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서평|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칠순의 아버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빠르게 몸의 기능들을 잃어갔다. 아침 산책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줄 수 없을 만큼 손떨림이 심했다. 식탁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쾌락을 누리기는커녕 음식을 흘리며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병이 깊어지던 시절의 아버지는 증상의 일부로서 얼굴 근육이 굳어갔지만 많이 놀라고 슬프고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의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문화의 관행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환자로 치료에 임하고 가부장답게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몰락을 향해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투병 과정과 죽음 직전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질병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간의 삶 속에서 추방된 ‘타자’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을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가족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간의 거리를 허물지 못했다.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분류하자면 학술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프고 죽고’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온전한 사유를 가로막는 근대 의학(“모더니스트 의학”)과 인간에 대한 전능성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주체 철학을 학자로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심장병과 고환암 선고를 받고 투병했던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일반적인 학술서와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픈 사람의 좌절과 고독에 공감하며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증후군을 겪고 있는 주디스 자루쉬스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심각한 질병은 심각한 질병은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의 인생을 안내해 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든다. 아픈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50)고 침통함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지도로 살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명료한 진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욕망을 내려놓고,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껴보자는 식의 뻔하고 기만적인 조언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언제나 치료의 객체, 즉 대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요구받으며 자신의 질병을 낯선 것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질병을 새롭게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질병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아픈 몸에 대해 말하고 이를 통해 질병과 더불어 살며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자고 말한다.

아픈 몸이 말하도록 하자고 저자는 설득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것인데도 우리는 질병에 대해 정교하고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언어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막연히 좋아지기를 바라며 의학에 자신을 맡기고,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유하지 않는다. 근대의학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혹은 전능한 인간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관해 말하고, 그것과 화해할 틈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억눌릴 때, 아픈 사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와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 의학과 주체중심주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던 아픈 사람이 인간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아픈 사람을 병리화,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질병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픈 사람이야말로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늙은 마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을 몰며, 손님에게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부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고, 아들의 상실이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해 가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마부가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고통은 이야기와 청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픈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의사와 회복에 대한 낙관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 즉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아픈 사람은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구성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 이야기가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아픈 사람들을 식민화하고, 더 지독한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암 환자였던 경험을 토대로 아픈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누고 그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분석한다. 복원의 서사는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 바탕을 둔 것으로 투병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저자는 복원 서사를 제도 의학과 병원 너머의 더 강력한 이해관계 집단들이 질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모든 고통에는 치료약이 있다는 모더니스트 기대”가 투영된 이 서사는 환자가 의학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환자에게서 필멸의 현실과 책임을 박탈한다. ‘혼돈’은 질병의 좌절과 공포에 노출되어 앞으로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에 파 먹힌 이의 이야기 유형이다. 혼돈 서사는 “비(非)-자아-이야기”(222)로 고통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 순서의 감각도 없고 고통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자아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고 구멍도 많다. 혼돈 서사의 주체는 자신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통제 없이 휩쓸린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며, 수치심과 절망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지원이나 위안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혼돈의 서사는 아픈 사람들을 절망에 가두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극복이 필요한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만의 질병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서사 유형이다. 탐구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아픈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야 하는가’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나 오드리 로드의 투병기를 탐구 서사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비록 질병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중단이지만, 질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격의 변화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암에 걸린 오드리 로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프고 유방을 도려낸 여성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소수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었다.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불행이나 고통은 단순히 우리의 주체 역량을 갉아먹기에 부정되거나 회피해야 할 나쁜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현장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집중을 촉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정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출판·독서 시장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 서사들이 문화적, 미학적 우세종이 되고 있다. 그간 의학은 진단과 설명의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질병을 사회와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아픈 사람을 의학의 권위를 증명할 수단으로 객체화, 상품화해 왔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치료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의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 경험은 질병이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적 서사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당사자들의 질병에 대한 말하기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질병이 단순히 자기관리의 실패나 삶의 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당사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고 해석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는 정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는 시의적절하고도 긴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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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몸을이야기하기-보도자료-fin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소개 글 :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김교빈)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김교빈(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철학)

 

이 글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의 여섯 번째 발문(추천서문, 35~38쪽)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에 게재합니다.

 

2009년 7월 31일 한국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그리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5년 6월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네스코의 선정 과정을 거쳐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전통의학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기신의 초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서술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인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랜 인문학의 전통을 지녀왔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인문이 나머지 둘을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인문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천문과 지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인본주의와 인문의식의 출발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문학을 의미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럴 아츠(Liveral Arts)’는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하는 그리스에서 노예 교육과 달리 자유민인 그리스 시민의 소양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했다. 그래서 ‘리버럴 아츠’는 오늘날에도 인문학을 뜻하는 동시에 교양 교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인간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 사유를 밖으로 표현해 낸 예술까지를 인문의 범주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는 신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사고를 뜻하며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불타오른 인문정신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담긴 인문정신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의 첫 편은 「내경(內景)」이고 두 번째 편은 「외형(外形)」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편이 붙어있다. 만약 『동의보감』이 병증의 원인과 증세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뒤의 세 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근대시기의 그렇고 그런 의학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과 처방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 몸의 겉과 속, 그리고 사람과 사람 밖의 자연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깃든 사람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몸 안의 장부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몸 안의 구조와 몸 밖의 신체 부위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사람의 몸과 자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강은 무엇이고 질병은 무엇인지,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양생법이 필요한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를 설명하는 정(精)·기(氣)·신(神)이 무엇인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면서 당시의 의학이 도달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은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보편성만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라는 말은 『동의보감』 서문에 있는 것처럼 당시 중국에 있던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동의보감』 출간 284년 뒤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도 ‘동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약재와 처방 모두에서 그 이전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의료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향약집성방』에 수록된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처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본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어떤 책인가?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의학을 풀어낸 책이다. 특히 저자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그 사유의 기반인 기철학을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최종덕은 기를 사유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하였고,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란 물질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란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라고 부연하였다.

최종덕은 매우 폭 넓은 공부를 해 왔다.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기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얼마 안 가 ‘기(氣)철학분과’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다른 학회들과 달리 분과 모임들로 나뉘어 있고, 분과들은 매 주 정기적으로 모여 세미나를 진행한다. 1989년 학회 창립과 동시에 내 제안으로 시작된 ‘기철학분과’는 동양철학 연구자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인원이 늘면서 동양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의학 연구자와 과학철학 연구자인 최종덕 교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 대상 텍스트도 대표적인 기철학자 장횡거의 『정몽(正蒙)』이나 방이지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 『동의보감』, 『격치고(格致藁)』 같은 전통의학 서적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기철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고, 동양철학 연구자들 또한 전통의학과 자연철학으로 논의를 깊여갔다.

최종덕은 기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면서 ‘개인의 건강이나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영역의 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사회적 비판기능 내지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생산 역량을 지닌 기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관점은 ‘과학적 접근방식과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한 것이다. 특히 최종덕은 전통의학을 ‘자연주의 의학’이자 ‘유기체 의학’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잘 담아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써 낸 것이다. 최종덕이 전통의학, 기철학, 물리학, 자연철학 등의 여러 분야를 날줄과 씨줄 삼아 자유자재로 엮은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만난 독자들은 전통철학과 현대철학, 기철학과 자연철학을 동시에 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울러 이 책이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을 융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교빈 씀)


필자 김교빈: (재)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철학 에세이》, 《하곡 정제두》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화담집》, 《강좌 한국철학》, 《기학의 모험》,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중국의 고대 논리》,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 《중국 의학과 철학》, 《기의 철학》 등이 있다.

[서평]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함태원(건국대)

 

칸트 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칸트가 위대한 철학자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지럽고 머리 아픈 칸트의 철학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철학을 전공하는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칸트라고 한다면 고개부터 저을 정도로 칸트 철학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칸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는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칸트의 위대한 업적의 비결을 ‘루틴’이라고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루틴을 세우고 이 루틴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칸트야 주변 시민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라 불리는 규칙적인 사람이었으니, 루틴을 지켜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칸트가 아침에 일어나 5분간은 침대에서 그 무엇보다 유혹적인 아침잠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 하인이 커피를 타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커피를 달라고 보채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하지만 칸트가 자기 루틴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이 아침잠에 약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루틴에 이를 포함했다. 칸트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36쪽)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루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루틴을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지도에 목적지도 표시하지 않고 항해를 나갈 수는 없으니 어디로 갈지부터 체크해야 한다. 목적지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도 우리는 칸트 덕에 “진리는 대상에 있지 않고, 내가 구성하는 것”(61쪽)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이다.

그럼, 루틴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우선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든 우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루틴을 완성하고 유지해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을까? 내가 좋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걸까?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도 좋다고 했다면, 칸트가 이토록 이름나있는 인류의 스승은 아니었을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도덕법칙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어려운 법칙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햄버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햄버거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저기 옆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조카의 햄버거를 빼앗아 먹으면 안 된다. 경찰이 아무리 몸이 괴롭고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벌어지는 범죄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것을 지키면 될 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도덕법칙은 자율로서 자신이 세우는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법칙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나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나 칸트의 요점은 이 법칙을 언제나 그리고 확고하게 고수하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몸이 힘들다고, 내가 지금 몹시 허기져 있다고 범죄 현장을 외면하거나 강도 행위를 벌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세운 그 원칙을 공고하게 유지하면 도덕법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 “자율적으로 행하되 그 행위가 도덕법칙인 한에서 행동하자”.(111쪽) 자유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칸트처럼 하루하루 삶의 루틴을 만들어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이유는 엄격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쓴소리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선생님들의 말은 언제나 옳지만 듣기 싫은 소리로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위대한 일은 언제나 고되고 힘든 법이다. 시작하는 25년 새해, 칸트처럼 하루하루 나의 루틴을 정해 지켜나가며 위대한 일을 이뤄내보자.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서평: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독서가 마무리될 때쯤, ‘12․3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 독후감을 쓰는 오늘 12월 10일 현재, 탄핵안의 자동 폐기에 뒤이어 이곳 남한의 주권대행자 윤석열은 사실상 모든 행정권한을 잃고 있다(그럼에도 권리상 그는 여전히 행정부 수반이자 군통수권자이다). 내게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43장 「풍요를 해방하라」에 담긴 내용은, 여기 계엄의 비상시를 달리 재생산하려는 입법권력에 대해, 그 국회의사당 입법권력의 정면을 점유한 인파人波의 비상시적인 힘에 관해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회집하고 있는 그 인파를 홀러웨이가 말하는 “무리rabble” “어긋나는 자들misfitters” “비복종자들”로 새겨 보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을 듯하다.

그들 무리, 어긋나는 자들 속에는 법치주의적 시스템 혹은 자유/자본주의적 헌정질서 안에서within 그것을 거스르며Against 그 너머를 향해 가는Beyond 일상적이고도 편재하는 클리나멘(원자의 측정 불가능한 이탈/편위偏位 운동)의 계기들이 잉태되어 있다. 그들 무리의 어긋남이 일으키는 관계적 균열의 효과를 탐지․분석․구성하려는 홀러웨이의 일관된 의지가 “소망적 희망”과 “이성적 희망”을 구분하는 준칙이 된다. 이성적 희망과는 반대로 소망적 희망은 희망 없는 시대를 연장하고 위기와 절멸이 지연되게 만드는, 체제 내화되고 있는 범용한-안전한 감정, 말하자면 체제를 조바꿈하면서 보전하는 전前-종말론적 근본정조이다. 이성적 희망, 그것의 형질․벡터․이념을 달리 표출하기 위해 다시 인용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책에 거듭 인용되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맑스, 1857)의 한 대목이 그것이다.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풍요Reichtum란 보편적 교환을 통해 창출된 인간적 필요, 능력, 쾌락, 생산력 등의 보편성 외의 다른 무엇일까? … [풍요란] 이전의 역사적 발전 이외의 어떤 전제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총체성 [외의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모든 인간적 능력의 발전을 (사전에 결정된 잣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으로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인 전개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특수성으로 생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은 어디인가? 자신이 이미 되어진 어떤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절대적인 생성 운동 속에 있으려고 애쓰는 곳은 어디인가?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또는 한계 부여됨으로써 균형 잡게 되는 국가권력적 기관들 간의 비밀리에 일원화된 연계망이 공개됨으로써 파열될 때에, 여기 계엄령의 해제 및 탄핵안 폐기 이후 친위쿠데타와 여당의 연성쿠데타가 내란죄 구성요건과 위헌정당 해산 요건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여파의 때에, 그러니까 “오래된 것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한 위기의 때,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나는 그 공백 시기[인테레그눔]”(A. 그람시)에 무리는 계엄령의 목표가 공화적 분립을 파기한 내전적 통치력의 한계 없는 완전체․총체였음을 우선적으로 인식한다. 암세포가 퍼진 주권대행체와 이를 중심에 둔 말기적 권력계가 사실상 이미 폐절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힘의 구축이 권리상 아직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태, 낡은 노모스의 정당성 근거와 합법성 보위가 벌써 [박]탈정초Entsetzung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노모스의 취득이 여전히 수행되지 않고 있는 여기의 궐위상태[공위(空位)상태].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무리는 계엄령의 벡터에 따라 재정초될 권력관계라는 것이 최종심으로서 재량적 생살여탈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생명 통할의 총체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정하는바, 우선 무리는 ‘선량한 국민’과 불온한 비국민을 구별하는 총체적 내전권력(초법적 내전정체)의 정립을 저지하는 힘으로서, 그런 총-통에의 의지 및 총통이라는 최종목적을 절단하는 폭(권/위)력으로서, 다르게 생산되는 ‘총체성’의 이념을 체현하고 발현시킬 수 있다. 이 과정을 집약하는 홀러웨이의 중심 테제가 “풍요를 해방하라”이다. 그런 과정/소송을 홀러웨이와 함께 집약하면서도 달리 전개시켜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풍요’라는 번역어의 성립 사정에 대한 옮긴이 조정환의 문장들이다: “번역본으로 『자본』을 접한 우리는 ‘풍요’라는 단어의 자리에 대개 ‘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맑스가 사용한 독일어 원어는 Reichtum이다. 홀러웨이는 독일어 Reichtum을 대개의 영문 번역에서 사용된 wealth로 번역하지 않고 richness로 번역했다. 이런 독해 전략을 통해 wealth를 부르주아적 형식의 ‘부’로, richness를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진 ‘풍요’로 해석하는 개념 분할이 성립하는 것이다. 명사로 쓰일 때(Reich) 나라, 제국 등을 의미하게 되는 독일어 형용사 reich는 어원적으로 power(ful)을 함축하고 있다. 이 때문에 reich는 넘쳐흐르는 힘을 지시하기에 적절한 용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우리말 ‘부’가 아니라 ‘풍요’라고 옮겼다. 어원적으로 부유할 富부자는 넉넉함이 집 안에 가두어진 모양(즉 곳간의 풍요)을 가리킨다. 반면 풍년 豊풍자는 그릇 위에 가득 담긴 음식이 넘칠 것 같은 형상을 가리키고 넉넉할 饒요자도 먹을 것이 넘치는 모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풍부, 풍성 등 풍요와 결합된 넘쳐흐름의 언어들은 드물지 않다. 이 풍요는 흘러웨이에게서 존재론적 역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풍요의 해방, 그것은 궐위상태 속의 무리에게 가장 가까이 접선되고 있는 새로운 노모스 창출의 근원이자 방법이다. 그것은 어긋나는 무리에 의해, 무엇보다 궐위상태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형될 수 있을 구원적 사회구성체의 목표이자 산물이다. 그러나 사정은 단란하게 단선적이지 않은데, 무엇보다 궐위상태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병적 증상들이 폭발하는 위기적 시간이 궐위상태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이라는 순수통치의 별/이념형, 다시 말해 하달된 명령에서 벗어나는 일은 엄중히嚴 삼가도록 하는戒, 삼엄하게 자제시키는, 알아서 무념이 되게 하는 계엄령martial law, 내전권력의 법통할권. 달리 상기시키건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치안-축적의 명령어 속으로, 그 암구호 속으로 합성된 사회를 재생산하는 군정적 노모스. 그 낡은 노모스 바깥으로 어긋나면서 모여드는 자들, 말하자면 회집하는 아웃-로out-law. 그러나 그 무리의 클리나멘은 궐위상태 속에서 탄핵-재선출이라는 법치주의적 헌정질서의 회로와 접선되기 십상이다. 그런 한에서, 궐위상태란 떠나온 안전지대/고향으로의 회귀와 그런 고향으로부터의 진정한 어긋남, 공공의 안전이라는 보험법적 보장체제로의 환류와 그런 체제로부터의 탈구out of joint라는 상충하는 벡터의 전장이자 적대적 토포스들의 연계체이다. 인용된 맑스의 질문 형식으로 된 희망의 출처, 즉 ‘스스로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과 ‘절대적 생성 운동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홀러웨이는 답한다: “집회나 코뮌이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말하면서-듣는 운동이다. 그것은 미리-정의된 선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있는-곳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다. 이는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심지어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의 유토피아적 핵심, 그들의 존엄, 그들의 고통, 그들의 꿈을 만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인-나I-that-is-We와 나인 우리We-that-is-I의 상호 인정을 향해 손을 뻗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는 풍요의 합류이다. 그것은 상품 교환, 화폐, 국가 그리고 법을 통해 확립되는 사회적 결속에 대립하는 사회적 결속의 구축이다.” 궐위상태라는 전장에서 접선되는 유토피아적 핵심. 이 블로흐적 희망-유토피아 곁에 자리매김해 놓게 되는 것은 새로운 노모스의 장소성을 표현하면서 그 노모스의 창출과 접선되고 있는 “아-토포스A-Topos” 혹은 “유-토포스U-Topos”(없는/없애는 장소)론이다: “유토피아라는 인공적인 낱말 속에는 대지의 낡은 노모스가 근거해 있는 모든 현장확정들의 거대한 지양Aufhebung 가능성이 함축적인 선율로 표명되고 있다.”(칼 슈미트) 그런 지양의 실험적 가능성과 원상회복적 불가능성이 더불어 잠재해 있는 궐위상태 속에서 “희망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저항이 반란으로 넘쳐흐르는 정도 만큼이며 서로 다른 억압상태들을 연결하는 점들을 적어도 도식적으로라도 잇기join 시작하는 정도 만큼이다.”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과 절망은 반대말이 아니다. 절망을 단념하지 않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절망이 희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반복하는 절망이, 그런 절망 속에서 차이의 조형 가능성에 내기를 거는 일이 진정한 절망의 조건이자 현명한 희망docta spes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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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호·남승석 지음,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갈무리, 2024. 1. 24.) 서평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 이주봉 [철학자의 서재]

영화는 어떻게 시대의 예술이 되는가:

신간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국가 폭력의 관점에서를 읽고.

 

이주봉(국립군산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영화는 19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기술적 발명으로 등장하여, 당대 대중사회로의 이행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였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미디어 중 하나로 위세를 떨친다. 영화는 여러모로 특별한 콘텐츠인데, 문화산업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나 현실 및 세계에 대한 통찰 등을 제기하는 재현예술이라 할 것이다. 제임스 모나코같은 영화학자는 영화의 제작 및 수용 과정 등 그 생태계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요소들의 절대적 영향력을 염두에 둔다면, 영화가 예술이 된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디지털 전환 이후에도 영화는, 여전히 문화산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로 그 위세는 굳건할 뿐만 아니라, 이전 세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대와 현실을 관통하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 또 시대 이해 및 시대 비판의 단초를 제공하는 예술적, 미학적 논의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는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그리고 예술‧미학적으로 비판적인 논의의 장을 제공한 중요한 대중문화의 공간이자, 예술적, 인문사회과학적 사유를 풍요롭게 해준 지적 저수지가 되어왔다. 그 저수지를 풍성하게 해준 많은 사상가 중에서 발터 벤야민과 테오도르 W. 아도르노는 단연 돋보이는 사상가라 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교류하면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현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상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영화를 통해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커다란 지적 자극을 주었던 학자라고 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라는 저작은, 바로 이 두 사상가가 주었던 이러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의 가능성을 영화 작품들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눈에 띄는 저작이다.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한국(<공동경비구영 JSA>, <택시운전사>), 중국((<여름궁전>), 대만(<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일본(<복수는 나의 것>) 등 다섯 편의 영화를 벤야민 및 아도르노의 사유와 함께 읽으면서, 이들 각각의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별인간들은 세계의 폭력 아래에서 고통받는 모습이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기하고, 나아가 두 사상가의 사유에 기대어, 영화 속 개별인간이 당하는 그러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구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두 저자가 예시하는 다섯 편의 영화는 제작 시기나 제작 국가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는 모두가 국가권력 및 사회체계가 개별인간을 어떻게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지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문병호가 서문에서 쓰고 있듯이, “세계가 진행된 역사는 세계가 인간에게 자행한 폭력의 역사”(서론, 24쪽)이기에, 그 속에서 개별인간은 고통과 슬픔을 가질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병호와 남승석 두 저자는 벤야민의 ‘세계의 고통사’와 구제의 가능성)이나, 아도르노비판이론을 통한 ‘세계와 인간의 화해’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들 다섯 편의 영화들이 담고 있는 “충격적이고 추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이 어떻게 “슬프고 추한 세계를 증언”(25쪽)하는지를 추적하여 제시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강점이 자리하는데, 저자들이 이미 서문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책은 영화라는 예술 매체가 갖는 사유의 힘을 바로 벤야민과 아도르노 두 사상가의 개념과 함께 추출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벤야민-아도르노와 함께 보는 영화』 라는 저작에서, 영화는 “개념과 논리를 사용하는 논증으로써 인식을 제공하는 능력”(32쪽)이 아닌, “수수께끼와 같은 형상”(36쪽)에 담긴 알레고리를 통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해주는 예술적 힘을 가진 매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예술의 부정성”(아도르노)이나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가진 형상”과 관계하는 “알레고리”(벤야민)와 같은 개념을 통해서 문병호와 남승석은 영화라는 재현매체가 갖는 예술적 능력을 적절하게 설파한다고 할 것이다.

  문병호와 남승석의 신간에 담긴 영화 다섯 편이, – 물론 때로는 국가권력의 폭력이나 억압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기도 하지만, – 기본적으로 소위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을 가진 모호한, 벤야민의 개념을 빌리자면 ‘알레고리적’ 이미지들로 형상화되는 경우를 자주 보여주는 영화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에 예시하는 영화 속에 공히 담겨있는, 충격을 주고 추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각각의 영화적 “세계를 증언”하는 “수수께끼적인 성격”(13쪽)을 가진 영화가 되는지에 두 저자는 집중하면서, 바로 이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미지의 연속들에서 국가권력의 폭력, 즉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국가권력의 메커니즘”(33쪽)이자 “폭력을 자행하는 이념”(34쪽)을 추출하고, 이에 대한 통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두 저자가 다루는 영화들이, 대체로 오래전에 제작된 영화들이지만, 이들 영화는 21세기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과 그 의미를 새로이 해주는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수많은 무력한 개별인간이 프레카리아트로 전락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인식‧해명‧비판할 수 있는 모멘트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37쪽)

  더불어서 이 책의 장점은 전공이 상이한 두 학자가 함께 협업하는 방식이다. 두 저자가 각각 개별 영화에 대한 입장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형식은 조금은 낯설고 투박해 보일 수도 있다. 먼저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남승석이 영화적 맥락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영화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그 영화적 의미를 제시한 이후에, 아도르노 전문가인 문병호의 글이 뒤따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개별 영화 작품에 대한 두 저자의 입장이 그저 병렬적으로 배치된 형식으로 불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은 외려 영화 전반에 대한 영화학적인 맥락에서의 이해를 제시하고, 이어서 국가폭력과 개별인간의 고통이 갖는 사회적, 철학적 사유를 보다 깊이 있게 탐색하도록 해주면서, 독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넘어 영화가 시대의 예술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도록 해준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비판이론 연구가와 영화학자 사이의 융합연구서로서 이 책은 영화와 비판이론가의 사유를 넘나들 수 있는 징검다리이자 융합적 사유를 위한 적절한 시도로 긍정하게 되는 저작이라고 할 것이다.

움베르또 R.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J.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 2023. 11.) 서평 – 이수영 [철학자의 서재]

관찰자들의 다중우주

서평 |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

움베르또 마뚜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정현주 옮김, 갈무리, 2023

 

이수영(미술작가) 2024.1.31.

 

뉴런과 시냅스에 대한 설명이 전체주의와 아나키즘으로 연결된다. 북방산개구리의 시신경이 기계와 연결되고, 객관적인 앎의 불가능성이 윤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런 낯선 연결들로 궁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체계란 무엇인가’, ‘생명체는 어떻게 인지하는가’이다. 생물학 책에 ‘인식, 객관적 진리, 전체주의, 윤리’가 등장한다. 서문을 쓴 스태포드 비어의 말처럼 이 책은 학제 간 연구가 아니라 여러 학문을 초월하는 것으로 “새로운 도서관에 속하는 것이다(172).”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에는 「인지생물학」(마뚜라나, 1970)과 「자기생성과 인지」(마뚜라나, 바렐라, 1973)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인지생물학」은 마뚜라나 전 생애의 모든 연구와 저작의 기원이자 전주곡이다. 그 다음의 저서들은 전개와 변주이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사유를 이해하기에는 『앎의 나무』(마뚜라나, 바렐라, 최호영 옮김, 갈무리, 2007), 『있음에서 함으로』(마뚜라나,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등이 더 편하다. 하지만 마뚜라나 초기 글에는 낯설어서 기이한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들을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 낯설고 기이한 개념은 ‘관찰자’였다. 마뚜라나는 살아있는 체계를 ‘관찰자’라고 부른다.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내부이다. 고양이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보지 못한다. 새에 부딪치는 광자로 활성화된 자신의 시신경들의 상호작용을 바라볼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뉴런들의 상호작용 체계가 독립된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관찰자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본다. 마치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바깥 세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기라도 한 듯이. 고양이의 뉴런과 나뭇가지 위의 새,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가 마뚜라나·바렐라에게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 ‘안과 바깥’이라는 개념이 역설로 느껴진다면, 주체와 객체로 세상을 가르고 저 바깥 객체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알고자 몸부림치는 이원론에 너무 오래 익숙했기 때문이다.

마뚜라나는 말한다. “말해진 것은 모두 관찰자가 말한 것이다(62).” 객관적 실체는 없다. 객관적 앎은 없다. 주체와 객체는 구별되지 않는다. 대화는 객관적 정보의 공유가 아니다. “언어를 통해서는 전달되는 정보가 없다…듣는 사람이 자기 인지영역에서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이다(112).”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가 투명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브루노 라뚜르의 행위자들이 서로를 번역하듯이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외부를 번역하는 능력이다. 외부가 투명하게 내부로 드리우고 내 앎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마뚜라나의 관찰자 개념은 인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혹은 신경계를 가진 생명체에게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자기 고유의 재귀적 상호작용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체계이다. 즉 마뚜라나의 가장 유명한 업적인 ‘자기생성(Autopoiesis) 체계’를 갖추고 있는 존재자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재규어도 아메바도 꿀벌집단도 어떤 도시나 국가도 관찰자이다. 아메바, 재규어, 마을 공동체, 도시와 국가 모두가 동등한 관찰자라는 말은 평평한 존재자들의 민주주의를 이끈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과 레비 브라이언트를 떠올리게 한다. 신체가 다르면 인지가 다르다는 마뚜라나·바렐라의 말은 에두아르두 까스뜨루의 관점주의적 다(多)자연주의도 떠올리게 한다. 까스뚜르의 관점주의를 마뚜라나와 연결시켜 본다면, 모든 살아있는 존재자는 자신의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에 따라 세계를 사유한다. 재규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다르다. 폭력에 시달려 온 인간과 폭력을 일삼아 온 인간의 자기생성 체계와 우주는 다르다. 같은 하늘 아래 생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이고 있는 하늘이 다르고 신체가 다르다. 자기생성 체계의 차이들만큼 수많은 자연이 존재한다.

계통적이고 개체적인 반복적 경험으로 자기생성 체계의 구조와 구성은 변하지만, 자신을 자신이게끔 생산해내는 체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마뚜라나·바렐라는 이 자기생성 단위체를 ‘기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살아있는 체계가 ‘기계’라고 주장한다(193).” 살아있음은 어떤 정신이나 정령이 깃든 것이 아니라 물리적 동력을 가진 단위체이다. 이 ‘기계’ 개념은 펠릭스 과타리의 기계 개념으로 연결되었다.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기계는 과타리의 기계처럼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하고 연결하며 “자기 자신을 상수로 유지하며 변주한다(197).” 기계는 기계의 구성요소의 속성과는 독립적이다.

살아있는 체계는 환경과의 상호소통으로 자신을 생산한다. 마뚜라나가 인간의 사회체계를 윤리와 연결시키는 대목은 니클라스 루만을 떠올리게 한다. 루만은 마뚜라나의 자기생성 체계 이론에 영향을 받아 사회체계이론을 만들었다. 자신이 속한 더 큰 자기생성 체계인 국가가 자신의 자기생성과 상호체계를 배제하거나 제약한다면 전체주의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 마치 자신이 어떤 외부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이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다. “관찰자를 위해 그리고 관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53)”를 마뚜라나는 아나키스트 사회라 부른다.

새로운 도서관에 꽂힌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책은 분류보다는 연결과 종합을 따르고 있다. 페루난두 페소아에게 수많은 이명(異名)의 페소아들이 있듯이, 이 글에도 마뚜라나와 바렐라를 ‘적소(適所)’로 삼은 많은 이명들이 함께 나타났다. 내게는 마셜 맥루언,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레비 브라이언트, 에두아르두 까스뜨루, 펠릭스 과타리, 니클라스 루만이 그들이었다. “살아있는 체계는 주위환경의 일부, 즉 적소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므로 적소와 독립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64).”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관찰자들이 마뚜라나·바렐라와를 적소로 삼기를 바란다.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2: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 촛불 맨드라미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달고나)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오디오북 두 번째 영상입니다.

“박은미 작가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읽어보려고 합니다. 작가는 내가 나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나도 모르게 하는 거짓말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거짓말인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 부부싸움할 때 예전 일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투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기억이 실제 기억이 아니라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마음이 편한 쪽으로 기억을 조작합니다. 오늘은 고석정 꽃밭의 촛불맨드라미 위주로 풍경을 감상해볼게요. 맨드라미가 뾰족한 것이 참 예쁜데 어마어마한 넓이에 심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예쁜 꽃밭과 함께 [일상에서의 철학]을 들어보실까요?”(유튜브 채널 소개 내용)

아래 목차를 확인 하고 바로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0:00 하이라이트
0:49 인트로
2:09 나조차 속아넘어가는 나의 거짓말
4:28 인지부조화와 기억왜곡
9:02 후광효과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잊지마세요~!)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S7hJpoip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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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철학자의 서재]

들려주는 철학: <아주 일상적인 철학(박은미)>과 철원 고석정꽃밭의 버베나꽃

 

강지은(한철연 회원)

 

유튜브에서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www.youtube.com/@user-vg6dx9dk5m) 채널을 운영하는 강지은 회원이 박은미 박사의 신작 [아주 일상적인 철학] 출간을 기념하여  철원의 고석정 꽃밭을 산책하며 책을 읽는 오디오북을 제작했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의 주옥같은 구절들을 귀로 듣고 읽어보니,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한 발짝 더 깊이 생각하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내기를 제안하는 [아주 일상적인 철학]의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10월 말까지 꽃축제가 이어진다는 철원 고석정 꽃밭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마음의 어려움들을 풀어내길 제안하는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을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목차를 참고하여 찾아보시면 좋습니다.
1:05 인트로
2:37 내가 이런 건 다 부모 탓이라는 생각
6:46 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게 될까?
13:06 부모와 나의 관계는?
15:57 남 탓하지 말고 제3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참, 주인장 달고나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달달한 목소리로 문학과 예술을 읽어주는 유튜브 채널 ‘거기서 듣는 오디오북’ 많은 분들의 구독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W_QSEy5nPBQ?si=hxPJ6lpMD2npRm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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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철학자의 서재]

마음이 힘든 시기에 읽어둘 책, 박은미의 『아주 일상적인 철학』

 

오상현(한철연 회원)

 

박은미 선생님의 책, 『아주 일상적인 철학』은 “마음을 힘들게 하는 생각 습관 벗어나기”라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가, 또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해 철학자의 시선에서 고르고 담았다. 화가 많은 나로서는 일종의 처방전이었다고 해야겠다.

“논리적 결론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때 인간은 그 논리적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이끌어갑니다. 즉 논리적 결론이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논리적 결론을 외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요. 그러니 논리적 결론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그 결론을 외면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자기 보존을 원활하게 만드는 결론, 즉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결론을 참이라고 믿습니다.”(38쪽)

철학을 전공하면서 ‘논리’를 무기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에 열을 올리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일상에서 논리적이지 못하다. 행동경제학이 전통경제학보다 재미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다만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면 다행이겠지.

“반성 능력이 좋은 사람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입힐 가능성을 생각하고, 반성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즉 후자는 자신의 잘못을 못 보기에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거죠.”(214쪽)

‘정신승리’가 자기 보존에 유리한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요즘 유독 ‘책임’을 지겠다는 권력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답답하고 아쉬웠는데, 반성 능력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태풍도 폭염도 곧 지나간다 하였다.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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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 이병태 [철학자의 서재]

슈티르너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박종성 번역, 2023) 서평 (2)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나’의 개방과 해방에 관한 가장 지독한 사유

 

1. 슈티르너는 우리에게 오로지 맑스를 경유하여 알려진 철학자다. 바쿠닌, 바우어, 푸르동이 그러했듯이 슈티르너란 철학자는 맑스의 조롱과 비판 ‘덕분’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슈티르너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확인하기에 앞서, 혹은 그럴 필요도 없이 그의 이름은 확고한 ‘악명’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악명은 구체적으로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다. 주지하다시피 맑스의 신랄한 비판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맑스의 주저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한 이론, 사상, 실천적 노선 또는 그 주창자를 향한 ‘비판서’들이다. 『독일이데올로기』,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헤겔법철학비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자본』도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부제를 달고 있을 뿐 아니라, 속류경제학 및 부르주아 경제학에 대한 전투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특이하고 인상적인 비판은 『독일이데올로기』(이병창 번역)의 슈티르너 비판이다. 단순히 비판을 위해 한 사람에게 할애한 원고량도 놀랍지만, 글쓰기의 스타일도 전무후무하다. 우선, 늘 그렇듯 날카로운 비판이 전개되긴 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문장 및 구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나아가, 저술 전체가 마치 ‘악플’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슈티르너를 조롱하며 심지어 그의 연인까지 들먹일 정도다. 어쨌든, 국역본 기준으로 700여쪽에 달하는 이 장대한 비아냥거림 덕분에 슈티르너는 악명이나마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맑스의 공이 크다고 해야 할까. 궁금한 것은 이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이 왜 하필 슈티르너를 향했는가 하는 점이다. 맑스의 인성부터 『독일이데올로기』 저술시점이 지닌 역사적·개인사적 긴박함까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맑스의 비판, 그리고 그 강도는 논적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를 향한 맑스의 과도한 비판은 어쩌면 슈티르너의 사유가 지닌 영향력 또는 잠재력을 맑스가 간파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2. 슈티르너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 첫머리부터 이미 가장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저 위대한 자기중심적 사람을 섬기지 말고, 오히려 자기중심적 사람 자체가 되라고 제안한다.” 신과 신성, 위대한 인류애, 왕 또는 국가가 끊임 없이 설득해 온 자기 희생, 그리고 이 희생의 열매인 다른 이들의 안녕 및 행복이란 그가 보기에 명백한 기만이다. 진정 신과 인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드러내는 타협 불가능한 자기중심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신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나, 나의 전부인 나, 유일자인 나”만을 자기 행위의 근거로 삼는다. 세속의 ‘선량한 도리’란 신에 근거하든 인류에 근거하든 ‘나’에겐 부질없으니, 진리와 선, 정의와 자유 따위는 신이나 인류의 관심사일 따름이다. 나는 ‘나의 것’, 나만의 것, 따라서 ‘유일한 것’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나에게, 나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맑스가 말한 해방이 ‘현실’적인 것인 한, ‘이념’, ‘가치’, 이를 체화한 제도 등을 배제할 수 없고, 이를 통한 ‘통제’ 역시 불가피하다. 슈티르너는 신, 철학, 과학, 혁명 그 어떤 미명을 내걸든 ‘나’를 강박하는 외부를 완전히 거부하며, ‘나’의 유일무이함, ‘나’의 근원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순전히 ‘나’의 권역에 속하는 문제다. 해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또 혁명이 모든 억압의 소멸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역사, 21세기 민주주의의 현실, 과학을 비롯한 학문들의 현재, 현대인의 삶 등을 되돌아 보면 슈티르너의 이같은 목소리는 지금도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나아가 슈티르너의 사유는 헤겔이나 낭만주의의 기풍이 역력하긴 하지만, 영향력 있는 여러 현대 사상가들과 유사한 궤적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양한 외적 강제와 그로 인한 ‘나’의 침몰을 치열하게 사유했기에 어떤 점에선 푸코의 권력 이론에 맞닿고, 소크라테스 이후 인류가 고대의 생기를 상실한 채 ‘정신’과 ‘진리’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에 대한 니체의 사유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맑스는 아마도 슈티르너의 이같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했기에, 그리고 그의 사유가 혁명의 길을 흐트릴 정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구석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처럼 과도한 비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자의 목소리는 엇나가는 이들에 대한 규제를 함축하지만, 길끝의 영광을 선취하는 이는 도정의 고난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훨씬 달콤하다. 아마도 슈티르너는 후자였고, 맑스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후자의 힘을 간파했던 전자였을 듯하다. 맑스의 일갈에 묻힌 철학자를 우리말로 꺼내 21세기 한국의 철학도들에게 소개한 박종성의 노고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