유전자공학에서부터 항생제 의약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생명공학기술에서 당장 손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억지논리, 편향된 믿음, 거짓에 대한 동참, 위약효과(placebo effect), 물신주의, 그럴듯함에 대한 기대감, 남들 따라 무조건 믿게 하는 집단동조의식, 기만에 대하여 기꺼이 세뇌당하고 싶어하는 감성유혹이 우리 행동성향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티비에 등장하는 마술사는 그런 인간의 허점을 역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믿음의 권력자는 그런 허점을 통해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만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특히 창조과학은 거창하고 그럴듯한 과학용어를 사용하여 믿음의 대상을 지식의 체계로 바꾼다.

 

창조과학은 자신의 사회적 병증을 자기합리화 시키고 있다. 자기합리화의 이유는 단순히 창조신앙으로 계몽하려는 순수 종교적 의지를 넘어서 있다. 창조과학을 표방하는 소위 지식인들은 겉으로는 창조신앙을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지식권력을 지향한다. 여기서 지식권력이란 그들 개인의 확증편향을 집단의 확증편향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집단지식의 주도자로 되려는 데 있다. 창조과학과 같은 종류의 확증편향이 집단맹신주의로 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창조과학 지식인 대부분이 한반도의 역사왜곡과 비리정치를 그럴듯하게 합리화시키려는 자기기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로 그칠 일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창조과학 류의 주술적 문맹을 경계해야 한다. 일부 창조과학자는 아주 손쉽게 혹은 기꺼이 일베 동조자에서 일베 지도자로 변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 중인 박성진 교수 곧 물러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박성진 개인만이 아니라 잠재적 박성진이라는 한국의 반과학적 미신사회를 퇴거시켜야 한다. 그러면 데이타 조작하는 부정행위, 제자에게 갑질하기, 연구비만 따먹으려는 프로젝트 등의 연구부정행위는 자동적으로 사라질 수 있다. 나아가 실험실 연구는 열심히 하지만 일상에서는 중심잃은 비과학적 사고를 하는 무중력 상태의 ‘진공관 과학자’도 따라서 줄어들 것이다.

 

“난 그냥 알아”, “아니면 말구”, “내가 해봐서 다 아는데”, “니들은 여전히 낭만적이군”, “밀어붙이면 다되지 않겠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데 웬 시비야”, “참고 기다리면 유토피아가 올거야”, “불신지옥”, “빨갱이들”의 단어들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생활주술”과 “생활미신”이 판치고 있다. 창조과학이나 빨갱이론 등의 권력형 믿음들, 무임승차와 낙수효과 등의 공허한 믿음들, 환상과 가공이 실제를 지배하는 유토피아의 믿음들은 사실의 인식론과 자연의 과학을 주술과 미신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주술을 떨쳐내야 하고, 위장된 미신을 과학과 구별해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이 책,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은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