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

1)

시간, 공간은 무한한가? 앞에서도 밤하늘 무한한 천공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거나 시냇가 조약돌에서 아득한 시대 화석으로 남은 생물을 발견하면, 그 아득히 먼 시대를 상상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의 아득함에 관해 시인들은 많은 시를 지었는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을 다루면서 주석에서 할러의 시를 하나 인용한다.

숱한 산들처럼
엄청난 수를 쌓아 올리고
시간의 더미에 시간을, 세계의 더미에 세계를 쌓아 올리고
그리고 소스라칠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가
아득하게 다시 너를 내려다보면,
수의 위력이 천 배가 증가하더라도,
아직도 너는 단 한 귀퉁이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수의 위력을 떨쳐버릴 때
너의 모습은 생생하게 내 앞에 떠오를 것이다.

헤겔은 이 시의 앞부분은 무한한 시공간 앞에 느끼는 숭고함을 표현했으나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한다. 즉 차라리 무한한 수의 위력을 떨쳐 버릴 때 오히려 무한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수의 위력이란 곧 무한 진행으로서 악 무한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진정한 무한의 모습은 곧 내재하는 무한성 즉 자기 부정성으로서 무한성일 것이다.

2)

우리 앞에 있는 세계의 무한성에 관한 논의는 곧바로 세계의 유한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반박당한다. 세계에 시초가 있어야 하고 우주는 그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주장을 통해서도 무한성에 관한 주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니, 형이상학의 세계는 곧 세계의 무한성과 유한성이라는 주장의 전장터가 되었다.

이런 전장을 최종적으로 흽쓸어 버리려 했던 철학자가 곧 칸트였으니,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무한성이라는 주장이든 유한성이라는 주장은 이율 배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논증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칸트는 알다시피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 2편 2장에서 순수이성의 이율 배반을 다루면서 네 가지 이율 배반을 제시했다. 이 네 가지 이율 배반은 네 가지 판단형식의 범주 즉 질적 범주, 양적 범주, 관계적 범주, 양상적 범주에 각기 해당한다.

그 가운데 질적 범주에서 나타나는 이율 배반은 사물이 합성체인지 단순 실체인지 하는 이율 배반인데, 칸트는 이를 두 번째 이율 배반으로 다루었지만, 양적 범주보다 질적 범주를 우선하는 헤겔은 오히려 앞에서 질적 판단형식을 다룰 때 이미 다루었다.

헤겔은 양의 무한성을 논하는 가운데 칸트가 말한 첫 번째 이율 배반을 다룬다. 헤겔은 이 이율 배반이 양적인 것과 관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헤겔에서는 이 이율 배반이 두 번째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시간과 공간이 시초나 한계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세계가 양적으로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헤겔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자신과 칸트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으로 보았다. 반면 헤겔은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상호 관계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때 관계 방식은 바로 양적인 것의 방식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방식은 서로 동일한 일자와 일자의 외면적인 관계다. 나뭇잎과 나뭇잎, 물방울과 물방울의 관계에서 나뭇잎이나 물방울과 같은 구체적 대상을 제거한다면 바로 시간 공간적 관계가 된다. 이런 시간, 공간적 관계는 사물이 가진 모든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이 지닌 모든 구체적 관계를 추상한 가장 외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칸트와 같이 추상적인 직관의 형식으로 보든, 헤겔과 같이 사물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로 보든 일단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헤겔은 이런 양적인 관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과 무한성의 문제를 여기서(정량, c 절 양적 무한성, b 항 무한 진행, 주석 2) 다룬다.

4)

우선 정립은 세계가 유한하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시간에는 시초가 있으며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은 우선 이 정립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인용하면서 소개하는데,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지 않는다면 주어진 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이 흘러가야 하며 세계 속에 상호 뒤따르는 사물 상태의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런 계열이 무한하다는 것은 곧 이 계열이 계기적 종합을 통해서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한히 흐르는 세계 계열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의 시초는 세계가 현존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고 이것은 처음 증명되어야 했던 것이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29)

칸트의 증명은 간단하다. 시초가 없다면 어떤 현존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하는데 이 무한한 계열을 다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어떤 현존이 있는 것을 분명하므로, 시초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어서 공간의 한계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소개한다. 이 부분은 칸트의 증명을 헤겔이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된다.

“공간상 무한한 세계 부분들의 총괄을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세계가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주어진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 무한한 시간은 이미 흘러간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증명의 앞부분에서 제시됐듯이 무한한 시간이 흘러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이 증명의 핵심은 곧 공간이 한계가 없다면, 이 공간을 총괄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데, 무한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공간은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을 우리가 총괄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

5)

위와 같이 칸트의 정립을 소개한 다음 헤겔은 이를 비판하는데, 그의 비판은 칸트의 소위 귀류법적인 증명은 증명 속에 증명돼야 하는 것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미 칸트는 시간에는 시초가 있고, 공간은 한계가 있어서 총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현존이 있으려면 요청되는 것인데, 증명을 통해 증명돼야 하는 사실이다. 칸트의 정립 증명은 시간의 시초가 있고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므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니,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시간의 시초와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는가? 어떤 것은 그 시초를 모르는 것이거나 공간상 한계 없이 펼쳐지는 것이더라도 현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내 앞의 우주가 언제 생겼는지, 어디까지 펼쳐지는지 모르더라도, 내 앞에 우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증명되어야 하는 주장이 증명의 근저에 직접 놓여 있으므로 증명을 우회적으로 만들거나 증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원(영원은 여기서 다만 악 무한적인 시간이라는 형편없는 의미를 지닌다)이 흘러가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시점 또는 각 주어진 시점이 전제된다. 주어진 시점이란 곧 시간 속에 일정한 한계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증명에는 시간의 한계가 실제로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는 증명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립이 주장하는 것은 곧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6)

이어서 헤겔은 반정립을 살펴본다. 칸트가 말한 반정립은 세계는 시초를 갖지 않으며 공간상 한계도 갖지 않고 오히려 시간상이나 공간상으로 무한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칸트의 증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 하자. 현존하는 이 시초에 앞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선행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즉 공허한 시간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공허한 시간 속에 어떤 사물의 발생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같은 시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 앞에서 비 현존의 조건에 앞서 구별된 현존의 조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속에서 사물의 많은 계열이 시작할 수 있지만, 세계 자체는 시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계는 지나간 시간과 관계하여 무한하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31)

이 증명은 사물의 발생이 시간 속에 현존하는 조건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만일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시간에는 사물의 발생할 조건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물이 발생하려면 시초 앞에 시간에도 사물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세계의 시초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반드시 그 앞에 발생 조건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아무 조건 없이 출현하는 사물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초 앞에 공허한 시간이 있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헤겔은 이런 생각 끝에, 칸트의 증명이 정립에 대한 증명과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생 조건이 전제되는데, 이 발생 조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시초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시초가 없다는 것이 증명돼야 하는 과제인데 이미 발생 조건이라는 말 속에 함축적으로 전제되고 있다.

이어서 칸트는 공간에 한계가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는데, 이 증명은 시간의 무한성 증명과 같은 논리를 반복한다. 즉 사물의 공간이 한계가 있다면, 그 밖은 공허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면 공허한 공간 속에 사물의 공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시간의 무한성 증명에서는 조건이라는 개념이 이용됐다면 공간의 무한성 증명에는 관계 개념이 이용된다. 어떤 것이 공허와 관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무와 관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있으려면 공허가 아니어야 하고 사물의 공간은 다시 더 큰 사물 공간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결국, 사물의 공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발생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시간 앞의 시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면, 이미 공간 너머 공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이 미리 전제된다고 하겠다.

7)

시공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는 중장은 동시에 성립하지 않으니, 칸트는 이를 이율 배반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런 이율 배반이 나오는 이유는 사유의 범주, 판단의 형식을 경험적 개념에 적용하지 않고 물 자체의 개념 즉 시간, 공간, 우주, 세계와 같은 물 자체의 개념에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런 물 자체에는 유한성이나 무한성과 같은 사유의 범주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면서 거꾸로 말하자면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장이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곧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가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한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이다.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것은 곧 한계가 자기를 자기가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어떤 정량은 자기 내에 무한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함으로써 양적 무한성을 설명하려 했다.

헤겔은 칸트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계에서 모순을 제거하고 반대로 모순을 정신 속으로 또는 이성 속으로 옮기고 그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립시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나약한 태도다. 사실상 정신은 모순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력하며 그러나 또한 모순을 해소할 줄도 알고 있다. 그러나 소위 세계는 어디에서도 모순이 없지 않으며 모순을 견딜 수 없고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에 희생된다.”(논리학 재판, GW21, S.232)

세계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분투의 정신이 여기에 표현돼 있다.

[특별기고] 헤겔 정신현상학의 시대적 의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정신현상학의 시대적 의의

 

이 글은 『정신현상학 번역과 주해』의 발간을 기념해서 25년 11월 27일 대안 공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던 강연의 원고입니다.

 

글: 이병창(한철연 회원)

 

1) 필자의 관심

필자는 본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대학 시절 실존철학이나 불교에 깊이 빠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필자가 문학과 예술에 늘 마음을 빼앗겼던 것도 그 속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도 실존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데, 어느 날인가 철학 하는 선배의 석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기 시작했다. 그 논문의 주제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연구가 끝나지 않았다. 『정신현상학』은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으니 처음엔 그저 한 쪽을 읽다가 잠에 빠졌으며 읽기를 매번 다시 포기했다가 얼마 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이제 70대 노인이 돼버렸다. 그간 몇 권에 걸쳐 『정신현상학』의 비밀을 풀어보려 했으나 다들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두서너 해 전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대, 문득 죽음이 부르는 듯한 환청처럼 듣고,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이 책의 번역과 주해를 마쳐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사를 제치고 집에 틀어박혔다. 생각해 보면 학자적 삶의 거의 전부를 『정신현상학』의 이해에 매달렸으니, 무엇이 필자를 이 책에 걸신들리게 했는지를 이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몰두했던 것도 이 책이 본래 필자의 관심 영역인 마음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마음 즉 정신이란 단순히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삶의 가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심성 즉 실천적 의지나 정신적 표현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많은 철학은 마음을 다루더라도 주로 인식과 가치의 문제만을 다룰 뿐이고 심성의 문제나 표현의 문제는 심리학이나 교육학 또는 예술의 문제로 넘겨버렸다. 심리학이나 교육학은 경험적 방법이나 실용적 목적이 지배하고 심층적 이해는 없었다. 예술은 표현을 개인의 천성의 문제로 돌렸으니 아쉬웠다. 일부 철학(예를 들어 실존철학)은 심성의 문제를 다루기는 했으나 적절한 방법론이 없이 내적인 수련의 문제로 여길 뿐이었기에 그 역시 필자로서는 답답했다.

그런 마당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인식과 가치뿐만 아니라 심성이나 표현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학문적 방법론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필자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신현상학』을 조금씩 이해해 나가면서 그 가운데서 인간의 실천적 의지나 정신적 표현에 관련된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여기서 상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그 이름만 들어보자면 자기의식 장에 나오는 ‘노예 의식’과 ‘불행한 의식’이라든가, 이성 장에 나오는 ‘덕성’과 ‘세속’의 개념, ‘성실한 의식’ 그리고 정신 장에 나오는 ‘인륜적 의식’ ‛세계의 주인’ ‘소외된 정신’ ‘분열된 의식’이나 ‛순수 의식’ ‘유용한 존재’ ‘절대적 자유’ ‛전치[Verstellung]’와 ‛아름다운 영혼’의 개념 등이 있다. 헤겔은 많은 문학 작품이나 종교적 형태에서 그런 모습의 원형을 찾으려 했다. 그가 참고했던 대표적인 소설만 들더라도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나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야코비의 『볼데마르』 등이 있다. 그 모습은 필자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풍요로웠으니 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필자로서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헤겔은 그 모습을 역사적으로 출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과거의 모습을 극복하는 한에서 출현하며, 출현했다가는 역사적 운동을 거쳐 다시 자기 모순에 빠지고, 그럼에도 새로운 극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 모습은 한편으로 보면 역사 앞에서 부딪히는 모순 때문에 비극적으로 몰락하면서 숭고성을 띤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현실의 역사를 은폐하려는 시도 속에서 풍자되고 희화화된다.

 

2) 정신현상학의 역사적 배경

그런데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동기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그 시대 역사적 배경이며 여기서 정신현상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나온다. 다른 하나는 철학적 배경인데 여기서 정신현상학이 전개되는 구조와 전개 방식이 나온다.

① 독일의 궁핍

우선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헤겔 시대 이웃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이미 민족적 통일 국가와 근대적 민주주의 체제 그리고 활발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중세 봉건적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17세기 초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은 소 국가로 분열됐으며, 각 국가는 봉건적 지배 아래 있었고 자본주의적 발전은 오히려 후퇴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전해 받고,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일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독일에서도 혁명적 지식인이 출현했다. 헤겔 역시 이 시대 청년기를 보냈으며, 그런 혁명적 지식인의 이상을 공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청년들은 프랑스 혁명 가운데 전개된 공포 정치에서 충격받았으며, 새로이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목격했으니, 혁명적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근대적 체제를 실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공포와 불평등이 없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② 헨 카이 판의 이념

그것이 곧 헨 카이 판[hen kai pan]이라는 이념이었다. 이것은 곧 ‘하나이자 전체[All Einheit]’라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이 원리는 그리스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헤겔은 청년기부터 시인 횔덜린과 자연철학자 셸링과 더불어 가슴에 품고 있었다고 하는 원리다. 이 원리를 헤겔은 각자는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라는 의미로 재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간단히 공동체적 정신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런 이상의 가능성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 곧 칸트였다. 칸트는 로베스피에르가 사사한 루소의 일반 의지 개념이 지닌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순수 의지 즉 도덕적 자유의지 개념을 제시했으니, 칸트의 세례를 받은 청년 지식인들은 이런 도덕적 자유의지를 통한다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뜨게 됐다.

그러나 칸트의 순수 의지 개념은 나름대로 문제를 지녔으니,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낭만주의자는 이를 양심 개념으로 발전시켰으며, 헤겔은 그것조차 넘어선 ‘하나이자 전체’라는 절대지의 개념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칸트 철학에서 새로운 빛이 탄생했다고 한다. 이 빛은 철학적으로는 선험철학이며 사상적으로는 그의 순수 의지 개념이다. 칸트는 이런 순수 의지가 지닌 자체 내 한계 때문에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이 출현했다고 한다.

③ 낭만주의의 한계

헤겔은 낭만주의적 양심 개념을 정신현상학의 절대정신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루었는데, 그만큼 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시대 낭만주의자들이 나갔던 길을 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여러 흐름이 있지만, 대체로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이 학생운동은 예나 대학에서 시작돼서 전국적으로 파급됐다. 학생들은 학생조합이라고 할 부르셴샤프트를 조직해서 활동했는데, 초기에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학생운동은 독일의 통일과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1807년 나폴레옹의 독일침략을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분열했다. 상당수는 보수화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전향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적으로 전향했다. 그런 가운데 중세를 이상화했고 신성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며 그 후예라고 할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지했다. 반면 급진파는 전쟁 이후 1814년 발트부르크 축제를 통해 보수파의 저서를 불태우는 등 급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운동은 급진파와 보수파로 분열된 가운데 온건 개혁파라고 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개혁 운동을 반대했다. 여기서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낭만주의와의 대결이 전개됐는데, 이때 헤겔은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이 지닌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보면서 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바로 이것이 그가 사상적으로 절대정신으로 이행하게 된 역사적 동기였다고 하겠다.

 

3) 정신현상학의 목적

헤겔은 이념적으로는 낭만주의자들이 지닌 이념을 지지했다. 그 역시 헨 카이 판의 공동체를 지지했으며 이를 통해 독일의 봉건제와 민족적 분열, 자본주의적 참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그는 칸트의 순수 의지도 아니고 낭만주의의 양심도 아니며 그것을 넘어선 절대정신을 요구했는데, 그렇다면 절대정신이란 무엇인가?

헤겔에서 절대정신이란 곧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단순히 공동의 목적(이성, 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공동체는 그와 동시에 개별 의지의 통일체 즉 집단의지 또는 공동 자아를 말하며, 이는 국가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절대정신은 곧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우리가 이성이 실천적으로 실현된 형태로 들었을 당시에는 우리에게 절대적 본질로 나타났으나 여기서는 자신의 진리에 도달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식된 인륜적 본질 즉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본질로 등장한다.”(446 구절)

이런 절대정신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 하나는 내적인 모습인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정신으로 출현한다. 이는 근대에서 개신교를 통해 출현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모습인데 앞으로 구체적으로는 국가로 출현해야 할 이상이다. 이는 곧 사랑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사회 제도를 의미한다.

헤겔은 이 사회 제도를 나중에 법철학에서 제시했는데 이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전개된 것이다. 즉 국가가 삼위일체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을 말한다. 삼위일체는 각각이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라는 헨 카이 판의 원리에 기초하지만, 개별자와 일반자 사이에 양자를 매개하는 특수자를 개입시켜 세 가지 항이 각기 전체이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계기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국가 속에서 이런 삼위일체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법철학에서 나오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자.

정신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절대정신에 도달할 수 있는 가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절대정신에 추상적인 윤리적 사유가 아니라 역사를 통한 실제 훈련을 통해 몸으로 직접 체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이런 절대정신에 도달하는 길을 찾으려 했으니, 바로 이것이 정신현상학이 정신의 역사로 구성된 이유다.

 

4) 정신현상학의 철학적 배경

그렇다면 역사 속에서 정신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여기서 헤겔은 정신이 전개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이런 고민은 그 시대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① 의식 경험의 길

『정신현상학』이 전개되는 방법은 헤겔이 「서론」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개념을 통해 밝혔다. 이 개념은 칸트의 선험철학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곧 대상이란 의식의 범주가 규정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의식의 경험은 대상 너머에 있는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이는 곧 의식의 범주로 규정되지 않는 딜레마나 모순이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 철학은 이런 물 자체에 부딪힘으로써 그 너머 영역은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규정했다. 이 물 자체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였다. 직관으로 돌아간 셸링과 달리 헤겔은 칸트 선험 원리를 지키면서도 이 물 자체의 난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헤겔은 여기서 의식 경험의 개념을 제시한다.

헤겔에 따르면 의식 경험의 길에서 딜레마나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물 자체는 사실 그 의식이 이미 전제한 특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것 때문이다. 그런 특정한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더는 딜레마나 모순이 출현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딜레마나 모순에 부딪히면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여 기존의 의식 형태와 다른 새로운 의식 형태가 출현하며 이를 통해 의식이 자기 내로 반성하는 것이 곧 헤겔이 말하는 의식 경험의 길이다.

의식의 자기 내 반성은 그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대상을 넘어 물 자체 즉 딜레마가 출현하는 것을 매개로 한다. 의식이 딜레마를 매개로 더 일반적 의식으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물 자체는 의식이 파악하는 현상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 이에 따라 의식이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의 영역도 확장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의식 경험 역시 일정한 범주를 전제로 구성된 것이니, 다시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이렇게 매번 새롭게 등장하는 물 자체는 이전에 출현했던 물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물 자체가 될 것이다.

② 근거로의 복귀와 개념의 실현

 

이와 같은 ‘의식 경험’의 개념에 따르면, 의식은 개별적 형태에서 일반적 형태로 발전한다. 즉 좁은 영역에만 적용되는 의식의 범주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물 자체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영역에 적용되는 일반적 의식 범주로 발전한다. 개별적 의식에 대해 일반적 의식은 근거가 되는 것이므로 의식 경험의 운동은 자기 내에 있는 근거로 복귀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의식이 물 자체라는 대상에 부딪히는 운동이며, 마침내 의식과 대상이 통일되면서 자기의식이 되는 운동이다.

의식의 이런 운동은 출발점에서 본 운동이다. 이 운동을 그 결과에서 그리고 대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결과는 더 포괄적인 대상이므로, 이런 대상이 의식의 출발점에 가능성으로 있다가 마침내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운동은 추상적이며 가능적인 것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나가며, 헤겔은 이런 운동을 개념의 자기실현 운동이라 한다. 여기서 추상적 가능성을 헤겔은 그 자체 존재라고 하고 이 그 자체 존재는 자기 밖의 물 자체에 대립하게 되면, 대자 존재와 대타 존재로 분리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을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대자적인 것이라 한다.

——————–

여기서 의식의 반성과 대상의 출현이 서로 매개한다. 의식이 자기 내로 발전하는 과정은 거꾸로 보면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 즉 물 자체가 출현하는 과정을 매개로 한다. 거꾸로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은 의식의 자기 내 반성을 매개로 한다. 의식이 더 일반적 의식이 되면서 더 근본적인 대상의 본질이 출현하게 된다.

————————-

의식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그 의식을 넘어서 규정될 수 없는 물 자체가 출현할 것이니 이 과정은 개방적이고 열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시대에서는 더는 당시의 의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대상은 없으니, 그런 한에서 이 과정은 닫힌다. 열림과 닫힘은 서로 교체된다. 열린 운동 끝에서 보면 닫힌 것이며, 닫혔다 하더라도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면, 다시 열리게 된다.

의식의 경험에서 의식은 개별적 의식에서 일반적 의식으로 발전한다. 반면 대상의 실현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니, 양자는 서로 전도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전자가 상향적이며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는 개방적 과정이라면 후자는 하향적이다.

의식 운동이나 개념 운동은 서로 매개하는 것이니, 의식 운동의 이면에 개념 운동이 있으며, 개념 운동의 이면에 의식 운동이 있다. 헤겔의 경우 대부분 학문은 개념 운동의 길을 택하고 있다. 학문의 경우(논리학이든 자연철학이나 정신철학이든) 개념 운동이 전면에 나오며 그 이면에 의식 경험이 전개된다. 반면 『정신현상학』의 경우는 의식 경험의 길이 전면에 나오며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대상의 개념 운동이다.

———————–

마르크스는 헤겔이 말한 의식 운동과 개념 운동을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으로 설명했다. 연구 과정은 경험적으로 얻어지는 개별 사실들에서 출발하여 가장 일반적이고 근거가 되는 원리로 나간다. 서술 과정은 연구 과정을 통해 발견된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추상적 원리를 구체화하면서 현실의 대상을 설명하게 된다. 마르크스의 경우에서도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이 서로 매개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보면, 장마다 먼저 개념적으로 서술한 다음 이를 다시 역사적인 발전을 덧붙이는데, 이는 연구 과정과 서술 과정이 매개됨을 보여준다.

③ 형태와 계기의 운동

 

의식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전의 의식 형태는 이후의 의식 형태에 내면화[기억:Erinnerung ]되니, 이후의 형태가 전개될 때는 이전의 형태가 다시 반복된다. 다만 과거의 것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 형태를 지반으로 해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를 개념의 계기가 된다고 한다. 의식 형태의 이행은 개념의 계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영된다. 전자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이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후자는 논리적 과정이며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상의 개념 운동과 같은 것이다. 시간 속에서 이행과 사유 속에서 이행은 서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평행한다. 양자의 과정은 마치 계통의 발생 과정을 개체가 반복하는 것과 같다. 헤겔은 이를 형태와 계기의 관계라고 한다.

 

5) 정신의 전개 과정

헤겔에서 정신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 정신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즉 인식과 실천적 의지 그리고 표현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세 가지 영역을 개별성과 일반성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해서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정신현상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이 구성은 대체로 헤겔이 칸트의 범주표에서 끌어낸 4개 범주(12개 판단형식)에 대응한다.

정신현상학 내용 판단형식
의식 개별적 인식 개별자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시도가 다루어진다. 질 범주
자기의식 개별적 의지

(자아)

형식적 자유의의 출현 과정이 탐구된다. 이는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 내적으로 출현하고 스토이시즘과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을 거쳐 현실적으로 출현한다. 양(본질) 범주
이성 일반적 인식 사물의 일반적 본질이 인식된다. 이는 자연에서는 분류학의 형태로 출현하며, 인간 사회에서는 정의의 개념으로 출현한다. 실체 범주
정신 일반적 의지

(일반적 자아)

개별 의지가 자기를 극복해서 일반적 본질 즉 정의를 실현하려는 이성적 의지로 발전하는 과정이 다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칸트의 자유의지, 낭만주의의 양심 개념 들이 다루어진다. 개념 범주
절대정신 정신의 표현

(예술, 종교, 철학)

정신의 표현은 개별 의지를 공동 자아로 조직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 공동 자아는 종교에서는 교회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며, 절대지의 단계에서는 삼위일체적 이상 국가로 출현한다. 이념

이런 과정에서 자기의식의 단계에서 개별적 자유의지가 출현한다. 이는 곧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의지, 결정하고 선택하는 의지를 말한다. 이성의 단계에서 사회의 공동 목표라고 할 정의가 파악된다. 그리고 정신의 단계에서 이런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는 실천적 의지가 형성된다. 마침내 절대정신의 단계에서 이런 실천적 의지 가운데 공동체의 정신이 출현하면서 구체적으로 이상 국가의 출발점이 된다.

 

6) 정신현상학과 이 시대의 철학

마르크스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이고 다른 한 번은 희극이다. 마찬가지로 사상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90년대 초 포스트모던 사상이 불어닥쳤다. 대체로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후기 구조주의에 기초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진리도 부정하고 어떤 가치도 부정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억압을 반대한다는 긍정적 가치도 지니지만,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결국 개인주의, 상업주의, 쾌락주의를 정당화해 왔다. 이는 이 시대 함께 퍼진 신자유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전후로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모던 사상의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전개됐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직관주의적 철학이 발전했다. 라캉은 이드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 있다고 보았으며, 들뢰즈는 사물을 생성하는 미분적 차이를 직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직관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라진 진리와 객관적 가치를 찾으려는 숭고한 노력이었으나, 직관 개념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직관은 결국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수놓은 이런 사상의 발전은 거슬러 올라가면 헤겔 당시의 사상사적 발전을 상기시킨다. 칸트의 선험철학은 구조주의와 유사하다. 이어서 등장한 낭만주의 철학은 직관주의다.

헤겔은 칸트 선험철학을 계승한다. 즉 사태를 인식하는 데서 개념의 구조를 전제한다. 그렇게 된다면, 칸트가 말했듯이 물 자체의 아포리아에 부딪히고, 상대적 현상주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헤겔은 개념의 구조를 전제하면서도 진리와 객관적 가치의 인식에 육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개념을 거부하고 직관에 의존해 진리를 인식하려는 낭만주의를 비판했다. 즉 진리를 회복하려는 낭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방법에서 헤겔은 직관이 아니라 구조적인 개념을 통해 가능하다 보았다. 그 과정에 곧 앞에서 말한 의식 경험의 길인데 즉 모순과의 대결을 통해 사유가 객관화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식 경험의 길을 통해 헤겔은 한편으로 자기가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독선적 오만에 빠지는 것도 경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포기하고 상대적 세계에 머무르는 것도 거부한다. 헤겔은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는 모순에 온 몸으로 부딪혀 가면서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고투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주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헤겔이 제시하는 정신적 고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뉴턴의 물리학을 포함하면서도 넘어서는 것이거나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의 노동 가치설을 수용하면서 이를 넘어서 독자적인 가치론을 확립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0-양적 무한성

1)

앞에서 셈법과 수의 종류를 다룰 때 정수에서 분수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양이 출현한다고 했다. 정수는 외연 량을 표현한다. 그것은 길이나 무게와 같은 추상적인 개별 량이다. 분수는 비례 량을 표현한다. 이것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무게와 부피의 비례인 비중, 거리나 시간의 비례인 속도와 같은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 성립하는 구체적인 양을 비례 량이라고 이름 붙였다. 양자를 매개하는 것이 내포 량 또는 정도다. 내포 량은 타자와 비교에서만 성립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양이다.

외연 량(정수)에서 비례 량(분수)으로 나가는 과정은 경험적으로는 경험이 더 풍부해져서 개별적 정량을 넘어선 다른 정량들 사이의 관계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겔은 이런 이행을 추상에서 구체로 나가는 개념의 실현 운동으로 설명한다.

이 운동 과정에 대한 헤겔의 설명은 모호하다. 이는 c절 양적 무한성 절에서 설명되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악 무한’에서 ‘진 무한’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이 악 무한(예를 들어 무한대나 무한소)으로 표현됐다가, 이것이 무한 진행임이 밝혀지고 나아가서 그 본질은 진 무한 또는 내적인 무한성 개념이라는 사실이 자각된다.

처음 악 무한을 다룰 때는 헤겔의 설명은 동일한 정량에서 정량의 운동(예를 들어 길이의 확장)을 설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진 무한 개념이 등장하면서 이 진 무한이 곧 비례 량 즉 다른 정량의 내적 관계임을 천명하면서 끝난다. 이 과정은 약간 어리둥절하게 보이며 이 과정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헤겔이 논의를 전개하는 독특한 방법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헤겔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2)

먼저 헤겔에서 양적 무한성에 관한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하나의 정량과 다른 하나의 정량이 관계다. 이 관계는 길이나 무게와 같은 개별 정량에서 두 정량의 관계로 볼 수도 있고 비중같이 두 다른 정량 사이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차라리 헤겔의 개념 규정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두 차원을 넘나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개별 량와 비례 량이라는 구체적 내용의 차이를 무시하고 두 정량의 일반적 형식적 관계를 보자.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인 일자에서 동일한 대자 존재인 다른 일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서로 같은 대자 존재가 관계한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며 각 대자 존재는 고유한 일자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되고 무차별하므로 이 관계는 분산적이다.

양적 관계가 이와 같은 이중성을 지니므로, 어떤 정량의 부정은 정량의 타자지만 또 하나의 정량이 된다. 그러므로 그 부정은 새로운 정량에 머무르지 못하며, 그 새로운 정량조차 자기를 부정하게 하니,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된다. 새로운 정량은 기존 정량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부정되니, 이중 부정 또는 자기 부정이며 이런 점에서 무한 정량, 즉 양적인 무한성이 된다.(이런 자기 부정성 개념은 길이나 무게 등 개별 정량의 무한 진행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앞에서 질적 무한성 개념을 다룰 때도 양적 무한성에서와 마찬가지의 자기 부정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같은 자기 부정성이더라도, 질적 무한성과 양적 무한성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이제 현존 절에서 다루었던 질적 무한성과 양 절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을 비교해 보자.

3)

질적 존재에서 규정성은 어떤 것이 지닌 속성이다. 예를 들어 소금은 짜거[p]나 입방체[-p]다. 모든 소금은 짜며, 동시에 입방체다. 양자의 통일은 p가 아니고 -p도 아니며 동시에 p이면서 -p인 것이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p와 -p를 매개하고 자기를 p와 -p로 출현하게 하는 동시에 양자를 초월하는 일반성 즉 대자 존재다.

이 질적 무한성 즉 대자 존재는 자기를 때에 따라 p나 -p와 같은 대립하는 성질로 나타내는 운동을 의미하지만, 그 자신은 질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양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왜냐하면, 대자 존재와 대자 존재는 일자와 일자의 관계이며 양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질적 무한성은 양으로 이행한다.

일반적으로 질적 규정성은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타자의 부정을 통해(반성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짠맛은 입방체에 대립해서 짠맛으로 규정된다. 즉 p는 -(-p)이다. 양적인 것에서는 이런 타자에 대한 대립 관계가 사라진다. 그 때문에 질적 성격도 사라진다. 여기서는 동일한 대자 존재 그러나 서로 무차별한 존재 즉 일자와 일자 사이의 관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적 존재에서 두 대자 존재, 즉 일자와 일자는 서로 동일한 것이면서도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두 개의 나뭇잎, 두 개의 물방울은 서로 무차별하면서도 서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양적인 무한성 즉 p가 아닌 것은 그 자체가 p이므로 자기 자신도 부정할 수밖에 없으니 어떤 부정은 자기 부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끝없는 자기 부정성이 곧 양에서 나타나는 양적 무한성이다. 이런 양적 무한성은 하나의 정량 내에서 이 정량이 자기를 부정해서 자기를 넘어서게 만드는 것 그러므로 내적인 무한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정량에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 독특하다는 사실이다. 정량의 자기 부정성은 어떤 정량의 타자가 곧 자기 즉 자기와 같은 대자 존재이므로 나타나는 자기 부정성이다. 그러므로 이 부정성은 타자를 부정해서 다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는 타자로 미끌어지는 것(무한 진행)이며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미끌어진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무한성이다. 그러나 타자를 부정해 자기로 돌아온다는 측면에서는 규정성이다. 질적 규정성이란 타자에 대립해서 나타나는 부정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무한성을 통해 양에서 질적인 것이 회복된다.

4)

예를 들어(이런 의미에서 양적 무한성은 개별 량에서보다 오히려 비례 량에서 더 잘 드러난다) 무게는 독자적인 정량일 수도 있고 부피에 비례하는 정량일 수도 있다. 후자가 비례 량이다. 전자일 때는 정량의 규정성(예를 들어 삼 미터)은 자기(길이)에 대해 외면적이다. 그 규정성은 자기에 무차별하다.

그러나 부피에 비례하는 무게 즉 밀도 또는 비중은 같은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정량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은 그저 무게와 무차별한 부피에 대해 무게가 외면적으로(사유를 통해) 비교된 것이 아니다. 비중은 부피라는 자기의 타자에 대해 관계하며 그것도 대립적으로 관계하니 즉 비중이 크다는 것은 자기의 부피를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중은 부피에 대립하고 부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므로 질적인 규정성이 다시 회복된다. 비례 량을 이루는 구성 요소인 개별 양은 추상적이고 그 각각은 양적 관계를 갖지만, 비례 량에 이르면, 그 자체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양적 관계에 머무르면서도 이제 질적 차이를 발생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양적 무한성 즉 이중적 부정은 “어떤 정량으로서뿐만 아니라 정량 자체로서 지양된 정량이다.”(논리학 초판, GW12, S. 140)라고 한다. 즉 단순히 하나의 정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량 자체를 부정하는 것 즉 질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정량은 자기의 비 존재 무한자를 매개로 하여 다른 정량 속에서 자기 규정을 갖는다. 즉 질적인 차원에서 정량의 본성으로 된다. 그러나 정량의 개념과 그 현존을 비교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반성에 속하며 즉 여기서 아직 출현하지 않은 비례에 속한다. … 이제 외면성 속[정량의 타자]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외면성 속에 자기 관계하며 자신과 단순한 통일성 속에 있고 질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5)

“이 비례 속에서 정량은 자기에 외면적이며 자기 자신과 상이하다. 그러나 이 자기의 외면성, 다른 정량에 관계하는 것이 동시에 그의 규정성을 이룬다. 이 속에서 무차별한 규정성이 아니라 질적 규정을 갖는다. 정량은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초판, GW12, S. 153)

5)

양적 무한성의 개념은 이처럼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 개념을 통해서 무한대나 무한소, 무한 진행, 진정한 무한성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한다.

무한대, 무한소는 무한히 크고 무한히 작은 것을 실체화하여 실제로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다. 그것은 마치 피안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다. 반면 무한 진행은 정량이 극한에 도달한 순간 다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을 말하니, 비유하자면 수평선을 끝까지 가면 다시 더 멀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과 같다.

그러나 헤겔은 무한대나 무한소는 잘못된 이미지라고 보며 이를 일단 무한 진행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에 따르면 그것은 무한 진행의 왜곡된 표현이며 이 무한 진행을 일정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대나 무한소로서 무한량은 본래 무한 진행이다. 그것은 크거나 작은 것으로서 정량이면서 정량의 비존재다. 따라서 무한대나 무한소는 표상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 표상은 좀더 가까이 다가가 고찰해 보면, 무실한 그림자와 안개처럼 나타난다.”(논리학 재판, GW21, S. 233)

“정량을 넘어서는 것은 정량의 부정 즉 무한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량이 정립되면서 이것은 무한의 부정이다. 이 악 무한은 표상에서 절대자로 여겨지며 다시 지양되지 않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더는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논리학 초판, GW12, S. 151)

헤겔은 이런 무한 진행 역시 넘어서면서 이 무한 진행은 진 무한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한 진행은 끝없이 자기를 부정해서 앞으로 나가는 운동인데, 진 무한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탈자화의 운동 자체를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무한 진행와 진 무한은 다를 바가 없다. 둘 다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이다. 진 무한이라 할 때는 어떤 정량 속에 그것이 자기를 넘어서는 운동을 말한다. 무한 진행이라 할 때는 그런 진 무한의 운동한 결과 도달한 결과가 다시 넘어서서 끝없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진 무한이 내적 운동이라면 무한 진행은 그런 내적 운동의 표현이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질적 무한성에서도 출현한다. 이때는 질적 무한성은 대립하는 성질을 넘어서는 포괄적 일반화로 즉 대자 존재로 나간다. 그러나 양적인 것의 평면에서는 자기 부정성은 즉 양적 무한성은 일반화가 아니라 옆으로 미끌어지는 무한 진행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무한 진행의 진정한 모습이 내적 부정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외면적으로 끝없이 앞으로 나가는 모습만을 취해서 본다면 그것이 헤겔이 비판하는 무한 진행이다. 무한 진행은 아직 내적 부정성의 운동임을 모르고 있는 내적 부정성의 운동일 뿐이다. 거꾸로 무한 진행이 지닌 본래적 모습을 자각한다면, 그것이 곧 진 무한이다. 헤겔은 이 진 무한을 ‘정량의 개념’, ‘개념에 따라서 규정된 정량’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한자는 다만 최초의 부정으로 규정되고 무한 진행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무한 진행 속에서 그 이상의 것이 출현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 왔다. 즉 부정의 부정 또는 본래적으로 무한자인 것이 말이다. 이런 사실은 정량의 개념이 이를 통해 회복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논리학 재판, GW21, S. 234)

5)

위에서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은 진 무한을 왜곡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헤겔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실 이런 무한의 여러 종류는 자연의 운동 또는 수 운동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헤겔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해 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양적 무한성은 정량에 내재하는 운동이며 이는 곧 자기를 부정하는 또는 자기를 넘어가는[Hinaus] 운동이며, 자기를 벗어나는 운동 즉 탈자화[Aussersich]로 규정된다. 그런데 이런 양적 무한성은 정량의 종류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운동을 보자. 이 자연의 운동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등속 운동 S=at a ; 1, 1, 1 (정수): 속도가 고정된 운동

등가속 운동 S=vt v=S/t : 1/2, 2/4, 3/6 (유리수적 분수)…. : 일정한 양으로 속도가 증가하는 운동

가속 운동 S=1/2at² a=2S/t² : 1/2, 1/4, 1/9(무리수적 분수) … : 속도가 가속적으로 증가하는 운동

여기서 세 가지 운동은 전혀 다른 운동으로 보이지만, 사실 하나로 환원될 수 있다. 즉 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가 등가속운동이고 이 등가속 운동이 단순화된 형태 등속 운동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운동을 이렇게 본다면, 이 관계를 다시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양적인 영역에서 운동의 개념은 탈자화하는 운동이다. 즉 자기를 부정해서 또 다른 자기로 이행하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의 개념이 등속 운동에서는 가능성으로만 나타나고 비로소 가속 운동에 이르러 그 개념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등속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이 가능성에 머무르고 감추어져 있다. 무한 진행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 운동에서 운동의 개념인 운동의 기울기가 곧 0라는 것을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운동은 외면적으로만 나타나고 그 결과 운동은 악 무한이나 무한 진행이라는 외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면 기울기가 일정수인 경우나 기울기가 증폭하는 경우에서도 그 운동은 무한히 확산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무한 진행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운동의 개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운동이 확산하거나 증폭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있는 운동의 기울기가 내적 부정성, 진 무한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6)

자연의 운동이란 본래 두 가지 정량 사이의 관계다. 이는 등가속 운동이나 가속 운동이 분수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런 운동의 개념은 이미 개별 양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등속 운동에서도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등속 운동도 비례 량이다. 이미 거기서도 두 다른 정량이 관계하고 있다.

등속 운동에서는 비례 량이라는 사실도 드러나지 않기에 여기서는 마치 개별적 정량이 자기 내에서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나 등가속, 가속 운동에 이르러 운동의 개념이 드러나면서 두 다른 정량의 비례 량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존재론 현존 절은 판단 형식에서 질적 범주에 해당한다. 존재론 양적인 것은 판단 형식에서 양의 범주를 다룬다. 이때 1절 양적인 것은 양의 운동 일반을 다룬다. 2절 정량은 양의 판단 형식에서 최초의 판단인 단칭 판단의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단칭 판단이 부정되는 가운데 양적 무한성 개념이 출현하고, 그 결과 등장하는 진 무한은 곧 특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진 무한은 곧 비례 량이니 비례 량이 특칭 즉 양적인 어떤 것에 해당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9-외연량, 내포량, 비례량

1)

앞에서 정량에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외연랑은 자기의 한 부분을 단위로 해서 자기를 잴 수 있다. 외연량은 이 단위가 몇 배인가[Vielheit]로 표시된다. 수적으로 표현하자면 외연량은 기수로 표시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물체의 길이나 무게와 같은 정량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헤겔은 이런 외연량은 “자기 내에서 개수”, “자기 관계하는 다수라는 규정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내포량은 이런 몇 배라는 방식으로 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기본 단위가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것의 내포량은 다른 것의 내포량과 비교를 통해 더 많거나 더 적거나 하는 방식으로만[Mehrheit] 표시된다. 수적으로 말하자면 내포량은 다만 서수로만 표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가 경도에서 스무 번째라 할 때 그런 점에서 경도가 첫 번째 되는 사물보다 다이아몬드의 경도가 스무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여러 사물의 경도를 서로 비교해 볼 때 스무 번째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포량은 이처럼 타자와 비교를 통해 나오지만, 여전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하나의 정량이며 이는 비교되는 타자와 공유하는 정량일 뿐이다. 즉 물질의 경도나 강도나 감각적 뜨거움이나 가벼움 등과 같은 특정 정량이 비교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내포량은 “자기 밖에 있는 것으로서 개수,” “자기에게 외면적인 것으로서 규정성”을 갖는다고 한다.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넘어서 새로운 정량의 형태로 이행한다. 이 새로운 정량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중과 같은 것인데, 이는 두 개의 정량(부피와 무게)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다. 이제 단순한 정량에서 관계 속에 있는 정량 즉 비례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자연에는 이처럼 두 개 정량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정량이 많다. 비중을 예로 들었지만, 비중 외에도 등속도 운동을 보자. 속도는 시간에 비례한다. 등속 운동은 분수로 표현된다. 즉 p=V/t이다. 또 뉴턴의 힘의 법칙에서 힘은 질량이나 가속도에 비례한다.(즉 F=am)

앞에서 수의 종류가 발전하는 가운데 분수가 출현한다고 했다. 분수는 더하기, 곱하기를 거쳐 셈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이런 셈법은 단순히 사유의 유희는 아니다. 이런 분수가 곧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면, 이 분수는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정량 즉 두 개의 정량 사이의 관계 또는 비례를 통해 만들어지는 정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분수를 통해 표현되는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보다 더 발전된 정량이다. 외연량이 자기를 단위로 하는 것이라면, 내포량은 타자와 비교하되 결국 동일한 단순한 정량의 측면에서 서로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포량은 자기 관계를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등장하는 비중과 같은 비례량은 더는 단순한 정량에 머무르지 않으니, 여기서 비교되는 정량은 비교하는 정량과 전혀 다른 정량이다. 즉 하나의 정량이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비교의 대상을 단위로 측정된다.

어떤 것이 단순히 자기 관계하지 않고 타자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면, 그것은 질적인 것이 된다. 헤겔에서 질이란 타자의 부정성을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타자는 그 질과 대립하는 타자이며, 이때 두 가지는 반성 관계에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헤겔에서 빨강은 항상 빨강이 아닌 색과 대립해서만 빨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정량이 단순한 자기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립하는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된다면 그때 이 정량은 질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외연량과 내포량은 단순한 정량이다. 그 정량의 한계를 규정하는 방식 즉 몇 배수[Vielheit]냐 아니면 크고작음[Mehrheit]이냐 방식의 차이다. 그런데 외연량과 내포량을 측정할 때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외연량이나 내포량은 서로 환원될 수 있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량을 지닌 정량과 관계하면, 내포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무게를 보자. 무게는 외연량이지만, 만일 피부에 가해지는 압박감을 통해 규정된다면 내포량으로 규정된다. 무거운 것은 강하게 압박하고, 가벼운 것은 약하게 압박한다.

“외연적 크기는 내포적 크기로 이행한다. 왜냐하면, 그 다수의 개수[Vieles]는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 총수 즉 다수의 개수 바깥에 등장하는 총수로 몰락하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거꾸로 내포량도 외연량을 지닌 다른 정량을 통해서 규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감각적 내포량인 뜨거움을 보자. 이 뜨거움은 수은주를 확장하는 효과를 지니는데, 그런 수은주의 확장은 외연량으로 측정된다. 그러므로 뜨거움도 외연량으로 규정될 수 있다.

“다르게 규정된 내포성에 무차별한 것으로서 이 단순한 것은 외면적인 개수를 그 자체에서 가지며, 따라서 내포적 크기는 본질적으로 외연적 크기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외연량과 내포량은 사실 단순한 정량이므로 실제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측정하기 위해 추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모든 정량은 항상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 있으므로, 이런 관계의 방식에 따라서 외연량은 내포량으로, 내포량은 외연량으로 전환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두 정량의 관계를 통해서 규정된 새로운 정량 즉 비례량은 외연량인 동시에 내포량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례량이라는 개념을 통해 헤겔은 외연량과 내포량을 통일한다. 앞에서 두 정량의 관계 즉 비례량을 통해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이 출현한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연결하면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양자[내포량과 외연량]의 동일성으로부터 질적인 어떤 것이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 동일성은 자기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에 관계하는 총수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13)

4)

정량에는 수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있다. 수가 분수로 발전하면서 단순한 정량은 관계를 지닌 비례량으로 발전한다.

분수는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유리수에 머무르는 것과 무리수가 되는 것이다. 유리수적 분수가 자연수의 비례 관계로 표현한 것이라면 무리수에서는 제곱의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 예를 들어 등속도 운동 S=vT 와 가속도 운동 S=1/2aT² 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일 분수에서 허수가 개입하게 된다면, 이는 원운동과 같은 것으로 출현할 것이다.

양자는 마찬가지로 분수로 표현되지만, 그 의미는 달라진다. 등속도 운동, 가속도 운동, 원운동은 서로 다른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의 관계를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즉 등속도 운동도 하나의 가속도 운동이지만 가속도 운동의 가장 낮은 단계일 뿐이며, 마찬가지로 가속도 운동도 원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원운동의 가장 낮은 극한에서 등장한 한 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를 헤겔적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등속도 운동에서는 개념이 아직 숨어 있고 마침내 원운동에 이르러 비로소 개념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연량, 내포량, 비례량을 서로 다른 자연의 운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외연량은 내포량의 가장 낮은 극한이며, 내포량은 비례량의 가장 낮은 극한으로 볼 수 있다. 즉 비례량에서 표면에 드러나게 될 개념이 외연량에서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감추어진 개념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숨어 있는 개념이 표면에 드러나는 과정은 어떻게 일어날까? 헤겔은 바로 그것을 부정의 작용으로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정의 부정이라는 이중 부정인데, 이런 이중 부정을 통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드러난다.

이 정량에 감추어진 개념이 곧 무한 개념이다. 헤겔에서 이 무한 개념은 곧 자연의 운동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어서 헤겔은 2편 2장 3절에서 ‘양적 무한’ 개념을 다루는데, 여기서 헤겔은 비례량에서 드러날 무한 개념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추적해 나간다. 무한 개념은 외연량과 내포량, 비례량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앞에서 나타난 무한 모습(무한소나 무한대/ 그리고 무한 진행)은 최종적인 비례량에서 나타나는 무한의 모습즉 진 무한을 암시하며 선취하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무한 개념의 발전 밑에는 정량의 종류에서 발전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8-셈법과 수의 종류

1)

앞에서 여러 번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정량의 화폐라고 말했다. 이 수를 세는[Zaehlen] 것을 셈법[Rechenschaft]이라 한다. 셈법은 초등학교 들어가서 배우는 제일의 기법이다. 누구나 셈법 하면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하기 빼기는 그 가운데 더 초보적이고 곱하기에 숙달하려면, 외우는 것이 요구된다. 구구단을 얼마나 외웠는지, 이 나이 들어 자기 전화번호는 종종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구구단은 잘 외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는 구구단이라 하는 데 독일 사람들은 일일단[Einmaleins]이라 한다. 이왕 농담하는 김에,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발간한 수학에 관한 소개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그러니까 중세 독일의 한 상인이 자식을 상인으로 키우기 위해 셈법을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독일 대학교수(아마 수학 교수는 없었고 철학 교수였을 것이다)에게 자식을 데리고 가서 후하게 해 줄 테니 자식에게 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 더하기 빼기까지는 저희가 가르칠 수 있지만, 곱하기 나누기를 배우려면, 이탈리아 유학을 가야 합니다.”

이 농담의 전거를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로마자로 수를 표현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듯하다. 솔직히 지금 필자는 로마자로 된 숫자조차 제대로 읽기 힘들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셈법이 이처럼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단순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 셈법에 관한 철학을 제시했으니 말이다. 좀, 웃길 것 같은데, 사실은 헤겔의 논리학에서 정량에서 무한량 개념으로 이행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서 결정적인 것이다. 이 부분에는 전거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헤겔 논리학 재판에서 대체로 주석에 관한 한, 초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주석조차 초판을 대폭 확장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이 바로 정량과 무한량을 다루는 절에 속한 주석이다. 무한량을 다룬 주석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광대한 주석을 달아서 소위 해석기하학의 근본원리 즉 무한계산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다룬다. 그에 앞서서 정량의 1절(제목 수)에 덧붙인 주석 1에서는 초판의 주석에 덧붙여 바로 이 셈법을 철학적으로 다룬다.

2)

헤겔은 이 셈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항상 다만 동일한 것을 다루면서도 외면적으로 산출하는 셈법의 상이성은 셈해지는 수들의 상호 차이에 놓여 있다. 그런 구별은 어디 다른 곳에서 외면적인 규정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 셈법의 차이가 곧 수들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셈이란 동일한 수를 다루는 것이 아닐까? 더하기와 곱하기, 나누기에서 셈하기 전의 수와 셈한 이후의 수는 동일한 수다. 이런 수들은 소위 자연수 가운데 어느 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니, 셈법의 차이와 수의 차이는 무관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헤겔은 수의 차이에서 셈법의 차이가 나온다고 하는데,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셈법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우선 더하기와 빼기를 생각해 보자. 이건 어렵지 않다. 3 더하기 4는, 3개까지 개수를 세고, 더해서 4개의 개수를 더 센 것이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세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개수가 그대로 보존된다는 것이다. 즉 7개의 개수가 아니라 8개나 6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명제는 분석적이라 본다. 하지만 이 분석적 명제를 아는 데는 경험적으로 즉 손가락으로 세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12개의 개수라는 사실은 분석적으로 알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떤 총수로 표현하는가를 알려면, 손가락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빼기는 더하기로 환원된다. 3 빼기 2은 3 더하기 -2이다. 즉 3에서 거꾸로 세워가면 된다. 빼기가 더하기로 환원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여기서는 -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 수는 앞으로 가는 것이라면, -수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수가 등장하면서 수가 하나의 벡터 즉 운동하는 방향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의 시야가 공간의 좌우로 뻗어 나간 것이다.

3)

이제 곱하기를 생각해 보자. 더하기는 1이라는 단위를 개수만큼 반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 곱하기 4에서, 곱하기는 3이라는 총수가 이제 기본 단위가 된다. 그래서 이런 기본 단위를 4번 반복하는 것이다. 즉 3+3+3+3이다. 3은 1+1+1이니, 위의 곱하기는 (1+1+1)+(1+1+1)…로 환원할 수 있어서, 곱하기는 더하기와 다름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의 기본 계기를 단위, 개수, 총수로 볼 때, 여기서 단위는 총수와 일치한다. 즉 총수가 기본 단위가 된 것이다. 더구나 3 곱하기 4는 4 곱하기 3이나 마찬가지다. 즉 3이라는 총수를 단위로 보고 4를 개수로 보든, 4를 단위로 보고, 3을 개수로 보든, 마찬가지다.

나누기는 곱하기를 변형한 것이다. 3 곱하기 4는 12라는 명제는 12를 4 또는 3으로 나누면 3 또는 4가 된다. 이는 얼마나 여러 번 기본 단위 3이나 4가 주어진 총수 속에 포함돼 있는가를 의미한다. 그 답이 곧 개수다. 또는 나누기는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즉 어떤 총수를 주어진 개수(3이나 4)에 도달하도록 나누려면 기본 단위를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떻든 곱하기와 나누기는 총수를 원하느냐, 개수를 원하느냐, 단위를 원하느냐 하는 요구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일 뿐이다. 일정한 과자를 자기 아이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주려면 단위가 필요하며, 일정한 과자를 한 아이가 먹을 만큼 나누어주면 몇 명이나 먹일 수 있는가를 생각하려면 개수가 필요하다. 나가서 자기 아이가 먹을 만큼 과자를 사려면 얼마나 사야 하는지, 그 총수를 알려면 곱하기가 필요하다.

더하기는 양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다. 빼기에 이르면 수는 정수로 확장한다. 곱하기는 여전히 정수에 머무르는 것 같지만, 나누기에 이르면 이제 수는 분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곱하기에는 여전히 자연수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것을 변형한 나누기에 이르면, 자연수를 넘어선 분수가 출현하게 된다.

곱하기는 다시 거듭제곱으로 발전한다. 거듭제곱 예를 들어 3³은 3*3*3이다. 이것은 처음 3이라는 총수가 단위로 되어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 결과는 9인데 이제 9가 단위가 되어 다시 3의 개수만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 거듭제곱은 곱하기로 환원되고, 다시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단순한 곱하기는 반복적이지만 여기서 곱하기는 누적적으로 일어난다. 누적하는 운동이 들어간다.

나아가서 거듭제곱은 새로운 수를 발생한다. 이는 그것에 대립하는 운동인 근의 운동에서 드러난다. 제곱근은 4의 제곱근은 +/-2이어서 지만, 5의 제곱근은 루트로 표현된다. 즉 무리수다. 나가서 삼제곱이나 삼제곱근에 이르면 허수가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셈법의 상이한 방식은 수의 종류와 연관된다. 한편으로 셈법이 발전하면서 수의 종류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분수나, 무리수, 허수 등이 인간 사유의 산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은 오히려 거꾸로 설명한다. 즉 수의 종류는 자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정량의 운동과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며, 이 운동과 관계를 우리가 인식 또는 파악하면서 셈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헤겔은 앞에서 말했듯이 셈법의 기원은 수의 차이에 있다고 한 것이다.

4)

그렇다면, 수의 종류는 정량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까? 헤겔은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하는데, 분수와 무리수다. 무리수는 나중에 무한량(미분양)과 관계되는 데, 우선 정량을 다루는 데서는 분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 분수를 보자. 그런데 분수란 무엇인가? 헤겔은 이 분수를 단순한 수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두 가지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비중은 질량과 부피의 관계다. 가속도는 힘과 질량의 관계다. 분수는 이런 두 개의 정량이 갖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자연 속에 정량은 하나의 양이다. 이 정량은 동일한 일자의 반복적 관계이며, 이 정량은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구분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외연량은 자기의 한 부분으로 자기를 측정한다. 이는 단순한 자기 관계다. 헤겔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추상적이라는 말이며, 개별적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길이나, 무게 등등 각각은 이런 추상적인 개별적 정량이다.

그런데 내포량에 이르면 이 내포량은 이런 추상적인 단순한 자기 관계를 벗어난다. 내포량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만 측정되며, 즉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어떤 점에서 더 많고 더 강한 것이다. 헤겔은 이런 내포량은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관계하는 정량이라고 규정한다.

내포량에서는 아직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에 대한 관계가 출현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과 비교되지만, 그러나 비교되는 것 자체는 동일하다. 즉 다이어몬드의 강도와 유리의 강도가 강도라는 하나의 정량에서 비교된다.

그러나 이제 내포량을 넘어서 하나의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출현하는 정량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앞에서 예로 든 비중이나 가속도와 같은 것인데, 수로 보면 이런 관계는 분수 즉 비례나 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가 분수가 된다는 것은 사유의 유희가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두 정량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분수가 고안된 것이다. 헤겔은 정량이 다른 정량과 관계하면 이 관계를 통해 질적인 정량이 등장한다고 본다. 양에서 다시 질이 되돌아온 것이다. 비중이나 가속도는 양적인 것이지만, 이미 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다.

앞에서 질을 설명하면서 두 성질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대자 존재가 출현하고, 이로부터 양적인 것이 출현했다고 했다. 이제 거꾸로 양이 서로 관계 맺으면서 질을 발전시킨다. 이 질은 단순한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질적 성격을 지닌 양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양이 질로 발전한다는 사실은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심지어 양적인 것을 자연에서 제거하려는 철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 될 것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47-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7-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인가?

 

1)

논리학은 정량을 다루는 가운데, 수 개념을 제시한다. 이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 즉 상품을 대표하는 화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수가 지닌 모든 속성은 정량에서부터 유래한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수학에 관한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에 개입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제시한 주장 즉 ‘수학적 명제는 선천적 종합 명제다’라는 주장이다. 헤겔은 이를 주석에서 다루는데, 그의 주장에는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있어 여기 소개한다.

알다시피 칸트는 아주 기초적인 수학적 명제를 예로 든다. 즉 ‘7+5는 12라는 명제’다. 칸트는 여기서 ‘더하기’라는 개념을 분석하더라도, 그 더해진 수가 ‘12’라는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12라는 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손가락을 이용해 7개를 세고, 더 나가서 5개를 더 세어야 한다. 이렇게 세어진 결과 구부려진 손가락을 직관하면서, ‘12’라는 수를 떠올린다. 그러므로 칸트는 개념을 넘어서 경험적 직관의 도움 없이는 위의 명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면서, 위의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명제라고 말한다. 즉 경험적 직관의 도움이 없어도 위의 명제가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에서 ‘더하기’란 가장 외면적인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적인 일자들 사이에 서로 외면적인 관계, 서로 동등하면서도 서로 구분되는 관계를 다룬다고 했다. 양자의 서로 동등한 관계가 곧 물질적 관계며, 양자의 서로 구분되는 관계가 공간적 관계다. 물질적인 관계와 공간적 관계는 상호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양적인 것의 관계는 가장 외면적인 관계다. 여기서 서로 관계하는 일자들 사이에 어떤 내적인 연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외면성은 기하학적 공간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하학적 공간은(일단 여기서는 유크리트적 공간을 말한다) 텅 비고 동질적이어서 그 속에서 도형을 아무리 이리저리 이동하더라도 그 도형은 서로 합동이며 즉 도형의 내적 성질은 그런 공간적 이동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양적인 것은 가장 외면적 공간이어서 그 속에서 정량들이 맺는 관계는 그 정량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7개에 5개를 더하더라도, 전자의 개수가 7개인 것에는 변함이 없고 후자에 개수 5개 역시 그대로 남아 있으니,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12개의 개수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직관이나 경험의 도움이 없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며 이는 분석적인 사실이다.

칸트는 12개의 개수가 있을 때 이를 ‘12’라는 총수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언어적 표현의 문제이다. 12개의 개수를 ‘12’라는 수로 표현하는 것은 12라는 수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언어로 표현할 것이다. 만일 12개의 개수를 표현하는 언어가 ‘12’라는 수가 아니라, ‘한 다스’라는 언어이어서 그 결과를 ‘한 다스’로 표현하더라도 문제는 없다.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는 언어적 문제이지 ‘더하기’라는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2)

칸트가 수학이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의 예로 또 하나 끌어들인 것이 기하학의 명제다. 그것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다’라는 명제다. 이 명제가 선천적 종합 명제라는 주장에 대한 칸트의 논증은 간단하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질적인 개념이다. 직선은 ‘곧바른’, ‘단순한’ 선이라는 말이니 말이다. 반면 ‘최단은 양적인 개념이다. 즉 길이가 가장 짧은 것이라는 의미다. 질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이 나오지 않으니, 위의 명제는 분석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명제다.

헤겔은 여기서 칸트가 직선 개념을 오해했다고 한다. 직선은 단순히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선에는 이미 양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즉 직선은 그저 ‘곧바른 것[Gerade]’ 가 아니라 ’곧바른 선[Gerade Linie]’이므로 위의 기하학적 명제는 양적인 개념에서 양적인 개념을 끌어낸 것일 뿐이다.

이렇게 칸트를 반박한 다음, 헤겔은 직선 개념에서 최단 개념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끌어낸다. 직선은 가장 ‘단순한’ 선이니 ‘자기 관계하는’ 선이고, 이런 ‘자기 관계’는 “어떤 종류이든 규정의 상이성이나 그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관계도 정립되지 않은 것”이니, 따라서 ‘최단’의 선이다는 것이다. 그 논증의 핵심은 곧 직선은 두 점 사이에 놓인 축에서 벗어난 제3의 점을 거치지 않으므로, 즉 우회를 거치지 않으므로 최단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직선이라는 규정은 사실 다름 아니라 단적으로 단순한 선이다는 즉 그 탈자화(점의 운동) 가운데 단적으로 자기 관계하며, 그 확장 속에서 어떤 종류의 상이한 규정이나 자기 바깥의 점이나 선에 대한 어떤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 단적으로 자체 내 단순한 벡터[Richtung]라는 의미다.”(논리학 재판, GW21, S. 200)

헤겔의 논증은 겉으로 보기에도 좀 억지 또는 궤변처럼 보인다. 기하학적 명제에 관한 한, 칸트가 말한 것처럼 경험적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기하학적 논증이 일정한 특수한 공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보면, 거기서 헤겔은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이 작도에 의존하며, 그런 작도는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기하학적 명제가 순수하게 개념적이며 분석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여기서 비록 칸트가 예로 들기는 했더라도, 굳이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여, 수학이 분석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기하학은 해석기하학을 통해 수학으로 환원됐으며 해석기하학은 특수한 공간에 적용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달리 순수한 양적인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적 명제의 성격에 관해서 이미 다분히 경험적인 기하학적 명제를 끌어들이지 않고 수의 관계를 통해서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알다시피 칸트는 이런 수학적 명제는 경험적이면서도 필연적(보편적)이어서, 그 때문에 선천적 종합 명제라 불렀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적 명제가 경험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이라는 사실 역시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은 수학적 명제가 분석적이라고 했다. 분석적이라면 필연적이 아닌가? 적어도 칸트의 용법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헤겔은 그 필연성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헤겔의 필연성 개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헤겔에서 필연성은 사태가 내적으로 연관돼서. 연관된 하나의 사태에서 다른 사태로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고도 충분한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수학적 명제가 토대를 두고 있는 양적인 것의 관계는 서로 외면적인 것이다. 동일한 일자가 반복되면서 맺는 양적인 관계는 같은 것의 반복(물질적 측면)이어서 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인 필연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 관계는 서로 단적으로 다른 것의 관계(공간적 측면)이어서 불연속적이며 그런 한에서는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무차별한 측면에서는 그 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수의 관계를 보면, 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분석적이다. 그러나 다른 것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체적 사물을 일자라는 것으로 추상화해서, 즉 단순한 물질이나 공간으로 볼 때, 이 사물의 수적 관계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어떤 일자를 구체적인 것으로 본다면, 이것들의 관계는 비록 수학적으로 표현되더라도 필연적이 아니고 우연적이다.

즉 손가락을 추상화하며 동일한 일자로서 볼 때 여기서 더하기는 분석적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구체적 사물로 볼 때(수자는 본래 손가락을 지시하는 명사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즉 손가락 두 개로 보지 않고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 중지로 보면, 이런 구체적 사물의 관계에서 더하기라는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엄지와 검지를 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를 통해 중지가 나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관계이며, 수적인 필연성을 지닌 관계는 아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칸트는 수학적 명제를 선천적 종합 명제라 했다. 헤겔은 수학적 명제는 분석적 우연의 명제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최근 언어철학자 크립케는 고정지시어를 경험적이며 필연적 명제라 했는데, 그의 주장은 칸트에 가깝다기 보다 헤겔에 더 가깝다.

4)

수학적 명제가 이처럼 추상적인 일자의 관계 즉 추상적인 물질이나 공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헤겔은 수학의 한계를 본다. 근대에 들어와 수학은 자연과학의 도구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세계의 모든 관계를 표현하려 시도했다. 즉 수학을 철학의 방법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헤겔은 자연과학에서 수학이 놓아준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역학적 물체를 다루는 영역은 전적으로 양적인 영역이니, 여기서 수학을 적용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 한다. 수는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를 충분히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수학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자연 전체를 즉 생물학이나 심지어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할 때 이런 철학적 시도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경우에는 이미 더 복잡한 물질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 수학적 관계를 적용한다는 것은 생물이나 인간을 역학적 물체로 환원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진정한 사상, 가장 생동적이며 가장 운동적이고 단지 관계 속에서만 개념화되는 것이 이같은 탈자의 지반[즉 수] 속으로 옮겨지면서 죽은 운동이 없는 규정으로 변한다. 따라서 사상의 규정과 관계가 풍부할수록 수와 같은 형식으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황량하고 자의적인 것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6)

물론, 헤겔은 수학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과 사상의 가운데 있는 추상적인 일자의 영역 즉 양적인 영역이므로 수학적인 것은 사유를 통해 사상에 다가가는 예비적 단계로서 사유를 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가 수학을 배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로 수를 사용한다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 기호이란 표면적인 유사성(도상)이나 단편적 흔적(지표), 관습적 관계(상징)만으로도 상징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와 같은 수학적 상징이 그러하다.

그러나 헤겔은 ‘삼위일체’라는 수학적 상징은 개념의 발전 즉 일반성, 특수성, 개별성 사이의 내적 필연적 연관을 성자, 성부, 성령과 같은 자연적인 가족적 관계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런 수학적 상징은 수가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념의 내적 발전이나 연관을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는 한계가 있다. 다음과 같은 헤겔의 한탄을 들어보라.

“고대인은 사상규정을 위한 수적 형식의 불충분성을 매우 올바르게 통찰하고 있었으며 사상을 위한 임시변통 대신에 사상에 본래적인 표현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요구했다. 고대인들은 숙고의 측면에서 오늘날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나았는가,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다시 수 자체와 수적 규정을 … 사상 규정 대신에 정립하면서 무능력한 유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어떤 가상할 만한 것이며 근본적이며 심원한 것으로 여긴다.”(논리학 재판, GW21, S. 205)

헤겔 형이상학 산책 46-내포량과 외연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6-내포량과 외연량

1)

앞에서 수에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다. 단위[Eins]와 개수 그리고 총수[Einheit]¹이다. 정량에서 단위는 그 정량에 외면적인 것이지만, 정량은 이 단위의 반복을 통해 규정되므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다. 개수는 단위가 모인 집합이므로 불연속적이다. 총수는 이런 단위를 전체로 총괄하는 것이므로, 연속적이다.

주1: Eins, Eeinheit와 같은 표현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대체로 Eins는 일자 즉 정량을 이루는 단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때로는 문맥상 어떤 수가 고유한 개별자로 존재할 때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7은 하나의 일자이다. 또 Einhiet도 대체로 총수를 의미하는데 어떤 때는 차라리 단위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더 적합할 때도 있다. 혼란이 있지만,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헤겔에서 개수도 연속성의 측면이 있으며 총수도 불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개수가 불연속적인 것의 집합이라 할 때, 세어지는 각 일자는 서로 같은 것이므로,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 같은 것들끼리는 연속적이니, 그 점에서 개수도 연속적이다. 마찬가지로 총수가 내적으로는 연속적인 것이지만, 다른 수와 비교해 보면 단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것이니, 이런 점에서 총수는 불연속적인 것이기도 하다.

2)

앞에서 말했듯이 질의 범주에서는 질이 서로 관계하여 통일되면서 대자 존재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 대자 존재는 양적인 것의 출발점이 된다. 양의 범주에서는 그 반대다. 여기 양에서 양적인 것이 서로 관계하면서 질적인 것이 다시 출현하는 과정이 다루어진다. 이처럼 질적인 것이 다시 출현하는 데서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내포량의 개념이다.

헤겔에서 내포량은 외연량과 비교된다. 양자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양적인 것을 규정하는 일자 즉 양적인 것의 원리이며 그 자체 규정성의 원리인 단위다. 외연량에서 단위는 자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이다. 어떤 것의 크기는 자기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을 거듭 반복하면서 재어질 수 있다.

그 단위가 자기 자신이므로 여기서 규정성은 자기 관계에 머무른다. 이런 자기 관계는 아직 타자를 통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자기 관계다. 여기서는 어떤 크기는 그 단위가 몇 번 반복된 것인지가 확정된다. 이것을 통해 개수와 총수가 주어진다.

그런데 내포량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말해지는 대로 감각의 정도를 말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사물은 경도나 강도에 따라 비교될 수 있다. 이런 경도나 강도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비교될 수는 없다. 이것은 자기와 다른 것과 비교돼서 더 크고 더 작은 정도를 지닐 뿐이다. 철기는 청동기보다 더 강하다. 서로 부딪히면 청동기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유리보다 다이아몬드는 더 큰 경도를 지닌다.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자를 수 있다.

이처럼 내포량은 오직 다른 것과 비교된 크기므로, 더 강하고 더 약하다는 비교를 통해서 서열을 매길 수는 있지만, 과연 그 정도가 몇 배나 더 큰가를 말할 수는 없다. 다이아몬드 이런 비교를 통해 서열상 20번째라고 한다면, 여기서도 개수와 총수가 나오니 이것도 하나의 정량이기는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서열상 첫 번째 사물(예를 들어 유리라고 하자)의 20배나 더 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헤겔은 외연량은 배중성[Vielheit]을 가진다고 말하며 내포량은 가중성[Mehrheit]을 가진다고 한다. 즉 전자는 몇 배인지를 알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더 많은 것인가 많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외연량에서 개수는 ‘자기 내에서의 개수’이고 내포량에서 개수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개수’라고 한다.

“외연량과 내포량은 정량의 동일한 규정이다. 그 구별은 외연량은 개수를 자기 안에 가지며, 내포량은 이를 자기 바깥에 가진다는 데 있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3)

여기서 ‘자기 바깥에’라는 말은 타자와 비교된다는 말일 것이다.

“정도는 특정한 크기지만, 집합이거나 단지 자기 내에 머무르는 더 많은 것[Mehreres]은 아니다. 정도는 더 많음[Mehrheit]인데 더 많은 것은 단순한 규정 속으로 복귀한 더 많은 것[Mehere]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0)

여기서 ‘자기 내에 머무르는 더 많은 것’과 ‘단순한 규정 속으로 복귀한 더 많은 것’이 비교된다. 그 의미를 새겨 보면, 전자는 많고 적음이 세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후자는 많고 적음이 세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외연량은 세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내포량은 그저 비교될 뿐이다.

3)

어떻게 본다면, 내포량은 양적인 것에 아직 불완전하게 도달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처음에 단순히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 측정된 것들도 엄밀하게 자기 관계하면서 몇 배나 되는지가 측정되고 외연량으로 규정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체온은 처음에는 감각의 정도였다. 손으로 재면서 내 체온보다 높으면 뜨겁고 내 체온보다 낮으면 차갑다. 그러나 이제 체온계를 통해서 재어지면서 얼마나 높은지, 몇 배나 되는지가 수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꾸로다. 즉 내포량은 외연량보다 한 단계 발전된 것이다. 왜냐하면, 외연량은 추상적인 자기 관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만, 내포량은 이제 타자와 관계하면서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 질적인 것이 지닌 의미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외연량은 타자와 비교되는 것이지만, 사실 이 타자는 자기와 같은 것이다. 즉 타자는 예를 들어 경도나 강도와 같은 일정한 측면에서 비교되는데, 자기와 타자는 공통으로 이 경도나 강도를 가지고 있다. 결국, 이 타자와의 관계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며, 여전히 자기 관계라는 추상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자기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이제 정량은 다른 정량과 관계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정량인 길이와 무게가 서로 관계하면서 비중이 출현한다. 관계한다는 것[Verhaltniss]은 곧 비율[Verhaltniss] 또는 비례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비중의 정도는 두 개의 정량이 관계 또는 비율이다.

최근 과학에 대한 실망에서 과학적 사고를 비판한다. 현상학적 철학의 계열에서는 과학적 사고는 양적인 것을 토대로 한다. 과학적 사고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양적인 것을 통해 개별적이여 구체적인 질적인 차이를 제거한다. 양적인 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하는 사유가 만들어 낸 것이므로, 자연을 왜곡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과학적 사유는 자연을 파괴한다. 나아가 오늘날 시장 사회에서는 개인이 지닌 개성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개인의 양적인 가치만이 중요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소외되며, 평범하고 진부한 존재로 격하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는 질적인 감각의 정도로 규정된 내포량(흔히 감각량)은 질적인 것이 여전히 보존된 것으로서 추상적 자연과학을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감각의 정도를 측정하는 예술가는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과학자가 된다.

헤겔은 다른 의미에서 이 감각량 즉 내포량에 주목하는데 이를 통해서 추상적인 양으로부터 감각적인 질적 차이가 다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관점은 다르지만, 동일하게 양적인 것의 극복을 내포량에서 찾는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내포량은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 관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면서 그 자기 관계가 타자를 통해 측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내포량을 유사한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외연적인 타자 존재를 더는 자체 내에서 갖지 않고 이를 그 밖에서 가지며, 그 자차 존재에 자기규정으로서 관계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일자로서 수는 개수의 무차별성과 외면성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외면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자기에 관계한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무차별한 규정성이 정량의 질을 이루며 즉 그 자체에서 자기에 외면적인 규정성으로 존재하는 규정성이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정도는 그러한 내포성이 더 많음이라는 것 아래 있는 단순한 크기 규정이다. 이 크기 규정은 각각이 단지 자기 관계하며 동시에 서로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상이한 규정이다. 그러므로 각각은 다른 것과의 연속성 속에서 자기규정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 21, S. 211)

“이 자기 외면성이 내포량이고 단순한 규정성이다. 다시 말해 자기 관계하면서도 동시에 그 규정성을 타자 속에 갖는 것이며 그 규정성은 그 자체에서 자기에 외면적인 규정성이다.”(논리학 초판, GW 11, S. 133)

“정도의 각각은 자기 관계하는 크기 규정으로서 다른 크기 규정에 무차별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서 이 외면성에 관계하며 다만 이 외면성과 매개해서만 그 자신의 본질로 된다.”(논리학 재판, GW 11, S. 134)

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5-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

1)

헤겔 논리학을 다루면서 논리학의 구조가 판단 형식 즉 범주가 전개되는 방식과 상응한다고 말했다. 그런 상응에 비추어 보면, 정량은 양적 판단 형식 가운데 첫 번째 단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질을 다룰 때도, 존재와 무의 상관관계를 통해 현존을 끌어냈다. 존재와 무는 현존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관계 즉 ‘관계있음(존재)’과 ‘관계없음(무)’를 말한 것일 뿐이고, 실제 질적 판단 형식은 현존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현존이 질적 긍정 판단에 해당한다.

이런 전개 방식은 양을 다루는 때도 마찬가지다.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양적인 것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정량의 일반적인 상호 관계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양적 판단 형식이 처음 시작하는 것은 정량에서부터다. 질적 판단 형식에서 현존에 해당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는 정량이다.

2)

정량과 수의 관계는 앞에서 말했다. 정량 속에 이미 수적 관계가 들어있다. 수는 나름대로 하나의 정량이며, 다만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기호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정량에서 이미 존재하는 수적 관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상품 속에 이미 교환가치의 관계가 들어있다. 화폐도 하나의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즉 화폐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수에 관한 심리주의자는 수를 인간의 셈이라는 주관적 활동으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것에 대해 논리주의자는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수는 알다시피 초월성 또는 객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플라톤은 수를 이데아로 여겼다. 양적인 존재 즉 정량은 이런 이데아가 분유 되어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의 객관성은 마치 화폐가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마르크스는 금의 자연적 속성에서부터 화폐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일종의 물신화로 여겼는데, 마찬가지다. 수의 객관성을 수가 지닌 고유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면 이는 물신화에 해당한다.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듯이 수의 객관성은 정량에서 나온다.

3)

정량은 수로 대변되므로 헤겔은 정량을 논하면서 자주 수를 끌어들인다. 정량을 다루는 2편 2장 A 절은 아예 ‘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A 절에서 헤겔은 수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외연량과 내포량이다.

흔히 수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연속적 수와 불연속적 수다. 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¹를 다루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불연속적 수 또는 크기(정량)를 다루는 것이 산술학이다. 고대에 기하학과 산술학은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기하학은 주로 이집트 그리스에서 측량술로부터 발전했다. 산술학은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에서 발전했다. 인도가 수 0을 발견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주1: 헤겔은 양적인 것[Quantität]을 크기[Größe]와 구분한다. 크기는 규정성을 지니므로 정량[Quantum]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가 자연수에서나 분수에서처럼 불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일찍 발견됐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비밀로 여긴 무리수의 발견이 여기에 속한다. 무리수는 수이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연속적 수다. 이 수가 서로 분리된 유리수 사이에 끼어들면서 수는 단순히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임이 알려졌다. 수를 불연속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를 숨기려 했던 것은 이 발견이 고대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기하학은 공간적 크기를 다루고, 여기에는 수가 개입하지 않는다. 기하학은 변이나 각, 길이의 같음과 다름을 다룰 뿐이다. 물론 기하학에서도 삼각형이라든가, 사각형 등에서 보듯이 수가 부분적으로 개입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루는 대상에 관한 것이지, 기하학이 다루는 것은 여전히 같음과 다름일 뿐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기하학적 방식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대수학이 발전하면서 피타고라스 정리가 대수학적으로 증명됐고 나아가서 근대 해석기하학에서 대수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기하학적 크기 역시 불연속적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인정되기에 이른다.

대수학의 발전은 기하학의 연속적 크기가 불연속적 크기를 가지며, 거꾸로 산수적 불연속적 크기가 연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수를 이렇게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는 것을 의미 없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량을 다루면서 당시 흔히 다루었던 방식대로 연속적 크기와 불연속적 크기로 나누지 않고, 외연량과 내포량으로 나누었다.

4)

이제 외연량과 내포량, 외연적 크기와 내포적 크기의 관계를 다루기 전에, 이 두 가지 크기의 공동 지반이 되는 정량을 살펴보자. 정량은 개념적으로는 양적인 것이 규정성 또는 한계를 지니면서 출현한다.

이런 정량은 구성하는 요소는 우선 일자다. 이 일자[Eins]는 정량의 수를 셀 때 출발점이 되는 것 즉 기본 단위다. 이 단위를 무엇으로 하는가는 자의적이다. 물의 양을 재기 위해 우리는 부엌에서처럼 바가지로 잴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처럼 비커로 잴 수도 있다. 전통적 단위인 ‘냥’으로 잴 수도 있고 국제 표준 단위인 그램을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단위를 사용하든 자의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고유한 객관적 단위는 없다. 헤겔은 어떤 정량을 재기 위한 단위를 그저 ‘일자’라고 한다.

정량을 단위로 재면, 두 가지 계기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를 개수[Anzahl]와 총수[Einheit]라고 한다. 이 두 계기가 수를 설명하는데 아마도 헤겔만이 제시한 독특한 개념이다. 우선 개수는 어떤 단위가 얼마나 여러 번 반복됐는가를 말한다. 20의 크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이 스무 번 반복돼야 한다. 즉 20에는 1이 스무 개 들어있다.

20개 속에 들어있는 1 즉 일자는 서로 동일하다. 그 중 어느 것도 1일뿐이다. 또한, 이들은 서로 동등하다. 세 번째 1과 네 번째 1은 세기 나름이지, 달리 세어서 세 번째를 네 번째로 세고 네 번째를 세 번째로 세더라도 무방하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20개 속에 있는 일자는 불연속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자는 아무리 빨리 세더라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어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총수[Einheit]를 보자. 이것은 1을 스무 번 반복해서 나온 ‘20’이라는 수가 다른 수 예컨대 ‘9’라든가 ‘21’과 같은 수와 비교해서 가지는 의미다. 이 20은 개수로 보면 스무 번 반복한 것이지만, 총수로 보면, 다른 수처럼 고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엄지와 검지는 개수로 보면 1과 2지만, 총수로 보면 각자 고유한 것 즉 엄지와 검지다. 엄지는 머리를 누르는 것이고 검지는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다. 스무 개라는 개수가 고유한 스물이 되는 게 바로 수다.

20이 스무 개라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인 것의 집합이다. 그러나 20을 총수로서 고유한 크기로 보면, 그 속에 모여 있는 20개라는 분리된 것들은 의미가 사라지고 전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것 즉 연속적인 것이 된다. 그러기에 이름이 총수[Einheit: 통일성]이다.

“수는 그 계기로 총수와 개수를 가지며 그 자체에서 양자의 통일이다. 총수는 연속성의 계기며, 개수는 분리의 계기를 이룬다. 양자는 정량 속에서 수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초판, GW11, S. 126)

5)

정량에서 개수와 총수가 이처럼 두 계기를 이루므로, 헤겔은 정량의 규정성과 질적 현존의 규정성을 비교한다. 질적 현존에서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이고 외면적일 뿐이다. 그것은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된 것이다. 예를 들어 빨간색은 파란색에 대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에서 규정성 즉 한계는 다른 규정성과 구별되는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다른 규정성과 연결되고 있으니, 4는 3과 5와 다른 것이지만, 동시에 단위인 일자를 셋에서 한 번 더 더한 것이며 한 번 더 더하면 다섯이 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타자에 대립해서 규정되지만, 후자의 측면에서는 자기 관계해서 규정된 것이다.

어떤 사물의 정량이 20이라고 할 때, 이 개수로서 20이든 총수로서 20이든, 그 기본 단위가 자의적이므로, 그 정량은 자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나이가 스무 살 된 대학생보고 팔십 먹은 노인네라 해도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이를 셀 때 1년을 단위로 하지 않고 계절별로 세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량이라는 크기는 어떤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고 그 사물의 본성과 무관한 무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정한 단위가 전제된다면, 그때 정량은 그 사물을 규정하는 고유한 한계, 규정성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군에 가는 나이는 20살이다. 누구도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스무 살에는 군에 가야 한다.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이처럼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정량은 타자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정량을 재는 단위가 일단 정해진다면, 정량은 그 단위의 반복을 통해 규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정량은 자기 자신을 통해 규정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헤겔은 정량은 “타자를 통해 규정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머무른다”라고 말한다.

6)

정량의 규정성이 자의적인 규정성이라는 점에서 이 정량의 규정성은 질적 현존에서 현존의 규정성과 유사하다. 현존의 규정성 즉 감각적 성질은 주관이 파악한 우연성이며, 그 사물에 대해 외면적이다. 질적 범주에서 운동은 인식하는 주관이 이 외면성을 극복해서 사물에 고유한 성질을 찾아 나가는 운동이었다. 그 운동 끝에 마침내 대자 존재 즉 그 사물의 형상에 이르렀다.

정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량은 외면적인 규정성이다. 어떤 사물에 고유한 정량을 발견하는 것이 양적 판단 형식에서 운동의 기본 목표다. 예를 들어 도라는 음은 현의 길이를 통해 그 본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현의 길이는 도라는 음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우연적 정량이 아니다. 헤겔은 척도라는 개념에 이르면 비로소 고유한 정량이 출현한다고 본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가 지양된 것이므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리고 대자적으로 그 한계에 대해 무차별하다. 그러나 동시에 양적인 것에서 그 한계 또는 정량이라는 사실은 무차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양적인 것은 일자를 즉 절대적으로 규정된 존재를 자체 내에 그 자신의 고유한 계기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일자는 그 자신의 연속성 또는 총수에 이르러 정립되면 양적인 것의 한계가 된다. 이 한계는 양적인 것이 자기를 생성해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독자적 존재[Eins]로서 머무른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

1)

형이상학은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다룬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더욱 발전하겠다고 확고하게 선언했던 헤겔은 세계의 일반 원리를 사유의 근본 범주(또는 판단 형식)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문제는 양적 범주다. 양적 판단 형식 즉 양적 범주가 세계를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지, 요즈음 철학은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원초적인 세계는 질적 개별자의 세계가 아닌가? 양적 범주란, 세계 밖에서 사유하는 인간의 주관적 산물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개별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지속적이어야 한다. 명멸하는 우연적인 것에는 이런 개별성조차 없고 그저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찰나생 찰나멸, 이런 세계에서는 사유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속하는 것이 있는 한, 이 지속성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성질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대자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 대자 존재자들의 상호 관계는 양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양적인 세계의 존재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서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공간의 개념을 기초로 한다. 원자와 원자의 관계가 곧 양적인 관계이며, 이 양적인 관계에서는 오직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원자와 원자는 동일한 대자 존재의 관계이니 연속적이며 그러면서도 이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독자적인[fuer sich] 것이니 분산적이다.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것이며, 분산적이라는 점에서 공허로서 공간적인 것이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서로의 이면에 떼어낼 수 없이 붙어있다.

2)

양적인 관계야말로 수학적 관계의 토대가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양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피타고라스의 수의 세계도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양적인 것과 수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이 나오고 정량에서 다시 수가 나온다고 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의 연속과 분리라는 관계를 말할 뿐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크기 규정을 갖지 않는다. 정량은 이런 양적인 것이 일정한 크기 규정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이미 양적인 것은 크기 규정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대자 존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대자 존재는 반복하는 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양적인 것에서 크기 규정은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특정한 크기를 지니려면 다른 것과 비교되어야 한다. 즉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길이는 미터를 잣대로 하고, 무게는 그램을 잣대로 한다. 그러나 미터나 그램과 같은 잣대는 주관적으로 선택된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든 임의적으로 선택된 잣대를 기준으로 반복을 통해 일정한 크기가 규정된다. 이렇게 규정된 특정한 크기가 곧 정량이다.

정량은 반복되면서 이미 수적인 체계를 갖지만, 아직 수는 아니다. 그것은 가능적인 수적 체계다. 이 정량이 수가 되려면, 일정한 잣대가 지닌 수적 관계가 추상돼야 한다. 그렇게 추상된 수적 관계가 곧 수를 이룬다.

“정량은 일단 규정성이나 한계 일반을 지닌 양적인 것인데, 그것이 완전하게 규정되면 수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치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화폐는 상품의 하나다. 어느 상품이 화폐인가 하는 것은 주관적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어떤 상품이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화폐로 선택되면서 화폐가 출현한다. 이 화폐는 상품이 지닌 교환가치의 비례 관계라는 수적 체계를 의미할 뿐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량을 측정하는 잣대는 주관이 임의로 선택한 것이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선택된 대표적인 잣대가 곧 수다. 이 수는 정량의 비례 관계를 언표하는 수단이 된다.

3)

이제 수 개념에 관한 플라톤이나 러셀의 주장을 헤겔의 사유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19세기 심리주의는 수를 더하거나 빼는 것과 같은 사유의 활동에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심리적 활동은 경험적이고 우연적이지만, 수적 질서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니, 이런 심리주의는 수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서 끌어내거나, 수를 논리로 환원하려는 논리주의가 등장했다.

우선 수에 관한 플라톤적 설명은 문제가 있다. 수는 자주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기하학적 크기도 일종의 수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하학적 질서야말로 플라톤이 이데아의 표본으로 설명해 왔던 것이 아닌가? 수가 이처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자연의 질서 속에 수를 적용한다는 것은 이 자연이 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데아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창조주 신은 일단 제쳐 두자. 창조주는 굳이 이데아의 모범에 따라 세계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자연이 초월적 이데아를 따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데미우르고스를 인정할 수 없다면, 자연 속에 수적인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만큼 자연적인 것에서부터 수적인 질서가 발생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헤겔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수가 자연에서 발생하는 과정을 잘 이해시켜 준다. 헤겔에서 수적인 것은 양적인 것에서 나온다. 양적인 것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정량으로, 정량에서 다시 정량을 대표하는 수로 전개된다. 정량이 이미 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만 수일 뿐이다. 수도 하나의 정량으로서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에서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는 과정과 같다.

4)

이번에는 현대 수 이론을 대표하는 러셀의 주장을 살펴보자. 러셀은 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 예를 들어 {신발, 손, 발, 귀 등등}.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두 번째 손가락(검지, 둘)이다.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도 있다. {솥의 다리, 삼원색 등등.}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세 번째 손가락(중지, 셋)이다. 이처럼 어떤 집합을 대표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집합 즉 {둘, 셋, 넷… 등등}이 곧 수이다.

러셀의 수 개념은 간명하기는 하지만, 이 집합의 집합을 통해 수의 진정한 개념이 정립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러셀의 주장은 헤겔이 이미 말한 것처럼 수가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는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해서 수적 질서를 의미하게 됐는지를 말할 뿐이다. 이를 통해 수가 지닌 기본적인 속성 즉 수의 연속성과 분산성은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집합의 집합으로서 수 개념은 정의 속에 이미 수를 전제로 한다. 즉 ‘쌍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나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는 개념이 이미 쌍이나 셋이라는 수 개념을 포함하니, 정의될 것을 정의 속에 전제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으로서는 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속성을 끌어낼 수 없다. 쌍을 대표하는 수 검지(둘)와 다섯 개짜리를 대표하는 수 즉 약지(다섯) 가운데 어느 것이 큰가 또는 둘과 셋을 더하면 다섯이 나온다는 수적인 질서가 나오지는 않는다. 검지가 약지보다 작은가? 또는 검지로 찌르고 다시 중지로 찌른다고 해서 약지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러셀의 수 개념은 집합 개념에 기초하는 것인데 집합 개념은 그 자체 모순을 포함한다는 사실이 이른바 러셀의 역설을 통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사실 잘 살펴보면, 러셀의 수 이론은 수의 개념을 설명한다기보다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선택된 것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5)

플라톤이나 러셀은 수 개념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부터 수 개념을 끌어냈는데, 양적인 것을 규정한 정량은 다양한 것들로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정량적 존재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곧 수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43-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 논증

1)

양은 대자 존재의 관계다. 대자 존재는 동일한 것이 여럿으로 존재하니, 예를 들어 나뭇잎이나 물발울과 같은 것이다.

이들의 관계 속에서 관계 맺는 것이 동일한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견인하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되고, 동시에 여기서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자므로 이들은 서로 반발하면서 이 관계는 분산된 관계다.

“연속성 속에는 다의 병열이 여전히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나 동시에 구별되지 않은 것, 중단되지 않은 것으로 포함되어 있다. 다는 연속성 속에 본래 그대로 정립되어 있다. 다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며 각자는 다른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다는 단순한 구별이 없는 동등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6)

대자 존재의 견인과 반발은 상호 작용적이니, 반발하는 가운데 견인이 일어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게 된다. 반발 가운데 견인하면서 연속하고 견인하는 가운데 반발하므로 분리된다. 헤겔은 이런 분리와 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할 때 한편으로 자기를 넘어 연장(지속)하는 것 즉 생산적인 지속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벗어나 분리되는 것 즉 영속적인 탈자태가 있다.

“양은 그 규정상 자기에 대한 지양하는 관계이며 영속적인 탈자화[Aussersichkommen]이다. 그러나 반발된 것은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반발은 자기 자신의 생산적인 지속[Fortfliessen]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77)

생산적인 지속이 양적인 것이며 영속적인 탈자태가 공허다. 물질은 양적이며 시공간은 공허다. 그러나 물질도 배후에는 탈자성이 있으며, 시공간도 배후에는 하나의 양적인 연속체다.

2)

헤겔은 이런 관계 개념들 즉 ‘대자 존재와 일자’/ ‘견인과 반발’/ ‘연속과 분리’/ ‘지속과 탈자’라는 개념을 통해 양적인 것을 규정한다. 이런 ‘양적인 것[Quantitaet]’은 아직 ‘정량[Quantum]’ 또는 ‘크기[Groesse]’는 아니다.

양적인 것은 지속과 탈자라는 관계만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직 어떤 한계가 주어져 있지 않다. 단순히 물질 또는 시공간을 말할 때 우리는 그 크기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 크기가 규정되지 않고 다만 지속과 분리만 말할 때, 즉 무규정적인 크기가 양적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시공간이 그렇다. 시공간에 관해서 또는 물질에 대해 누가 그것은 얼마나 큰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로소 정량 또는 크기는 일정한 크기를 통해 규정된 것을 말한다. 그런 어떤 것이 정량이 되려면 일정한 크기 즉 한계를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물방울은 일정한 폭을 지닌 크기를 가진다. 그것을 우리는 분자 단위나 원자 단위로 세지 않는다. 물 분자의 일정한 집합체를 하나의 물방울로 보고, 비로소 물방울의 수를 센다. 물 분자가 물방울의 크기를 이루지 못하면, 물 분자는 그대로 있지만, 물방울을 사라진다고 말한다. 물방울이 더욱 뭉쳐서 물줄기가 되면, 이제 물줄기라 하지 이를 물방울로 보지 않는다. 이처럼 일정한의 크기를 지닌 어떤 것이 곧 정량이다.

3)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 크기로 넘어가면서 긴 주석을 통해 양의 연속성과 가분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소개한다. 원자론자는 가분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다. 스피노자는 연속성을 주장하는 대표자로 소개된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 독자적으로 관심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양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언급될 뿐으로 보인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연속성과 분리를 동시에 인정하므로 양에 관해 칸트가 주장한 이율 배반이 특별히 흥미로웠을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양에 관한 이율 배반론을 살피기 전에, 칸트의 이율 배반론 전반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서술한다.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의 공적을 인정하면서 칸트의 이율 배반론은 “이전의 형이상학이 전복이며 새로운 철학으로 이행의 주요 계기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율 배반론은 “유한성의 범주를 내용의 측면으로부터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이전의 형이상학은 지성의 개념 즉 판단 범주를 실체화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는 긍정하고 그것에 대립하는 것은 반박하였는데, 칸트는 두 가지 모두가 자기 모순적인 것을 밝힘으로써 어느 개념도 실체화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론이 지닌 한계를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칸트는 이율 배반에 속하는 네 가지 개념쌍을 네 가지 판단 범주에서 끌어내 “완전성이라는 가상을” 주려 했으나, 사실 지성의 모든 범주가 “이런 대립된 계기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칸트는 지성의 개념을 물 자체에 적용하는 가운데서 이율 배반이 나온다고 보았으나, 이런 관점은 이율 배반이 개념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물 자체에 적용되면서 구체화되는 가운데(즉 구체적 개념) 출현하는 것인지를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은 지성 개념은 현상에 적용하면 문제가 없고 다만 물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이율 배반이 생긴다고 했는데, 이는 이율 배반을 주관에 귀속시킴으로써 “모순을 주관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니” 현상 자체에서도 마찬가지 이율 배반이 생긴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4)

이상 관점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 헤겔은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는 데로 들어간다. 이제 양적인 것에 관한 이율 배반은 두 대립하는 정립과 반정립을 모두 긍정하는 이율 배반이다. 모순이 존재할 수는 없으니, 두 주장 다 배척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헤겔은 칸트가 논증했다고 믿는 것은 사실은 진정으로 논증한 것이 아니라 전제 속에 감추어놓고 이것을 마치 논증한 결과처럼 떠벌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칸트는 논박 요술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 고찰된 증명은 요술은 아니지만, 증명이라는 외적인 형태를 갖고 있어서 결론으로 출현해야 하는 것이 괄호 속에 증명의 축이 된다는 것을 투시하지 못하게 한다.”(논리학 재판, GW21, S. 184)

정립부터 보자. 이 정립은 “세계 속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합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즉 더는 나누어지지 않는 단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가 ‘합성된 실체’인데, 정립에서 칸트는 이 주어를 실체보다는 합성된 것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칸트는 이 주장을 논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단순한 것이 없다고 해 보자.

-그러면 합성된 것을 구성하는 것은 다시 합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무한히 이어가면, 마지막으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남는다.

-합성된 것이 무로 구성될 수는 없으니, 단순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칸트의 이런 논증에 대해 헤겔은 불필요한 우회를 해서 증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구성 또는 합성된 것이라는 말 속에 이미 단순한 것의 합성이라는 의미가 깔려있다. 이것은 합성된 것은 합성된 것이라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합성된 실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모든 합성은 사유 속에서 지양될 수 있으니, 어떤 합성된 부분도 남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단순한 부분도 없으므로 어떤 단순한 것도 따라서 어떤 것도 결과적으로 어떤 실체도 있을 수 없다.”(논리학 재판, GW21, S. 182)

“다음 사실이 밝혀진다…. 즉 증명으로 제시된 근거는 직접 추론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합성은 단순히 실체의 우연적 관계이며, 이 관계는 실체들에 외적이어서 실체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3)

5)

이제 반정립을 보자. “세계 속에 어떤 합성된 사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계 속에 어떤 단순한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칸트는 정립과 다른 주어를 사용한다. 즉 ‘합성된 사물’이다. 흔히 그렇게 하듯이 ‘사물’을 ‘실체’와 같은 말로 보면, 정립과 같은 주어가 된다. 그런데 이 반정립된 합성된 실체(사물) 가운데 칸트가 초점을 두는 것은 정립에서와 달리 ‘합성체’가 아니라 실체 즉 ‘단순한 것’에 있다.

칸트는 이 반정립 역시 타당한데 그것의 논증은 이러하다.

-실체가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실체의 합성은 공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부분들은 각기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떤 공간도 부분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된 것을 이루는 부분도 공간을 차지하는 공간은 다시 부분으로 나누어지니, 단순한 것은 합성된 것이 된다. 이는 자기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실체는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칸트가 이 논증에서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순한 실체가 연속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런 논증 역시 잘못이라 한다. 여기서 이미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칸트는 공간은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한 전체라고 본다.),

칸트는 반정립의 논증에서 사물을 공간 속에 집어넣었는데, 이는 곧 사물이 이미 공간적인 것 즉 연속적이어서,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정립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제에 몰래 집어넣은 것을 추론이라면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가정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의 직접적인 근거로 되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5)

“공간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가정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것을 이런 공간이라는 지반으로 옮겨놓는 것은 근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지반은 단순한 것이라는 규정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186)

6)

이 논증은 칸트가 공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하므로 발생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공간 속에서 합성이라는 외면적 관계가 성립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칸트는 물체를 공간 속에 집어넣고 물체의 합성을 공간적 관계로 설정했는데, 이것은 그 자신 공간을 다시 부분으로 합성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혼란을 이렇게 지적한다.

“여기서 특히 공간에 대해 연속성이 매우 올바르게 부분의 합성과 대립하여 제시되었다. 반면 논증에서는 실체가 공간 속에 옮겨져 서로에 대해 외적으로 발견되는 관계가 즉 합성된 것이라는 관계가 동반된다고 가정된다. 그런 논증과 달리 공간 속에서 다양성이 발견되는 방식은 명백히 합성과 선행하는 부분들의 합일을 배제해야 한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6)

사실 헤겔에서 물질과 공간은 양적인 것이면서도 서로 대립한다. 물질은 연속적인 것이면서 그 이면이 분리된 것이다. 공간은 분리된 것이면서 그 이면이 연속된 것이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물질은 공간에 들어있고 공간은 물질을 수용할 수 있다..

칸트는 정립에서 처음에 주어는 ‘합성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만일 정립의 주어를 ‘실체에 맞추어 보면 즉 단순한 실체라고 본다면, 단순한 실체가 단순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즉 합성된다)는 말은 모순이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반정립에서 주어의 초점이 단순한 ‘실체(사물)’에 있었는데, 만일 이 초점이 ‘합성체’에 있다고 한다면, 반정립은 합성체가 단순한 부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연속체라고 주장하니 그 자체로 모순이다.

결국, 정립과 반정립에서 칸트는 주어를 모호하게 했다. 정립의 주어는 ‘합성된 실체’고 반정립에서는 ‘합성된 사물’이다. (사물과 실체를 같은 것으로 보더라도)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각기 그 의미가 달리 해석된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 자체에 모호한 개념을 사용하면서 논증했으니, 철저한 논증이라 할 수 없다.

7)

헤겔의 입장은 ‘이율 배반이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아니다. 모호한 주어를 명확하게 하더라도, 정립과 반정립은 동어반복이든 아니면 자기모순이니 두 가지 주장이 동시에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히려 헤겔은 칸트의 주장을 통해 대립하는 것의 통일, 모순이라는 그의 변증법적 원리를 확인할 뿐이다.

헤겔의 비판은 칸트의 의도를 비판하는 데 있다. 칸트는 정립과 반정립을 동시에 긍정하면서 이런 서로 대립된 것이 동시에 긍정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율 배반을 발견했다. 칸트는 그러므로 단순성과 합성된 것, 연속성과 분리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나 경험적 현상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물 자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이율 배반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모든 양적인 것이 지닌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성질이라고 보았으며, 이것이 우리가 양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들 물질, 시간, 공간 등의 본질적 특성이라 하였다.

“연속성 자체 내에 원자의 계기가 있다. 연속성은 단적인 분할의 가능성[즉 무한 분할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분리는 모든 구별을 지양한다. 왜냐하면, 단순한 일자는 다른 것과 같은 일자이기 때문이다. …. 각각은 다른 측면을 그 자체에서 가지므로 다른 것 없이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 규정의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다.”(논리학 재판, GW21, S. 187)

헤겔은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높이 평가한다.

“그는[아리스토텔레스] 무한 가분성을 연속성에 대립해서 무한한 추상적 다를 그 자체에서 또는 가능성에서 연속성 속에 포함시켰다. 현실적인 것은 추상적 다수성에 대립하는 동시에 추상적 연속성에 대립하는 것이니 구체적인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 S.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