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 – 퇴색되어 버린 시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8

퇴색되어 버린 시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모든 것은 퇴색되어 버린다.

모든 것은 동시에 희망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새롭게 변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동시에 좌절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흐른다.

모든 것은 그렇게 순환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잊혀져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모든 것은 그렇게

감각의 무덤 위로

바람이 흩어지고

흙이 흩날리고

감정의 깊이는 무덤덤해져

그렇게 슬퍼지기도 한다.

감정의 세포는

감정의 혈류를 타고

점점 차가워져

깊이는 사라진다.

 

2017,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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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4분의 3 청춘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7

4분의 3 청춘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열린다.

 

끊어지지 않는 고통은

연민을 끊임없이 찾아

감정과 감정의

선과 선의

사이와 사이에

공간을 가르고

점점 점을 찍고

면을 채우고

색을 칠한다.

 

복잡한 선과 선은

내면을 관통하여

지루하게 수식을 만들고

부유하는 날개를 끊고

뚫리는 절벽에는

바람이 날리기도 한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남기기도 하고

하얀 얼굴을 내미는

작은 빛은 굵게, 진하게, 흐리게

드넓은 언덕과 언덕을 만들고

 

흩날리는 먹구름에

선을 깡충 뛰어넘어

하늘의 그려진

가시밭길 뒤늦은 청춘이

아슬아슬 걸린다.

 

낮으로 가는 밤길을 찾아

밤으로 가는 낮 길을 찾아

 

겨울의 문턱이 없는

작은 집은

그렇게 문이 닫힌다.

 

그렇게 시간의 흔적이

하나하나 새겨지고 있다.

 

2017.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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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빈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4

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썩어가는 흰 눈에 바람에 가려진 나무의 흔들림이 있다

산은 말하고 말은 말이 없고 마른 하늘은 새벽별 그리워

밤이 그리워 가슴에 빛이 나고  세상은 온통 까만 닭이 짖는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빗속에 눈이 내린다

 

2017.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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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풍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3

풍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바람에 달이 있어 저 구름인 양 시월도 오고 가는 데

시의 시원한 바람은 잡히지 않은 양을 타고 간다.

흔들리고 떨리는 눈동자에 찬 시가 열리어 가는 데

거울의 아침은 보리밭 알알이 타는 까만 속이 열리고 있다

향기는 시큰하게 찬 밤하늘의 별빛으로 속삭이는 데

바람의 달이 송이송이 빛나고 있다.

 

2017.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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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유리의 성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2

유리의 성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깨어질 듯, 깨어지는 틈새로

작은 꽃이 스스럼없이 피어난다.

한 때는 흙이었고

한 때는 바람이었고

한 때는 길이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유리는

타인의 길에 의지할 때 깨어진다.

스스로 자라는 길에는

작은 씨앗이 보송보송 피어나고

옹기종기 모인 자갈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는다.

나는 곧 타인의 끝에 서있다.

나는 다시 타인의 시작에 서있다.

 

2017.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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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균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하면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유리처럼 단단했던 그 벽이 투명해집니다. 우주를 이해하면서 작은 꽃이 피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시원함도 느낄 수 있는 자갈도 만납니다. 작은 씨앗들이 모이고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은 변화의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두꺼웠던 벽은 흐려지고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는 유리의 성을 깨고 우주를 항해합니다.

섦 – 노래 위에 상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0

노래 위에 상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퍼석퍼석 모래 위로 나는 새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 위에 핀 꽃을 노래하는 슬픔의 변명이 놀라워

그들은 꽃을 멀리하였다.

기억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붉은 입술로 노래를 하고

익지 않은 푸른 사과는 아쉬워 바람에 춤을 춘다.

 

아직 낯선 사과에 겨울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은 너무 낯설고 익지 않아 항상 거칠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나비의 향기가 그립고

아직 익지 않은 밤, 푸르게 익어가는

한 여름 밤의 녹색 바람이 그립다.

부슬부슬 알 수 없는 비를 그리며

갓 구은 듯 한 초승달 한 마리가 반짝반짝

창밖으로 떨어지는 밤을 그리워한다.

그는 수많은 밤을 모아 곧 시장을 열 것이다.

그 추억의 밤을 누군가는 곧 사서 모을 것이다.

 

2017.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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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딱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덜 익고 푸릇한 사과처럼 모든 것이 그 크기만큼 낯설고 그 크기만큼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푸른 사과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는 것은 수많은 밤을 그 안에 담기 때문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많은 밤을 담을 것입니다. 푸르른 여름밤 풀냄새가 하늘에 가득하고 달빛에 반짝이는 빵 냄새가 나는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과 뜨겁고 시원한 여름밤과 꽃이 피는 봄밤도 같이 담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낯익은 가을밤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던져 준 하얀 겨울밤을 차곡차곡 쌓은 사과의 낯설었던 밤은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 됩니다. 상인은 수많은 밤을 팝니다. 작은 샘에 동그랗게 뜬 달을 떠서 누군가의 마음에 담는 것처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밤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는 삶을 때로는 갈망하며 삶은 항상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늘 꽉 찬 듯 부족한 것이 그리움입니다.

섦 – 가보는 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9

가보는 것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유리알처럼 투명해지기를 바라지만

보석처럼 빛나기도 전에 흔들릴 때가 있지만

그런대로 흔들리지 않고 싶지만

기울어가는 해처럼 기울어지지만

바스락거리는 해를 잡아보고도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시간의 상념을 붙잡고 싶지만

그렇게 살아지지만

다시 본래의 세계로 물들어가지만

시작의 습관을 붙잡고 싶지만

잠을 청하는 마을의 언덕위에 부는 바람을 잡아보고 싶지만

가을 빛 고스란히 어깨위에 웃음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그림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로 보내지만

경험하지 못한 공간으로 인도하지만

끝까지 쌓아 가보는 것이다.

 

2017.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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섦 – 가면 쓴 우주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7

가면 쓴 우주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을 때

나의 세상 밖으로 나가서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비운 것처럼 슬퍼하는

가면 쓴 우주인을 벗고

노랑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를 따라 향기를 맡으러 가보리.

그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하늘도

내가 본적 없는 꽃도

내가 느껴 본 적 없는 나무도

내가 그려보지 못한 냄새의

향기로 가득할거야.

 

2017-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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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언제나 틀을 없애려는 그 시도조차 어느 틀에 갇히는 수고로움을 갖게 됩니다. 진정으로 욕망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것처럼 결국에 그것 또한 욕망의 한 형태로 자리합니다. 수 없이 어떤 것에 규정되거나 정해진 사각형, 삼각형의 형태로 갇히길 원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또 다른 형태의 틀로 가기도 합니다. 살아온 환경, 살아온 경험, 살아온 관계는 그 사람을 규정하고 타인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성립하여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슬픔과 마주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타인으로 성립되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나로서 내가 성립하는 나는 무엇인지 그 둘 간의 간극에서 벌어진 틈을 보면 마주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 자체로도 행복할 수 없는 나를 마주하는 나의 현실에서 타인에게서 나라는 존재를 성립하고 자신을 타인에게 성립하려는 자신의 가면 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가본 적이 없는 아주 먼 나라를 동경하고 직접 경험한 적 없는 우주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끝도 없이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걸어갈 수 없는 타인의 길에 가끔은 함께 그 길을 걷고 싶기도 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나의 길을 온전하게 걸어갈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삶이고 싶습니다. 공간을 유유히 흐르는 향기로운 나비처럼, 삶의 이상향을 찾아가는 노랑나비처럼, 삶을 유유히 흘러가는 나비가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로 받아들이는 익살스러운 가면 쓴 우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섦 -빈집 II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6

빈집 II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하얀 눈이 이 세상을 채우고

따뜻한 햇살에 세상이 비워지고

사람의 흔적이 없는 빈집 지붕 위에는

따뜻한 공기가 채워지고

또 다시 빈집은 비워져 있는 공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찬란했던 빛으로 채워 놓고

햇살이 지나간 흔적을 어둠으로 비우고

때로는 혼자만의 어둠으로 상실을 채운다.

나의 곁에 항상 머무를 것 같은 빈집은

채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은 채울 수 있는 것이고

채우지 않아도 여백의 즐거움이 있다.

 

2017-2-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봄의 향기가 올 것 같으면서 느리게 겨울을 붙잡던 계절이 가고 새롭게 시작할 게으른 봄의 열정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공간 속에 필요한 물질을, 그리고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질들을 채우는 것이 자주 습관적으로 반복됩니다. 겨울의 추위 속에 하얀 눈이 세상을 하얗게 채우고 따뜻한 햇살이 찾아와 하얗게 다시 비우고 북적북적 채워져 있는 집과 집 사이 어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빈집은 누군가의 추억, 과거의 흔적, 찬란했던 삶을 채웠다가 어둠의 공기로 닦아내고 먼지로 추억을 닦아내고 새로운 희망을 채워 가기 위해 낯선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비어있는 삶이 즐겁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