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9월 월례발표회 영상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9월 월례발표회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하반기(8-11월) 월례발표회는 발표를 신청한 회원들의 발표로 이어집니다.
이번 9월 발표는 두 명의 토론자가 참여하여 풍성한 발표회가 되었습니다.
9월 월례발표회 개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주 제: 지젝과 하이데거 사태 – 잘못된 방향이지만 올바른 발걸음
발표자 : 김성우(상지대학교)
토론자 : 서영화(서울대학교), 김민수(동서울대학교)
일 시 : 2022년 9월 27일(화)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FnL0XtLOwqs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8월 월례발표회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하반기(8-11월) 월례발표회는 발표를 신청한 회원들의 발표로 이어집니다.
이번 8월 발표는 2022년 상반기 월례발표회 대주제였던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과 연결되는 주제입니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김시천 회원의 발표로 2022년 하반기 발표를 시작합니다.

주    제: “아나키즘에서 씨알의 자치로 – 함석헌의 『장자』 읽기와 20세기 한국의 ‘노장'”
발표자: 김시천(상지대학교)
토론자: 유현상(숭실대학교)
일   시 : 2022년 9월 2일(금) 오후 6시 – 8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0zZH2hnIMzQ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갈무리, 2022-05-3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들뢰즈 다양체를 읽고

 

한동석(시각예술인)

 

공간이 3차원의 다양체인 것처럼, 『들뢰즈 다양체』는 편지들,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들, 청년기 저작들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껏 발표되지 않았거나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이 텍스트들은 질 들뢰즈의 주요 저작들의 사이에, 혹은 저변에 자리 잡고는 곧 다른 저작들의 시공간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가 좋아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영화의 막간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진동,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며 알게 모르게 영화 속으로 스며드는 메아리와 흡사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던 사이에 그의 주요 저작 가운데 소유하고 있지 않은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책꽂이는 조금 더 비좁아져 있었고 들뢰즈에 대한 내 마음은 조금 더 부산해졌다. 새 책의 낯선 느낌이 전해지며 방은 잠시 나와는 무관한 듯 느껴졌고 순간 기존의 물건들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1부 편지들」에서는 ‘친구’ 미셸 푸코를 포함한 여러 동료 철학자들, 흠모하는 예술인들, 여러 저작을 통해 협업을 펼쳤던 펠릭스 과타리, 들뢰즈 철학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인 연구생 등의 다양한 인물들을 향해 띄운 그의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들뢰즈가 평소 편지를 보관하지 않았기에 발신 메시지로만 남았지만, 문장은 때로는 자잘한 속마음을, 때로는 그지없는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드러내며 각 인물들과 맺은 관계의 고유성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사뭇 다른 어조에도 철학적인 관심을 함께 나누려는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무엇보다 편지라는 친근한 형식에 힘입어 들뢰즈의 사유가 발전해나가는 내밀한 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새로웠고 들뢰즈의 철학적 고민들이 여타의 저작에서보다 쉽고 간명하게 표현된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다.

가장 호기심을 끄는 편지는 과타리를 향한 것들이었다. 협업이라는 때로 험난할 수도 때로 흥미로울 수도 있을 과정에 대한 일반적이며 막연한 궁금증도 애초에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들뢰즈 혼자만의 저작과 과타리와의 협업이 낳은 저작을 연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평소의 물음이, 이들 편지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으로 이끌었다. 먼저 편지에서 드러나는 들뢰즈는 과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의 가족주의에 대한, 또 이를 너무나 손쉽게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응시키려는 당대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하게 공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과타리를 ‘야성적 개념의 놀라운 발명가’라고 부르며 ‘무의식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서 과타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기계’ 개념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또한 무의식을 죄의식과 더불어 파악하기를 거부하고 법과도, 위반과도 무관한 것으로서 긍정하는 과타리의 입장을 무의식에 대한 보다 풍요로운 논의의 장을 열었다고 칭송하며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동의와 지지의 기반 위에서 들뢰즈는 과타리와 더불어 분열증적 생산 기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켜나가고자 한다.

편지에는 들뢰즈와 과타리가 종종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대목들도 눈에 띈다. 그런데 이러한 불일치에 더해, 그럼에도 이를 서로에게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은, 이들 차이의 철학자들이 협업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설정되었으리라 짐작되는 구절들도 만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결과를, 철학자로서 보다 심대한 역량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들뢰즈에게만 귀속시키는 태도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들뢰즈는 그의 철학을 연구하는 아르노 빌라니와의 편지에서 과타리와의 공저를 들뢰즈만의 창작물로 해석하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드러낸다. “하나의 분석에는 독창적일 모든 권리가 있지만, 그 책(『천 개의 고원』)이 본질적으로 나 혼자만의 저작이라 주장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만일 인물이 아닌 모종의 흐름에 의해 책이 탄생한다고 가정해본다면 둘의 협업은 본래와는 전혀 다른 흐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본래의 물결은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새로운 파장을 형성하는 데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협업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녹음에 기초한 또 다른 인터뷰 자료가 2부에 이어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가능했다.

들뢰즈는 편지 속에서 종종 여러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여러 업무와 실생활에 쫓겨 저작과 연구 활동에 몰입할 수 없음을 한탄하는 구절들, 논문준비생에게 그의 철학을 연구해서 현실적으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는, 당시 프랑스 주류 철학계가 들뢰즈에게 취했을 껄끄러운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은 왠지 모를 공감을 자아냈다. 감성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지향하며 전복적인 사유를 펼쳐나가는 철학자가 마주했을 학자로서의 삶이 현실적으로 순탄치 않았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험로가 만들어지는 이유를 굳이 따져보자면 쉽게 수긍할 수도 없다. 단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대한 양의 역작들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를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바라보며 개인의 천재성, 혹은 독특성의 발현과 그에게 사회가 되돌려주는 고난, 이들에 대한 선후를 가늠할 수 없는 인과적 필연성을, 혹은 운명적 조응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2부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는 들뢰즈의 그림들로 시작된다. 몇몇 그림은 ‘괴물’을 묘사하고 있었으며 번호가 붙어있었다. 「1부 편지들」에서 빌라니가 띄운 ‘당신은 괴물인가요?’라는 질문에 들뢰즈는 괴물이란 ‘그 극단적 규정성이 미규정성을 완전하게 존속시키는 그러한 어떤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한 강한 공감과 더불어 무언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 느껴지는 현기증을 함께 담아 이 문장에 줄을 두 번이나 그었던 기억에 비하면, 괴물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게다가 평범하기까지 하여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히 우스꽝스럽게, 또는 그런대로 재밌게 생겼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4. 평생 친구인 장-피에르 벙베르제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들뢰즈의 자화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도 느낌이 좋았지만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들뢰즈라는 철학자의 복잡한 의도를 알 길이 없어 오랫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핏 보기에 그는 친구에게 말을 하라고, 또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달리 보면 그는 친구의 목을 매우 솜씨 좋게 어루만져 친구의 입에서 혀가 튀어나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헌정했던 스승이었으며 훗날 절연했던 페르디낭 알키에는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알키에의 저작에 대한 들뢰즈의 2편의 리뷰에서 그 단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키에가 ‘초현실을 피안으로서,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낳는 분리의 원리로, 시를 낳는 이행의 원리로, 현실에서 비현실로, 비현실에서 현실로 의지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규정했다는 대목은, 들뢰즈가 발전시켜나갔던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내재성의 철학의 단초를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알키에가 데카르트에 있어 ‘사유는 진리를 넘어서고 진리의 우연적 측면을 파악한다’고 해석한 대목에서, 사유를 진리에 대한 추구가 아닌,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로, 역설적인 어조로써 새롭게 정의했던 들뢰즈의 입장이 마련될 실마리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들뢰즈가 철학적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한 여러 입장들을 그의 삶과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과정은 그의 사상이 갖는 또 다른 저변은 물론, 그가 보였던 창의적 역량도 새롭게 비추어볼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2부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텍스트는 한때 들뢰즈가 출간을 고려했었다는 흄에 대한 강의 자료였다. 비교적 들뢰즈의 활동 초반기, 『차이와 반복』이 출간되기 10년 전 즈음에 이루어졌던 강의이니만큼 그의 사상적 진화의 출발 지점을 헤아려볼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접근과는 별개로, 더 나아가 저자와도 무관하게, 이 자료는 흄에 대한 강의로서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텍스트였다.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간결한 표현들뿐만 아니라, 개념과 개념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역동적인 구도와 명료한 짜임새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결국 개인적으로 개괄적인 이해의 계기를 고대해왔던 흄의 철학을 단지 인식론이나 인과론 영역에 한정 짓지 않고 총체적으로 접할 기회를 맞이할 수 있어 기뻤다.

이와 더불어 2부에 수록된 여러 단편 텍스트들도 모두 나름의 강한 여운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음악적 시간>이라는 매우 짧은 단편은, 음악을 들으며 철학 텍스트를 읽어보는 색다른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청각적 환경 속에서 이 단편을 읽어보는 나름의 실험적 상황을 꿈꾸게 되었다. 이 글은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을 소개하며 박자로부터 해방된 시간, 음향 풍경,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음악적 재료에 대해 다룬다. 들뢰즈의 시간, 개체, 물질, 생명에 대한 사유가 음악 속에 녹아든 듯한 매우 아름다운 글이다.

 

「3부 청년기 저작들」에서는 스물, 스물 남짓 된 들뢰즈의 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주요 철학적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이를 자신만의 문장으로 표현할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청년기 철학자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묘사〉라는 텍스트는 어디에서 이해의 발판을 마련하여 다가가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이 글에서 들뢰즈는 성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 담론을 동일한 맥락상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방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에로티시즘과의 연관 속에서 타자 철학을 새롭게 바라보며 그 한계를 느껴보려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성에 대한 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묘사가 낯설고 불편했다. 『천 개의 고원』에서 여성 되기는 있어도 남성 되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는 소수자 되기만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들뢰즈의 입장과 차이가 느껴지는 텍스트였다. 언젠가 여러 시간적 양태들이 혼재하는 결정체적 시간 이미지의 한 단면으로 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때 이 텍스트와 공명할 또 다른 시공간적인 계기와 더불어 보다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독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보다 진보한 독자로서의 역량이 마련되길 기대해본다.

이 책을 들뢰즈라는 인물에 대한 전기적인 자료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누구도 전면적으로 견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일 이 책을 전기적 자료로 해석할 경우. 그의 저작들 사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으로만 그를 다소간 한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 들뢰즈에게 삶의 파고는 철학적 작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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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5월 월례발표회 영상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이번 5월 월례발표회는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념이었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특히 슈티르너 철학의 수용과 관련된 박종성 선생님의 발표와 김광호 선생님의 열띤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 – 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
발표자 : 박종성(건국대학교)
토론자 : 김광호(서울시립대학교)
일    시 : 2022년 6월 2일(목)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NoK4CKs7Y1M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4월 월례 발표회 영상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4월 월례발표회는 동학 및 천도교의 사상 그리고 한국현대철학의 서양철학 수용과 관련된 이병태 회원의 발표와 전호근 회원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주    제 : 한국현대사상사와 『개벽』
발표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토론자 : 전호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일    시 : 2022년 4월 29일(금) 오후 4시 – 6시
방    식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k8NW-4fLUIU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3월 월례발표회 영상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의 월례발표회는 지난 2월부터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주 제 : 선(禪)은 변증법인가? -선과 셸링(Schelling), 일심삼문(一心三門)과 자유의지
발표자 : 이찬희[대종교(大倧敎) 시교사(施敎師)]
토론자 : 박병훈(서울대학교)
일 시 : 2022년 3월 24일(목) 오후 5시 – 7시
장 소 : 비대면 줌 회의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Og9lRCP_7c8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 영상(《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학술대회(《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故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제62회 정기학술대회는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주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장소: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 (온라인 동시진행)
시간: 2022년 6월 11일 (토) 오후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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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박정하 회장(성균관대)
축 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 사회: 이지영(이화여대)
– 발표1 – 김성우(상지대): 코로나 19 팬데믹과 푸코 생명정치의 문제
– 논평1 – 조은평(건국대)
– 발표2 – 김범수(숭실대): 바이러스, 도래한 시대 : 들뢰즈를 중심으로
– 논평2 – 김은주(서울시립대)
– 발표3 – 정유진(서강대): 쏠루세와 코비드 19 – 해러웨이를 중심으로
– 논평3 – 이현재(서울시립대)
– 1부 종합 토론

2부 《이규성 선생님 추모 학술제》 – 사회: 이병창(한철연)
– 발표1 – 이지(이화여대): 중국 현대 ‘신철학’ 재검토 – 이규성의 『중국현대철학사론』 비판적 독해
– 발표2 – 박민철(한철연): 한국현대철학사 방법론의 확장 : 이규성의 『한국현대철학사론』과 그 논쟁들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 청중과 함께하는 좌담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영상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2월 월례 발표회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상반기 4차례의 월례발표회는 ‘한국근현대사상의 지평’이라는 대주제로 개최될 예정입니다. 동학과 대종교 등의 종교사상, 한국철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한국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자기화 과정 등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주 제 : “동학 공동체의 두 지향과 공(公) 의식 – 최제우와 최시형의 보국과 안민을 중심으로”

발표자 :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토론자 : 송인재(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일 시 : 2022년 2월 24일(목) 오후 4~6시

장 소 : 온라인 줌 회의실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1QCwlGMdknI

<‘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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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감응하는 사물’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 스티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갈무리, 2021) 서평

 

주요섭(밝은마을_생명사상연구소)

 

아마도 ‘사물들의 우주’ 이전에는 ‘인간들의 우주’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이전에도 ‘사물들의 우주’는 엄존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변’된다. 다시, 아니다. 인간들의 우주 역시 사실은 사물들의 우주였을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는 문득 ‘인간이라는 사물’을 출현시켰고, 인간들의 우주라는 착시가 있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사물도 다른 사물들이 그렇듯이 문득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 샤비로의 사고실험, 혹은 철학적 SF는 결이 조금 다르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의 허무주의적 편향에 대응해 ‘또 다른’ 사변적 실재론을 탐색한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짧지 않지만, 결론은 명쾌하다. 그 이름은 ‘사변적 미학’이다(279). 세계는 인간의 인식과 관계없이 ‘비-상관적으로’ 실재하되, 그것은 단지 무정(無情)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유정(有情)한, 마음이 있는 사물들의 그물망이다.

 

감응하는 우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1982년, 장일순과 김지하를 비롯한 원주캠프는 ‘생명의 세계관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을 제안하는 이른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를 세상에 내어놓았다. 그리고 인간 중심 세상에서 생명 중심 세상으로의 대전환과 생명운동으로의 사회운동의 대전환을 선언한다.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이제 세계는 ‘생명들의 세계’다. 이를테면, ‘생명들의 우주’다. 물론 이때 생명이란 인간이나 고양이와 같은 유기체만이 아니다. 풀 한 포기와 돌멩이도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나에게 ‘사물들의 우주’라는 책은 무엇보다 ‘감응하는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물의 ‘내적 경험’이라는 표현에서 감이 왔고, 범심론(pan-psychism)에 대한 긴 소개에서 나름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때 감응(感應)은 흔히 정동(情動)으로 옮겨지는 affect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 ‘기(氣)의 감응’, 혹은 천인감응(天人感應)의 그 감응이다. 또한 19세기 말 동학에서의 ‘내 마음이 네 마음(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과의 감응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또한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는 생명세계의 소통형식으로서의 감응이기도 하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감응하는 사물의 사밀성, 즉 ‘사물의 숨겨진 내면적 삶’(77)을 강조한다. 사물들은 인간과 관계없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은 서로 교감하며 스스로 진화한다. 넷플릭스 영화 ‘문어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어이야기의 화자는 “문어와의 경계가 사라졌을 때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감응의 아름다움이다. 감응은 인간과 문어와의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어를 둘러싼 바닷속 생태계가 곧 또 하나의 감응하는 우주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응’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도 ‘너’도 ‘그’도 감응함으로써 살아있다. 햇볕과 바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이전에 햇볕을 쬐고 공기를 마시는 덕분에 살아있다. 감응은 비-의식적이다. 여성들의 월경이 그렇듯이 달을 의식하지 않아도 신체는 달과 감응한다. “달에 대한 나의 파악은 표상이 아니라 원격접촉이다”(216). 서로의 내적 삶을 몰라도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경험에 접근할 수 없다. ‘나’도 ‘나’를 알 수 없다. 인식 이전에, 신체와 신체 사이 신체와 사물들 사이에서 비-의식적인 감응이 계속되고 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없다. “나는 내가 원리상 알 수 없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178) 저자가 화이트헤드를 빌려 말하고 있듯이,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150).

 

범심론: 사물에도 내적 경험이 있다

 

그렇다.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란, 다시 말하면 ‘감응하는’ 사물들의 우주다. 그리고, 그것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과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물들의 내적 경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경험적이다(155). 키워드는 ‘경험’이다. 감응하는 사물을 샤비로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하는 사물인 셈이다. 저자는 화이트헤드를 빌려,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해 단언한다. 프로토타입은 ‘경험’이다. “모든 존재는 내재적으로 무언가를 경험한다. 존재는 곧 경험이다.”(150)

그러나 이때 경험은 물질적이다. 에너지적이다. 저자는 스트로슨(2006)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물리적 소재는 그게 어떠한 형태라도 에너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에너지는 현상을-포함하는-경험이다.”(189) (그런데, 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도 자신의 주저 『인간현상』에서 사물의 내부를 이야기한다. “사물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범심론으로 이어진다. 샤비르에게 범심론은 “현상적인 경험을 실체화하거나 근절시키지 않고 그 자명함을 존중하는 데에 뒤따르는 필연적 귀결이다.”(189. 강조는 저자.) 범신론(Pan-psychism)의 ‘범’(Pan)이란 접두사가 그렇듯이 사밀성과 관계성을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사물에 적용하는 것이다.

생명의 감각으로도, 생명운동의 관점에서도 범심론은 자연스럽다. 생명사상을 정초한 시인 김지하는 생명의 핵심적 특징을 (다양성, 순환성, 관계성과 함께) 영성이라고 꼭 집어 말한다. 이때 영성은 인지적 마음, 감성적 마음과 구별되는 생명의 보편적 마음이다. 우주의 마음이다. 이때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느끼는 마음’이다(화이트헤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아우르는 ‘감응하는 마음’이다.

2012년 어느 강연에서 시인 김지하가 생태학과 녹색당의 한계를 언급한 바 있다. 요점은 생태학과 녹색당에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 관찰만 있을 뿐 존재의 내적 경험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물들의 우주’의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존재가 외면과 내면을, 일인칭 경험과 관찰가능한 삼인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193)고 말할 수 있는데 말이다. 생태와 녹색의 사유는 오늘날 기후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여지듯이, 내적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외적 관찰의 결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기후위기 대응의 한계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 전환의 시대, 범심론적 사변은 역설적으로 대전환의 키워드가 될지도 모른다. 스티븐 샤비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두 개의 탈출구 중에서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가차 없는’ 객체적 실재론이 아닌, 사물들의 가치경험을 통해 존재의 평등성이 인정되는 범심론적 실재론을 제안한다. 샤비로의 표현을 빌자면, 카나리아, 미생물, 원자 등의 사태와 같은 지평 위에 인간의식을 위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또 다른 세계를 태동시킬 수 있을까?

 

오늘날 인류는 명실상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직면해있다. 팬데믹과 기후변화 때문만이 아니다. SF영화들은 포스트 휴먼와 트랜스 휴먼의 세계, 혹은 ‘인간-외계인들의 우주’를 도래할 현재로 보여준다.

최근 나의 키워드는 파국과 태동이다. 오늘날 팬데믹-기후위기의 경험에서 볼 때, 파국적 이행(Catastrophic transition)은 불가피하고,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또 다른 세계들이 태동하고 있다는 기대 혹은 예감이다. 그리고 그 태동을 촉진하는 것을 정동적 서사들이다. 새로운 세계관 설정이다. 나에겐 샤비로의 『사물들의 우주』도 또 하나의 서사 혹은 세계관이다. 그 스스로도 그의 사변이 과학소설에 가깝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변’은 파국적 현실 속에서 새로운 세계들을 태동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을까?

사변적 실재론은 언어적 전회를 경과한 사유이다. 구성주의를 통해 인식론적 장애물을 넘었기에 존재론적 백가쟁명을 가능하다는 말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존재론적 사변들과 사고실험들과 환상적 이야기들이 제출될 것이다. 아직은 알 수 없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사변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실재론이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을 격발시킬 수 있을까? 토끼와 호랑이와 인간과 천지만물이 함께 춤추는 오랜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현실은 훨씬 치열하고 절박하다. 또 다른 세계의 태동은 매우 실존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묻지 않을 수 없다. 범심론적 실재론이 생물 종들의 속절없는 소멸을 완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까? 불평등을 넘어서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인간사회 내부의 소멸과 격리와 파괴를 전환시킬 수 있을까? 사물들의 민주주의를 발명해낼 수 있을까?

그렇다. 실재론적 사상기획의 사회적 효능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판의 한국사회, 사상기획들의 존재 여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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