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5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 전쟁에 관한 일(466e-471c) 그리고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471c-474c)
제5권 [466e – 471c]
*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파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뜬금없이 아래와 같이 전쟁에 관한 일들을 길게 늘어놓는다.
1) 아이들과 동반 출정의 이유와 안전을 위한 방책
*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구경θέα을 통해 장차 아이들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있도록 전쟁에 함께 출정해야 한다. (466e)
* 이때 이들의 안전ἀσφάλεια을 도모하기 위해서 경험과 연배에서 지도자ἡγεμονεύς이자 아이들의 인솔자παιδαγωγός이기에 충분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말 타는 법ἱππεύειν을 가르쳐 필요할 경우 가장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467d)
2) 전사들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와 전사자에 대한 대우
* 전사στρατιώτης들 가운데 비겁κάκη하게 대오τάξις를 이탈하거나 무기ὅπλον를 버린다거나 혹은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자는 장인이나 농부로 보내야 한다.(468a) 산 채로 적들에게 잡힌 자는 적들οἱ πολεμία이 마음대로 하도록 선물로 줘 버려야 한다.(468b-c)
* 반대로 무훈을 세우고ἀριστεύσαντά 명성을 떨친εὐδοκιμήσαντα 자는 화관στέφανος을 수여하고 환영해야 하고 짝짓기 기회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무훈을 세우는 데 더 열심을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우수한 자식들도 태어난다.(468c)
* 호메로스를 따라 젊은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에게 명예τιμή를 높여주는 것이 정당하다. 제사나 모든 행사에서 찬가ὕμνος와 함께 명예로운 자리와 고기, 그리고 가득 찬 술잔으로 명예를 높인다. 그것은 한창때 용감한 자들의 명예를 드높임과 동시에 체력을 증진시킨다.(468d-e)
* 출정 중 전사한 이들 가운데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황금족γένος τοῦ χρυσοῦ으로 이야기하고 잘 장사 지낸 후 무덤을 돌보고 엎드려 절해야 한다. 또한, 특별히 훌륭하게 살다 죽었을 경우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관례νόμος로 삼아야 한다.(468e-469b)
3) 적들에 대한 태도
* 가능한 한 그리스인들이 이민족βάρβαρος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그들이 적일 경우에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지 말아야 한다.(469b-c)
* 승리를 거두고서 죽은 자에게서 무기 외에 약탈해서는 안 된다. 시체를 약탈하거나 시신 수습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 땅을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해의 농작물καρπός만을 취한다.(469c-470b)
* 친족에 대한 적대행위는 ‘내분’στάσις이고 남에 대한 적대행위는 ‘전쟁’πόλεμός이다. 그리스가 병이 들어 내분을 벌이더라도 상대편의 농토를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한, 보모τροφό이자 어머니인 나라를 유린해서는 안 된다.(470b-d)
* 패배한 친족들은 싸울 상대가 아니라 화해διαλλάσσειν하게 될 상대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농작물 정도나 취하는 게 적정하다. 그리스인들은 훌륭하고 양식 있는ἀγαθοί τε καὶ ἥμεροι 사람들로서 그리스를 자신들의 조국으로 간주하고 사랑하며 공통의 종교의례를 갖는다.(470d-e)
* 친족과 내분이 있을 때도 그리스인들은 상대방을 노예로 삼거나 파멸시키는 식으로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σωφρονισταί이지 적이 아니다.(471a)
*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그들에게 적대자인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대자이다. 따라서 대다수가 친구인 상대방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거나 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471b)
* ‘아무 잘못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의해’ὑπὸ τῶν ἀναιτίων ἀλγούντων 책임자들οἱ αἴτιοι이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만 갈등을 지속해야 한다.(471b)
* 땅을 유린하거나 집을 불사르지 말라는 것도 수호자들에게 법으로 제정해줘야 한다.(47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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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7d 아이들의 인솔자 : 아테네에서 이 역할은 노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경험과 연배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우수한 시민에게 그 역할이 맡겨져 있다. 플라톤은 아이들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이미 혁신을 기하고 있다.
* 467d 말 타는 법 : 아테네 전투편제에서 기마병은 자신이 소유한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소위 귀족 내지 지휘자급의 병과였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경우 승마교육이 중시되었다. 이곳에서도 수호자 계층에게 승마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 468c 이 문맥에서 글라우콘은 무공을 세웠을 경우 ‘출정 중 입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 이것은 무공을 세운 자들에게 소년애를 마음껏 누리게 해야 한다는 글라우콘의 바람을 드러낸 말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 짝짓기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설사 동성 간 입맞춤이 허용되더라도 그것은 자식을 대하듯이 선의의 입맞춤이어야 함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403b) 플라톤은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의 결합은 자연에 어긋난 것으로 뻔뻔함(tolmēma)과 무절제(akrateia)의 소산으로 여긴다.(<법률> 63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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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답변을 최대한 늦춰 보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일종의 여담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내용상 전쟁 관련해서 이상국가가 택하고 있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 부분 주제와 연관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나마 플라톤의 전쟁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대행위를 크게 동족끼리 싸우는 내분과 이민족과 싸우는 전쟁으로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에게서 전쟁은 오직 침입에 맞서는 방어 전쟁뿐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인 모두가 칭송하고 옹호하던 아테네의 패권적 침략 전쟁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메넥세노스> 해설 참고) 실제로 동족이건 이민족에 대해서건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있는 부분은 대화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내분과 전쟁 모두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나쁜 것이지만 플라톤은 앞서도 살폈듯이 내분을 특히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이민족과의 전쟁도 나라의 내분이 없는 한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단합하여 이민족인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장기간에 걸친 내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내분을 대처하는 방안이다. 우선 내분은 친족과 싸우는 것이므로 언젠가 화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옥을 파괴하거나 재물을 약탈하거나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내분은 질병 상태인 만큼 질병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일 뿐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적대자는 아니다. 친족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이지 예속이나 파멸을 의도하여 서로에게 벌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갈등 내지 적대행위 또한 다만 그 불화의 장본인들이 벌을 받는 시점까지여야만 한다.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전쟁에서 동족을 적으로 대할 때 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제국주의 아테네가 기원전 416년 동족 멜로스인들에 대해 저지른 참혹한 학살 사건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시민들 대부분을 무차별 학살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때 멜로스 여성을 자신의 정부로 삼기도 했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제1권의 내용을 구상하는데 기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5권 84-116 참고)
* 그리스 시대 동족끼리 그래왔듯이 오늘날 모든 나라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류애를 바탕으로 동등한 세계시민으로서 상호 존중 하에 국제간 평화를 도모하면서 올림픽과 국제적인 예술제 등 문화적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나라 간 민족 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에 따라 오늘날에도 대규모 살상 무기의 제한 및 전쟁 포로의 인권적 처우 등 전쟁 관련 기본 규범 등 국가 간 전쟁 또는 분쟁 시 서로가 준수하고 노력해야 할 최소한의 규범과 그 해결책이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방침들을 들여다보면 이미 2500년 전 플라톤이 내놓은 위와 같은 제안들이 근본 원칙으로 관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 자신 평생 전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국가 근간을 마치 전시 체제 정부인 양 그리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통치의 이념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 나라 간 사람들 간 평화와 안전 그리고 화해와 공존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 국가의 가능성(471c-474c)
[471c-474c]
* 소크라테스가 기대와 다르게 전쟁 관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자 글라우콘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이러다간 미뤄두었던 문제를 아예 잊어버리실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 후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생겨난다면 당연히 그런 온갖 좋은 것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그러한 정치체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득해 주기를 요구한다.(471c-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가까스로 두 개의 파도를 피했는데 삼중 파도 중 가장 크고 거친 파도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 후 그 주제가 통념에도 어긋나고 말을 꺼내기도 힘든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재촉이 거듭되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하다가 논의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환기케 한 후 정의 자체αὐτόε δικαιοσύνη와 완전하게 τελέως 정의로운 사람, 부정의와 가장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탐구해온ἐζητοῦμεν 것은 그것들을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그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그 반대와 관련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며 우리들 자신과 관련해서도 가능한 한 그것들과 가장 닮은 사람이 그러한 운명과 가장 닮은 운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ἀποδείκνυμι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472a-d)
*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본을 그림에다 충분히 표현한 화가가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까지 보여줄 수 없다 해서 그 화가를 폄하할 수 없듯이 설사 우리가 말로 만들어 온 훌륭한 나라의 본 그대로 나라를 수립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논의가 목적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72d-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행위πρᾶξις가 본래 말한 것λέξις 그대로 진리ἀληθεία에 다다를 수는ἐφάπτεσθαι 없는 만큼, 우리가 말로 설명한 나라가 실제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를 강요하기보다는 그 나라와 가장 비슷하게 경영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게 해서’ὅτι ὀλιγίστων τὸν ἀριθμὸν καὶ σμικροτάτων τὴν δύναμιν 어떤 것을 바꾸어야 이런 방식의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73a-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뭔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그 변화의 방법과 관련하여 “내가 보기에는 하나εἷς가 바뀌면 – 비록 그 하나가 작은 것은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 나라가 변화될 수 있다.”고 운을 뗀 후, 당대 아테네인들의 비웃음과 경멸에 휩쓸릴 정도로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지금의 주제 즉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신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품고 눌러만 두었던 속내를 마침내 선언하듯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나라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ἐὰν μή, ἦν δ᾽ ἐγώ, ἢ οἱ φιλόσοφοι βασιλεύσωσιν ἐν ταῖς πόλεσιν ἢ οἱ βασιλῆς τε νῦν λεγόμενοι καὶ δυνάσται φιλοσοφήσωσι γνησίως τε καὶ ἱκανῶς, καὶ τοῦτο εἰς ταὐτὸν συμπέσῃ, δύναμίς τε πολιτικὴ καὶ φιλοσοφία, τῶν δὲ νῦν πορευομένων χωρὶς ἐφ᾽ ἑκάτερον αἱ πολλαὶ φύσεις ἐξ ἀνάγκης ἀποκλεισθῶσιν, οὐκ ἔστι κακῶν παῦλα, ταῖς πόλεσι, δοκῶ δ᾽ οὐδὲ τῷ ἀνθρωπίνῳ γένει, οὐδὲ αὕτη ἡ πολιτεία μή ποτε πρότερον φυῇ τε 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καὶ φῶς ἡλίου ἴδῃ, ἣν νῦν λόγῳ διεληλύθαμεν. 요컨대 이것 이외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οὐκ ἂν ἄλλη τις εὐδαιμονήσειεν οὔτε ἰδίᾳ οὔτε δημοσίᾳ.(473c-d)
*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비장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글라우콘은 크게 놀라워하며 그 소리가 불어올 충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많은πολύς 사람들이, 그것도 만만치φαῦλος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를테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각자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ὅπλον를 집어 들고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선생님께 있는 힘껏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글라우콘은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내지 못할 경우 그야말로 조롱거리가 될 수τωθαζόμενος 있음을 함께 우려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주장을 온전히 다 펼쳐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그 자신 호의εὔνοια와 격려παρακελεύεσθαι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논의에 잘 부응하겠다고ἐμμελέστερον 다짐한다.(473e-474a)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큰 동맹군을 제공해준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언급한 후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무엇보다도 먼저 그 철학자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규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분명해지면 왜 철학자들이 나라를 인도하는 것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일인지가 드러나 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74b-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을 최대한 담보해낼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통치론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통치자로서 왜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7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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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이 재촉해왔던 주제는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여러 가지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공동체적 처자공유 일반이 가져온 이로움으로 일반화한 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을 구현하고 있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내용상 처자 공유의 가능성이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 전환이 크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세 번째 파도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주제가 처음과 다르게 보다 일반화된 주제로 슬그머니 전환 내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에 따라 세 번째 파도의 주제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 즉 플라톤이 지금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 국가가 과연 현실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로 재정립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 전에 그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전제들을 먼저 언급한다. 즉 1) 말로 세운 이상 국가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다. 2) 행위는 말한 것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3) 그러므로 이상 국가가 행위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증명할 수 없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기본 전제를 언급한 후에 그것을 토대로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의 성격 전환을 시도한다. 본 그대로 현실화는 불가능하지만, 본에 최대한 다가갈 수는 있다. 즉 본을 최대한 닮은 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로써 이상국가의 가능성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상 국가와 최대한 닮은 나라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의 구현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만족하기에 충분한 성과이자 실제 목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그 목적을 현실에서 달성하는 방법의 최선으로 철학 통치론 내지 철학자 왕이 제시된다.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자라나 햇빛을 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 미룰 대로 미루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렇게 논의의 최종 단계에서 최대한 닮은 나라의 구현 가능성으로 규정되고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극적인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제5권을 통해 철학과 철학자의 문제를 다루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 그러나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내용으로서 이곳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여러 곳 발견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상 국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와 관련하여 <국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오늘날 권좌에 앉아 있거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 또는 그 자식들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애욕(eros)에 사로잡히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가 일어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가 가능하다.(제6권 499c-e)
– 누군가가 왕들과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자손들이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사람만 생겨나고 나라가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들을 완전히 실행하기에 충분하다.(제7권 520e-521a)
– 진정한 철학자들이 여럿이든 한 명이든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 … 자신들의 나라를 바로잡을 경우,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우리의 기원이 전적으로 기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제7권 540d)
* 위에서 인용한 경우들은 언뜻 보기에 하나같이 철학자 왕이 나타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와 정치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곳에 인용된 경우들은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내용 즉 본 그대로는 불가능하고 다만 최대한 그것과 닮은 나라만 가능하다는 언급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위에서 새로 인용한 경우들을 자세히 잘 들여다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선 그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말의 내용과 정황에 있어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나같이 권력과 철학의 결합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논의 내용과 정황이 다르다면 몰라도 모두 같다면 인용된 경우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권력과 철학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의 의미 또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 제5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과 권력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는 본(本)으로서 정치체제가 아니라 분명코 ‘가능한 한도까지eis ton dynaton’ 본에 다가가 최대한 그 본과 닮은 나라와 정치체제이다. 요컨대 인용된 위의 경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라와 정치체제도 내용상 그와 다를 게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국가> 전체에서 상호 모순 없이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
*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말로 세운 이상 국가의 의미가 결코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3)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최대한 본에 가깝게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5)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대한 본에 가까운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일이다. 6) 그런데 그 방법을 찾는 최선의 길은 가능만 하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것’ 즉 가장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다. 7) 철학자가 왕이 되면 그러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위와 같은 논의 과정을 거쳐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상의 논의들을 플라톤의 우주론적 틀을 빌려와 분석하면 논의 구도가 좀 더 명확하게 해명된다.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서 플라톤 우주론과 연관된 몇 가지 개념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플라톤은 말로 세운 이상 국가를 본(paradeigm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本)을 바라보고 현실로 구현해내려는 제작자 내지 실행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제작자 내지 실행자에 의해 최대한 본에 가깝게 만들어진 실물 내지 모상이 나온다. 그런데 본과 제작자와 모상 등 3가지는 플라톤 우주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것들에 적용해보면 ‘정의 자체’,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본’에 해당하고 ‘통치자’, ‘화가’는 ‘제작자’ 그리고 ‘정의 자체에 가장 닮은 사람’, ‘그림 속에 잘 그려진 아름다운 사람’은 각각 ‘모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제작자의 행위(praxis)는 본래 말한 것(lexis)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작자는 본을 바라볼 수는 있되 행위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상으로 구현할 수 없고 다만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을 구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제작자의 실제 목표는 본이 아니라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이다. 실제로 여기서 화가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최대한 그림으로 잘 표현해내는 과정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가 우주를 만드는 과정과 그대로 일치하고 본 또한 두 곳 모두 ‘paradeigma’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플라톤 연구자라면 모두가 동의하고 있듯이 <티마이오스>에서 그 paradeigma, 즉 본은 우주의 원상으로서 플라톤 존재론의 최상위 실재, 즉 이데아적인 일자성을 갖는 그 자체로 진상인 ‘자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바라보면서 물질적 질료에 영혼을 결합하여 최대한 본과 닮은 것으로 우주를 만들어 낸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는 항성과 행성 등 여럿으로 이루어진 운동하는 다(多)의 세계이되 그 여럿은 각각 본의 일자적 ‘자체성’(kath’ auto on)을 닮은 ‘자기 동일성’(tauton)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의 세계로서 우주 영혼으로 자기 운동하되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실재한다. 즉 우주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체이다.
* 그러나 그에 비하면 인간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신들에 의해 만들어져 우주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가사적(可死的) 존재로서 해체와 소멸을 면치 못한다. 요컨대 우주는 그 자체로 본의 모습 그대로 관철된 영원한 실재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본에 대한 앎은 가질 수 있어도 우주 영혼처럼 그것을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보존하지 못한 채 신체가 갖는 무규정성으로 인해 평생 무지와 탐욕에 시달리는 가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 우주 영혼을 닮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있어 그 자신 영혼의 자기 고양을 통해 비록 본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최대한 우주와 닮도록 자신을 도야할 수 있고 그것을 기초로 우주적 조화 원리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도 만들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곳 논의에서도 말로 세운 이상적 정치체제는 본이 되고 현실 통치자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최대한 그것을 닮은 나라를 만드는 제작자가 되며 최대한 본과 닮은 나라는 본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조건에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 국가가 된다.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주제인 이상국가가 현실국가로 가능한지 아닌지, 본이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는 애초부터 물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따질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에게서 본은 모상에 관여될 뿐 본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기서도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가능성 문제를 아예 본을 최대한 닮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문제로 제한한 뒤 그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최선의 방도로서 결국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 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 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상 국가론이라고도 불린다. <국가>의 이상은 처음부터 현실화가 될 수 없음을 플라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법률>에 가서 그 현실화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그 본을 말로 세운 후 최대한 그것을 닮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를 만드는 최선의 방도로서 플라톤이 도달한 것이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고 철학자 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이상적 논의를 기초로 그 연장선 위에서 본으로서 <국가>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기초해 구체적인 법률들이 발전적인 보완책으로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극이다.
* 이제 처자 공유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고 고양되면서 마침내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본으로 삼아 최선의 현실적인 나라를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능력 내지 능력자를 찾는 일로 수렴되고 최종적으로 그 정점에서 드디어 철학과 철학자가 그 방법의 가히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요체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 즉 철학자 왕의 등장을 제시하자 대화 참여자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지금 아테네 현실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가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모를 리 없다. 사실 바로 이러한 반응이 나올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최대한 그 충격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서 세 가지 파도 등 다각적인 수준의 예비적 논의를 문학적 복선까지 끌어들여 주도면밀하게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애초에 예상하고 준비한 논의 구도대로 대화 참여자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막아서기보다는 그의 동맹군이 되어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호의와 격려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앞으로 전개될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노라 다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에 최대한 가깝게 갈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왕의 배출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며 왜 그런 사람이 왕의 역할에 부합하는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 왕을 배출하려면 어떤 조건과 어떤 교육적 환경에 주어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국가>가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 영역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 결국,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철학자 왕의 등장을 통해 가능하고 철학자 왕의 등장은 철학자 교육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가능성의 영역인 한에서 각각의 단계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공적인 철학자 양성 교육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현실화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전제이자 조건이 된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논의의 정점으로 불리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 논의의 초점은 종국적으로 철학자의 교육 과정에 모여져 있다. 그런데 교육은 본질적으로 능력의 영역이고 능력의 영역은 그야말로 양상론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이다. 본에 대한 온전한 앎을 토대로 영원한 우주 실재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현실 통치자는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았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도모하는 일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며, 잘 되었다가도 흐트러질 수 있고 흐트러져 있다가도 다시 잘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본 또는 선의 이데아를 알아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그 본에 가까운 것을 행위를 통해 실제로 구현해내려는 의지와 능력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일례로 불가에서 어느 누가 성불을 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관 앞에서 어느 순간 판단을 그르쳐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성불했다고 함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푯대 삼아 다시 자신을 곧추세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굳건히 그것에로 다가갈 수 있는 하나같은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가능적 능력 또한 바로 그처럼 끊임없는 분투와 지적 긴장을 통해 최선에 다가가는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구현 가능성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본성 그대로 앎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그에 부응하는 철학 통치자의 한결같은 실천을 통해 담보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란 그 자체로 진정한 앎을 향한 분투 어린 수련과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현실에서 최대한 그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철학자 왕 을 통해서 담보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근본 바탕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객관적인 표준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법률이나 제도가 아닌 어떤 특정 사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은 법치와 인치의 특징을 비교해서 살필 때 그랬듯이 적지 않은 한계와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나치즘이나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초래한 비극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단과 무지를 교묘하게 지혜로 포장하여 대놓고 참혹한 폭정을 일삼는 자’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어 가히 무망하기 그지없는 몽상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 최고 권력을 맡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고 권력을 기능적으로 분산하고 상호 잘 감시할 것인가가 핵심 관심 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통치자와 관련해서도 누가 훌륭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보다 누가 위험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에서 배제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게다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현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헤아려 가며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도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 판에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한 가지 방식을 택해 일거에 해결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권력과 지성의 결합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그 취지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나 법률에 한정하여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 어차피 그는 의심스럽기 때문에 – 그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정치의식 관련 덕목으로 요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플라톤에게서 본과 모상, 이상과 현실은 서로가 각기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공존하는 것인 만큼 플라톤 정치철학 전체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본으로서 <국가>의 이상 국가론만이 아니라 최대한 그에 닮은 모상으로서 <법률>의 현실 국가론을 동시에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비판은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일정 부분 <법률>에서 고려되고 해소되고 있다. – 끝 –
* 다음 주제 :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