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1. 전쟁에 관한 일(466e-471c) 그리고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471c-474c)

 

제5권 [466e – 471c]

*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파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뜬금없이 아래와 같이 전쟁에 관한 일들을 길게 늘어놓는다.

1) 아이들과 동반 출정의 이유와 안전을 위한 방책

*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구경θέα을 통해 장차 아이들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있도록 전쟁에 함께 출정해야 한다. (466e)

* 이때 이들의 안전ἀσφάλεια을 도모하기 위해서 경험과 연배에서 지도자ἡγεμονεύς이자 아이들의 인솔자παιδαγωγός이기에 충분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말 타는 법ἱππεύειν을 가르쳐 필요할 경우 가장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467d)

2) 전사들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와 전사자에 대한 대우

* 전사στρατιώτης들 가운데 비겁κάκη하게 대오τάξις를 이탈하거나 무기ὅπλον를 버린다거나 혹은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자는 장인이나 농부로 보내야 한다.(468a) 산 채로 적들에게 잡힌 자는 적들οἱ πολεμία이 마음대로 하도록 선물로 줘 버려야 한다.(468b-c)

* 반대로 무훈을 세우고ἀριστεύσαντά 명성을 떨친εὐδοκιμήσαντα 자는 화관στέφανος을 수여하고 환영해야 하고 짝짓기 기회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무훈을 세우는 데 더 열심을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우수한 자식들도 태어난다.(468c)

* 호메로스를 따라 젊은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에게 명예τιμή를 높여주는 것이 정당하다. 제사나 모든 행사에서 찬가ὕμνος와 함께 명예로운 자리와 고기, 그리고 가득 찬 술잔으로 명예를 높인다. 그것은 한창때 용감한 자들의 명예를 드높임과 동시에 체력을 증진시킨다.(468d-e)

* 출정 중 전사한 이들 가운데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황금족γένος τοῦ χρυσοῦ으로 이야기하고 잘 장사 지낸 후 무덤을 돌보고 엎드려 절해야 한다. 또한, 특별히 훌륭하게 살다 죽었을 경우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관례νόμος로 삼아야 한다.(468e-469b)

3) 적들에 대한 태도

* 가능한 한 그리스인들이 이민족βάρβαρος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그들이 적일 경우에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지 말아야 한다.(469b-c)

* 승리를 거두고서 죽은 자에게서 무기 외에 약탈해서는 안 된다. 시체를 약탈하거나 시신 수습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 땅을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해의 농작물καρπός만을 취한다.(469c-470b)

* 친족에 대한 적대행위는 ‘내분’στάσις이고 남에 대한 적대행위는 ‘전쟁’πόλεμός이다. 그리스가 병이 들어 내분을 벌이더라도 상대편의 농토를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한, 보모τροφό이자 어머니인 나라를 유린해서는 안 된다.(470b-d)

* 패배한 친족들은 싸울 상대가 아니라 화해διαλλάσσειν하게 될 상대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농작물 정도나 취하는 게 적정하다. 그리스인들은 훌륭하고 양식 있는ἀγαθοί τε καὶ ἥμεροι 사람들로서 그리스를 자신들의 조국으로 간주하고 사랑하며 공통의 종교의례를 갖는다.(470d-e)

* 친족과 내분이 있을 때도 그리스인들은 상대방을 노예로 삼거나 파멸시키는 식으로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σωφρονισταί이지 적이 아니다.(471a)

*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그들에게 적대자인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대자이다. 따라서 대다수가 친구인 상대방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거나 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471b)

* ‘아무 잘못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의해’ὑπὸ τῶν ἀναιτίων ἀλγούντων 책임자들οἱ αἴτιοι이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만 갈등을 지속해야 한다.(471b)

* 땅을 유린하거나 집을 불사르지 말라는 것도 수호자들에게 법으로 제정해줘야 한다.(47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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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7d 아이들의 인솔자 : 아테네에서 이 역할은 노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경험과 연배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우수한 시민에게 그 역할이 맡겨져 있다. 플라톤은 아이들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이미 혁신을 기하고 있다.

* 467d 말 타는 법 : 아테네 전투편제에서 기마병은 자신이 소유한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소위 귀족 내지 지휘자급의 병과였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경우 승마교육이 중시되었다. 이곳에서도 수호자 계층에게 승마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 468c 이 문맥에서 글라우콘은 무공을 세웠을 경우 ‘출정 중 입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 이것은 무공을 세운 자들에게 소년애를 마음껏 누리게 해야 한다는 글라우콘의 바람을 드러낸 말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 짝짓기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설사 동성 간 입맞춤이 허용되더라도 그것은 자식을 대하듯이 선의의 입맞춤이어야 함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403b) 플라톤은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의 결합은 자연에 어긋난 것으로 뻔뻔함(tolmēma)과 무절제(akrateia)의 소산으로 여긴다.(<법률> 63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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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답변을 최대한 늦춰 보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일종의 여담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내용상 전쟁 관련해서 이상국가가 택하고 있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 부분 주제와 연관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나마 플라톤의 전쟁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대행위를 크게 동족끼리 싸우는 내분과 이민족과 싸우는 전쟁으로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에게서 전쟁은 오직 침입에 맞서는 방어 전쟁뿐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인 모두가 칭송하고 옹호하던 아테네의 패권적 침략 전쟁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메넥세노스> 해설 참고) 실제로 동족이건 이민족에 대해서건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있는 부분은 대화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내분과 전쟁 모두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나쁜 것이지만 플라톤은 앞서도 살폈듯이 내분을 특히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이민족과의 전쟁도 나라의 내분이 없는 한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단합하여 이민족인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장기간에 걸친 내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내분을 대처하는 방안이다. 우선 내분은 친족과 싸우는 것이므로 언젠가 화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옥을 파괴하거나 재물을 약탈하거나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내분은 질병 상태인 만큼 질병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일 뿐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적대자는 아니다. 친족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이지 예속이나 파멸을 의도하여 서로에게 벌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갈등 내지 적대행위 또한 다만 그 불화의 장본인들이 벌을 받는 시점까지여야만 한다.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전쟁에서 동족을 적으로 대할 때 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제국주의 아테네가 기원전 416년 동족 멜로스인들에 대해 저지른 참혹한 학살 사건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시민들 대부분을 무차별 학살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때 멜로스 여성을 자신의 정부로 삼기도 했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제1권의 내용을 구상하는데 기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5권 84-116 참고)

* 그리스 시대 동족끼리 그래왔듯이 오늘날 모든 나라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류애를 바탕으로 동등한 세계시민으로서 상호 존중 하에 국제간 평화를 도모하면서 올림픽과 국제적인 예술제 등 문화적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나라 간 민족 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에 따라 오늘날에도 대규모 살상 무기의 제한 및 전쟁 포로의 인권적 처우 등 전쟁 관련 기본 규범 등 국가 간 전쟁 또는 분쟁 시 서로가 준수하고 노력해야 할 최소한의 규범과 그 해결책이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방침들을 들여다보면 이미 2500년 전 플라톤이 내놓은 위와 같은 제안들이 근본 원칙으로 관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 자신 평생 전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국가 근간을 마치 전시 체제 정부인 양 그리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통치의 이념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 나라 간 사람들 간 평화와 안전 그리고 화해와 공존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 국가의 가능성(471c-474c)

 

[471c-474c]

* 소크라테스가 기대와 다르게 전쟁 관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자 글라우콘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이러다간 미뤄두었던 문제를 아예 잊어버리실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 후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생겨난다면 당연히 그런 온갖 좋은 것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그러한 정치체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득해 주기를 요구한다.(471c-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가까스로 두 개의 파도를 피했는데 삼중 파도 중 가장 크고 거친 파도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 후 그 주제가 통념에도 어긋나고 말을 꺼내기도 힘든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재촉이 거듭되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하다가 논의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환기케 한 후 정의 자체αὐτόε δικαιοσύνη와 완전하게 τελέως 정의로운 사람, 부정의와 가장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탐구해온ἐζητοῦμεν 것은 그것들을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그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그 반대와 관련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며 우리들 자신과 관련해서도 가능한 한 그것들과 가장 닮은 사람이 그러한 운명과 가장 닮은 운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ἀποδείκνυμι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472a-d)

*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본을 그림에다 충분히 표현한 화가가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까지 보여줄 수 없다 해서 그 화가를 폄하할 수 없듯이 설사 우리가 말로 만들어 온 훌륭한 나라의 본 그대로 나라를 수립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논의가 목적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72d-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행위πρᾶξις가 본래 말한 것λέξις 그대로 진리ἀληθεία에 다다를 수는ἐφάπτεσθαι 없는 만큼, 우리가 말로 설명한 나라가 실제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를 강요하기보다는 그 나라와 가장 비슷하게 경영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게 해서’ὅτι ὀλιγίστων τὸν ἀριθμὸν καὶ σμικροτάτων τὴν δύναμιν 어떤 것을 바꾸어야 이런 방식의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73a-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뭔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그 변화의 방법과 관련하여 “내가 보기에는 하나εἷς가 바뀌면 – 비록 그 하나가 작은 것은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 나라가 변화될 수 있다.”고 운을 뗀 후, 당대 아테네인들의 비웃음과 경멸에 휩쓸릴 정도로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지금의 주제 즉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신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품고 눌러만 두었던 속내를 마침내 선언하듯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나라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ἐὰν μή, ἦν δ᾽ ἐγώ, ἢ οἱ φιλόσοφοι βασιλεύσωσιν ἐν ταῖς πόλεσιν ἢ οἱ βασιλῆς τε νῦν λεγόμενοι καὶ δυνάσται φιλοσοφήσωσι γνησίως τε καὶ ἱκανῶς, καὶ τοῦτο εἰς ταὐτὸν συμπέσῃ, δύναμίς τε πολιτικὴ καὶ φιλοσοφία, τῶν δὲ νῦν πορευομένων χωρὶς ἐφ᾽ ἑκάτερον αἱ πολλαὶ φύσεις ἐξ ἀνάγκης ἀποκλεισθῶσιν, οὐκ ἔστι κακῶν παῦλα, ταῖς πόλεσι, δοκῶ δ᾽ οὐδὲ τῷ ἀνθρωπίνῳ γένει, οὐδὲ αὕτη ἡ πολιτεία μή ποτε πρότερον φυῇ τε 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καὶ φῶς ἡλίου ἴδῃ, ἣν νῦν λόγῳ διεληλύθαμεν. 요컨대 이것 이외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οὐκ ἂν ἄλλη τις εὐδαιμονήσειεν οὔτε ἰδίᾳ οὔτε δημοσίᾳ.(473c-d)

*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비장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글라우콘은 크게 놀라워하며 그 소리가 불어올 충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많은πολύς 사람들이, 그것도 만만치φαῦλος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를테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각자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ὅπλον를 집어 들고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선생님께 있는 힘껏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글라우콘은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내지 못할 경우 그야말로 조롱거리가 될 수τωθαζόμενος 있음을 함께 우려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주장을 온전히 다 펼쳐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그 자신 호의εὔνοια와 격려παρακελεύεσθαι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논의에 잘 부응하겠다고ἐμμελέστερον 다짐한다.(473e-474a)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큰 동맹군을 제공해준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언급한 후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무엇보다도 먼저 그 철학자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규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분명해지면 왜 철학자들이 나라를 인도하는 것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일인지가 드러나 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74b-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을 최대한 담보해낼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통치론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통치자로서 왜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7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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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이 재촉해왔던 주제는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여러 가지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공동체적 처자공유 일반이 가져온 이로움으로 일반화한 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을 구현하고 있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내용상 처자 공유의 가능성이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 전환이 크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세 번째 파도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주제가 처음과 다르게 보다 일반화된 주제로 슬그머니 전환 내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에 따라 세 번째 파도의 주제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 즉 플라톤이 지금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 국가가 과연 현실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로 재정립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 전에 그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전제들을 먼저 언급한다. 즉 1) 말로 세운 이상 국가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다. 2) 행위는 말한 것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3) 그러므로 이상 국가가 행위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증명할 수 없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기본 전제를 언급한 후에 그것을 토대로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의 성격 전환을 시도한다. 본 그대로 현실화는 불가능하지만, 본에 최대한 다가갈 수는 있다. 즉 본을 최대한 닮은 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로써 이상국가의 가능성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상 국가와 최대한 닮은 나라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의 구현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만족하기에 충분한 성과이자 실제 목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그 목적을 현실에서 달성하는 방법의 최선으로 철학 통치론 내지 철학자 왕이 제시된다.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자라나 햇빛을 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 미룰 대로 미루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렇게 논의의 최종 단계에서 최대한 닮은 나라의 구현 가능성으로 규정되고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극적인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제5권을 통해 철학과 철학자의 문제를 다루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 그러나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내용으로서 이곳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여러 곳 발견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상 국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와 관련하여 <국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오늘날 권좌에 앉아 있거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 또는 그 자식들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애욕(eros)에 사로잡히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가 일어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가 가능하다.(제6권 499c-e)

– 누군가가 왕들과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자손들이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사람만 생겨나고 나라가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들을 완전히 실행하기에 충분하다.(제7권 520e-521a)

– 진정한 철학자들이 여럿이든 한 명이든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 … 자신들의 나라를 바로잡을 경우,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우리의 기원이 전적으로 기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제7권 540d)

* 위에서 인용한 경우들은 언뜻 보기에 하나같이 철학자 왕이 나타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와 정치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곳에 인용된 경우들은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내용 즉 본 그대로는 불가능하고 다만 최대한 그것과 닮은 나라만 가능하다는 언급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위에서 새로 인용한 경우들을 자세히 잘 들여다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선 그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말의 내용과 정황에 있어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나같이 권력과 철학의 결합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논의 내용과 정황이 다르다면 몰라도 모두 같다면 인용된 경우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권력과 철학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의 의미 또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 제5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과 권력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는 본(本)으로서 정치체제가 아니라 분명코 ‘가능한 한도까지eis ton dynaton’ 본에 다가가 최대한 그 본과 닮은 나라와 정치체제이다. 요컨대 인용된 위의 경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라와 정치체제도 내용상 그와 다를 게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국가> 전체에서 상호 모순 없이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

*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말로 세운 이상 국가의 의미가 결코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3)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최대한 본에 가깝게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5)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대한 본에 가까운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일이다. 6) 그런데 그 방법을 찾는 최선의 길은 가능만 하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것’ 즉 가장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다. 7) 철학자가 왕이 되면 그러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위와 같은 논의 과정을 거쳐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상의 논의들을 플라톤의 우주론적 틀을 빌려와 분석하면 논의 구도가 좀 더 명확하게 해명된다.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서 플라톤 우주론과 연관된 몇 가지 개념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플라톤은 말로 세운 이상 국가를 본(paradeigm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本)을 바라보고 현실로 구현해내려는 제작자 내지 실행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제작자 내지 실행자에 의해 최대한 본에 가깝게 만들어진 실물 내지 모상이 나온다. 그런데 본과 제작자와 모상 등 3가지는 플라톤 우주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것들에 적용해보면 ‘정의 자체’,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본’에 해당하고 ‘통치자’, ‘화가’는 ‘제작자’ 그리고 ‘정의 자체에 가장 닮은 사람’, ‘그림 속에 잘 그려진 아름다운 사람’은 각각 ‘모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제작자의 행위(praxis)는 본래 말한 것(lexis)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작자는 본을 바라볼 수는 있되 행위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상으로 구현할 수 없고 다만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을 구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제작자의 실제 목표는 본이 아니라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이다. 실제로 여기서 화가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최대한 그림으로 잘 표현해내는 과정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가 우주를 만드는 과정과 그대로 일치하고 본 또한 두 곳 모두 ‘paradeigma’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플라톤 연구자라면 모두가 동의하고 있듯이 <티마이오스>에서 그 paradeigma, 즉 본은 우주의 원상으로서 플라톤 존재론의 최상위 실재, 즉 이데아적인 일자성을 갖는 그 자체로 진상인 ‘자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바라보면서 물질적 질료에 영혼을 결합하여 최대한 본과 닮은 것으로 우주를 만들어 낸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는 항성과 행성 등 여럿으로 이루어진 운동하는 다(多)의 세계이되 그 여럿은 각각 본의 일자적 ‘자체성’(kath’ auto on)을 닮은 ‘자기 동일성’(tauton)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의 세계로서 우주 영혼으로 자기 운동하되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실재한다. 즉 우주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체이다.

* 그러나 그에 비하면 인간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신들에 의해 만들어져 우주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가사적(可死的) 존재로서 해체와 소멸을 면치 못한다. 요컨대 우주는 그 자체로 본의 모습 그대로 관철된 영원한 실재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본에 대한 앎은 가질 수 있어도 우주 영혼처럼 그것을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보존하지 못한 채 신체가 갖는 무규정성으로 인해 평생 무지와 탐욕에 시달리는 가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 우주 영혼을 닮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있어 그 자신 영혼의 자기 고양을 통해 비록 본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최대한 우주와 닮도록 자신을 도야할 수 있고 그것을 기초로 우주적 조화 원리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도 만들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곳 논의에서도 말로 세운 이상적 정치체제는 본이 되고 현실 통치자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최대한 그것을 닮은 나라를 만드는 제작자가 되며 최대한 본과 닮은 나라는 본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조건에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 국가가 된다.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주제인 이상국가가 현실국가로 가능한지 아닌지, 본이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는 애초부터 물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따질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에게서 본은 모상에 관여될 뿐 본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기서도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가능성 문제를 아예 본을 최대한 닮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문제로 제한한 뒤 그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최선의 방도로서 결국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 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 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상 국가론이라고도 불린다. <국가>의 이상은 처음부터 현실화가 될 수 없음을 플라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법률>에 가서 그 현실화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그 본을 말로 세운 후 최대한 그것을 닮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를 만드는 최선의 방도로서 플라톤이 도달한 것이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고 철학자 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이상적 논의를 기초로 그 연장선 위에서 본으로서 <국가>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기초해 구체적인 법률들이 발전적인 보완책으로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극이다.

* 이제 처자 공유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고 고양되면서 마침내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본으로 삼아 최선의 현실적인 나라를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능력 내지 능력자를 찾는 일로 수렴되고 최종적으로 그 정점에서 드디어 철학과 철학자가 그 방법의 가히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요체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 즉 철학자 왕의 등장을 제시하자 대화 참여자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지금 아테네 현실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가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모를 리 없다. 사실 바로 이러한 반응이 나올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최대한 그 충격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서 세 가지 파도 등 다각적인 수준의 예비적 논의를 문학적 복선까지 끌어들여 주도면밀하게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애초에 예상하고 준비한 논의 구도대로 대화 참여자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막아서기보다는 그의 동맹군이 되어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호의와 격려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앞으로 전개될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노라 다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에 최대한 가깝게 갈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왕의 배출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며 왜 그런 사람이 왕의 역할에 부합하는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 왕을 배출하려면 어떤 조건과 어떤 교육적 환경에 주어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국가>가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 영역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 결국,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철학자 왕의 등장을 통해 가능하고 철학자 왕의 등장은 철학자 교육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가능성의 영역인 한에서 각각의 단계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공적인 철학자 양성 교육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현실화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전제이자 조건이 된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논의의 정점으로 불리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 논의의 초점은 종국적으로 철학자의 교육 과정에 모여져 있다. 그런데 교육은 본질적으로 능력의 영역이고 능력의 영역은 그야말로 양상론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이다. 본에 대한 온전한 앎을 토대로 영원한 우주 실재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현실 통치자는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았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도모하는 일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며, 잘 되었다가도 흐트러질 수 있고 흐트러져 있다가도 다시 잘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본 또는 선의 이데아를 알아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그 본에 가까운 것을 행위를 통해 실제로 구현해내려는 의지와 능력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일례로 불가에서 어느 누가 성불을 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관 앞에서 어느 순간 판단을 그르쳐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성불했다고 함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푯대 삼아 다시 자신을 곧추세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굳건히 그것에로 다가갈 수 있는 하나같은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가능적 능력 또한 바로 그처럼 끊임없는 분투와 지적 긴장을 통해 최선에 다가가는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구현 가능성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본성 그대로 앎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그에 부응하는 철학 통치자의 한결같은 실천을 통해 담보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란 그 자체로 진정한 앎을 향한 분투 어린 수련과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현실에서 최대한 그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철학자 왕 을 통해서 담보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근본 바탕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객관적인 표준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법률이나 제도가 아닌 어떤 특정 사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은 법치와 인치의 특징을 비교해서 살필 때 그랬듯이 적지 않은 한계와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나치즘이나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초래한 비극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단과 무지를 교묘하게 지혜로 포장하여 대놓고 참혹한 폭정을 일삼는 자’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어 가히 무망하기 그지없는 몽상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 최고 권력을 맡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고 권력을 기능적으로 분산하고 상호 잘 감시할 것인가가 핵심 관심 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통치자와 관련해서도 누가 훌륭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보다 누가 위험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에서 배제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게다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현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헤아려 가며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도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 판에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한 가지 방식을 택해 일거에 해결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권력과 지성의 결합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그 취지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나 법률에 한정하여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 어차피 그는 의심스럽기 때문에 – 그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정치의식 관련 덕목으로 요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플라톤에게서 본과 모상, 이상과 현실은 서로가 각기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공존하는 것인 만큼 플라톤 정치철학 전체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본으로서 <국가>의 이상 국가론만이 아니라 최대한 그에 닮은 모상으로서 <법률>의 현실 국가론을 동시에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비판은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일정 부분 <법률>에서 고려되고 해소되고 있다.  – 끝 –

 

* 다음 주제 :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1.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 우선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 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의 논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목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점은 플라톤 스스로 주도면밀하게 구성한 이곳 전후의 논의 구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두 번째 파도를 논의하기 전에 플라톤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어떤 문학적 구성으로 어떻게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전체 논의 국면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 중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해 청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제5권에 들어서며 새로운 주제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의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그 문제 해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크게 부각한다. 특히 처자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대화 참가자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자신 논의 자체를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당혹스럽고 난감한 주제로 제기된다.

2)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가능성은 젖혀두고서라도 일단 이론적으로는 처자 공유의 문제가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라는 핵심가치의 구현 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 이에 따라 이 가능성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세 번째 파도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라는 주제 자체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4) 아니나 다를까 글라우콘은 제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세 번째 파도인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곳 논의 국면에서 플라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를 최대의 관심사로 극대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는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가능하면 정의로운 나라의 핵심가치가 구현 가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를 슬그머니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그 두 가지 가능성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떻게 주어질까? 다음 강해에서 다루어지겠지만 그 가능성은 단적으로 ‘철학자 왕’을 통해 주어진다. 이렇게 보면 결국 세 파도와 관련한 이곳 논의 국면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을 최고도로 끌어올린 다음 그 절정에서 그 불가능에 가까운 난관을 해소하는 종국의 열쇠로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를 <국가> 논의의 최고 정점으로 끌어 올리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 이로써 플라톤이 왜 <국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제5권을 새로운 논의 전환점으로 삼으면서 왜 세 파도를 끌어들였고 또 그 논의 전환점을 통해 무엇을 핵심 주제로 삼으려 했는지가 비로소 밝혀진다. 요컨대 세 가지 파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제5권에서 플라톤이 이제 집중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곧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이고 그에 따라 제5권-제7권은 정의로운 나라를 구현하는 유일한 토대로서 그 철학자 왕을 출현시킬 수 있는 철학과 그 교육 과정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나라(제2권-제4권)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는 그 철학자 왕의 가능성의 문제(497a-502c)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철학자 왕을 담보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문제(502c-541b)로 귀착한다.

* 그러나 이러한 교육 과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할까? 교육은 능력의 문제를 본질로 하고 있고 능력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최소한 가능성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 세 번째 파도를 다루는 부분에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이 실천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에 있다. 플라톤의 철학 역시 지혜를 향한 사랑으로서 ‘사랑’ 즉 본질적으로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끊임없이 선의 이데아, 즉 지고의 진리에 다가가는 ‘분투’의 철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해당 부분 강해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이상이 세 파도와 관련한 논의 국면 전체가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이다. 그러면 이제 서두에서 밝힌 취지에 맞게 그러한 논의 국면의 전체적인 이해를 배경에 두고 오늘 강해의 주제인 처자 공유의 목적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461e-466d]

* 플라톤은 우선 나라의 최대선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고 그러한 나라의 결속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유에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 나라 수립을 위해서 가장 큰 좋은 것, 이것이 입법자가 법을 세울 때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συνδῇ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διασπᾷ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2a)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ἡδονῆ과 괴로움λύπη의 공유κοινωνία이다. (462b) 최대다수πλεῖστοι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ἐπὶ τὸ αὐτὸ κατὰ ταὐτ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경영되는 나라이다.(462c)

*‘우리 중 누군가가 손가락을 찌었을 경우, 몸 전체를 거쳐 영혼까지 뻗어 있으면서 안에 있는 다스리는 것에 의해 단일한 조직σύνταξις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πᾶσα ἡ κοινωνία가 손가락 찧은 것을 감지하고, 부분의 고통에 대해 전체가 모두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가 경영되는 방식이다.(462c-d) 다시 말해 ‘시민들 중 한 명’ἡ τοιαύτη πόλις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는 통치자들과 민중δῆμος이 서로 시민πολίτης들이라고 부른다.(462e-463a)

* 그러나 다른 많은 나라의 민중들은 통치자를 군주δεσπότης라고 부르고 민주정체를 갖춘 나라에서는 그냥 그대로 통치자ἄρχων라고 부른다.(463a) 이에 비교해 우리의 나라에서 민중들은 통치자들을 시민들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구원자σωτήρ들이자 조력자들ἐπίκουροι이라고 부르고 통치자들은 민중을 보수를 주는 자μισθοδότης들이자 부양자τροφεύς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은 민중을 노예δοῦλος라고 부른다.(463b) 다른 나라에서는 통치자들 서로를 동료 통치자συνάρχων라 부르지만 우리의 나라에서는 동료 수호자συμφύλαξ라고 부른다.(463b)

* 다른 나라 통치자들의 경우 어떤 이들은 친족οἰκεῖος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남ἀλλότριος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나라 수호자들은 누구를 만나든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또는 이들의 자손이나 조상을 만난 것으로 여긴다.(463c) 이 나라 통치자들은 이름만 친족이 아니라 이름에 따르는 모든 행동도 친척을 대하듯이 하도록 법을 정하여 어렸을 때부터 서로에 대해 공경하고 봉양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 등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하게 한다.(463d)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일이 잘되거나 잘못되었을 때 ‘내 일이 잘되었다’거나 ‘내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두 한목소리를 낸다.(463e)

* 이러한 신념δόγμα을 갖고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다 보면 우리의 시민들은 동일한 것을 최대로 공유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을 최대로 공유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주된 이유는 이 나라에 마련된 다른 제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수호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a) 즉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b)

 

[464b – 466d]

* 그런 연후 이제 소크라테스는 처자 공유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 진정한 나라의 수호자들은 집도 토지도 다른 어떤 소유물도 사적으로 갖지 말아야 하며, 다만 수호의 보수로 다른 이들에게서 양식을 받아 그들 모두가 공동으로 소비해야 한다.(464b) 참된 수호자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남들과 상관없이 혼자 여자와 아이도 따로 가지고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사사로운 즐거움과 아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에 대한 하나의 신념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 할 수 있는 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이다.(464c)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소송이나 고소도 없으며 돈이나 자식과 친척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464d-e)

* 그들 사이에서 폭력이나 폭행으로 고소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며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폭력을 쓰거나 모욕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 δέος과 염치αἰδώς가 그런 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으로 인해 모든 영역에서 이 사람들은 반목함이 없이 서로서로 평화εἰρήνη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464e-465b)

* 그리고 이들이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라의 다른 계층 사람들이 이들과 반목하거나 혹은 자기들 서로 간에 반목을 하게 될 위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와 같은 아주 사소한 나쁜 것들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등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ἀγεννής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465c) 이들은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가 사는 복된μακάριος 삶보다 더 복되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경기 우승자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수호자들이 가진 것 중에 작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호자들이 거둔 승리는 더욱 훌륭한 것이며, 그들은 나라를 구한 명예를 누리고 공공기금으로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어 죽어서도 걸맞은 장례가 치러진다.(465d-e)

*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나라 안의 한 집단에 주목해서 그 집단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할 수 있는 한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6a) 그리고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οἱ Ὀλυμπιονῖκαι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났다면, 그것은 구두장이들의 삶이나 다른 어떤 장인들의 삶, 농부들의 삶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466b) 수호자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몰지각하고 유치한 믿음에 사로잡혀 우리가 이야기한 삶을 고수하지 못하고 나라 안의 모든 것을 권력을 행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쪽으로 이끌린다면, 그는 ‘반이 전체보다 많다’πλέον ἥμισυ παντός고 이야기한 헤시오도스가 진실로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66b-c)

*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교육받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는 일을 공유해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공유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전시이건 아니건 그러한 공유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이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도 그러한 공유가 생기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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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3b 조력자들 : 이곳에서 조력자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epikouroi는 수호자 계층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구분하면서 전사들을 통치자의 ‘보조자들’ 또는 ‘조력자들’로 부를 때(414b, 416a, 420a 등등) 사용한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는 민중들이 통치자들을 부를 때 쓰는 말로 나온다. 즉 수호자들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사람이고 통치자들은 민중들을 보조하는 사람이다.

* 464b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466a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수호자들’이란 말을 쓰지 않고 ‘조력자들’이라는 말을 썼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note 참고)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수호자 계층 가운데 통치자들이 아닌 전사 계급 즉 ‘보조자’ 내지 ‘조력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 공유와 관련한 대부분 문맥에서는 일관되게 수호자들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바로 앞서 통치자들을 조력자들로 불렀던 것에 기초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465c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 아테네 당대 현실의 경제적 실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초래하는 일상의 양태로서 오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 465c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 수호자 집단 내에 하인이나 노예도 없음을 보여준다.

* 466a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 제4권을 시작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제기한 비판이다.(419a)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들의 관점에 서 있다.(<정치학> 1264b15-24 참고)

* 466b ‘반이 전체보다 많다’ :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40 참고. 권력자들이 모두 나라의 반을 갖겠다고 한다면 그 모두를 합칠 경우, 전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나라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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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곳의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곳에서 제시된 이상적 공동체의 핵심 요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위와 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앞선 강해에서도 여러 번 소개되었듯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기존의 논쟁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한번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석을 더 하자면 아래와 같다.

 

* 1)의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흔히들 내거는 총화단결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리거나 일체의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나라 전체를 위해 하나의 대오를 강조하는 군국주의적인 획일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상은 플라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들은 각기 자연적 본성에 따라 서로 다른 각기 고유의 역할을 갖고 그들 간의 분업적 의존을 통해 각기의 본성적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획일적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나라라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역할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음악에서도 조화는 획일적인 같은 음들이 그저 하나같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들이 각각의 고유한 음가를 가진 상태에서 마치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 하나 됨이란 같은 것들끼리의 획일적인 통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다움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들 상호 간의 조화를 통해서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통치를 수행하는 권력자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인 시민의 이익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좋아하는 것이 통치자의 본성인 한에서 통치자 또한 충실한 통치의 수행을 통해 그 스스로 행복을 얻는다.

* ‘누군가가 손가락을 찧었을 때 단일한 조직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가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462c-d)라는 말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유기체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20세기 전체주의자들이 내건 국가유기체설에 따르면 개인과 나라의 관계는 유기체에서 유기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위들과 몸 전체의 관계와 동일하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그 역할과 기능 또한 자신들 개개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 몸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국가를 떠나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역할과 기능 또한 개인 자신이 아니라 전체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단일 생명체가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성하는 부위도 존재할 수 없듯이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 그리고 생체 부위들 일부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상실해도 생명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개인들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고 희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나라는 과연 이와 같은 국가유기체설에 토대를 둔 전체주의 국가일까? 일단 유기체라는 말만 고려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유기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개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고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 또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나라에서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의 각 계층이다. 개인 차원에서도 유기체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신체적 부위들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그리고 개인들은 분업적인 상호 의존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욕망을 최선으로 발휘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 고유의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의지한다.

*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가>의 논의 자체가 어떤 개인이 더 행복한가를 주제로 출발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논의는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서 분명하게 살피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개인 내부 영혼들 간의 조화에 기초한 개인 자신의 행복이 논제로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은 단지 나라의 이익을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다’ 또는 ‘개인들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행복 또한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담보된다는 앎 즉 절제의 덕을 토대로 기꺼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절제라는 그러한 공동의 덕목 아래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가장 행복한 개인이 되고 또 동시에 가장 충실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2)의 내용에서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 이 말에서 특히 ‘시민들 중 한 명’이란 표현은 플라톤의 나라가 그 자체로 얼마나 국가주의와 거리가 먼지를 잘 보여준다. 정의로운 공동체란 특정 계층이 다른 계층의 희생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최대다수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나라이다. 그러한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나라가 나라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발상은 어디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 3)의 내용 또한 플라톤의 나라를 권력에 따른 철저한 위계 사회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통치자와 민중은 군주와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함께 정의로운 나라를 일구어가는 서로가 똑같은 시민의 관계이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단지 민중의 안녕을 보전하고 그들을 보조하는 대가로 민중이 기꺼이 제공하는 보수를 받는 자들이다. 보수라는 말이 사용자가 피고용인에게 주는 대가라는 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민중들이 사용자이고 통치자들은 피고용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근대사회 이후에 성립된 사회계약론은 이기적 개인들의 배타적 이해관계 속에서 상호 의심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한 규정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각기 고유한 역할을 토대로 상호 호혜의 관점에서 자발적이고도 협동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계이고 무엇보다 이기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의심이 아닌 덕과 믿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관계이다.

4)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가져다주는 이로움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이로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1)에서 최선으로 언급된 ‘나라의 내분을 막고 하나 됨’이라는 입법의 목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이 나라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나라의 분열 특히 그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이다. 나라의 최악을 초래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은 역사적인 사실들에 기초해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권력과 재력 등 특권의 부당한 독점이 주된 원인이고 그 특권의 중심에는 가문과 가족 등 혈연과 가족주의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직접 겪은 아테네 히피아스 참주정과 시켈리아의 디오니소스 참주정 모두 직계 가족 간 세습으로 이루어진 폭압적 참주정이었다. 오늘날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가까이 우리와 관련해서도 북한 역시 3대에 걸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독재국가이다. 오늘날 막강한 힘을 갖고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른바 재벌들 또한 대부분 부자간 세습을 통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대규모 종교집단에서도 세습에 의해 권력이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누리는 부유함 또한 대부분 가족 간 상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상속 과정에서 그들 서로도 분열되지만, 그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빈부의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면서 그 자체로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 요컨대 나라나 사회 또는 개인들이 서로 갈라져 분열하고 싸우는 원인 한 가운데는 가족이기주의와 물질적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자들일수록 그러한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피폐상은 당사자 개인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불행을 낳는다. 우리나라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도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리사욕과 폭행, 권력의 남용과 책임회피가 나라가 분열되든 말든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치없이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뻔뻔하게 자행되고 있다.

* 한편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폐해가 심대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족주의가 갖는 혈연적 친밀감과 연대감은 그 집단의 긍정적인 결속에 큰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가족이기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기 위해서 수호자들에게 일상 형태의 가족 구성은 철저히 금하지만 그 대신 4)에서처럼 수호자 집단의 짝짓기를 통해 출산된 공통의 자식들과 친족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친밀한 가족 내지 친족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통해 수호자 집단 고유의 가족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1262a-b)에서 플라톤이 가족 확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구성원들 간의 친애(philia) 사랑은 마치 많은 물을 섞으면 농도가 묽어지는 것처럼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굳이 처자의 공유는 농부 계급에서 더 유용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정한 신념과 소명으로 무장된 수호자 집단의 경우 오히려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가족적 연대감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분명 플라톤이 주장하는 수호자 집단 내 가족의 확장은 그러한 생각에 기초해 있다.

* 5)의 내용은 많은 사람에 의해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만약 가장 소박하고 단순하게 공산주의를 규정하여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공의 소유에 기반을 둔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으로 정의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정의되어 왔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문제 역시 그 자체로 애매함과 불분명함을 안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대 특히 근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현실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준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나라와 현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공통점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흔히들 일컫는 사적 소유의 금지만 해도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경우 개인 수준에서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생산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사적 소유의 금지이고 그것도 특정 수호자 집단에만 한정된 것이다. 수호자 집단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의 경우는 생산 수단을 비롯하여 재산과 가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부도 축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는 현대적 의미의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고 굳이 연관시킨다고 해도 정치체제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소수 권력자 집단에 국한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나라들 대부분은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정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거나 권력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플라톤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사적 탐욕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현대의 여느 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플라톤의 구상은 그 금지의 수준이 권력자 집단 내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포함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그러나 가히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금하고 있는 플라톤의 나라는 구현 가능성 이전에 그 철두철미함 그 자체로 정치권력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도덕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좀 더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위와 같은 공동체의 핵심가치와 목표를 아래와 같이 풀어 쓸 경우, 정치체제와 크게 상관없이 최소한 명분에서 그 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강령으로 가히 손색이 없다.

1) 나는 나 자신과 가족과 관련한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않는다.

2) 나는 정해진 보수 이외에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

3) 나는 시민 한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나 자신의 고통과 기쁨으로 여긴다.

4) 나는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같은 시민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5) 나는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힘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수호자들끼리 소송하거나 고소하는 일, 폭력이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도 없고 돈이나 혈연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호자들과 다른 계층들 사이에도 반목이 없고 다른 계층들 내부 사람들끼리도 반목할 위험이 없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집단이 처자 공유를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로 삼았을 때 갖게 될 이로움을 이렇게 언급한 후 수호자들의 통치 목표가 이미 제4권에서 말한 것처럼(419a) 나라 안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 모두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라가 갖는 이러한 이로움은 모두 모두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교육받고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며 함께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고 함께 서로를 공유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통치의 본성이 시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통치자의 본성에 부합하는 한, 통치자 자신 또한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누린다고 이곳 논의를 마무리 한다.

* 이곳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부분의 논의는 <국가> 논의 구도 전체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처음 대화 참여자들이 요구한 대로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담보하는 처자의 공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즉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앞서 미리 밝힌 대로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세 가지 파도가 논의의 주제임을 고려하면 이 부분의 논의는 일종의 여담에 해당한다. 그럼 다음 강해에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끝-

* 다음 강해 : 2. 두 번째 파도(III) : 전쟁에 관한 일(466d-471c)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1.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두 번째 파도(1) : 처자의 공유(457b-461d)

 

[457b-461d]

* 양성의 평등한 역할과 관련한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에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헤쳐 나가야 할 파도로서 이른바 처자의 공유 즉 수호자 집단에서 배우자 공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하고δυνατά 이롭다ὠφέλιμα는 점에서 우리의 주장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 후 바로 처자의 공유 문제를 꺼내든다.(457b-c) 처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여자들 모두가 이 남자들 모두에게 공유되어서κοινός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사적으로ἰδίᾳ 함께 살지 않으며 아이들도 공유되어서 어떤 부모도 자식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어떤 아이도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457d)

* 이에 글라우콘은 그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의심을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이로움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가장 크게 좋은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 것임은 논쟁ἀμφισβήτησις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57d)

* 그럼에도 글라우콘은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 많은 논쟁이 불가피하니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논의해주길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로움에 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유익함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7e) 다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허락만 한다면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지금은 그것들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방책이 무엇이고 그것의 실제 운용이 나라와 수호자들에게 어떤 근거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지를συμφορώτα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8a-b)

* 글라우콘이 그것을 허용하자 소크라테스는 우선 배우자 공유의 문제가 통치자에 의해 어떻게 법제화되고 실제로 운용되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남자들을 선발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한 그들과 본성이 같은ὁμοφυής 여자들을 선발하여 주거와 식사를 공동으로 하고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단련이나 그 밖의 양육을 받으면서 함께 지내게 한다.(458c)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이들은 타고난 필연성 즉 성적인 필연성ἐρωτικός ἀνάγκη에 의해 서로의 교합μίξις으로 이끌리게 된다.(458d)

2) 그런데 행복한 이들의 나라에서는ἐν εὐδαιμόνων πόλει 이 서로의 교합이 무질서하면 경건한ὅσιος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짝짓기γάμος는 최대한 신성한ἱερός 짝짓기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이로운 짝짓기가 신성한 짝짓기이다.(458e)

3) 가장 이로운 짝짓기는 동물들의 경우에서 제일 나은 새끼를 얻으려고 할 때 그리 하듯이 인간 종τὸ τῶν ἀνθρώπων γένος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한창때ἐξ ἀκμαζόντων 혈통 좋은 자들끼리 짝짓기를 해야 최고의ἄκρον 통치자들을 얻는다.(459a-b)

4)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의사가 환자를 위해 약 처방을 할 때 그러하듯이 통치자들이 과감하게 처방을 해야 하는데 그 처방은 곧 거짓ψεῦδος과 속임수ἀπάτη이다. 즉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의 이로움을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많이 써야 한다. 짝짓기와 아이 낳기παιδοποιία의 영역에서 그것은 ‘옳음’τὸ ὀρθὸν이고 그 크기 또한 특히 작지 않다.(459c) 왜냐하면 가장 뛰어난 남자와 여자들끼리 최대한 자주 관계를 갖게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막아서 우수한 자손들을 낳아 무리ποίμνιον가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가 되고 수호자 집단ἀγέλη τῶν φυλάκων 또한 가능한 한 가장 내분이 없는ἀστασίαστος 상태가 되게 하려면 이 모든 일이 통치자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459d-e)

5) 그리고 이러한 속임수는 축제나 제의 몇을 법으로 정해서 거기에서 신랑νυμφίος과 신부νύμφη들이 만나도록 하되 짝이 맺어질 때마다 그 못난 사람들이 통치자가 아니라 운τύχη을 탓하도록 교묘한κομψός 제비뽑기κλῆρος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460a) 그리고 이때 그렇게 맺어지는 짝짓기에 어울리는 찬가들도 지어야 하고 짝짓기의 수가 얼마가 되게 할지도 정해져야 한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그런 모든 것들을 잘 고려해서 가능한 한 남자들의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전쟁이나 그 밖의 영역에서 뛰어난 이들에게는 특전γέρας과 상ἆθλον 특히 여자들과 잠자리συγκοίμησις를 같이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ἐξουσία를 아낌없이 주어 이런 자들로부터 씨를 받아σπείρωνται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을 두어야 한다.(460b)

7) 이때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그들이 받아서 양육소σηκός로 데려가 나라의 어떤 구역μέρος에 따로 떨어져 거주하는 보육인τροφός들 손에 맡기고 못난 자들의 자식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자식이라도 불구인ἀνάπηρος 경우에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ἀπόρρητος 은밀한ἄδηλος 장소에 적절하게 감추어κατακρύψουσιν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엄마들이 젖이 불면 양육소로 데리고 가되 자기 자식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고 그 밖에 힘든 일은 유모나 보모에게 넘겨주도록 해서 엄마들을 돌보게 해야 한다.(460c-d)

8) 여자는 20살부터 시작해서 40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고, 남자는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한창때 25세를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55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460e)

9) 만약 이와 달리 이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이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위한 출산에 끼어들어 몰래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그러한 제사θυσία와 기원εὐχή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무절제ἀκράτεια를 수반한 어둠σκότος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461a) 그리고 아직 아이 낳는 시기에 있는 남자라도 통치자의 주선을 거치지 않고 적령기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동일한 법이 적용된다. 그가 나라에 신성하지 않고 공인되지 못한 서출νόθος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461b)

10) 그러나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아이 낳을 적령기를 벗어나면 자식이나 손자, 부모뻘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해도 되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태아나 아기가 생긴다면 그런 아이에게 양육이 없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461c)

11) 이 경우 짝짓기가 이루어진 후 열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달에 태어난 자식들은 누구든 그들 모두의 아들이나 딸이고 그들은 아버지가 되고 마찬가지로 얘들의 자식들은 손자 손녀가 되고 그들은 다시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자식을 생산하던 시기에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끼리 교합은 금지되며 다만 남매지간의 경우는 제비뽑기가 그렇게 나오고 퓌티아 사제가 승인할 경우 동침이 허락된다.(46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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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교합’μίξις 2)에서 ‘짝짓기’γάμος란 말은 각각 ‘성교’와 ‘결혼’으로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이들의 짝짓기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축제와 제의를 동반하는 신성한 결혼 의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 4)에서 거짓과 속임수가 ‘크기가 작지 않은 옳음’인 이유는 장차 수호자가 될 우수한 자손들을 출산할 수 있는 방책이자 무엇보다도 그들의 내분을 막을 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의 ‘최대선’τὸ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다.(462a) 곧이어 밝혀지겠지만 처자 공유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이로움 또한 나라의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데 있다.

* 5)에서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나라의 인구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곳은 수호자 집단과 관련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다. 수호자 집단은 전체 인구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423c에서 나라 전체의 크기와 관련해서 이미 같은 말을 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생산자 계층의 인구수도 당연히 통제 대상임을 전제하고 한 말일 것이다. 우수한 수호자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언급도 앞의 언급과 다소 상충하지만, 이 말은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 6)에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 : 여성의 역할에서 가사 노동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계급사회에서 특권 여성이 노예들에게 고생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따라 육아 및 가사 노동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은 별도의 관리들 즉 분업에 따른 전문적인 직업군에게 위탁된다. 여성의 사회참여에 따라, 가사 노동이 분리되고 또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이 일정한 직업군으로 전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양태와 일정 부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의 가사 노동은 공적 노동으로 그 대가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비록 소수 집단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여성과 가사 노동의 분리가 제도적으로 관철된 최초의 사회이기도 하다.

* 7)에서 ‘못난 자들의 자식과 불구자’ : 불구로 태어난 아기들을 유기하는 것(apothesis)은 당대 아테네의 일상화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영아유기는 이유를 불문하고 용납해서는 안 될 반인권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못난 아이들’의 경우 어떻게 했는지는 여기서 불분명하다. 다만 <국가>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티마이오스> 19a의 내용에 따르면 ‘못난 자들의 자식들은 도시의 다른 영역으로 은밀하게 분산하여 키우되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항상 그들을 지켜보면서 가치 있는 아이들은 다시 올려보내고 거꾸로 우수한 자들의 자손도 열등해질 경우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도시의 다른 영역’ 또는 ‘아래’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건국 신화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생산자 계층 또는 그들의 생활 영역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에서는 불구가 아닌 한 이른바 못난 아이들도 양육과 교육의 결과에 따라 우수해질 경우 다시 수호자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나라의 분업적 구성원의 하나로 그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 11)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분명 가족의 해체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가족의 공동체적 확장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곧이어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다루면서 이기적 가족주의의 해체가 가져다주는 장점을 공동체의 확장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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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상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야 할 처자 공유란 그 내용이 ‘남성 수호자들과 여성 수호자들 모두가 서로 배우자가 되고 태어난 아이들 또한 그들 모두의 자식으로 공유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양성의 평등에 관한 첫 번째 문제처럼 가능성과 유익성의 측면에서 두 번째 문제 즉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만 글라우콘은 가능성은 물론 유익성도 의심스럽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유익성과 관련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크게 좋은 것’이어서 그 문제는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로움마저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에 가능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처자 공유의 유익성에 대한 논의부터 꺼내든다. 이로써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두 번째 파도는 크게는 처자공유의 문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자 공유에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의 문제로 구체화 되고,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는 이상적인 정치체제 자체의 가능성의 문제로 슬그머니 확대되면서(472b) 소크라테스가 해명해야 할 세 번째 파도를 구성하게 된다. 첫 번 째 파도보다 두 번째 파도가 그리고 두 번째 파도보다 세 번째 파도가 더 큰 난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이러한 서두적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비롯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기하는 정치체제 전반의 실현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도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해명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유익함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글라우콘에게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일단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마음껏 이야기하겠다고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면은 논거가 비교적 분명한 유익함을 전면에 세워 처자 공유 주장의 정당성을 우선 확보해두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유익성에 반비례하여 그 가능성의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은 처자 공유의 이로움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분명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야 함에도 소크라테스가 엉뚱한 주제를 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그 논의를 미루면서 시간을 끄는 장면(466e-471)에서도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제법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길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 장면은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의도적인 논의 지연을 알아차린 글라우콘의 항의를 접하고서야 끝이 나고 그제에서야 비로소 세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러한 장면 구성들은 모두 처자 공유의 문제가 유익함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지만, 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 주제인지를 플라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 또한 처자 공유 문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플라톤 나름의 긴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 사실 첫 번째 파도인 양성평등의 문제의 경우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힘들었을지라도 최소한 시대 현실에 따라 가능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발전적 변화로 평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문제(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아닌 전적인 배우자 상호 공유)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사회에서 현존했었던 적도 없을 정도로 어느 시대 그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실현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중시되는 오늘날의 경우 그것은 용납 여부는커녕 아예 말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처자 공유의 문제는 그 자신도 비록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 구상 자체만으로도 오늘날 수많은 비평가의 혹독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 이상국가의 제반 구상을 여러 측면에서 해명하고 옹호하려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이 처자 공유의 문제만큼은 누구도 예외 없이 가장 크고 심각한 난관이자 어떻든 피하고 싶은 곤혹스러운 주제로 받아들여 진다. 플라톤 저명한 주석가 앤너스도 해당 논의 부분에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거에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아예 도외시하고 있다. (J. Annas(1981) 181-184쪽 참고)

* 플라톤의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다각적인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하등동물에 대한 유비에서도 보듯이 동물의 품종 개량에 기울이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수호자 집단의 우생학적 개선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의 품종 개량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이, 인간의 우생학적 개량 역시 인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처자의 공유가 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권력 집단에 의해 특정 계층에게 강제의 형식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의 구상에는 전체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이념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2) 게다가 비록 통치계급에 한정되긴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 및 양육이 철저히 국가 소수 권력자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초한 정교한 제도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개인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 또는 사적 영역에서의 행복 추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 사실 개인 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적 욕구는 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플라톤도 인정하고 있다. 정교한 속임수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것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날 경우 그 불만족이 초래하는 위험의 크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그 속임수가 ‘크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459c) 당사자보다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에 충분히 더 부응할 정도로 지고의 지혜를 갖고 있으며 또 그들에 의해서만 그 지혜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지고의 지혜가 과연 존재하는지 검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것이 구현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정반대로 그러한 믿음은 실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폭압과 불행을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구상은 최소한 형식에서 나치가 국가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행한 우생학에 기초한 폭력적 인종주의와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다.

3) 실제 역사적인 사례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설사 대의명분이 선하다 해도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주체적 욕망과 개개인의 특수한 정황 그리고 비합리적 감성을 배제한 채, 오직 소수 권력의 독단과 형식적인 정치 이성에 기초해 정치적 실천 방안이 수립될 경우 그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충분히 경험하고 확인했다. 처자의 공유 문제는 플라톤의 이성주의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려 없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고 정당화할 경우, 얼마나 참담하고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엄청난 당혹감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납 여부와 무관하게 비록 어렵긴 하지만 구상 차원에서나마 플라톤이 그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일정 부분 존재했음을 살피는 것 또한 <국가>의 이상적 구상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 일단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1) 우선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 당대에는 결혼 당사자들에게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관념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근대 개인주의가 확립된 이후에 생긴 것일 뿐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대 아테네 남성들에게 결혼은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에서 그저 출산을 위한 짝짓기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고 성적인 욕망은 이른바 창녀로 불리는 여성들과의 성매매나 소년애를 통해 충족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혼 또는 결혼 상대조차 당사자가 아닌 부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정의 배경에는 최대한 명문 집안 내지 가문과의 혈연 동맹을 통한 이권 확보에 대한 고려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그 가부장적 권력이 소수의 국가 권력으로 대치되고 결혼이 소규모 가문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는 공동체 수준의 구성과 처자의 전면적인 공유로까지 크게 확대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혼 당사자들 모두 기본적으로 후계의 생산 말고는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결혼과 관련한 이러한 고려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집안 어른이나 부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혼(定婚) 관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처자의 공유 차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평이나 비판을 가하지 않고 다만 처자 공유라는 공동체적 가족의 확장이 플라톤의 기대와 달리 결코 혈연적 애착의 증대로 귀결되지 않음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 i-vi)

2) 그리고 우생학에 기초한 플라톤의 구상은 – 특히 나치 인종주의의 야만성과 연계되면서 – 그야말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그려진 폭력적 동물 사육과 품종 개량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아예 언급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비판받고 있지만, 우생학적 관념 자체는 오늘날 인간의 건강한 삶과 복지를 위한 의제로 현대과학 전반에 걸쳐 다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죄악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가족계획과 관련한 안전하고 효과 높은 피임약의 개발, 결혼 당사자들의 건강진단서 교환, 우수하고 건강한 정자를 확보하기 위한 정자은행의 노력,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일정 부분 개인들의 우생학적 고려, 또는 유전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최근 급속하게 발전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와 줄기세포 연구 분야를 들여다보면 인간 유전학에 기초한 기술과학의 발전 차원에서 질병의 치료와 삶의 복지를 위한 우생학적인 관점이 유의미하게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러한 유전공학적 시도가 확장 발전하는 현대적 상황 자체가 갖는 위험 또한 상존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래의 생물학적 생태적 자연 상태를 인위적으로 수정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오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추동하는 배후에는 자연의 생태적 환경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생학적 고려와 그에 따른 유전공학의 발전이 오늘날 불가피한 현실로 상존하는 한,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관리가 필연적으로 다시 요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우생학적 구상에 대한 주된 비판 근거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대한 이성적 개입과 통제가 이제는 거꾸로 왜곡된 인간 욕망을 바로 잡는 철학적 기초로 다시 소환되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발생했고 그것이 과연 인간과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성적으로 따져 묻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지향을 지니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성적으로 모색하고 그에 맞추어 이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플라톤 이성주의의 핵심적이고도 일관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4) 다만 문제는 그것을 따져 묻고 모색하며 실천하는 플라톤 이성주의의 실천 주체가 최소한 정치영역에서만은 이른바 소수 철학자 집단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생학적 판단과 실행은 오로지 그들 소수에 의해서만 기획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플라톤의 왕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참함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역사적 경험을 안겨 준 나치와 스탈린의 독재정과 연계되면서, 시민 대중과 개인들의 권익이 아닌 국가 전체와 소수 권력층의 이익만을 위한 이른바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의 진전에 따라 오늘날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비평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이 비록 왕정의 구조는 갖고 있으나 그 체제를 시민 대중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가전체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 강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철학자왕 자신들을 포함하여 각기 다양한 본성의 계발을 통해 행복을 획득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이른바 공동체주의에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피력해 왔다. 플라톤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인 네틀쉽도 이 부분에 주해를 달면서 플라톤의 철학자왕정이 지향하는 개체성과 공동체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추상 속의 개인, 문자 그대로 모든 타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그런 공동체란 없으며,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의해서 공유되지 않는, 그들이 살고 있지 않는, 그런 공동의 삶이나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체성이란, 그 참다운 의미에서 보면, 이 공동의 삶이나 이익에 참여함으로써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 봉사에 헌신하는 공복(公僕)이란 그 봉사 때문에 개인이 되기를 중단한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이익적인 구두쇠가 자신의 일에 ‘자기 자신’을 최대한 집어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공동의 이익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던져 넣을 때,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개체성은 더욱 위대한 것으로 살아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R. L Nettleship(1925) Lectures on the Republic of Plato.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 김안중, 홍윤경 역, 교육과학사 2010. 182쪽)

 

* 아무려나 일부 집단의 처자 공유가 구상으로라도 일정 부분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주장의 강도와는 다르게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세 번째 파도에서 그 가능성의 문제를 슬그머니 이상 국가 일반의 실현 가능성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는 데다 그마저 꼭 그것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다만 본(本)으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실제로 <국가>의 이상적 구상이 실물로서 현실화된 것이라 평가되는 <법률>에서 첫 번째 파도인 남녀평등은 일정 부분 구체적인 제도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 처자 공유의 문제는 전체를 통틀어 아예 한마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

*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서만은 아주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언급하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처자의 공유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비록 의심스러울지라도 만약 그것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법제화된다면 그것이 나라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최소한 자신이 왜 처자의 공유 문제를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매우 중대한 과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철학적 정당성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현실적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이성적 사고 차원에서 그가 내세우는 처자의 공유가 과연 어떤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요컨대 이 부분은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 자체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다만 그러한 구상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는데 방점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해설은 다음 강해에서 다루기로 한다. -끝-

* 다음 주제 : 2.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궁극적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9월 월례발표회 “빌렘 플루서의 이미지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하기”(발표:이진욱 박사)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3년도 한철연 월례발표회는 학문후속세대 발표로 진행합니다.

9월 월례발표회는 최근 학위[「빌렘 플루서의 이미지 현상학에 대한 연구」(2023)]를 취득한 건국대학교 이진욱 박사의 발표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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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빌렘 플루서의 이미지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하기

발표자: 이진욱(건국대학교)

토론자: 김성우(상지대학교)

일    시: 2023년 9월 21일 오후 4시 – 6시

방    식: 줌(zoom)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hN2Xyjl2mHQ?si=MM5HmInGU0OaX7RL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8월 제7차 정기세미나 “이규성 선생의 사상에 미친 불교 사상의 영향(이규성과 불교)” 2023.08.11. (발표:최유진)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일곱 번째 정기 세미나 영상입니다.

이번 세미나는 불교 전공자인 경남대 최유진 명예교수의 발표로 진행합니다.

이규성 선생의 저서에서 불교를 언급한 사례를 소개하여 이규성 선생의 사상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주제: ‘이규성 선생의 사상에 미친 불교 사상의 영향(이규성과 불교)’

발표: 최유진(경남대 명예교수)

장소: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

일시: 2023년 8월 11일(금) 오후 4시~6시

방식: 오프라인+줌(Zoom) 회의실

유튜브 링크https://youtu.be/KxBKUVLgcL8?si=m7MBfbJM4NkJD9MQ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4)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여성의 지위 : 451c-457b)에 대한 해설

 

* 앞서 살폈듯이 여성과 아이들의 공유 문제는 수호자 집단 내에서 벌어질 수호자들의 배우자 공유와 그들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에 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을 올바로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뜬금없이 경비견 사례를 꺼내든다. 처자의 공유가 이상 국가의 목적에 온전히 부합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이전에 우선 수호자 집단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비견 사례를 통해 플라톤이 제안하는 양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기존의 전통적인 견해들과 정면으로 대치될 만큼 아주 파격적이다. 어떤 이는 이 경비견 사례를 성 역할과 관련한 오늘날의 동물행태학적 접근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동물 일반의 사례가 아님을 고려하면 경비견 사례는 다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라 할 것이다. 어쨌거나 플라톤의 경비견 비유는 일단 그 자체로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외에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비유대로라면 여성은 출산과 수유 기능 이외에 처음부터 남성과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그에 따라 수호자들의 집단생활에서도 남성 수호자와 동일한 환경 여건에서 동등하게 동일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 그러나 비유와 다르게 실제 사람의 사회적 역할은 개의 역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플라톤의 경비견 이야기를 사람과 동물의 행태 및 역할 상의 차이를 간과한 그릇된 인용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물은 가사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정치학> 1264b4) 그러나 이어서 제기된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 그리고 반대 의견을 포함한 대화와 쟁론에 관한 이론적 논의까지 모두 종합하여 평가해보면, 사회적 역할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내세우는 양성평등론은 단순한 비유 수준을 넘어 견고한 논변의 형식으로 수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 및 기술 영역 전반에 걸쳐 하나로 관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출산과 양육과 관련한 생물학적 차이를 근거로 양성 간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차이를 논증하는 것은 쟁론가들이 흔히들 저지르듯 표현상 말꼬리만을 붙잡아 서로 다른 논리적 범주들을 하나로 혼동한데서 비롯된 잘못된 추론이다. 남성은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여성은 임신 출산하고 일정 기간 수유하는 생물학적 기능은 양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범주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학적 차이들은 사회적 역할 수행에서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반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인간 종으로서 자연적 본성이 동일한 만큼 각기 감당해야할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혀 차이가 없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주장과도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외에 최소한 가사를 돌보는 일도 여성의 고유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주장은 오히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플라톤이 살아 있다면 오늘날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 군대 징집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처사조차 자연적 이치에 맞지 않는 부당한 일로 여겼을 것이 분명하다.

* 물론 플라톤은 자연적 본성에서건 사회적 역할에서건 양성 간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에 따라 남성이 여성보다, 여성이 남성보다 각각 더 잘하는 경우가 분명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은 우연적인 경우로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연적 종류(eidos)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성이 남성보다 요리를 잘한다고들 여기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요리를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요컨대 남성과 여성은 사회적으로 할 수 일에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양성 간 차이를 말하자면 다만 힘과 능력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플라톤은 언급한다. 즉 여성은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비록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남성이 생물학적 근육의 힘에서 여성보다 강하다는 게 일반의 상식임을 고려하면 최소한 힘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조차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오래된 관습이 낳은 후천적 결과이며 오히려 소근육과 유연성에서는 여성이 단연 우월하다는 연구도 있다. 문제는 그것 외에 일의 수행 능력에서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보면 비록 플라톤 주장의 혁명성을 충분히 인정할 지라도 그 역시 분명 그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할 것이다.

* 그러나 양성 간 힘의 차이에 대한 그의 부차적 언급을 시대적 한계로 비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서조차 여성의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른바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발달 수준이 비교적 높다고 평가되는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성의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경우만 해도 불과 100여 년 전까지 여성의 사회참여는 물론 자유롭게 집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본권은 물론 최소한의 교육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2,500년 전 아테네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은 축제를 제외하고는 집안에만 갇혀 아이들의 양육과 가사 역할만 맡았고 외부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것조차 남성 가족 내지 남성 노예들이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대상조차 부친이 결정했으며 출산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결혼에 따른 성생활은 주로 아이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졌고 쾌락을 위한 남성들의 성적 대상은 창녀들이나 동성 소년들이 대신했다. 게다가 상속할 권한이 생겼어도 여성은 그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과 결혼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성차별과 관련한 이러한 뿌리 깊은 사회적 관습과 배경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놀랍게도 여성에게 남성과 마찬가지로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통치자로서 권력의 수장까지 될 수 있는 동등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고, 장차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어린아이 때부터 남성과 동등한 양육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말로 세우는 이상 국가론의 형태로 제시된 것이지만 그가 과거 100년도 아닌 2,500년 전 인물임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선구적이고 혁명적이었는지 가히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이다. 최소한 이 점만 고려해도 플라톤을 오늘날 최소한 페미니즘의 고대적 선구로 평가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 현대 여성주의자들은 물론 플라톤에 대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이 그의 양성평등론을 평가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20세기 인류가 겪은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스탈리즘의 참혹상을 비판하면서 크로스만(R. Crossman), 포퍼(K. Popper), 아렌트(H. Arendt)를 비롯한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들이 그 전체주의적 발상의 배후에 플라톤이 있다고 맹렬하게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비판과 공격은 오늘날까지도 지식인 사회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긴 오늘날 여성의 개인적 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내세우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전체주의의 사상적 뿌리로 낙인찍힌 플라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로 내세운다는 게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 연구자로서 명망이 높은 앤너스(J. Annas)조차 그의 양성평등론이 여성의 권리를 인권의 차원에서 권리 그 자체로 확보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다만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양성 구분 없이 인력을 총동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플라톤은 여성의 권리에 관심이 없으며 인간 평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다만 여성을 단지 거대한 미개척 자원으로 본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와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분명 여성의 지위에 관한 혁명적인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대상, 즉 수호자로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그저 당대의 일상적인 열악한 여성의 지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의 제안은 그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불행과 굴욕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또 수호자 계급에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과연 자기 의사에 기초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수호자의 역할이 매우 거칠고 힘든 일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수호자의 역할과 지위를 여성들 스스로 원한 것이기보다는 실제적으로는 권력 있는 자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부여된 측면이 강하다고 의심한다. (J. Annas(1981) 181-185쪽 참고)

*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가나 집단 공동체의 이익이 그 사회의 가장 큰 목표였음에도 그것을 위해 여성 일반을 자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장차 왕이 될 수도 있는 수호자 계급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한 경우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예 없었다. 게다가 플라톤의 주장이 양성 평등에 관한 기초적인 발상은 물론 성차별을 자연적 삶 자체로 당연시했던 근 2,500년 전에 제기된 것임을 함께 고려하면, 근세 이후에야 간신히 남성 부르주아 시민들을 대상으로 확립된 인권 개념으로 플라톤을 평가하는 시도들 자체가 이미 비판의 적절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힘들고 거친 일이라고 여성들 모두가 기피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의심 자체가 이미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은 여성을 수호자 계급에 참여시키면서 여성 모두에 대해 그 자격을 열어 두지 않는다. 플라톤은 남성 수호자의 선발 과정이 그러하듯이 이곳에서도 여성 수호자를 선발함에 있어 이른바 수호 역할에 뛰어난 여성들과 그러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우열을 가린다. 지혜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혜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자가 있고 기개가 없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456a) 그러나 이것은 남성 수호자 선발과정이 그 자체로 남성 차별이 아니듯이 이 또한 여성 차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뛰어남 또한 수호 역할과 관련되어 있을 뿐 모든 측면을 다 포함하지도 않는다. 수호자는 결코 생산 기술에서 생산자 보다 뛰어나지 않다. 오늘날에도 적정 자격을 위한 선발 과정에는 그와 관련한 뛰어남을 기준으로 우열이 비교되고 그것을 토대로 선발하는 것을 정당한 절차로 모두 받아들인다.

* 이밖에도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하여 비평가들이 크게 의심하는 사안이 또 있다. 그것은 경비견의 비유에서 보듯이 플라톤이 여성의 역할 가운데 오로지 수호자의 역할에만 관심이 있고 수호 이외에 여성이 맡을 수 있는 다른 역할에 관해서는 관심이 거의 없거나 아예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경비견의 비유는 개가 주인을 위해 주인에게만 복종하고 봉사하듯이 사람 또한 나라를 위해 나라에만 복종하고 봉사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의 근거로 비평가들은 여성 수호자에 대한 그의 언급 대부분이 싸움과 운동 훈련에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한다.(452a-b, 453a, 458d, 466c-d, 467a, 468d-e) 설사 플라톤의 제안을 양성평등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저 여성의 남성화를 통한 평등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가 플라톤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마치 공연을 재연하는 것처럼 남성 수호자에 관한 논의와 똑같은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임을 고려하면 그 의심은 사회적 역할 중 수호의 역할에만 초점을 맞추어 다소 과민하게 제시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이루어진 앞서 이상국가론에는 단지 수호자 역할만 갖는 사람들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역할 즉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여성 공연으로 표현되는 이곳의 논의가 앞서 이상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개된 남성 공연에 상응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곳에서도 여성으로서 생산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당연히 함께 포함되고 고려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실제로 플라톤은 대화와 쟁론의 차이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논의 대상을 ‘표현 자체가 아닌 종류에 따라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경우’, 시가와 기술, 체육과 전쟁 등 어떤 역할이건 간에 양성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일관되게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비유를 언급하면서도 플라톤은 생산자 계급에 속하는 구두장이와 의사, 목수 등의 역할을 인용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여자 의사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454d)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성의 사회적 역할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론적 논증에 기초한 플라톤의 일관된 주장을 굳이 수호자 역할에만 한정해서 좁게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플라톤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다. 비록 이곳에서는 수호자의 역할이 주제가 되는 한, 양성의 동일한 역할에 대한 논의가 수호의 역할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플라톤의 생각은 양성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일반론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성의 기준에 관한 455b-c의 논의는 양성의 사회적 역할을 논할 때 양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인지, 그 기준을 정함에 있어 이치에 따른 논거가 얼마나 핵심을 차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말 그대로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여성들은 자연적 본성상kata physin 남성들과 동류syngeneus인 것이다.(456b)

* 그런데 오늘날 새롭게 전개되는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양성 간의 근본 차이가 과연 플라톤의 주장대로 출산과 수유 단계까지의 양육 정도뿐인지 아니면 그 밖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모종의 본질적인 성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견해들이 논쟁적으로 제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현대 생물학과 생리심리학에서도 눈에 보이는 양성 간의 신체적 차이 외에 유전자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여성성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성징들이 따로 존재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모종의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지 많은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일련의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출산과 양육 기능 이외에 성역할과 관련한 양성의 독특한 특성들과 정체성이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정한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양성의 그러한 근본적 차이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도 생겨났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진정한 의미에서 양성평등론이 아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성별 간 일방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평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 양성 간 고유하게 실재하는 생물학적, 문화적 차이들과 정체성을 원천적으로 무시 또는 제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양성 간 불일치는 해결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의 관점에서 오히려 성, 출산, 육아등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고유 능력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가부장제를 타파하고 여성 고유의 문화 영역을 구축하는 적극적인 토대로 삼기도 한다.

* 그러나 지난 2,500년 동안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이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통해 성차별을 극복하는 근거로 수용되었던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역사 속 수많은 선구적인 주장들이 운명처럼 겪어 왔듯이 그들 주장 또한 전도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인류 역사 이래 양성 간 차이는 거의 대부분 남성의 우위를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 차별의 근거로만 이용되어 왔고 그 위세 또한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물며 일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은 양성 간 차이와 정체성에 기초하여 전통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양성 평등을 내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어처구니없게도 양성 간 차이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근거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일부 보수적인 플라톤 비평가들(L. Strauss 등)이 양성 간 근본 차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끌어들여 플라톤의 접근방식을 오히려 자연 법칙에 반하는 것이며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극 비판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지난하고도 먼 가시밭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세계사적 진보는 늘 그 가시밭길을 딛고 헤쳐 가며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 아무려나 양성 간 생물학적 차이 내지 여성성의 범위가 현대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더 크게 확대되건 아니건 또는 설령 생물학적 차이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양성 간 문화적 차이가 있건 없건 간에,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차이일지라도 양성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들과 관련하여 그 차이들이 결코 양성간의 차별이나 불평등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양성 간 동일함은 동일함대로 차이는 차이대로 정당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여져 그것이 양성의 자유로운 의지와 행위를 저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권리를 고양하고 담보하는 적극적인 근거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출발 역시 이러한 자각을 토대로 생물학적 차이가 결코 사회적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명제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미 2,500년 전 제기된 사회적 역할과 관련한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어쨌거나 그 이후 제기된 전통적인 주류 여성주의자들의 그 어떤 주장보다도 그 명제에 가장 충실하게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그런데 플라톤의 양성평등론과 관련한 이상의 다각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 사이에서 플라톤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일관되게 지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양성평등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이 대화편 전체를 통해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곳 <국가>만 보더라도 여자들을 ‘속 좁은 사람’(469d), 또는 아이들이나 여자들을 ‘다수의 미천한 사람들’로(431b-c)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정해진 삶을 잘 영위하지 못했을 경우 두 번째 탄생에서 여자로 바뀌게 된다.’(<티마이오스> 42b, 90e-91a)거나 ‘남성이 여성보다 사려가 깊다’(<크라튈로스> 392b)는 표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이것을 근거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이중적이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플라톤이 제안한 양성평등론이 그 자신도 조심스러워하고 대화 참여자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성격을 갖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대화편들 전체에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왜 일관성을 갖기 힘들었는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당대 아테네인들이라면 모두가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마침내 <국가>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주장하기 전까지는 굳이 많은 설명이 요구되는 견해를 불쑥 내놓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대화 국면에서는 그냥 소극적으로 일상의 견해들을 따라 언급을 해오다가 비로소 <국가>에 와서 그간의 성찰을 종합하여 비로소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수준의 속생각을 적극적으로 털어놓게 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의 여성에 대한 <국가>의 견해가 과연 그토록 조심하고 경계했어야할 정도로 파격적인가에 대해서는 당대 아테네 대중은 차치하고 지성을 대표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여성관을 들여다보더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포클레스는 ‘여자에게는 침묵이 곧 품위kosmos’(<Ajax> 193)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은 선한 행동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모든 악을 고안해내는데 가장 뛰어나다’(<Medea> 406)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플라톤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감함의 수준에 있어 ‘용감한 여자라고 해 봐야 비겁한 남자’의 수준일 뿐이고 품위의 수준에서도 ‘여자가 남자만큼 품위 있다고 해도 그저 수다스러운 여자’정도라고 말하고 있다.(<정치학> 1277b25) 게다가 아테네 민주정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리클레스조차 과부가 된 전몰자의 아내에게 짧은 충고를 전하면서 ‘덕에 대해서건 결함에 대해서건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나는 일이 아주 적다면 그것으로 큰 명예’(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45)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포클레스 등 여타 당대 유명 저작가들의 문헌들 여러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습들 자체가 역설적으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대화편 전체에서 왜 일관되게 표출되기 힘들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일정 부분 설명해줌과 동시에 오히려 그것들은 그 인습의 견고함에 반비례해서 <국가>에서 제안된 여성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는가를 다시금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보다 적극적인 근거가 된다.

*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의 이상국가론을 토대로 차선의 현실국가론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되는 <법률>을 통해 양성 평등에 관한 <국가>의 주장들을 일정하게 이어 가고 있다. 플라톤은 <법률>에서 아테네인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본적으로 ‘여자들을 위한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그냥 간과될 경우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 관행을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나아가 모든 관행을 여자와 남자가 공유하도록 조직하는 것이 나라의 행복을 위해 좋다.’(781b)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역할과 관련해서도 ‘여자도 관직에 나갈 수 있고 군역도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부과할 수 있되 관직에 진출하는 연령은 남자가 30세 이상, 여자는 40세 이상인 반면에 군역은 여자의 경우 아이를 낳은 후에만 부과하되 50세까지로 제한해야 한다.’(<법률> 785b)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법률>에서도 양성의 동등한 역할에 있어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래의 인용을 보면 양성 평등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가 교육 및 사회 분야 전체에 두루 걸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인용하자면 그곳에서 주인공 아테네인은 ‘그리스에서는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한 뜻으로 같은 일을 수행하지 못해, 동일한 지출과 수고로 2배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과 아이는 아버지의 반대와 무관하게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하며’(804e-805a) ‘전술적 기동과 전투대형 갖추기, 무장 기술 등을 양성 시민 모두가 똑같이 익혀야 한다.’(814a-c)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는 한, 여성은 교육과 그 밖의 다른 일에 남성과 함께 최대한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요구가 지니는 열기가 식는 일은 없을 것’(805c)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의 양성평등론은 가히 2,500년 전에, 여성에 대한 기존의 그릇된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그 자신만의 길고도 힘든 숙고 과정을 거쳐 <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칙의 형태로 제안된 이후 <법률>에서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으로 실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 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아이들의 공유 문제에 대한 대화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에 답변하면서 우선 수호 역할을 중심으로 남성과 여성들의 동일함을 논증한 후, 그것이 자신이 제시할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kyma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 그것을 토대로 이제 두 번째 파도로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본격적 다루기 시작한다. <끝>

* 다음 회 :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c-471c)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달고나)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오디오북 두 번째 영상입니다.

“박은미 작가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내가 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거짓말인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 부부싸움할 때 예전 일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이 실제 기억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마음이 편한 쪽으로 기억을 조작합니다. 오늘은 고석정 꽃밭의 촛불맨드라미 위주로 풍경을 감상해볼게요. 맨드라미가 뾰족한 것이 참 예쁜데 어마어마한 넓이에 심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쁜 꽃밭과 함께 [일상에서의 철학]을 들어보실까요?”(유튜브 채널 소개 내용)

아래 목차를 확인 하고 바로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0:00 하이라이트
0:49 인트로
2:09 나조차 속아넘어가는 나의 거짓말
4:28 인지부조화와 기억왜곡
9:02 후광효과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잊지마세요~!)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S7hJpoip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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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에서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는 오디오북을 제작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귀로 듣고 읽어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한 발짝 더 깊이 생각하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기를 제안하는 [아주 일상적인 철학]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10월 말까지 꽃축제가 이어진다는 철원 고석정 꽃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풀어내길 제안하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목차를 참고하여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1:05 인트로
2:37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6:46 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게 될까?
13:06 부모와 나의 관계는?
15:57 남 탓하지 말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W_QSEy5nPBQ?si=hxPJ6lpMD2npRm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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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 (5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3)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A.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 제4권의 끝은 부정의한 나라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지만, 그 논의는 제5권이 아니라 제8권에 가서 이어진다. 대화 상대자들이 논의 진행을 끊고 몇 가지 이의를 제기했고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5권에서 7권까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5권에서 제7권까지 펼쳐진 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다만 형식상의 일탈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나름의 문학적 플롯에 따라 플라톤이 주도면밀하게 사전 계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는 말로 나라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통치자와 수호자, 생산자 계급으로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기본 틀과 그들의 기본 덕목을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이상 국가를 다스리는 핵심적인 중추로서 통치자 계급과 관련해서는 그 선발 과정 이외에 그들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역할과 위상이 무엇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을 통해 담보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고 그에 따라 나라의 통치자 또한 최고 수준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철학자들로 구성되어야 이상국가의 이상과 목표가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런데 당대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과 철학자들의 위상이란 소크라테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를 신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오도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내몰 정도로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지식인 사회의 중심은 전통적인 시인들과 신흥 소피스트들이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시인들이 기반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소피스트들의 궤변적 수사술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객관적 인식과 논리에 기반한 철학으로 대체되어야 하고 아테네가 직면한 정치적 현실 또한 철학과 철학자들의 정의로운 통치와 참여를 통해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구상은 당대의 지적 풍토에서 결코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으로서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기본 틀 이상의 정치 체제의 기본 위상과 기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애초 설정한 논의 계획을 일시 유보하고 철학의 위상은 물론 철학자들이 어떤 교육 과정을 통해 어떤 능력을 갖추었기에 통치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근본적으로 먼저 밝힐 필요가 있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5권을 시작하면서 앞서 소크라테스가 건국신화에서 제시한 처자공유 및 양육과 교육에 관한 내용에 대해 대화 상대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계획된 논의 전개를 중단시키고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철인정치의 가능성 등의 파격적인 주제로 앞으로 다루어질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들에 불을 당긴 후, 논의 방향을 아예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로 완전히 틀어 버린다. 이러한 논의 구도의 전환은 형식적으로는 논의의 일탈로 보이지만 플라톤이 염두에 둔 이상 국가가 다름 아닌 철학 통치자들에 의해 그 온전함이 구현되는 나라임이 확인되면서, 내용적으로는 기본 틀만을 다룬 지금까지의 이상 국가론을 더욱 심화하고 확장하는 획기적인 전기가 된다. 게다가 논의의 목적상 철학과 철학자의 위상이 심도 있게 다루어지면서 그 부분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는 물론 주제적으로도 형이상학과 인식론, 윤리학과 정치철학 등 철학적 탐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들을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플라톤 연구자들은 형식상 일탈로 보이는 제5-7권을 오히려 <국가>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자 철학적 논쟁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철학사를 통해 <국가>와 관련한 의미 있는 수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이곳에 담긴 주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테면 양성의 평등, 좋음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철학의 위상, 수학 및 기하학과 천문학의 기초, 변증술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가 모두 이곳에 담겨 있다.

 

*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갖는 이러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이제 제5권 도입부의 논의 내용을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449a-451b]

1) 소크라테스는 논의 계획에 따라 이제 나라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나 개인들의 영혼의 성격 형성τρόπου κατασκευή과 관련해서 네 가지 나쁜 유형εἶδος의 정치체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449a) 그러나 이때 아데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그의 겉옷ἱμάτιον을 잡아당기며 건네는 말을 듣고 이내 목소리를 높여 소크라테스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가 결코 작지 않은 주제 즉, 여인들이나 아이들과 관련해서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κοινὰ τὰ φίλων이 되리라는 게 누구에게나 명백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며(424a)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ἐκκλέπτειν는 것이다.(449b-c) 그러니 나쁜 정치체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처자공유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말한 그 공유의 방식ὁ τρόπος τῆς κοινωνίας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야기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글라우콘과 트라쉬마코스 등 대화자 전원이 그에 동의를 표한다.(449c-450a)

2)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는데 자네들이 지금 얼마나 큰 논의의 벌집을 건드리고 있는지 모른다고 당황해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가 이 사람들이 논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황금을 캐려고χρυσοχοήσοντας 여기에 온 것으로 생각하냐고 반문하고 그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적정한μέτριος 정도의 논의를 언급하자 다시 또 글라우콘이 나서 그러한 종류의 논의를 듣는 데 적정한 정도란,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평생 전부가 될 것임을 내세워 제기된 처자공유와 아이들의 양육τροφή 및 교육에 관한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한다.(450a-c)

3)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설명이 실현 가능성은 물론 그것이 최선인지도 의심스러운데다 설명할 경우 그것이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며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다루길 주저한다.ὄκνος 이에 글라우콘은 재차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리ἀληθεία를 알고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신감을 가지고 할 만한 안전한 일이지만 확신이 없는 채로 찾고 있는 중ζητοῦντα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섭고 위험한φοβερόν καὶ σφαλερόν 일이라고 말한다.(450c-451a)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본의 아니게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φονεύς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ἁμάρτημα라고 생각함에도 ‘글라우콘이 잘도 나를 북돋는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된다 해도 방면해드릴 테니 용기를 내서 말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한다.(45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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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0b 트라쉬마코스 :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후에도 두 번 정도(498c-d, 590d)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인 이상국가론을 펼친 후에 직접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 450b ‘황금을 캔다’ : 이 말은 아테네인들에게 전해지는 고사에 기초하여 생긴 격언에서 따온 말로 의미상으로는 ‘제 할 일은 게을리한 채 어리석게도 별 이익도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것’을 빗댄 말이다. (J. Adam not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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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애초 논의 계획에서 보면 일종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마치 제1권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듯이 제5권-제7권의 내용도 별도의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가 이곳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제5권 서두를 읽다가 앞서 그려진 424a의 장면을 잘 음미해보면 제5권 서두의 논의 전환이 훗날 삽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도면밀하게 플라톤에 의해 하나로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424a로 되돌아가면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양육을 훌륭하게 받아 절도 있는 수호자가 되면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라는 속담대로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는 것까지도 당연한 것으로 간파하게 될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대화 참여자들은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파격적인 언급에 아무런 이의 없이 순순히 동의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제5권 서두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의아하게 여긴 그대로 제5권에 가서 대화 참여자들 역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의를 제기하도록 만들기 위한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었다. 즉 플라톤은 424a에서 미리 그와 같은 의아한 장면을 복선으로 깔아 독자들에게 의아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내내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이의를 제기하게 만드는 배경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 제5-7권의 핵심 주제가 철학과 철학자 왕이라는 점도 이 부분이 나중 <국가>에 삽입된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제인 개인과 나라의 행복과 정의와 관련해서 그 행복과 정의를 담보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철학과 철학자 왕이고 그 내용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 또한 제5-7권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제5-7권은 플라톤이 처음부터 <국가>의 전체 구도 안에서 따로 집중해서 다루려 하는 의도에서 편제된 <국가>의 핵심 부분인 것이다.

* 그럼에도 아데이만토스 등 대화 참여자들의 이의 제기와 요청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지나칠 정도로 방어적이고 신중하다. 자신의 대답이 진리가 아니라 소원이나 비는 것처럼 보일까 염려된다는 말도 하고 하물며 그 자신 확신도 없는 말로 본의 아니게 좋은 사람들을 속이느니 차라리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는 것이 더 작은 죄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곧이 들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내놓을 답변들은 모두 <국가>의 핵심을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플라톤 스스로 숙고와 성찰을 거듭해서 내놓은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후 본격적으로 토해내는 주장 또한 놀랄 만큼 확신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왜 여기 시작 단계에서 소크라테스를 그토록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내용들이 <국가>의 중심 주제이자 플라톤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양성평등과 처자공유 및 정치체제에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위상에 관한 문제는 당대 아테네의 지적 풍토에서는 감히 꺼내 들기도, 설득력을 지니기도 힘든 주제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에서 양성평등이란 입에 꺼내기조차 힘든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대 아테네에서는 지식인 세계에서 위세를 떨쳤던 전통적인 신화와 시인들과 달리 철학과 철학자란 크게 주목을 끌거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주제들을 자신의 핵심 주장으로 제기하려는 플라톤으로서는 다각적으로 저작 기법상의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단 자신이 불쑥 그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주변 대화 참여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마지못해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태도 또한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장면 또한 플라톤의 치밀한 의도 아래에서 그려진 것으로 일종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대답을 극력 촉구하는 글라우콘을 향해 농담조로 ‘잘도 나를 북돋는다’(451b)고 반문하는 것 역시 이 국면이 플라톤의 의중을 담아내기 위한 아이러니임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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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 451c-457b)

 

[451c-457b]

1)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대화 참가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남성 공연δρᾶμα을 완전히 다 마치고 나서 여성 공연을 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남성들을 무리의 수호자로 세우려 했던 앞서의 과정과 상응하는 방식으로 처자공유 방식을 논의하되 우선 여성들과 아이들을 소유하고 다루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51c)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컷 경비견φυλάκων κυνῶν들과 암컷 경비견들의 비유를 들어 암컷들이 새끼를 낳고 기르는 것 때문에 경비나 사냥 같은 일은 수컷이 하고 암컷은 집을 지켜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단지 힘 차이를 빼면 두 경비견이 하는 일은 동일하므로 하는 일 모두를 공동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비유에 기초하여 그러한 동물을 동일한 일’ἐπὶ τὰ αὐτὰ에 쓰려면 그 동물에게 ‘동일한 양육과 교육을’τὴν αὐτὴν τροφήν τε καὶ παιδείαν 부여해야 하듯이 여성γυνή들도 남성ἀνήρ들과 같이 동일한 일에 쓰려고 한다면 여성들에게도 동일한 것을 가르쳐야διδακτέον 하고 시가와 신체단련 기술은 물론 전쟁 임무도 부여하는 등 동일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51d-e)

2) 이를테면 여성들이 남성들과 함께 레슬링 도장παλαίστρα에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γυμναζομένας 것이 관습상 우스울지라도 그리고 하다못해 몸에 주름이 잡혀서 보기 좋지 않은 노인네들이 신체 단련장에서 볼 수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변화를 두고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농담σκῶμμα을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452a-c) 그리스인들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크레타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벗고 신체 단련하는 것을 보고 희화화했지만 막상 신체단련을 해보니까 벗어버리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듯이 논변λόγος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이 밝혀지면 눈ὀφθαλμός으로 우습다고 여겨진 것은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요컨대 나쁜 것τὸ κακόν이 아닌 다른 어떤 것ἄλλην τινὰ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좋은 것 말고 다른 것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진지해하는 사람은 다 멍청하다.(452d-e)

3)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φύσις상 여성이 남성과 모든 일을 공동으로 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하여 우리가 반대쪽 사람들 편에 서서 우리 자신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방식으로 토론해 볼 것을 제안하고 우선 그쪽 편에 서서 이렇게 반론을 제시한다. 즉 i) 각 사람이 본성에 맞는 자기의 일 한 가지를 해야 한다‘δεῖν κατὰ φύσιν ἕκαστον ἕνα ἓν τὸ αὑτοῦ πράττειν고 당신들 자신이 동의했다. ii)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본성이 완전히 차이 난다. iii) 그렇다면 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일을 맡기는 것이 적절하다. vi) 그러므로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가당착τἀναντία이다.(453a-b)

4)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반박에 대한 탈출구를 요구하는 글라우톤 등에게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즉 그렇게 반박을 하는 사람들은 대화διάλεκτος가 아닌 쟁론ἔρις을 벌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의 대상을 종류εἶδος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는 못하고 표현 자체αὐτὸ τὸ ὄνομα에 매달려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이러한 반박술에 휘말릴 경우 우리는 표현에 얽매여서 동일한 본성이 동일한 일의 수행을 맡아야 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을 용맹스럽고 쟁론적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대머리인 사람들φαλακροὶ과 머리가 긴 사람들κομῆται이 반대되는 본성이 아니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고서 그들의 본성이 반대된다는 데 우리가 동의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이 구두장이σκυτοτόμος 일을 하면 머리가 긴 사람들은 못하게 하고 역으로 머리가 긴 사람들이 구두장이 일을 하면 대머리인 사람들은 못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라는 것이다.(453c-454b) 요컨대 동일한 본성과 다른 본성을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면 안 되며 다만 수행할 일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란 이를테면 의사ἰατρός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을 서로 연관시키는 경우이다. 이 경우 의사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닌 목수τέκτων 일을 할 줄 아는 사람과 연관시킬 경우 그것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것끼리 연결 짓는 것이다.(454c-d)

5) 남성들과 여성들의 경우도 어떤 기술이나 다른 어떤 수행할 일과 관련해서 한쪽이 더 뛰어난 것으로 드러나면 본성상 양자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단지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은 아이를 배게 한다는 차이만으로는 어떤 기술이나 수행하는 일과 관련한 논의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수호자들과 그들의 여성들이 동일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은 반박되지 않는다.(454e) 나라 경영διοίκησις과 관련해서 여성이 고유하게 수행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455a) 어떤 것에 적성τὸν εὐφυῆ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적성이 없다고 할 때 기준이란 i) 한 사람은 그것을 쉽게 배우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경우 ii) 한 사람은 조금 배워도 그 배운 것으로부터 스스로 아주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은 많이 배우고 익히고 나서도 배운 바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경우 iii) 한 사람에게서는 몸에 속한 것들이 생각을 충분히 잘 섬기는데μελέτης, 다른 사람에게서는 그것들이 생각에 저항하는ἐναντιοῖτο 경우이다.(455b-c)

6) 물론 사람들이 익히는 일들 중에 여성이 잘 한다고 여겨지고 그래서 거기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못하면 정말로 웃기는 일들 이를테면,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 따위가 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이 여성을 훨씬 능가κρατεῖται하긴 하지만 많은 여성이 많은 남성보다 더 뛰어난βελτίων 영역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어떤 것도 따로 여성에 속한 것도 따로 남성에게 속한 것도 없으며 그와 관련한 본성들은 양성 모두에 비슷한 방식으로 흩어져 있어서, 비록 모든 일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긴ἀσθενής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수행할 일들 모두에 본성에 따라서 공히 참여할 수 있다.(455d)

7) 다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본성상 의사 일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으며, 또 시가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듯이 신체단련과 전쟁에 적성이 있는 여성이 있고 전쟁과 어울리지 않고 신체단련을 좋아하지 않는 여성이 있다.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는 여성과 지혜를 싫어하는 여성이 있으며 또, 기개가 있는 여성이 있고 기개가 없는 여성이 있다.(455e-456a) 이렇듯 수호라는 목적에 비추어볼 때도 더 약하거나 더 강하다는 점만 빼면 여성의 본성과 남성의 본성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성들도 선발해서 그러한 남성들과 함께 거주하고 함께 수호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충분하고 본성상 그런 남성들과 동류συγγενής이기 때문이다.(456a-b)

8) 결국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여성 수호자들에게 시가와 신체단련을 부여하는 것이 본성에 어긋나지 않다는 데에 우리가 동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고 단순한 소원εὐχή 같은 것을 법으로 세운 것도 아니며 본성에 맞게 법을 세운 것이다.

9)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동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남성 수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수호자로 두는 경우도 과연 최선일지가 동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근거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우리가 수립한 나라에서 앞서 말한 양육과 교육을 받은 수호자들이 구두장이 기술을 교육받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나은 사람이듯이 여성의 경우도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여성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나은ἀμείνων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수호자가 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가능한 한 뛰어난 여성들과 남성들이 생기는 것보다 나라에 더 나은 일이 없으며 시가와 신체단련이 우리가 설명한 대로 이루어지는 한 그 일은 성취될 수가 있다.(456c-e) 요컨대 우리는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οὐ μόνον ἄρα δυνατὸν ἀλλὰ καὶ ἄριστον을 나라의 법으로 정한 것이다.

10) 그러므로 여성 수호자들은 의복 대신에 덕ἀρετὴ을 몸에 두른 것이므로 옷은 벗어야 하고 전쟁과 그 밖의 나라 수호 일을 함께해야 하며 다른 일은 하지 말아야 하되, 다만 여성이 더 약하니까 그런 일 중에 더 가벼운 일을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부과해야 한다. 최선βέλτιστος의 것을 위해서 옷을 벗고 신체단련을 하는 여성들에 대해 웃는 남성은 자신이 무엇을 두고 웃는 것인지도 또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자이다. 실로 ‘이로운 것은 아름답고 해로운 것은 추하다’τὸ μὲν ὠφέλιμον καλόν, τὸ δὲ βλαβερὸν αἰσχρόν.

11)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논의 과정을 우리 주장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했을 하나의 파도κῦμα라고 말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맞이할 파도들 중 첫 번째 파도를 이제 넘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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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451c 남성 공연과 여성 공연의 비유는 이후에 언급되는 여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이 앞서 언급한 남성 수호자에 관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성 수호자를 기준으로 표현된 ‘처자의 공유’라는 말 또한 남녀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수호자 계급에서 ‘배우자와 아이들의 공유’가 될 것이다.

* 2)에서 452d-e : 이 부분에서 노인들의 경우는 스파르타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나이 들어서까지 전사로서 레슬링 훈련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편견에 기초한 관습들은 객관적인 경험들과 이치에 맞는 논변에 의해 극복되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좋고 나쁨은 오직 이치에 기초해서만 판정되어야 한다. 눈으로 보면 여성 수호자들 역시 옷을 벗고 있지만, 이치에 기초해보면 그들은 다만 덕을 두르고 있는 것이다.

* 2) 452d ‘나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 모든 것들이 좋은 것 나쁜 것들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소피스트들은 모든 것을 흑백으로 나눈다. 그러나 플라톤에게는 늘 중간의 것들 무규정적인 것들이 있다. 무규정적인 것들은 다만 정도 차이만 가질 뿐 서로 다른 것들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고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 3)의 i)- iv)는 대화가 아닌 쟁론에 기초한 반박이다. 이러한 반박술은 논의 대상을 종류에 따라 나누어 고찰하지 않고 종류상 서로 다른 본성의 것임에도 표현 자체에 매달려 그것을 동일한 본성으로 여겨 모든 측면에다 다 갖다 붙여서 적용하는 경우이다. 오늘날 오류론에 입각해서 보면 생물학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를 혼동한 데서 비롯된 논점 일탈의 오류 내지 유추의 오류이자 특정한 사례를 기준으로 모든 사례가 그렇다고 일반화하는 부당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류들은 쟁론을 일삼던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류들이다. 이곳 논의에서 쟁론이 아닌 대화로 평가될 수 있는 경우는 다만 수행할 일 자체와 그것과 관련이 있는 종류의 차이와 유사성만 염두에 두고 그것들 서로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머리와 구두장이 비유는 쟁론과 대화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 6)에서 뜨개질이나 빵 굽는 일, 채소 삶는 일은 소크라테스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나누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다만 우연적 요소에 불과하다. 플라톤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본질적인 요소는 적성이다. 그리고 적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5)의 i) – iii)에 기초해야 하며 그 기준에 기초하는 한 남성과 여성의 적성은 동일하다.

* 9)에서 456c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최선이기도 한 것’ : 남녀의 평등과 차이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전혀 경직되어 있지 않고 유연하다. 양성의 역할을 비교하면서 예외적인 경우가 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진리에 부합하는 본질적인 경우인지 우연적인 경우인지를 가려, 일반적인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한다. 여성 수호자가 가능한 것도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성평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세우는 법과 기준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kata physin) ‘가능한 것들이자 최선의 것들’이다. 이것은 인류 지성사를 통해 양성평등의 자연법적 기초가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되었음을 보여준다. <끝>

* 다음 회 : 2. 첫 번째 파도(양성의 평등 : 451c-457b)에 대한 세부 해설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철학자의 서재]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오상현(한철연 회원)

 

박은미 선생님의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 벗어나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자의 시선에서 고르고 담았다. 화가 많은 나로서는 일종의 처방전이었다고 해야겠다.

“논리적 결론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때 인간은 그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즉 논리적 결론이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논리적 결론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논리적 결론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그 결론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원활하게 만드는 결론, 즉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결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38쪽)

철학을 전공하면서 ‘논리’를 무기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일상에서 논리적이지 못하다.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보다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다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면 다행이겠지.

“반성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입힐 가능성을 생각하고,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후자는 자신의 잘못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거죠.”(214쪽)

‘정신승리’가 자기 보존에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요즘 유독 ‘책임’을 지겠다는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답답하고 아쉬웠는데, 반성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태풍도 폭염도 곧 지나간다 하였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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