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누스바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6.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下)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숨기고만 싶은 치부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고 부족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걸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꼭꼭 숨기고 덕지덕지 봉합한다. 잡힐까 두려워 머리만 풀숲에 쳐박는 꿩처럼 그렇게 위장하고 은폐한다.

혹시라도 남들 앞에 자신의 이런 치부가 발각되거나 드러나기라도 하게 된다면, 많은 경우엔 강렬한 수치심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이런 수치심은 자존감을 무너뜨리리게 되고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인간 관계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위협을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수치심은 우리를 압도하면서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저서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 이러한 파괴적인 감정인 수치심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본 글에서는 먼저 수치심에 대한 누스바움의 설명을 살펴보고, 그리고는 수치심이 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수치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 편안한 자궁, 비극적인 출생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은 개별 인간의 삶의 발달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수치심은 전지전능함과 완전함, 그리고 편안함을 바라는 유년기의 욕구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유아는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유한성, 부분성, 거듭된 무력감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깨달음 안에 있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일시적인 방법이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유아기에서부터 형성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일컫는다. 이 원초적 수치심은 불가피하면서도 다소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며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다. 그런데 어떤 외적인 계기로 인해 원초적 수치심을 제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강화된 채로 존속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위험한 감정이 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유아는 태아 상태에서 자궁 속에 있을 때는 불필요한 자극이 없고 자동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함과 완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출생의 순간부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엄마의 편안한 자궁과 달리, 세상은 유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갖 고통스러운 자극과 매정함으로 가득차 있고, 돌봄 제공자는 항상 원할 때 자동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풍경은 다양한 고전들 속에 그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출생을 거센 파도에 난파되어 낯선 땅위에 표류한 선원에 비유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라던지, 노동할 필요도 없고 강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며 날씨는 따뜻하고 대지는 풍요로운 곡식들로 넘쳐나는 황금시대를 이야기하는 헤시오도스의 신화라던지, 인간이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힘이 엄청났으며 신과 겉이 강했다가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이야기는, 완벽한 세상인 자궁 안에 있다가 출생과 동시에 비극적인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유아의 모습을 은유한다.

유아는 예전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고 결핍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깨닫게 되면서 원초적 수치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자아 이상을 바라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들키기 않고 감추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어버리고자 하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이런 원초적 수치심은 유아기 이후에도 잠복되어 있게 되며, 이제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특성들, 즉 부족하거나 결핍되거나 완벽하지 못하거나 의존적이라는 특성들은 수치스러운 것들이 되어 억압의 대상이 되고 파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런데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무질서해지소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치심은 좋은 감정이며, 심지어 사회가 법을 통해서 수치심을 주는 형벌을 권장할 필요마저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동체주의 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1929. 1. 4 ~)나 법학자 댄 케이헌(Dan Kaha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케이헌은 노상방뇨를 한 사람에게 직접 길바닥을 솔로 북북 문지르게 한 처벌을 옹호하며, 성매매를 한 사람의 신상을 신문에 공개해야 하고 심지어 음주운전자거나 범죄자임을 알리는 표시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하며 얼굴에 낙인찍는 형벌을 복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수치심을 주는 처벌들은 범죄에 대한 강력한 억제 효과와 처벌 효과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혼모, 약물중독자, 범죄자 같은 일탈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런식의 수치심 주기는 사회 질서와 도덕적 가치 구현에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권장되어야 할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수치심 처벌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 둘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국가의 사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인민재판이 된다. 셋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잘못된 대상을 처벌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넷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억제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대상을 소외시킴으로써 더 범죄로 몰아넣는 역효과를 지닌다. 다섯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시민들을 사회적 통제 아래에 둔다.

 

  • 낙인찍히는 존재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 처벌은 주로 역사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 부과되어왔다. 예컨대 옆에 있기만 해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낙인찍히거나 수치심을 부여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들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은 낙인과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주로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존재들, 예컨대 여성이나 동성애자, 범죄자 등이 그런 낙인과 수치심주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누스바움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과 같은 스티그마나 여성의 치마에 대한 역사등의 고찰을 통해서,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에게 수치심을 주어왔다고 들려준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는 남성에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사회는 여성들의 패션과 치마 길이를 통제해 왔으며, 범죄나 동성애자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존재들이지만 겉으로는 그들의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지를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넣음으로써 누구나 인식하게끔 자행되어왔다.

앞에서 원초적 수치심을 다룰 때 이야기됐던 것처럼, 주로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즉 수치스러운 특성을 지녔다고 간주됨으로써, 원초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투사되는 것이다. 그런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그들과 다른 나는 정상적이며 완벽하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야한 옷을 입다니 천해보인다”, “니가 짧게 입고 돌아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같은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나 ‘창녀 수치심주기’slut shaming를 생각해보자.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경박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나이든 여성이 예쁘게 꾸미는 것도 수치스럽고 주책맞은 일로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엔 감정을 드러내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약해보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 여성스러운 것이므로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억누르라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감정이나 친밀성을 억누르면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타인과의 감정 교류나 공감과 연민의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비하의 맥락 안에 놓여 있기에 ‘여성혐오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여성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 여성이 자신의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통제되지 않는 여성을 향해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것이다.

 

  •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이처럼 수치심은 신뢰할 수 없고 매우 위험한 감정이며, 특히 그것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게 부여될 경우엔 더더욱 위험한 낙인이나 예속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도덕적인 분개나 도덕적 반성에서 기인하는 수치심이나, 아니면 성취한 목표에 대한 열망의 독려 차원에서의 수치심의 경우엔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차별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수치심에 비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이러한 수치심을 ‘건설적 수치심’ 또는 ‘생산적 수치심’으로 일컫는다. 예컨대 작가이자 활동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 1941. 8. 26~)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과 주거 및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한 탐욕스러운 미국 사회를 향해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한 것과 같은 수치심이 그런 종류의 건설적인 수치심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수치심은 누군가를 낙인찍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수치심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건설적 수치심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에 호소해야 하며, 둘째, 나르시시즘(완벽한 자아 이상에 대한 사랑)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수치심은 자칫하면 비정상에 대한 낙인과 배제로 기능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수치심의 경우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수치심과 혐오가 없는 사회

 

수치심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드려면 어찌해야 할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비정상성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1922. 6. 11~1982. 11. 19)의 사회학적인 논의를 끌어들여 인종, 장애, 계급, 지역, 학벌, 외모, 성별, 성적지향 등에서 모두 완벽한 ‘정상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한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하고 서로 상호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장애인이 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자신의 이런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숨기려하고, 이를 환기시키는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수치심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낙인을 찍고 모욕을 준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인간의 취약함과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주는 사회다. 이 점에서 그녀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과 상호의존성, 그리고 다양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존 롤즈(John Rawls, 1921. 2. 21~2002. 11. 24)식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롤즈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공공복리 같은 목적을 이유로 수단화 되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서로 타인의 종교, 세계관, 생활방식과 같은 ‘포괄적 교설’(comprehensive doctrin)을 존중해줘야 한다.

누군가는 동성결혼이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옳지 않으며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의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성적인 표현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수치스럽고 정숙하지 못한 일이라고 통제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런 포괄적 교설은 개인이 가질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법과 제도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정한 누군가의 세계관이나 종교가 정치나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롤즈는 그런 모욕과 수치심은 자유주의가 보장하고자 하는 시민의 존엄성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social base of self-respect)가 정의로운 사회가 신경써야할 가장 중요한 기본적 사회재(primary social goods)라고 이야기했다.

롤즈의 이런 자유주의는 누스바움의 수치심에 대한 주장과 공명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타인을 그렇게 통제하고 싶어하는 그런 도덕관이나 세계관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열등함을 참지 못하는 원초적 수치심이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서 강화된 경우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처럼 법이나 제도에 수치심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낙인에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상호존중과 존엄성을 구축하는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시 말해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 1939. 3. 22~)의 주장처럼 모욕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수치심과 혐오로부터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지 않을까.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이 직업을 선택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즉 ‘공적 영역’ 진출의 자유와 자격을 논한다. 여성이 (사적 영역인) 가정에 머무는 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그것이[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이] 부정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다수 남성들이 가정 내에서 여성이 집안일에만 전념하고, 가정 내에서 여성의 복종이 유지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남성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지속되어 온 관습이다.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배제는 여성에 대한 억압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해악이다.

인류의 절반이 스스로의 책임 아래 각자가 원하는 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의 투표 행사 권리는 모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기보호의 수단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헌법의 역할은 사람들의 신탁에 있어 필요한 모든 안전장치와 제한으로 선거권을 보호하는 것이며, 법적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누가 어떤 법을 만드는지 알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은 여성이 공적 책임을 맡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공직은 ‘자격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여성이든 공개경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단지 몇몇 여성이라도 그 자리에 대한 자격이 인정될 경우, 그런 가능성을 막는 것을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또한 밀은 여성의 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그는 남성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정신적 차이는 그들의 교육과 상황 차이에 의해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남녀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 역시도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언제나 억압의 상태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본성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성의 본성을 남성의 본성처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놓아둔다면, 그리고 만일 인간 사회의 조건이 남녀에게 공통으로 줄 수 있는 것 외에 어떤 인위적인 성향도 여성에게 가하지 않는다면, 남녀의 성격과 능력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녀의 차이조차 자연적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후천적인)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밀은 만약 여성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하더라도, 약점 있는 남자 또한 많은데, 그들은 [여성과 달리]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에 의해 교정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아 교정될 수 있다면, 여성 역시 남성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완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은 여성의 종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여성 해방을 논했던 최초의 남성 철학자이다. 그 자신은 자신의 성별 때문에 종속의 경험이 없음에도, 그토록 여성 해방을 주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밀은 여성의 종속이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며, 여성이 자유로워지면 인류 전체는 진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성이 자유로워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혜택은 당연히 여성의 사적 행복이다. 인간은 타의에 이끌려 사는 것보다 합리적 자유에 따른 삶을 살 때 행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무제약적인 자유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의무감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양심과 일치하는 사회적 제약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규율하는 자유를 일컫는다. 또한 각자의 능력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발휘하는 것도 행복의 한 원천이다.

나아가 여성이 자유로워진다면 남성의 도덕적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밀이 살았던 당시의 남녀 관계는 오히려 남성들에게 도덕적 해악을 끼친다. 정당한 근거 없는 남성의 여성 지배는 모든 이기적 경향, 자기 숭배, 옳지 못한 자기 선호에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왜냐하면 실정법이 단지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본인보다 우월한 여성들까지도 포함해] 인류 절반보다 우월한 자리에 올라갈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은 이런 믿음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남성의 삶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다른 하나의 성 전체 위에 있다는 느낌과 그들 중 한 여성에 대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권위의식이 합쳐지면,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우연적인 이점을 자랑하는 최악의 종류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이 악덕이 그들과 동등한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도전 받아 억제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위치의 사람들에게 분풀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밀은 여성 해방이 사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근거로 밀은 그 당시의 도덕과 정치에 있어서 원리를 들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정의의 원칙의 적용 범주는 행위자가 아니라, 행동만이 존중 받는 것이다.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가, 즉 출생이 아니라, 공적만이 모든 권력과 권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과 당시의 남녀 관계는 모순적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 두 원칙 중 부정의, 즉 특정 개인이 타인에 대해 지속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봉사하는 원칙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정의의 원칙을 세우려는 교육과 문명의 모든 노력은 허사일 뿐이다. 여성의 억압, 즉 세계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의 반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세계의 손실이며, 여성에게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재능의 양을 늘리는 것은 인간사를 위해 유용할 것이다.

 

  • 『여성의 종속』의 이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밀은 자신의 도덕론의 주체와 대상을 명시적으로 여성에게까지 확장할 것을 주장한 최초의 남성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사회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때문에 이롭다는 공리주의적 관점과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 보장과 제도적 차별을 없앨 것을 강조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같은 인간으로 고려해야 함을 호소한다. 밀 이후에 ‘포스트 페미니즘’ ― 접두사 ‘post’(이후)와 ‘페미니즘’이 결합하여 ‘요즘 시대에 여성차별이 어디 있느냐, 페미니즘은 낡은 유물이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안티 페미니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말 (이와 전혀 다르게, 원래는 포스트 식민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구조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흐름의 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 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공적 영역에의 진출은 확대되었고, 헌법은 여성의 모든 권리를 보장하며, 적어도 제도상으로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은 이제 없다. 기혼 여성들 또한 이제는 배타적인 자신만의 재산을 가질 권리와 결혼 관계를 그만둘 권리를 가지며, 이혼할 때 아이 양육권은 협상으로 분배된다. 어쩌면 밀이 기대한 ‘차별’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밀이 기대한 차별 없는 세상에서 여성의 일생은 그 당시의 여성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김지영 씨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어디에나 갈 수 있도록, 그녀의 성별이 그것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뭔가 하려고 하거나, 어디 가려고 할 때, 이제 ‘맘충’이라는 비난,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라거나 ‘그냥 얌전히 시집이나 가’라는 말,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소리와 마주친다. 차별의 시대는 이제 혐오의 시대가 되어, 여전히 여성의 억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여성 해방에 있어 법 혹은 제도의 역할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자유 실현을 위한 기존 제도에의 도전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기회 보장을 넘어서, 페미니스트들은 사소하고 주관적인 경험으로 생각되어 온 여성의 경험에 ‘성희롱/성폭력’ 등으로 명명하여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제도 내에 기입했고, 고용이나 채용 등에서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는 ‘적극적 조치’를 제도적으로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인간을 동등한 주체로 볼 것과 모든 인간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 밀이 이러한 도전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밀이 『여성의 종속』 서두에서 여성 억압을 유지하는 제도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의 ‘강렬하고 뿌리 깊은 감정’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서, 그는 이러한 도전들의 유효함을 인정하지 않을까?

 

  • 두 달에 걸쳐 두 편으로 연재된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글 잘 읽으셨나요?
  • 다음 달(6월)에는 미셸 푸코에 관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존 스튜어트 밀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 서누)

 

 

서양 근대철학의 이상은 인간에서 시작한다. 그 이상은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출발해, 세계를 향하고, 인간에게로 되돌아온다. 모든 인간의 평등에 대한 사상들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그 ‘인간’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모든 인간에게 사유 재산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영국에서 여성의 재산권이 온전히 보장된 것은 1882년 재산법 통과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자연적 본성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이성 능력이 다르고, 그 차이에 따른 양성의 역할이 다르다고 말했다. 루소에 따르면, 여성은 본성적으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할 만한 정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루소는 남녀의 차이를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루소가 주장한 ‘천부 인권’은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89년 프랑스에서 라파이예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고, 같은 해 남성 시민들에게 비로소 ‘보통 선거’에 가까운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여성들이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려 1944년에 이르러서였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던 19세기의 영국에서 위와 같은 성차별은 제도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은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주로 남성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차이는 역할 분리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가 뚜렷해지면서,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여성은 순결한 존재로 사적 영역을 지키면서 남성을 위안하고 돌보는 역할만을 맡아야 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 20여 년간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성의 고등교육 기회 확장, 여성 노동시장의 증가, 투표권이나 산아제한에 대한 캠페인 등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는 전통적 관점에 대해 여성들이 자각하고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은 ‘남성에의 여성의 종속’은 문명사회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여성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쟁취를 목적으로 <여성의 종속>을 쓴다. 그리고 여성 억압은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강렬하고 뿌리 깊은 감정 외에 정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이념이 확산되어 점차 철폐돼 가던 노예제와, 그에 반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여성 억압을 비교하면서 사회에 탄원한다.

밀에 의하면 자유와 평등의 추구는 선험적 진리이며, 공공의 이익(general good)을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떠한 법적 차별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제도는 이러한 선험적 진리에도 어긋나며,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 예컨대 ‘여성의 남성 지배’나 ‘두 성의 동등한 지배’가 시도된 후에 적극적인 비교를 통해 판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원칙은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는 강자의 법칙 외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문명과 도덕이 발전한 사회에서 강자의 법칙은 인간사회를 규율하는 원리로서 적절하지 않으므로, 이마저도 ‘남성의 여성 지배’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한편 여성은 지배 받아야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논거로 남성의 여성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밀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정말로 ‘그러한 것(본성)’혹은 ‘그러해야 하는 것(당위)’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역사적 사례를 들어 반박한다. 봉건 시대에 귀족의 평민 지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제는 모두가 정당하게 인정하는 일반 시민(당시의 농노)의 정치 참여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고대의 스파르타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신체적 훈련을 받았고, 이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능력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성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도 아니다.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던 당대에는 ‘남성의 여성 지배’에 부당함을 느끼며 직접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쓰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었고, 선거권 운동과 더불어 교육권, 노동권 보장을 획득하려는 정치적 집단들이 조직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지속적인 세뇌와 정치적 운동에 참여했을 때 우려되는 남편의 학대 때문에, 여권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여성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성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여성의 전반적 지위가 내려가느냐 올라가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한 민족 또는 한 시대의 문명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밀은 앞선 논의들을 종합하며 불평등한 권리의 구조는 인간 발전의 전 과정, 즉 역사의 흐름과 인간사회의 진보적 경향, 그리고 미래와 조화롭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와 낡은 과거를 가르는 기준은 인간이 출생조건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능력과 기회를 이용하여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사자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두는 것이 발전을 이루는 사회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법과 제도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현대의 사회 원리에 어긋나는 거의 유일한 사례이며, 현대 세계의 진보적 흐름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본다.

특히 밀은 당대의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전적으로 불(합)리한 제도임을 자세히 밝힌다. 결혼한 여성의 법적 지위를 살펴보면 [노예제와 같은 법적인 신분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의 노예와 다름없다. 아내는 결혼식 단상에서 남편에게 평생의 복종을 맹세하고 나면, 평생을 통해 그것을 지켜야 한다. 여성은 남편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남편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아가 아내는 어떤 것도 소유할 권리가 없다. 상속을 통한 것이든, 노동을 통한 것이든. 여성이 어쩌다 재산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은 결혼과 동시에 사실상 남편의 소유가 된다. 아내의 것은 무엇이든 남편의 것이 됨으로써 ‘법 안에서 한 사람’이 되지만, 그 규정은 반대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만이 자녀에 관한 법적 권리를 갖는다. 여성은 남편의 대리로서가 아니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영화 ‘서프러제트’ 中, 여권 운동에 참여하여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다른 집에 입양 보내는 주인공 모드의 남편. 여기에서 모드는 반대할 권리가 없어 아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남성이 여성을 노예처럼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실제 결혼생활에서 받는 대우와 상관없이 이 제도는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이 제도를 악용할, 사악한 남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제도에 의해서 목격되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 아니며 잠재적 폭압을 합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제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을 염두하고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남성은 결혼하는 순간 남편으로서의 완전한 법적 권력이 부여되고 보장되지만, 남편들 중 그 누구도 결혼 전에 절대권 행사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법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은 관계를 취소할 수 없는데, 이들의 자발적인 결합에서 한 사람이 절대적인 주인이 되는 것은 옳지 못하며, 특히 법이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아이리스 영 (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정의란 무엇이며, 부정의란 무엇일까? 억압당하는 집단은 부정의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의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억압이란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억압당한다는 것일까?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유명한 ‘억압의 다섯 가지 모습들’을 제시한다. 영은 철학에서 논의되어 왔던 기존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정의와 부정의는 분배 문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억압’과 ‘지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억압이란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환경에서 좋은 기술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을 막는 제도적 과정 체계”(p.99.)를 뜻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과 관계된다. 한편 지배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 참여하지 못하게 금제하거나 막는, 또는 행위조건들을 결정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금제하거나 막는 제도적 조건들”(p.99.)을 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결정(self-development)과 연결된다. 영은 이런 억압과 지배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영이 분배 부정의, 즉 재화나 지위에서의 불평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배 문제는 정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분배의 문제가 정의의 전부라고 간주하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 부정의를 낳은 생산조건과 제도적 맥락, 노동 분업의 문제, 의사결정 권력 문제, 문화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분배에만 주목할 경우, 분배와 관련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이라는 문제는 도외시된다.

억압이라는 용어는 우선 전통적으로 독재국가에서 탄압받는 시민들을 일컬을 때 사용되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나 공산국가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영에 따르면 억압은 심지어 발전된 서구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존재하며, 반드시 억압하는 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억압은 제도적인 조건이기에 단순히 사회적 지위나 생산관계로 인해 누군가가 특권을 얻고 누군가는 차별을 당하는 상황 자체도 억압이 된다.

억압이라는 용어가 부정의의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은 주로 신 사회 운동, 즉 사회주의 이후의 다양한 정체성 운동인 페미니즘, 게이/레즈비언 해방운동,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 환경 운동의 약진 덕분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억압을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은 이러한 현실 운동의 주장들에서 출발한다. 주로 이들이 억압을 개선하거나 종식해달라고 요청할 때, 어떤 억압의 양상들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은 이러한 억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서, 이 억압당하는 집단들은 착취, 주변화, 무력화, 문화제국주의, 폭력이라는 억압을 체계적으로 겪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착취(exploitation)’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목적(의도)에 따라서, 그리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 통제 하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즉 “사회집단의 노동 산물이 타 집단에게 이득이 되도록 이전되는 항상적 과정”(pp.123-124)을 일컫는 용어로, 물론 맑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영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 문제를 넘어서 여성의 에너지가 남성으로 이전되는 ‘젠더 착취’로 착취 개념을 확장시킨다. 젠더 착취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는데, 예컨대 여성이 보수를 받지 못하고 가사 노동을 하게 되는 것처럼 물질적 노동의 과실이 남성에게 이전되는 것과, 성애화 된 직종에 종사하거나 직장에서 긴장관계를 누그러뜨리는 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것처럼 여성의 정서적, 성적 에너지가 남성에게 이전되는 것이 있다. 영에 따르면 이런 착취는 단순히 노동 산물이나 에너지에 대한 착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착취하는 집단은 착취를 통해서 부나 이윤뿐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둘째는 ‘주변화(marginalization)’로, 이는 “노동 시스템이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p.131) 것을 일컫는다. 청년 실업이나 노인, 신체 장애인과 정신 장애인, 재취업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주변화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에 해당된다. 주변화를 경험하는 집단은 불안정한 고용과 실업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복지에 의존한다는 비난 등으로 인해 의미 있는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는 억압을 경험한다. 따라서 영은 “어쩌면 주변화야말로 가장 위험한 억압 형태일지도 모른다”(p.132)고 설명한다.

세 번째, ‘무력화(powerlessness)’는 “간접적 의미에서의 권한이나 권력조차도 전혀 가지지 못하는 것”,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명령을 내릴 권리는 거의 갖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 것”(pp.137-138)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사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권력 자체가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력화인 것이다. 예컨대 비전문직 노동자들은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들에 비해 업무에서의 자율성이 거의 없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불가능하며 상급자의 지휘나 감독만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이나 통제력을 가지지 못한다. 공사장의 인부는 전기 기술자, 건축 기술자 등 숙련 노동자에 비해 천시당하거나 권한을 갖지 못한다.

네 번째 억압은 ‘문화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이다. “지배 집단의 경험과 문화를 보편화하고 유일한 규범으로 확립하는 것”(p.142)으로서, 이는 지배 집단이 자신들 역시 특수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관점이나 견해가 보편적인 것인 양 강요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예컨대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이 흑인이나 여성들은 열등하다는 레테르를 붙이거나 동성애자들은 난잡하다는 식으로 표지를 붙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피억압 집단을 향한 지배 집단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보편적인 문화로 제시됨으로써, 피억압 집단의 관점이나 정체성은 배제되고 차별 당하게 된다.

마지막 억압은 ‘폭력(violence)’로서, 영에 따르면 폭력은 단순히 개별 행위자의 행위가 아닌, 사회적인 맥락에서 비롯될 수 있는 체계적인 속성을 가진다. “폭력이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도덕적 잘못이라는 점을 넘어서서 사회 부정의의 한 현상이 되는 것은 폭력이 가지는 체계적 속성, 즉 폭력이 사회적 실천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p.148) 다시 말해, 특정한 제도와 사회적 실천이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폭력 행위를 부추기고 관용하고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사회적 환경(맥락)이 결국 그 폭력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체계적 폭력(systematic violence)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동성애자를 구타하는 행위에는 그러한 행위들을 방조하고 묵인하는 제도적이고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렇게 억압의 다섯 가지 양상을 통해 영은 지금까지의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문화 제국주의나 폭력과 같은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런 억압들은 ‘사회집단’으로서의 약자들에게 가해진다는 특성이 있다. 영은 집단을 단순히 이런저런 속성들로 자의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집합체(aggregate)나, 혹은 가입과 탈퇴가 비교적 자유로운 공식적인 결사체(association)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정의론은 개인이 집단 이전에 있다는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을 전제한다고 비판하면서, 이처럼 개인들의 묶음들로 집단을 바라보는 관점은 피억압 집단이 발생하게 된 사회․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함으로써 억압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의 정의론은 억압당하는 사회집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락시킴으로써 차이를 은폐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집단이 다 억압 받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가톨릭 신도들은 독특한 관행과 상호 친밀성을 가진 특유한 사회집단이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억압받는 집단은 아니다. 영에 따르면 “한 집단이 억압 받는지 여부는 다섯 가지 조건(착취, 주변화, 무력화, 문화제국주의, 폭력) 중 한 가지 조건이나 그 이상의 조건들을 충족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p.120). 예컨대 영의 ‘억압의 다섯 가지 조건’을 고려해 봤을 때, 사회집단으로서의 ‘남성 집단’은 인종, 성적 지향, 계급이나 학벌 등으로 차별받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남성으로 억압을 경험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영은 이처럼 억압에 대한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집단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억압들을 범주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어떤 제도나 정책이 이 억압의 범주들 중 하나를 강화한다면, 그것은 부정의한 것이 된다. 영은 이 기준들을 통해 차이를 가지는 사회집단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제거해 나가는 정의를 주장한다. 동일성을 통해 차이를 없애기 보다는, 차이를 의식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좀 더 정의롭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젠더 중립적인 정책보다는 젠더 의식적인 정책을, 집단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참여 민주주의로서의 집단 대표제(group representation), 소수자 우대 정책 등을 제시한다. 차이를 고려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분배를 넘어서는 쟁점들을 정의에 수용하라는 영의 이런 주장은,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개념을 통해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사회집단 간 차이를 민주주의에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무페와 라클라우의 정의론, 분배/인정의 이원론적인 정의관을 주장하는 프레이저의 정의론, 좋은 삶을 정의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는 역량(capability) 접근법인 누스바움의 정의론과 같은, 분배 정의론이 오히려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을 강화하는 지점을 비판하는 다른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들의 입장과도 공명하는 듯하다. 영은 물론 이런 차이가 본질적이거나 영속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이를 가질 뿐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다. 결국 영의 입장처럼, 추상적인 원칙이나 동질적이라고 가정되는 시민 공중이라는 망상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집단들에게 가해지는 부정의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정의’가 아닐까?

 

(두 편으로 연재된 영에 관한 글 잘 읽으셨나요-? 4월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예속>에 관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아이리스 영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3. <차이의 정치와 정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 – 2006) (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영은 정의와 사회적 차이를 연구한 저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1990년 저작 “정의와 차이의 정치(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에서 지금까지의 정의론을 분배 중심 정의론으로 비판하며 ‘차이의 정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존 롤즈의 “정의론”으로 대변되는 평등 지향적인 자유주의적 정의관이나, 로버트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정의론, 그리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정의관은 주로 파이를 어떻게 분배할지 혹은 플루트는 누가 차지해야 하는지와 같은 부나 재화, 지위 등의 분배 문제에만 관심을 두거나, 철로에서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와 같은 일어날 법 하지 않은 극한상황(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의 도덕추론을 따지는 데에만 관심을 뒀을 뿐, 성소수자가 당하는 억압이나 여성들이 느끼는 차별과 같은 매우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롤즈의 유명한 ‘원초적 입장’이나 ‘무지의 베일’ 같은 가상의 장치들은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정초하기 위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소수자들, 약자들이 느끼는 억압, 차별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과연 ‘정의의 두 원칙’이 억압당하는 자들의 현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영은 이런 정의관을 예리하고 통렬하게, 조목조목 비판한다. 정의/부정의에 대한 문제는 분배가 아닌, ‘지배’나 ‘억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대체 무슨 문제라는 것일까? 영에 따르면, 사회 정의에 대한 사유를 사물, 자원, 소득, 부와 같은 물질적 재화의 할당 또는 사회적 지위, 특히 직업의 분배에만 집중하는 경향은, 분배 문제에 버금가게 중요한 ‘의사결정 권력 및 절차’, ‘노동 분업’, ‘문화’에 대한 문제들을 무시하고 간과하게 한다.

예컨대 시민이나 노동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업이나 국가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결정 과정에서 누군가 배제되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경우, 그런 의사결정 권력 및 절차의 문제는 비록 비-분배적인 것이지만 부정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에 쏠리게 되는 현상과 같이, ‘누가 노동을 할지 그리고 누가 어떤 노동을 하게 되는지’에 관한 노동 분업 역시 분배적인 것을 넘어서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미디어에서 편견에 의해 비하되고 혐오당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분배와는 무관하지만 심각한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

영은 기존의 분배 중심 정의관이 개인주의적이며 이성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롤즈의 정의론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자적이고 불편부당한 개인을 전제하거나 동질적인 공중을 강조하는 식이다. 특히 영은 포스트 구조주의와 페미니즘의 입장을 끌어온다. 기존 정의론들의 기저에는 일종의 근대적 이성 중심주의와 사회존재론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정신을 지닌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감성과 신체의 영역을 여성, 동성애자 등과 같은 ‘타자’에게 속한 것으로 전가시킨다.

이로써 아이리스 영은 ‘동질적 공중’을 전제하는 정의관을 비판하며, 다양한 사회 집단이 경험하는 억압을 인정하는 ‘이질적 공중’을 내세우는 ‘차이의 정치’를 그의 정의론으로 제시한다.

정의에 관해서는 크게 이상적인 정의의 원칙이나 가상적인 계약을 제시하는 초월론적 접근법과 현실의 부정의를 발견하고 제거해 나가는 내재적 방법이 대비된다. 영은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현실을 분석하고 규범적인 진단을 하는 비판 이론 전통, 상호주체성과 신체와 감정을 복권시키는 페미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의 피억압 집단들의 투쟁과 운동에서 얻은 교훈을 결합하여, 영은 다양한 차이를 가지는 피억압 집단들로 이루어진 이질적 공중들의 차이의 정치를 주장한다.

이러한 영의 주장은 실은 20세기 후반에 폭발적으로 급증한 신 사회 운동, 즉 맑스주의 이후의 여성 운동, 게이레즈비언 운동, 흑인 운동 등 현실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들 신 사회 운동은 모두 억압과 부정의에 대한 요구를 주장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단순한 사람들의 무리인 ‘집합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와는 다른,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을 당하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그동안의 정의론은 분배 중심적이었으며, 이와 다르게 부정의의 문제는 지배와 억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이러한 차이의 정치의 도전에 대해 정치철학적으로 과연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 아니, 질문을 달리 해보자면, 부/재화의 보다 공정한 소유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정의의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여성이 돌봄 노동과 성별화 된 노동에 종사되는 노동 분업의 문제, 시민들이 관료화된 행정조직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문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혐오당하거나 구타당하는 문제, 즉 차이의 정치의 도전에 대해 준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울스턴크래프트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와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1.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上)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나는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고 한다. 남자든 여자든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므로, 모든 것이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가부장제에 핍박받는 여성들을 목격하다

 

여권의 옹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759년 영국 런던 근교의 스피털필즈에서 에드워드 울스턴크래프트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사회생활 실패의 울분을 어머니에게 폭력으로 푸는 아버지와 모습과 불행한 부모의 결혼 생활을 목격하면서 남자에게 여성을 종시키는 불합리한 결혼제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함께 모든 법적 책임과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하게 되었기에, 폭력 앞에서 저항할 길이 없었다. 기혼 여성은 채무의 책임은 없었지만 대신 계약서에 서명도 할 수 없었고, 소송도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법률적 효력이 있는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다. 당연히 그 어떤 경제활동도 불가능했고 가정의 모든 경제권만이 아니라,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내의 재산과 함께 자식마저도 모두 법적으로 남편에게 속해 있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러한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 결혼한 동생 일라이저마저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탁하는 여성의 고달픈 처지와 결혼 생활의 비참함을 재확인한다. 그는 일라이저를 탈출시켜 자신이 돌보았고,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이러한 각성은 울스턴크래프트를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면서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삶을 살도록 만든다. 그는 가정교사와 귀족 부인의 비서로 일하고, 이후 1784년 이슬링턴에 여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경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첫 저작인  『여성 교육론』 저술 후 런던에서 머물다 혁명의 와중에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계몽주의 세계를 몸소 체험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은 당시의 통념과 관습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역동적이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파리에서 만난 미국인 길버트 임레이(Gilbert Imlay)와 결혼하지 않은 채 첫딸을 낳는다. 그러나 임레이의 새로운 애인으로 파탄이 난 관계는 울스턴크래프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선원들의 구조로 살아난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영국인 아나키스트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만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고드윈은 평등한 관계를 실험하고 실천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들은 결혼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1788년부터는 런던의 저명한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이 발간하던 당대의 대표적인 급진주의 계열 잡지 『어낼리티컬 리뷰』에 서평, 번역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면서 시작된다. 토머스 페인, 윌리엄 고드윈, 윌리엄 블레이크 등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존슨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동안 첫 소설 『메리』와 『창작 동화집』을 저술한다. 그 중 울스턴크래프트를 유명하게 한 책은 바로  1792년 출간한 『여권의 옹호』이다.

『여권의 옹호』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에 이름을 알린,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를 직접 경험한 후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진전에 관한 역사적·도덕적 견해』를 저술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1796년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의 짧은 체류 동안 쓴 편지』를 펴낸다. 그러나 그의 저술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두 번째 딸을 출산한 뒤, 열흘 후에 불행히도 산욕열로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울스턴크래프트의 딸 역시 세계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는 바로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의 작가 메리 셸리(Merry Shelly)이다.

 

 

  • 이성(reason)에 남녀는 없다

 

1792년  『여권의 옹호』는 단 6주 만에 쓰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혁명 후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1971년 프랑스 제헌국민의회의 대한 보고서를 읽고 탈레랑의 교육 법안에 반대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교육 법안은 공화국의 모든 소년에게 국민교육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교육의 대상에 소녀는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과 권리에 대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진보적이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부르짖던 ‘인간의 권리’라는 말 속에 인간은 오로지 ‘남성’만을 의미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이라 불린 로크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조차도 여성은 자연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존재이기에 남성과는 절대로 평등해질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보적 남성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위 속에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성은 그저 남성의 보호 아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성 지식인들 중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성과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성을 지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그 누구보다 계몽주의 사상사인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만을 인간으로 상정한 계몽주의의 한계를 계몽주의로 맞섰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책을 통해 남성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사회개혁 이론 속에 배제한 여성문제를 논쟁에 포함시키면서,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주장한다.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남성의 보조적 역할로만 보는 기존 사회의 관념에 도전하고 비판한다.

“나는 루소부터 그레고리까지 여성교육과 풍속에 대해 글을 써온 모든 작가들은 분명히 여성을 더 부자연스럽고 나약한 존재, 그래서 사회에 더 무익한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해왔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러 사상가를 비판하고 최초의 엄마인 이브를 나약하게 그린 밀턴을 향해 “유순한 가축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니, 그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그는 여성을 이렇게 수동적인 존재이자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소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여성 비하의 풍조를 정면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며 문제시 한다.

특히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루소의 『에밀』을 “여성의 매력을 찬미하면서도 그들을 억압하는 저 해로운 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열등한 이성을 지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곧 자연법”이라는 루소의 의견에 반대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서술하면서 여자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도 다룬다. 에밀은 시민으로 성장을 고무 받는 반면 소피의 교육은 이후 성인으로 성장할 에밀의 배우자인 이상적 부인을 목표로 한다. 소피는 인내심과 수동성을 특징으로 지니고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적응을 잘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루소는 소피를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심신의 약함을 알고 자연의 목소리를 따르고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생각에 자신을 의탁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처음에 『여권의 옹호』는 익명으로 출간되지만, 폭발적인 반응과 책의 유명세에 응답하며, 울스턴크래프트는 2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하지만 호응만큼이나 반발도 거세 울스턴크래프트를 ‘사색하는 뱀’,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 부르기도 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