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5)

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상호작용과 개념

1)

헤겔은 개념론에 들어가기 전에 ‘개념 일반에 관해’라는 글을 붙인다. 아마 개념론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서문은 약 19쪽에 달하니 1부 객관 논리학 앞에 붙인 부분(‘Vorrede’ 4쪽, ‘Einleitung’ 15쪽, ‘Anfang der Logik’ 8쪽)에 못지않게 길다. 여기서 헤겔이 다루는 핵심적인 주제는 곧 논리학과 관련하여 칸트 선험철학의 의미와 그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의 출발점은 논리학(헤겔적인 의미에서 주관 논리학을 의미한다)의 출발점인 ‘개념’(개념에 관한 헤겔의 독특한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앞으로 헤겔적인 개념에 관해서는 ‘개념’를 사용하고자 한다)의 출현이다. 다른 학문의 경우 그 출발점, 원리는 단순히 전제되며, 이 전제는 이웃하는 학문에서 빌어오거나 더 높은 차원의 학문에 의존한다. 그러나 논리학은 자기의 원리를 다른 어디에서도 끌어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서 끌어내야 하니, 논리학은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리학의 원리는 마치 유클리트 기하학에서 공리처럼 전적으로 직접 주어지는 것으로 전제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헤겔은 오히려 논리학의 원리는 모든 존재자 속에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이 구체적 존재를 규정하고 정립하니, 논리학의 근거는 거꾸로 모든 존재자로부터 가장 일반적으로 끌어낸 것이라고 한다. 이 도출의 과정이 논리학의 근거가 생성하는 과정이며, 즉 근거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자기를 정립하는 운동, 즉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운동과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 즉 개별적 존재에서 일반적 원리로 나가는 운동은 서로 대립적이면서 서로 순환한다. 이 순환은 이미 정신현상학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직접적인 것은 매개된 것으로 전환하며 거꾸로 매개된 것은 직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개념의 생성은 이런 직접적인 생성의 운동을 통해 서술된다. 그러나 개념의 생성이 지닌 의미는 모름지기 생성이 항상 그렇듯이 이행하는 것이 자기의 근거로 반성한다는 것이며 우선 앞선 것이 이행해 들어간 나중의 것이 처음에는 타자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처음의 것이 지닌 진리를 이룬다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1-12)

“추상적으로 직접적인 것은 사실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인 한에서 오히려 매개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직접적인 것이 진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그 토대는 이 매개된 것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논리학 2부, GW12, 11)

이런 관점에서 주관 논리학의 원리는 앞에서 객관 논리학에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다시 절대적 관계로, 여기서 실체관계, 인과 관계, 상호작용을 거쳐 생성된다고 한다. 헤겔은 이 과정을 다시 한번 간략하게 서술한다.

2)

헤겔을 따라 이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자면, 이렇다. 즉 실체관계는 서로 무차별한 우발적 존재의 관계였다면, 인과 관계는 개체가 각자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그 결과 인과 관계의 연쇄가 출현하고 마침내 상호 인과 관계 즉 상호작용이 출현한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원인(능동적 실체)과 결과(수동적 실체)는 상호 교체된다. 원인의 작용에 의해 결과는 자신의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가 되면서 원인이 된다. 이 결과를 원인으로 해서 원인도 전제된 직접성을 벗어나 정립된 존재 즉 원인이 된다.

“능동적 실체는 작용을 통해 즉 자기가 자기를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정립하는 가운데 즉 그와 동시에 이런 전제된 타자 존재 즉 수동적 실체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 원인이나 근원적 실체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거꾸로 이렇게 작용이 가해짐으로써 정립된 것은 정립된 것으로,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며 따라서 수동적 실체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 계시되고 원인은 자기 자신의 타자 속에서 전적으로 다만 자기와 합일할 뿐이다.”(논리학 2부, GW12, 13)

이 두 가지 상호적 인과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이 관계를 상호작용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원인은 역시 자기를 결과 속에 정립하면서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존재자’(일반성)가 된다. 반면 결과는 근원적인 원인에 대립하는 것이니 이미 부정적인 존재인데, 원인에 의해 부정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 즉 가상으로 되니,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성)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 측면 즉 타자가 자기에 동일하게 관계하는 것이거나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각자 자기 자신의 반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동일성의 관계와 부정성의 관계는 동일한 것이다. 실체는 이제 자기의 대립물 속에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이것이 두 가지로 정립된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이룬다.”(논리학 2부, GW12, 13)

이런 상호작용을 매개로 해서 가능성으로서 절대자가 실제성으로 실체가 되며, 이런 매개는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항상적으로 일어나니 절대자의 실현은 필연적인 것이다. 이처럼 필연적으로 실현된 절대자가 곧 실체다.

이렇게 절대자가 실현된 실체는 필연적 실현인 한에서 무조건적인 것이니 곧 자동적인 것[automatische]으로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한 것이다. 이런 실체가 곧 ‘개념’으로 규정된다. 이 ‘개념’이 곧 앞으로 전개될 개념론의 출발점 곧 원리가 된다.

3)

앞에서 말했듯이 개념은 상호작용하는 관계를 매개로 한다. 이 관계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양자의 통일성으로서 가정된 절대자가 양자로 분화되며, 이런 분화가 다시 통일되어서 양자의 통일적인 관계 즉 ‘실체’가 출현한다.

이런 통일성으로 가정된 절대자 즉 목적으로서 절대자가 곧 개념이니, 개념은 이미 이런 관계 속에 그리고 이 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여기서 목적으로서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고(개념이 부정된 것, 정립된 것) 이 분화된 개체의 상호 관계를 통해(부정된 것의 부정, 정립된 것의 정립됨) 실현되니 이는 과정은 하나의 이중 부정 운동으로 서술할 수 있다.

우선 출발점에 있는 개념은 장차 분화될 가능성을 지니지만, 아직은 단순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의 실현은 이중적인 부정성(부정의 부정)을 통해 회복되는 자기 관계(일반자)이다. 거꾸로 매개가 되는 개체는 개념이 부정된 것이지만, 타자와 관계하면서 다시 이것이 부정되는 것이니, 자기 부정성 또는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일반자나 개별자는 각자 속에 이미 타자가 들어 있다. 즉 일반자의 자기 관계 속에는 자기 부정성으로서 개별자가 들어 있으며, 개별자의 자기 부정성 속에는 이미 일반자의 자기 관계가 들어 있다

“개념 규정성의 각각은 총체적인 것이며, 각자는 타자의 규정을 자기 내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총체적인 것은 전적으로 다만 하나이지만, 동시에 이와 같은 통일성은 자기 자신을 이러한 이원적인 것이라는 자유로운 가상으로 분화한다. 이런 이원화는 개별자와 일반자로 구별되는 가운데 완전한 대립으로 나타나지만, 이 대립은 그에 못지않게 가상이기에 하나가 파악되고 언표되면 그런 가운데 다른 것도 직접 파악되고 언표된다.”(논리학 2부, GW12, 16)

4)

헤겔에서 이 ‘개념’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주 특정한 것이니 그 출발점은 실체이다. 즉 생명체의 집단(암수 결합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개념의 단초,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본래 개념은 주관이 출현하면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주관을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히 자기 동일성에 머무르는 것, 데카르트적 에고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 주관은 순수한 자기의식 즉 칸트가 말한 통각에 해당하는 것이니, 이 자기의식은 처음에 순수하게 자기 관계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하여 대립하는 가운데 다시 양자를 통일하여 자기 관계하는 통일에 이른다. 이런 전개 방식은 개념의 전개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니, 이 주관이야말로 개념의 구체적인 예가 된다.

“개념은 그 자체 자유로운 현존에 이른 한에서는 주관이나 순수 자기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주관은 사실 개념이며 즉 특정한 개념이다. 그러나 주관은 순수한 개념 자체이며 개념으로서 현존하기에 이른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앞에서 개념의 단초인 실체 즉 암수 관계에서는 아직 상호작용은 불완전하다. 암수 관계에서 개념적 실체는 아직 자동적인 우연성에 머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암수 관계는 각자 개별적인 생명체이면서 성적 관계에서만 상호작용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실체는 아직 개체에 내면적으로 머무르는 잠재적인 개념이다.

반면, 주관에 이르게 되면, 개체의 사회적 상호작용적 관계가 출현하며 상호작용은 전면적으로 일어나며 그 관계는 완전히 자유로운 것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호작용으로 성립하는 실체는 개체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사회가 된다. 이런 주관에 이르러서 본격적인 개념이며 동시에 실현된 개념이다.

“주관은 순수한 자기 관계하는 통일성이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주관이 모든 규정과 내용을 제거한 채 한계 없는 자기 동일성의 자유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은 일반성이며 통일이어서 다만 추상작용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부정적 태도를 통해 자기와 통일을 이루고 이를 통해 모든 규정된 것을 자기 내에 해소한 채로 포함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17)

5)

이와 같은 ‘개념’은 논리적인 범주 가운데 하나이다. 12개 판단 형식은 각기 독자적인 논리적 범주를 이루는데, 헤겔에서 ‘개념’은 이런 논리적 범주가 마침내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과로 등장하는 것이다. 즉 ‘실체’ 범주에서 단초적으로 ‘개념’이 출현하며 본래적인 ‘개념’은 비로소 ‘주체’에 이르러 완성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개념’은 이런 최종적 논리적 범주로서 ‘개념’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은 헤겔의 ‘개념’이 그 앞에서 다룬 논리적 범주 ‘질’이나 ‘양’ ‘본질’ 등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논의이다. 즉 ‘개념’의 구체적 내용에 관한 논의다.

그런데 논리적 범주 중의 하나로서 ‘개념’은 헤겔의 다른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통 규정을 지닌다. 헤겔에서 모든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은 형식상 내용을 자기로부터 규정한다.

그 때문에 헤겔은 앞에서 제기한 ‘개념’에 관한 논의에서 이제 방향을 돌려, 판단 형식으로서 논리적 범주가 지닌 근본적인 특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그 자신의 주관 논리학이 기존의 형식적 논리학과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그를 따라 우리도 이제 논리적 범주의 형식적 의미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헤겔이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 곧 칸트이므로 칸트의 기여와 한계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지금 다루는 개념에 관한 일반론의 핵심 주제이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논리적 범주와 일반적 개념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지 않는다. 소의 개념이나 꽃의 개념은 추상적인 일반성을 의미한다. 이 추상적 일반성이 구체적 내용과 무관하고 외면적인 형식이듯이, 마찬가지로 논리적 형식 즉 판단 형식이란 구체적인 다양한 판단 내용과 무관하다.

기존 논리학에서는 판단의 형식 즉 논리적 범주는 질과 양, 긍정과 부정을 교차한 네 가지 판단 형식밖에 없다. 판단 형식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긍정과 부정, 개별과 일반이며, 판단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여기서 부정이니 양화니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논리적 추론 형식즉 대당관계라는 직접적 추론 형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판단 형식 즉 논리적 범주를 확장해서 12개의 판단 형식이나 범주를 제시한다.

칸트가 이렇게 판단 형식을 확장한 것은 단순히 종류를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이른바 선험철학의 원리를 통해 이런 판단 형식이 지닌 의미 자체를 형식 논리학과 근본적으로 구별해 새롭게 부여했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객관 논리학에서 주관 논리학으로

1)

헤겔 논리학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헤겔 논리학 1부(존재론, 본질론)는 1813년 부활절 직전 발간되었다. 논리학 2부(개념론)이 발간된 것은 1816년 10월 초였다. 2부가 발간되는데 무려 3년 이상 지체된 것이다.

그는 개념론 앞에 ‘일러두기[Vorbericht]’(1816년 7월 21일 작성)에서 지연된 책임이 “그가 맡은 직책이나 다른 개인적 사정으로 산만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다”(논리학 2부, GW12, 6)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는 뉴른베르크에서 김나지움 교장을 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의 번잡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책임이라면 1부 논리학 작성 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이 일러두기에서 개념론을 작성하는데 1부를 작성하는 데서 부딪힌 것과는 다른 어려움을 호소했는데, 그런 어려움이 그의 길을 더디게 했던 것이 아닐까?

헤겔의 논리학 1부는 여기에 논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논리학 2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확립된 논리학의 주요 내용(판단론, 추리론)이 들어 있으니, 논리학이라 불러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1부를 쓸 때는 “발판이 되거나 재료를 주고 전개할 길잡이를 보장할 만한”(논리학 2부, GW12, 5) 이전 철학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황무지에 아무런 설비도 없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어려움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 새로운 것을 짓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2부 개념론에 이르면, 이전 논리학의 “완전히 완성되고 심지어 석화된 재료가” 마치 장애물처럼 깔려 길을 막고 있어서 게다가 저마다 이전 시대에는 진리라는 영예를 부여받은 것이니 “이를 유동화해서 그와 같은 죽은 소재에 생동적인 개념의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고 한다.(논리학 2부, GW12, 5)

2)

헤겔이 부딪힌 어려움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어떻든 논리학 3부 개념론은 한 사년 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진짜 문제는 이런 논리학이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내용을 담은 부분 다음에 배치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몇 가지 단서를 좇아가 보면, 어느 정도 그 이유가 짐작은 된다. 헤겔은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로부터 학생들을 위한 논리학 교과서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데, 이게 그가 논리학을 작성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이다. 이에 대해 답장하면서(1808년 5월 20일) 자기의 철학적 견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한다.

이 답장에서 그는 기존 논리학에 관해서 강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그것은 그런 방식으로 지속할 수 없는 것”(논리학 2부, GW12, 323)이라고 평가하며 기존 논리학의 내용이라면 “두 장[오늘날의 A4용지가 아니라 당시 작성의 기준이 된 전지를 의미할 것이다]이면 충분히 서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상의 내용이라면 “심리적으로 느끼는 가련함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4)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미 그는 1801/2 예나 시대에서부터 기존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개편하려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807년 발간된 그의 예나 시대 체계화 기획 2권을 보면, 이런 시도가 눈에 띈다. 이미 여기서 그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시켜 사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1. 논리학, 2. 형이상학, 3. 자연철학을 다루는데, 그 가운데 논리학은 1) 단순 관계(질, 양, 무한성)와 2) [절대적] 관계로 나누어지며, 그중 [절대적] 관계는 다시 ① 존재[실체] 관계와 ② 사유 관계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존재 관계는 논리학[GW11]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마지막 ‘절대적 관계’와 일치하며, 사유 관계가 앞으로 다룰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1편의 판단, 추리론과 일치한다.

형이상학은 사유 법칙(동일율이나 배중율, 모순율)과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을 다루고 있다. 헤겔은 사유 법칙은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 본질론 1편에서 다루고 전체로서 세계나 영혼은 2부 주관 논리학 개념론 2편에서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다룬다.

이상의 편제를 보면, 대 논리학에서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에 속하는 부분이 예나 시대에서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걸쳐 흩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를 통해 한편으로 이미 헤겔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연결해서 사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나중에 형이상학에 가까운 객관 논리학과 기존 논리학에 가까운 주관 논리학이라는 구별이 확립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자기의 철학에 기초한 새로운 논리학을 발간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이미 니트함머의 권고를 받은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시도의 정체는 1813년 논리학 1부가 발간된 이후 등장한 출판사 광고문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광고문에 따르자면, 새로운 논리학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예리함을 끝까지 함께 하며”

② “이를 자기의식으로 성장한 시대 정신에 적합한 형태로 고양하고”

③ “진정하게 해명된 형이상학을 통해 일찍이 너무 성급하게 추방된 신비를 철학에 다시 부여하고”

④ “철학에 본래적인 원리와 고유한 방법을 확신하게 하며”

⑤ “이성에 그 오래된 영원한 권리인 진리에 대한 자립적인 생산자라는 지위를 새로이 바치는 것”(논리학 2부, GW12, 327)

펠릭스마이너 판 논리학(GW12)의 편집자에 따르자면, 이 광고문의 작성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을 보면 헤겔 논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헤겔 논리학을 나오자 말자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헤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을까 한다. 아니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정말 이렇게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위의 광고문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광고문의 구절은 헤겔 논리학의 핵심을 짚어내고 있는데, 한 가지가 눈에 뜨인다. 즉 자기의식 시대에 적합한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의식 시대란 다름 아닌 칸트가 제시한 선험철학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후진적 독일에 살았던 헤겔로서는 그 시대 원리인 선험철학의 원리가 하나의 시대 정신으로 논리학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혁명이 달성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그는 이 시대를 ‘탄생과 이행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4)

칸트의 원리에 따르면 사유 범주는 직관의 다양을 구성하여 객관적으로 통일한다. 사유 범주는 곧 존재의 본질을 의미하니 그것이 곧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유 범주를 다루는 논리학은 곧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형이상학이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읽어보면 판단과 주어, 술어 등의 구조가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서 ‘실체’란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양상’이란 곧 술어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미 나중에 칸트에서 드러나는 “논리학이 곧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의 단초가 발견된다고 하겠다.

헤겔은 그런 점에서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이라고 보고 위의 광고문에서 보듯이 이를 계승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논리학이 형식화하면서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예리함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비판적 의식이 담겨 있다.

논리학이 형식화함으로써 논리학은 순수한 필연성의 체계가 되었지만, 대신 공허한 형식적 동어반복에 그치며 그것은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채, 흔히 사유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진리의 인식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마치 공허한 사유의 논리처럼 보이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논리학이 다시 진리의 생산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함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즉 논리적 구조 속에서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를 엿보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그의 시대 철학이 수학에서 방법론을 빌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수는 양적인 것이므로, 양적인 것에서나 적용되지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생명이나 정신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면서 철학은 고유한 방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철학의 고유한 방법론은 무엇인가, 앞에서 헤겔이 호소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생각해 볼 때, 그의 형이상학의 방법론은 바로 논리학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학이 궁극적으로 판단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헤겔의 방법론은 곧 판단 즉 문장의 구조로부터 끌어낸 것이니, 어쩌면 헤겔이야말로 언어 철학의 시조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5)

논리학이 형이상학 즉 존재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굳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이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논리학이 전개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헤겔에서 논리학은 추상적 존재가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생성 또는 근거로의 복귀 과정이다.

논리학에서 처음 출발점인 현존은 가장 개별적인 것이고 가장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인 근거가 되는 논리적 범주가 아직 등장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존재론이며 이 현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파악하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그런데 1부 객관 논리학의 마지막에 일반적인 실체가 상호작용을 거쳐 주관적인 개념이 되면서 이제 논리적 범주가 우리 눈앞에 직접 등장한다. 그 결과 여기서부터는 순수한 논리학적 내용이 다루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객관 논리학 대신 주관 논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각해 보면 ‘객관 논리학’에서 강조점은 논리학보다는 ‘객관’ 즉 존재론에 있으며, ‘주관 논리학’에서는 강조점이 곧 ‘논리학 자체’에 주어진다.

이상을 통해 헤겔이 객관 논리학과 주관 논리학으로 구분하고, 주관 논리학에 와서야 비로소 기존의 논리학에서 다룬 내용을 즉 판단과 추론을 다루게 된 이유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5-상호작용과 개념론으로의 이행

1)

특정한 인과성은 실재적인 인과성이다. 이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 외에 다른 독자적인 내용을 가짐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양방향으로 무한히 진행하는 것으로 된다. 이런 무한 진행이 자기로 되돌아오면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그 자신의 결과를 원인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상호 작용의 출발점은 서로 엇갈리는 관계다. 즉 한편에서는 원인은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원인으로 되어 결과를 자기의 결과로 정립한다. 다른 한편 원인은 자기의 기체를 전제로 하는데, 이 기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결과가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기서 원인과 그 기체의 측면은 서로 외면적이며 마찬가지로 결과에서 결과의 측면과 원인이 되는 측면은 서로 다르다. 여기서 원인이 결과가 되는 인과적 관계가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인과 관계가 서로 엇갈린다. 두 측면은 상호적이지만,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할 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두 생산자의 교환을 생각해 보자. 하나의 생산자는 곡식을 만들어 팔고 다른 생산자는 옷을 만들어 판다. 곡식 생산자는 곡식을 옷 생산자에게 팔지만, 옷 생산자에게서 옷을 구입한다. 이 두 관계는 상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서로 엇갈리는 관계일 뿐이다. 즉 두 측면은 서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인과 관계는 상호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차례로 연결하여 인과의 연쇄로 삼더라도 무방하다.

“원인은 이제 작용한다. 왜냐하면, 원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위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인은 자신에 전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자신을 타자로[기체] 즉 수동적 실체로 삼아서 자신에 작용한다. 따라서 원인은 수동적 실체가 지닌 타자성[기체]을 지양하여 이 수동적 실체[기체] 속에서 자기 자신[원인 실체]으로 되돌아온다.”(논리학, GW11, 405)

“두 번째로 원인은 이와 동일한 것을 규정한다. 원인은 이 수동적 실체의 타자성[원인에 대한 타자성]을 지양하는 것 또는 자기 내 복귀를 하나의 규정성으로 정립한다. 이 정립된 것은 동시에 원인이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므로 우선 그 원인의 결과이다. 거꾸로 이 원인은 전제하는 것인 한, 자기 자신을 자기의 타자[기체]로 규정하므로 결과를 다른 실체 즉 수동적 실체 속에 정립한다.”(논리학, GW11, 405)

즉 원인이 원인이 되려면 전제된 기체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결과는 원인에 의해 정립되면서(규정성을 지니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기체 즉 원인의 타자성을 지양한다는 것이다.

2)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상호작용적 인과 관계로 넘어가는 매개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가 있다. 작용과 반작용은 여전히 외적인 반성에 머무르는 것인데,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를 보는 관점을 전도한 것이다.

즉 원인의 측면에 서서 보면, 원인이 직접적인 것이고 결과는 그 원인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결과 자신이 원인이 되어 원인은 결과가 된다. 다만 여기서 작용하는 방향이 반대이다.

예를 들어 태양에 지구가 충돌한다면, 이는 하나의 관점에서는 태양이 인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태양을 밀어내는 척력이 발휘된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인력의 힘이나 척력의 힘은 양적으로 동일하며 다만 방향만 대립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태양이 능동적 실체로서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관점을 달리해서 바라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이렇게 관점을 뒤집어 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전환된다. 즉 수동적 실체로서 결과가 원인의 받아들이는 것은 이 결과 내에 이미 그런 것으로 정립될 가능성[An sich Sein]이 실제로 정립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능동적 실체 역시 마찬가지다. 능동적 실체가 힘을 행사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가 그런 힘을 받을 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 실체는 강제당한다. 강제는 위력의 현상이거나 외적인 것으로서 위력이다. 그러나 위력이 외적인 것은 다만 원인이 되는 실체가 자기 자신을 [결과로] 정립하는 가운데 동시에 [타자를] 전제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양된 것으로서 정립하기 때문일 뿐이다.”(논리학, GW11, 405)

“수동적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은 수동적 실체에 다만 정당한 권리가 행사되는 것이다. 수동적 실체가 잃어버리는 것은 그것이 지닌 직접성이며 즉 그것에 낯선 실체성이다. 수동적 실체가 자기에 낯선 것으로서 획득하는 것 즉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규정이다.”(논리학, GW11, 406)

능동적 실체가 행사하는 것이 작용이라면, 수동적 실체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수동적 실체 자신의 반작용이다. 그것은 수동적 실체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정립한 것이다.

“수동적 실체의 반작용은 이중적인 것이다. 즉 우선 이 수동적 실체가 지닌 모습이 정립된다. 두 번째로 수동적 실체가 그것으로 정립되는 것이 그것의 그 자체 존재로서 서술된다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6)

“둘째로 반작용은 최초의 작용하는 원인에 대립한다. 이전에 수동적 실체가 자기 내에서 지양한 작용은 바로 최초의 원인이 작용한 것이다. 이 작용이 지양되면서 그 원인이 되는 실체성도 지양된다.”(논리학, GW11, 406)

4)

이런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서 마침내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이 출현한다. 여기서 원인은 능동적 실체이며 동시에 수동적 실체 즉 결과이니, 원인과 결과가 단순히 엇갈리는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원인 자체가 곧 결과이다. 또한, 작용과 반작용처럼 단순히 관점의 전환에 의해 원인이 결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는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결과이고 결과를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 원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인과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 구별은 더는 구별이 되지 못하고 투명하게 된다.

이전에 특정한 인과성에서 기체와 실체, 토대와 인과 관계가 서로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구분 자체가 해소된다. 원인의 기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 자체가 자신의 기체이다. 그것은 결과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과도 결과가 아닌 독자적 기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자체가 자기를 원인으로 만드는 기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바이메탈을 보자. 열을 받으면 많이 늘어나는 물질과 적게 늘어나는 물질 즉 서로 대립하는 성질을 지닌 두 물질이 결합한다. 이 바이메탈에 냉장 콤프레서가 연결되면, 냉장고가 된다.

냉장고 온도가 올라가면 바이메탈이 굽어져서 냉장 콤플레서가 작동하여 온도가 내려간다. 온도가 내려가면 바이메탈이 반대로 펼쳐져서 냉장 콤플레서의 작동이 중지하면서 온도가 다시 올라간다. 이런 상호적 운동을 통해 냉장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여기서 냉장 콤플레서 작동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냉장 콤플레서 중지의 원인이며 이 중지의 원인이 미친 결과가 곧 작동의 원인이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곧 원인이다.

5)

원인은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므로 자기 매개하는 것이다. 결과 역시 자기의 결과를 통해 결과로 되는 자기 매개이다. 곧 원인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하고 결과는 자기 자신을 결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매개, 자기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일어난 상대적 필연성의 운동은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발전한다. 자기 자신을 근거로 하기에 더는 타자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니 항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필연성과 우연성이 통일로서 절대적 필연성이 출현한다. 즉 “한편으로 결합과 관계로서 직접적 동일성”과 다른 한편으로 “구별이 지닌 절대적 우연성”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런[특정한 인과성에서] 내적 필연성이나 잠재성은 인과성의 운동을 지양한다. 이를 통해 양 측면이 지닌 실체성[우발성]은 상실되며 필연성이 은폐를 벗어난다.”(논리학, GW11, 409)

이런 절대적 필연성은 동시에 자유(자발성)의 체계이다. 냉장고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므로 이 냉장고는 마치 목적론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목적을 추구하는 자발적 존재다. 그러나 사실 이 합목적적 운동의 구조는 서로 대립하는 물질의 상호 작용에 있다.

“거꾸로 동시에 우연성은 자유로 된다. 왜냐하면, 필연성을 이루는 측면들은 독자적으로 자유롭지만, 서로 비추는 실제성이라는 형태를 가지지 않으나 이제부터 동일성으로 정립되면서 구별되는 가운데서도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이루는 총체성이 이제 또한 서로 동일한 총체성으로 비추거나 서로 동일한 반성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409)

6)

이와 같은 자유는 아직 단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자유는 마침내 개념 운동에 이르러 등장하며, 아직은 단순히 자발적인 합목적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여기서 개념 운동의 출발점이 놓인다.

능동적 실체는 개별적 개념이 된다. 이것은 자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관계하는 것 또는 “자기와 동일한 부정성”이다.(논리학, GW11, 398)

수동적 실체는 일반적 개념이 된다. 여기서 직접적인 것이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단순한 동일성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규정성으로부터 자기 내로 반성하여”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정립된 것” 이다.(논리학, GW11, 398)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특수성으로서 개념이다. 이 매개는 구별된 개체다. 이 개체는 자립적이며 구별된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잠재적으로는 일반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상호 작용 속에 들어가 자기를 부정하는 것 즉 개별자로 된다. 그러므로 이 특수성이 곧 가상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구별된 계기이지만, 동시에 각자 자기 속에 이미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개별성의 부정성은 자기 부정성이므로 곧 동일성이다. 일반성의 자기 동일성은 부정의 부정을 통한 동일성이다. 특수성의 자립적 개체는 이미 부정적인 것이며 앞으로 부정될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부정의 부정을 통해 통일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총체성은 동일한 반성이어서 자기에 부정적으로 관계하면서 앞에서 말한 두 가지로 자기를 구분하지만, 그런 구별은 완전히 투명한 구별 속에 즉 특정한 단순성 속에 또는 양자에 동일한 동일성인 단순한 규정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이고 주관성의 영역 또는 자유의 영역이다.”(논리학, GW11, 409)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4-법칙 관계와 인과 관계

1)

앞에서 우발적 존재에서 반성은 실존에 머물러 있어서 아직 본질이 그런 우발적 존재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또는 공허를 본질로 한다고 했다. 이제 인과 관계에 이르러 처음으로 반성이 내적으로 되면서, 개체는 본질이 그 속에 비친 것 즉 현상으로 된다.

헤겔에서 인과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이처럼 현상으로서 개체이니, 이 개체는 자립적인 동시에 타자와 관계한다. 이 개체가 지닌 양 측면이 곧 인과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헤겔의 인과 개념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어지는 인과 개념과 구분된다. 인과 관계는 철학상 법칙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지며 그 때문에 흄의 비판 이래로 부정되어왔다. 법칙 관계란 흔히 두 자립적 존재가 조건적으로 관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다른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항상 반복되면 법칙이 된다.

그런데 인과 관계는 이 두 자립적 존재 사이에 어떤 관계를 설정하는 데, 흄에 의하면 실제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지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과 관계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개별적인 것들 사이의 법칙 관계 또는 조건 관계뿐이라고 한다.

칸트는 흄의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런 고립된 개별적인 것이더라도 항상 계기해서 지각된다면, 선험적 주관은 이를 인과 관계로 파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2)

헤겔은 힘의 관계를 인과 관계를 구분해서 다룬다. 법칙 관계 또는 힘의 관계와 인과 관계는 관계의 성격에서 구분된다. 전자는 현상 편에서 다루어지는 물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며, 후자는 실제성 편에서 다루어지는 실체적 개체를 요소로 하는 관계이다.

하나의 물체는 여러 성질을 지니고, 이 성질은 서로 관계한다. 이 성질이 다른 성질과의 관계는 양자 사이에 미분적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힘은 한편으로 발산하고 다른 한편으로 수렴하면서 두 성질을 관계하게 한다. 이것이 힘의 외화라는 관계다. 헤겔은 이 힘의 외화를 통해 두 성질 사이의 법칙 관계가 성립된다고 본다.

반면 인과 관계는 유적 본질이 실체로 펼쳐지는 반성 운동을 매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종적 개체는 가능적인 것이며 다른 개체는 실제적인 것이다. 여기서 가능적인 것은 원인이 되고 실제적인 결과가 된다.

가능성의 실현은 앞에서 헤겔이 말했듯이 자기를 펼치는 운동이며 자기를 이중화해서 계시하는 운동이다. 여기서는 원인의 원인성이 결과에 전달되어 결과를 원인과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원인은 인과적 작용 속에서 자기의 원인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과 역시, 인과 작용에 의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원인과 같은 것으로 정립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면, 하나의 당구공은 자신이 지닌 운동량을 잃어버리고 이 운동량을 다른 당구공에 전달한다. 즉 가만히 있던 당구공이 운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는 조건 관계와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인과 작용에서 스스로 변화한다. 원인은 원인성을 잃고 결과는 원인성을 띠게 되니, 이런 변화를 통해 우리는 인과적 관계를 단순한 조건적 관계 즉 법칙 관계와 구별할 수 있다.

3)

우발적 존재에서 일어난 반성 운동이 공허를 본질로 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 일어나는 반성 운동은 일정한 본질을 설정한다. 인과 관계는 실체적 개체 사이의 반성 운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런 반성 운동은 아직 일면적인 것에 그치므로 인과 관계는 외적인 반성 운동에 그치고 장차 내적 반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인과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전환한다.

헤겔은 인과 관계를 형식적 인과성, 특정한 인과성, 작용과 반작용 관계로 발전적으로 서술한다. 그 가운데 형식적 인과성은 인과의 단순한 개념만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과성은 특정한 인과성에서 시작한다.

우발적 존재가 부정적인 것으로 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통해 인과 관계가 출현한다. 개체가 맺는 동일성의 관계를 통해 가능적인 것이 실현되어 실제적인 것으로 된다. 이때 가능적인 것이 원인이고 실제적인 것이 결과다.

원인이 이런 원인이 되려면, ① 처음 직접적인 실존에서 자기 내로 반성하고, 가능적인 것[An sich Sein]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양된 것으로서 원인은 인과 관계 속에서는 오히려 직접적인 것, 근원적인 것이며, “자기로부터 시작하고 타자로부터 촉발되는 법이 없이 자기로부터 산출하는 자립적 원천이다.”(논리학, GW11, 398)

원인이 원인으로서 자기 내 반성과 원인이 결과를 규정하거나 정립하는 것은 동일한 행위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없이 통일되어 있다. 즉 원인이 원인이 되면 즉시 다른 것에 작용[wirken]을 해야 한다.

“원인의 근원성이란 원인의 자기 내 반성이 곧 규정하는 정립이며, 거꾸로 양자는[자기 내 반성과 규정이] 하나의 통일을 이룬다는 데 있다.”(논리학, GW11, 398)

② 자기의 위력을 통해 이 정립된 규정성을 결과 속에 정립한다. 원인은 결과 속에서 자기와 동일한 것 즉 “정립된 것으로서 정립된 것”(논리학, GW11, 398)에 이르므로 ③ 자기 관계하는 가운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이제 원인은 원인으로서 자기를 소실한다. 결과는 처음에는 ④ 직접적인 것이었으나 이제 원인의 결과가 되면서 정립된 것으로 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서 “결과는 일반적으로 원인이 포함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으며 거꾸로 원인은 결과 속에 존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98)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동일한 것인데, 이는 원인의 가능성이 펼친 것이며, 자기를 이중화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단순한 이행도 아니고, 외화[형성]도 아니며 자기를 타자에 전달하는 것이니, 헤겔은 원인을 ‘위력을 지닌 것[Macht]’으로 규정한다.

4)

형식적 인과 관계는 인과 관계에 관한 개념일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과 관계는 특정한 인과 관계이다. 특정한 인과 관계는 원인과 결과가 각기 직접적인 실존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각자는 고유한 내용을 지니며, 그 가운데 하나의 내용에서 인과 관계가 맺어진다.

우발적 존재의 실체 관계가 추상적 필연성 즉 우연성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특정한 원인과 결과는 앞에서 논의한 상대적 필연성에 상응한다. 원인은 구체적인 가능성이며 결과는 구체적인 실제성이다.

인과 관계 속에서 개체는 실체로 규정된다. 원인과 결과는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실체의 형식을 지닌다. 그것은 서로 관계하여 실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원인과 결과가 인과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지닌 내용은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토대가 되니, 곧 기체이다.

원인은 여러 내용을 지닌다. 원인이 원인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되는 기체에서 벗어나 원인으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즉 원인은 자기를 지양해야 한다. 이제 원인은 실체가 되며 이 원인이 작용하면서 원인이 되는 내용을 결과로 옮기면 원인은 이 원인이 되는 내용을 잃어버리면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한다. 원인은 번래 기체로 복귀한다.

“이 [원인이 되는] 실체의 작용은 외적인 것에서 시작하며 이 외적인 규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외적인 것의 [결과를 통해] 자기 내 복귀는 자신의 직접적 실존을 보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인과성을 지양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402)

예를 들어 돌이 다른 것을 타격하는 원인이 되려면, 돌이 들어 올려져서 하나의 운동량을 지닌 것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돌은 다른 것을 타격하면서 운동량을 잃고 다시 땅으로 낙하하고 처음의 직접적인 존재로서 돌로 된다.

결과는 원인의 작용에 의해 그 자신이 지양되면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 결과는 이 정립된 원인을 다시 다른 타자에 정립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간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원인과 결과는 자립적인 내용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로 무차별하지만, 어떤 인과 관계를 이루는 특정한 내용에서는 서로 동일하다. 특정한 인과 관계에서 서로 무차별한 측면과 서로 동일한 측면은 각기 독자적 내용을 지니면서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돌이 다른 것을 때릴 때, 여기서 원인이 되는 것은 운동량이다. 그런데 돌이 돌이라는 점에서 지닌 내용은 이 운동량과는 무관하다. 이 동일한 운동량을 돌이 지닐 수도 있고, 나무도 지닐 수 있으니, 돌의 구체적 내용은 원인으로서 내용과 서로 외면적이다.

형식적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동일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석적 명제를 이루며, 특정한 인과성에서 원인과 결과는 단순한 형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원인과 결과는 인과적 내용 외에 독자적인 내용을 지니므로 양자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6)

① 하나의 결과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해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결과는 여러 형식을 가진 통일적인 내용이므로, 그 형식에 따라서 각기 다른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고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자동차의 결함일 수도 있고, 도로 조건의 결함이나 운전의 미숙일 수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자주 중첩해서 작용하여 사고를 일으킨다.

② 특정한 인과성은 원인과 결과가 지닌 내용의 차이 때문에 다양하게 발전한다. 우선 하나의 원인은 원인으로서 갖는 자신의 내용 외에도 다른 내용을 지니므로 이 내용을 통해 그 자신의 원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가 탄환을 맞아 전사하면서 아들이 각고 노력하여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여 성공했다고 하자. 아들이 성공한 원인은 각고 노력인데 이 각고 노력의 원인은 아버지의 전사이고 아버지가 전사한 원인은 다시 전투에서 맞는 탄환이다.

이런 관계는 무한히 펼쳐질 수 있으며 원인의 방향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결과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계를 통해 인과의 사슬이 만들어진다.

③ 생명체나 정신에 이르면 하나의 원인은 결과에서 자기를 그대로 이중화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결과는 자발적인 힘을 지니고 이런 원인이 미치는 작용을 자기 나름대로 고유하게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이오니아 기후가 미치는 영향은 호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며 시저의 명예욕이 공화국을 멸망시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호머나 공화국은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 이런 원인의 작용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작은 원인이 거대하고 심각한 사건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은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간접적 원인이거나, 여러 원인 중의 하나이거나 주체적으로 변형되는 원인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결과는 결코 원인보다 클 수 없다고 주장한다.

7)

원인의 사슬 가운데 원인이 다른 것의 원인이지만, 자기 자신 역시 다른 것의 결과이다. 하나의개체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된다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가 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결과는 원인과 관계하여서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내용을 지닌 기체이다. 이 기체는 인과적 동일성에 대해 다만 외면적인 것 즉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기체가 원인이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하는 전제로서 규정된다. 다시 말하자면 결과가 원인이 되어 원인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정한 인과성에서 어떤 것을 원인으로 만드는 것은 외적인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제 원인이 자기의 결과를 통해 원인으로 되면서 자기 스스로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이전에 동일성이 다만 잠재적으로 존재했던 것인 기체는 이제부터 전제로 규정되거나 작용하는 인과성에 대립해서 규정되며, 이전에 동일한 것에 다만 외적인 것이었던 반성은 이제 이 동일한 것에 관계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논리43-실체 관계와 공연한 존재

1)

마침내 본질론 마지막 3편 3장인 ‘절대적 관계’의 장에 이르렀다. 이 장을 통해 1부 객관 논리학은 끝나고 2부 주관 논리학으로 이행한다. 이 장은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의 마지막 장인데, 많은 내용이 3편 2장인 ‘양상’ 장의 내용과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2편 현상 편) 설명했듯이 본질론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본질론에서는 항상 먼저 개념이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것이 점차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 끝에 이르러 개별적 형태가 다시 일반적 형태로 전개된다. 이는 곧 역사적 발전의 길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신현상학의 전개 과정과 거꾸로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논리의 평면에 투영된다. 헤겔은 이것을 내면화[Erinnerung: 기억]의 과정이라 했다. 논리학에서 본질론은 거꾸로 논리적 계기의 발전이 시간의 축에 투영되니 이를 헤겔은 ‘형태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3편에서도 2장에서 양상 개념이 추상적 필연성에서 구체적 필연성을 거쳐 절대적 필연성으로 전개되었다. 이제 3장에 이르면 개체들의 우연적 관계(실체 관계)에서 개체들의 구체적 관계(인과 관계)를 거쳐 개체들의 절대적 관계(상호작용 관계)로 나간다. 여기서 논리적 계기와 역사적 형태가 상응하는데, 추상적 필연성이 실체 관계와, 구체적 필연성이,, 인과 관계와, 절대적 필연성이 상호작용적 관계와 상응한다.

시야를 좀 더 넓혀서 보면, 2편 ‘현상’ 편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먼저 현상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는데, 2편 3장에서 이것이 시간에 투영되어 전체와 부분의 관계, 힘과 드러남의 관계, 외부와 내부의 관계가 전개되었다.

정신현상학에서 논리적 계기가 새로운 의식 형태를 토대로 새롭게 재구성되면서 그 이전의 계기와 평행하듯, 여기서는 논리적 차원이 발전하는 가운데 시간적 형태의 흐름도 재구성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새로운 이념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지만, 이전의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와 새로운 이념에서 구성된 역사가 평행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간의 축에서 2편 3장의 축은 3편 3장의 축과 상응한다. 즉 논리적 차원이 현상에서 실제성으로 이행하면서 시간의 차원도 재구성된 것이다. 그 때문에 2편 3장의 현상의 관계는 3편 절대적[실체의] 관계와 평행한다. 즉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실체 관계에, 힘과 드러남은 인과 관계에,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상호작용적 관계에 상응한다.

2)

앞의 장에서 양상은 가능성과 실제성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가능성이란 곧 유적 본질을 말하며 실제성이란 이것이 실현된 실체를 말한다. 이 관계가 개별적이면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이었고, 특수적이면 개연성(상대적 필연성)이었고 일반적이면 필연적(절대적 필연성)이었다.

헤겔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운동은 자기 자신을 펼치는 운동[auslegen]] 또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계시하는[Menifestation] 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유적 본질과 실체, 즉 근거와 그 토대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개체들의 상호 관계이었는데, 이제 3장 관계 장에서는 이 개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헤겔은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절대자의 펼침은 빛을 비추는 운동이며 이 빛남[Scheinen]은 곧 가상[Schein]으로서 정립되는 것이니, 관계를 이루는 양 측면은 총체성이다. 왜냐하면, 이 측면들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가상이 총체성인 까닭은 가상으로서 구별된 것들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대립하는 것 또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 구별된 것은 총체성이므로 가상이다. 그러므로 이 구별된 것 또는 빛을 비추는 절대자{scheinendes Aboslute: 즉 가상]는 자기 자신을 동일하게 정립하는 것일 뿐이다.”(논리학, GW11, 393)

이 구절에서 논의의 핵심은 곧 ‘가상’이 곧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대자와 가상(또는 양상)’, ‘가능성과 실제성’, ‘개체와 실체[개체의 관계]’의 개념을 서로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상은 무차별적인 실존이 아니라, 그 속에 절대자 즉 유적 본질이 자기를 비춘 것을 의미한다. 절대자의 비춤을 통해 실존은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이런 자기 부정성 때문에 가상은 곧 양상이라 규정된다.

실존적 개체에 본질의 빛이 비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개체가 자기와 대립하는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론 1편에서 설명했듯이 헤겔에서 본질로의 반성{수직적 운동)과 타자와의 관계(수평적 운동)는 상호 얽혀 있는 운동이다. 개체가 타자와 배타적 통일의 관계를 맺을 때 이 개체는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의 대립물이니, 곧 총체성이라 한다.

개체가 타자와 맺는 배타적 통일의 관계가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적 본질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한 것이다. 가상을 매개로 해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여 실체가 된다. 이런 가상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되는 과정이 곧 가능성(유적 본질: 절대자)이 실현되어 실제성(실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상에서 가상과 총체성의 관계에 관해 설명했다. 이제 실제성 편 3장 절대적 관계 장에서는 논의는 개체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로 옮겨진다. 이 관계가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서 다양한 실체가 출현한다. 개체들이 서로 무차별하면 우발성의 관계이며, 개체들이 구체적으로 관계하면 그것이 곧 인과 관계이다. 마지막으로 개체가 상호작용하게 되면 그 관계가 곧 목적론적 관계이고 여기서 필연성은 자유로 발전한다.

3)

이런 실체적 관계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우발성[Akzidenz]의 관계로서 실체이다. 헤겔은 이를 단순히 실체 관계라고 하는데, 그 관계를 이루는 요소가 곧 우발적 존재*이다.

*주) 이 ‘우발성’은 앞에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실현할 때 등장한 추상적 필연성으로서 ‘우연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그래서 ‘우발적 존재’는 흔히 ‘우연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그때 나온 ‘우연성’과 구별하여 우연하게 등장한 개체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발적 존재’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이는 실체적 집단을 이루는 한 원소로서 개체적 존재이다.

즉 어떤 것이 우연히 실제적으로 될 때, 그것이 곧 우발적 존재다. 이 우발적 존재는 자립적인 실존이며, 타자에 대해 무차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발적 존재가 서로 맺는 관계 즉 실체는 공허, 무일 뿐이다. 우발적 존재는 각자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이지만, 형식상 서로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이 무차별한 내용의 측면에서 우발적이며 형식적 동일성의 측면에서는 곧 실체적이다.

우발적 존재는 마치 점이 들어 있는 공허한 공간과 같다. 이 공허한 공간은 긍정적으로 보면 모든 우발적 존재에 공통적인 동일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우발적 존재를 받아들이는 공허한 것이다. 이 공허한 공간과 같은 실체가 곧 우발적 존재의 토대가 되는 실체이다.

공허한 공간이 점과 구별되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일반적 실체 역시 우발적 존재에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실체의 측면과 우발적 존재의 측면은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동전의 이면과 같이 관계한다.

4)

이 관계의 구체적 예로서 앞에서는 형식 논리학에서 논리적 형식과 명제 내용 사이의 관계를 들었다. 논리적 형식은 명제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외면적인 동일성이고, 각 명제 내용은 서로 고립적이며 무차별적인 것이었다.

이제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마치 개별 인격과 추상적 법의 관계와 같다고 하겠다. 인격은 법적 인격이며 인격의 내용은 개별적이지만, 인격의 형식은 법적으로 인정되며,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한 것이다.

명제의 논리적 형식이나 법적 인격은 긍정적으로 보면, 추상적인 동일성이며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형식이나 인격은 공허한 공간처럼 모든 명제 내용이나 인격의 모든 구체적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우발적 존재와 일반적 실체의 관계는 ‘현상’ 장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와 같다. 다만 전체와 부분에서 부분은 지속성이 없는 개별자(물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 실체적 관계에서는 실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에 이 우발적 존재는 그 자신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하나의 실체 즉 종적 개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헤겔은 이 우발적 존재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규정하는데, 이 우발적 존재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이면은 공허이니,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실제성이고 실체이지만 공허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가능성이고 절대자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결합하니,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 공허와 개체, 본질과 존재는 직접 자기의 반대로 전도한다. 각자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타자이며 이를 통해 서로 타자를 비춘다.

“이 빛남은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형식의 동일성으로서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은 최초에는 생성이며, 생성과 소멸의 영역으로서 우연성이다. 왜냐하면,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직접성의 규정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인 한에서 양자가 서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며 각자가 그에게 다만 타자인 것으로 직접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는 가상이므로,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또한 동일화하는 또는 타자에 자기를 비추는 반성이다. 따라서 우발성의 운동은 그 계기 모두에서 존재 범부과 본질의 반성 규정이 서로 비추는 것을 서술한다.”(논리학, GW11, 394)

5)

우발적 존재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끊임없이 교체한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이 창조인데, 이 창조의 근거인 가능성은 곧 공허 즉 심연이므로 아무 근거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직접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독자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므로 존재할 뿐’이며 자기를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이유 없이 존재하는 공연[空然]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우발적 존재는 공허를 그 근거로 하므로 자기 내에 부정성을 지니고,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다시 몰락하여 공허라는 가능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존재는 헛되고 헛된 존재이다.

마치 존재론에서 다루었던 감각적 질이 하나의 질에서 다른 질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명멸하는 것이었듯이, 우발적 존재 역시 창조되었다가 다시 몰락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이런 우발적 존재의 창조와 소멸은 우발적 존재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창조와 소멸은 실체가 되는 공허의 위력[Macht]으로 나타난다. 공허는 근거가 되어 창조하며 근거가 공허이므로 또 소멸한다. 공허가 근거이므로 갑작스럽게 출현하지만, 근거가 공허이므로 존재하는 즉시 사라질 운명이다.

“실체는 자기가 가능적인 것을 그 안에 옮겨 놓은 실제성이 지닌 내용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위력으로 계시하며 자기가 실제성을 그 안으로 옮겨 놓는 가능성을 통해서 자기를 파괴하는 위력으로 계시한다.”(논리학, GW11, 395)

가능성(몰락)과 실제성(창조)이라는 형식은 공허라는 실체를 내용으로 하며, 이 형식은 갑자기 출현했으나 이미 몰락하는 것이며, 몰락하는 가운데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다. 실체는 매번 임의로 특정한 내용을 산출하고 다시 회수하는 가운데 내용상 끝없이 변천하며 또한 형식상 가능성에서 실제성으로, 실제성에서 가능성으로 전복하기를 영원히 계속한다.

“그러므로 실체의 위력은 영원히 자기를 형식과 내용의 구별로 분화하며, 영원히 이런 일면성에서 자기를 순화하지만, 이런 순화 자체 속에서 규정과 분화로 도로 떨어진다.”(논리학, GW11, 395)

6)

실제적인 우발적 존재는 그 자체 우연한 것이기에 다른 우발적 존재도 가능하며, 그러기에 여러 우발적 존재가 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용상 변천하며 형식상 전도한다. 이런 내용적으로나 형식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원천은 우발적 존재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의 본질인 공허한 실체에 있다.

이 일반적 실체는 그 자체 내용상 공허한 것이고 다만 형식상 일반적이지만, 모든 개별적 내용을 창조하고 다시 몰락시키는 가운데, 이는 겉보기에 마치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추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는 우발적 존재가 아니라 실체 자체의 위력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한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를 패배시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겉보기의 모습에 지나지 않고 사실은 시장 자체가 자기를 전개하는 위력에 지나지 않는 것과 유사하다. 또는 옛날 첩들의 싸움과 같다. 그들은 서로 죽어라 싸우지만, 사실 그들을 싸우게 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적인 남자다.

“그런 우발적인 것은 다른 우발적인 것에 대해 위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실체의 위력이 양자[우발적인 것]를 자기 내에서 포괄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것으로서 양자에 부등한 가치를 정립하면서 하나는 소멸하는 것으로서 다른 하나는 다른 내용을 지니고 발생하는 것으로서 규정한다.”(논리학, GW11, 395)

“하나의 우발적 존재가 다른 우발적 존재를 쫓아내는 이유는 다만 하나의 우발적 존재를 고유하게 존속하게 하는 것이 형식과 내용의 총체성[일반적 실체]이며 이 우발적 존재는 다른 우발적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런 총체성 속에서 존속하는 것에 못지않게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5)

이런 실체의 위력을 통해 우발적 존재는 명멸하는 모순에 처하게 되며 이런 모순을 극복하면서 인과적 관계로 이행한다. 우발적 존재가 서로 무차별한 실체이었다면, 인과적 관계에서 개체는 한편으로 자립적이며 ‘단순한 자기 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이어서’ 서로 관계한다.

“이 우발성은 자기에 대립하여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규정되며 동시에 자기 관계하는 단순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되니 독자적[fuer sich]으로 존재하는 위력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실체 관계는 인과 관계로 이행한다.”(논리학, GW11, 396)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2-필연에서 자유에로(3)-절대적 필연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2-필연에서 자유에로(3)-절대적 필연성

1)

가능성이 실현되어 실제성으로 되는 매개는 곧 개체들의 관계다. 이 관계가 자립적이고 무차별한 실존으로 이루어지면, 이 매개는 우연한 것이 된다. 이 우연한 것은 추상적 필연성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곧 공허한 공간 속에서 서로 관계하는 양적인 것을 말한다.

이어서 이 관계가 자립적인 현상의 법칙 관계로 이루어지면, 이 매개는 구체적인 필연성 또는 상대적인 필연성으로 된다. 여기서 부분적으로 법칙이 성립하지만, 이들 법칙은 서로 우연적으로 만날 뿐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계 또는 생태계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을 넘어서 이제 헤겔은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는 매개에 이른다.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 이르면 자립적 개체는 타자와 단순히 법칙 관계를 지닌 것은 아니다. 개체는 타자를 결여라는 방식으로 포함하고 있어서 이미 내적으로 타자와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자를 자기의 목적으로 추구하게 되니, 여기서 가능성의 실현은 필연적이다.

2)

상대적 필연성에서 법칙 관계를 이루는 요소는 양적으로 척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의 정량은 자립적이면서도 다른 정량에 제약된다. 그런데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등장하는 개체는 양적으로는 척도 관계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산과 알칼리의 관계와 같은 것인데, 여기서 산에는 알칼리를 통해 제공되는 것을 결여하며 거꾸로 알칼리에는 산을 통해 제공되는 것을 결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개체는 타자를 결여라는 방식으로 포함하는 총체성이니,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타자와 결합한다.

산과 알칼리가 배타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동시에 선택적인 친화성을 지니고 있듯이 절대적 필연성에서도 두 개체는 배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런 선택적 친화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 개체의 결합은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필연성을 지니게 된다.

절대적 필연성에 두 개체의 관계는 자기를 결여한 것을 타자를 통해 채우려는 운동이므로, 그 운동은 합목적적으로 일어난다. 구체적 예를 들자면, 생명체에서 암수의 관계가 될 것이다. 양자는 서로 결여한 것을 타자를 통해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연적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욕망이라 한다.

여기서 욕망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자유 의지의 단초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아직 자동적인 것 즉 맹목적 필연성에 그친다. 이 자동적인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로 발전하면서 본질은 개념으로 고양되지만, 아직은 여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3)

실체가 가능성에서 실제성으로 자기를 펼치는 운동에서 매개가 되는 것은 개체의 관계였다. 이 개체가 서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면서, 가능성이 실제성으로 전개되는 것이 항상성 또는 일반성을 지닌 필연적인 것으로 된다.

상대적인(실재하는) 필연성에서 가능한 것은 현존하는 조건에 따라서 다양한 실제성을 실현한다. 또 하나의 실제성을 실현하는 가능성 역시 그 형식이나 근거에 따라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절대적 필연성에서는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것이 배타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으므로, 가능한 것은 실제적인 것의 ① 근거이면서 동시에 조건이 되니, 절대적이다. 실제적인 것은 오직 그 가능성을 통해서만 실현되고, 그 가능성은 오직 그 실제성만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가능성과 실제성이라는 두 대립하는 형식은 각자의 자립성을 잃어버리고 정립된 것으로 이행한다. 두 계기는 서로 직접적인 자기를 지양하여 타자의 계기가 되며, 이는 자기를 정립된 존재로 만들고, 타자를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운동이다. 동시에 각자는 자립적인 타자를 부정하면서 자기의 계기로 만든다. 이는 곧 자기를 전제하면서 타자를 자기의 계기로 즉 정립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성은 이런 정립된 존재를 지양하는 것이거나 직접성과 잠재성을 정립하는 것인데, 그에 못지않게 그런 가운데 이런 [정립된 존재의] 지양을 정립된 존재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 필연성은 그 자체 우연성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이 필연성은 이런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기로부터 자기를 반발시켜 이런 반발 속에서 그 자체 다만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며 이런 자기 복귀를 통해 생성된 그 자신의 존재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반발시킨 것이다.”(논리학, GW11, 390)

이런 ② 상호 자기 지양과 타자의 정립이라는 관계를 통해 가능성과 실제성이 통일을 이룬다. 이미 상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형식상 차이를 지닌 채 내용상 동일한 것으로서 통일되어서 필연성은 이 두 형식에 외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과 실제성이 상호 타자를 통해 매개하면서 각자가 지닌 차별적인 형식은 투명해지며, 그들의 통일은 각자에게 내면적으로 되면서 ③ 형식과 내용의 구별조차 해소되고 만다. 헤겔은 이를 형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게 되는”(논리학, GW11, 390) 것이며, 각자는 “내용으로 충만한 사태가 된다”(논리학, GW11, 390)고 한다.

가능성과 실제성은 각자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를 통해 다시 자기로 복귀하니, 이 자기 매개적 자기 동일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지양된 존재가 다시 지양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본질의 자기 부정성이며, 직접적인 것이 자기 매개를 통해 되돌아온다는 점에서는 자기 관계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필연성에서 ④ 순수 존재와 순수 본질이 통일된다. 즉 단순한 직접성과 절대적 부정성이 통일된다. 따라서 여기서 절대적 필연성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논리학, GW11, 391)이다. 바로 이것이 곧 실체다.

“절대적 필연성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실제성과 가능성이 그리고 형식적 필연성과 실재적 필연성이 복귀하는 진리이다. 이 절대적 필연성은 이미 밝힌 것처럼 존재가 자신의 부정인 본질 속에서 자기 관계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절대적 필연성은 단순한 직접성이거나 순수한 존재이며 그에 못지않게 단순한 자기 내 반성이거나 순수한 본질이다. 절대적 필연성은 양자가 동일하게 된 것이다.”(논리학, GW11, 391)

4)

우연성이나 상대적 필연성에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것은 가능성 자체에 외적인 것이었다. 이제 절대적 필연성에서 이런 매개를 통해 가능성 자체가 자기를 실현하는 힘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인 실제성 즉 실체는 “자기 자신에서 나와서 자기에 이르는” 필연성이니 이는 곧 ‘자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90)

그러나 동시에 헤겔은 이런 점에서 곧 이 실체는 곧 우연적이며 공허한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자기에 근거한다는 것은 자기 외에 어떤 다른 근거나 조건을 가지지 못하니, 그것은 자기 발생적인, 자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헤겔은 이런 실체를 ‘맹목적’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도 다른 것 속에서 빛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실체는 “타자에 관계한다는 흔적을 자신에서 보여주고자 하지 않으며” “자기 내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자신에서 필연적이다.”(논리학, GW11, 391)

여기서 본질은 “존재 속에 가두어져 있으며” 실체들 사이에는 서로 접촉함이 없고, 오직 “자기 매개하는 것이면서 타자를 통한 매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존재와 동일한 것인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실체는 “다만 가능한 것, 공허하게 정립된 것”으로 규정된다.(논리학, GW11, 391)

“이 우연성은 자유로운, 본래 필연적인 실제성의 본질이다. 이런 실제성의 본질은 빛을 꺼려하니,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빛이나 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순수하게 자기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독자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고 다만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자유롭고 본래 필연적인] 실제성은 다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1-392)

이 실제성은 본질이 자기를 계시하는 것이다. 절대적 부정성은 단순한 존재이니, 본질은 “빛이 없는 직접성이 지닌 자유로움” 속에 사라지며 동시에 “이 실제적인 것들을 깨고 나온다.” 왜냐하면, 존재는 자기 속에 본질을 지니고 있어서 자기 모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런 실제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2)

본질은 실제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이며, 이 무는 “실제성에 대립하는 자유로운 타자 존재”인 동시에 실제성을 산출하고 “그들의 존재”가 된다.(논리학, GW11, 392)

헤겔은 이런 자유로운, 필연적 실제성을 필연성이 등장하는 ‘기회[Mal]’(논리학, GW11, 392)라고 한다. 즉 절대자가 출현하는 때이다. 이 기회 속에 절대적 부정성으로서 본질이 자기를 계시하고 이런 자기규정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면서 이런 실제성을 “자유롭게 절대적으로 실제적인 것으로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논리학, GW11, 392)

실체는 내면과 외면의 통일이며, 본질과 존재의 통일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우연적인 것이니, 헤겔은 이를 기회라고 했다. 곧 절대자가 출현한 때이다. 여기서 실체는 절대적인 필연성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우연적인 것 즉 자동적인 것이다.

이런 자동적인 것은 앞으로 등장할 자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아직은 맹목적 필연성에 그치며, 이는 인간의 유적 본질에 관한 자각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체 즉 사회 속에서 마침내 출현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 본질론의 마지막 장인 실체적 관계의 장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통과해야 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1-필연에서 자유로(2) 개연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1-필연에서 자유로(2) 개연성

1)

형식적인 우연성은 무차별한 실존에서 발견되는 양상 개념이다. 자연계의 어떤 사물도 이런 무차별적 실존은 아니다. 이런 실존은 형식논리학(추상적 사유)에서 파악하는 사태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모든 사태는 형식적 동일성 또는 공허한 형식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공허한 동일성(유적 본질)을 지닌 실존이 형식적 가능성이고, 무차별한 집단을 이루는 실존이 곧 형식적 실제성이다.

자연 세계에서 존재하는 대부분 사물은 실존에 속한다기보다 현상에 속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상 편에서 설명했듯이 현상으로서 개체들은 한편으로는 자립적이어서 서로 무차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법칙 관계를 맺는다. 이 법칙 관계 속에서 각자는 부정성을 지니고 타자와 통일된다.

마찬가지로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매개하는 개체는 무차별한 실존에서 자립적인 동시에 법칙 관계 속에 있는 현상으로 발전하면서, 양상도 형식적인 필연성 즉 우연성에서 실재적인(구체적인) 필연성 즉 개연성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이를 상대적인 필연성이라고도 한다.

또, 앞에서 우연성이 정량의 세계에 상응했다면, 개연성은 정량이 지양된 것 즉 척도에 상응한다. 단칭 판단에서 정량은 서로 양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질적으로 무차별하니 그 관계의 장은 텅 빈 공간이었다.

정량이 지양된 척도는 두 정량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되는데 이런 척도는 특칭 판단을 통해 표현된다. 이 척도는 두 정량의 관계인데, 이 관계 때문에 한편으로 한 요소는 자립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른 요소에 의해 제약된다. 이런 자립성과 제약된 관계라는 이중성 때문에 척도는 곧 현상에 속하는 것이며, 양상에서는 개연성에 상응한다.

현상에서 실체는 현상의 총체인데 이는 곧 다양한 법칙 관계가 서로 교차하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세계가 흔히 우리가 자연계라고 알고 있는 세계이다. 이 자연 세계는 법칙의 필연적 관계와 그 법칙 상호의 우연적 교차가 결합한 세계다. 생물계에서는 생태적 관계가 전형적으로 여기에 속한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그 진화는 맹목적이다.

앞에서 실존에 적용하는 양상 개념이 의제적이라고 했듯이 여기서 현상에서 적용되는 양상 개념도 마찬가지로 의제적이다. 현상의 법칙 관계는 그 자체로는 가능성이 실현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제적으로는 하나의 현상에 내재하는 가능성이 이 관계를 통해 실제적인 것으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개연성에서 출발점은 하나의 구체적[real: 실재적] 실제성이다. 이 실제성은 하나의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구체적 내용을 지닌 자립적인 실존이다.

다른 한편, 하나의 현상으로서 실제성은 다른 현상과 법칙 관계 속에 있다. 그런 관계 속에 있으므로 하나의 현상은 다른 현상으로부터 이미 반성된, 정립된 실존이다. 이 실제적 현상은 다른 현상으로부터 반성된 것이므로 구체적[real: 실재적] 내용을 지닌 가능적 존재[An sich Sein]다.

또한, 하나의 실제성은 이런 법칙 관계 속에서 다른 구체적 실제성에 대해 그것의 가능성이 된다. 이 가능성이 실현된 구체적[real: 실재적] 실제 역시 특정한 내용을 지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가능적인 것이 지닌 구체적 내용을 근거로 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 실현된 실제성 역시 독자적인 자립적 실존을 갖는다.

“이 구체적[rea] 실제성 자체는 처음에는 다양한 성질을 지닌 사물, 실존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실제성은 현상 속에서 해소되어 버리는 실존이 아니라 실제성인 한에서 동시에 잠재적 존재이며 자기 내로 반성한 존재다. 이 실제성은 단순한 실존의 무차별한 다양성 속에서도 자기를 유지하니, 그것의 외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인 관계이다.”(논리학, GW11, 385)

3)

구체적 가능성에서 구체적 실제성으로 전환은 존재론에서 일어나는 타자로의 이행[Uebergehen] 운동(예를 들어 빨간색이 그 부정인 파란색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전환은 현상에서 일어나는 법칙 관계(“존재하는 어떤 것이 타자에 관계하는 것”)도 아니다.

양상의 운동은 근거 관계를 통해 내적 유적 본질이 외적인 실체로 드러나는 운동이다. 여기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동일한 근거, 본질, 형식이 전이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 관계를 절대자가 자기를 계시하는 것[Menifestat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것이 미치는 영향, 실제화[wirken]를 “그것이 산출하는 타자를 통해 알려주며”, “하나의 자립적인 것이 다른 자립적인 것 속에서 자신의 특정한 본질규정을 갖는 것”이다.(논리학, GW11, 385-386)

형식적 가능성은 무엇이든 가능하며 형식적 어떤 것도 형식적으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구체적 가능성과 구체적 실제성에서 존재하는 근거 관계를 통해서 보면, 가능성과 실제성은 한계를 지닌다.

근거 관계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형식과 내용 그리고 조건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대립하는 형식의 통일이 내용이며, 내용이 현존하는 조건에 따라서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실제성은 그것이 지닌 내용이 포함하는 다양한 형식에 따라서 여러 근거, 여러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거꾸로 하나의 가능성은 다양한 현존이라는 조건을 통해 여러 실제성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가능성과 실제성 사이에는 근거 관계가 존재하므로 여기서 양자 사이에 구체적 본질이 동일하게 존재하는 한, 실제성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도 제한되며, 가능성을 현존하게 하는 조건도 제한되니, 어느 편에서나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형식적 가능성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만 형식적이므로 내용의 구별에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p가 가능하다면, -p 역시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태의 형식에서는 무모순적이지만, 사태의 내용상 모순이 될 수 있다.

구체적 가능성 역시 이와 무모순성과 모순성을 동시에 가진다. 하나의 구체적 실제성의 조건으로 여러 구체적 가능성이 있다. 이 여러 구체적 가능성은 서로 통일되어 하나의 실제성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가능한 것은 그것이 지닌 그 자체 존재 때문에 그것이 지닌 단순한 내용 규정에 따라서 보더라도 모순되지 않는 것 즉 형식적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그런 가능한 것이 전개되고 구별된 상황이나 그것이 관련된 모든 것들을 따라서 보더라도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서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논리학, GW11, 387)

동시에 이 구체적 가능성은 조건에 따라 여러 실제성을 실현하니, 이 구체적 실제성은 서로 상이하며, 심지어 서로 모순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체적 가능성은 형식적 가능성처럼 그 자신이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이 가능한 것은 자기 내에서 다양하며 다른 것과 더불어 다양한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런 상이한 것은 본래 대립으로 이행하니, 이는 모순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 387)

4)

헤겔은 이 운동에서 매개가 되는 구체적 가능성은 구체적인 실제성이 부정된, 정립된 것이면서 다시 자기를 부정하여 다른 구체적 실제성으로 나가니, ① 가능성은 기존의 실제성이 반성된 또는 정립된 것이며 이 가능성이 다른 실제성으로 실현되는 것은 “정립된 존재 자체가 정립되는 것”(논리학, GW11, 388)이고 실제성이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는 필연성이다.

“구체적 가능성의 부정은 그 가능성이 자기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능성이 자기를 지양하는 것은 이런 지양이 자기 내에서 반발하는 것이므로 이 구체적 가능성은 구체적 필연성으로 된다.”(논리학, GW11, 388)

다시 말하자면 가능성은 실제성의 가능 조건이며 그런 점에서 가능성은 자기가 실현하는 실제성과 내용상 동일하니 “실제성을 그 자신에서 지니며” “달리 될 수는 없는 것” 즉 필연적인 것이다. 즉 “그런 조건이나 상황 아래서 어떤 것은 다른 결과를 이룰 수 없다.”(논리학, GW11, 388)

그러나 이 필연성은 제한된 상대적인 필연성 즉 개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법칙 관계를 이루는 ② 두 현상은 동일성과 동시에 무차별성을 가지고, 아직 외적 반성을 완전하게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법칙 관계가 출발점으로 삼는 구체적 가능성은 다만 “규정된 실제성”이고, “직접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규정성을 다양성을 지닌 실존하는 상황에서 가지니” (논리학, GW11, 388)즉 이 법칙 관계는 일정한 상황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동시에 상대적이다. 즉 필연성은 그 출발점이 되는 전제를 갖는다. 필연성은 우연적인 것에서 자신의 출발점을 갖는다.” (논리학, GW11, 385)

양자에서 동일한 내용이 이처럼 각자의 자립성에 외면적이므로 이 내용 자체가 특정한 것, 실재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가능성의 실제성으로의 전환은 내용의 동일성 때문에 필연적이지만, 동시에 “이 내용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우연성을 갖는다.”(논리학, GW11, 388)

그러므로 이런 필연성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필연적인 동시에 우연한 것일 뿐이다. 헤겔은 이런 필연성을 구체적 또는 상대적인 필연성이라 하며 동시에 곧 구체적 우연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인 것인 동시에 우연적인 것이다.

5)

구체적 가능성과 구체적 실제성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내용의 동일성은 형식의 차이와 결합되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실재하는 필연성이 지닌 상대성은 내용에서 드러나는데 그 방식을 보면 그 내용은 다만 처음에는 형식에 무차별한 동일성이고 따라서 그 형식으로부터 구별된, 일반적으로 말해 특정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89)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은 한편으로 전제된 자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타자와 관계 속에 있고 타자를 매개로 자기 내로 복귀한다.

“이 필연성은 그렇게 되는 것을 통해 가능성과 실제성의 아직 자기 내로 반성되지 않은 통일에서 출발한다. 이런 전제와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은 아직 분리되지 않는다.”(논리학, GW11, 388-389)

또는 이런 매개 운동은 자립적인 각자에 외면적이어서, 자립적인 것 자체가 자기로부터 전개하는 운동은 아니니, “필연성은 아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연성[자유]으로 규정된 것”(논리학, GW11, 385) 즉 절대적 필연성, 자발적인 필연성은 아니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0-필연에서 자유에로(1) 우연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40-필연에서 자유에로(1) 우연성

1)

헤겔에서 양상 개념의 출발점은 우연성이다. 이 우연성을 헤겔은 추상적인 필연성으로 본다.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의 관계는 실존하는 개체들의 자연적 만남에 의해 일어난다. 자립적인 개체는 서로 무차별하니, 그 만남은 우연적일 뿐이다.

여기서 실존은 개체들의 집단인 실체를 바탕으로 한다. 사실 실존은 서로 무차별하니 그 관계는 공허하다. 하지만 마치 물체가 공허한 공간 속에서 통일되어 있듯이 이런 실존들도 외적인 반성에서 본다면 차라리 이 공허를 유적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공허한 본질 위에 존재하는 실존에서 양상 개념은 사실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실존은 본래로서는 지속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실존을 외적 반성을 통해서 보면, 운동을 부여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도 양상 개념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실존을 이런 공허를 본질로 지닌 것으로 보면, 가능성이고 이것이 실현된 집단 속에서 개체를 보면 이것이 실제성이다.

자연에는 이런 무차별한 실존은 없다. 이런 무차별한 실존과 그 관계로서 공허한 공간은 형식논리학(추상적 사유)에서 다루어지는 사태의 관계에서 발견된다. 형식논리학에서 동일률이나 모순율은 형식일 뿐이며 이 형식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사태는 각자 고립된 것이며 서로 무차별한 것이니, 공허한 형식이 이 사태의 본질이며 서로 무차별한 사태는 이 공허한 형식을 통해 서로 관계할 뿐이다.

자연계에서 이런 실존에 해당하는 것을 찾자면, 정량의 세계일 것이다. 정량은 하나의 일자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서로 양적인 차이면 갖는다. 그러므로 이 정량은 일자의 양적 공간 속에 들어 있으며 여기서 각자는 양적인 차이는 질적으로 서로 무차별하다.

2)

이제 반성에서 사용되는 양상 개념을 보자. 반성 속에서 어떤 것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적 본질이 찾아진다. 그것은 어떤 가능한 것[An sich Sein]이다. 이 어떤 것을 단순히 현존 또는 실재한다고 하지 않고 이미 이것을 이미 반성 속에 집어넣고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성 속에 실제적인 것은 이미 그 근거인 본질을 통해 규정된다.

이제 처음 다루어지는 양상 개념은 실존과 관계한다. 실존은 각자 자립적인 것이며 서로 무차별하다. 그러므로 실존에 어떤 구체적인 유적 본질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추상적 사유 또는 순수한 외적 반성을 통해서 이 실존들은 하나의 집단 속에 집어 넣어지는데 이 집단은 사실 공허를 그 관계로 하는 집단이다.

여기에 양상 개념을 의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실존하는 것의 유적 본질은 공허이며, 이 공허가 실현되면서 무차별한 집단이 실체다. 공허를 본질로 가진 실존이 형식적 가능성이며 공허가 실현되어 공허 혹에 있는 실존이 곧 형식적 실제성이다.

여기서 형식적 가능성과 형식적 실제성이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추상적 사유 속에서 공허한 본질을 지닌 것으로 보면, 그게 형식적 가능성이고 이 어떤 것을 서로 공허를 통해 관계한 집단 속에서 보면, 그게 실제적 가능성이다.

실존의 본질인 공허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모든 실존의 본질이므로 순수한 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동일성이다. 그것은 마치 텅 빈 공간(유클리트 기하학적 공간)처럼 모든 것들을 수용하지만, 그 자신은 어떤 내용도 없는 것이다.

3)

외적 반성은 공허를 본질로 하므로 어떤 것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공허가 실현된 것으로 즉 실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부조리한 것조차 공허를 본질로 하면 실제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물이 하늘로 떨어지는 것도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도 여기서는 실제적인 것이다. 다만 외적 반성(형식적 사유)은 모순율을 따르므로 실제적이 되려면, 이 어떤 것은 형식적으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처럼 공허를 근거로 삼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니, 어떤 실제성은 이 공허를 근거로 하는 무한히 많은 것 중의 하나이니 그 자체가 실제적이기는 하더라도 ‘다만 하나의 가능한 것[Nur Moegliches]’(논리학, GW11, 383)이다. 그러므로 실제성의 본래 가치는 오히려 그것이 가능한 것 중의 하나이라는 데 있다.

거꾸로 공허라는 유적 본질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니, 공허라는 가능성은 “모든 것을 향해 열린, 관련성이 없으며, 무규정적인 용기”(논리학, GW11, 382)라고 한다. 이런 공허라는 가능성은 실제성에 비추어 본다면 가치가 없는 그 자체로 공허한 것일 뿐이다.

4)

공허는 가능성이고 근거이니,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단순히 가능적일 뿐이라면 가치가 없다. 그것이 실현되어야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당위이다.

그러나 공허는 근거이지만, 비어 있는 것일 뿐이니, 자기를 실현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와 반대되는 것이 실현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A=A라면, -A= -A이다.(A가 가능한 것이라면, -A도 가능한 것이다)

이는 형식논리학에서와 같다. 형식논리학에서 형식 속에는 어떤 내용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인 것이 그런 형식논리에서 가능하니 p가 실제라면, -p도 실제다. 형식논리는 한편으로 모든 세계에 적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세계에도 적용될 수 없다. 어떤 세계도 모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논리는 순수 사유 공간 속에서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형식논리학은 모순율을 원리로 하지만, 그 자신 가장 모순적인 것이다.

“가능한 것은 두 가지 규정을 갖는다. 다만 가능한 것이며 마땅히[Sollen] 형식의 총체성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당위가 없는 가능한 것은 본질 규정 자체이다…. 이런 가능성은 다만 계기이고 절대적 형식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정립된다. 이 가능성은 잠재적 존재이며 ..그에 못지 않게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가능성은 자기 자신에서 모순이기조차 하며 불가능한 것이다.”(논리학, GW11, 382)

외적 반성 속에서 실제성은 공허의 실제성이고, 공허는 실제의 가능성이니 양자는 상호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가운데 통일된다.

“따라서 이 실제성은 단순한 존재이거나 실존이지만, 그 진리는 정립된 존재 또는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정립된다. 거꾸로 가능성은 자기 내 반성이거나 잠재적인 존재인 한에서 정립된 존재로 정립된다. 가능한 것은 실제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실제적인 것이다.”(논리학, GW11, 384)

그러나 공허는 실제적으로 되지 않는 것이기에 가능성이며 어떤 것이 실제적이려면 그것에는 공허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형식적 가능성과 형식적 실제성은 서로 대립한다.

5)

여기서 가능성과 실제성을 매개하는 것이 곧 개체들의 관계이다. 실존하는 개체들이 서로 무차별한 것이고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어떤 가능한 것이 실현되니, 이런 실현은 개별적인 것인 것에 그치므로 우연적인 것이다. 헤겔은 여기서 등장하는 우연성을 형식적 우연성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연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연한 만남[Tyche]’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 우연한 실현에서, 그 근거는 공허이니, 그것은 심연[Ab-Grund: 근거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한 실제성은 심연에 걸쳐 있는 것이고 이 심연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근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공허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니, 그런 점에서 이 공허를 통해 실제적인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공허라는 필연성은 알지 못하는 필연성(운명)이며, 헤겔은 추상적(형식적) 필연성이라 한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모든 실존이 그 자체 심연을 토대로 한 것이면서 동시에 근거가 정립된 것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우연하게 실현된 것은 근거가 없으며 동시에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다만 우리가 그 근거를 알수 없는 근거일 뿐이다.

“우연적인 것은 우연적이므로 근거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연적인 것은 우연적이므로 근거를 지닌다.”(논리학, GW11, 384)

여기서 형식적 실제성은 곧 형식적 가능성이며, 양자는 서로 직접 전도한다. 하나의 실제성은 곧 모든 가능한 한 것 가운데 하나인 가능한 것이며, 가능한 것은 무엇으로라도 실현되는 것이니, 이미 하나의 실제성이다. 이런 전도, 끊임없이 요동하는 전도가 곧 우연성이다.

이런 우연성은 다시 필연성과 서로 부단히 전도한다. 우연적인 것은 공허를 근거로 지닌 것이니 필연적인 것이고 필연적인 것의 근거가 공허이므로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형식적 우연성은 자기 모순적인 것이다.

“두 가지 규정[실제성과 가능성]의 생성이 벌이는 이 절대적 동요가 곧 우연성이다. 그러나 각자는 직접 대립물로 전도하므로 이 우연성은 이런 동요 가운데서도 전적으로 자기 자신과 합일하며 이와 같은 양자의 동일성 즉 하나가 다른 것 속에 갖는 동일성이 필연성이다.”(논리학, GW11, 384)

앞에서 형식적 실제성은 모순율을 따른다고 했으나, 그 자신이 가장 모순적이다. 이런 모순을 통해 형식적 가능성은 상대적 가능성으로, 우연성은 개연성으로 이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