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회원 신간소개 발표_좌담회 ‘이 책을 말하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영상 20230707

주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
저자 발표: 박종성
논평·토론: 이병창, 이병태
일시: 2023년 7월 7일(금) 오후 5시 30분
장소: 한철연 강의실

한철연 웹진 [이 시대와 철학]에서 진행
박종성 회원(건국대)이 번역한 슈티르너의 저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는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슈티르너의 저작
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 웹진 [이 시대와 철학] 논평_토론문 링크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1)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0/
▶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http://ephilosophy.kr/han/55235/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M4_T0zODMSU?si=vnE3ZqbNBxOLVwS-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9d)

[487b-488e]

*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데’τοῦ ἐρωτᾶν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경험이 없는ἀπειρία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논변λόγος에 의해 조금씩 잘못 이끌려가 논변의 마지막에 가서 처음 이야기와 반대되는 것에 직면하듯이 오늘날 누군가는 ‘선생님께 말로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반박ἐναντιόομαι을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실제로 목도 한다ἔργῳ δὲ ὁρᾶν’고 주장한다.(487b-c) 즉 ‘젊어서 철학을 시작하여 그만두지 않고 더 오래도록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못된’παμπόνηρος 사람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기이한ἀλλόκοτος 사람이 되고. 또, 그중 가장 괜찮아ἐπιεικής 보이는 사람들조차 선생님께서 찬양하시는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πάσχοντας 나면, 나라에 쓸모없는ἄχρηστος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진실τἀληθῆ이라고 수긍을 한다.(487d)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자들이 그처럼 나라에 쓸모없다면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제5권 473c-d)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다시 묻는다.(487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질문은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비유εἰκών에 익숙하지 않음οὐκ εἴωθας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증명하기 어려운’δυσαπόδεικτος 논의는 비유를 들어 그것도 여러 개를 합한 비유를 써서 변명할ἀπολογέομαι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나라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τὸ πάθος은 너무도 어려워 그러한 일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화가들이 염소, 사슴이나 그러한 것들을 몇 가지 동물을 섞어서 그리듯이 아주 고생스러울 정도의 비유로서 배ναός의 비유를 들어 여러 척의 배든 한 척의 배든,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488a)

* 앞으로 펼칠 설명의 편의상 소크라테스의 비유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배주인ναύκληρος은 덩치μέγεθος나 힘ῥώμη은 배에 탄 누구보다도 앞서지만, 귀가 어둡고ὑπόκωφος 근시인데다가ὁρῶντα βραχύ 항해술ναυτική과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로 짧네. 선원ναύτης들은 각자가 자신이 키(舵)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를 누가할지 서로 다투고 있네. 그 기술을 배운μαθόντα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διδάσκαλος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διδακτός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르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찢어죽일κατατέμνειν 준비까지 되어 있지.(488a-b)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πείθωσιν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ἐκβάλλοντας. 그리고 점잖은γενναῖος 배 주인을 약μανδραγόρας이나 술μέθη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συμποδίσαντας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εὐωχουμένους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488c)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πείθοντες 폭력을 가하든βιαζόμενοι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ναυτική이 있고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비난하고 말이지.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에 대해서, 진정으로 배의 지배자ὁ ἀρχικός가 되려는 사람은 한 해의 계절ὥρα들과 하늘οὐρανός과 별들ἄστρων과 바람πνεῦμα, 그리고 그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네.(488d) 또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τέχνη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을 학습μελέτη하거나 습득λαβεῖ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들이 배에서 벌어지는 경우에, 이런 상태의 배에 탄 선원들은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μετεωροσκόπος, 수다쟁이ἀδολέσχης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489a)

* 소크라테스는 이 비유가 어떤 점에서 나라들을 닮았는지를 재확인한 후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데 대해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가르쳐주고, 그들이 존중받는다면 그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철학에 몸담은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οἱ πολλοί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μὴ χρωμένος 사람들을 탓해야지αἰτιᾶσθαι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89b)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89c)

*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이 그 반대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εὐδοκιμεῖν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장 크고 강력한 모함διαβολή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러한 활동을 한다고 자처하는φάσκοντας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덧붙인다.(48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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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7e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 :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제5권 473c-d에서 아래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환기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오직 한쪽에만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성향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제지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아니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선의 정치체제가 철학자 왕정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자 정치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플라톤 정치철학의 궁극적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제로서 제6권 499b-c 및 501c에서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된다. 플라톤은 이에 따라 <국가> 논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6권과 7권에서 바로 이 철학자 왕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가 이상 국가 건설의 실질적인 관건으로서 제시된다.

* 487e – 488a :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문답을 통해 논증의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난제들의 경우 그것의 총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자주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화나 속담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이어 온 아데이만토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 말하고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비유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은 앞으로 논의될 주제들이 비유를 끌어 들어야 할 정도로 설명이 간단치 않은 문제들임을 미리 보여주는 일련의 수사적 장치라 할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를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논의 주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아데이만토스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답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짐짓 우쭐하여 그렇게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을 놀린다고 핀잔을 준 후 실제로 자신이 해명해야 주제가 그야말로 ‘증명하기 어려운’ 아주 힘든 난제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무용성에 대한 반박 정도를 넘어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철학자왕 체제는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장할 수도 말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앞서 평생의 고뇌를 통해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는 한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 체제 그것은 플라톤에게 결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히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이데아적인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철학자 왕 체제는 인간 이성이 상정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체제이자 그에 따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치체제의 이상적 원상(paradegma) 그 자체인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치가>편에서도 최상의 이상적인 정치가로서 그와 같은 철학자 왕의 존재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진실성을 논리적 증명 대신 신화와 비유를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이 <정치가> 편을 강의하면서(『박홍규 전집』, 제4권 <후기철학 강의>. ‘정치가 편’ 참고) 그 신화 자체를 다름 아닌 설명 너머의 진실이자 원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자들이 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와 관련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제7권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핵심 논제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적 논법의 토대를 이루는 문답법은 물론이려니와 앞서 그 자신 예고한 그대로 마치 주도면밀하게 미리 상정해 둔 일련의 기획으로 여겨질 정도로 의미심장한 수준의 비유, 즉 배의 비유를 비롯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차례로 끌어들이고 있다.

* 488a : ‘배의 비유’에서 ‘배’는 나라(polis)를, ‘선주’는 민중(dēmos)을, ‘선원들’은 선동 정치가들(dēmagōgoi)을, ‘진정한 키잡이’(kybernētēs)는 철학자를 가리킨다. 내용에 비추어 보면 배로 비유된 이 나라는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를 가리킨다.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은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고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곳 배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위와 같은 다중이나 민중을 비록 배의 주인이지만 귀가 어둡고 근시안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맥에서는(493a, c) 아예 ‘짐승’(to zōon)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은 플라톤이 민중을 매우 낮게 폄하하고 있으며 그에게 민중은 그저 우중(愚衆)에 불과하다고 시종일관 비난해왔다. 그러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비난과 공격의 초점은 선주인 민중이 아니라 선주를 겁박하여 배를 자기 멋대로 끌고 가려는 선원들 즉 선동 정치가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짐승’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선동 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길들여진 상태의 민중에 한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문맥(499e-500b)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그곳에서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플라톤은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거친 태도를 지니게 된 이유 또한 ‘마치 잔치에서 법석을 떠는 술꾼들처럼 어울리지 않게 바깥에 있다가 부적절하게 철학에 뛰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 철학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그런 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민중이 처음부터 우중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고 충분히 바르고 좋은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을 익힐 경우, 훌륭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앞서 살핀 이상 국가만을 보더라도 민중에 해당하는 대다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급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기초로 조화롭게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온전하게 구현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나라의 공동체적 삶에도 참여하는 분별 있는 시민들이다. 사실 그의 이상 국가론에 나타난 민중 일반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이 살던 시대가 아테네에서 여성 및 노예 등은 물론 정치적 권한을 가진 시민들 상당수조차 문맹에 불과하여 도편추방 투표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플라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민중들에 대해 플라톤의 인식과 비교할만한 수준의 철학자나 정치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플라톤의 민중관에는 기본적으로 민중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 엘리트의 온정주의(paternalis)적 연민 의식이 깔려 있고 그에 따라 민중을 오직 그들의 지배를 통해서만 계몽될 수 있는 수동적 집단으로 여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민주정의 등장 배경을 보면 오히려 민중은 스스로 생존적 저항을 토대로 지식인이나 귀족 등 기득권 과두 집단의 피폐한 지배를 뒤엎고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을 쟁취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비록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량까지는 아니지만, 민주정이 보여주듯 최소한 민중이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일단 정치적 의사결정의 최종권한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지식인 집단의 왜곡된 욕망에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민중을 위한답시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들어선 30인 과두정의 횡포를 바라보며 차라리 이전 민주정의 시기가 황금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편지> 324d) 그리고 제8권을 살필 때도 다루겠지만 민주정 치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의 불법적인 욕망까지도 앞장서 부추기고 영합하는 선동 정치가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는 오늘날 실제로건 명분으로건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국가들이 한편으로 안고 있는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선동정치가들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가장 참혹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나락에 빠트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선구적 성찰을 담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자 왕정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에는 통치자의 숫자가 아니라 통치 권력의 지성화가 핵심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지성화를 지상과제로 여긴 플라톤이 만약 오늘날 되살아나서 파리코뮨이나 한국 민주주의에서 1980년 광주 항쟁, 촛불 혁명이 보여준 이른바 민중 집단의 지성적 양태들을 목도한다면 그는 민주주의에서도 자신의 정치 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롭고도 실질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련 논의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이정호 ‘플라톤과 정치철학’ 참고)

*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488b)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을 학습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89a) : 플라톤에게 정치는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 영역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정치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배움과 습득에 의해 획득되는 전문 기술이자 그 모든 전문 기술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기술이다. 사실 기술의 전문성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존중하지만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성을 배제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 선 현대 비평가들에 의하면 플라톤은 도덕 내지 실천적 정치철학적 지식을 과학적, 수학적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여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당위를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존재(Sein)와 당위(Sollen)는 근원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다. 즉, 어떠한 정치적 결론도 그 자체가 도덕적, 정치적이 아닌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총화가 당위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에 대한 모든 진리는 비록 발견되거나 입증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비합리적 변수로 가득 찬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현실문제 해결에 해답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기술 관련한 언급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반기술과 통치기술 간의 유추는 전체론(holism)적 관점에서 일반화된 잘못된 것이며 통치기술로 비유된 항해술 또한 목적선정과 관련된 기술이 아닌 이동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이정호, ‘플라톤과 민주주의’, <서양고전학 연구> 1989 참고)

* 인간의 삶의 현실과 관련한 제반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침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제반 사물과 사태 및 가치에 대한 모종의 객관적이고도 총체적인 원리 내지 근원이 존재한다는 신념 위에 이른바 합리주의 정치철학이 서 있다면, 플라톤은 분명 합리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내용 또한 가장 선명하다고 할 정도로 급진적인 이성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사실 피폐한 정치이념으로서 파시즘, 나치즘은 물론이려니와 헤겔 철학, 마르크스주의,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사상, 캘빈의 제네바, 그리고 동양의 왕도정치 및 고대 유가사상이 지향하는 정치철학 역시 분분들을 관통하는 총체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보면 모두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wholism) 계열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그들의 합리주의적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세계관적 규정을 달리하며 그에 기초하여 그들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치 및 행복의 개념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특정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적 주장이 표방하는 구체적 방안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비판될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여타의 주장들이 내세우는 각각 교의의 가치 및 내적 본질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더욱이 공유된 목적과 본성적 욕구의 실현을 통해 협동적 삶을 추구하는 일정한 세계관 철학에 기초한 공동체적 사회관계로의 꿈은 그것이 표방하는 그 나름의 가치와 특정의 사회관계적, 민족적, 역사적 체험을 밀접히 결합하면서 사회관계상의 모순과 갈등이 심화한 국면에선 오히려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통합욕구를 객관화시킨다. 그리고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이 함축하는 가치의 표준적 정당성의 객관화는 그에 기초한 인간 생활의 질서화를 위한, 그리고 이상적 사회관계에로의 인간의 진보적인 해방의식을 선도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유의미성을 보존한 채, 세계관 철학으로서의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 488c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 그리고 점잖은 배 주인을 약이나 술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 : 플라톤의 이 말은 세계사적 정치 현실에서는 물론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 이를테면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정권에서 박근혜, 이명박을 거쳐 오늘날 윤석열에게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우리가 겪거나 또 현재 겪고 있는 피폐한 정치적 경험들(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 전두환의 광주 민중 학살, 국풍 및 3S 등 국민 위무정책, 이명박의 다스 소유 등 권력의 사유화,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작금 윤석열의 무도한 행태 등)을 그야말로 마치 미리 내다보았기나 한 것처럼 실감 나도록 그려내고 있다.

* 488c 점잖은gennaios 선주 : 민중을 나타내는 선주를 플라톤은 점잖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그리스 원어 gennaios는 ‘출신이 좋은’, ‘고상한’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원어가 갖는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했다면 이 말은 아테네 민중이 아테네 시민(hoi politai)로서 이방인(barbaros)에 비교해서 훌륭한 출신 성분을 갖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대체로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훌륭한 민족임에도 아둔하게 선동 정치에 휩쓸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gennaios의 반어적 용례는 <국가> 454a, 363a, 544c에도 있고 <작은 히티아스> 370d, <정치가> 274e, <소피스트> 231b 등에도 있다.

* 489a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 수다쟁이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에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내뱉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인문학은 건축에 비유하면 기초이다. 기초는 건물을 굳건하게 세우는 데 필수지만, 하나같이 늘 어둠 속 바닥에 묻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 안에서 먹고 살고 때론 더 번듯한 건물들을 칭송하거나 부러워할지언정 그 건물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초가 삐죽 지상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건물은 다 무너진다. 그래서 기초는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기뻐하며 그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으로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이다. 여기 배의 비유에서도 철학자는 평판에 상관없이 진정 키잡이가 갖추어야 할 지식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자부심을 지니고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488d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이 있고 키잡이 기술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 선원들에게 항해술,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 기술은 일반 전문적인 기술처럼 배우거나 습득할 수 있는 기술(technē)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선동 정치가들로 하여금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그들이 대중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들이 소유한 기술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이비 기술자들을 선원들과 구별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능한 사람들’로 부른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하고 그들의 주구(走狗) 역할을 하는 사이비 기술자들이 곧 소피스트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지는 문맥에서(493b,c) 이들 소피스트들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센 짐승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와 욕구를 숙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곤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등 함께 지내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이런 모든 것을 알아내고서는 그는 이것을 지혜sophia라고 부르고 기술로 체계화한 후에’ 보수를 받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인 것이다. 혹자는 대중의 기분과 욕망을 잘 알아내려는 소피스트의 태도야말로 민중에 대한 이해에 힘쓰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민중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도 챙기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태도이다. 그야말로 권력의 주구로서 권력에 부역하는데 진심인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태도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류 언론 집단과 곡학아세에 목을 매고 있는 지식인 집단은 지금도 하나같이 권력에 기생하여 권력자들과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489b ‘철학에 몸담는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야지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 이 말은 철학과 철학자의 무용성을 제기하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이 쓸모없게 여겨지게 된 것은 철학자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테네 민주정 아래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한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에 부역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하고 대중들 또한 그들의 주장과 태도에 휩쓸려 철학자들을 그야말로 쓸모없는 사람들로 매도한 데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이야말로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데 진정으로 가장 쓸모 있는 기술자임에도 그것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폭력적 수단으로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들 때문에 철학의 무용성이 마치 진실인 양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왜 철학자들은 그들을 곡해하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부족함도 마찬가지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사라면 먼저 환자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반문할 수 있다. 철학의 무용성과 관련하여 설사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잘한 것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은 사실 역사적 소크라테스에게는 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정작 플라톤에게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역사적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당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그들을 일깨우려다 목숨까지 잃었지만, 배의 비유에서 정작 철학자는 별을 구경하는 자 아니면 그냥 수다쟁이로 그려질 뿐 저항이나 투쟁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성적 사고에 투철한 플라톤이 철학의 무용성을 오로지 아테네 민주정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뭔가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앞으로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은 반지성적 민주정에 기대어 민주정의 개선에 힘쓰는 일은 이미 기대 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이미 민주정을 결코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싹틔울 수 없고 그에 따라 선동 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대중이 길들여지는 체제로 그리고 있고 제8권에 가면 민주정을 아예 태어날 때 본성으로 갖고 있던 자연적 소질마저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하여 구성원들 모두를 짐승처럼 서로를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피폐한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플라톤에게 철학자로서 진정 좀 더 잘 할 수 있고 잘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논의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민주정을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원천적으로 민주정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대안으로서 철학자왕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삶의 행적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 플라톤 자신은 민주정체의 개선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무망한 일로 여기고 있었는지가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그곳에서 ‘잘못된 정치체제의 개선을 기대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런 나라들의 법률 상태는 행운을 동반할 놀랄 정도의 대책 없이는 거의 구제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326a)고 고백할 정도로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라톤은 ‘개인의 일이든 나랏일이든 모름지기 정의로운 것 모두는 철학을 통해 알아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국가> 이곳에서 언급한 말 그대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가히 그의 정치철학적 결론이라 할 만한 신념을 이미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플라톤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개선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듯이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국가>를 통해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적 통치체제의 구현을 담보하는 주체가 철학자인 한, 바로 그 훌륭한 철학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 교육론을 이상 국가론의 핵심 주제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선명성과 급진성에서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한 그의 이상주의적 철학자왕 체제는 민주정과 참주정 등 기존의 피폐한 정치체제가 플라톤 자신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충격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시켈리아에서의 정치 실험의 실패가 가져다준 근원적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처럼 플라톤은 그가 겪은 피폐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절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말년으로 가면서 정치적 현실 참여는 아예 접어 버리고 그 대신 아카데미아에 처박혀 장차 언젠가는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철학자왕정을 구상한 후 그것의 구현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조건을 탐색하고 교육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치 참여와 관련한 플라톤의 태도를 현실적 개선 자체를 부정하고 고고하게 불타협적인 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점진적 개선을 위한 현실 인식도 원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어졌을 때 올바른 방향 및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현실 국가를 바람직한 최상의 국가로 견인하기 위한 동력이자 방향타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가장 말년에 쓴 <법률>도 <국가>의 철학자왕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칙을 유지하되 현실적 적용 차원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라 할 것이다.

* 플라톤의 <편지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현실 정치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치적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말년 플라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일례로 플라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말도 하고 지도자에게 조언도 하되, 만약 전혀 조언을 들어줄 자세가 없거나 조언 때문에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게 뻔한 경우에는 조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편지들> 330d-331d 참고) 그리고 아테네가 멸망하던 절체절명의 시기 아테네의 장래를 두고 데모스테네스와 이소크라테스 등 수많은 지식인이 마케도니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때에도, 플라톤은 해외에서 나라의 입법관련 자문을 구하는 제자들의 요구는 응했을지언정 그들의 논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은 채 아카데미아에서 오직 제자들을 교육하고 집필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앞서 살핀 대로 민주정 아테네는 물론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역시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 국가와는 원천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절망의 끝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그리스의 운명과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플라톤은 이곳에서(496d) 민주정 치하 철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그 자신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바람을 피해 모두를 헤아려 보며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저작들이 기울대로 기울어 버린 당대의 그리스 현실을 넘어 인류 일반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전해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플라톤의 그 소망은 로마와 기독교 철학을 거쳐 그 후 철학사의 위대한 지표가 되었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이정호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이 왜 원천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드디어 해명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무용성이 결코 철학과 철학자의 탓은 아니라는 게 해명되었긴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어쨌거나 처음에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처음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둘 타락하여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서 철학과 철학자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철학에 발을 들여놓거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비난과 모함은 더욱 치명적이다.(489d) 이에 따라 앞에서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일부 미리 거론되기도 했지만,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일부가 왜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와 더불어 철학과 철학자에 먹칠하는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B.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8e-495b)

문병호·남승석 지음,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갈무리, 2024. 1. 24.) 서평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 이주봉 [철학자의 서재]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신간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를 읽고.

 

이주봉(국립군산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영화는 19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기술적 발명으로 등장하여, 당대 대중사회로의 이행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위세를 떨친다. 영화는 여러모로 특별한 콘텐츠인데, 문화산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나 현실 및 세계에 대한 통찰 등을 제기하는 재현예술이라 할 것이다. 제임스 모나코같은 영화학자는 영화의 제작 및 수용 과정 등 그 생태계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요소들의 절대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영화가 예술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디지털 전환 이후에도 영화는, 여전히 문화산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로 그 위세는 굳건할 뿐만 아니라,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대와 현실을 관통하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 또 시대 이해 및 시대 비판의 단초를 제공하는 예술적,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그리고 예술‧미학적으로 비판적인 논의의 장을 제공한 중요한 대중문화의 공간이자, 예술적,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를 풍요롭게 해준 지적 저수지가 되어왔다. 그 저수지를 풍성하게 해준 많은 사상가 중에서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W. 아도르노는 단연 돋보이는 사상가라 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교류하면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현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상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영화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커다란 지적 자극을 주었던 학자라고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라는 저작은, 바로 이 두 사상가가 주었던 이러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을 영화 작품들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눈에 띄는 저작이다.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한국(<공동경비구영 JSA>, <택시운전사>), 중국((<여름궁전>), 대만(<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일본(<복수는 나의 것>) 등 다섯 편의 영화를 벤야민 및 아도르노의 사유와 함께 읽으면서, 이들 각각의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별인간들은 세계의 폭력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습이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나아가 두 사상가의 사유에 기대어, 영화 속 개별인간이 당하는 그러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구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두 저자가 예시하는 다섯 편의 영화는 제작 시기나 제작 국가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는 모두가 국가권력 및 사회체계가 개별인간을 어떻게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문병호가 서문에서 쓰고 있듯이, “세계가 진행된 역사는 세계가 인간에게 자행한 폭력의 역사”(서론, 24쪽)이기에, 그 속에서 개별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가질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벤야민의 ‘세계의 고통사’와 구제의 가능성)이나, 아도르노비판이론을 통한 ‘세계와 인간의 화해’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들 다섯 편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충격적이고 추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슬프고 추한 세계를 증언”(25쪽)하는지를 추적하여 제시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강점이 자리하는데, 저자들이 이미 서문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은 영화라는 예술 매체가 갖는 사유의 힘을 바로 벤야민과 아도르노 두 사상가의 개념과 함께 추출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라는 저작에서, 영화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하는 논증으로써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32쪽)이 아닌, “수수께끼와 같은 형상”(36쪽)에 담긴 알레고리를 통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는 예술적 힘을 가진 매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예술의 부정성”(아도르노)이나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가진 형상”과 관계하는 “알레고리”(벤야민)와 같은 개념을 통해서 문병호와 남승석은 영화라는 재현매체가 갖는 예술적 능력을 적절하게 설파한다고 할 것이다.

  문병호와 남승석의 신간에 담긴 영화 다섯 편이, – 물론 때로는 국가권력의 폭력이나 억압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도 하지만, – 기본적으로 소위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을 가진 모호한, 벤야민의 개념을 빌리자면 ‘알레고리적’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경우를 자주 보여주는 영화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에 예시하는 영화 속에 공히 담겨있는, 충격을 주고 추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각각의 영화적 “세계를 증언”하는 “수수께끼적인 성격”(13쪽)을 가진 영화가 되는지에 두 저자는 집중하면서, 바로 이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미지의 연속들에서 국가권력의 폭력, 즉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국가권력의 메커니즘”(33쪽)이자 “폭력을 자행하는 이념”(34쪽)을 추출하고, 이에 대한 통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두 저자가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오래전에 제작된 영화들이지만, 이들 영화는 21세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과 그 의미를 새로이 해주는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무력한 개별인간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인식‧해명‧비판할 수 있는 모멘트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37쪽)

  더불어서 이 책의 장점은 전공이 상이한 두 학자가 함께 협업하는 방식이다. 두 저자가 각각 개별 영화에 대한 입장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형식은 조금은 낯설고 투박해 보일 수도 있다. 먼저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남승석이 영화적 맥락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영화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그 영화적 의미를 제시한 이후에, 아도르노 전문가인 문병호의 글이 뒤따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개별 영화 작품에 대한 두 저자의 입장이 그저 병렬적으로 배치된 형식으로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외려 영화 전반에 대한 영화학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제시하고, 이어서 국가폭력과 개별인간의 고통이 갖는 사회적, 철학적 사유를 보다 깊이 있게 탐색하도록 해주면서, 독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영화가 시대의 예술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비판이론 연구가와 영화학자 사이의 융합연구서로서 이 책은 영화와 비판이론가의 사유를 넘나들 수 있는 징검다리이자 융합적 사유를 위한 적절한 시도로 긍정하게 되는 저작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2월 월례발표회 영상(일부)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2024년 2월 월례발표 일부 내용을 담았습니다.

2024년부터 한철연 월례회는 대면으로 진행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4년 2월 월례발표회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주제 : 재즈는 소수자 예술이다 – 질 들뢰즈의 소수 문학을 중심으로-
발표자 : 김범수(백석대학교)
토론자 :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유가연(서강대학교)
일시 : 2024년 2월 29일 오후 3시 – 5시
방식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출처: https://youtu.be/rUHr2WgqWo0?si=Sbjks4C0uiaMKdck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 제5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 행위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나라의 통치자가 철학자일 경우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철학자가 뭐길래 소크라테스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철학자란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그 진리가 다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형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형상이 일상인들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언급되면서 이른바 플라톤의 형상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6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라의 수호자이자 통치자로서도 적합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의 자질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철학자의 자질이 얼마나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6권 484a-487a]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곧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질을 주제로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이자 지도자ἡγεμονεύς로 지혜로운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법νόμος과 수행할 일들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그 능력의 기본 조건이 다름 아닌 ‘좋은 시력을 갖춘’ὀξὺ ὁρῶντα 감찰τηρεῖν 능력에 있음을 밝힌 후 그 감찰 능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484a-b)

* 수호자는 무릇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γνῶσις을 가지고 영혼ψυχῇ 안에 뚜렷한 본 παράδειγμα으로서 가장 참된 것τὸ ἀληθέστατον을 바라보고ἀποβλέποντες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있어야 한다.(484c)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한 이 땅에서의 법규τά νόμιμα를 설정τίθεσθαί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γραφεύς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τι τυφλῶν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덕ἀρετή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484d)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연적 성향φύσις 즉 자질을 갖추었기에 그러한 능력들을 두루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85a)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적 성향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항상 있으며ἀεὶ οὔσης 생성γένεσις과 소멸φθορά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μὴ πλανωμένης 저 존재οὐσία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움μαθήματός과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ἀεὶ ἐρῶσιν.(485b)

2) 그들은 그 모두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큰 부분이든 작은 부분이든 더 가치 있는 부분이든 덜 가치 있는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포기하지 않는다οὔτε ἀφίενται.

3) 그들은 거짓 없음ἀψεύδεια,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거짓τὸ ψεῦδος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 진리ἀλήθεια를 좋아한다στέργειν. 자연적 성향상 누군가에 대한 정욕을 가진ἐρωτικός 사람은 그 애인과 친족이고syggenes 그에게 속한oikeios 모든 것πᾶν을 반기는 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 한, 진리보다 지혜σοφίᾳ와 더 가까운 것은 없다.(485c) 그러므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사람은 어려서부터 곧장 모든 진리를 가능한 한 최대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

4) 그들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ἡδονή들을 추구하며 육체σῶμα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저버린다.(485d)

5) 그들은 분별σώφρων이 있어서 결코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돈과 많은 소비δαπάνη에 몰두σπουδάζειν하지 않는다.(485e)

6)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할ἐπορέξεσθαι 영혼에게 좀스러움 σμικρολογία이란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과 모든 시간χρόνος과 모든 존재οὐσία에 대해 관조θεωρία함을 갖춘 정신διανοίᾳ을 지닌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은 뭔가 대단한μέγας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θάνατος도 무서운δεῖνος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86a) 비겁하고δειλός 자유인답지 못한ἀνελευθερίος 자연적 성향은 참된 지혜·사랑과 상관이 없다. 이에 더해 그들은 규율이 있고(품행이 단정하고)κόσμιος 허풍ἀλαζών을 떨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계약을 파기하지δυσσύμβολος 않는 사람들이다.(486b)

7) 그들은 영혼이 정의롭고 온순하며ἥμερος 쉽게 배우고εὐμαθὴς 기억력μνημονικός이 좋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σῴζειν하는 사람이다.(486c-d)

8) 그들은 균형ἐμμετρία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본래적 성향τὸ αὐτοφυής상 균형 잡히고 우아한εὔχαρις 정신διάνοια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들을 있는 것 각각의 형상ἰδέα으로 이끌어 준다.(486d)

9) 있는ὄντος 것에 충분하게ἱκανῶς, 그리고 완전하게 τελέως 참여할μεταλήψεσθαι 영혼에게 이 각각의 것들은 필수적이며ἀναγκαίη 상호 연관된ἑπόμενα 것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기억력이 좋고νήμων 쉽게 배우며εὐμαθής 호방하고μεγαλοπρεπής 우아하며εὔχαρις 진리ἀληθεία, 정의δικαι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절제σωφροσύνη와 친구φίλος이자 친족적인συγγενής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육παιδείᾳ과 연륜ἡλικία에서 원숙해지면τελειωθεῖσι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ἐπιτρέπειν.(486e-48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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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a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국가> 논의의 근본 출발점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청(362-367)에 따라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플라톤은 이곳 말고도 이점을 <국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환기하고 있는데(420b-c, 427d, 434d-435a, 445a-b, 427b, 545d, 588b) 이것에 주목하여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하는 근본 관심사가 정치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행복한 삶과 관련한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dikaiosynē도 ‘정의’justice보다도 ‘올바름’righteousness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강해 서두에서 <국가>의 원제 politeia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시민적 삶, 폴리스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구분 자체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배타적 이기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의식이 확립된 근대 이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오도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청에 응하면서 곧바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개인을 국가로 확장하는 것도 플라톤 스스로 이미 politeia 즉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별개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플라톤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도 ‘정의롭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 특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 더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강해에서도 수시로 강조했듯이 20세기 일부 비평가들의 견해들처럼 플라톤이 개인의 삶을 국가주의에 복속시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에서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통치 목표는 그 대상인 시민들 모두의 행복이며, 개인들 또한 어떤 계층에 속하건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에 따른 직책을 기꺼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절제의 덕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시민들 각각의 행복을 담보하는 통치의 방식으로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 484c ‘수호자는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영혼 안에 뚜렷한 본으로서 가장 참된 것을 바라보고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구절은 우주를 제작하면서 오직 본으로서 원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주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는 통치자 즉 철인 통치자의 이상적 모델인 것이다. 이곳에서 본(paradeigma)은 <티마이오스>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내용적으로 공히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apoblepontes) 관찰하고(theomenoi) 조회한다(anapherontes)는 말은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장차 다루어질 변증술의 기초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직관 내지 관조(theoria)에 기초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자 왕을 다루는 제6권 500c, 500e-501c에서 여기서 언급된 본에 대한 관조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담(J. Adam)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아에 대한 철학자의 지식이 단순히 인식적 가치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으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이 땅에서의 법규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자가 이상적인 나라에서 태어났을 경우 그 나라는 이미 형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므로 그는 단지 이미 확립된 법규를 수호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철학자들은 현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바람직한 법률을 세우고 관철하려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화가(grapheus)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화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가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음악과 조각 등 조화미와 관련한 예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곳과 10권에서 화가에 대한 비판은 화가가 형상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대상을 또다시 모상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형상적 앎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 484d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empeiria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 ‘경험’의 그리스 원어 empeiria는 영어로 ‘experience’, acquaintace with’, ‘practice, without knowledge of principles’의 뜻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도 그 말을 사전적 의미와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 ‘~을 접해 본 적이 있음’이라는 경험 일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원리적 추론과 지식이 아닌 ‘감각적 경험이나 지각’으로 좁혀 사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익숙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467d, 529e, 601c)가 있다. <국가>에서 첫째의 경우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584e)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지식이나 감각과 상관없이 ‘접해 보았음’ 일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로서, 위의 용례 외에 ‘앎이나 이득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582a), ‘문답하는 것에 대한 무경험’(apeiria)(487b), ‘진리에 대한 무체험’(apeiros)(519b), ‘교과들을 경험한 자’(533a), ‘사려분별과 덕에 대한 경험’(585e) 등의 용례가 있다. 그리고 셋째의 경우는 ‘경험과 연령에 있어서(467d),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tis emperos)(529e), ‘사용함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자’(601c) 등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례로서 대부분 원리적 추론, 실재나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이 아닌 지식을 이용함으로써’(409c), ‘권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422c), ‘전투 관련 경험과 관찰에 의해서’(467a), ‘이들이 (앎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539e) 등의 용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484d)라는 이곳의 표현 또한 이 둘째 용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경험’은 원리적 사고로서 ‘사려분별(pronesis) 또는 이성적 추론’(logos)(582a)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것은 설사 그 경험이 수없이 축적되더라도 진정한 앎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의 단계상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비록 경험이 진정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앞서 앎보다 믿음이 지식의 단계에서 저급한 수준의 것이지만 믿음이 실제 생활 영역에서 기술적 훈련을 통해 학술의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전쟁 전체에 대한 정책적 결정과 전략에 대한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투 역량의 향상을 위한 지휘 및 전투 등 전쟁 실무 능력의 향상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실무 역량의 향상은 실제 전투 경험을 포함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반복적 관찰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을 통해 획득되는 지성적 앎의 능력과 더불어 반복적인 연습과 체험을 통해 몸에 밸 정도로 숙달된 신체 능력이자 실천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체육을 통한 끊임없는 신체 단련은 물론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전쟁 지휘 및 관직의 수행 등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그것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치자로 뽑아 최고의 철학 교육으로서 변증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지성적 앎은 물론이고 통치와 관련한 어떠한 경험도 쌓지 않은 자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졸지에 최고 통치자가 되어 분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실로 통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근세 합리론과 경험론(empiricism)을 이야기할 때 ‘경험’의 의미도 이 두 번째 용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경험론이 말하는 지식은 경험적 감각자료들의 귀납에 의해 개념적 일반지의 지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귀납지가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전제로 성립하는 한, 플라톤이 이미 포착하고 있듯이 그것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개연지일 뿐이다. 플라톤에게 보편지는 형상적 앎 또는 그에 준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형상적 앎과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 모두 일정 수준에서 모두 각기 인간 삶의 보전에 기여하는 한, 플라톤에게 있어 그 각각은 비록 인식론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앎으로서 고유성과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논리적 추론 차원을 넘어선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지로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칸트가 근대 과학지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학지를 ‘인간 나름의 해석’ 즉 지각에 대한 오성의 구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왜 가설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해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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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직위로서 수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374d) 수호자(phylax)는 나중(414b)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taleis)로서 통치자들(hoi archontes)과 그들의 보조자들(epikouroi) 내지 협력자들(boētoi)로서 전사들(stratiōtas)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수호자에서 통치자로 좁혀졌다가 이곳에서부터 그 통치자가 다시 철인 통치자로 더욱 좁혀진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성향이나 자질도 처음 포괄적으로 제시된 이후 점차로 보다 구체적인 자질들이 추가되면서 이곳에서 철학자의 자질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주제 상으로는 철학자가 지닌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철학자들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 만큼 내용적으로는 철학자의 자질이면서도 동시에 통치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장차 철인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고 있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지금까지 언급된 수호자와 통치자들의 자연적 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들이 특히 추가되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호자의 성향을 다룰 때(375a-376c)와 달리 지혜의 친족이자 진리로서 ‘형상’(idea)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용기와 더불어 배움과 지혜가 주요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배움과 지혜에는 보조자들이 갖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임에 비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들의 배움은 ‘존재’(ousia)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움’이고(485b) 지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우아한 정신으로 참된 앎 곧 ‘형상’(idea)에 다가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86d) 그리고 보조자들이 아닌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을 언급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dogma)과 소신(doxa)이 추가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412e) 이곳에서처럼 형상에로 이끌린다거나 그것을 열망했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수호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도덕과 지식이 하나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지라도 기본적으로 도덕의 고양에 크게 방점이 주어져 언급되었다면 지금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고양을 통해 존재 내지 형상에로 다가가는 것에(486d-e) 크게 방점이 찍혀 있다.(J. Adam 497c note 참고)

*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 하나하나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위 요약문 1)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호자의 자질에 더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서 가장 먼저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존재ousia’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철인 통치의 근본 토대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에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함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로서 존재를 향한 지향이 결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과 열정을 수반하면서 늘 항상성을 갖고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위 요약문 2) : 철학적 지향이 그러하듯 철학 통치 또한 총체성과 전면성을 가지며 어떠한 것도 따로 차별해서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철인 통치자라고 한다면 특정 계층, 특정 대상, 특정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크건 작건, 가치가 더 있건 덜 있건 간에 상관없이 통치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 문제 해결에 다가서며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 문제의식의 전면성 내지 총체성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있어 철학 통치자에게 불타협적 끈기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위 요약문 3) : ‘어떤 식으로도 거짓(to pseudos)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라는 말은 플라톤이 특수한 조건에서 ‘통치자의 거짓말’이 옹호될 수 있다는 내용(414b 등)과 상충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플라톤적 의미에서 ‘진리를 향한 영혼의 결여에서 나오는 무지’를 의미한다. 다만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의 앎을 가진 통치자가 자신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분명하게 담보하는 전제하에서 거짓말을 허용한다.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정욕을 가진 사람이 애인을 대하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반기는 사람들이므로 결코 진실을 결여한 거짓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위 요약문 4), 5) : 철학자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욕구의 물길이 크게 뚫린 그만큼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 쪽으로 깊숙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깊숙이 가 있는 그만큼 분별력 또한 뚜렷해져 육체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은 아예 생겨날 여지가 없고 그에 따라 감각적 향락을 위한 소비도 없다.

위 요약문 6) : 철학자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하며 그에 따라 전혀 좀스럽지 않고 반대로 호방하게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관조하는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다. 중국 송대 지식인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에서 노래하듯 물여아개무진야이우하선호(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세상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거늘 달리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죽음도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행위에서 비겁할 이유가 없다. 공자가 70세에 이른 사람의 경지를 일컬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철학자는 자유인답게 늘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행위를 해도 지혜사랑 안에 있으므로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풍도 떨지 않으며 매사에 있어 사회적 연대나 계약에 어긋남이 없다.

위 요약문 7) : 여기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정의로움과 온순함에 더해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이 강조되고 있다. 1)에서 6)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일정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은 그것들에 비해 다분히 천부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 통치자는 그 스스로도 이미 건국신화를 통해 황금족으로 따로 구분했듯이(415b) 자격에서부터 원천적으로 소수 엘리트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위 요약문 8), 9) :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균형과 동족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 통치자란 위와 같은 성향들을 영혼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시켜가면서 균형 잡히고 우아한 정신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존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통치의 궁극적 이념으로서 형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호방하고 우아하며 진리 정의, 용기, 절제와 친구이자 친족인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은 통치자들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육과 연륜에서 원숙해지면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이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은 하나같이 도덕과 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마키아벨리즘과 철저히 대척적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것은 당대의 참주정의 목표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설사 그러한 통속적 이해와 달리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의도한 그대로 ‘수단의 도덕적 선악과 관계없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에 있어 그 유용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러한 정치이념이 말 그대로 과연 ‘정치 현실에서 국익을 위한 공적 권력의 성공적인 유지와 관리를 담보’해왔는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근대 이후 개인적인 관계에서건 계층 간 나라 간 관계에서건 배타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냉혹한 현실에서 그것은 나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 현실에 대한 단기적 진단에 토대를 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러한 처방은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보다는 그 질곡을 더욱 부채질하고 강화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배타적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토대를 둔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불평등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원천적으로 국제간 평화 공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 나라이건 개인이건 ‘신의와 약속’은 자기 보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로지 살길은 각자도생하며 각자 의심의 눈을 부릅뜨고 배타적 경쟁력을 갖는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을 견인한 산업혁명은 오늘날 막대한 자본력과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개인 간 계층 간 나라 간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를 마치 문명 발전이 수반하는 불가피한 실재로 정당화하면서 나날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기세를 떨쳐가고 있다. 그 최전선에 도구적 지식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통속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강대한 나라에게는 타국에 대한 패권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어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반대로 약소국에서는 정치권력의 폭압성과 기득권 세력의 피폐성을 정당화하고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열패성을 마치 숙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생태적 위기는 강대국 약소국을 막론하고 세계 시민들 모두를 앞이 빤히 보일 정도의 문명적 재앙으로 점점 더 몰아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영역에서도 미국의 트럼프 등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서구에서 쥐꼬리만큼이나마 연명하고 있었던 톨레랑스도 이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윤석열이란 무도한 자가 검찰, 언론, 종교 등 강고한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형식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통치 권력을 장악한 후 하루가 멀게 반민중적 횡포를 일삼고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이끈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듯 24년 3월 현재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피폐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 진보의 전망은 물질문명에 눈이 멀어 문명적 재앙을 선도하는 초국적 자본과 각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갖는 위세 등등함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 민초들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시민 모두가 담론 생산자가 되어 비판적 담론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직화해가면서 그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더욱 넓게 퍼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한 지식인들의 낭만적 이상론으로 불리면서 그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여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진리를 향해 터져 나오는 욕구의 물길처럼 이상을 향한 인간의 정신과 의지가 내뿜는 힘은 결코 현실에 압도되거나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건 현실 분석의 영역에서건 마키아벨리즘의 냉철함과 영악함을 크게 압도하는 진보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토대로 철저함과 진지함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키워가면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견인해 나갈 것이다. 정치의 지성화를 본질로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분명 원리적 사고의 측면에서 그러한 진보적 담론 형성과 투쟁에 일조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발전과 변화를 꿈꾸며 고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시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란 게 결코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상수도 진실도 아니라는 것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 사상사의 전체 흐름이 보여주듯이 현대 물질문명 각 영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별적인 분석과 미시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모순을 딛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면서 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거대 담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매몰된 현금의 철학적 정황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생태적 연대와 소통을 기반으로 세계관 차원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는 이 시대의 한국 철학자 이규성(李圭成, 1952-2021)의 철학이 필자에게 빛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자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마치 철학에 대한 현대인의 의구심을 선구적으로 궤 뚫어 보기나 한 듯이 이내 아데이만토스의 반박에 부딪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그와 같이 주장을 해도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설사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철학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러한 자질들을 나라의 공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이들이 되거나 반대로 그 소질들을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그러한 지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철학자가 그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유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임을 철저히 밝혀내야 철학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온전하게 바로잡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

다음 강해 B. 3. 철학이 비난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8e)

2) 철학자들이 스스로 타락하는 이유(488e-495b)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 2023. 11.) 서평 – 이수영 [철학자의 서재]

관찰자들의 다중우주

서평 |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갈무리, 2023

 

이수영(미술작가) 2024.1.31.

 

뉴런과 시냅스에 대한 설명이 전체주의와 아나키즘으로 연결된다. 북방산개구리의 시신경이 기계와 연결되고, 객관적인 앎의 불가능성이 윤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런 낯선 연결들로 궁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체계란 무엇인가’, ‘생명체는 어떻게 인지하는가’이다. 생물학 책에 ‘인식, 객관적 진리, 전체주의, 윤리’가 등장한다. 서문을 쓴 스태포드 비어의 말처럼 이 책은 학제 간 연구가 아니라 여러 학문을 초월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서관에 속하는 것이다(172).”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에는 「인지생물학」(마뚜라나, 1970)과 「자기생성과 인지」(마뚜라나, 바렐라, 1973)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인지생물학」은 마뚜라나 전 생애의 모든 연구와 저작의 기원이자 전주곡이다. 그 다음의 저서들은 전개와 변주이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사유를 이해하기에는 『앎의 나무』(마뚜라나, 바렐라,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있음에서 함으로』(마뚜라나,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등이 더 편하다. 하지만 마뚜라나 초기 글에는 낯설어서 기이한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 낯설고 기이한 개념은 ‘관찰자’였다. 마뚜라나는 살아있는 체계를 ‘관찰자’라고 부른다.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이다. 고양이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새에 부딪치는 광자로 활성화된 자신의 시신경들의 상호작용을 바라볼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뉴런들의 상호작용 체계가 독립된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관찰자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본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바깥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고양이의 뉴런과 나뭇가지 위의 새,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마뚜라나·바렐라에게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 ‘안과 바깥’이라는 개념이 역설로 느껴진다면, 주체와 객체로 세상을 가르고 저 바깥 객체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알고자 몸부림치는 이원론에 너무 오래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는 말한다. “말해진 것은 모두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62).” 객관적 실체는 없다. 객관적 앎은 없다.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대화는 객관적 정보의 공유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는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듣는 사람이 자기 인지영역에서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이다(112).”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가 투명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브루노 라뚜르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번역하듯이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외부를 번역하는 능력이다. 외부가 투명하게 내부로 드리우고 내 앎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마뚜라나의 관찰자 개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혹은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자기 고유의 재귀적 상호작용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이다. 즉 마뚜라나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자기생성(Autopoiesis)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존재자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재규어도 아메바도 꿀벌집단도 어떤 도시나 국가도 관찰자이다. 아메바, 재규어, 마을 공동체, 도시와 국가 모두가 동등한 관찰자라는 말은 평평한 존재자들의 민주주의를 이끈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과 레비 브라이언트를 떠올리게 한다. 신체가 다르면 인지가 다르다는 마뚜라나·바렐라의 말은 에두아르두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적 다(多)자연주의도 떠올리게 한다. 까스뚜르의 관점주의를 마뚜라나와 연결시켜 본다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에 따라 세계를 사유한다. 재규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다르다. 폭력에 시달려 온 인간과 폭력을 일삼아 온 인간의 자기생성 체계와 우주는 다르다. 같은 하늘 아래 생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이고 있는 하늘이 다르고 신체가 다르다. 자기생성 체계의 차이들만큼 수많은 자연이 존재한다.

계통적이고 개체적인 반복적 경험으로 자기생성 체계의 구조와 구성은 변하지만, 자신을 자신이게끔 생산해내는 체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이 자기생성 단위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아있는 체계가 ‘기계’라고 주장한다(193).” 살아있음은 어떤 정신이나 정령이 깃든 것이 아니라 물리적 동력을 가진 단위체이다. 이 ‘기계’ 개념은 펠릭스 과타리의 기계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기계는 과타리의 기계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연결하며 “자기 자신을 상수로 유지하며 변주한다(197).” 기계는 기계의 구성요소의 속성과는 독립적이다.

살아있는 체계는 환경과의 상호소통으로 자신을 생산한다. 마뚜라나가 인간의 사회체계를 윤리와 연결시키는 대목은 니클라스 루만을 떠올리게 한다. 루만은 마뚜라나의 자기생성 체계 이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체계이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속한 더 큰 자기생성 체계인 국가가 자신의 자기생성과 상호체계를 배제하거나 제약한다면 전체주의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마치 자신이 어떤 외부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관찰자를 위해 그리고 관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53)”를 마뚜라나는 아나키스트 사회라 부른다.

새로운 도서관에 꽂힌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책은 분류보다는 연결과 종합을 따르고 있다. 페루난두 페소아에게 수많은 이명(異名)의 페소아들이 있듯이, 이 글에도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적소(適所)’로 삼은 많은 이명들이 함께 나타났다. 내게는 마셜 맥루언,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레비 브라이언트, 에두아르두 까스뜨루, 펠릭스 과타리, 니클라스 루만이 그들이었다. “살아있는 체계는 주위환경의 일부, 즉 적소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적소와 독립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64).”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관찰자들이 마뚜라나·바렐라와를 적소로 삼기를 바란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형상적 앎과 믿음

 

[476e-480a]

*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전자의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아는 것γιγνώσκειν이 아니고 그저 믿는 것δοξάζειν일 뿐”이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이 참τὸ ἀληθές이 아니라고 대드는 경우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할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은 누구도 알 수는 없으므로 그 사람 역시 ‘무엇인가를 아는γιγνώσκει τὶ 사람’이라는 동의를 받은 다음, 그 사람에게 그가 알고 있는 그 뭔가가 ‘있는 것’ὄν인지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477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다름 아니라 ‘있는 것’ὄν도 ‘있지 않은 것’μὴ ὄν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임을 밝힌 후 그 사람의 사고 대상이 그것인 한 그의 사고는 믿음δόξα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1) ‘완전하게 있는 것’τὸ παντελῶς ὂν은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παντελῶς γνωστόν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ὴ ὂν μηδαμῇ 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πάντῃ ἄγνωστον.

2) 그런데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상태’τι οὕτως ἔχει ὡς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있는 것’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과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ηδαμῇ ὄντος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7a)

3) ‘앎’γνῶσις은 ‘있는 것’을 대상으로ἐπ᾽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무지’ἀγνωσία는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앎ἐπιστήμη과 무지ἀγνοία 사이의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δόξα이며 그것은 앎과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이다. 요컨대 믿음δόξα과 앎ἐπιστήμη은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한다. (477a-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무지와 믿음을 그것들 각각이 갖는 대상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앎과 믿음 모두가 왜 능력이고 그 능력이 어떻게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 능력이란 있는 것들의 한 부류γένος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 능력들은 ‘같은 것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을 같은 능력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을 다른 능력이라고 부른다. 즉 능력은 대상으로 하는 것과 ‘해내는 일’ὃ ἀπεργάζεται이 능력마다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ὄψις과 청각ἀκοή은 모두 능력에 속하지만, 시각은 색깔χροάζω이나 모양σχῆμα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고 청각은 그와 달리 들리는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다.(477c)

3) 앎ἐπιστήμη은 일종의 능력으로서 모든 능력 중 가장 강력한ἐρρωμενεστάτην 것이다. 믿음도 능력이다. 그러나 앎은 오류 불가능한 것τό ἀναμάρτητον 이고 믿음은 오류 불가능하지 않은 것τό μὴ ἀναμάρτητον이다. (477d)

4) 앎과 믿음 각각은 본디 서로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ἕτερον을 대상으로 한다. 앎은 본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믿는 것은 앎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477e-478a) 요컨대 앎과 믿음이 둘 다 능력이되 서로 다른 능력인 한, 앎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이 같은 것일 수 없다.(47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믿음이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 별개의 능력임을 분명히 한 후에 위의 논의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그 앎의 대상이 ‘있는 것’임에 비교하여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믿음은 앎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중간의 것임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한번 재확인한다.

1) 앎의 대상γνωστόν은 있는 것τὸ ὂν이고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가지는 한, 믿음의 대상δοξαστὸν은 ‘어떤 하나의 것ἕν τι’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것’은 ‘어떤 것도 아닌 것’μηδὲν 즉 ‘있지 않은 것’τὸ μὴ ὄν이 아니다.

2) ‘있지 않은 것’에는 믿음이 아니라 ‘무지’ἄγνοια가 할당되고 ‘있는 것’에는 ‘앎’γνῶσις이 할당된다.ἀποδίδωμι(478c) 그런데 믿음은 ‘있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을 믿는 것도 아니므로 믿음은 무지도 앎도 아니다.

3) 그것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들 바깥, 즉 명확함σαφήνεια에서 앎을 넘어서거나 불명확함ἀσαφείᾳ에서 무지를 넘어서는ὑπερβαίνουσα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믿음은 앎보다는 더 어둡고σκοτωδέστερον 무지보다는 더 밝은 φανότερον 것 즉 그 둘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8c)

4) 믿음이 앎도 무지도 아닌, 그 사이의 것이듯이 믿음의 대상 또한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것τι οἷον ἅμα ὄν τε καὶ μὴ ὄν으로서 ‘순수하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것이다.(478d) 양 끝에 있는 것들에게는 양 끝에 있는 것들을 할당하고, 사이에 있는 것들에는 사이에 있는 것들을 할당해야 한다.(478e)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언급한 후 처음에 제기되었던 물음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그리고 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즉 철학자인지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1)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 자체,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의 형상ἰδέα이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정의로운 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느 면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느 면에서 추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479a) 큰 것들과 작은 것들, 가벼운 것들과 무거운 것들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들은 모두 항상 반대적인 것ἢ τἀναντία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한다.(479b)

2) 이 많은 것들(ta polla) 각각은 잔치 자리ἑστίασις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해서, 이것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또 둘 다이거나 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을 놓아둘 자리는 있음과 있지 않음의 중간이다. 이것들은 더 있지 않음과 관련해서 있지 않은 것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더 있음과 관련해서 있는 것보다 더 밝은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479c) 요컨대 아름다움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πολλὰ νόμιμα은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κυλινδεῖται. 그것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고 중간에서 떠도는 것으로서 중간의 능력으로 포착되는 것이다.(479d)

3)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움 자체는 보지도 못하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믿으면서δοξάζειν 그들이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각 그 자체의 것들’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ὄντα 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한다.γιγνώσκειν 이들은 앎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을 반기고 사랑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을 반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소리나 색깔이나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구경하지만 아름다움 자체를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479e-480a)

4) 그러므로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ἕκαστον τὸ ὂν를 반기는ἀσπαζομένους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φιλόδοξος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φιλόσοφος라고 불러야 한다.(48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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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논의에 따라 철학자와 감각으로 구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앞의 강해에서 살폈듯이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는 곧 형상(形相)에 대한 앎이다. 요컨대 진정한 앎의 대상은 형상이고 형상은 곧 ‘있는 것’, ‘(완전하게) 순수하게 있는 것’,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 ‘오류 불가능한 것’,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 상태는 진리로서 앎(epistēmē)이 아니라 ‘믿음’에 불과하다. 사실 믿음의 그리스 원어 doxa는 기본적으로 ‘(옳건 그르건) 일상인들이 수행하는 모든 생각과 의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텍스트 곳곳에서 doxa를 존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인식 차원에서 진정한 앎과 철저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은 종종 ‘억견’이나 ‘상상’ 등의 말로 옮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이 사용하고 있는 앎과 믿음이라는 말의 이러한 용례만 보더라도 철학사에서 왜 그를 두고 이른바 예지계와 현상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두 세계 이론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선구라고 평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강해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그와 같은 세계관을 내 세운 근본적인 동기가 현실 세계의 다(多)와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 구제론에 있음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말들의 용례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또한 근본적으로 그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고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예지계와 현상계, 앎과 믿음을 구분했다는 것 이전에 왜 플라톤은 그 예지계를 구성하는 형상들을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상정했을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엘레아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 다의 세계로서 자연세계와 현실 세계의 존재성을 철학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형상들의 존재는 그것의 모상(模像)으로서 다의 세계의 존재성을 뒷받침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변화무쌍한 다의 세계의 운동성까지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다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물질적 운동성도 부동의 형상과 더불어 우주 발생의 시원적 원인들의 하나로 상정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배경에는 이처럼 다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로서 자연 및 현실 세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동기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와 운동을 자연세계의 시원적 토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의 전통적 세계관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은 종축에서 보면 위와 아래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이원론이지만 횡축에서 보면 마치 그리스의 신화가 그러하듯이 여럿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다원론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세계관을 두고 이원론인가 다원론인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플라톤의 가장 최종적이고 원숙한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는 <티마이오스>를 보면 우주 생성의 세 가지 근본 원인(aitia)들로서 형상인 원상(paradeigma)과 수용자이자 보조원인(synaitia)인 질료적 공간(chora), 그리고 제작자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제시되고 있는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점에 주목하여 플라톤의 세계관을 3원론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플라톤에게서 ‘좋음의 이데아’가 최상이자 유일의 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자나 교부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아예 일원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런데 플라톤의 현실구제론이 단순히 자연 세계의 존재성과 운동성만 해명하는 것이라면 원자론이 이룩한 철학적 의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원자론은 원자들과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허공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성과 운동성을 함께 해명하였지만, 영원히 운동하면서도 조화와 질서라는 합목적적 가치를 함께 보전하고 있는 그리스적 우주, 즉 코스모스를 온전히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형상계와 운동하는 현상계를 따로 구분하되 그 현상계가 형상계와 완전히 분리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분유(分有, metechein)와 모방의 방식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물질적 현상계는 형상들의 세계인 예지계의 모상으로서 예지계가 지니는 존재성을 일정 부분 분유함으로써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방의 방식으로나마 조화와 질서를 갖춘 코스모스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현상계는 형상계와 비교하여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면서 존재성이나 앎의 근거가 크게 부족한 세계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의 분유치로서 일정한 존재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현상계의 물질적 운동성에 역행하는 영혼의 설득(peithos)(<티마이오스> 48a, c, 51e, 70b)을 받아들여 최대한 형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토대 즉 형상과 닮을 가능성도 함께 갖춘 세계인 것이다.

* 이곳 논의 부분에서 플라톤이 믿음의 대상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 ‘항상 반대적인 것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하는 것’,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 등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근본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으로서 물질적 타자성(heteron)에 의해 언제나 생성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무한정자(apeiron)’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플라톤에게 현상계로서 현실은 극단적 일원론자들에 의해 백안시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수많은 여러 것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바로 그러한 무한정자에 분유의 형식으로 존재성도 함께 부여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자기동일성의 차원까지 상승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를 함께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엘레아주의의 극단적 이분법에 의해 촉발된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가능적 토대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우리나라 서양고대철학의 태두 박홍규(1919-1994)는 위와 같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존재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즉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전집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을 꼽자면 수도 없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의 논문 <유티데모스편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지상세계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엘레아주의에 기초한 이분법적 독단이 어떻게 현실 허무주의를 조장하는지를 그 자신의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기초로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의 논리를 토대로 모든 현실의 다와 운동을 무로 돌리지만 무한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서 다양한 측면과 정도 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배움을 통해 일정한 변화 즉 교정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즉 존재와 무 사이의 것으로서 무한정자는 타자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플라톤에게 현실 허무주의의 타파를 위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에서 제시된 믿음의 대상이 갖는 내적 무한정성을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그저 해체의 원인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부분의 논의는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믿음과 그 대상을 고찰하되, 그것의 한계는 물론 그 반대로 최대한 형상적 앎에 근접할 수 있는 내적 가능성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형상에 대한 진정한 앎에 대한 인식이 변증술을 익힌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믿음의 영역은 현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일상의 장인(demiourgos)들이 수행하는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technai)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실제적 앎으로서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 논의에서는 인식과 관련하여 앎과 믿음이 아주 배타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선분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 앎과 믿음 사이에 추론적 사고의 단계(dianoia)가 자리하는데 이 추론적 사고 단계마저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형상적 앎 보다는 믿음 쪽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수학적 앎은 일단 자체성(kath’ hauto)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형상적 앎(epistēmē)이 아니고  이곳 논의에서 보듯이  형상적 앎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예외없이 모두 믿음(doxa)으로 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dianoia)은 믿음과도 분명 구분되지만 최소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구분의 정도에 있어 그것과 형상 사이의 거리는 그것과 개별 학술적 대상 사이의 거리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전자의 거리는 초월적이지만 후자는 최소한 근접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믿음은 지적 훈련을 통해  일반 기술 내지 학술지를 거쳐 점차 경험적 물질적 연장성을 줄여가는 그 만큼 자기동일성(tauton)을 담보하는 추론적 사고 상태(dianoia)에까지 최대한 근접할 수 있지만,  형상적 앎은 고도의 철학적 훈련을 통해 변증술을 갖춘 아주 소수의 철학자들 아닌 한 인식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믿음의 원어인 doxa를 우리말로 단순히 ‘억견’이나 ‘억측’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믿음은 아래로는 환상이나 상상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믿음을 인식 수준에서 점차 상승하는 쪽으로 보면 그것은 이른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과 ‘대중적 덕’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또  개별 기술지(technai)를 비롯해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학이나 기하학은 비감각적 지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의 측면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간적 연장성을 수반하는 도형들의 사용은 물론 별도의 증명 없이  수와 공리의 존재를  전제(hypothesis)하고 들어 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떠한 연장성도 전제도 갖고 있지 않은 무전제의 원리(archē anypothtos)인 순전한 형상지로서 철학과는 원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510b)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학적 대상은 형상적 앎의 대상에 닿아 있지만 마치 당구공들이 서로 닿아 있어도 서로가 분리되어 있듯이 형상적 앎의 대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아무려나 이런 의미에서도 현상계의 믿음의 대상들과 믿음이 갖는 가치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이 그렇듯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최상의 수준에까지 고양될 경우 우리 모두가 추론과 정합을 통해 정립하고 있는 실질적인 개별과학의 진리성으로서 자기동일성까지 확립 가능한 일종의 일반 법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 동일성은 형상의 자체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동일성에 기초한 개별학술들 내지 개별 과학은 본질적으로 개연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20세기가 낳은 걸출한 이론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하이젠베르크(W. K. Heigenwerg)가 제기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려나 앎과 추론적 사고, 믿음과 관련해서는 학자들 간 해석 상 많은 견해차와 논란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루면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  이렇듯 믿음은 위쪽으로 비록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추론과 정합적 사고를  포함하는 일반 기술지에서 시작하여  최상의 수준에서는 수학, 기하학의 추론적 사유에까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을 제외한 상투적 믿음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억측이나 환상에 불과한 상상에까지도 추락할 수 있다. 즉 믿음의 대상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 믿음이 본질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의 측면을 갖는 가능성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중 없는 것 쪽으로 해체될 가능성의 경우는 존재 쪽으로의 극복과 상승의 측면에서 보면 내용적으로 우연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무한정자는 그 자체 맴돌면서 그 우연성을 어떻게든 증대하는 게 필연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티마이오스>에서는 그것을 ‘방황하는 원인(planōmenē aitia)’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필연(ananch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티마이오스> 48a) 이런 점에서 형성과 해체 양쪽으로 열려 있는 무한정자의 내적 가능성은 양상론적으로 능력(dynamis)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무한정자의 영역에서는 능력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앎과 더불어 믿음을 능력으로 언급하고 그 능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형상적 앎(epistēmē)은 한결 같이 그 자체적인 것으로 일자적으로 존재하지만, 믿음은 앎과 무지의 중간자로서 앎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능력과 양상에 따라 위로는 추론적 사고(dianoia)에 까지 상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억측이나 환상(eikasia)의 수준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이러한 앎과 믿음이라는 능력의 주체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영혼(psychē)이다. 즉 앎과 믿음은 영혼의 능력이되 그것이 영혼의 능력 안에서 앎과 믿음으로 갈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영혼의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무한정자의 타자성이 비록 운동과 변화를 담보하지만, 그 힘을 설득하여 다를 해체하는 쪽이 아니라 보전하는 쪽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능동적 힘, 즉 포이운(poioūn)으로서 능력의 지향 방향 즉 해체를 거슬러 가장 완전하게 복구해야 할 보존의 근본 지향 내지 목표는 다름 아닌 형상(eidos)이다. 그러나 이것을 플라톤 형상론이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 근거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플라톤에게 목적은 능력에 따라 다다를 수도 있고 다다르지 못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결정론적이라면 플라톤의 목적은 비결정론적인 것으로서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의 영역에서 확립 가능한 자기동일성 또한 영혼의 힘을 토대로 무한정성의 지배를 거슬러 올라 형상적 앎에 근접했을 경우 획득 가능한 최상 수준의 인식 값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질적 타자성(heteron)도 포함되어 있다. 물질적 타자성은 영혼의 힘을 거부하고 무한정성 고유의 성질이 극도로 발현된 상태 즉 언제나 무로 향하는 해체의 원천이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앎에로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타자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우연성과 해체성이 증가한다. 이것들을 존재론적 위계로 구분해 본다면 일자적 자체성이 확보된 형상이 가장 우위에 있고 그다음이 능동자 포이운(poioun)으로서 영혼 그리고 가장 아래에 무한정자가 위치하지만, 가능성의 토대가 무한정자인 한, 믿음 영역 또한 상승과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분투 어린 삶의 영역으로서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철학함의 실질적인 현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물론 그러한 분투를 통한 영혼의 내적 고양 단계에서 그야말로 철학적 변증술을 통해 형상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수준까지 고양되지 않을 경우, 사고 상태는 그저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형상적 앎과 믿음은 모두 영혼 능력의 연속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형상적 앎은 그 영혼 능력의 고양을 통해 믿음의 영역을 초월해야 획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형상적 앎에 이른 철학자가 믿음의 영역 즉 현실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떠날 수도 없다. 다만 철학자는 믿음이 갖는 본질적 성격을 인지한 상태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 믿음을 앎으로 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를 토대로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에 따라 고통스러운 등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것이다.

* 변증술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철학자가 믿음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의 영역에 왜 실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과연 철학자의 근본 욕망으로서 관조적 본성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될수록 플라톤 철학의 실천철학적 성격은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제시된 진리를 관조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보통 사람들의 구별, 형상적 앎과 믿음의 구별 즉 형상이론의 근본 틀은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 원칙과 시작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점으로 이 이후에 제시되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원칙을 토대로 철학의 기본 구상들을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해간다. 다소 거칠게 그 내용들의 성격을 미리 요약하자면 태양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철학 통치자가 종국적으로 지향해야할 총체적인 가치와 합목적성을 보여주며, 선분의 비유는 이곳에서 논의한 앎과 믿음의 세분화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의 인식론적 위계 내지 기본틀을 보여주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의 위계에 상응하는 인식과 실천의 단계들을 통해 현실 영역의 실상은 물론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분투의 여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형상적 앎을 이룩한 철학자가 왜 종국적으로 동굴 속 현실의 세계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유들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종착점이 왜 현실의 구제를 위한 실천의 철학인지를 하나같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philosophos)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곳 논의의 결론(480a)이자 제5권의 마지막 문구는 차후에 펼쳐질 논의를 통해 여전히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선전포고이자 차후의 구상을 예고하는 선제적 선언인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질 제6권에서 위와 같은 철학자들의 기본 성향과 자질들을 다시 한번 정리 제시한 다음, 승리의 요건으로서 지피지기가 중요하듯 그러한 철학자들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현실의 실태들과 그 이유들을 분석적으로 비판한다.

* 끝으로 이곳 논의에서 언급된 무지agnōsis에 상응하는 대상은 ‘있지 않은 것to mē on’이지만 실제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설사 억측을 밥 먹듯 일삼고 있는 자일지라도 믿음의 영역에 있는 한,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일정 부분 무지한 사람은 있어도 전 영역에서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앎을 획득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모두가 서로 일정 부분 옳고 그른 생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된 한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선 안 된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주의의 이분법을 토대로 그 다양한 측면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도하는 방식으로 모든 현실 판단에 대한 회의를 부추겼다. 그러나 현실 판단 모두가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의 영역은 수많은 대립적인 것들과 측면들이 혼재하는 영역으로 영혼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보다 ‘앎’에 가까운 믿음도 있고 ‘무지’에 가까운 믿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보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철학함의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영혼을 고양하는 철학적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그러므로 철학 공부는 개인으로서건 시민으로서건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굳이 현실에서 가장 많은 측면에서 가장 무지한 자를 꼽으라면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통치 영역에서 자신의 무지조차 모른 채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반지성적 전횡을 일삼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러한 무지한 통치자야말로 인간 삶에 가장 위해를 가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가장 비판하고 지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직업으로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최소한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통치의 종식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책무가 아닐 수 없다. 2024년 2월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 가히 그 책무는 너무나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구된다. “윤석렬은 탄핵되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외침과 저항 또한 그 당연한 책무의 하나이다.

* 이곳 논의는 형상론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로서 <국가>에서 처음 제시된 곳이기는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말고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이곳에서는 형상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하고 앞으로 형상론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다른 대화편의 내용도 함께 연관해 가면서 추가로 논의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서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가 제시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플라톤의 대화편 형상(이데아)론 관련 전거들

<라케스> 191e, 192a

<에우튀프론> 54d

<고르기아스> 467e, 506d

<대히피아스> 289d, 292a, 293e, 294a, 298b, 300a, 303a

<뤼시스> 217b, d

<에우튀데모스> 280b, 301a

<메논> 72c, 72d. 72e

<크라튈로스> 389b, 390a

<향연> 204c, 211b

<파이돈> 74d, 75b, 78d, 100b, 103e, 104b, d, e, 105a

<국가> 402c, 434d, e, 435a, b, c, 476a, d, 500e, 510b, d, e, 511a

<파이드로스> 237d, 250a, b, 265e

<파르메니데스> 149e, 150a, 159e, 158b, c, 160a

<테아이테토스> 203e

<소피스테스> 228c, 247a, 252b, 260e

<티마이오스> 28a, 29b, c, 29b, 39e, 48e, 49a, 50c, d, 51a, c, 52c,

<필레보스> 16d, 25b

* 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Chp. 17th, Oxford 1951

(W. D. 로스, 김진성 역, 『플라톤의 이데아론』, 누멘 2011, 259쪽)

 

이상으로 제5권 끝

다음 주제: 2.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영상 20231209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가을 제65회 정기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연합학술대회 20231209

◎ 주제: ‘포스트휴면과 신유물론: 물질, 몸, 도시’
●일시: 2023년 12월 9일(토) 11:00~18:00
●장소: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308호(31308)
●주최: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숙명인문학연구소 HK+사업단,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주관: 성균관대학교 교양기초교육연구소

영상 목록(특정 발표 영상만 공개)
☞ 개회사 사회: 현남숙(성균관대)
☞ 개회사: 김종갑(한국포스트휴먼연구회 회장·건국대)
☞ 축사: 박정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성균관대)
1부 신유물론과 물질에 대한 논쟁 – 좌장: 김재희(을지대)
☞ 2발표(11:40): ‘신유물론의 물질 개념과 들뢰즈의 존재론’ – 박준영(수유너머 104)
2부 기조발제 – 사회: 하인혜(인천대)
☞ 1발표(13:30): ‘얽힘과 접촉’ – 최종덕(독립연구자)
☞ 2발표(14:10): ‘위기인가 기회인가: 포스트휴머니즘의 곤경과 신유물론 정치의 가능성’ – 박인찬(숙명여대)
3부 신유물론과 물질과 몸 – 좌장: 이승준(생태적지혜연구소)
☞ 1발표(15:00): ‘물질과 시간의 미결정성, 그리고 애도의 윤리’ – 서영화(서울대)
☞ 2발표(15:30): ‘몸의 물질화와 수행성’ – 정유진(서강대)
☞ 3부 질문 및 토론(16:00~16:20)
4부 신유물론과 디지털도시화 – 좌장: 이지영(이화여대)
☞ 2발표(17:00): ‘디지털 도시화와 탈/재물질화’ – 이현재(서울시립대)

전체 일정표 참고 링크
http://ephilosophy.kr/han/category/e-academy/e-academy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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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 1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vA0Hp8-IHhk?si=004ZEyIC_Wv382Ny

2부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C54pkAUt-7E?si=JLqkWLaZwyrobw_M

3부 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TUdBTLFLPGc?si=4VkkM-JcRDZwxMYQ

4부 – 2발표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lGdQU2quDc?si=lu3dIOLZ0HV9VZH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제1부] 영상 PART 1, 2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3년 봄(8월) 제64회 정기 학술대회 영상
사회와철학연구회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합 심포지엄
◎ 주제: 한국 사회의 길을 철학에 묻다

● 일시: 2023년 8월 19일(토) 오후 1~6시
● 장소: 서울대학교 83동(인문사회계열멀티미디어 강의동) 305호

영상 (PART 1)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1발표] 배기호(중원대) – ‘한국 사회는 진짜가 없는 사회다’
[2발표] 서민규(건양대) – ‘한국 사회는 없는 것이 없는 사회다: 21세기 철학적 실재론과 반인간주의’
[3발표] 유가연(서강대) – ‘한국 사회는 자신을 표현할 길이 없는 사회다’
[4발표] 박준웅(중앙대) – ‘한국 사회는 관용이 없는 사회다’

영상 (PART 2) 제1부: 발표 13:2015:20 / 사회: 조은평(건국대)

[5발표] 유민석(서울시립대) – ‘한국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다’
[6발표] 정대훈(부산대) – ‘한국 사회는 매개가 없는 사회다’
[7발표] 김범수(청주대) – ‘한국 사회는 지리 철학이 없는 사회다: 한반도에 필요한 지리 철학’
[8발표] 이재복(한양대) – ‘한국 사회는 애도(哀悼)가 없는 사회다’

(PART 1)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ENHDtKldfyU?si=4MMT3Ph_KGJ0xDKv

(PART 2)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NDtAEAmxnsQ?si=V11BrxNyArNFnU1K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1.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2.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1) 형상(이데아)론(474c-476d)

 

* 이데아론을 다루기에 앞서 살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요약하면 결국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 ‘말로 세워진 나라’(gignomenē polis logō) 이른바 로고폴리스(logopolis)는 그 자체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구현이 불가능하지만, 철학자를 그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할 경우 최대한 그 본에 가깝게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제5권 502c부터 제7권 540e까지 철학자의 자질과 교육과정 등 그 본에 최대한 닮은 나라 즉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다룬 다음 그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비로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고 명명한다.(527c). 사실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 자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 <국가>의 주제를 나눌 때 일반적으로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의 내용을 ‘이상국가의 수립’으로 불러 구분하고 그 후 철인 통치자와 교육과정까지를 포함해 <국가> 내용 전체를 통틀어 ‘이상국가론’이라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말로 세운 로고폴리스도 플라톤의 이상국가이고 제7권에서 명명된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또한 그의 이상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자의 논의가 후자의 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에 철학자 통치론이 추가된 후자의 나라야말로 플라톤이 생각한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실질적인 이상국가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지닌 입장을 정리하자면 전자의 이상국가는 본으로서 현실 불가능하지만, 후자의 이상국가는 최대한 그 본을 닮은 나라로서 최대한 가까운 한도까지 실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그 실현 가능성이 어떤 단일한 조건에서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와 제도를 갖춘 나라의 경영 상태를 어떻게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한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과 관련한 실질적인 물음은 단지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가능하되 어떻게 얼마나 더 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필수적인 가능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문제는 결국 철학자 왕의 수준, 즉 바람직한 철학자 왕의 자질과 능력이 무엇이고 그 능력의 최고치는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철학자 통치론을 다루되 철학자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에 나라의 통치자로서 적합한지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철학자가 좋아하는 진리로서 형상이 제시되고 드디어 이데아론이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474c-476d]

* 소크라테스는 이제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ἅπτεσθαι 나라를 인도하는 것ἡγεμονεύειν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προσήκει φύσει부터 아래와 같이 해명한다.

* 누군가가 뭔가를 사랑한다φιλεῖν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옳으려면,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년을 좋아하는 사랑꾼φιλόπαιδα은 한창때의 아이들 모두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내치지 않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사람들 또한 어떤 포도주이건 어떤 지위이건 가리지 않고 욕구한다.ἐπιθυμηταί 이렇듯 뭔가를 욕구하는ἐπιθυμητικός 사람은 그것의 모든 종류를 욕구하는 사람이다.(474a-475b)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지혜σοφία는 욕구하고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배울 거리τὰ μαθήματα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을 선뜻 맛보기를 원하고 기꺼이 배우려 하며 그래도 늘 부족해 하는ἄπληστος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475c)

* 이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οἵ φιλοθεάμονες, 듣기를 사랑하는φιλήκοος 사람들도 구경거리, 들을 거리가 있으면 어디든지 빠짐없이 찾아 돌아다니며 그 비슷한 것들이나 잡기술τεχνύδριον을 배우려 드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닮은 사람들일 뿐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ἀληθείας φιλοθεάμονας이라고 말한다.(475d-e)

* 그러자 글라우콘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아래와 같이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과 그것들이 온갖 곳에 나타나서 ‘여럿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한다. “아름다움καλός과 추함αἰσχρός, 정의로움δίκαιος과 부정의함ἄδικος, 좋음ἀγαθός과 나쁨κακός 등 모든 형상εἶδος 각각이 그 자체로 하나’αὐτὸ ἓν ἕκαστον인데, 그 형상들이 행위πρᾶξις들이나 물체σῶμα들과 어울림κοινωνία으로써, 그리고 자신들끼리 서로ἀλλήλων 어울림으로써 온갖 곳에 나타나서 각각이 여럿πολλὰ으로 보이는 것φαίνεσθαι이다.”(476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기초로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전자)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후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요컨대 전자의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 등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μόν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φωνή나 색깔χροάζω, 모양σχῆμα, 그리고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반길 뿐, 그들의 지적 상태διάνοια로는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의 본성은 볼 수도ἰδεῖν 없고 반길 수도ἀσπάσασθαι 없는 사람들이다. (476b)

* 아름다움 자체에 다가가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καθ᾽ αὑτὸ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σπάνιος.(476b) 누군가가 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운 것들ὁ καλὰ πράγματα은 믿으면서νομίζων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κάλλος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앎γνῶσις으로 이끌고 갈지라도 그를 따라갈 수조차 없는 사람은 꿈ὄναρ을 꾸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움 자체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들τὰ μετέχοντα을 모두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 ‘그것 자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 자체’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ὕπαρ로 살고 있는 것이다.(476c-d).

* 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διάνοια는 아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γιγνώσκοντος 앎γνώμη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는 믿음을 갖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δοξάζοντος 믿음δόξα이라고 불러야 옳다.(47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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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c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 나라를 인도하는 것hēgemoneuein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 : 자연적 성향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 성향에 맞는 것을 자기 일로 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국가의 분업 원리도 모두 그 원칙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철학자는 자연적 성향에서 무엇보다 철학에 적합하지만, 나라를 인도하는 것 즉 통치에도 적합하다고 언급된다. 즉 철학자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자연적 성향 그대로 통치하기도 좋아하고 또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 다른 곳에서는 그 반대로 철학자는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521b)이고 ‘정치적 관직을 깔보는 삶’(521b)을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통치하게 하려면 강제가 요구되는 사람들(521b)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관직을 깔본다는 내용은 통치를 시민의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 권력을 쟁취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는 통치행위는 당연히 싫어하고 그러한 권력 지상주의자들이 탐하는 관직을 깔본다. 그러한 통치는 동족 간 내란을 일으켜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기 때문이다.(521a) 그러나 바람직한 통치자는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을 도모하고(420b) 시민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462b), 또 성향상 철학자가 그러한 통치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므로 통치 권력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는 정치 생활 보다는 철학 생활하기를 더 좋아하므로 누구라도 선뜻 먼저 나서기보다 서로에게 떠맡길 수 있어 일종의 자율적 강제의 형식으로 통치의 수고를 돌아가며 떠맡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는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선뜻 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에 대한 자율적인 내부 규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철학자에게 강제는 없다. ‘강제’라는 표현은 철학자들이 통치 적합자임에도 자칫 이기적 권력을 탐하는 자들로 비칠 수 있음을 변명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rhetoric)의 성격이 강하지만 어쩌면 철학과 정치 참여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해온 플라톤 자신의 내적 심리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 475d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 요컨대 철학자는 진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랑한다’거나 ‘추구한다’는 것은 모종의 성취 결과를 이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음’, ‘추구하고 있음’이라는 과정 그 자체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랑을 쟁취했다는 말도 쓰지만,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 진정 원하고 목표로 하는 것은 쟁취 그 시점이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 진행형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철학 역시 어떤 목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설사 진리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에 머물지 않고 늘 되물어 보고 되돌아보면서 보다 진일보한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지적인 긴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철학함의 진정한 목표라 할 것이다.

* 476d 지적 상태(dianoia) : dianoia는 추론적 사고(思考)(thinking), 사고 내용(notion, thought expressed), 사고 과정(process of thinking), 이해(understanding), 사고 기능(thinking faculty), 지적 능력(intellectual capacity)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적 이해의 상태 내지 내용’을 의미한다.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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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차 언급했듯이 <국가>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은 이데아론, 철인 통치론, 좋음의 이데아,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변증술과 철학자 교육과정 등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불릴만한 핵심적인 주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관련 연구서들은 물론이고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이라면 모두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면서 거의 빠짐없이 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개요 수준에서부터 전문적인 연구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료들이 매우 풍부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다행하게도 최소한 이 주제들과 관련하여 우리 강해에서 기울여야 할 노력은 그만큼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데아론을 비롯하여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우리가 다룰 플라톤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해 우리 강해는 앞으로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우선 지금까지 해왔듯이 기본적으로 <국가> 텍스트의 해당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되, 위 주제들과 관련하여 철학사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은 줄이는 대신 주요 논쟁점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 전체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몇 가지 점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 그럼 텍스트 순서대로 <국가>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 또는 ‘형상(eidos)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형상은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통치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도입부의 대화를 통해 제기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배울 거리를 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온갖 것을 기웃거리며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그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는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그런 연후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래와 같이 대비해가면서 그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를 담지하는 대상으로서 형상이라는 것이 처음 소개된다.

* 물론 플라톤의 형상이 <국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형상은 이곳에서 처음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좋음의 이데아, 변증술로 이어지면 깊이를 더해 가지만 그 주제가 플라톤 철학의 중심 주제인 만큼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 등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도 두루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체계적인 논의가 아닌 데다가 대화편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들 자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구석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이 ‘플라톤 이데아론’이지 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그 해석 또한 학자마다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오늘날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발달에 따라 관련 텍스트에 대한 미시적 언어 및 논리 분석이 크게 증대되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대두되면서 현대철학에서는 아예 플라톤의 원초적인 의도와 관점이 아예 공중 분해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텍스트를 직접 접하거나 전문 연구서를 보기보다는 서양철학사 등 플라톤 이데아론을 다룬 개괄서들을 통해 일반적인 개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접하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 우선 형상(eidos : 形相)이라는 말은 ‘보이는 것’, ‘외모’, ‘형태’, ‘종류’, ‘개념’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니는 일상어로서 앞에서도 여러 번 사용된 말이다.(402c-d, 434d, 435b 참고) 그러나 약간의 논란이 있는 402c eidē의 경우를 제외하면(강해 40참고) <국가>에서 플라톤이 eidos를 본격적으로 ‘형상’(形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이곳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데아’(idea)라는 말은 eidos라는 말과 함께 eidō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eidos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그 형상을 언급하면서 ‘그 자체로’(kath’ hauto, kata auto), ‘자체’(auto)라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auto를 형용사에 정관사 to를 붙여 명사화한 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말들은 소크라테스가 거의 공식이라 할 정도로 형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정의 자체(auto to dikaion) 등)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형상을 ‘각각 그 자체로 하나’(auto hen hekaston)이자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ekaston to on)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우선 플라톤의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일자성(一者性)을 갖고 있다는 것 즉 형상이 어떤 타자와도 무관하게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실재하며 늘 한결같고 불변하는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하나가 각각 하나라고 함은 그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달리 ‘여럿’(polla)임을 나타낸다. 즉 플라톤의 형상은 다(多)의 진상으로서 각각 일자성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자체로 독존적으로 실재하는 ‘있는 것’(to on)이다.

* 형상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on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einai의 중성 분사형으로 being의 뜻을 갖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einai동사는 영어의 be동사가 그러하듯 ‘있음’이라는 존재를 나태는 용례만이 아니라 ‘~임’이라는 술어적 용례로도 쓰이고 나아가 ‘다름 아닌 정말 그것 맞음’이라는 진위적 용례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을 ‘to on’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형상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자 ‘~인 것’이며 동시에 ‘정말 ~인 것으로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용례 중 어떤 용례로서 to on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온갖 경우를 들어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자체가 그 세 가지 용례를 모두 포함하는 데다가 플라톤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용례의 특수성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그러한 분석이 별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그가 사용한 용례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왜 그 모든 용례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플라톤은 그 형상들의 실례로 이곳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을 들고 있다. 그런데 형상들이 존재하는 곳이 믿음(doxa)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계가 아니라 진정한 앎epistēmē이 대상으로 하는 예지계라는 점에서 과연 ‘추함’ 이나 ‘부정의함’도 형상인가 그것은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의 ‘결핍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특히 to on의 진위적 용례가 to on의 참됨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곳 바로 뒤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오류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분명 이 점은 논란거리이긴 하다. 다만 이곳의 언급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추함’과 ‘부정의함’ 또한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체로 추한 것, 부정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류 불가능성 또한 ‘정말 추한 것, 부정의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 그런데 이렇듯 플라톤이 예로 들은 형상의 실례를 통해 형상이 무엇인가를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곳 <국가>에서도 ‘아름다움’, ‘추함’, ‘정의’, ‘부정의함’ 등 뭔가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것 이외에 감각계 인공적 사물인 ‘침상’의 형상(597c)도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있음’, ‘없음’, ‘운동’, ‘정지’ 등 범주적인 것들(<파르메니데스 129d-e, 139b, <소피스테스> 254b-255e, <티마이오스> 35a 등)을 비롯해 ‘하나’, ‘둘’, ‘홀수’, ‘짝수’, ‘원’, ‘직선’, ‘도형’, 다름’, ‘같음’ 등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것들(<대히피아스 300d-302b, <파이드로스> 104a-c, 104e, <에우튀프론> 12d, <메논> 74b, 74d-e 등) 그리고 ‘눈’, ‘불’, ‘벌’, ‘흙’, ‘공기’, ‘물’, ‘불’ 등 자연물들(<파이드로스> 103c-105d, <메논> 72b-c, <티마이오스> 51b 등)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침상의 예처럼 형상의 그림자인 것들로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형상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어서 침상의 경우 그냥 비유로만 사용된 것이라 이해한다 해도 플라톤이 언급한 위와 같은 형상들의 다양한 예들은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는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로 많은 논란과 의문을 수반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 대부분이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사례들로 정의하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예시된 것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형상은 모든 경우에서 늘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 즉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aei kata tauta hosautōs onta)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일상의 경험에서도 가까운 예로 일정한 음의 수적 비례 등 수와 논리,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론적 원리들이 수많은 아름다운 악곡들 배후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리고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형상들과 행위들 또는 물체들과 어울림(koinonia)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또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이른바 감각적 물질세계에 대한 형상의 관여(metechein)로 설명되면서 실상의 세계, 예지계로서 형상계와 그 그림자의 세계로서 현상계의 내적 관계를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형상들) 자신들끼리 서로 어울려’라는 부분은 예지계 형상들끼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별도의 추가적인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과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형상들이 어울린다고 하면 형상들에게 어울리는 측면이 있어야 가능한데 형상들 각각은 어떤 것들과도 관계 맺지 않는 자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불변의 것으로서 관점이나 측면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플라톤은 이곳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관련하여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 대신에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피스테스>에서 그 문제를 독립적인 주제로 삼고 있어 우리는 <소피스테스>(250a-259d)를 통해 그 의문의 실마리를 부분적으로나마 풀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존재(ousia)와 운동(kinesis) 그리고 정지(stasis),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을 형상의 예로 들면서 운동과 정지 모두 일단은 있는 것으로서 존재성을 갖는 한, 존재에 의해 포괄된다고 말한다. 즉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일정하게 결합(koinonia)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그러면서도 이들 각각의 것과 다른 어떤 것이므로 이들 각각은 또 서로 다른 것으로 ‘다름’과 결합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그 자체로 자기 동일적이므로 ‘같음’과도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서 철자의 비유를 통해 형상들의 결합을 설명한다. 즉 자음 모음은 각각 그 자체 하나의 유(類, genos)이자 형상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는 다시 어울려 단어를 이룬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등이 일단 어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각형의 형상에서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각각이 결합했다 해서 그것들 각자의 일자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체로 자체성을 보전하면서 유와 종의 관계를 갖고 서로 결합한다. 물론 이것들은 무한대의 경우 수로 결합하거나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존재와 정지는 결합할 수 있되 정지와 운동은 결합할 수 없듯이 철자들이 아무런 철자술(grammatikē, 253a) 상의 규칙 없이 아무 자음과 모음들끼리 임의로 결합할 수는 없다. 이른바 최고류에 해당하는 형상은 종차를 이루어가며 가장 위쪽으로 섞이고 모이면서(synagein) 드러나는 형상이고 반대로 그러한 최고류의 형상이 분할(diairesis)되어 더 분할 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최하종으로서 이를테면 철자에 해당하는 원자적 형상(atomon eidos)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결합과 분할의 내적 관계와 규칙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곧 철학자가 최종적으로 습득해야 할 변증술(dialēktikē)이다.

* 이러한 형상들의 결합은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주 제작과정을 그리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이른바 형상들의 세계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그것을 보고 실제 자연 세계를 만든다. 이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바라보는 형상들 가운데에는 개별 형상들도 있겠지만 ‘여럿이 조화롭게 어울린 자연 세계의 본’으로서 복합적 특성을 갖는 ‘결합된 형상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따로 자신이 본을 구상하지 않고 순전히 그 형상계의 본만을 보고 우주를 제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본으로서 제작 전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제작하는 목표가 ‘좋은 우주’ 즉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에 있는 한 우주 전체에 섞여 그것을 통일적으로 관철하는 우주 세계의 본으로서 ‘좋음의 형상’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가>에서 앞으로 제시될 ‘좋음의 형상’은 형상계의 모든 형상들의 총체적인 결합과 관련한 형상으로서 우주 제작자가 가장 중시해야 할 본이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이후의 철학사를 통해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두 세계 이론(Two worlds theory)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토대로만 주목되면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는 그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고 반대로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천상의 세계만을 실상의 세계로 생각하는 철학자로 평가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만 봐도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근대 인문주의 내지 과학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철학사적 전통에서 플라톤 철학이 왜 ‘현상 구제론’ 즉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형상론을 접하는 사람이면 보통의 경우 대부분 앞서 말한 두 세계 이론부터 떠올리지만, 현상 구제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형상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多) 즉 복수의 형상들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형상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기본적으로 존재 세계에서 오직 부동의 일자만을 주장하는 종래의 파르메니데스주의를 혁파하고 존재 세계가 본래부터 여럿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 익히 알고 있듯이 플라톤 당대 혼란기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었던 철학 사조는 파르메니데스주의를 이어받은 엘레아의 철학이었다. 아테네 철학은 소박한 물활론에서 시작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론(panta rhei)을 거쳐 파르메니데스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엘레아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유기적 통일, 여럿과 운동이 철저히 부정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여럿과 운동의 부정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성과 그것들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학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전란에 허덕이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극복의 근거나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그들을 아예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덕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적 논리주의를 이용하여 권력 지향적인 귀족들에게 궤변적 수사술과 처세술을 가르치며 사적인 이익을 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으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에 기여했다. 물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현실과 지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엘레아주의에 대항하여 여럿과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없지 않았다. 특히 원자론자들은 엘레아주의자들을 의식하여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에 부합하는 이른바 원자(atom)의 존재를 상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원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들을 둘러싼 허공(kenos) 즉 없는 것(無)의 존재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적으로 존재 세계가 여럿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자론은 그런 방식으로 일정 부분 여럿과 운동을 구제할 수는 있었으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 운동의 기계론적인 성격은 그리스적 세계관의 토대로서 자연과 관습의 유기적 통일을 위한 합목적적 가치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여럿과 운동의 근거도 확보하고 운동과 변화의 합목적적 가치지향도 가능할 수 있도록 고정치는 고정치대로, 운동치는 운동치대로, 관계치는 관계치대로 각각에 정당한 존재론적 기초를 부여하여 존재 세계에 파르메니데스적 일자들이 여럿이 있음과 동시에 그것들이 운동하는 것임을 밝히고 덧붙여 존재 세계의 총체적인 합목적적 가치의 지향 푯대로서 최고의 유적 형상이자 본으로서 ‘좋음’(to agathon)의 형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형상론은 자연 세계 여럿의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을 형상들 각각에게 부여하여 여럿이 각각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일차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세계에서는 운동치가 자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그에 이어 운동치는 고대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 존재자들의 근본 속성으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것들이 형상을 분유(metechein)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물질적 존재자들의 구분과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존재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즉 플라톤은 고정치는 형상계에, 운동치는 물질적 현상계에 두고 그것들이 존재 세계에서 상호 관여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존재 세계가 일정하게 여럿을 보전하면서도 상호 섞일 수 있는 관계치의 근거도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여럿이자 운동하는 현실이 존재론적으로 구제된 것이다. 이제 화살이 정지해있지 않고 날아가는 것이, 토끼가 거북이를 앞질러 달려가는 것 또한 더 이상의 가상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것들의 차이를 식별하고 구분하여 사물과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 또한 더 이상의 허튼짓이 아니다.

* 그러나 현상계 존재자들은 형상의 분유치만 갖고 있으므로 한결같이 고정적이지 못하고 물질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완전한 분유치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인식과 학술을 도모할 경우 형상 수준의 진리성 즉 에피스테메까지 이르지 못하고 믿음(doxa)이나 확신(pistis)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요컨대 그것들에 대한 학술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그럴듯한 수준의 설명’(eikos logos) 즉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계에서도 물질성을 최소로 갖고 있거나 물질성이 갖는 연장성만 지니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곧 수 또는 도형 다시 말해 수학적 기하학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지성(nous)을 통해 형상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획득하는 변증술을 제외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학술로서 가장 에피스테메에 근접하는 일반 학술은 오직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기하학은 가정(hypothesis, 510c-d)도 수반하고 형상이 갖는 완전한 고정치까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분유치로서는 최고 수준의 고정치를 인식할 수 있는 학술인 만큼,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모든 학술의 최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된다. 이를테면 건축술, 조타술, 제화술 모두 최대한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기하학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개별과학 역시 본질적으로 수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자체성(kath’ hauto)은 변증술을 통해 형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자기동일성(tauton)은 추론적 사고(dianoia)로서는 최고 단계 즉 최고 수준의 분유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수학과 기학학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교육과정에도 수학과 기하학은 변증술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이수해야 할 전 단계 과목으로 제시된다.

* 가장 완전한 앎으로서 형상에 관한 앎은 변증술 즉 철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면, 당대의 일반 학술들(technai)(511b-c)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일반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들에게는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학적 인식의 최고 목표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동일성은 기본적으로 현상계 진리성이므로 진정한 앎이 갖는 자체성에 미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개연적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반 학술로서 오늘날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은 절대지에 이를 수 없고 늘 그 절대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절대지에 근접하는 지식만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자연학이 갖는 개연성에 만족하지 못해 형상을 자연세계 개체에 끌어들여 자연학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른바 경험과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갈릴레오 역학과 그 이후의 이론 물리학의 등장, 그리고 그것의 진리성은 그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고려하더라도 2,500년 전 제기된 플라톤의 형상론이 말을 너머 진상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상이나 종교는 물론, 오늘날 자연과학 내지 개별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인지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플라톤의 형상론은 본질적으로 현상계의 학술적 해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 즉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제시된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 위계에서 본다면 형상계가 최상이지만 플라톤이 기울인 관심의 위계에서 보면 현상계 즉 현실에 대한 관심이 최우위에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 실제로 이같이 형상의 인식과 현상계의 인식을 구분하는 위계적 구도를 현상계에서 똑같이 보편-개물의 구도로 적용할 경우. 오늘날 일반 학문의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학문은 현상계 소여들을 귀납하여 보편적 개념으로 일반화하고 그 보편 개념들의 정합 관계를 통해 사물과 사태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도모하는데, 플라톤의 인식론 또한 보편 실재로서 형상들이 관여의 방식으로 개물들에 결합된 형상적 분유치들(현상계 사물의 공통 속성들을 일반화한 개념들)을 토대로 감각적 개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적 인식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 기본 구도는 서로 비슷하다. 현상계 인공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보편이 드러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현상계의 사물들에 대한 일반 개념들은 개물들이 갖는 공통적 속성의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위쪽의 방향으로 모여져서 주어지는 데 비해, 플라톤의 인식론에서는 그 반대로 실재하는 형상(아름다움 자체)이 위에 있고 개체들(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아래쪽으로 분유되는 방식으로 존재성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른바 형상이든 개념이든 이른바 보편자를 통해 개별자에 대한 인식과 식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즉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형상과 현상의 관계’와 현상계 내에서 ‘개념과 개체의 관계’는 마치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원상이고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모상인 양 구조적으로 닮아 있어, 비록 현상계의 인식이 분유치에 대한 개연적 설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현상계에서 사물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그것의 정합적 체계화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비록 형상에 대한 인식이 참된 앎이고 그것에 이르는 학술이 변증술이자 철학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획득된 앎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플라톤 자신 대화편 어느 곳에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그 내용이 있다면 형상들의 실례 정도, 그것도 불분명한 수준 정도의 밖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 자신을 포함 누군가 그것에 대한 앎을 획득했다는 언급도 없고 그저 철학자가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조차 형상계와 관련해서는 여러 형상들이 있다는 정도 외에 철학자가 아닌 일반적인 학자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형상계에 비교하여 비록 낮게 평가되고 있으나 바로 그 현상계가 일반 학술 차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학적 인식의 실질적인 중심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플라톤 또한 결코 현상계 영역을 허투루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이곳 형상론도 정의로운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이상적 푯대이자 토대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얼핏 세계를 물자체가 존재하는 예지계와 현상계로 나누고 실질적인 학적 인식을 현상계에 대한 오성(Verstand)의 인식으로 국한한 칸트(I. Kant)의 비판적 인식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에서도 신은 위계상 지고의 존재임에도 현실의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 요청(Postulat)되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에게서 신학은 위계상 최고의 학문임에도 도덕론에 부수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쟁점을 갖고 있는 영역이 또 플라톤의 현상계이다. 바로 그 현상계에 대한 논의가 이곳 형상계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다루어진다. -끝-

다음 주제: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현상계와 믿음(doxa)(474c-47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