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행길이(한철연 회원)
[4]
- 프랑크푸르트, 새로운 세계 그리고 옛 하이델베르크 – ② –
□ 이제 선생님의 첫 번째 주요 저작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연구 주제이자 교수자격 논문의 주제로 삼게 된 데에는 어떤 자극과 동기가 있었나요? 분명히 서독에서 여론조사 연구가 한창 주목받던 시기였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미디어 시스템의 문제도 명확히 드러나 있었죠. 하지만 ‘공론장’이라는 복합적 주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건가요? 혹시 볼프강 아벤드로트(Wolfgang Abendroth)나 아도르노에게서 영향을 받으신 적이 있나요? 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폴리스 이론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이 그저 우연히 여러 영어권 저서들—예를 들어 당시 영미권에서 잘 알려졌던 C. W. 밀스나 존 듀이(C. W. Mills und John Dewey)의 이론서들과 비슷하게 선생님 손에 들어온 책이었나요, 아니면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 이 주제는 제가 스스로 선택해서 발전시킨 겁니다. 그 배경에는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정치적 의견 형성 방식에 대해 제가 실망했기 때문이죠. 질문하신 여러 가지를 역순으로 답변해 보겠습니다. 듀이의 『공중과 그 문제들 The Public and Its Problems』은 1927년에 나왔지만 1996년에야 독일어로 번역됐죠.[1] 저는 그 책을 몰랐습니다. 미드(Mead)와 듀이는 196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의할 때에야 비로소 제 연구에서 의미를 갖게 됐습니다. C. W. 밀스의 유명한 책[2]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언급할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출간 당시 읽었고,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쓰기 시작할 때 폴리스에 대한 아렌트의 열정적인 묘사가 우연히 떠올랐어요. 사실 저는 그 책에서 다른 점에 더 주목했습니다. 바로 아렌트가 생생하게 묘사한 행위 유형의 구성 방식과 초기 허버트 마르쿠제가 후설의 생활세계와 하이데거의 존재분석에서 영감을 받아 1930년대 초 사회민주주의 잡지 『사회 Die Gesellschaft』에 발표했던 비슷한 고민들 사이의 친연성이었죠.
볼프강 아벤드로트는 제가 교수자격논문을 이미 완성한 뒤에야 알게 됐어요. 그때까지 저는 플레스너, 셸스키, 베르크슈트레서, 뮐만 등 여러 교수들에게 심사를 요청했다가 모두 거절당했고 마지막으로 아벤드로트에게 전화를 했죠. 제 친구 스피로스 시미티스가 권해서 한 거였어요. 아벤드로트가 보여준 열린 태도와 호의 덕분에 제 학문적 경력이 실제로 구제될 수 있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아도르노에게는 1959년 여름에 처음 교수자격논문 의사를 밝혔을 때 1장 초고를 보여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건 결국 호르크하이머에게 거절당했고, 아도르노와는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깊이 논의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다만, 제가 [조교를] 사직한 뒤에는 가다머의 도움을 받아 아도르노가 독일연구재단에 교수자격논문 장학금을 신청해주기도 했죠.
말씀하셨다시피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공론장’이라는 개념은 주로 여론 연구와 관련해서만 다뤄졌습니다. 그런데 제 프로젝트는 훨씬 더 야심찼죠.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는 그동안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공론장 개념을 ‘부르주아사회의 범주’ 속에서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공론장’은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형성을 위한 미디어들의 인프라인 동시에 사회적 기반을 이룹니다. 그리고 의회의 의원들이 공식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핵심을 형성하죠. 즉, 사회학적으로 볼 때 ‘주권적’으로 간주되는 ‘인민의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규범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요약하면, 제 연구 주제는 가족이나 경제 체계와는 구별되는 시민사회의 기반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했고, 이로부터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정치적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잊혀졌지만, 듀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정치적 공론장에 대한 사회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발전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 루흐터한트 출판사의 사회학 시리즈가 아니라 정치학 시리즈로 출간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역사적 관점을 통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지닌 규범적 내용은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한 산업사회 조건에서는 오직 사회국가적 민주주의의 형태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는 이 책이 출간되기 몇 년 전 독일 헌법학자협회에서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 볼프강 아벤드로트 사이에 치열하게 논의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1959년에 쓴 『학생과 정치 Student und Politik』 서문의 참고문헌을 펼쳐보면, 제가 교수자격논문에서 근거로 삼은 정치학 및 법이론 문헌의 상당 부분이 이미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 서문에서 ‘정치 참여 개념’에 대해 고민한 부분을 보면, 아데나워 시대의 억압적인 분위기, 특히 연구소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공론장의 이성적 잠재력을 동원해 권위주의적이고 탈나치적인 사회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지적 수준, 즉 승전국들에 의해 부과된 민주 제도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저의 문제의식이 일관되게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비판적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발전된 이런 주제에서는 당연히 칸트, 헤겔, 마르크스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학문적 동기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이것이 바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진짜 동기입니다. 스피로스 시미티스는 저에게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국가법 논쟁들과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문제점들을 익히게 해주었습니다. 또 다른 한 축은 폴 라자스펠트(Paul Lazarsfeld)의 라디오 리서치[1930~40년대 미국에서 라자스펠드가 주도한 라디오 청취자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대중 커뮤니케이션 연구라는 넓은 분야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망명한 독일 출신 학자들은 자신들에게 낯선 미국의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는데—이 점은 아도르노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이들의 폭넓은 문화비평은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공론장에서 여론 형성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을 비춰주었습니다. 저는 책의 참고문헌에서 이처럼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다양한 연구 분야들을 각각 따로 제시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개념을 새로 만들고 정립한 힘(begriffsbildenden Kraft)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까지 사회학에서 통합적으로 정의된 적 없던 ‘공론장 구조’의 여러 복합적 기능들을 역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해냈다는 점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최근에 당신께서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 번 이 주제, 더 구체적으로는 상당 부분 탈규제적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환경 아래 전개된 정치적 공론장의 또 다른 구조적 변화를 다루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이러한 새로운 매체 공론장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참여하면서 정치적 공론장의 새로운 전개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동료 연구자들과 세대 간의 간극을 넘어서 학문적 교류를 함으로써 영감을 받고 배울 준비가 된 대담자라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작은 책자[3]에서 저는 젊은 동료들의 연구에 기생하듯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저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처음 전개했던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에 관한 담론 이론의 규범적 함의를 다시 한 번 자세히 풀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 글은 출판사의 제안으로 묶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수십 년에 걸쳐 발전시켜온 정치 이론의 관점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나타난 정치적 공론장의 변화와 그 위협에 대해 저 스스로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제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저보다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학문 여정에서 아마도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일 이 문제를 다시금 깊이 파고들게 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떤 우려가 선생님을 그렇게 이끄셨는지요?
■ 저는 미국의 공론장이 디지털화와는 무관하게 이미 한동안 붕괴 조짐을 드러내 왔다고 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공적 의사소통이 모든 시민들을 포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의사소통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서, 정당 간의 경쟁과 그들이 공적으로 제시하는 정책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알아보고 이를 명확히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점을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반쯤 실패한 건강보험 개혁을 계기로 몇 달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대안적 사실들(alternative Fakten)’에 의한 공론장의 체계적인 오염 문제는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할 겁니다. 이미 저는 2006년에 의사소통학적 맥락에서 민주적 의지형성이 과연 여전히 인식론적 차원을 갖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바 있습니다.[4] 이러한 흐름은 미국에서 특히 더 심화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미디어 시스템이 다른 곳에 비해 전면적으로 사유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 미디어 환경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제 인상이 틀리지 않다면, 독일의 일간지와 주간지 역시 지난 10년에서 20년 사이 디지털화의 흐름 속에서 분명히 변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문사들은 자신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주목받기를 원하면서 소셜 미디어에 오히려 종속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국 단위의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조차도 ‘일요판 신문’ 스타일을 따르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신문의 지적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정치면과 교양면이 점점 더 흐릿해지고 개성이 사라지는 현상은 잘 알려진 경제적 요인—즉 디지털 경쟁에 따른 광고 수입 급감—에서 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는 그러한 경제적 압박이 없어도 언론 편집 작업 자체가 선제적으로 비전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미디어 소비자들이 충분한 정보 없이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주관적으로 보이는 반응에 맞추려는 언론의 태도는 기이한 획일성을 만들어냅니다. 정치적 공론장의 붕괴는 트럼프 집권기 미국에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유럽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독일, 스페인, 프랑스와 같이 공영 방송 시스템 덕분에 정치적 의사소통은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기능하는 나라들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 다시 선생님의 사유 여정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약 3년의 시간이 철학적으로 특히 자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하고 결실이 있는 만남들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시절을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교수 임용 —저는 이 소식에 폐렴으로 반응했습니다만—은 저를 철학으로 다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테와 저에게 교수 임용은 경제적 불안정성과 직업적 종속 상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상황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교직 자격 시험 합격자(Assessorin)였던 우테는 새로운 상황 덕분에 교사 일을 잠시 미루고 먼저 두 어린 자식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기이하게도 신분 의식이 강하고, 저희 부부가 금방 알게 되었던 것처럼 매우 부르주아적으로 안온한 삶이 이 오래된 대학 도시에 남아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게르트 칼로(Gert Kalow)의 탑에서 열린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적이거나 지역적 한계에 국한되지 않았던 사교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웃한 한트슈스하임에서는 마리 막스(Marie Marcks)와 헬무트 크라우흐(Helmut Krauch) 부부와 가족 같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미처리히 부부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뢰비트(Löwith) 교수와 가다머(Gadamer) 교수 부부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특히 부인이신 케테 가다머(Käte Gadamer) 여사는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에 실린 제 글들 때문에 이미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분도 우리에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출신인 저의 학문적 배경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우리가 젊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대학 환경에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무엇보다도 우테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전공으로 다시 강의를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사회학이나 철학을 가지고 직접 강의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1961년 겨울 학기 가다머의 조언에 따라 마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 논문을 마친 후 늦게 시작하게 되었는데, 저는 박사논문 시절에 공부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셸링에 관한 강의와 사회적 유토피아에 관한 세미나를 개설한다고 공지했습니다. 첫 세미나에서는 참가자 수가 많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알브레히트 벨머를 알게 되었고,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제 지도하에 졸업 시험을 치른 두 명의 학생도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는 만하임에 있던 울리히 외버만(Ulrich Oevermann)도 리케르트(Rickert) 세미나를 위해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제게 강의는 늘 부담스러웠습니다. 이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할 때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강의를 자유롭게 진행하는 데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콜로키움[소양이 높은 학생들과 하는 토론식 수업] 형식이 가장 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콜로키움에서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서 저에게 잘 맞았습니다.
철학 교수로 임용된 것은 저에게 전공의 재정립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이미 정치학 교수자격 논문을 마친 사회학자였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이론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본 대학에서 로타커와 베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던 철학적 지식과 관심사를 다시 일깨워야 했습니다. 그 연결고리로 가다머 교수의 대표작이 막 출간되어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특히 『진리와 방법 Wahrheit und Methode』 2부, 즉 이해를 통한 전통의 습득에 대한 독창적이고 세심한 분석에 집중했으며 일부러 비판적으로 읽었습니다. 가다머 교수는 ‘해석학적 이해’가 정신과학[독일 학문 전통에서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는 인간의 정신, 문화, 역사, 언어 등을 연구하는 학문군을 뜻한다. 우리식으로는 인문학이 여기에 가깝다]의 한 방법론이라는 오해에 대항하여 이 책을 썼지만, 저는 사회과학자의 방법론적 관점에서 독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책의 3부에 나오는 존재론적 사변은 제외하고, 해석학의 통찰을 법학과 신학의 고전적 해석을 실천하는 한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사회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사회과학의 논리(die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라는 철학적 주제를 발견했고, 그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사회학적 지식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 하이델베르크 시절 이러한 방향 설정에 관련된 이론적 결정들과 철학적 영향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철학적 해석학은 제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강의하면서 따랐던 적어도 세 가지 흐름 중 하나였습니다. 이 세 가지 흐름이 결국에는 제가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 보고서로 이어졌습니다.[5] 이 보고서는 실제로는 1967년에야 『철학 동향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으로 출간됐습니다. 1960년에는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뿐만 아니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저작집 1권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철학적 탐구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로 이어지는 전체 저작의 구조를 이미 암시하는 대담한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어니스트 네이글(Ernest Nagel)의 『과학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ce』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카르납과 빈 학파로부터 유래한 논리실증주의를 사회과학에 적용한 저작으로서 신실증주의적 과학 이론을 전개한 것입니다. 당시 서독에서는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가 1934년에 출간된 칼 포퍼(Karl Popper)의 주저 『탐구의 논리 Logik der Forschung』를 수용함으로써 이에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리처드 헤어(Richard Hare),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 윌리엄 올스턴(William Alston), 게오르크 폰 브리히트(Georg von Wright) 등과 함께 영국에서 꽃피운 분석적 언어철학을 아펠과 나는 대륙의 해석학과 분석적 과학이론 사이를 잇는 가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이해의 작업 혹은 해석 작업을 기호로 기록되고 전해지던 것의 해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해석 작업을 통한 이해란 이 기호들을 통해 생각과 느낌을 기록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고 그들의 존재 방식을 경험하면서 과거의 전통과 대화를 나누며 존재론적 만남으로서의 지평 융합을 스스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분석적 과학이론에서 이해 작업이란 인간 행동이나 사회 현상까지도 자연 과학처럼 엄격한 경험주의적 방법으로 해독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분석적 과학이론은 ‘이해 작용’을 헴펠-오펜하임 모델에 기초하여 경험주의적으로 설명했던 것이죠. 이 간략한 개요가 제가 철학으로 돌아온 길을 스케치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칼-오토(아펠)가 두 분석 철학 전통을 습득하는 데, 특히 프래그머티즘의 뿌리로서 퍼스(Peirce)를 ‘발견’하는 데 저보다 앞섰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배경에서 아펠과 저의 논의가 진행되었고, 1960년대 전반기에 우리의 ‘인식 관심(Erkenntnisinteressen)’ 이론이 발전했습니다.
□ 교수의 시각에서 대학을 접하신 건 하이델베르크에서 처음 시작하셨는데요, 이런 경험을 하시면서 학문적 연구 조직에 대해서 어떤 점을 배우셨습니까?
■ 돌이켜보면 양면적인(ambivalentes) 그림이 그려집니다. 당시 하이델베르크는 1960년대 학생 운동을 견뎌내지 못했을 ‘옛 독일’ 대학의 모습을 여전히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학장이 제 가족이 이사왔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전체 교수진 앞에서 제게 통상적인 인사 방문을 하라고 권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때 명함을 미리 만들어두는 센스가 없어서, 결과적으로는 일일이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했죠. 덕분에 1962년 봄과 여름 동안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선배 교수 댁을 방문하면서, 석탄난로를 때는, 책과 원고로 가득한 검소하면서도 품격 있는 옛 독일 교수들의 일상 세계를 아주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 부인들 역시 조용히 그 삶에 동참하고 계셨고요. 유명한 이집트학자나 미술사가 분들과 마주하게 되면, 저희의 ‘현대적인’ 생활 방식이 그분들보다 조금 더 넉넉했던 탓에 약간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가다머 선생님은 조금 더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셨고, 그분께서 저에게 이 전통 깊은 대학의 관행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박사논문 심사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평가가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여도 괜히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다는 식으로요. 총장 선거에는 여전히 학사 가운을 입고 갔고, 누가 후보로 나왔느냐는 제 질문에 교수들은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누가 당선되기로 정해졌는지 옆 사람에게 물어보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제게는 시간제 비서 한 명이 배정되었는데, 오래된 철학 세미나실이 너무 좁아서 그녀가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강당에서 열린 저의 취임 강의[6]는 만원이었습니다만 일본인 관광객들-당시 이미 상당히 많이 독일을 찾아오고 있었죠-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계속 살면서 짧게 남편을 방문하던 슈테른베르거(Sternberger) 부인은 당시에도 이미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중심가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 처럼 이 대학 역시 내부적으로는 정돈된 분위기, 좋은 예절 그리고 약간은 박물관 같은 고풍스러운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때 가다머와 뢰비트(Löwith)라는 두 원로 교수님의 보호 아래 은 비정년 교수로 활동하던 처지였기 때문에 대학 내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는 분위기가 훨씬 거칠었고, 갈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두 곳의 경험을 종합해서, 이후 저는 프리데부르크(Friedeburg), 데닝거(Denninger), 비트휠터(Wiethölter)와 함께 당시 헤센 주 문화부 장관에게 대학 헌법의 ‘민주화’를 위한 개혁안을 제안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이 개혁안은 상당하면서도 양면적인 결과를 낳았을 테지만 새로운 대학법 도입 직후 제가 슈타른베르크(Starnberg)로 옮겼기 때문에 고백하건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7]
□ 가다머, 뢰비트, 미처리히 세 분과 관련해서는 어떤 기억들이 있으신가요?
■ 크라우흐(Krauch)와 칼로(Kalow) 부부 외에도 이 세 분과의 인연이 제게 정말로 중요한 개인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뢰비트 부부와 맺은 우호적이고 사적인 관계는 오직 하이델베르크에서만 유지되었습니다. 가다머 선생님은 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막 시작할 무렵 조교직을 제안해 주시면서 이미 알게 되었고요, 평생에 걸친 서신 왕래가 그 관계가 지속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미처리히 부부와는 세대 차이가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까지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학문적인 관심보다도 우정이 먼저였고, 그 속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습니다. 마르가레테는 제 아내 우테가 정신분석전문가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애써 주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저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슈타른베르크로 이사했을 때, 알렉산더와 마르가레테 두 분 모두 저희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 만남의 빈도는 줄었지만, 우정 자체가 훼손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친밀감에 비해, 뢰비트나 가다머 선생님과의 관계는 여전히 스승이자 저에게 큰 영향을 준 책의 저자분들이라는, 일정한 거리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칼 뢰비트 교수님의 책들을 탐독하며 영향을 받은 건 본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뵈었던 뢰비트 교수님은 이미 젊은 시절의 역사-사회학적이면서 좌파 하이데거주의적 사유에서 거의 벗어나 계셨죠. 고전적 자연 철학으로 돌아가셨기에 이론적으로는 저와는 다소 멀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분이 제 학문적 관심사와 얼마나 가까웠는지는 사실 제가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직전 막스 베버 학술회의[8]를 준비하면서 뢰비트 교수님의 마르부르크 시절 1920년대 논문들을 처음 읽었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교수자격논문[9]에서는 제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논문에서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해 포이어바흐의 독해를 바탕으로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그 저작에 담긴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언어 이해와 ‘속인(Man)’에 대한 분석을 비판하셨더군요.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에 대한 이러한 초기 규명은 제가 가장 최근에 쓴 책에서도 다시 다루었죠.[10] 하지만 마르부르크 시절 뢰비트 교수님에게 제가 배웠던 것에 관해서는 하이델베르크의 뢰비트 교수님과는 더 이상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 주제에 대해 저희가 건드린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예를 들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니체는 이 시대에 더 이상 ‘해로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곧 틀린 것으로 드러나버린– 확신에 찬 주장을 펼치면, 그분은 그저 미소만 지으셨을 뿐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다머 교수님과는 당시에도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가다머 교수님의 해석학이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에 대해 보수적이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주의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을 한다는 점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가다머 교수님이 제 사회 과학의 논리에 대한 문헌 보고서를 읽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 이론에 대한 저의 해석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 보고서가 미국에서의 가다머 수용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교수님도 알고 계셨죠. 가다머 교수님과 저의 논쟁에는 아펠 교수도 참여했는데 이는 책으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11] 이러한 논쟁이 가다며 교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담스럽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깊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5회에서 계속~
[1] J. Dewey, The Public and Its Problems, New York 1927; dt. Ausgabe: Die Öffentlichkeit und ihre Probleme, aus dem Amerikanischen von W.-D. Junghanns, herausgegeben mit einem Nachwort von H.-P. Krüger, Bodenheim 1996.
[2] C. W. Mills, The Power Elite, New York 1956; dt. Ausgaben: Die amerikanische Elite. Gesellschaft und Macht in den Vereinigten Staaten, aus dem Amerikanischen von H. Stern, H. Neunes und B. Engelmann, Hamburg 1962; Die Machtelite, neu übersetzt von S. Lübeck, herausgegeben von B. Wendt, M. Walter und M. B. Klöckner, Frankfurt/M. 2019.
[3] Vgl. Habermas (2022).
[4] J. Habermas, »Hat die Demokratie noch eine epistemische Dimension? Empirische Forschung und normative Theorie«, in: ders., Ach Europa. Kleine Politische Schriften XI, Frankfurt/M. 2008, 138-191. Philosophische Texte. Studienausgabe in fünf Bänden, Frankfurt/M. 2009, Bd. 4: Politische Theorie, 87-139에 재수록.
[5] J. Habermas,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in: Philosophische Rundschau, 별책부록 5, Tübingen 1967. 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 (확장판), Frankfurt/M. 1982, 89-330에 재수록.
[6] J. Habermas, »Hegels Kritik der Französischen Revolution« (Heidelberg대 취임 강의),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Neuwied, Berlin 1963, 89-107. Wieder abgedruckt in: ders., Theorie und Praxis. Sozialphilosophische Studien, Frankfurt/M. 1971, 128-147 확장 신판에 재수록.
[7] Vgl. dazu E. Denninger u. a., »Grundsätze für ein neues Hochschulrecht«; dies., »Ein Beitrag zur Diskussion des Hessischen Hochschulgesetzentwurfs«, in: J. Habermas, Protestbewegung und Hochschulreform, Frankfurt/M. 1969, 202-216; 223-234. Hessischer Kultusminister war von 1959 bis 1969 Ernst Schütte.
[8] Vgl. dazu J. Habermas, »Wertfreiheit und Objektivität. Eine Diskussionsbemerkung« (zum Referat von Talcott Parsons), in: O. Stammer (Hg.), Max Weber und die Soziologie heute (= Kongressband zum Deutschen Soziologentag 1964), Tübingen 1965, 74-81. Habermas (1982), 77-85에 재수록.
[9] K. Löwith, Das Individuum in der Rolle des Mitmenschen. Ein Beitrag zur anthropologischen Grundlegung der ethischen Probleme (Habilitationsschrift von 1928), in: ders., Sämtliche Schriften, herausgegeben von K. Stichweh, Stuttgart 1981.
[10] Vgl. Habermas (2019), Bd. 2, 603-623, hier 613.
[11] Vgl. K.-O. Apel u. a., Hermeneutik und Ideologiekritik, Frankfurt/M.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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