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코너입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고발, 더 나아가 나름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글들을 담아내려 합니다.

지하 대학생의 며칠 [피켓2030]

이번 [피켓2030]에서는 특별히 소설 한편을 올립니다. ‘문과여서 죄송하다’말이 ‘문송’이라는 신조어로 굳어질 정도로 험난한 이 시절에,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감히 작가를 꿈꾸는 한 작가 지망생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는 글인 것 같아 전편을 모두 올립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시겠지만 그래도 읽어보시면 정말 잼납니다.ㅎㅎ


지하 대학생의 며칠

정승우(작가 지망생)

 

바닥까지 왔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어느 정도 지난 지금, 분명 나는 그 때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다. 눈을 뜨는 새로운 아침마다 더 깊은 밑바닥을 맛본다. 이제 좀 그만 일어나자. 침대에서 일어나자는 게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 이정도면 죽어도 되잖아. 하지만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하고 눈을 뜨면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먹고 살아야한다. 일을 해야 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 돼야한다. 빌어먹을. 귀찮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사실 엄청 아프지는 않다. 이것도 내성이 생겨선지, 예전 같았으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에서 마구 뒹굴었을 것이다. 이젠, ‘아프다’ 한 마디 하고 말아버린다. 익숙해진 걸까. 뭐가 뭔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다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다. 대신, 몸에 힘이 너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인간이 힘이 없어도 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치 내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온 몸을 최대한 오므리고 벽에다 붙는다. 벌레라면, 벌레의 마땅한 모습을 해야지. 최하의 인간이 된 것 같다.

해는 모습을 감췄다.

여기, 반 이상 땅으로 들어가 있는 조그만 한 칸의 방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 아니 자신의 속성만을 끊임없이 고수한다. 어두움.

어두움으로 가득한 이 한 편의 지하세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죽음을 데려오려 한다. 여기에 갇힌 나는 이곳 밖의 사람들 보다 더 빨리 죽어간다.

이 어두움의 공간 속에서 내 몸의 열은 슬며시 빠져나가버리고 다시 그 열을 채워줄 해는 이곳에 닿을 수 없기에,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빠져나감들 뿐이다. 열기의 빠져나감, 욕망의 빠져나감, 생명의 빠져나감. 

나는 이 어두운 구석에 눕혀져 이 한마디만을 되풀이한다. “살려주세요.”

어젯밤, 술을 마시고 들어와 노트에 끄적댄 글이다. 뭐, 이런 걸 썼지. 하긴, 반-지하 방에서 2년 정도 살다보면 어둠이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시계가 한시쯤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 방은 아직도 컴컴하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으나, 그것이 왜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곳으로 환풍이 되는 것 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밖에 볼 만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반대쪽 똑같은 반-지하 방의 창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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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일어나 봐라. 뭐 좀 먹자.”

친구 한 녀석이 침대 밑에서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이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은 이렇게 내 방에서 뻗어있다. 불을 켜야지. 녀석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까 내가 벌레 모양을 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최하의 인간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안도감.

“용건아, 좀 일어나라 인마.”

그제야 친구는 눈을 뜨고,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자다 일어난 꼴 그대로 내 방을 나온다. 밖에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고 있다.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 왠지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백반 집에 들어가서 제육볶음 하나와 순두부찌개 하나를 시켜 노나 먹는다. 참 맛있다. 평생의 끼니를 이것으로 충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두 개를 먹는 데에 만천원이라는 돈밖에 들지가 않는다. 정말 평생 동안 이것만 먹는다고 해보자. 돈을 많이 안 벌어도 되겠네.

“야, 어제 나 술 먹고 뭐 안 했냐?” 용건이 매일 하는 질문을 어김없이 한다.

“뭐, 별 거 없었지. 늘 하던 대로.”

“또, 술 먹고 난리쳤어 그럼?”

“뭐, 늘 하는 정도로”

“술 그만 마시자, 이제”

“늘 그래야지.”

이정도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다. 시답잖은 편이지. 용건이 계산을 한다. 일종의, 하룻밤을 내 방에서 묵은 대가다. 나는 장사꾼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기분이 좋다. 용돈을 타 쓰는 이에게 밥 한 끼 값이 굳는다는 건 꽤나 큰 기쁨이다. 아, 세시 수업을 가야하는데. 뭐, 가야지. 우리는 다시 내 방에 들러, 가방만 든 채 나온다. 씻는 거야, 늘 보는 애들이니 이렇게 하루쯤 씻지 않아도 큰 무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 친구들에겐 씻지 않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하니, 더욱더 큰 무리가 없다고 봐야지.

문과대로 가는 길에 용건은 학교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한다. 정말 예쁘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만, 나는 귀찮아 대답을 넘겨버렸다. 처음엔 꼬박 대답을 해주었지만, 똑같은 물음을 계속해대니 나도 별수가 없다. 이번이 몇 번짼지. 여러 해를 봐온 호수인데, 용건은 매일 술을 마시며 호수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매일 호수가 예쁠 수 있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똑같은 것을 보고서 매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아름다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귀찮을 일이 없지. 아. 나도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모든 걸 다 까먹어버렸으면. 그럼 모든 걸 다 아름다워 할 수 있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늘어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주변 모든 것들이 아침 알람처럼 짜증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박쥐는 전혀 나쁜 놈이 아니야. 오히려 나쁜 놈들은, 싸움을 일으킨 놈들이지. 만약에 싸움을 일으킨 놈이 새들의 두목이랑 육지 동물의 두목 그 둘이라면, 그 두 놈이 나쁜 놈들이야. 우선, 싸우면 안 돼. 굳이 왜 싸워. 다투는 건 이 세상에서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두 놈이 싸움을 일으켰으면 그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거지, 왜 모두를 싸우게 만드느냔 말이야. 뭐, 그 둘이 싸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쳐. 그러면 새들, 육지 동물들 안의 어느 무리끼리 서로 시비가 붙었었겠지. 그러니까 싸움이 났을 거 아니야. 이 때도 똑같아. 자기들끼리 싸웠으면 자기네들끼리 싸워야지. 왜 모두 싸움을 하게 해. 일단, 이게 난 맘에 안 들어. 물론, 이건 그냥 푸념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이제 중요한 걸 말해줄게. 들어봐. 박쥐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 보니 육지 동물과 새의 모습 중간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전쟁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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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헛소리 하네 인마.”
“헛소리가 아니고,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박쥐는 폭력을 당했어. 전쟁 중에 박쥐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겠지. ‘너는 어느 편이야?’ 박쥐에게 그 물음은 이런 것과 똑같아. ‘너는 어느 편이 될 거야? 너는 어떤 유(類)가 될 거야? 어서 정해. 그리고 잘 정해야 할 거야. 어떤 유가 되냐에 따라 너는 우리의 적이 될 테니까.’ 박쥐는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거야. 이편, 저편이 아니라 그냥 박쥐로 말이야. 그런데 육지 동물과 새들은 전쟁 중이라는 그 상황에서 서로 이기기 위해 박쥐에게 강요를 한 거지. ‘너는 우리가 되어라.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끝이다.’ 박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열이 나게 이야기를 하고, 토를 하러 갔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또 다시 눈을 떴고, 역시 내 방 침대에 나는 벌레처럼 누워있다. 오늘 있는 일 교시 수업을 한 번 더 빠지면 나는 F를 받게 된다. 그리고 눈을 뜬 지금은 12시 무렵이다. 수업은 이미 끝났을 것이고, 이제 나는 그 수업에서 F를 받겠지. 분명, 어제 용건에게 이 말을 하며 일찍 방에 들어가자고 했었지만, 당연한 결과다. 방은 여전히 컴컴하고, 이 녀석은 역시 새우잠을 자고 있다. 한편으론, 고맙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리지어 다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무리 지어 다니면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다. 그러니 고민이 없어지므로 아니, 고민을 할 시간이 없으므로 인생이 편해진다.
둘째, 무리지어 다니면 알게 된다. 나만 이런 등신이 아니구나. 인생이 편해진다.
제기랄. 그래도 나는 인생이 편하지가 않다. 이놈저놈 몰려다니는 데도 쓸데없는 생각이 끊임이 없다. 그래, 용건이 저렇게 자고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곧, 또다시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 니체가 틀렸다. 그래, 모든 걸 알 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역시 용건이 계산을 했다. 그리곤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켜고, 노래를 들었다. 이 음악 저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딱히 내키는 것은 없다. 소리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것은 내 귀로 들어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리가 음악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단순하게 일정한 음률을 지니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지금 냉장고에서 세어 나오는 소음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나의 집중은 그것에 가있지 않다. 내겐 둘 다 똑같이 윙윙 거릴 뿐이다.
밤이 되자 또다시 친구들의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오늘은 방에서 쉴까,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술이나 마실까. 그리고 나는 역시 술이나 마신다. 술자리에 도착하니 친구 두 놈과 여자애 하나가 있다. 나는 모르는 앤데.
“야, 왜 이렇게 오는 데 오래 걸려.”
“빨리 온 거니까 조용해라.”
“얘는 올해 신입생이야.”
“안녕하세요, 철학과 신입생 신나리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이름 말해줘야지 인마.”
“이제 보지도 못 할 텐데, 됐어. 저는 그냥 4학년이에요.”


일학년 여자애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야 저렇게 어린애를 네가 어떻게 아냐?”
“일학년 수업 안 들은 거 있어서 들으러 갔다가 예뻐서 봐뒀지. 예쁘지 않아?”
“몰라 인마. 진현아, 넌 근데 요즘 뭐하냐?”
“취업준비하지 뭐. 넌 돈 벌 준비 안 해? 그러다 쫄딱 굶는다. 돈을 벌어야 나중에 행복하게 산다. 형님 말씀 들어라.”
“아, 뭐 어떻게 되겠지. 야, 너도 취업준비 하고 있냐?”
“난 휴학해서 아직 3학년이잖아. 내년부터 하던가 해야지.”
재미없는 이야기들. 나는 술이나 마신다. 이 얘기도 별로, 저 얘기도 별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정말 나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였다. 분명 턱을 괴고 소주잔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방인 거지? 핸드폰을 보니 정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어젯밤에 전화한 거네.
“야, 나 어제 잘 들어갔냐?”
“그럼, 아주 잘 들어갔지. 내가 여자 있을 때 너 부르나 봐”
“왜 내가 뭐 했는데?”
“나리가 어제 너 부축해서 데려다준다고, 둘이 같이 간 거 기억 안 나?”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걔가 왜 날 데려다줬는데”
“네 방이랑 같은 방향이라고 뭐 그러더라고. 하여튼, 허튼 짓 했기만 해봐라. 죽일 거다 내가.”
“아 몰라, 헛소리 할 거면 끊어.”
여자에 눈이 먼 놈, 나는 욕을 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뭐 그렇다 해도, 관심도 없는 애에게 내가 뭘 했을까봐 저렇게 유난인 걸까. 그 때, 메시지 하나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어제 같이 자리에 있었던 신나리에요. 속은 괜찮으세요?’
사진 두 개가 첨부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멋있는 말 같아서 찍었어요. 다음에 밥 사줘요, 오빠’
사진을 보니, 내 수첩을 찍은 것이었다.

숨김없음. 계속해서 밖으로 밀고 나가는 힘. 그게 긍정이다.

책임의 문제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때 그 순간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판단된 것들 혹은 예측된 것들의 범위를 벗어난 일들과 연관되어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주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행위들이 발생하게 되는 질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한낱 일종의 자신감이자, 자만이다.

이딴 게 멋있다니. 술에 취해 언젠지도 모르고 썼던 말들이다. 그런데, 얘는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거지? 또 수첩은 허락도 없이 봤네. 기분이 불쾌했다. 한 마디 할까했지만, 됐다. 그 아이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냥 넘긴다.


숙취에 오늘 하루를 멍하게만 보내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뭐, 여긴 언제나 밤이지. 아니, 밤이라기 보단 언제나 어둠이다. 밤은 아름다운 것이잖은가. 내 방은 아름답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밤이 아름다운 건 낮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낮이 값진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 내 방은 그런 반대편이 없다는 거야. 여긴 그냥 어둠밖에 없어. 이것밖에 없는데, 아름답고 아니고 할 게 없는 거지. 내 방은 아름다운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저 어두움, 무(無)다. 갑자기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난다.
‘ex nihilo nihil fit’
‘무에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방 안에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지금 나한테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무다. 어둠 속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어둠이 돼버렸다.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시간은 흐르고 여기 이 땅은 해를 맞이하여 불을 켜지만 우주는 언제나 어둠인 것을, 대체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끝없는 어둠의 자궁 속에 희미한 빛을 집어넣어준 것은 사정을 위해 들어온 남근이었거늘, 나는 이 어둠의 끝을 위해 아니, 한 순간의 짧은 이 어둠의 잊힘을 위해 어떤 천박한 것을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끝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탯줄이 잘리며 한 존재가 드디어 자궁 속을 벗어나듯, 이 목숨을 잘라 이 우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나는 이 어둠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시간을 보니 새벽 7시다. 머리맡에는 수첩이 있고 저런 글이 쓰여 있다. 또, 헛소리나 적어놨구나.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써놓은 메모를 연극 톤으로 읊어본다. 팔을 이렇게 하늘로 들고,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됐다, 집어치우자.
하늘로 뻗었던 팔은 그 상태 그대로다. 잠깐만. 나는 세상의 신비 중 하나를 알고 있다. 누운 상태에서 팔을 하늘로 뻗어 누워 있는 몸과 정확히 수직인 상태로 만든다면, 아무리 팔을 오래 들고 있다고 해도 아프지가 않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니체보다 낫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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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방에서 아침을 대충 챙겨먹으려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 같은 건 취업을 하고 나서도 쓸 수 있으니, 직장 구할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한다. 글 같은 거라. 글을 쓰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이 세계의 내용들이 쓰이지만, 글이 써지는 순간 글은 이 세계와 분리돼 하나의 세계가 된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계와 공통의 언어란 것으로 연결돼 있다. 근데 어떻게, 이 방대한 일을 돈을 벌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단 거지? 물론, 나는 게으르다. 그래, 부지런한 누군가는 다 해내겠지. 핑계를 대는 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왔다. 대개, 부모님 말씀 중엔 틀린 게 없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은 대개 틀리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대개 충고는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나는 세상의 신비를 하나 더 알고 있다. 그건 이것이다.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사실 틀릴 수가 없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지.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바보라도 남의 충고 따위를 따를,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전화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아침을 차려 먹었다. 스팸을 굽고 반숙으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얀 밥. 사람들은 흔히 밥을 먹기 위해 반찬으로 스팸과 계란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스팸과 계란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밥이 필요한 것이다. 스팸의 짠 맛을 흰 쌀이 중화시키며, 그것을 보다 맛나게 한다. 계란 후라이의 경우는 스팸과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다. 밥은 주식이라기 보단 서포터 단연, 최고의 서포터다.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는 거꾸로 된 것들이 꽤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버는 것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밥을 굶는다던가.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임에도, 어느새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던가. 살기 위해 행복하려는 것임에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던가. 아니면, 존재하고 난 뒤 형상이 드러나는 것임에도, 형상이 있고 존재가 등장한, 아 몰라. 생각을 그만둔다.


나는 대충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행정관 앞에서 조그마한 집회가 있다. 최근, 문과계열의 전공을 통폐합 하려는 학교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지만, 최근에 몇 개의 과가 급작스럽게 통폐합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금 대두됐다. 때문에 sns 상에서도 수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이럴 때가 되면 다들 하는 말들이 있다. ‘무엇이 올바른가. 대학교의 올바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다니나. 지금 대학이 행하고 있는 것이 대학의 존재 목적과 상응하는 것인가.’ 내 성격이 모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뭔가 그런 것들이 아니꼽다. 그곳에 가면 아마 진현도 있을 거고 정수도 있겠지.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과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방을 나왔다. 역시 해는 밝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태어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해결 방법은 모든 걸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복잡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창세기 6장7절이 떠오른다. 문제로 가득 찬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신을 보면서, 뭔가 어긋났을 땐 ‘역시 새로 시작하는 게 최고인가’ 하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꼬인 것을 하나하나 풀기보다는 그냥 잘라버리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걸까. 잡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는데, 폐휴지를 주우시는 아저씨가 옆을 지나갔다. 이틀에 한 번은 보는 아저씨다. 누가 보아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 아저씨는 항상 입으로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며 수레를 끄신다. 불쑥, 저 아저씨도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다.
행정관 앞에는 역시 진현과 정수가 있었다. 그들은 제일 앞줄에 서서 열심히 대학의 올바른 나아감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정수 옆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가 있었다. 순간 그 애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마주침은 하고 싶지 않다. 행정관 앞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다. 대단하다. 이 광경이 대단한 것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광경이 대단한 것인가? 확실히 이런 풍경은 낯설다. 8,90년대 대학에서야 이런 모습이 흔했겠지만, 간혹 교수님들이나 어른들이 자랑하듯 그 때의 모습을 툭 내뱉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어떤 하나의 일을 꾸린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니, 이 만큼의 인원이 뱉어내는 어떤 힘 비스무리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지는 역시 모르겠다. 정수가 그 여자애 어깨에 손을 걸치는 모습이 보인다.
“형, 왜 이제 와.”
“야 깜짝이야. 뭐, 이정도면 빨리 온 거 아니냐?” 병환이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놀라 대답했다.
“우린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이러고 있었어.”
“얌마, 지금도 아침이긴 해.”
“아무튼, 빨리 나 따라와. 앞으로 가야지.”
“어, 어.”
병환은 사람으로 가득 차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곳을 손을 비집으며 들어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니, 한 명의 투사 같았다. 굳이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뒤를 따르는 척 하다가 몰래 옆으로 빠져 나왔다. 이곳이 뭔가 답답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저녁쯤이 되면 술을 마시자고 또 연락이 오겠지. 그 때, 사람들 얼굴이나 보던가 해야겠다. 지금은 그냥 방에 다시 들어가 쉬고 싶다.


방에 들어가는 길에, 폐휴지 줍는 아저씨를 또 마주쳤다. 그 아저씨는 역시 허공에다 혼자 중얼거리며 수레를 끌고 있었고 나 혼자서 아저씨를 바라봤다.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함. 몸의 편안함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편안함. 어둠이 좋은 게 하나 있긴 하군. 이 안에 있으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있다 해도 느낄 수가 없지. 불을 켠다는 건 한편으로 위험해.
밤이 됐나보다. 시간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병환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후문으로 와, 형”
“응”
쉽게 대답을 해버렸다. 휴, 나가야지 뭐.
대략 10명쯤 있었다. 모두가 마구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나도 얼른 자리에 앉았고 꽤나 마셨다. 술자리는 곧 2차로, 다시 곧 3차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런 건 쉽사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농담인 것 같다. 농담들이 난무한다. 웃음들이 퍼지고,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멍하니 소주잔을 바라봤다. 순간,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대각선 위치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엔 정수가 딱 달라붙어있다. 나는 또다시 얼른 눈을 돌렸다. 둘은 언제 온 거지.
“네가 뭘 아냐.” 갑자기 과열된 언성이 들렸다.
옆 테이블을 보니, 교성이형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앞으로 살짝 뺐다. 대상은 2학년 남자애였다.
“네가 그 책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냐고. 이해도 못 할 거 읽어서 뭐하게 인마. 때려치워라 그냥.”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읽는 거죠.”
“조금? 읽어서 교수님정도로 이해도 못 할 거면, 쓸모없는 거 아니야?
저 형이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농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농담이 정작 있어야할 때는 대개 자리에 없다. 모두가 교성이형 눈치만 보고 있다. 낮에만 해도 투사가 돼서 학교에 맞서 소리 지르던 인물들인데, 밤이 되면 그 기운들이 빼앗겨 버리는 건지 아니면 해가 그런 기운들을 잠시 줬던 것뿐인지. 모두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작 지금이야말로 투사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만해요, 형. 이해 못 한다고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입을 뗐다.
“뭐라고 인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내 생각엔 형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새끼가.”
형이 애들을 밀치며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물론,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둘 다 그만해 좀.”
“뭘 그만해. 저 새끼가 지금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데.”
“형이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너도 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잠깐의 소란. 오래가진 않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꽤나 어색해졌고 술자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 자리는 교성이형이 계산을 하기로 했었고, 모두들 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각자의 집으로 갔다. 나는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 그 2학년 남자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형을 기다렸다. 내 눈엔 다들 멍청해보였다.
다음날,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자가 와 있었다. 단체 문자 한 통과 몇몇 애들의 문자였다. 오늘도 집회가 있다며, 얼른 나오라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투사들이 되신 건가. 올바름을 물으며 행정관 앞에서 열심히 싸움을 하겠지. 역시,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단, 집합이 대단한 걸까?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지? 처음부터 그곳에 대단한 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계속 누워있다. 옆으로 눕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쿵. 순간, 어떤 추락이 느껴졌다. 실제로 내 몸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몸은 단지 옆으로 돌려졌을 뿐. 하지만, 난 분명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내 밑바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이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겠지. 이 추락은 언제 끝이 날까. 잠깐만. 내 추락은 언제 시작 된 거지? 그리고 왜? 그래. 내가 궁금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왜 추락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이 물음의 끝엔 내 추락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추락하는가.
추락은 부정이다. 내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나는 더욱 더 나를 부정한다. 또한, 내가 나를 부정할수록 나는 더욱 더 아래로 떨어진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4학년. 곧 졸업. 취업준비는 해놓지 않았고. 이전에 글을 써본 적도 없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천재도 아니고. 겨우, 서울권 대학에 들어와 다녔다. 고등학교 때를 생각해보자. 물론, 대학에 가기 위해 꽤나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을 새가면서 한 적도 있고. 아니, 나는 더 밤을 샜어야 해. 중학교 때를 보자. 그 때, 왜 그렇게 나는 멍청한 생활들을 했을까. 퍽 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 앉아,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하며 이상한 이야기나 해댔다. 학원은 빠지기 일쑤였고. 초등학교 때는? 기억도 안 나네. 그냥 놀았다. 왜 그땐, 미래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누군간 분명 그 때부터 훗날을 생각했겠지. 그럼 유치원 때는? 아기 때는? 시발.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거지. 내가 추락하게 된 건 내 잘못이다.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 나는 늘 부족했다. 그렇다면, 내 추락의 위기는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 위기가 지금 드러난 것뿐이다. 홍수야 일어나라. 아니, 잠깐만. 아기 때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었을까. 어떻게 내가 갓난아기시절을 보내왔기에 내가 이렇게밖에 성장하지 못한 건가. 홍수야 일어나라.
이 위대한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쳇.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배나 채워야지. 나는 제육볶음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역시 해가 높이 떠있다. 골목을 나오니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빵조각을 뜯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니, 내 추락이 끝나는 지점이 된다면,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어있을까? 고개를 절며 나는 얼른 밥집으로 들어갔다. 제육볶음을 주문하는데, 아차. 큰 일 났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지? 핸드폰으로 확인을 해보니 2천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육볶음은 빵 쪼가리 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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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아직 채 술이 다 깨지도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마실 날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근데, 사주냐?’ 답장을 보냈다.
‘이 등신이. 과방으로 와.’ 답장이 왔다.
등신이라, 날 정확히 봤군. 나는 픽 웃었다.
용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과방으로 출발했다. 해가 참 쨍쨍했다. 반-지하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그 정도의 해는 꽤나 부담스럽다. 해가 아무리 쨍쨍하면 뭐하리. 결국 나의 방으로는 조금도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을. 갑자기 궁금했다. 우리에겐 밝음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어두움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둠이 본래 깔려 있고, 빛이 들어와 그곳을 밝히는 걸까? 아니면 빛이 본래 깔려 있고, 어둠이 들어와 그곳을 덮어버리는 걸까?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병환과 마주쳤다.
“어, 형! 어디 가는 거야. 어젠 잘 들어갔어?”
“그렇지 뭐. 지금 용건이나 만나려고. 너는 어디 가냐?”
“형 또 술 마시게? 정신 좀 차려. 허구한 날 술만 마셔 무슨. 난 행정관 앞에 가는 중이지. 형도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나랑 같이 거기나 가자. 좋은 일 좀 해.”
“너나 많이 해라. 난 간다.”
병환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갈 곳 있는 이의 걸음은 저렇게나 빠르다. 저 친구의 눈엔 난 항상 쓸데없는 것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기분이 조금 언짢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과방에 들어서니,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거리고 있었고, 몇몇 고학번들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르고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과방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도 있었다. 나는 조금 불편했다. 용건은 날더러 과방으로 오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본인이 없었다. 아직 오는 중인가보다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아는 애들도 없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또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어제 술집에서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옆에 여자애에게 귓속말을 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기분이 불쾌해져 과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용건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제 넌 왜 안 왔냐?” 나는 삼겹살을 구으며 용건에게 물었다.
“그런 술자리 불편하다고 했잖아. 가면, 정치얘기만 아주 주구장창 해대.”
“안 그래도, 거기서 술 마시다가 교성이형이랑 싸웠다.”
“들었어. 애들이 안 좋게 말하던데.”
“누구를?”
“너.”
“아, 등신들.”
“됐어, 술이나 마셔 인마.”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삼겹살을 한 점 먹는다. 결코, 소주를 마시기 전에 삼겹살을 먹지 않으며, 소주를 먹고 삼겹살을 먹어도 결코 한 점 이상을 먹지 않는다. 그게 딱 나에게 적절하다. 그런데, 용건 이 놈도 나와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우리 둘이서 술을 마시면 안주가 많이 남는다. 한참 전에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은 이미 새까맣다. 우리는 고기가 그렇게 타도록 내버려둔다. 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우리 입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주의 양은 정해져 있고 삼겹살은 그에 비해 넘친다.
정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용건에게 말하고 우리가 있는 곳을 정수에게 말해줬다. 정수는 금방 왔다.
“너 어제 왜 그랬어?”
“오자마자 그 소리냐.”
“어제 좀 심했어, 너.”
“심하긴 뭘 심해.”
“이번엔 둘이 싸우기라도 하려고? 정수야 술이나 받아.”
정수는 고기를 왜 태우고 있냐고 우리를 나무라며, 고기를 더 시켰다. 배가 고팠던 건지, 정수는 잘도 먹었다. 술병이 생각보다 늘어났다.
“너 근데 나리한테는 왜 그랬어?”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리한테 다 들었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둘이 나 모르는 소리 할래?”
“나도 무슨 소린지 몰라.”
“네가 나리한테 밥 사준다고 그러면서 껄떡댔다며.”
“걔가 그랬어?”

“어쨌든, 일들 잘 책임져서 풀어. 사람들이 너 못난 놈이란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는 딱히 나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참,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우리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끝까지 술을 마셨고, 그 고깃집에서 나왔을 땐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 용건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용건이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해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호수를 따라 잠시 걸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네. 웬일일까. 어쩌면, 용건이 호수를 늘 예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이 호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호수지만, 오늘 아름답다.


나는 목이 말라 도중에 잠에서 깼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물은 다 마시고 없었다. 아. 나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편의점은 내 방 바로 근처에 있다. 새벽 공기가 꽤 차다. 나는 물을 사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살겠다. 이 때 마시는 물만한 물이 없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가로등 근처에 계셨다. 가로등은 환했다. 그 아저씨는 가로등 쪽으로 걸어왔고, 이젠 가로등을 등진 채로 서 있다. 술이 덜 깨선지, 가로등의 불빛이 그 아저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예전에 봤던 예수 그림이 떠올랐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다. ‘저 분에게는 지금의 당신 삶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시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가로등 앞에 선 폐휴지 아저씨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는 뭘까. 추락의 끝에 신이 된 건가? 나는 뭘까? ‘못난 놈.’ 오늘 내가 들은 내 모습이다. 나는 왜 못난 놈인 거지? 내가 그렇게 불릴만한 일을 했어? 내가 한 거라곤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온 연락을 무시한 것, 술에 취해서 이상한 소릴 하는 형에게 대꾸한 것 그리고 현재를 잊고 미래만 바라는 정의로, 뭉쳐 있는 곳에 가는 걸 거부한 것뿐인데. 대체 내가 왜 못난 놈인 거지. 나는 내가 닥친 상황에서 마땅히 할 만한 것을 했을 뿐인 걸.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연락이 오면 무조건 대꾸를 하고, 형이 말하면 무조건 가만히 있어야 하며 함성이 있는 곳엔 무조건 가야하는 건가? 무조건?
그 때 나는 알았다. 추락은 없었구나.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도 그리고 갓난아기 시절에도, 그 어떤 때에도 잘못 행한 것 없이 충만했다. 나는 추락하지 않았구나. 아니지, 이렇게 말해야 할 거야. ‘나는 나를 추락시킨 적이 없었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내비치는 어떤 유형, 틀.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가해지는 비난과 부정. 그것들이 나를 추락하는 인간으로 꾸며낸 것뿐이구나.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의무가 없는 곳에 굳이 부정이 있을 필요가 없지.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렇구나. 이게 내 모습일 뿐이구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나다. 당신들에게 말해야지.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미래의 나는 만날 수 없어요.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현재의 나입니다.’
나는 수첩을 찾아 펜을 들었다. 그리곤 이내 잠들었다.

나는 홍수를 일으켰다.

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진섭(자유기고가)

“민중은 개·돼지로 보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주지하듯,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47) 공무원의 발언입니다. 2016년 7월 8일 저녁 한 신문사의 보도로 알려진 이 발언은 민중의 뒤통수를 제대로 내리쳤고 이튿날 내내 비난과 조롱, 풍자를 낳으며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99%의 개·돼지가 주는 세금으로 밥 처먹고 사는 놈이…”, “당장 파면해라”, “고위직 인사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할 듯”, “기득권의 비밀을 누설하다니 승진은 물 건너갔군”, “교육부 폐지하고 농림축산식품부만 있으면 되겠다. 개·돼지만 있는 나라에 교육부가 웬 말?” 등등 인터넷에는 그야말로 격분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빗발쳤습니다. 진부하지만 밤길 조심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출근길에는 각자 죽창이라도 들고 나올 기세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다릅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라도 해주시겠다면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38분마다 1명꼴로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나라 민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어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2014년 궁핍한 생활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이른바 ‘송파 세모녀’를 기억하는 가슴이 따뜻한 공무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국가도, 시장도, 이웃 주민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에서 “먹고 살게 해주겠다”며 민중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노인빈곤율 49.8%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 폐지 줍는 175만 명의 노인들 또한 갸륵하게 여기실 줄 아는 공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우며 한 달에 고작 10만~20만 원을 손에 쥐는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언임을 저희 개·돼지들은 잘 알고 있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2년 전(2014년)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영혼들의 억울함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말에서 개·돼지가 당하는 죽음보다 못한 죽음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집니다. 적어도 상위 1%에 계신 고관대작들께서 잡아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저희 민중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신 발언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돼지로 봐 주신다면 적어도 저희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분명할 테니까요.

이번엔 2015년 여름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메르스(MERS) 바이러스가 곳곳에서 출몰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니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메르스 사태처럼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나아가, 구제역(口蹄疫)이 창궐해도 개·돼지 같은 저희 민중을 도살 처분하지 않으실 테죠. 지금까지는 구제역만 돌면 저희가 인간 취급을 받느라 진짜 개·돼지들이 땅 속에 매몰되었잖아요. 이제 모두 개·돼지가 되었으니 개·돼지 같은 저희들이 아프면 무상으로 치료도 해주시면서 먹고 살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경상남도 도지사께서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이유도 당신의 발언을 접하니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위한 병원 한 개보다는 개·돼지를 위한 수많은 공공병원을 짓기 위함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이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고령화에서 벗어나고자 무려 152조 원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내 코가 석 자’에서 비롯한 현상이거든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꿈도 못 꾸던 차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제 개·돼지처럼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그동안 못 낳은 새끼도 많이 낳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벌써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나향욱 정책기획관님 덕분에 처음으로 희망이란 걸 가져봅니다. 모돈(母豚)이라고 하여 평생 애만 낳다가 죽는 어미돼지처럼 살 수 있다는 꿈이라도 가져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도 못 낳고 일찍 죽는 불상사가 인간 세상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앞으론 저희 개·돼지 같은 민중의 출생률이 급격히 높아져 국익(國益)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저희 개·돼지는 인간처럼 자연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봤자 20년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발언은 바로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한 새로운 국가 브랜드인 ‘Creative Korea’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발상이라고 확신 또 확신합니다.

이젠 젊은이들 보고 중동으로 가라는 말도 안 나오겠죠. 네 발 달린 짐승이 무슨 수로 중동까지 간단 말입니까. 중동가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간파하시어 개·돼지로 보고 이 땅에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해당 발언이 보도되고 회자된 시점이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제16차 ‘기본소득’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던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7.7.~7.9. 서강대학교). 기본소득(Basic Income)은 노동 여부, 소득·자산의 액수와 무관하게 무조건 일정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 누구든 기본적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이번 행사 기간에 맞춰 나온 당신의 발언은 기본소득의 정신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자동화 및 인공지능 등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대체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옛 말씀이 설득력을 잃고 있는 요즘,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면 된다”는 말씀은 ‘노동과 소득의 단절’이라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기 발령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서울시·성남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인 복지 정책에 제동을 걸며 지방 재정에 목줄을 걸고 있는 중앙정부의 ‘기본수탈’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기본소득’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임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결혼수당과 출산수당 지급 등의 공약을 내 건 허경영 후보 못지않게 민생(民生)을 최우선으로 삼는, 아니 견생(犬生)과 돈생(豚生)을 택한 매력적인 당신에게 제 한 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하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오늘은 간만에 네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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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는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건국대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영역본을 함께 읽었던 학생이 기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정승우(건국대 철학과)

우리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과 과학 등의 발달로 인간의 권리는 계속해서 신장되고, 절대적인 재화의 양은 증가했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세탁기가 없는 삶보다 세탁기가 있는 삶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례하게 우리의 삶의 행복 또한 늘어나고 있는가? 나의 견해로, 행복의 절대량은 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시대보다 삶의 여건이 무수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결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외부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왜 내적인 환경은 변화 혹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스펙타클의 사회” 1장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 서문은 기호가 기호화된 대상을, 복사본이 원본을 그리고 외양이 본질을 대체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또한 그와 같다. 아주 단순화 시켜, 이미지로 말할 수 있는 스펙타클이 개인의 삶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 1테제(“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에서부터 34테제(“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에 이르기까지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이 만연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1테제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다. 사용가치는 사라져버리고 교환가치만이 중시된다. 모든 것에 값이 측정되어 본래 목적에 대한 고려는 사라지고 오직 그 값의 규모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이다. 사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권리의 신장과 함께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한 자본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특히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로 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는데, 자본을 생산할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가치로 내세우며 자본가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더 소유하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의 특수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계급의 나뉨을 정당화한다.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having’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가치가 자본으로 매겨지는 사회 속에서, 인정 혹은 사회적 선망은 자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개인이 적응하는 순간, 소외가 시작된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의 과정에서 또한 소외되며,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자본가를 선망하게 된다. 즉, 자본을 선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삶과 멀어진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분리, 자기 소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개인들의 그와 같은 소외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발전한다.

이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하여 스펙타클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이전의 자본이 하던 기능, 목적 등은 스펙타클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이 축적되어 스펙타클이 된다. 이제 ‘having’ 소유는 ‘appearing’ 보여져야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 혹은 교환가치로 둘러 쌓여있었듯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둘러 쌓여있다. 쉽게 말해,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지화된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히 자본을 쫓지 않고, 자본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쫓는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가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가상은 동시에 물질적으로 환원된 실재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라고해서 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듯, 스펙타클은 현실과 분리돼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존재한다. ‘벤츠’를 얻는 것이 벤츠를 사는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펙타클의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스펙타클은 그러한 개인의 삶을 그자체로 통합해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합되었듯이,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통합은 진정한 개인의 삶의 통합이 아니라 찢긴 채 분리된 삶을 단순히 획일적으로 뭉쳐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스펙타클에 의해 통합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삶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 자체가 기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이 단지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까지 이르는 자립적인 존재였듯이, 스펙타클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고 자립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스펙타클과 개인의 삶이 전도되는 것이다.

스펙타클에 의해 개인의 삶이 잠식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부정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 시각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개인의 실현은 ‘appearing’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직 시각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스펙타클을 통해서만 드러내진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일종의 지도이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서 지도를 봐야하듯이,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개인들은 행위 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통해야한다. 스펙타클에 의한 삶의 잠식 혹은 전도는 스펙타클이 더 이상 허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벤츠’가 없이는 더 이상 벤츠는 벤츠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펙타클이 개인의 실제 삶의 부정이라는 것 혹은 개인의 삶을 점점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펙타클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스펙타클 자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서 스펙타클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합리적 도구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과이자 프로젝트이다. 자본은 소비를 통해 더욱 축적된다. 스펙타클은 바로 그 소비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자본가는 스펙타클을 만들어서 개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때의 욕망은 자본가에 의해 투여된 거짓 욕망이다. 개인의 실제 삶이 부정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경험되는 삶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는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로 봤을 때,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는 자본가에 의해 장치된 것이므로 이는 곧 개인의 삶이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은 이제 소멸돼버린다. 그렇게, 개인은 점점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종국에는 개인의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스펙타클은 권력 자체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주의 안에서 드러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틈 혹은 모든 문제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벌려 놓는다. 스펙타클은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고 노동자는 더욱 더 스펙타클에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군림하며, 스펙타클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가는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실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에 갇혀진 의미를 초월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 일반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 이미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칸트는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을 ‘인식의 틀’을 통해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것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접함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본래 자립적이며 지배적이다. 최초로 받아들인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떠올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만들어진 그 후로는 독립적으로 사고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보고 A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A라는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에 계속해서 개입한다.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통합되어 칸트 식의 ‘인식의 틀’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미지들이 있다. 중세의 ‘신’, 근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대의 ‘스펙타클’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인식의 틀’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주체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체성이란 것이 가능한가? 토마스 쿤은 과학 이론은 패러다임 속에 존재하며, 그 패러다임은 모든 과학적 탐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면, 그것으로 패러다임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패러다임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인간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뿌연 연기 속에서 소외된 상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 통합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러한 통합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외부의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외로움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면서 잠시 그 외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타인이 떠나면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타인을 찾는다. 여기서 타인이 바로 통합 이미지 곧, 스펙타클이다. 스스로 존재함에 대한 불완전함 혹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외부로부터 만족을 바라는 태도, 인간의 수동성이 통합 이미지, 스펙타클의 기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자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며 그것에 지배받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다.

다시, 자본가는 스펙타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가조차 스펙타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들만큼은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소수의 자본가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스펙타클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자본의 이미지화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단지 노동자에 비해 자본을 많이 가졌다는 것,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결핍을 채워줄 외적인 존재, 즉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발전 혹은 삶의 조건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 무관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불완전성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하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스펙타클’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의 사회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펙타클은 매우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곧, 불완전한 인간의 소유욕과 비례한다.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많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는 이미지 또한 인간의 결핍,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having’ 소유였다. 단, 그 소유의 대상이 달라진 것일 뿐.

과연 우리는 스펙타클 혹은 통합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핍이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느냐, 실존 자체만으로 우리 삶을 만족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인간 권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삶의 만족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 혹은 만족은 외부에서 채울 수 없다. 집단 형성을 통한 혁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조차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모든 것을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만족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소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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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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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

이진섭(자유기고가)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오빠께.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서울에 사는 초등학생이에요.
얼마 전 숙제를 하다가 오빠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스크린도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2016. 6. 2.  당신의 희생을 슬퍼하는 평범한 초등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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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하다가 당한 참담한 일입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2016. 5. 30. 국회의원 안철수 트위터 중.

 

놀랍게도, 같은 나라에 사는 두 사람이 같은 사고를 접한 후 보인 반응이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넘나들며 생명을 돌보는 의사였던 안철수가 지금은 의료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나를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명과 안녕을 다루는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된 것을 더 큰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린다.

묻고 싶다. 우리 사회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에 왜 초등학생이 미안해하고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반면 공공의 업무를 보살펴야 하는, 나아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공직자는 왜 저 모양인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안철수 의원이 말이 맞긴 맞다.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 흙수저로 태어나면 금수저 밑에 들어가서 위험한 일도 척척 해내야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다. 비행기 안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논리에 맞게 땅콩 서빙도 눈치껏 잘 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집에서 태어나면 위험수당을 받기 위해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해외 근무를 자진해야 하며, 제대 후에는 고객님께 따끈따끈한 치킨을 전해드리기 위해 오토바이 위에서 목숨 걸고 총알 배달을 해야 한다. 질환이나 장애가 있어 더 이상 식당 일도 못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집에서 번개탄 피워놓고 마지막 숨을 쉬어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면 도로 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지 않아도 되며 자살을 시도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맞는 말을 한 안씨가 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이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안씨가 비난을 받는, 또 받아야 하는 이유는 공직자로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 컵라면 먹을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한 업무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지점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라고 했으면 그 다음엔 “이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야 합니다 또는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씨는 뭐라고 했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선택했을 거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금번과 같은 사고로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걸 승인한다는 내용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헐~, 생활을 위해 일하면서 그 일 때문에 생활 이전에 생존부터 위협받는 아이러니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공직자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의 말은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또는 ‘세상은 그냥 요지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건 무력한 세인들 간에나 하는 말이지, 정치인이 세인들에게 할 말은 아니다. 오히려 세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저러한 냉소와 조롱의 정서가 사그라지도록 하는 역할이 정치이고 정치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그토록 위험한 일들을 덜 위험하도록 만들어 가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 공직자다. 그러기에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며 밥도 거를 정도로 바쁘고 위험한 일을 자연발생적인 전제로 두고 이는 그 개인이 선택한 것이니 그 결과도 고스란히 개인이 안고 가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인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야말로 당연하다.(미주*) 고대 그리스 시절보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난 정도로 끝난 것이지 제대로라면 이런 자들은 공동체에서 추방해야 맞다(잠재적 대권 주자? 어이가 없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추구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원리로 조직된 사회의 그물망에 숨통이 조인 한 생명을 떠나보낸 일반 시민들조차 이번 사고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의 참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공직자가 저 따위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걸 공직자 이전에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의 태도 또한 기가 막히다. 새누리당은 금번 구의역 사고를 끌어들여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번 구의역 사고는 파견이 아닌 ‘원청-하청’ 구조와 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지 파견법이 개정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파견법 개정안이 친(親)기업 입장에서 파견 노동자 양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파견 역시 전형적인 간접 고용 방식으로 ‘원청-하청’ 방식 이상으로 심각한 ‘책임지지 않음’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구의역 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어불성설이며 기만 중의 기만이다. 도대체 이 나라 정치인들은 제 정신인가? 유가족의 통곡과 분노, 초등학생의 눈물이 그대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제 정신이라면 구의역 사고 이후 파견법 등을 비롯해 노동 환경 전반을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 는, 그야말로 <세상은 요지경>의 가사를 되풀이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공직자의 업무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요지경>은 대중이 정치인들을 향해 겨누는 조롱의 화살이지, 정치인이 대중에게 감히 내뱉을 말이 아니다. 정치인은 그저 말없이 조용히 행동하면 된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어린 소녀의 얼굴에 이와 같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말이다.

평범한 초등학생의 두 볼에 흐른 눈물이 이번만은 아닐 터.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인 공직자를 둔 우리 사회에 눈물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있으며 그 눈물이 마른 곳은 있을까. 눈물은 세월호 침몰과 메르스 방역 실패에 따른 무고한 죽음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동안(아니 훨씬 이전부터) 독성 가습기 살균제는 확인된 통계로만 266명의 숨통을 끊어 놓았고, 울산-거제 벨트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해고를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남역에서는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의 칼부림에 손쓸 틈도 없이 비명에 갔고, 구의역에서는 한 청년이 자신의 몸과 시민의 안전을 맞바꾸며 기득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결국 그는 온 몸으로 피를 쏟았고 그의 어머니는 온 몸으로 눈물을 토했다. 매일 전쟁을 치러내야 하는 이 삶과 죽음의 매트릭스를 아비규환 외에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은 지옥불반도 헬조선이 맞다. 사회가 그야말로 작살이 나고 있는 와중에도 이 나라 최고의 공직자라는 사람은 해외로 나가는 것도 모자라 그 곳에서 빼놓지 않고 K-Pop 공연을 관람한다. 심지어 손을 흔들며 환한 표정을 짓는 여유를 보인다.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의 환한 미소 앞에 평범한 초등학생의 궂긴 표정이 겹쳐 보인다.

“나와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오빠가 이것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어요”

그렇다. 초등학생조차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속한 이 사회가 나에게 850원 어치 컵라면조차 용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곳이 돈벌이 논리에 신음하는 자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박한 헬조선임을. 나아가 ‘지금 초등학생인 나도 몇 년 후엔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근거 있는 상상과 우려를 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2016년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키워가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언제 짓밟힐지 모르는 불안한 꿈이기에 꿈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져 간다. 애초부터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삶이 결국엔 공허하다는 걸 깨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였을까,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미 꿈꿀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서울의 많은 초등학생들은 과도한 학업 부담으로 밤 12시까지 공부한다는 내용의 인터뷰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더라.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이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한 저 편지의 주인공 역시 밤늦게 꿈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서울의 초등학생은 아닐지 문득 궁금해진다.

초등학생도 글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사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공직자가 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충격을 넘어 이들이 공직자 중에서도 소위 ‘별 중의 별’이라는 사실이 공포를 더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누가 더 밝은 빛을 발하는지 경쟁하느라 바쁘다. 지상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하늘의 별’이 되도록 방치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늘 같은 별’이 되어 시민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사이 지상에선 누군가는 끊임없이 죽어 나가고 지하에 묻힌다. 이들은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하늘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라고 연료를 지원하기도 한다. 이러니 우리 사회의 공직자들이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공직자는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일단 멈춰 서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부조리와 몰상식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합당한 조치를 해야 할 의무와 권한이 있다. 공직자는 수시로 지상으로 내려와서 필요하다면 지하까지 강림하시어 멈추지 않고 달리는 지하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저 평범한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아래 편지 내용에 잘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이 슬퍼하고 같이 아파할 수밖에 없어 미안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인 나는 단지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안철수 너는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을 넘어 공직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새누리당의 파견법 개정 시도를 꼭 본 것 마냥 평범한 초등학생의 깊은 우려와 따끔한 충고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초등학생과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이 살고 있는 사실상 두 개의 나라인 이곳에서 만 2살짜리 아이가 초등학생으로 살아갈 미래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엄마와 할머니 손을 잡고 이비인후과 문을 열고 들어온 만 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좁은 공간에서 잘도 뛰어 논다. 좋다고 할머니 품에도 안긴다. 아프긴 해도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다. 나에게도 관심을 보인다. 문득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명을 달리한 19살 청년의 어릴 적 모습을 상상한다. 그 청년도 저렇게 즐거워하며 또 귀여움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엄마랑 할머니랑 살을 부대끼며. 유가족이 된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어머니 볼에 뽀뽀를 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내온, 끈끈했던 그래서 단단해보였던 20년의 시간은 단 한 순간에 파편화되었다. 자본의 냉정한 논리 하에 그동안의 뜨거웠던 살점들은 무참히 뜯겨져 나갔다. 그 곳에 더 이상 사람의 살‘정(情)’과 ‘오감(五感)’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차가운 공구들과 아직 뜯지 않은 컵라면, 나무젓가락, 그리고 라면 국물을 떠먹기 위한 스테인리스 숟가락만이 쓸쓸히 그리고 온전히 돌아왔다. 나를 보고 웃는 그 2살짜리 아이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여전히 반복되는 어이없는 언니/오빠/형/누나들의 죽음을 보며 위와 같은 편지를 계속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도 밤 12시에 학원 숙제를 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저 편지를 쓴 서울의 평범한 초등학생은 여전히 평범한 젊은이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2살 아이든 초등학생이든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사람 살만한 사회여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를 위해 공직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상의 여유가 있든 없든 이미 우리의 죽음은 그것과 무관하다. 여유가 있으면 있어서 죽고, 없으면 없어서 죽는다. 컵라면도 먹을 여유 없이 죽어라 일만 하다 실제로 죽기도 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여유를 보이다 죽음을 당하기도 하며 좋은 공기를 마시려다 되레 살균제를 흡입하여 죽기도 한다. 그러니 안씨가 흙수저의 처지를 모르고 금수저만 옹호한다고 비난하지는 말자. 안씨는 금수저 흙수저를 떠나 자연인(사람)에겐 관심 없다. 오직 법인(자본)의 성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부인하지만) 노조가 생기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의 입 구멍과 콧구멍은 닫혀도 회사 문은 절대로 닫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안씨다. 구의역 사고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에는 연대하지 못하는 무력한 노동을 강요한 폭압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트윗글에서도 보듯 안씨는 이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이러한 소수의 탐욕과 이를 뒷받침하는 다수의 희생이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4·13 총선 직후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로 등장한 안철수 정당(국민의당)이 적극적으로 처리하려 한 법안 중의 하나가 새누리당이 만든 파견법 개정안임을 아시는지. 노동하는 사람이 다 죽어 나가면 결국 회사도 문 닫지 않겠냐고 물어보면 그땐 입 구멍 콧구멍 걱정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가는 로봇으로 대체하면 그만이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오감에 공감하지 못하고 저 따위 트윗글이나 날리는 평범하지 않은 정치인에게 우리가 표를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눈꼽만큼도 없다. 정치인이 할 일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몸과 살을 가진 존재로서 ‘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실업/빈곤/질병/재난 등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오는 인생 리스크를 줄여주는 일이다. 이를 ‘사회안전망’이라고 하는데 ‘회사안전망’에만 주력해 온 안씨가 들어나 봤을지…

하긴 자신의 인생 리스크를 관리할 줄도 모르고 정치판에 뛰어든 철없는 안씨에게 무슨 기대를 하랴. 장차 정치판에서 죽게 될 안씨에게 미리 조문을 해본다.

“안씨, 당신도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주*)  2014년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스크린도어 장애 신고 건수는 1만 2천여 건으로, 일 평균 30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 강북 49개 지하철 역사의 스크린도어 전체를 4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수리 시작 전에 다른 곳으로의 출동 명령이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수리하지 못할 경우 해당 직원이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다고 하니 2인 1조는 언감생심. 혼자 작업을 해도 항상 초과근무를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부족했다는데 이런 업무를 개인이 원해서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공구 가방 들고 이 역사 저 역사로 불려 다니며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850원 짜리 컵라면 하나 겨우 먹는 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정치인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그런 자가 정치인으로서 더 큰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며 그 정치인이 바이러스인지 백신인지도 분간 못하는 유권자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우리 사회의 치명적 결함이다. 안씨는 공직자로서 사회 전반적으로 병리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요즘 ‘사회적 백신’을 만들어 보급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 스스로 바이러스가 되어 가고 있다. 아니, 애초부터 백신의 탈을 쓴 치명적인 바이러스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