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5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 우선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 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의 논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목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점은 플라톤 스스로 주도면밀하게 구성한 이곳 전후의 논의 구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두 번째 파도를 논의하기 전에 플라톤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어떤 문학적 구성으로 어떻게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전체 논의 국면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 중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해 청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제5권에 들어서며 새로운 주제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의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그 문제 해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크게 부각한다. 특히 처자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대화 참가자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자신 논의 자체를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당혹스럽고 난감한 주제로 제기된다.
2)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가능성은 젖혀두고서라도 일단 이론적으로는 처자 공유의 문제가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라는 핵심가치의 구현 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 이에 따라 이 가능성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세 번째 파도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라는 주제 자체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4) 아니나 다를까 글라우콘은 제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세 번째 파도인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곳 논의 국면에서 플라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를 최대의 관심사로 극대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는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가능하면 정의로운 나라의 핵심가치가 구현 가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를 슬그머니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그 두 가지 가능성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떻게 주어질까? 다음 강해에서 다루어지겠지만 그 가능성은 단적으로 ‘철학자 왕’을 통해 주어진다. 이렇게 보면 결국 세 파도와 관련한 이곳 논의 국면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을 최고도로 끌어올린 다음 그 절정에서 그 불가능에 가까운 난관을 해소하는 종국의 열쇠로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를 <국가> 논의의 최고 정점으로 끌어 올리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 이로써 플라톤이 왜 <국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제5권을 새로운 논의 전환점으로 삼으면서 왜 세 파도를 끌어들였고 또 그 논의 전환점을 통해 무엇을 핵심 주제로 삼으려 했는지가 비로소 밝혀진다. 요컨대 세 가지 파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제5권에서 플라톤이 이제 집중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곧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이고 그에 따라 제5권-제7권은 정의로운 나라를 구현하는 유일한 토대로서 그 철학자 왕을 출현시킬 수 있는 철학과 그 교육 과정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나라(제2권-제4권)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는 그 철학자 왕의 가능성의 문제(497a-502c)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철학자 왕을 담보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문제(502c-541b)로 귀착한다.
* 그러나 이러한 교육 과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할까? 교육은 능력의 문제를 본질로 하고 있고 능력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최소한 가능성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 세 번째 파도를 다루는 부분에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이 실천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에 있다. 플라톤의 철학 역시 지혜를 향한 사랑으로서 ‘사랑’ 즉 본질적으로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끊임없이 선의 이데아, 즉 지고의 진리에 다가가는 ‘분투’의 철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해당 부분 강해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이상이 세 파도와 관련한 논의 국면 전체가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이다. 그러면 이제 서두에서 밝힌 취지에 맞게 그러한 논의 국면의 전체적인 이해를 배경에 두고 오늘 강해의 주제인 처자 공유의 목적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461e-466d]
* 플라톤은 우선 나라의 최대선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고 그러한 나라의 결속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유에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 나라 수립을 위해서 가장 큰 좋은 것, 이것이 입법자가 법을 세울 때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συνδῇ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διασπᾷ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2a)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ἡδονῆ과 괴로움λύπη의 공유κοινωνία이다. (462b) 최대다수πλεῖστοι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ἐπὶ τὸ αὐτὸ κατὰ ταὐτ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경영되는 나라이다.(462c)
*‘우리 중 누군가가 손가락을 찌었을 경우, 몸 전체를 거쳐 영혼까지 뻗어 있으면서 안에 있는 다스리는 것에 의해 단일한 조직σύνταξις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πᾶσα ἡ κοινωνία가 손가락 찧은 것을 감지하고, 부분의 고통에 대해 전체가 모두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가 경영되는 방식이다.(462c-d) 다시 말해 ‘시민들 중 한 명’ἡ τοιαύτη πόλις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는 통치자들과 민중δῆμος이 서로 시민πολίτης들이라고 부른다.(462e-463a)
* 그러나 다른 많은 나라의 민중들은 통치자를 군주δεσπότης라고 부르고 민주정체를 갖춘 나라에서는 그냥 그대로 통치자ἄρχων라고 부른다.(463a) 이에 비교해 우리의 나라에서 민중들은 통치자들을 시민들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구원자σωτήρ들이자 조력자들ἐπίκουροι이라고 부르고 통치자들은 민중을 보수를 주는 자μισθοδότης들이자 부양자τροφεύς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은 민중을 노예δοῦλος라고 부른다.(463b) 다른 나라에서는 통치자들 서로를 동료 통치자συνάρχων라 부르지만 우리의 나라에서는 동료 수호자συμφύλαξ라고 부른다.(463b)
* 다른 나라 통치자들의 경우 어떤 이들은 친족οἰκεῖος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남ἀλλότριος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나라 수호자들은 누구를 만나든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또는 이들의 자손이나 조상을 만난 것으로 여긴다.(463c) 이 나라 통치자들은 이름만 친족이 아니라 이름에 따르는 모든 행동도 친척을 대하듯이 하도록 법을 정하여 어렸을 때부터 서로에 대해 공경하고 봉양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 등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하게 한다.(463d)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일이 잘되거나 잘못되었을 때 ‘내 일이 잘되었다’거나 ‘내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두 한목소리를 낸다.(463e)
* 이러한 신념δόγμα을 갖고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다 보면 우리의 시민들은 동일한 것을 최대로 공유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을 최대로 공유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주된 이유는 이 나라에 마련된 다른 제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수호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a) 즉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b)
[464b – 466d]
* 그런 연후 이제 소크라테스는 처자 공유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 진정한 나라의 수호자들은 집도 토지도 다른 어떤 소유물도 사적으로 갖지 말아야 하며, 다만 수호의 보수로 다른 이들에게서 양식을 받아 그들 모두가 공동으로 소비해야 한다.(464b) 참된 수호자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남들과 상관없이 혼자 여자와 아이도 따로 가지고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사사로운 즐거움과 아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에 대한 하나의 신념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 할 수 있는 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이다.(464c)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소송이나 고소도 없으며 돈이나 자식과 친척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464d-e)
* 그들 사이에서 폭력이나 폭행으로 고소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며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폭력을 쓰거나 모욕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 δέος과 염치αἰδώς가 그런 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으로 인해 모든 영역에서 이 사람들은 반목함이 없이 서로서로 평화εἰρήνη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464e-465b)
* 그리고 이들이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라의 다른 계층 사람들이 이들과 반목하거나 혹은 자기들 서로 간에 반목을 하게 될 위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와 같은 아주 사소한 나쁜 것들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등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ἀγεννής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465c) 이들은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가 사는 복된μακάριος 삶보다 더 복되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경기 우승자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수호자들이 가진 것 중에 작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호자들이 거둔 승리는 더욱 훌륭한 것이며, 그들은 나라를 구한 명예를 누리고 공공기금으로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어 죽어서도 걸맞은 장례가 치러진다.(465d-e)
*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나라 안의 한 집단에 주목해서 그 집단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할 수 있는 한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6a) 그리고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οἱ Ὀλυμπιονῖκαι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났다면, 그것은 구두장이들의 삶이나 다른 어떤 장인들의 삶, 농부들의 삶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466b) 수호자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몰지각하고 유치한 믿음에 사로잡혀 우리가 이야기한 삶을 고수하지 못하고 나라 안의 모든 것을 권력을 행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쪽으로 이끌린다면, 그는 ‘반이 전체보다 많다’πλέον ἥμισυ παντός고 이야기한 헤시오도스가 진실로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66b-c)
*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교육받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는 일을 공유해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공유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전시이건 아니건 그러한 공유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이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도 그러한 공유가 생기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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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3b 조력자들 : 이곳에서 조력자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epikouroi는 수호자 계층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구분하면서 전사들을 통치자의 ‘보조자들’ 또는 ‘조력자들’로 부를 때(414b, 416a, 420a 등등) 사용한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는 민중들이 통치자들을 부를 때 쓰는 말로 나온다. 즉 수호자들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사람이고 통치자들은 민중들을 보조하는 사람이다.
* 464b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466a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수호자들’이란 말을 쓰지 않고 ‘조력자들’이라는 말을 썼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note 참고)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수호자 계층 가운데 통치자들이 아닌 전사 계급 즉 ‘보조자’ 내지 ‘조력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 공유와 관련한 대부분 문맥에서는 일관되게 수호자들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바로 앞서 통치자들을 조력자들로 불렀던 것에 기초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465c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 아테네 당대 현실의 경제적 실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초래하는 일상의 양태로서 오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 465c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 수호자 집단 내에 하인이나 노예도 없음을 보여준다.
* 466a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 제4권을 시작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제기한 비판이다.(419a)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들의 관점에 서 있다.(<정치학> 1264b15-24 참고)
* 466b ‘반이 전체보다 많다’ :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40 참고. 권력자들이 모두 나라의 반을 갖겠다고 한다면 그 모두를 합칠 경우, 전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나라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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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곳의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곳에서 제시된 이상적 공동체의 핵심 요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위와 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앞선 강해에서도 여러 번 소개되었듯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기존의 논쟁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한번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석을 더 하자면 아래와 같다.
* 1)의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흔히들 내거는 총화단결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리거나 일체의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나라 전체를 위해 하나의 대오를 강조하는 군국주의적인 획일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상은 플라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들은 각기 자연적 본성에 따라 서로 다른 각기 고유의 역할을 갖고 그들 간의 분업적 의존을 통해 각기의 본성적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획일적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나라라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역할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음악에서도 조화는 획일적인 같은 음들이 그저 하나같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들이 각각의 고유한 음가를 가진 상태에서 마치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 하나 됨이란 같은 것들끼리의 획일적인 통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다움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들 상호 간의 조화를 통해서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통치를 수행하는 권력자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인 시민의 이익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좋아하는 것이 통치자의 본성인 한에서 통치자 또한 충실한 통치의 수행을 통해 그 스스로 행복을 얻는다.
* ‘누군가가 손가락을 찧었을 때 단일한 조직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가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462c-d)라는 말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유기체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20세기 전체주의자들이 내건 국가유기체설에 따르면 개인과 나라의 관계는 유기체에서 유기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위들과 몸 전체의 관계와 동일하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그 역할과 기능 또한 자신들 개개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 몸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국가를 떠나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역할과 기능 또한 개인 자신이 아니라 전체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단일 생명체가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성하는 부위도 존재할 수 없듯이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 그리고 생체 부위들 일부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상실해도 생명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개인들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고 희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나라는 과연 이와 같은 국가유기체설에 토대를 둔 전체주의 국가일까? 일단 유기체라는 말만 고려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유기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개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고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 또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나라에서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의 각 계층이다. 개인 차원에서도 유기체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신체적 부위들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그리고 개인들은 분업적인 상호 의존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욕망을 최선으로 발휘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 고유의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의지한다.
*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가>의 논의 자체가 어떤 개인이 더 행복한가를 주제로 출발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논의는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서 분명하게 살피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개인 내부 영혼들 간의 조화에 기초한 개인 자신의 행복이 논제로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은 단지 나라의 이익을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다’ 또는 ‘개인들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행복 또한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담보된다는 앎 즉 절제의 덕을 토대로 기꺼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절제라는 그러한 공동의 덕목 아래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가장 행복한 개인이 되고 또 동시에 가장 충실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2)의 내용에서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 이 말에서 특히 ‘시민들 중 한 명’이란 표현은 플라톤의 나라가 그 자체로 얼마나 국가주의와 거리가 먼지를 잘 보여준다. 정의로운 공동체란 특정 계층이 다른 계층의 희생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최대다수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나라이다. 그러한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나라가 나라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발상은 어디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 3)의 내용 또한 플라톤의 나라를 권력에 따른 철저한 위계 사회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통치자와 민중은 군주와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함께 정의로운 나라를 일구어가는 서로가 똑같은 시민의 관계이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단지 민중의 안녕을 보전하고 그들을 보조하는 대가로 민중이 기꺼이 제공하는 보수를 받는 자들이다. 보수라는 말이 사용자가 피고용인에게 주는 대가라는 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민중들이 사용자이고 통치자들은 피고용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근대사회 이후에 성립된 사회계약론은 이기적 개인들의 배타적 이해관계 속에서 상호 의심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한 규정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각기 고유한 역할을 토대로 상호 호혜의 관점에서 자발적이고도 협동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계이고 무엇보다 이기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의심이 아닌 덕과 믿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관계이다.
4)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가져다주는 이로움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이로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1)에서 최선으로 언급된 ‘나라의 내분을 막고 하나 됨’이라는 입법의 목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이 나라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나라의 분열 특히 그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이다. 나라의 최악을 초래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은 역사적인 사실들에 기초해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권력과 재력 등 특권의 부당한 독점이 주된 원인이고 그 특권의 중심에는 가문과 가족 등 혈연과 가족주의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직접 겪은 아테네 히피아스 참주정과 시켈리아의 디오니소스 참주정 모두 직계 가족 간 세습으로 이루어진 폭압적 참주정이었다. 오늘날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가까이 우리와 관련해서도 북한 역시 3대에 걸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독재국가이다. 오늘날 막강한 힘을 갖고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른바 재벌들 또한 대부분 부자간 세습을 통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대규모 종교집단에서도 세습에 의해 권력이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누리는 부유함 또한 대부분 가족 간 상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상속 과정에서 그들 서로도 분열되지만, 그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빈부의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면서 그 자체로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 요컨대 나라나 사회 또는 개인들이 서로 갈라져 분열하고 싸우는 원인 한 가운데는 가족이기주의와 물질적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자들일수록 그러한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피폐상은 당사자 개인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불행을 낳는다. 우리나라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도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리사욕과 폭행, 권력의 남용과 책임회피가 나라가 분열되든 말든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치없이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뻔뻔하게 자행되고 있다.
* 한편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폐해가 심대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족주의가 갖는 혈연적 친밀감과 연대감은 그 집단의 긍정적인 결속에 큰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가족이기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기 위해서 수호자들에게 일상 형태의 가족 구성은 철저히 금하지만 그 대신 4)에서처럼 수호자 집단의 짝짓기를 통해 출산된 공통의 자식들과 친족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친밀한 가족 내지 친족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통해 수호자 집단 고유의 가족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1262a-b)에서 플라톤이 가족 확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구성원들 간의 친애(philia) 사랑은 마치 많은 물을 섞으면 농도가 묽어지는 것처럼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굳이 처자의 공유는 농부 계급에서 더 유용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정한 신념과 소명으로 무장된 수호자 집단의 경우 오히려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가족적 연대감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분명 플라톤이 주장하는 수호자 집단 내 가족의 확장은 그러한 생각에 기초해 있다.
* 5)의 내용은 많은 사람에 의해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만약 가장 소박하고 단순하게 공산주의를 규정하여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공의 소유에 기반을 둔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으로 정의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정의되어 왔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문제 역시 그 자체로 애매함과 불분명함을 안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대 특히 근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현실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준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나라와 현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공통점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흔히들 일컫는 사적 소유의 금지만 해도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경우 개인 수준에서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생산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사적 소유의 금지이고 그것도 특정 수호자 집단에만 한정된 것이다. 수호자 집단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의 경우는 생산 수단을 비롯하여 재산과 가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부도 축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는 현대적 의미의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고 굳이 연관시킨다고 해도 정치체제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소수 권력자 집단에 국한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나라들 대부분은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정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거나 권력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플라톤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사적 탐욕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현대의 여느 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플라톤의 구상은 그 금지의 수준이 권력자 집단 내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포함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그러나 가히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금하고 있는 플라톤의 나라는 구현 가능성 이전에 그 철두철미함 그 자체로 정치권력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도덕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좀 더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위와 같은 공동체의 핵심가치와 목표를 아래와 같이 풀어 쓸 경우, 정치체제와 크게 상관없이 최소한 명분에서 그 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강령으로 가히 손색이 없다.
1) 나는 나 자신과 가족과 관련한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않는다.
2) 나는 정해진 보수 이외에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
3) 나는 시민 한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나 자신의 고통과 기쁨으로 여긴다.
4) 나는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같은 시민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5) 나는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힘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수호자들끼리 소송하거나 고소하는 일, 폭력이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도 없고 돈이나 혈연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호자들과 다른 계층들 사이에도 반목이 없고 다른 계층들 내부 사람들끼리도 반목할 위험이 없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집단이 처자 공유를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로 삼았을 때 갖게 될 이로움을 이렇게 언급한 후 수호자들의 통치 목표가 이미 제4권에서 말한 것처럼(419a) 나라 안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 모두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라가 갖는 이러한 이로움은 모두 모두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교육받고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며 함께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고 함께 서로를 공유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통치의 본성이 시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통치자의 본성에 부합하는 한, 통치자 자신 또한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누린다고 이곳 논의를 마무리 한다.
* 이곳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부분의 논의는 <국가> 논의 구도 전체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처음 대화 참여자들이 요구한 대로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담보하는 처자의 공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즉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앞서 미리 밝힌 대로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세 가지 파도가 논의의 주제임을 고려하면 이 부분의 논의는 일종의 여담에 해당한다. 그럼 다음 강해에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끝-
* 다음 강해 : 2. 두 번째 파도(III) : 전쟁에 관한 일(466d-471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