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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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493a-495b]

* 다중οἱ πολλοί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철학자의 성향을 타락시키는 또 다른 집단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다중 스스로 기술의 경쟁자로 여기는 소피스트들을 꼽는다. ‘개인 보수획득술자  각각’ἕκαστος τῶν μισθαρνούντων ἰδιωτῶν으로서 소피스트들은 다중들이 모였을 때 형성되는 다중들의 신념δόγμα을 ‘지혜’σοφία라고 부른다.(493a) 이건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 센 짐승’θρέμματος μεγάλου καὶ ἰσχυροῦ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ὀργή 와 욕구ἐπιθυμί는 물론 그들이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그 모든 것을 알아내 기술τέχνη로 체계화하여συστησάμενος 그것을 지혜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493b) 그들은 이런 신념들과 욕구 중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름답거나 추한지, 좋거나 나쁜지, 또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등은 알지도 못한 채 이 모든 것들을 거대한 짐승ζῷον의 믿음δόξα에 따라 이름을 붙여 그 짐승이 기뻐하는χαίροι 것은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그 짐승이 기분 나빠하는ἄχθοιτο 것은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다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으면서, 불가피한 것τἀναγκαῖα을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그 불가피한 것이 좋은 것과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아예 본 적조차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ἄτοπος 교육자παιδευτής이다.(493c) 요컨대 그림γραφικῇ의 영역에서든 시가μουσικῇ의 영역에서든 정치πολιτικῇ의 영역에서든, 이처럼 다중의 분노ὀργή와 쾌락ἡδονή을 파악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소피스트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누군가가 다중과 어울리며 자신의 시나 다른 어떤 제작물이나 나라에 대한 봉사를 선보이면서 불가피한 ‘한도를 넘어서’πέρα 그들에게 맹종할 경우, 그것은 소위 ‘디오메데스의 필연’으로 그들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것들이 진정 좋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καταγέλαστος 만한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93d)

*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지혜는 이러한 소피스트들이나 다중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철학자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 또 ‘많은 각각의 것들’ τὰ πολλὰ ἕκαστα이 아닌 ‘각각의 것 자체’αὐτό τι ἕκαστον가 있다고 생각한다.(494a) 대중들πλῆθος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ἀδύνατος하다.(493e)

*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성향에 어떤 구원σωτηρία이 있다면 모를까 어떤 젊은이가 그 활동에 머무르면서 완성단계τέλος에까지 이르기는 절대 쉽지 않다. 그 젊은이가  ‘쉽게 배우는 능력’, ‘기억력’, ‘용기’, ‘호방함’ 등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그의 친지들과 시민들οἱ πολῖται,πολίτης은 그의 미래의 능력을 예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고 미리 아부도 떨고 추켜세우며 마냥 굽신거릴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이는 그리스인들Ἕλλην의 일들과 이방인들βαρβάροἱ의 일들을 모두 다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희망ἐλπί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결국 지성 νοῦς이 결여된 헛된 자부심σχηματισμός과 허세φρόνημα, 교만에 빠지게 된다. 특히 그가 큰 나라 시민으로 부유하고πλούσιος 혈통도 좋고γενναῖος  잘 생긴데다가εὐειδὴς 체격도 좋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494a-c) 그래서 그에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진실τἀληθῆ을 알려주면서 ”진정 지성을 갖추려면 지성에 노예 노릇을 하지δουλεύσαντι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어도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의 자연적 성향 때문에 그 이야기를 좀 알아듣고 마음을 돌려서 철학에 이끌릴 경우(494d) 그의 쓸모χρεία와 동료관계ἑταιρία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말릴 것이고 다른 한편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을 사적으로 음모를 꾸며ἐπιβουλεύοντας 공적으로 재판정ἀγών에 세울 것이다.(494e) 이렇듯 철학적 성향의 부분들 자체도, 나쁜 양육을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활동을 멀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소위 좋다고 하는 것들, 즉 부와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욱 더 타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최고의 활동에 적합한 최선의 성향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어떻게 몰락ὄλεθρος하고 파멸διαφθορά하는지 다시 말해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타락한 소수의 사람이 우수한 자질의 크기만큼 나라들에게나 개인들에게나 가장 큰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49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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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a-e : 이곳에서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정의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다중들이 말하는 지혜(sophia)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가 극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소피스트들에게 지혜는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대중의 욕구를  알아내서 체계화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불가피한 것’(tanankaia)’(493c)으로 여기는 것(대중들의 믿음(doxa)이나 신념(dogma) 혹은 물질적 필요,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디오메데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오딧세우스에게 행한 불가피한 대응 같은 것인 양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비웃음을 살만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에 따라 대중이 이러한 믿음과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아테네의 민주정 아래에 있는 이상, 대중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철학자들의 지혜와 정의,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아름답거나 정의롭다고 믿고 있는 ‘많은 각각의 것들’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이다.

* 494c-495b : 철학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정말 철학자가 그래서가 아니다.  그것은 배의 비유에서 살폈듯이,  다만 피폐한 아테네의 정치체제 즉 아테네 민주정 그 자체가  소수의 진정한 철학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물론  그 밖에 다수의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철학에 대한 나쁜 평판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나 그러한 피폐한 환경 하에서 타락한 철학자 또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자질들의 우수함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해악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저질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495b)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적 자질에 더해 부유함과 혈통, 훌륭한 외모와 체격까지 젊은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자라나면서 어떻게 헛된 자부심과 허세에 빠지게 되는지 그래서 나라와 개인에 얼마나 큰 해악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철학적으로 돌려세우는 노력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추었지만 끝내 타락한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라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실제로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는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둘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으로서  철학적 자질도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체격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는 18세 전후 포테다이아 전투에 출전했다가 소크라테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자처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철학자가 되기에는 그의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정계에 뛰어든 이후 뛰어난 능력으로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실책으로 권력에서 밀려났음에도 적대국이었던 스파르타로까지 망명하는 등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망명지에서 다시 아테네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  고도의 술책을 동반한 정치적 기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군의 능력도 자신을 영원히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결국 평생 정치적 풍운아로 살다가 기원전 404년 자객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플라톤의 대화편 <알키비아데스>, <향연>에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기본적으로 철학보다는 정치적 야망에 젖어 있던 알키비아데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를 철학에로 이끌고 가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은 대화편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알키비아데스 I> 104a-b,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I 16 1—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키비아데스’ 1. 4, 4. 1 등 참고)

* 아무려나 나라를 몰락과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에는 알키비아데스 같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젊은이가 타락하여 그 범상치 않은 뛰어남으로 오히려 나라를 더 큰 곤경으로 끌고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라를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로 자라날 젊은이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원천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시종일관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다름 아닌 아테네 민주정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체제로서 아테네 민주정이 그대로 존속하는 한, 최고의 활동에 가장 최선의 성향의 몰락과 파멸은 불 보듯 뻔하며 그에 따라 종국적으로 나라가 몰락하고 파멸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민주정일지라도 철학자 모두를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그러한 피폐한 정치체제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처음부터 신의 섭리moira와 구원sōzein에 따라(492e) 철학적 성향을 끝까지 보전하며 그것이 일러주는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불멸의 증표이다. 요컨대 민주정과 참주정을 비롯한 현실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여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들을 온전히 길러내고, 그들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 즉 철학자 왕정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플라톤이 이상국가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과제였던 것이다.

* 아무려나 이곳 논의의 목표는 그러한 철학자 왕정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이전에, 왜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나라를 파괴하는 나쁜 악당이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밝혀 철학과 철학자를 세상의 평판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이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철학적 자질들을 타락시켜 나라를 근본적으로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철학자 개인이 아닌 제도로서 민주정 그 자체임을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져다주는 배경에는 제도로서 민주정과 그 치하에서 타락한 철학자들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타락한 철학자들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이 마치 진정한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지만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는 가짜 철학자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런 연 후 철학이 비난 받은 현실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진정한 철학자들이 왜 소수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논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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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 – 497a)

 

[495c]

* 소크라테스는 이제 황량하고ἐρῆμος 불완전한ἀτελής 상태로 친족이 없는 고아ὀρφανός처럼 내버려진 철학이 그 밖의 또 어떤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인간 나부랭이ἀνθρώπιον들이 멋진 명칭들과 외관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철학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감옥εἱργμός에서 탈옥해서 신전τό ἱερό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 작업βαναυσία에서 탈출해ἀποδιδράσκοντες 철학으로 뛰어들었기ἐκπηδῶσιν 때문이다. 그것은 대머리φαλακρός에 작달막한 대장장이χαλκεύς가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자마자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생각διανόημα과 믿음δόξα에서 진실로 궤변σόφισμα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γέννα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φρόνησις은 결여한 서자νόθος를 낳을 것이다.(495c-496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걸맞고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결국 테아게스Θεάγες 등 일부의 경우를 포함해 정말 극소수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의 경우도 ‘영적인 신호’τὸ δαιμόνιον σημεῖον가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이 얼마나 즐겁고 축복된 것인지를 맛본 한편 대중의 광기μανία를 또 충분히 목도한 까닭에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마치 짐승들 사이에 떨어진 것처럼 혼자 모든 야만ἄγριος 족속에 맞서기에 충분하지도 않아, 부정의에 가담하지도 않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σύμμαχος ἐπὶ τὴν τῷ δικαίῳ에 원군으로 함께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라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겨울철χειμών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기 일만 하게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불법ἀνομία과 불경한ἀνόσιος 일들로부터 정결함καθαρός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삶을 떠날ἀπαλλαγήν 때 아름다운 희망ἐλπίς을 가지고 평안하고ἴλαος 너그러운εὐμενής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496a-e)

* 이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τὰ ἐλάχ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최대의 것τὰ μέγ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도 아니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에게 맞는προσηκούσης 정치체제를 만났다면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αὐξήσεται 사적인ἴδιος 것들과 함께 공적인κοινός 것들도 구해냈을 텐데 σώσει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49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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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5c-e : 철학이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는 텅 빈 철학의 자리에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작업으로 몸이 망가진 것처럼 영혼도 그렇게 깨지고 부서진 상태로’(495e) 자신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도 않는 철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가짜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우선은 소크라테스가 가짜 철학자를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로서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란 수공업 가문 출신으로서 부를 축적한 후 철학자 행세를 하려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그 가짜 철학자를 ‘생각과 믿음에서 진실로 궤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은 결여한 서자를 낳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을 추가로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에는 소피스트 또는 그들을 추종하며 교양인 행세를 하는 일군의 젊은이들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프로타고라스> 318e 참고)

*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플라톤이 가짜 철학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 기원전 436-338)를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소크라테스는 아울로스를 만들어 큰돈을 번 구리 세공업 가문 출신으로 그 부를 토대로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 고르기아스 등으로부터 수사학 교육을 받은 후 위대한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로서 평판을 누렸지만 정작  스스로는 ‘철학자’(philosophos)로 불리기를 바랐던(<안티도시스> 271 ff.)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소크라테스는 당대 유명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수사학 학교를 세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마케도니아와의 화친을 통해 몰락해가는 아테네를 구하려 온갖 힘을 쏟았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플라톤은 <파이드로스>(279a-b)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그에 대한 아주 짧은 평가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서도 이소크라테스를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철저히 도외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현대의 주석가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짜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를 소환하여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쏟아붓고 있다.

* 495e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 : 이소크라테스가 대머리에 작달막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그는 여늬 젊은이들 처럼 수사학을 배운 후 정계 진출을 꿈꾸었으나 목소리가 작고 소심한데다 가세까지 기울어  소장을 작성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뛰어난 수사학적 지식으로 큰  돈을 벌어 규모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버금가는 수사학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인들로 부터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받는 방식으로 말년에는 부친을 넘어설 정도로 큰 부를 이루었다고도 전해진다. (J. Adam. 해당 노트, 김봉철 <이소크라테스> 신서원 2004 참고)

*이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이후 서양 철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서양 지성사에서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라는 기록은 쉽게 접할 수 있어도 철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거의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접어들어 플라톤에 의해 다만 궤변을 일삼던 자들로 폄하되었던 소피스트들이 당대 철학사적 전환을 이끈 사상가들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에 발맞추어, 특히 근대 통일 국가를 열망하던 독일 사상계에서 이소크라테스의 범그리스주의가 크게 주목을 받은 이래, 이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당대 시대현실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관을 내세운 선구적인 철학자로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와 조화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폴리스들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아테네 제국주의와 이소크라테스가 지지했던 강대국 마케도니아 중심의 범그리스주의는 다(多)의 공존으로 표징되는 전통 그리스 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 제국주의와 범그리스주의는 알렉산더를 통해 헬레니즘적 팽창주의로 이어져 고대 사회의 붕괴를 거쳐 군사적 사상적 세계주의와 기독교의 세계동포주의와 결합하여 종래에는 거대 로마제국을 탄생시켰고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오늘날 근대 제국주의와 세계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 496a 소수의 철학자가 남게 되는 경우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우들로 1) 고귀하고 훌륭하게 자라난 사람이 망명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방해 없이 철학에 머물게 되는 경우 2) 위대한 혼을 가진 자자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국사를 깔보고 철학에 머무는 경우 3) 아주 소수의 훌륭한 성향을 가진 자가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철학에 머무는 경우 4) 테아게스처럼 병치레로 정치하기가 힘들어 하는 수 없이 철학을 하는 경우 5)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신호를 접한 경우를 들고 있다. 주석가들은 1)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시라쿠사에서 탈출해 아테네로 망명한 플라톤의 친구 디온(Dion)을, 2)의 경우는 비록 에페소스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왕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철학의 길을 택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를, 3)의 경우는 여기서처럼 신적인 은혜로 타락의 유혹을 이겨내고 철학에 머문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Phaidon) 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을(플라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4)의 경우는 테아게스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철학에 머문 사람들을, 5)의 경우는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전 어떤 때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오직 그에게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496 b-c ‘영적인 신호’ to daimonion sēmeion : daimonion은 형용사형으로서 정관사 ‘to’가 앞에 붙어 추상명사가 되면서 ‘신성’(Divinity)과 ‘신력’(divine Power)의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에게서 오는 특별한 신호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31c-d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에 대해 한 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가히 신적인 수준의 냉철한 철학적 자기 반성력을 지칭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수호신으로서 daimōn이란 말이 제10권 617e에 나오고 <파이드로스> 242b-c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제제로서 ‘익숙한 신호’(to eiōthos sēmeion)란 말이 나온다.

* 496c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 : 앞서 492e-493a에서 우리는 다중의 광기가 지배하는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것인지를 살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절망감은 그대로 이어져 민주정 체제에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건전한 행동도 할 수 없음이 처절하게 토로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겨울철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과 불경한 일들로부터 정결함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살다가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평안하고 너그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만족한 삶이라는 것이다.(496c-e)

* 이곳에서 나타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무력감, 현실 도피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이 갖는 실천적 성격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실망감마저 안겨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강해 62에서도 자세히 살폈듯이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혁명적 결론을 보다 절실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적 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이상국가론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점진적 개선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점진적 개혁이론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 현실에서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구상하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 철학자 왕의 출현을 담보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강해 62’를 다시 참조할 것)

* 플라톤의 이러한 의도는 이어지는 아데이만토스와의 대화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적인 성품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태에 대해 어찌 보면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토로하고 있다. 아데이만토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 소수의 사람이 행하는 일들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를 위로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반대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소수의 철학자들이 최대의 것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것은 앞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이 소수 철학자들의 소극적인 행동 방책에 대한 변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장차 소수 철학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적극적인 행동 방책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다 절실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이자 일종의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내심 의도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철학자들의 신념 유지를 위한 소극적인 삶의 방식을 자조 섞인 마음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걸맞은 철학자 왕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내적 성장은 물론 공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축하는 것임을 보다 절실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삶이 과연 이렇게 끝나야 할 것인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절규인 것이다. 진정 그들이 수행해야  마땅한 일은 따로 있다. 철학자의 목표는 현실 도피를 통한 유유자적한 삶이 아니라 진상에 대한 지적 인식과 실천을 통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비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비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언급을 모두 마무리하고 태세를 전환하여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을 논의 주제로 다시 꺼내 든다. – 끝 –

 

<다음 주제>

  1. 4.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497a – 502c)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1

 

[489e-493e]

* 소크라테스는 이제 뛰어난 자연적 성향φύσις을 타고 난 사람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되게πονηρὸς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렇게 못되게 된 것을 철학 탓αἰτία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를 함께 설명하려 한다.(489e). 그런데 그러한 설명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언급했던 그 훌륭하고 뛰어난καλόν τε κἀγαθὸν 사람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그 성향이 잘 발현되었을 경우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배움을 사랑하는 자’φιλομαθής로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통원하여 진리ἀλήθεια를 추구하는 사람이다.(490a), 그는 ‘있는 것’τὸ ὂν을 향해 매진ἁμιλλᾶσθαι하고 그것에 적합한 영혼의 부분으로ᾧ ψυχῆς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ο ὃ ἔστιν ἑκάστον의 본성에 접할 때까지 열정ἔρως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혼의 그 부분을 통해 ‘참으로 있는 것’과 결합하여μιγείς 지성νοῦς과 진리ἀλήθεια를 낳는다. 그리고 그는 그 앎을 가지고γνοίη ‘진실한 삶’ἀληθῶς ζῴη을 살며 진실한 양육τρέφειν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진통ὠδίς에서 벗어난다.(490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가무단χορός의 구성원들이 그러하듯 뛰어난 사람에게 따라 붙는 자연적 성향들로서 건전하고ὑγιής 정의로운 성품ἦθος과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비롯해 용기 ἀνδρεία,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 쉽게 배우는 능력εὐμάθεια, 기억력μνήμη 등을 언급한다.(490c) 이러한 서두적 언급은 철학자들이 타락했다고 비방διαβολή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들이 어떻게 왜 타락했는지를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490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1) 이러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διόλλυται, 2) 다중들에게 쓸모없다ἄχρηστος고 여겨졌던 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파멸에서 벗어나는지(490e)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면서 철학자들이 타락한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온 가짜 철학자들이 자신들에 걸맞지 않게ἀνάξιος 어떠한 방식과 활동ἐπιτήδευμα으로 잘못을 저질러 철학에게 나쁜 평판δόξα을 가져다주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91a)

* 그런데 위와 같은 3가지 논제 가운데 우선 소수ὀλίγος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에 관해 논의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놀랍게도 앞서 언급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들에 더해 아름다움κάλλος과 부πλοῦτος, 신체의 강함ἰσχὺς, 힘 있는 가문συγγένεια ἐρρωμένη,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모든 것들이 역설적으로 그 자연적 성향들을 못되게 만들어 영혼을 파멸시키고 철학을 멀리하게 하여 결국은 철학자들을 타락에 빠트린다고 말한다.(491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전체적ὅλος으로 제대로ὀρθῶς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이렇게 해서 시작된 1)의 논제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식물φυτόν이든 동물ζῷον이든 모든 씨앗σπέρμα이나 새끼들의 경우 적절한 양분τροφή이나 계절ὥρα, 장소τόπος를 얻지 못했을 경우 더 힘 있는ἐρρωμενέστερον 것일수록 그만큼 더 적절한πρεπόντων 것들을 결여하게 되어 단순히 좋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최고의 자연적 성향이 그에 맞지 않는ἀλλοτριωτέρον 양육을 받으면 그저 그런φαῦλος 성향보다 더 나쁘게 되어버린다.(491d)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가장 좋은 영혼이 나쁜 교육παιδαγωγία을 받았을 때 특별히 나쁘게 된다. 그러므로 큰 부정의τὰ μεγάλα ἀδικήματα와 극단적인ἄκρητος 못됨πονηρία은 활기찬νεανικός 자연적 성향이 양육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되었을 때 생기며, 반대로 약한ἀσθενής 자연적 성향은 큰 좋은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하고 큰 나쁜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한다.(491e) 요컨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의 경우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ἀρετὴ을 이루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신들 중에 누군가라도 도와주지 않는 한, 이번에는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49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을 타락시키는 이유 즉 그러한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누가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힌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소크라테스가 가장 나쁜 양육 주체로 꼽는 집단은 소피스트들이 아닌 다중들ὁὶ πολλοί이다. 그는 설사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해도 다중들에 비하면 정작 이렇다 할 게 없다고 말한다.(492a) 진정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러한 사적인ἰδιωτικός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μεγίστος 소피스트들 바로 다중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젊은이든 늙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들을 가장 완전하게 교육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낸다.(492b) 다중들은 민회ἐκκλησία나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극장θέατρον, 군대 막사στρατόπεδον,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σύλλογος에서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일삼는데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그 비난과 창찬의 소리가 두 배로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τὸ νέος는 그러한 비난과 칭찬에 휩쓸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적인 교육παιδεία ἰδιωτικ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아름답고καλὰ 추하다고αἰσχρὰ 주장하며, 그들이 하는 활동을 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492c) 게다가 교육자οἱ παιδευταί이자 소피스트인 다중들은 자신들의 설득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을 행동으로 강제ἀνάγκη하여 시민권을 박탈ἀτιμία하고 벌금χρῆμα이나 사형θάνατος 등으로 징계한다κολάζουσι. 그러므로 어떤 소피스트 또는 어느 누구도 이들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한 시도자체가 어리석은ἄνοια 일이다.(492d) 그리고 신적인θεῖον 성품ἦθος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들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παρὰ τὴν τούτων παιδείαν을 받아 덕ἀρετὴ과 관련해서 다른 종류의 성품이 생기는 일은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 안에서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면 그는 신의 섭리μοῖρα로 구원σώζεῖν을 받은 것이다.(49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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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e ‘못 되다’poneros : 플라톤은 이곳 문맥에서 이 말을 ‘타락phthora’, ‘철저히 파멸되다diollymi’라는 말과 함께 ‘철학적 성향의 전락 또는 붕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490e 참고) 기독교 주기도문 중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rhysai hemas apo tou ponerou라는 구절에서 ‘악’의 원어 또한 그 말이다.

* 489e ‘훌륭하고 뛰어난kalon te kagathon’ : 플라톤이 가장 훌륭한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최고의 수식어. 당연히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489e 앞서 이야기 했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 철학자의 성향과 관련하여 앞서 484a부터 487a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가리킨다. 487a에서는 그것을 기억력이 좋음, 쉽게 배움, 호방함과 정중함, 진리와 올바름, 용기와 절제 등으로 요약하고 있고, 이곳 490c에서도 건전함과 정의로움이 더해지면서 그것들 모두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 490a-d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내세우고 있는 철학자에 대한 변론은 철학자의 타고난 성향이 아무런 장애나 방해 없이 발현될 경우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관한 언급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성향이 타락하지 않고 제대로 발현 되었을 때의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논하기 전에 이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부터 먼저 제시하려는 까닭은 타락과 무관한 원래 상태부터 이야기해야 다중들이 제기하고 있는 철학자의 타락 내용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진정한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거론하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영혼의 상태를 갖는지를 규정(490d)하려 한다.

* 490b 영혼의 이 부분이 그와 결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아야 : 이곳에서는 철학자가 갖는 철학적 인식의 특성이 남녀의 결합과 출산 및 양육 과정의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다. 즉 철학자가 갖고 있는 영혼의 부분으로서 지성nous은 ‘있는 것’to on에 열정eros으로 다가가 그것과 결합mignumi(‘성교’의 뜻도 있다)하여 자식으로서 지성은 물론 진리를 출산하고 그 자식을 진실되게 양육할 때까지 진통ōdis을 멈추지 않는다. 산파술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철학자는 스스로 지성과 진리를 낳는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 지성과 진리를 낳도록 이끌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있는 것’,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는 이데아를 가리키고 ‘각각의 많은 것들’ta polla hekasta은 그 이데아가 관여된 현상계 사물 또는 사태들이다. 이처럼 영혼과 존재의 결합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대화편들(<파이드로스> 246e-247d, <향연> 210a-212a, <테아이테토스> 156a ff)에도 나타나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그 결합은 신비적인 특성을 갖고 그려진다. 어떤 이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통이 상대에게 열정으로 다가 가는 데에서 부터 결합하여 낳고 양육할 때까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철학적 인식에 다가가는 것은 물론 그것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고 보전하고 실천하는 과정 전체가 진통인 셈이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관점에서 철학은 실로 그 자체로 고통을 수반하는 고도의 지적인 탐문이자 비판적 자기 반성 그리고 실천인 것이다.(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490c 가무단chorus : 서로가 서로에게 부합하고 함께 어울리는 무리를 의미한다.

* 490d ‘일부는 쓸모없고 나머지 대다수는 완전히 나쁜 사람’ : 어떤 원전 역본에서는 ‘일부는 쓸모없고 다른 일부는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문 ‘다른 일부’에 해당하는 원문은 ‘polus(대다수)’이다. 즉 ‘다른 일부’라는 번역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진정한 소수 철학자들과 다수의 타락한 철학자들 간의 수적 대비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역이다. 원전 역본임을 자부하려면 소소하지만 이러한 부분도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490e-491a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무용성에 관한 논의에 이어 철학자의 타락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를 미리 밝힌다. 요컨대 우선 1) 철학자가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다룬다. 그다음 2) 그럼에도 그런 가운데 어떻게 소수의 철학자가 그 타락을 면하게 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가짜 철학자들이 어떤 행태를 범하면서 철학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지를 살핀다.

* 491b-491e : 이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요즘 사람들도 흔히들 말하듯 ‘똑똑한 놈이 나쁜 짓하면 덜 똑똑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초래한다.’, ‘도둑질도 더 똑똑하고 더 힘센 도둑이 더 큰 도둑질을 한다.’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설명들은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철학자가 갖고 있는 자연적 성향들의 목록을 보면 진리와 정의뿐만 아니라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타고난 성향이 뛰어난 젊은이가 타락을 했다고 말할 경우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의지가 줄어들었거나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자연적 성향 내지 능력이 줄어들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타고난 철학적 성향의 타락이란 그가 열거한 수많은 자연적 성향들 중 이를테면 진리와 정의 등 ‘있는 것’을 향한 성향의 타락에 한정해야 하고 목적이나 가치와 무관한 다른 일반 기능적 능력은 제외된다고 보아야 할까? 소크라테스도 보다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더 크고 나쁜 일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을 때(491e) 그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이미 타락한 자에게도 활기찬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일관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 중 어떤 것은 타락하고 어떤 것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곳에서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명들 모두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성향들의 예를 들고 그 성향들의 타락을 설명하려 하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더 자세하게 알려 주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하게’akribēs 말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hōlos ‘제대로’ortōs 파악해야 그것이 분명하게 이해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핀 대로 사실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분명해보이지만 자연적 성향들을 개별적인 성향들 차원에서 자세하게 나누어 설명할 경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 자연적 성향들을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의도와 설명이 어떻게 일관성을 갖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연적 성향들의 타락은 개별 성향들 차원에서 각각의 성향들의 타락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적 성향들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속에 드러나는 그 자연적 성향들 전체의 타락 다시 말해 그러한 성향들 전체의 담지자로서 철학자 자신의 인격 내지 품성ēthos의 타락을 말한다. 이를테면 용기와 절제 등이 타락한다는 것은 성향들의 개별적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향들이 다른 성향들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과연 진리와 정의의 성격을 더욱 보전하고 관철하는 쪽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기와 절제, 뛰어난 기억력과 호방함, 강건한 신체 등 모든 타고난 성향들은 개별적으로 기능적 뛰어남을 갖고 있을지라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와 정의가 아닌 거짓과 부정의를 드러내는 것들로 작용할 경우 이미 그것은 타락한 성향들이며 게다가 그 기능적 뛰어남으로 그 작용력을 배가시킬 경우 그 성향들은 더욱 타락한 성향들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자의 타락 여부는 그가 자연적 성향으로 갖고 있는 뛰어난 성향들이 어떤 양육을 통해 어떤 총체적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식물이나 동물, 씨앗의 경우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체가 나쁜 환경이나 토양에서 양육될 경우 더 강한 성향을 가진 것일수록 더 오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면 있지 그 강함 때문에 더 빨리 시들거나 죽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호박씨가 나쁘게 양육된다고 해도 병들고 허약한 호박은 될지언정 호박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철학적 성향이 나쁜 환경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다만 철학적 성향 자체는 다만 줄어들거나 약해질 뿐이지 그 반대의 다른 성향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위와 다르게 플라톤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씨앗이든 험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일수록 애초의 특성보다 훨씬 더 거칠고 억센 특성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환경 조건이 아주 나쁜 곳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일수록 그 생명체들은 건강에 좋지 않은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쁜 환경에서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나쁜 환경에 적응하여 그 나쁜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 492a에서 결론 내리고 있듯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을 이루게 되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그 성향의 뛰어남이 크면 클수록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참주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들로 태어나 참주에 의해 자신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양육되었을 경우 그 아들은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더욱 사악하고 못된poneros 참주, 타락한 참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이러한 사례는 민주정 치하에서 권력을 꿈꾸는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젊은이들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고 태어날 지라도 그가 태어난 곳이 민주정 치하라면 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타락을 면치 못할 것임을 통탄스러운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 492a ‘자네도 다중들처럼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타락한 젊은이들이 있으며, 타락시키는 일을 이렇다 할 만하게 하는 사적인 소피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다는 다중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젊은이들의 타락과 관련하여 소피스트들에게 돌릴 이렇다 할만한 탓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우리는 젊은이의 타락과 관련하여 ‘사적인idiōtikos 소피스트’ 즉 소피스트와 ‘위대한megistos 소피스트’ 즉 다중이 대비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그 발언은 그 둘을 대비하면서 다중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해 사적인 소피스트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수사적 차원에서 언급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중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다중들도 소피스트라고 부르면서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정작 소피스트들에게는 ‘사적인’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사적인’의 원어 idiōtikos가 ‘아무렇게나 하는’, ‘비전문가적인’, ‘아마추어적인’이란 의미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이 문맥에서 소피스트를 옹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그들을 폄하하고 경멸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듯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다중의 기호에만 영합하여 그들로부터 보수를 받고 살아가는’(493a) 일개 지식 장사꾼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피스트의 영향력이 주로 젊은이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다중의 영향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실로 막강하다. 요컨대 이 문맥에서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으려는 대상은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다중들인 것이다.

* 492b ‘대중’plēthos : 전번 강해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dēmos)’과 관련하여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도 쓰고 있고 여기에서처럼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이 표현들은 민중 일반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굳이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민중dēmos은 넓은 의미의 people 즉 일반 대중이라는 계급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다중hoi polloi은 ‘소수의 사람들’hoi holigoi과 대비하여 말 그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는 수적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대중plēthos 또한 원어 자체가 양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거의 동의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군중ochlos은 어원상 ‘동요하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집단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상태의 다중 또는 대중’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politēs는 도시국가 구성원 전체 즉 시민 또는 국민을 나타내는 말이다.

* 492b ‘민회나 법정이나 극장, 군대 막사,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 : 이 문맥은 앞서 언급된 ‘위대한 소피스트로서 다중’이 그저 다중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회나 법정, 극장과 공공 대중 집회’라는 모종의 정치 사회적 시스템이 일상적으로 확립된 이른바 ‘민주정 치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임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서 꼽고 있는 다중은 그냥 다중이 아니라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하고, 여기에 더해서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비난과 칭찬의 소리를 두 배로 만들 수 있는’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에서 중추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이른바 군중으로서 다중인 것이다. 사실 다중 또는 대중은 민주정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다중은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물며 철인왕정 치하의 다중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전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499e-500b) 이렇게 보면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다중 그 자체라기보다는 다중을 군중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근본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른바 정치체제로서 민주정인 것이다. 위대한 소피스트들이 지배하는 이런 민주정체 하에서는 어떠한 사적인 교육도 맥을 못 출 뿐만 아니라 일부 말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시민권 박탈이나 벌금, 사형 등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징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 그 흐름에 휩쓸려가 타락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소크라테스가 493e에서 ‘대중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때 대중 역시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가 아니라 아테네 민주정 치하의 다중에 대한 것이라 할 것이다.

* 492e-493a의 내용은 그야말로 민주정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는 절망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에 대항하여 그들과 다른 의견을 표출할 수도 없고 설사 표출을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을 받아 덕과 관련하여 인간으로서 다른 종류의 성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가히 신의 섭리가 그를 구원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 우리는 이러한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관련하여 근대 이후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토대로 아래와 같이 비판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은 때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 공론의 장을 통해 독립된 개인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현대 민주주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법 앞의 평등과 자유권을 보장하며 그것을 토대로 개인은 어떠한 국가적 폭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중이 군중화 된다고 해서 반드시 반지성적으로 휩쓸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촛불혁명이 그랬듯이 다중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고 연대하여 그 결집된 힘을 통해 정치적 억압과 불합리성을 개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중이 이와 같이 집단적인 지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현대 민주주의의 대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 플라톤이 현대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면 여기에서 표출될 정도의 절망감으로 민주정을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민주정 비판은 당대 아테네 민주정 그것도 저물어 가는 혼돈기 아테네 민주정의 피폐상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당대 민주정에 대한 그의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가 한편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적으로 뒤돌아보게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성찰을 적지 않이 담고 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다중 자체가 아니다.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플라톤은 다중 역시 철학적 교유와 소통을 통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다(499e) 문제는 아테네라는 특수한 민주정 체제가 대중의 지배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대중의 의사 결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중 자신이 아니라 아무런 공동체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저 대중들의 욕망에만 부응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의 선동 기술을 마치 지혜인 양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비록 사적인 소피스트들이지만 그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귀족 청년들과 선동정치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고 그 영향이 종국적으로 선동정치가들을 통해 다중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존재로 등극시킬 만큼 그 폐해의 크기는 가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하다. 무엇보다 아테네 민주정은 이들의 피폐한 영향력을 통제 또는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개선의 여지도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오로지 그들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배양 장치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중의 욕망을 지배하고 그들의 분노와 쾌락을 파악하는 기술을 체계화한 후 이른바 그것을 지혜라는 이름으로 사적 소송 기술 영역에서 만이 아니라 정치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결과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소송과 음해 정치적 선동이 난무하는, 거대하고 힘센 짐승들이 미치듯이 날뛰는 무도한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린 아테네 민주정과 비교하여 역사적 등장 배경은 물론 인구와 규모, 제도의 복잡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핵심 가치를 보존하려는 여러 가지 대의적 법적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다중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관한 문제 즉 공론의 장으로서 언론 영역에 한정하여 그 근본 문제점을 들여다 볼 경우, 최소한 현대 민주주의와 아테네 민주정이 갖는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론의 장 역시 여전히 아테네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다중의 욕망과 권력에 영합한 지식인들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사결정 또한 비록 다수결에 따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 권력 등 소수의 특권적 지배 엘리트들이 생산한 담론들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황금지상주의에 압도되어 있는 한, 다중들의 욕망 또한 이기적이고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는 모두가 인정하듯 거의 정글이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아예 이러한 사회의 정글화를 마치 인류 모두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문명사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상황이 이러하니 비록 현대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는 해도 최소한 현대인이 느끼는 절망감은 당대 현실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과 비교하여 그리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이 절망한 그 만큼 실제로 혼란을 거듭한 끝에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역설적으로 아테네를 멸망시킨 그 제국주의를 내세워 이른바 세계화 전략을 실행한 첫 번째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과 마케도니아가 채택한 최초의 제국주의 내지 세계화 전략은 로마를 거쳐 오늘날 근대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미국과 유럽 등 제국주의 강국들의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되살아 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치 제국주의 아테네 민주정이 걸어왔던 길 그대로 세계는 나날이 힘센 짐승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해가면서 급기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플라톤이 우려한 그대로 그것도 가히 세계적 차원에서 극우주의자들과 그들을 등에 업은 정치가들이 날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폄하했는지 그 생각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비판하고 철인왕정을 통해 정치의 지성화를 주창하게 되었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 주제>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9d)

[487b-488e]

*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데’τοῦ ἐρωτᾶν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경험이 없는ἀπειρία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논변λόγος에 의해 조금씩 잘못 이끌려가 논변의 마지막에 가서 처음 이야기와 반대되는 것에 직면하듯이 오늘날 누군가는 ‘선생님께 말로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반박ἐναντιόομαι을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실제로 목도 한다ἔργῳ δὲ ὁρᾶν’고 주장한다.(487b-c) 즉 ‘젊어서 철학을 시작하여 그만두지 않고 더 오래도록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못된’παμπόνηρος 사람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기이한ἀλλόκοτος 사람이 되고. 또, 그중 가장 괜찮아ἐπιεικής 보이는 사람들조차 선생님께서 찬양하시는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πάσχοντας 나면, 나라에 쓸모없는ἄχρηστος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진실τἀληθῆ이라고 수긍을 한다.(487d)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자들이 그처럼 나라에 쓸모없다면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제5권 473c-d)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다시 묻는다.(487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질문은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비유εἰκών에 익숙하지 않음οὐκ εἴωθας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증명하기 어려운’δυσαπόδεικτος 논의는 비유를 들어 그것도 여러 개를 합한 비유를 써서 변명할ἀπολογέομαι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나라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τὸ πάθος은 너무도 어려워 그러한 일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화가들이 염소, 사슴이나 그러한 것들을 몇 가지 동물을 섞어서 그리듯이 아주 고생스러울 정도의 비유로서 배ναός의 비유를 들어 여러 척의 배든 한 척의 배든,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488a)

* 앞으로 펼칠 설명의 편의상 소크라테스의 비유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배주인ναύκληρος은 덩치μέγεθος나 힘ῥώμη은 배에 탄 누구보다도 앞서지만, 귀가 어둡고ὑπόκωφος 근시인데다가ὁρῶντα βραχύ 항해술ναυτική과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로 짧네. 선원ναύτης들은 각자가 자신이 키(舵)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를 누가할지 서로 다투고 있네. 그 기술을 배운μαθόντα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διδάσκαλος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διδακτός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르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찢어죽일κατατέμνειν 준비까지 되어 있지.(488a-b)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πείθωσιν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ἐκβάλλοντας. 그리고 점잖은γενναῖος 배 주인을 약μανδραγόρας이나 술μέθη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συμποδίσαντας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εὐωχουμένους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488c)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πείθοντες 폭력을 가하든βιαζόμενοι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ναυτική이 있고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비난하고 말이지.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에 대해서, 진정으로 배의 지배자ὁ ἀρχικός가 되려는 사람은 한 해의 계절ὥρα들과 하늘οὐρανός과 별들ἄστρων과 바람πνεῦμα, 그리고 그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네.(488d) 또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τέχνη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을 학습μελέτη하거나 습득λαβεῖ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들이 배에서 벌어지는 경우에, 이런 상태의 배에 탄 선원들은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μετεωροσκόπος, 수다쟁이ἀδολέσχης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489a)

* 소크라테스는 이 비유가 어떤 점에서 나라들을 닮았는지를 재확인한 후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데 대해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가르쳐주고, 그들이 존중받는다면 그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철학에 몸담은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οἱ πολλοί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μὴ χρωμένος 사람들을 탓해야지αἰτιᾶσθαι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89b)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89c)

*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이 그 반대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εὐδοκιμεῖν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장 크고 강력한 모함διαβολή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러한 활동을 한다고 자처하는φάσκοντας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덧붙인다.(48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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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7e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 :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제5권 473c-d에서 아래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환기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오직 한쪽에만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성향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제지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아니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선의 정치체제가 철학자 왕정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자 정치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플라톤 정치철학의 궁극적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제로서 제6권 499b-c 및 501c에서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된다. 플라톤은 이에 따라 <국가> 논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6권과 7권에서 바로 이 철학자 왕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가 이상 국가 건설의 실질적인 관건으로서 제시된다.

* 487e – 488a :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문답을 통해 논증의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난제들의 경우 그것의 총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자주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화나 속담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이어 온 아데이만토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 말하고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비유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은 앞으로 논의될 주제들이 비유를 끌어 들어야 할 정도로 설명이 간단치 않은 문제들임을 미리 보여주는 일련의 수사적 장치라 할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를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논의 주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아데이만토스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답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짐짓 우쭐하여 그렇게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을 놀린다고 핀잔을 준 후 실제로 자신이 해명해야 주제가 그야말로 ‘증명하기 어려운’ 아주 힘든 난제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무용성에 대한 반박 정도를 넘어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철학자왕 체제는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장할 수도 말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앞서 평생의 고뇌를 통해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는 한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 체제 그것은 플라톤에게 결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히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이데아적인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철학자 왕 체제는 인간 이성이 상정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체제이자 그에 따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치체제의 이상적 원상(paradegma) 그 자체인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치가>편에서도 최상의 이상적인 정치가로서 그와 같은 철학자 왕의 존재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진실성을 논리적 증명 대신 신화와 비유를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이 <정치가> 편을 강의하면서(『박홍규 전집』, 제4권 <후기철학 강의>. ‘정치가 편’ 참고) 그 신화 자체를 다름 아닌 설명 너머의 진실이자 원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자들이 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와 관련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제7권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핵심 논제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적 논법의 토대를 이루는 문답법은 물론이려니와 앞서 그 자신 예고한 그대로 마치 주도면밀하게 미리 상정해 둔 일련의 기획으로 여겨질 정도로 의미심장한 수준의 비유, 즉 배의 비유를 비롯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차례로 끌어들이고 있다.

* 488a : ‘배의 비유’에서 ‘배’는 나라(polis)를, ‘선주’는 민중(dēmos)을, ‘선원들’은 선동 정치가들(dēmagōgoi)을, ‘진정한 키잡이’(kybernētēs)는 철학자를 가리킨다. 내용에 비추어 보면 배로 비유된 이 나라는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를 가리킨다.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은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고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곳 배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위와 같은 다중이나 민중을 비록 배의 주인이지만 귀가 어둡고 근시안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맥에서는(493a, c) 아예 ‘짐승’(to zōon)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은 플라톤이 민중을 매우 낮게 폄하하고 있으며 그에게 민중은 그저 우중(愚衆)에 불과하다고 시종일관 비난해왔다. 그러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비난과 공격의 초점은 선주인 민중이 아니라 선주를 겁박하여 배를 자기 멋대로 끌고 가려는 선원들 즉 선동 정치가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짐승’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선동 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길들여진 상태의 민중에 한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문맥(499e-500b)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그곳에서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플라톤은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거친 태도를 지니게 된 이유 또한 ‘마치 잔치에서 법석을 떠는 술꾼들처럼 어울리지 않게 바깥에 있다가 부적절하게 철학에 뛰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 철학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그런 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민중이 처음부터 우중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고 충분히 바르고 좋은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을 익힐 경우, 훌륭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앞서 살핀 이상 국가만을 보더라도 민중에 해당하는 대다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급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기초로 조화롭게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온전하게 구현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나라의 공동체적 삶에도 참여하는 분별 있는 시민들이다. 사실 그의 이상 국가론에 나타난 민중 일반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이 살던 시대가 아테네에서 여성 및 노예 등은 물론 정치적 권한을 가진 시민들 상당수조차 문맹에 불과하여 도편추방 투표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플라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민중들에 대해 플라톤의 인식과 비교할만한 수준의 철학자나 정치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플라톤의 민중관에는 기본적으로 민중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 엘리트의 온정주의(paternalis)적 연민 의식이 깔려 있고 그에 따라 민중을 오직 그들의 지배를 통해서만 계몽될 수 있는 수동적 집단으로 여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민주정의 등장 배경을 보면 오히려 민중은 스스로 생존적 저항을 토대로 지식인이나 귀족 등 기득권 과두 집단의 피폐한 지배를 뒤엎고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을 쟁취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비록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량까지는 아니지만, 민주정이 보여주듯 최소한 민중이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일단 정치적 의사결정의 최종권한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지식인 집단의 왜곡된 욕망에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민중을 위한답시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들어선 30인 과두정의 횡포를 바라보며 차라리 이전 민주정의 시기가 황금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편지> 324d) 그리고 제8권을 살필 때도 다루겠지만 민주정 치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의 불법적인 욕망까지도 앞장서 부추기고 영합하는 선동 정치가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는 오늘날 실제로건 명분으로건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국가들이 한편으로 안고 있는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선동정치가들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가장 참혹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나락에 빠트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선구적 성찰을 담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자 왕정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에는 통치자의 숫자가 아니라 통치 권력의 지성화가 핵심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지성화를 지상과제로 여긴 플라톤이 만약 오늘날 되살아나서 파리코뮨이나 한국 민주주의에서 1980년 광주 항쟁, 촛불 혁명이 보여준 이른바 민중 집단의 지성적 양태들을 목도한다면 그는 민주주의에서도 자신의 정치 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롭고도 실질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련 논의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이정호 ‘플라톤과 정치철학’ 참고)

*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488b)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을 학습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89a) : 플라톤에게 정치는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 영역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정치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배움과 습득에 의해 획득되는 전문 기술이자 그 모든 전문 기술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기술이다. 사실 기술의 전문성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존중하지만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성을 배제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 선 현대 비평가들에 의하면 플라톤은 도덕 내지 실천적 정치철학적 지식을 과학적, 수학적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여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당위를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존재(Sein)와 당위(Sollen)는 근원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다. 즉, 어떠한 정치적 결론도 그 자체가 도덕적, 정치적이 아닌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총화가 당위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에 대한 모든 진리는 비록 발견되거나 입증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비합리적 변수로 가득 찬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현실문제 해결에 해답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기술 관련한 언급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반기술과 통치기술 간의 유추는 전체론(holism)적 관점에서 일반화된 잘못된 것이며 통치기술로 비유된 항해술 또한 목적선정과 관련된 기술이 아닌 이동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이정호, ‘플라톤과 민주주의’, <서양고전학 연구> 1989 참고)

* 인간의 삶의 현실과 관련한 제반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침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제반 사물과 사태 및 가치에 대한 모종의 객관적이고도 총체적인 원리 내지 근원이 존재한다는 신념 위에 이른바 합리주의 정치철학이 서 있다면, 플라톤은 분명 합리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내용 또한 가장 선명하다고 할 정도로 급진적인 이성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사실 피폐한 정치이념으로서 파시즘, 나치즘은 물론이려니와 헤겔 철학, 마르크스주의,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사상, 캘빈의 제네바, 그리고 동양의 왕도정치 및 고대 유가사상이 지향하는 정치철학 역시 분분들을 관통하는 총체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보면 모두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wholism) 계열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그들의 합리주의적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세계관적 규정을 달리하며 그에 기초하여 그들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치 및 행복의 개념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특정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적 주장이 표방하는 구체적 방안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비판될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여타의 주장들이 내세우는 각각 교의의 가치 및 내적 본질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더욱이 공유된 목적과 본성적 욕구의 실현을 통해 협동적 삶을 추구하는 일정한 세계관 철학에 기초한 공동체적 사회관계로의 꿈은 그것이 표방하는 그 나름의 가치와 특정의 사회관계적, 민족적, 역사적 체험을 밀접히 결합하면서 사회관계상의 모순과 갈등이 심화한 국면에선 오히려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통합욕구를 객관화시킨다. 그리고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이 함축하는 가치의 표준적 정당성의 객관화는 그에 기초한 인간 생활의 질서화를 위한, 그리고 이상적 사회관계에로의 인간의 진보적인 해방의식을 선도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유의미성을 보존한 채, 세계관 철학으로서의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 488c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 그리고 점잖은 배 주인을 약이나 술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 : 플라톤의 이 말은 세계사적 정치 현실에서는 물론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 이를테면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정권에서 박근혜, 이명박을 거쳐 오늘날 윤석열에게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우리가 겪거나 또 현재 겪고 있는 피폐한 정치적 경험들(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 전두환의 광주 민중 학살, 국풍 및 3S 등 국민 위무정책, 이명박의 다스 소유 등 권력의 사유화,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작금 윤석열의 무도한 행태 등)을 그야말로 마치 미리 내다보았기나 한 것처럼 실감 나도록 그려내고 있다.

* 488c 점잖은gennaios 선주 : 민중을 나타내는 선주를 플라톤은 점잖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그리스 원어 gennaios는 ‘출신이 좋은’, ‘고상한’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원어가 갖는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했다면 이 말은 아테네 민중이 아테네 시민(hoi politai)로서 이방인(barbaros)에 비교해서 훌륭한 출신 성분을 갖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대체로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훌륭한 민족임에도 아둔하게 선동 정치에 휩쓸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gennaios의 반어적 용례는 <국가> 454a, 363a, 544c에도 있고 <작은 히티아스> 370d, <정치가> 274e, <소피스트> 231b 등에도 있다.

* 489a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 수다쟁이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에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내뱉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인문학은 건축에 비유하면 기초이다. 기초는 건물을 굳건하게 세우는 데 필수지만, 하나같이 늘 어둠 속 바닥에 묻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 안에서 먹고 살고 때론 더 번듯한 건물들을 칭송하거나 부러워할지언정 그 건물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초가 삐죽 지상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건물은 다 무너진다. 그래서 기초는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기뻐하며 그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으로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이다. 여기 배의 비유에서도 철학자는 평판에 상관없이 진정 키잡이가 갖추어야 할 지식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자부심을 지니고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488d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이 있고 키잡이 기술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 선원들에게 항해술,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 기술은 일반 전문적인 기술처럼 배우거나 습득할 수 있는 기술(technē)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선동 정치가들로 하여금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그들이 대중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들이 소유한 기술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이비 기술자들을 선원들과 구별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능한 사람들’로 부른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하고 그들의 주구(走狗) 역할을 하는 사이비 기술자들이 곧 소피스트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지는 문맥에서(493b,c) 이들 소피스트들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센 짐승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와 욕구를 숙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곤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등 함께 지내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이런 모든 것을 알아내고서는 그는 이것을 지혜sophia라고 부르고 기술로 체계화한 후에’ 보수를 받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인 것이다. 혹자는 대중의 기분과 욕망을 잘 알아내려는 소피스트의 태도야말로 민중에 대한 이해에 힘쓰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민중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도 챙기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태도이다. 그야말로 권력의 주구로서 권력에 부역하는데 진심인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태도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류 언론 집단과 곡학아세에 목을 매고 있는 지식인 집단은 지금도 하나같이 권력에 기생하여 권력자들과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489b ‘철학에 몸담는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야지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 이 말은 철학과 철학자의 무용성을 제기하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이 쓸모없게 여겨지게 된 것은 철학자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테네 민주정 아래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한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에 부역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하고 대중들 또한 그들의 주장과 태도에 휩쓸려 철학자들을 그야말로 쓸모없는 사람들로 매도한 데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이야말로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데 진정으로 가장 쓸모 있는 기술자임에도 그것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폭력적 수단으로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들 때문에 철학의 무용성이 마치 진실인 양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왜 철학자들은 그들을 곡해하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부족함도 마찬가지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사라면 먼저 환자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반문할 수 있다. 철학의 무용성과 관련하여 설사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잘한 것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은 사실 역사적 소크라테스에게는 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정작 플라톤에게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역사적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당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그들을 일깨우려다 목숨까지 잃었지만, 배의 비유에서 정작 철학자는 별을 구경하는 자 아니면 그냥 수다쟁이로 그려질 뿐 저항이나 투쟁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성적 사고에 투철한 플라톤이 철학의 무용성을 오로지 아테네 민주정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뭔가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앞으로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은 반지성적 민주정에 기대어 민주정의 개선에 힘쓰는 일은 이미 기대 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이미 민주정을 결코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싹틔울 수 없고 그에 따라 선동 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대중이 길들여지는 체제로 그리고 있고 제8권에 가면 민주정을 아예 태어날 때 본성으로 갖고 있던 자연적 소질마저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하여 구성원들 모두를 짐승처럼 서로를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피폐한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플라톤에게 철학자로서 진정 좀 더 잘 할 수 있고 잘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논의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민주정을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원천적으로 민주정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대안으로서 철학자왕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삶의 행적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 플라톤 자신은 민주정체의 개선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무망한 일로 여기고 있었는지가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그곳에서 ‘잘못된 정치체제의 개선을 기대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런 나라들의 법률 상태는 행운을 동반할 놀랄 정도의 대책 없이는 거의 구제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326a)고 고백할 정도로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라톤은 ‘개인의 일이든 나랏일이든 모름지기 정의로운 것 모두는 철학을 통해 알아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국가> 이곳에서 언급한 말 그대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가히 그의 정치철학적 결론이라 할 만한 신념을 이미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플라톤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개선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듯이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국가>를 통해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적 통치체제의 구현을 담보하는 주체가 철학자인 한, 바로 그 훌륭한 철학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 교육론을 이상 국가론의 핵심 주제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선명성과 급진성에서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한 그의 이상주의적 철학자왕 체제는 민주정과 참주정 등 기존의 피폐한 정치체제가 플라톤 자신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충격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시켈리아에서의 정치 실험의 실패가 가져다준 근원적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처럼 플라톤은 그가 겪은 피폐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절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말년으로 가면서 정치적 현실 참여는 아예 접어 버리고 그 대신 아카데미아에 처박혀 장차 언젠가는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철학자왕정을 구상한 후 그것의 구현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조건을 탐색하고 교육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치 참여와 관련한 플라톤의 태도를 현실적 개선 자체를 부정하고 고고하게 불타협적인 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점진적 개선을 위한 현실 인식도 원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어졌을 때 올바른 방향 및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현실 국가를 바람직한 최상의 국가로 견인하기 위한 동력이자 방향타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가장 말년에 쓴 <법률>도 <국가>의 철학자왕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칙을 유지하되 현실적 적용 차원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라 할 것이다.

* 플라톤의 <편지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현실 정치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치적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말년 플라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일례로 플라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말도 하고 지도자에게 조언도 하되, 만약 전혀 조언을 들어줄 자세가 없거나 조언 때문에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게 뻔한 경우에는 조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편지들> 330d-331d 참고) 그리고 아테네가 멸망하던 절체절명의 시기 아테네의 장래를 두고 데모스테네스와 이소크라테스 등 수많은 지식인이 마케도니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때에도, 플라톤은 해외에서 나라의 입법관련 자문을 구하는 제자들의 요구는 응했을지언정 그들의 논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은 채 아카데미아에서 오직 제자들을 교육하고 집필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앞서 살핀 대로 민주정 아테네는 물론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역시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 국가와는 원천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절망의 끝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그리스의 운명과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플라톤은 이곳에서(496d) 민주정 치하 철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그 자신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바람을 피해 모두를 헤아려 보며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저작들이 기울대로 기울어 버린 당대의 그리스 현실을 넘어 인류 일반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전해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플라톤의 그 소망은 로마와 기독교 철학을 거쳐 그 후 철학사의 위대한 지표가 되었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이정호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이 왜 원천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드디어 해명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무용성이 결코 철학과 철학자의 탓은 아니라는 게 해명되었긴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어쨌거나 처음에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처음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둘 타락하여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서 철학과 철학자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철학에 발을 들여놓거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비난과 모함은 더욱 치명적이다.(489d) 이에 따라 앞에서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일부 미리 거론되기도 했지만,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일부가 왜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와 더불어 철학과 철학자에 먹칠하는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B.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8e-495b)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 제5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 행위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나라의 통치자가 철학자일 경우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철학자가 뭐길래 소크라테스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철학자란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그 진리가 다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형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형상이 일상인들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언급되면서 이른바 플라톤의 형상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6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라의 수호자이자 통치자로서도 적합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의 자질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철학자의 자질이 얼마나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6권 484a-487a]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곧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질을 주제로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이자 지도자ἡγεμονεύς로 지혜로운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법νόμος과 수행할 일들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그 능력의 기본 조건이 다름 아닌 ‘좋은 시력을 갖춘’ὀξὺ ὁρῶντα 감찰τηρεῖν 능력에 있음을 밝힌 후 그 감찰 능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484a-b)

* 수호자는 무릇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γνῶσις을 가지고 영혼ψυχῇ 안에 뚜렷한 본 παράδειγμα으로서 가장 참된 것τὸ ἀληθέστατον을 바라보고ἀποβλέποντες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있어야 한다.(484c)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한 이 땅에서의 법규τά νόμιμα를 설정τίθεσθαί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γραφεύς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τι τυφλῶν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덕ἀρετή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484d)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연적 성향φύσις 즉 자질을 갖추었기에 그러한 능력들을 두루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85a)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적 성향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항상 있으며ἀεὶ οὔσης 생성γένεσις과 소멸φθορά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μὴ πλανωμένης 저 존재οὐσία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움μαθήματός과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ἀεὶ ἐρῶσιν.(485b)

2) 그들은 그 모두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큰 부분이든 작은 부분이든 더 가치 있는 부분이든 덜 가치 있는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포기하지 않는다οὔτε ἀφίενται.

3) 그들은 거짓 없음ἀψεύδεια,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거짓τὸ ψεῦδος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 진리ἀλήθεια를 좋아한다στέργειν. 자연적 성향상 누군가에 대한 정욕을 가진ἐρωτικός 사람은 그 애인과 친족이고syggenes 그에게 속한oikeios 모든 것πᾶν을 반기는 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 한, 진리보다 지혜σοφίᾳ와 더 가까운 것은 없다.(485c) 그러므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사람은 어려서부터 곧장 모든 진리를 가능한 한 최대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

4) 그들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ἡδονή들을 추구하며 육체σῶμα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저버린다.(485d)

5) 그들은 분별σώφρων이 있어서 결코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돈과 많은 소비δαπάνη에 몰두σπουδάζειν하지 않는다.(485e)

6)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할ἐπορέξεσθαι 영혼에게 좀스러움 σμικρολογία이란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과 모든 시간χρόνος과 모든 존재οὐσία에 대해 관조θεωρία함을 갖춘 정신διανοίᾳ을 지닌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은 뭔가 대단한μέγας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θάνατος도 무서운δεῖνος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86a) 비겁하고δειλός 자유인답지 못한ἀνελευθερίος 자연적 성향은 참된 지혜·사랑과 상관이 없다. 이에 더해 그들은 규율이 있고(품행이 단정하고)κόσμιος 허풍ἀλαζών을 떨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계약을 파기하지δυσσύμβολος 않는 사람들이다.(486b)

7) 그들은 영혼이 정의롭고 온순하며ἥμερος 쉽게 배우고εὐμαθὴς 기억력μνημονικός이 좋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σῴζειν하는 사람이다.(486c-d)

8) 그들은 균형ἐμμετρία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본래적 성향τὸ αὐτοφυής상 균형 잡히고 우아한εὔχαρις 정신διάνοια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들을 있는 것 각각의 형상ἰδέα으로 이끌어 준다.(486d)

9) 있는ὄντος 것에 충분하게ἱκανῶς, 그리고 완전하게 τελέως 참여할μεταλήψεσθαι 영혼에게 이 각각의 것들은 필수적이며ἀναγκαίη 상호 연관된ἑπόμενα 것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기억력이 좋고νήμων 쉽게 배우며εὐμαθής 호방하고μεγαλοπρεπής 우아하며εὔχαρις 진리ἀληθεία, 정의δικαι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절제σωφροσύνη와 친구φίλος이자 친족적인συγγενής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육παιδείᾳ과 연륜ἡλικία에서 원숙해지면τελειωθεῖσι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ἐπιτρέπειν.(486e-48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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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a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국가> 논의의 근본 출발점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청(362-367)에 따라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플라톤은 이곳 말고도 이점을 <국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환기하고 있는데(420b-c, 427d, 434d-435a, 445a-b, 427b, 545d, 588b) 이것에 주목하여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하는 근본 관심사가 정치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행복한 삶과 관련한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dikaiosynē도 ‘정의’justice보다도 ‘올바름’righteousness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강해 서두에서 <국가>의 원제 politeia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시민적 삶, 폴리스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구분 자체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배타적 이기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의식이 확립된 근대 이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오도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청에 응하면서 곧바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개인을 국가로 확장하는 것도 플라톤 스스로 이미 politeia 즉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별개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플라톤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도 ‘정의롭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 특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 더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강해에서도 수시로 강조했듯이 20세기 일부 비평가들의 견해들처럼 플라톤이 개인의 삶을 국가주의에 복속시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에서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통치 목표는 그 대상인 시민들 모두의 행복이며, 개인들 또한 어떤 계층에 속하건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에 따른 직책을 기꺼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절제의 덕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시민들 각각의 행복을 담보하는 통치의 방식으로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 484c ‘수호자는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영혼 안에 뚜렷한 본으로서 가장 참된 것을 바라보고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구절은 우주를 제작하면서 오직 본으로서 원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주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는 통치자 즉 철인 통치자의 이상적 모델인 것이다. 이곳에서 본(paradeigma)은 <티마이오스>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내용적으로 공히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apoblepontes) 관찰하고(theomenoi) 조회한다(anapherontes)는 말은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장차 다루어질 변증술의 기초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직관 내지 관조(theoria)에 기초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자 왕을 다루는 제6권 500c, 500e-501c에서 여기서 언급된 본에 대한 관조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담(J. Adam)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아에 대한 철학자의 지식이 단순히 인식적 가치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으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이 땅에서의 법규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자가 이상적인 나라에서 태어났을 경우 그 나라는 이미 형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므로 그는 단지 이미 확립된 법규를 수호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철학자들은 현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바람직한 법률을 세우고 관철하려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화가(grapheus)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화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가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음악과 조각 등 조화미와 관련한 예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곳과 10권에서 화가에 대한 비판은 화가가 형상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대상을 또다시 모상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형상적 앎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 484d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empeiria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 ‘경험’의 그리스 원어 empeiria는 영어로 ‘experience’, acquaintace with’, ‘practice, without knowledge of principles’의 뜻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도 그 말을 사전적 의미와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 ‘~을 접해 본 적이 있음’이라는 경험 일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원리적 추론과 지식이 아닌 ‘감각적 경험이나 지각’으로 좁혀 사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익숙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467d, 529e, 601c)가 있다. <국가>에서 첫째의 경우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584e)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지식이나 감각과 상관없이 ‘접해 보았음’ 일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로서, 위의 용례 외에 ‘앎이나 이득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582a), ‘문답하는 것에 대한 무경험’(apeiria)(487b), ‘진리에 대한 무체험’(apeiros)(519b), ‘교과들을 경험한 자’(533a), ‘사려분별과 덕에 대한 경험’(585e) 등의 용례가 있다. 그리고 셋째의 경우는 ‘경험과 연령에 있어서(467d),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tis emperos)(529e), ‘사용함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자’(601c) 등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례로서 대부분 원리적 추론, 실재나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이 아닌 지식을 이용함으로써’(409c), ‘권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422c), ‘전투 관련 경험과 관찰에 의해서’(467a), ‘이들이 (앎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539e) 등의 용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484d)라는 이곳의 표현 또한 이 둘째 용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경험’은 원리적 사고로서 ‘사려분별(pronesis) 또는 이성적 추론’(logos)(582a)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것은 설사 그 경험이 수없이 축적되더라도 진정한 앎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의 단계상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비록 경험이 진정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앞서 앎보다 믿음이 지식의 단계에서 저급한 수준의 것이지만 믿음이 실제 생활 영역에서 기술적 훈련을 통해 학술의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전쟁 전체에 대한 정책적 결정과 전략에 대한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투 역량의 향상을 위한 지휘 및 전투 등 전쟁 실무 능력의 향상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실무 역량의 향상은 실제 전투 경험을 포함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반복적 관찰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을 통해 획득되는 지성적 앎의 능력과 더불어 반복적인 연습과 체험을 통해 몸에 밸 정도로 숙달된 신체 능력이자 실천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체육을 통한 끊임없는 신체 단련은 물론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전쟁 지휘 및 관직의 수행 등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그것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치자로 뽑아 최고의 철학 교육으로서 변증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지성적 앎은 물론이고 통치와 관련한 어떠한 경험도 쌓지 않은 자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졸지에 최고 통치자가 되어 분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실로 통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근세 합리론과 경험론(empiricism)을 이야기할 때 ‘경험’의 의미도 이 두 번째 용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경험론이 말하는 지식은 경험적 감각자료들의 귀납에 의해 개념적 일반지의 지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귀납지가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전제로 성립하는 한, 플라톤이 이미 포착하고 있듯이 그것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개연지일 뿐이다. 플라톤에게 보편지는 형상적 앎 또는 그에 준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형상적 앎과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 모두 일정 수준에서 모두 각기 인간 삶의 보전에 기여하는 한, 플라톤에게 있어 그 각각은 비록 인식론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앎으로서 고유성과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논리적 추론 차원을 넘어선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지로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칸트가 근대 과학지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학지를 ‘인간 나름의 해석’ 즉 지각에 대한 오성의 구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왜 가설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해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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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직위로서 수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374d) 수호자(phylax)는 나중(414b)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taleis)로서 통치자들(hoi archontes)과 그들의 보조자들(epikouroi) 내지 협력자들(boētoi)로서 전사들(stratiōtas)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수호자에서 통치자로 좁혀졌다가 이곳에서부터 그 통치자가 다시 철인 통치자로 더욱 좁혀진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성향이나 자질도 처음 포괄적으로 제시된 이후 점차로 보다 구체적인 자질들이 추가되면서 이곳에서 철학자의 자질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주제 상으로는 철학자가 지닌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철학자들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 만큼 내용적으로는 철학자의 자질이면서도 동시에 통치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장차 철인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고 있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지금까지 언급된 수호자와 통치자들의 자연적 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들이 특히 추가되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호자의 성향을 다룰 때(375a-376c)와 달리 지혜의 친족이자 진리로서 ‘형상’(idea)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용기와 더불어 배움과 지혜가 주요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배움과 지혜에는 보조자들이 갖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임에 비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들의 배움은 ‘존재’(ousia)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움’이고(485b) 지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우아한 정신으로 참된 앎 곧 ‘형상’(idea)에 다가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86d) 그리고 보조자들이 아닌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을 언급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dogma)과 소신(doxa)이 추가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412e) 이곳에서처럼 형상에로 이끌린다거나 그것을 열망했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수호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도덕과 지식이 하나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지라도 기본적으로 도덕의 고양에 크게 방점이 주어져 언급되었다면 지금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고양을 통해 존재 내지 형상에로 다가가는 것에(486d-e) 크게 방점이 찍혀 있다.(J. Adam 497c note 참고)

*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 하나하나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위 요약문 1)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호자의 자질에 더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서 가장 먼저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존재ousia’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철인 통치의 근본 토대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에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함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로서 존재를 향한 지향이 결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과 열정을 수반하면서 늘 항상성을 갖고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위 요약문 2) : 철학적 지향이 그러하듯 철학 통치 또한 총체성과 전면성을 가지며 어떠한 것도 따로 차별해서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철인 통치자라고 한다면 특정 계층, 특정 대상, 특정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크건 작건, 가치가 더 있건 덜 있건 간에 상관없이 통치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 문제 해결에 다가서며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 문제의식의 전면성 내지 총체성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있어 철학 통치자에게 불타협적 끈기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위 요약문 3) : ‘어떤 식으로도 거짓(to pseudos)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라는 말은 플라톤이 특수한 조건에서 ‘통치자의 거짓말’이 옹호될 수 있다는 내용(414b 등)과 상충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플라톤적 의미에서 ‘진리를 향한 영혼의 결여에서 나오는 무지’를 의미한다. 다만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의 앎을 가진 통치자가 자신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분명하게 담보하는 전제하에서 거짓말을 허용한다.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정욕을 가진 사람이 애인을 대하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반기는 사람들이므로 결코 진실을 결여한 거짓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위 요약문 4), 5) : 철학자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욕구의 물길이 크게 뚫린 그만큼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 쪽으로 깊숙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깊숙이 가 있는 그만큼 분별력 또한 뚜렷해져 육체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은 아예 생겨날 여지가 없고 그에 따라 감각적 향락을 위한 소비도 없다.

위 요약문 6) : 철학자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하며 그에 따라 전혀 좀스럽지 않고 반대로 호방하게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관조하는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다. 중국 송대 지식인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에서 노래하듯 물여아개무진야이우하선호(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세상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거늘 달리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죽음도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행위에서 비겁할 이유가 없다. 공자가 70세에 이른 사람의 경지를 일컬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철학자는 자유인답게 늘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행위를 해도 지혜사랑 안에 있으므로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풍도 떨지 않으며 매사에 있어 사회적 연대나 계약에 어긋남이 없다.

위 요약문 7) : 여기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정의로움과 온순함에 더해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이 강조되고 있다. 1)에서 6)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일정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은 그것들에 비해 다분히 천부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 통치자는 그 스스로도 이미 건국신화를 통해 황금족으로 따로 구분했듯이(415b) 자격에서부터 원천적으로 소수 엘리트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위 요약문 8), 9) :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균형과 동족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 통치자란 위와 같은 성향들을 영혼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시켜가면서 균형 잡히고 우아한 정신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존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통치의 궁극적 이념으로서 형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호방하고 우아하며 진리 정의, 용기, 절제와 친구이자 친족인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은 통치자들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육과 연륜에서 원숙해지면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이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은 하나같이 도덕과 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마키아벨리즘과 철저히 대척적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것은 당대의 참주정의 목표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설사 그러한 통속적 이해와 달리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의도한 그대로 ‘수단의 도덕적 선악과 관계없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에 있어 그 유용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러한 정치이념이 말 그대로 과연 ‘정치 현실에서 국익을 위한 공적 권력의 성공적인 유지와 관리를 담보’해왔는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근대 이후 개인적인 관계에서건 계층 간 나라 간 관계에서건 배타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냉혹한 현실에서 그것은 나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 현실에 대한 단기적 진단에 토대를 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러한 처방은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보다는 그 질곡을 더욱 부채질하고 강화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배타적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토대를 둔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불평등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원천적으로 국제간 평화 공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 나라이건 개인이건 ‘신의와 약속’은 자기 보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로지 살길은 각자도생하며 각자 의심의 눈을 부릅뜨고 배타적 경쟁력을 갖는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을 견인한 산업혁명은 오늘날 막대한 자본력과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개인 간 계층 간 나라 간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를 마치 문명 발전이 수반하는 불가피한 실재로 정당화하면서 나날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기세를 떨쳐가고 있다. 그 최전선에 도구적 지식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통속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강대한 나라에게는 타국에 대한 패권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어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반대로 약소국에서는 정치권력의 폭압성과 기득권 세력의 피폐성을 정당화하고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열패성을 마치 숙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생태적 위기는 강대국 약소국을 막론하고 세계 시민들 모두를 앞이 빤히 보일 정도의 문명적 재앙으로 점점 더 몰아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영역에서도 미국의 트럼프 등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서구에서 쥐꼬리만큼이나마 연명하고 있었던 톨레랑스도 이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윤석열이란 무도한 자가 검찰, 언론, 종교 등 강고한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형식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통치 권력을 장악한 후 하루가 멀게 반민중적 횡포를 일삼고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이끈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듯 24년 3월 현재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피폐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 진보의 전망은 물질문명에 눈이 멀어 문명적 재앙을 선도하는 초국적 자본과 각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갖는 위세 등등함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 민초들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시민 모두가 담론 생산자가 되어 비판적 담론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직화해가면서 그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더욱 넓게 퍼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한 지식인들의 낭만적 이상론으로 불리면서 그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여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진리를 향해 터져 나오는 욕구의 물길처럼 이상을 향한 인간의 정신과 의지가 내뿜는 힘은 결코 현실에 압도되거나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건 현실 분석의 영역에서건 마키아벨리즘의 냉철함과 영악함을 크게 압도하는 진보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토대로 철저함과 진지함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키워가면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견인해 나갈 것이다. 정치의 지성화를 본질로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분명 원리적 사고의 측면에서 그러한 진보적 담론 형성과 투쟁에 일조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발전과 변화를 꿈꾸며 고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시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란 게 결코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상수도 진실도 아니라는 것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 사상사의 전체 흐름이 보여주듯이 현대 물질문명 각 영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별적인 분석과 미시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모순을 딛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면서 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거대 담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매몰된 현금의 철학적 정황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생태적 연대와 소통을 기반으로 세계관 차원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는 이 시대의 한국 철학자 이규성(李圭成, 1952-2021)의 철학이 필자에게 빛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자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마치 철학에 대한 현대인의 의구심을 선구적으로 궤 뚫어 보기나 한 듯이 이내 아데이만토스의 반박에 부딪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그와 같이 주장을 해도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설사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철학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러한 자질들을 나라의 공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이들이 되거나 반대로 그 소질들을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그러한 지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철학자가 그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유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임을 철저히 밝혀내야 철학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온전하게 바로잡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

다음 강해 B. 3. 철학이 비난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8e)

2) 철학자들이 스스로 타락하는 이유(488e-495b)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9)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형상적 앎과 믿음

 

[476e-480a]

*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전자의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아는 것γιγνώσκειν이 아니고 그저 믿는 것δοξάζειν일 뿐”이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우리의 말이 참τὸ ἀληθές이 아니라고 대드는 경우 어떻게 그 사람을 설득할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으로부터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은 누구도 알 수는 없으므로 그 사람 역시 ‘무엇인가를 아는γιγνώσκει τὶ 사람’이라는 동의를 받은 다음, 그 사람에게 그가 알고 있는 그 뭔가가 ‘있는 것’ὄν인지 ‘있지 않은 것’μὴ ὄν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477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아래와 같이 ‘그가 아는 그 뭔가’가 다름 아니라 ‘있는 것’ὄν도 ‘있지 않은 것’μὴ ὄν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임을 밝힌 후 그 사람의 사고 대상이 그것인 한 그의 사고는 믿음δόξα일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1) ‘완전하게 있는 것’τὸ παντελῶς ὂν은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παντελῶς γνωστόν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ὴ ὂν μηδαμῇ 은 ‘어떤 방법으로도 알 수 없다’πάντῃ ἄγνωστον.

2) 그런데 ‘어떤 것이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한 상태’τι οὕτως ἔχει ὡς εἶναί τε καὶ μὴ εἶναι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있는 것’εἰλικρινῶς ὄντος과 ‘어떻게도 있지 않은 것’μηδαμῇ ὄντος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7a)

3) ‘앎’γνῶσις은 ‘있는 것’을 대상으로ἐπ᾽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무지’ἀγνωσία는 ‘있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앎ἐπιστήμη과 무지ἀγνοία 사이의 것이다. 그것이 곧 ‘믿음’δόξα이며 그것은 앎과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이다. 요컨대 믿음δόξα과 앎ἐπιστήμη은 각각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한다. (477a-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무지와 믿음을 그것들 각각이 갖는 대상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앎과 믿음 모두가 왜 능력이고 그 능력이 어떻게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지를 아래와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 능력이란 있는 것들의 한 부류γένος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모든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 능력들은 ‘같은 것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을 같은 능력이라고 부르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다른 일을 해내는 것을 다른 능력이라고 부른다. 즉 능력은 대상으로 하는 것과 ‘해내는 일’ὃ ἀπεργάζεται이 능력마다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시각ὄψις과 청각ἀκοή은 모두 능력에 속하지만, 시각은 색깔χροάζω이나 모양σχῆμα이나 그 비슷한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고 청각은 그와 달리 들리는 것들을 구별하는 능력이다.(477c)

3) 앎ἐπιστήμη은 일종의 능력으로서 모든 능력 중 가장 강력한ἐρρωμενεστάτην 것이다. 믿음도 능력이다. 그러나 앎은 오류 불가능한 것τό ἀναμάρτητον 이고 믿음은 오류 불가능하지 않은 것τό μὴ ἀναμάρτητον이다. (477d)

4) 앎과 믿음 각각은 본디 서로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어서, 서로 다른 것ἕτερον을 대상으로 한다. 앎은 본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일을 할 수 있고 믿음이 믿는 것은 앎이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477e-478a) 요컨대 앎과 믿음이 둘 다 능력이되 서로 다른 능력인 한, 앎의 대상과 믿음의 대상이 같은 것일 수 없다.(47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앎과 믿음이 별개의 대상에 관계하는 별개의 능력임을 분명히 한 후에 위의 논의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그 앎의 대상이 ‘있는 것’임에 비교하여 믿음의 대상이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것이며 그에 따라 믿음은 앎도 아니고 무지도 아닌 중간의 것임을 아래와 같이 다시 한번 재확인한다.

1) 앎의 대상γνωστόν은 있는 것τὸ ὂν이고 믿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가지는 한, 믿음의 대상δοξαστὸν은 ‘어떤 하나의 것ἕν τι’이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것’은 ‘어떤 것도 아닌 것’μηδὲν 즉 ‘있지 않은 것’τὸ μὴ ὄν이 아니다.

2) ‘있지 않은 것’에는 믿음이 아니라 ‘무지’ἄγνοια가 할당되고 ‘있는 것’에는 ‘앎’γνῶσις이 할당된다.ἀποδίδωμι(478c) 그런데 믿음은 ‘있는 것’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을 믿는 것도 아니므로 믿음은 무지도 앎도 아니다.

3) 그것은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들 바깥, 즉 명확함σαφήνεια에서 앎을 넘어서거나 불명확함ἀσαφείᾳ에서 무지를 넘어서는ὑπερβαίνουσα 그 양쪽 어느 것도 아니다. 믿음은 앎보다는 더 어둡고σκοτωδέστερον 무지보다는 더 밝은 φανότερον 것 즉 그 둘 사이μεταξὺ에 놓여 있는 것이다.(478c)

4) 믿음이 앎도 무지도 아닌, 그 사이의 것이듯이 믿음의 대상 또한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것τι οἷον ἅμα ὄν τε καὶ μὴ ὄν으로서 ‘순수하게 있는 것’과 ‘전적으로 있지 않은 것’ 사이의 것이다.(478d) 양 끝에 있는 것들에게는 양 끝에 있는 것들을 할당하고, 사이에 있는 것들에는 사이에 있는 것들을 할당해야 한다.(478e)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언급한 후 처음에 제기되었던 물음으로 돌아가 결론적으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그리고 왜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정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즉 철학자인지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1)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 자체,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 상태로 있는 아름다움 자체의 형상ἰδέα이란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많은 아름다운 것들, 많은 정의로운 것들을 믿는다. 그러나 이들이 믿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느 면에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어느 면에서 추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 필연적이다.(479a) 큰 것들과 작은 것들, 가벼운 것들과 무거운 것들이라고 우리가 이야기할 것들은 모두 항상 반대적인 것ἢ τἀναντία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한다.(479b)

2) 이 많은 것들(ta polla) 각각은 잔치 자리ἑστίασις에서 이야기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애매해서, 이것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 또 둘 다이거나 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것들을 놓아둘 자리는 있음과 있지 않음의 중간이다. 이것들은 더 있지 않음과 관련해서 있지 않은 것보다 더 어두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며, 더 있음과 관련해서 있는 것보다 더 밝은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479c) 요컨대 아름다움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πολλὰ νόμιμα은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κυλινδεῖται. 그것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고 중간에서 떠도는 것으로서 중간의 능력으로 포착되는 것이다.(479d)

3)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아름다움 자체는 보지도 못하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믿으면서δοξάζειν 그들이 믿는 것들 중 어떤 것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각 그 자체의 것들’이며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ἀεὶ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ὄντα 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한다.γιγνώσκειν 이들은 앎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을 반기고 사랑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을 반기고 사랑하며 아름다운 소리나 색깔이나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구경하지만 아름다움 자체를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지는 않는다.(479e-480a)

4) 그러므로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ὸ ἕκαστον τὸ ὂν를 반기는ἀσπαζομένους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φιλόδοξος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φιλόσοφος라고 불러야 한다.(48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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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논의에 따라 철학자와 감각으로 구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앞의 강해에서 살폈듯이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는 곧 형상(形相)에 대한 앎이다. 요컨대 진정한 앎의 대상은 형상이고 형상은 곧 ‘있는 것’, ‘(완전하게) 순수하게 있는 것’,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 ‘오류 불가능한 것’,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감각으로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고 상태는 진리로서 앎(epistēmē)이 아니라 ‘믿음’에 불과하다. 사실 믿음의 그리스 원어 doxa는 기본적으로 ‘(옳건 그르건) 일상인들이 수행하는 모든 생각과 의견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텍스트 곳곳에서 doxa를 존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인식 차원에서 진정한 앎과 철저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말은 종종 ‘억견’이나 ‘상상’ 등의 말로 옮겨지기도 한다. 플라톤이 사용하고 있는 앎과 믿음이라는 말의 이러한 용례만 보더라도 철학사에서 왜 그를 두고 이른바 예지계와 현상계를 철저히 구분하는 두 세계 이론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선구라고 평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강해에서 살폈듯이 플라톤이 그와 같은 세계관을 내 세운 근본적인 동기가 현실 세계의 다(多)와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현실 구제론에 있음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말들의 용례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또한 근본적으로 그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하고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예지계와 현상계, 앎과 믿음을 구분했다는 것 이전에 왜 플라톤은 그 예지계를 구성하는 형상들을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상정했을까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엘레아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 다의 세계로서 자연세계와 현실 세계의 존재성을 철학적으로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형상들의 존재는 그것의 모상(模像)으로서 다의 세계의 존재성을 뒷받침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변화무쌍한 다의 세계의 운동성까지 해명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현실 세계의 다의 운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물질적 운동성도 부동의 형상과 더불어 우주 발생의 시원적 원인들의 하나로 상정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의 배경에는 이처럼 다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로서 자연 및 현실 세계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동기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플라톤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와 운동을 자연세계의 시원적 토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리스의 전통적 세계관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세계관은 종축에서 보면 위와 아래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이원론이지만 횡축에서 보면 마치 그리스의 신화가 그러하듯이 여럿들이 상호 공존하고 있는 다원론적 세계관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세계관을 두고 이원론인가 다원론인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플라톤의 가장 최종적이고 원숙한 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는 <티마이오스>를 보면 우주 생성의 세 가지 근본 원인(aitia)들로서 형상인 원상(paradeigma)과 수용자이자 보조원인(synaitia)인 질료적 공간(chora), 그리고 제작자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제시되고 있는데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 점에 주목하여 플라톤의 세계관을 3원론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플라톤에게서 ‘좋음의 이데아’가 최상이자 유일의 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주의자나 교부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철학을 아예 일원론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 그런데 플라톤의 현실구제론이 단순히 자연 세계의 존재성과 운동성만 해명하는 것이라면 원자론이 이룩한 철학적 의의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원자론은 원자들과 그것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서 허공의 존재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존재성과 운동성을 함께 해명하였지만, 영원히 운동하면서도 조화와 질서라는 합목적적 가치를 함께 보전하고 있는 그리스적 우주, 즉 코스모스를 온전히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형상계와 운동하는 현상계를 따로 구분하되 그 현상계가 형상계와 완전히 분리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분유(分有, metechein)와 모방의 방식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것으로 파악한다. 즉 물질적 현상계는 형상들의 세계인 예지계의 모상으로서 예지계가 지니는 존재성을 일정 부분 분유함으로써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방의 방식으로나마 조화와 질서를 갖춘 코스모스의 한 축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현상계는 형상계와 비교하여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면서 존재성이나 앎의 근거가 크게 부족한 세계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형상의 분유치로서 일정한 존재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현상계의 물질적 운동성에 역행하는 영혼의 설득(peithos)(<티마이오스> 48a, c, 51e, 70b)을 받아들여 최대한 형상 세계에 다가갈 수 있는 토대 즉 형상과 닮을 가능성도 함께 갖춘 세계인 것이다.

* 이곳 논의 부분에서 플라톤이 믿음의 대상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것’,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 ‘항상 반대적인 것으로 불리면서 양쪽 모두에 관계하는 것’,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 등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위와 같은 근본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으로서 물질적 타자성(heteron)에 의해 언제나 생성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 ‘무한정자(apeiron)’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여러 번 강조했듯이 플라톤에게 현상계로서 현실은 극단적 일원론자들에 의해 백안시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수많은 여러 것들이 다양한 측면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러한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바로 그러한 무한정자에 분유의 형식으로 존재성도 함께 부여함으로써 현실세계가 자기동일성의 차원까지 상승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를 함께 구축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엘레아주의의 극단적 이분법에 의해 촉발된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는 가능적 토대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우리나라 서양고대철학의 태두 박홍규(1919-1994)는 위와 같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존재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 즉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그의 전집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 사례들을 꼽자면 수도 없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의 논문 <유티데모스편에 대한 분석>은 이러한 지상세계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엘레아주의에 기초한 이분법적 독단이 어떻게 현실 허무주의를 조장하는지를 그 자신의 무한정자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기초로 탁월하게 풀어내고 있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의 논리를 토대로 모든 현실의 다와 운동을 무로 돌리지만 무한정자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부정과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에서 다양한 측면과 정도 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배움을 통해 일정한 변화 즉 교정이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즉 존재와 무 사이의 것으로서 무한정자는 타자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플라톤에게 현실 허무주의의 타파를 위한 가능성의 토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부분에서 제시된 믿음의 대상이 갖는 내적 무한정성을 단순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그저 해체의 원인으로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부분의 논의는 현실의 삶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사용하는 사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믿음과 그 대상을 고찰하되, 그것의 한계는 물론 그 반대로 최대한 형상적 앎에 근접할 수 있는 내적 가능성도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형상에 대한 진정한 앎에 대한 인식이 변증술을 익힌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믿음의 영역은 현실의 삶의 보전을 위해 일상의 장인(demiourgos)들이 수행하는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technai)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갖는 실제적 앎으로서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 논의에서는 인식과 관련하여 앎과 믿음이 아주 배타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이어지는 선분의 비유를 함께 살펴보면 앎과 믿음 사이에 추론적 사고의 단계(dianoia)가 자리하는데 이 추론적 사고 단계마저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면 형상적 앎 보다는 믿음 쪽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수학적 앎은 일단 자체성(kath’ hauto)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형상적 앎(epistēmē)이 아니고  이곳 논의에서 보듯이  형상적 앎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예외없이 모두 믿음(doxa)으로 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dianoia)은 믿음과도 분명 구분되지만 최소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구분의 정도에 있어 그것과 형상 사이의 거리는 그것과 개별 학술적 대상 사이의 거리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전자의 거리는 초월적이지만 후자는 최소한 근접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믿음은 지적 훈련을 통해  일반 기술 내지 학술지를 거쳐 점차 경험적 물질적 연장성을 줄여가는 그 만큼 자기동일성(tauton)을 담보하는 추론적 사고 상태(dianoia)에까지 최대한 근접할 수 있지만,  형상적 앎은 고도의 철학적 훈련을 통해 변증술을 갖춘 아주 소수의 철학자들 아닌 한 인식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믿음의 원어인 doxa를 우리말로 단순히 ‘억견’이나 ‘억측’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믿음은 아래로는 환상이나 상상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믿음을 인식 수준에서 점차 상승하는 쪽으로 보면 그것은 이른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과 ‘대중적 덕’의 토대가 되기도 하고 또  개별 기술지(technai)를 비롯해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학이나 기하학은 비감각적 지식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의 측면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간적 연장성을 수반하는 도형들의 사용은 물론 별도의 증명 없이  수와 공리의 존재를  전제(hypothesis)하고 들어 간다는 점에서 그것은 어떠한 연장성도 전제도 갖고 있지 않은 무전제의 원리(archē anypothtos)인 순전한 형상지로서 철학과는 원천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510b) 구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수학적 대상은 형상적 앎의 대상에 닿아 있지만 마치 당구공들이 서로 닿아 있어도 서로가 분리되어 있듯이 형상적 앎의 대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 아무려나 이런 의미에서도 현상계의 믿음의 대상들과 믿음이 갖는 가치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일반 기술 내지 학술들이 그렇듯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 최상의 수준에까지 고양될 경우 우리 모두가 추론과 정합을 통해 정립하고 있는 실질적인 개별과학의 진리성으로서 자기동일성까지 확립 가능한 일종의 일반 법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주장하고 있듯이 자기 동일성은 형상의 자체성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동일성에 기초한 개별학술들 내지 개별 과학은 본질적으로 개연성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20세기가 낳은 걸출한 이론 물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하이젠베르크(W. K. Heigenwerg)가 제기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가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려나 앎과 추론적 사고, 믿음과 관련해서는 학자들 간 해석 상 많은 견해차와 논란을 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를 다루면서 보다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  이렇듯 믿음은 위쪽으로 비록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추론과 정합적 사고를  포함하는 일반 기술지에서 시작하여  최상의 수준에서는 수학, 기하학의 추론적 사유에까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을 제외한 상투적 믿음 수준에서는 그야말로 억측이나 환상에 불과한 상상에까지도 추락할 수 있다. 즉 믿음의 대상이 ‘있지 않은 것과 순수하게 있는 것 사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그 믿음이 본질적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의 측면을 갖는 가능성의 영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중 없는 것 쪽으로 해체될 가능성의 경우는 존재 쪽으로의 극복과 상승의 측면에서 보면 내용적으로 우연성이 증대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적 무한정자는 그 자체 맴돌면서 그 우연성을 어떻게든 증대하는 게 필연적 속성이라는 점에서 <티마이오스>에서는 그것을 ‘방황하는 원인(planōmenē aitia)’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역설적으로 ‘필연(ananchē)’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티마이오스> 48a) 이런 점에서 형성과 해체 양쪽으로 열려 있는 무한정자의 내적 가능성은 양상론적으로 능력(dynamis)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무한정자의 영역에서는 능력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앎과 더불어 믿음을 능력으로 언급하고 그 능력이 적용되는 대상을 구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형상적 앎(epistēmē)은 한결 같이 그 자체적인 것으로 일자적으로 존재하지만, 믿음은 앎과 무지의 중간자로서 앎에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능력과 양상에 따라 위로는 추론적 사고(dianoia)에 까지 상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억측이나 환상(eikasia)의 수준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이러한 앎과 믿음이라는 능력의 주체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영혼(psychē)이다. 즉 앎과 믿음은 영혼의 능력이되 그것이 영혼의 능력 안에서 앎과 믿음으로 갈리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영혼의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혼은 무한정자의 타자성이 비록 운동과 변화를 담보하지만, 그 힘을 설득하여 다를 해체하는 쪽이 아니라 보전하는 쪽으로 현실화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능동적 힘, 즉 포이운(poioūn)으로서 능력의 지향 방향 즉 해체를 거슬러 가장 완전하게 복구해야 할 보존의 근본 지향 내지 목표는 다름 아닌 형상(eidos)이다. 그러나 이것을 플라톤 형상론이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 근거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플라톤에게 목적은 능력에 따라 다다를 수도 있고 다다르지 못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결정론적이라면 플라톤의 목적은 비결정론적인 것으로서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의 영역에서 확립 가능한 자기동일성 또한 영혼의 힘을 토대로 무한정성의 지배를 거슬러 올라 형상적 앎에 근접했을 경우 획득 가능한 최상 수준의 인식 값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물질적 타자성(heteron)도 포함되어 있다. 물질적 타자성은 영혼의 힘을 거부하고 무한정성 고유의 성질이 극도로 발현된 상태 즉 언제나 무로 향하는 해체의 원천이다. 그러나 자기동일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앎에로의 가능성이 증가하고 타자성의 측면이 강화될수록 우연성과 해체성이 증가한다. 이것들을 존재론적 위계로 구분해 본다면 일자적 자체성이 확보된 형상이 가장 우위에 있고 그다음이 능동자 포이운(poioun)으로서 영혼 그리고 가장 아래에 무한정자가 위치하지만, 가능성의 토대가 무한정자인 한, 믿음 영역 또한 상승과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분투 어린 삶의 영역으로서 결코 방기할 수 없는 철학함의 실질적인 현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물론 그러한 분투를 통한 영혼의 내적 고양 단계에서 그야말로 철학적 변증술을 통해 형상에 대한 직관적 통찰의 수준까지 고양되지 않을 경우, 사고 상태는 그저 믿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형상적 앎과 믿음은 모두 영혼 능력의 연속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 형상적 앎은 그 영혼 능력의 고양을 통해 믿음의 영역을 초월해야 획득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형상적 앎에 이른 철학자가 믿음의 영역 즉 현실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떠날 수도 없다. 다만 철학자는 믿음이 갖는 본질적 성격을 인지한 상태에서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 믿음을 앎으로 여기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진리를 토대로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바라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에 따라 고통스러운 등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되는 것이다.

* 변증술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한 철학자가 믿음이 지배하는 현실의 삶의 영역에 왜 실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과연 철학자의 근본 욕망으로서 관조적 본성과 일치하는가의 문제와 함께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논의가 전개될수록 플라톤 철학의 실천철학적 성격은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곳에서 제시된 진리를 관조하기를 좋아하는 철학자와 보통 사람들의 구별, 형상적 앎과 믿음의 구별 즉 형상이론의 근본 틀은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 원칙과 시작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점으로 이 이후에 제시되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원칙을 토대로 철학의 기본 구상들을 보다 다각적인 측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해간다. 다소 거칠게 그 내용들의 성격을 미리 요약하자면 태양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철학 통치자가 종국적으로 지향해야할 총체적인 가치와 합목적성을 보여주며, 선분의 비유는 이곳에서 논의한 앎과 믿음의 세분화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의 인식론적 위계 내지 기본틀을 보여주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의 위계에 상응하는 인식과 실천의 단계들을 통해 현실 영역의 실상은 물론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분투의 여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왜 형상적 앎을 이룩한 철학자가 왜 종국적으로 동굴 속 현실의 세계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유들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종착점이 왜 현실의 구제를 위한 실천의 철학인지를 하나같이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있는 것 자체를 반기는 사람들은 믿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philosophos)라고 불러야 한다’는 이곳 논의의 결론(480a)이자 제5권의 마지막 문구는 차후에 펼쳐질 논의를 통해 여전히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선전포고이자 차후의 구상을 예고하는 선제적 선언인 셈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질 제6권에서 위와 같은 철학자들의 기본 성향과 자질들을 다시 한번 정리 제시한 다음, 승리의 요건으로서 지피지기가 중요하듯 그러한 철학자들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현실의 실태들과 그 이유들을 분석적으로 비판한다.

* 끝으로 이곳 논의에서 언급된 무지agnōsis에 상응하는 대상은 ‘있지 않은 것to mē on’이지만 실제 사람의 경우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무지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설사 억측을 밥 먹듯 일삼고 있는 자일지라도 믿음의 영역에 있는 한, 무지한 사람은 아니다. 요컨대 현실에서 일정 부분 무지한 사람은 있어도 전 영역에서 전적으로 무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적 앎을 획득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모두가 서로 일정 부분 옳고 그른 생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의 생각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포함된 한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선 안 된다.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주의의 이분법을 토대로 그 다양한 측면들을 어느 한쪽으로 매도하는 방식으로 모든 현실 판단에 대한 회의를 부추겼다. 그러나 현실 판단 모두가 상대적이고 회의적인 것은 아니다. 믿음의 영역은 수많은 대립적인 것들과 측면들이 혼재하는 영역으로 영혼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보다 ‘앎’에 가까운 믿음도 있고 ‘무지’에 가까운 믿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보전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철학함의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영혼을 고양하는 철학적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 그러므로 철학 공부는 개인으로서건 시민으로서건 좋은 삶의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관점에서 굳이 현실에서 가장 많은 측면에서 가장 무지한 자를 꼽으라면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통치 영역에서 자신의 무지조차 모른 채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따라 반지성적 전횡을 일삼는 자라 할 것이다. 그러한 무지한 통치자야말로 인간 삶에 가장 위해를 가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가장 비판하고 지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직업으로서 철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최소한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통치의 종식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책무가 아닐 수 없다. 2024년 2월 한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 가히 그 책무는 너무나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구된다. “윤석렬은 탄핵되어야 한다.”는 우리들의 외침과 저항 또한 그 당연한 책무의 하나이다.

* 이곳 논의는 형상론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로서 <국가>에서 처음 제시된 곳이기는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말고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는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 두루 걸쳐 있다. 그러므로 일단 이곳에서는 형상론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면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소개하고 앞으로 형상론 관련 논의가 나올 때마다 다른 대화편의 내용도 함께 연관해 가면서 추가로 논의 사항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로 플라톤 대화편 전체에서 형상론과 관련한 논의가 제시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 플라톤의 대화편 형상(이데아)론 관련 전거들

<라케스> 191e, 192a

<에우튀프론> 54d

<고르기아스> 467e, 506d

<대히피아스> 289d, 292a, 293e, 294a, 298b, 300a, 303a

<뤼시스> 217b, d

<에우튀데모스> 280b, 301a

<메논> 72c, 72d. 72e

<크라튈로스> 389b, 390a

<향연> 204c, 211b

<파이돈> 74d, 75b, 78d, 100b, 103e, 104b, d, e, 105a

<국가> 402c, 434d, e, 435a, b, c, 476a, d, 500e, 510b, d, e, 511a

<파이드로스> 237d, 250a, b, 265e

<파르메니데스> 149e, 150a, 159e, 158b, c, 160a

<테아이테토스> 203e

<소피스테스> 228c, 247a, 252b, 260e

<티마이오스> 28a, 29b, c, 29b, 39e, 48e, 49a, 50c, d, 51a, c, 52c,

<필레보스> 16d, 25b

* 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Chp. 17th, Oxford 1951

(W. D. 로스, 김진성 역, 『플라톤의 이데아론』, 누멘 2011, 259쪽)

 

이상으로 제5권 끝

다음 주제: 2.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8)

 

  1.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2.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1) 형상(이데아)론(474c-476d)

 

* 이데아론을 다루기에 앞서 살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요약하면 결국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 ‘말로 세워진 나라’(gignomenē polis logō) 이른바 로고폴리스(logopolis)는 그 자체 본(paradeigma)으로서 현실구현이 불가능하지만, 철학자를 그 나라의 통치자로 임명할 경우 최대한 그 본에 가깝게는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제5권 502c부터 제7권 540e까지 철학자의 자질과 교육과정 등 그 본에 최대한 닮은 나라 즉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구체적으로 다룬 다음 그 철학자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비로소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라고 명명한다.(527c). 사실 <국가>에는 이상국가라는 말 자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 <국가>의 주제를 나눌 때 일반적으로 제2권 369a에서 제4권 427c까지의 내용을 ‘이상국가의 수립’으로 불러 구분하고 그 후 철인 통치자와 교육과정까지를 포함해 <국가> 내용 전체를 통틀어 ‘이상국가론’이라 부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른바 말로 세운 로고폴리스도 플라톤의 이상국가이고 제7권에서 명명된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 또한 그의 이상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자의 논의가 후자의 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자에 철학자 통치론이 추가된 후자의 나라야말로 플라톤이 생각한 최종적인 의미에서의 실질적인 이상국가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지닌 입장을 정리하자면 전자의 이상국가는 본으로서 현실 불가능하지만, 후자의 이상국가는 최대한 그 본을 닮은 나라로서 최대한 가까운 한도까지 실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그 실현 가능성이 어떤 단일한 조건에서 어떤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아니라, 복잡한 구조와 제도를 갖춘 나라의 경영 상태를 어떻게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한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이점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과 관련한 실질적인 물음은 단지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가능하되 어떻게 얼마나 더 본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가의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필수적인 가능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문제는 결국 철학자 왕의 수준, 즉 바람직한 철학자 왕의 자질과 능력이 무엇이고 그 능력의 최고치는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논의를 모두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철학자 통치론을 다루되 철학자가 어떤 자질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기에 나라의 통치자로서 적합한지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철학자가 좋아하는 진리로서 형상이 제시되고 드디어 이데아론이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474c-476d]

* 소크라테스는 이제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ἅπτεσθαι 나라를 인도하는 것ἡγεμονεύειν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προσήκει φύσει부터 아래와 같이 해명한다.

* 누군가가 뭔가를 사랑한다φιλεῖν고 주장할 때 그 주장이 옳으려면,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소년을 좋아하는 사랑꾼φιλόπαιδα은 한창때의 아이들 모두에 매료되어 관심을 가지고 누구도 내치지 않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명예를 사랑하는φιλότιμος 사람들 또한 어떤 포도주이건 어떤 지위이건 가리지 않고 욕구한다.ἐπιθυμηταί 이렇듯 뭔가를 욕구하는ἐπιθυμητικός 사람은 그것의 모든 종류를 욕구하는 사람이다.(474a-475b)

*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지혜σοφία는 욕구하고 어떤 지혜는 욕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를 욕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배울 거리τὰ μαθήματα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을 선뜻 맛보기를 원하고 기꺼이 배우려 하며 그래도 늘 부족해 하는ἄπληστος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475c)

* 이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οἵ φιλοθεάμονες, 듣기를 사랑하는φιλήκοος 사람들도 구경거리, 들을 거리가 있으면 어디든지 빠짐없이 찾아 돌아다니며 그 비슷한 것들이나 잡기술τεχνύδριον을 배우려 드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도 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은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닮은 사람들일 뿐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ἀληθείας φιλοθεάμονας이라고 말한다.(475d-e)

* 그러자 글라우콘은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그 설명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아래와 같이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과 그것들이 온갖 곳에 나타나서 ‘여럿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한다. “아름다움καλός과 추함αἰσχρός, 정의로움δίκαιος과 부정의함ἄδικος, 좋음ἀγαθός과 나쁨κακός 등 모든 형상εἶδος 각각이 그 자체로 하나’αὐτὸ ἓν ἕκαστον인데, 그 형상들이 행위πρᾶξις들이나 물체σῶμα들과 어울림κοινωνία으로써, 그리고 자신들끼리 서로ἀλλήλων 어울림으로써 온갖 곳에 나타나서 각각이 여럿πολλὰ으로 보이는 것φαίνεσθαι이다.”(476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기초로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전자)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후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요컨대 전자의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 등 ‘그 자체로 하나인 형상’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로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φιλόσοφος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μόν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후자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φωνή나 색깔χροάζω, 모양σχῆμα, 그리고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반길 뿐, 그들의 지적 상태διάνοια로는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의 본성은 볼 수도ἰδεῖν 없고 반길 수도ἀσπάσασθαι 없는 사람들이다. (476b)

* 아름다움 자체에 다가가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καθ᾽ αὑτὸ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σπάνιος.(476b) 누군가가 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운 것들ὁ καλὰ πράγματα은 믿으면서νομίζων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κάλλος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앎γνῶσις으로 이끌고 갈지라도 그를 따라갈 수조차 없는 사람은 꿈ὄναρ을 꾸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전자의 사람들 즉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움 자체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들τὰ μετέχοντα을 모두 볼 수 있으며,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 ‘그것 자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 자체’가 ‘그것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은 깨어 있는 상태ὕπαρ로 살고 있는 것이다.(476c-d).

* 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διάνοια는 아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γιγνώσκοντος 앎γνώμη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사람들 지적 상태는 믿음을 갖는 사람의 것으로ὡς δοξάζοντος 믿음δόξα이라고 불러야 옳다.(47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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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c ‘어떤 사람들이 철학에 발을 들이고 나라를 인도하는 것hēgemoneuein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지’ : 자연적 성향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 성향에 맞는 것을 자기 일로 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국가의 분업 원리도 모두 그 원칙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철학자는 자연적 성향에서 무엇보다 철학에 적합하지만, 나라를 인도하는 것 즉 통치에도 적합하다고 언급된다. 즉 철학자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자신의 자연적 성향 그대로 통치하기도 좋아하고 또 그것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 다른 곳에서는 그 반대로 철학자는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521b)이고 ‘정치적 관직을 깔보는 삶’(521b)을 사는 사람들이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통치하게 하려면 강제가 요구되는 사람들(521b)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플라톤의 말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관직을 깔본다는 내용은 통치를 시민의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 권력을 쟁취의 대상으로 삼는 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철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는 통치행위는 당연히 싫어하고 그러한 권력 지상주의자들이 탐하는 관직을 깔본다. 그러한 통치는 동족 간 내란을 일으켜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기 때문이다.(521a) 그러나 바람직한 통치자는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을 도모하고(420b) 시민과 함께 즐거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462b), 또 성향상 철학자가 그러한 통치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므로 통치 권력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는 정치 생활 보다는 철학 생활하기를 더 좋아하므로 누구라도 선뜻 먼저 나서기보다 서로에게 떠맡길 수 있어 일종의 자율적 강제의 형식으로 통치의 수고를 돌아가며 떠맡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강제는 싫어하는 것을 강제로 강요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선뜻 나서지는 않는 사람들에 대한 자율적인 내부 규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철학자에게 강제는 없다. ‘강제’라는 표현은 철학자들이 통치 적합자임에도 자칫 이기적 권력을 탐하는 자들로 비칠 수 있음을 변명하기 위한 일종의 레토릭(rhetoric)의 성격이 강하지만 어쩌면 철학과 정치 참여 사이에서 평생을 고민해온 플라톤 자신의 내적 심리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 475d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 요컨대 철학자는 진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랑한다’거나 ‘추구한다’는 것은 모종의 성취 결과를 이룬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음’, ‘추구하고 있음’이라는 과정 그 자체 현재 진행형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랑을 쟁취했다는 말도 쓰지만, 사랑을 쟁취한 사람이 진정 원하고 목표로 하는 것은 쟁취 그 시점이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 진행형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 것이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철학 역시 어떤 목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설사 진리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에 머물지 않고 늘 되물어 보고 되돌아보면서 보다 진일보한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지적인 긴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자체가 우리 모두의 철학함의 진정한 목표라 할 것이다.

* 476d 지적 상태(dianoia) : dianoia는 추론적 사고(思考)(thinking), 사고 내용(notion, thought expressed), 사고 과정(process of thinking), 이해(understanding), 사고 기능(thinking faculty), 지적 능력(intellectual capacity)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지적 이해의 상태 내지 내용’을 의미한다. 나중 선분의 비유(509c-513e)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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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차 언급했듯이 <국가>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은 이데아론, 철인 통치론, 좋음의 이데아,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변증술과 철학자 교육과정 등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불릴만한 핵심적인 주제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관련 연구서들은 물론이고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이라면 모두 플라톤 철학을 소개하면서 거의 빠짐없이 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만큼 이 주제와 관련한 논의들은 개요 수준에서부터 전문적인 연구 수준에 이르기까지 자료들이 매우 풍부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다행하게도 최소한 이 주제들과 관련하여 우리 강해에서 기울여야 할 노력은 그만큼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데아론을 비롯하여 제5권에서 제7권까지 우리가 다룰 플라톤 철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해 우리 강해는 앞으로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우선 지금까지 해왔듯이 기본적으로 <국가> 텍스트의 해당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개하되, 위 주제들과 관련하여 철학사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반적인 설명은 줄이는 대신 주요 논쟁점과 더불어 플라톤 철학 전체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몇 가지 점들을 중점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 그럼 텍스트 순서대로 <국가>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 또는 ‘형상(eidos)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플라톤의 형상은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통치자로서 적합한가에 대한 아래와 같은 도입부의 대화를 통해 제기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철학자 즉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든 배울 거리를 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글라우콘이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온갖 것을 기웃거리며 배우기를 좋아한다면 그들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는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하고 그런 연후 ‘진리 구경하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저 감각으로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래와 같이 대비해가면서 그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철학자가 사랑하는 진리를 담지하는 대상으로서 형상이라는 것이 처음 소개된다.

* 물론 플라톤의 형상이 <국가>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형상은 이곳에서 처음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선분·태양·동굴의 비유, 좋음의 이데아, 변증술로 이어지면 깊이를 더해 가지만 그 주제가 플라톤 철학의 중심 주제인 만큼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티마이오스> 등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도 두루 다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기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자체가 체계적인 논의가 아닌 데다가 대화편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들 자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구석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말이 ‘플라톤 이데아론’이지 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그 해석 또한 학자마다 천차만별이다. 특히나 오늘날 분석철학과 언어철학의 발달에 따라 관련 텍스트에 대한 미시적 언어 및 논리 분석이 크게 증대되고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대두되면서 현대철학에서는 아예 플라톤의 원초적인 의도와 관점이 아예 공중 분해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텍스트를 직접 접하거나 전문 연구서를 보기보다는 서양철학사 등 플라톤 이데아론을 다룬 개괄서들을 통해 일반적인 개요 수준에서 그 내용을 접하고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 우선 형상(eidos : 形相)이라는 말은 ‘보이는 것’, ‘외모’, ‘형태’, ‘종류’, ‘개념’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니는 일상어로서 앞에서도 여러 번 사용된 말이다.(402c-d, 434d, 435b 참고) 그러나 약간의 논란이 있는 402c eidē의 경우를 제외하면(강해 40참고) <국가>에서 플라톤이 eidos를 본격적으로 ‘형상’(形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이곳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데아’(idea)라는 말은 eidos라는 말과 함께 eidō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eidos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그 형상을 언급하면서 ‘그 자체로’(kath’ hauto, kata auto), ‘자체’(auto)라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auto를 형용사에 정관사 to를 붙여 명사화한 것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점차 밝혀지겠지만 이 말들은 소크라테스가 거의 공식이라 할 정도로 형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 아름다움 자체(auto to kalon), 정의 자체(auto to dikaion) 등)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형상을 ‘각각 그 자체로 하나’(auto hen hekaston)이자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ekaston to on)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들은 우선 플라톤의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일자성(一者性)을 갖고 있다는 것 즉 형상이 어떤 타자와도 무관하게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실재하며 늘 한결같고 불변하는 하나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하나가 각각 하나라고 함은 그 형상이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달리 ‘여럿’(polla)임을 나타낸다. 즉 플라톤의 형상은 다(多)의 진상으로서 각각 일자성을 갖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 자체로 독존적으로 실재하는 ‘있는 것’(to on)이다.

* 형상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그리스어 on은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einai의 중성 분사형으로 being의 뜻을 갖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어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einai동사는 영어의 be동사가 그러하듯 ‘있음’이라는 존재를 나태는 용례만이 아니라 ‘~임’이라는 술어적 용례로도 쓰이고 나아가 ‘다름 아닌 정말 그것 맞음’이라는 진위적 용례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플라톤이 형상을 ‘to on’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형상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자 ‘~인 것’이며 동시에 ‘정말 ~인 것으로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용례 중 어떤 용례로서 to on을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 온갖 경우를 들어 세세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자체가 그 세 가지 용례를 모두 포함하는 데다가 플라톤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용례의 특수성을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그러한 분석이 별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다. 플라톤을 이해하려면 그가 사용한 용례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왜 그 모든 용례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 플라톤은 그 형상들의 실례로 이곳에서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로움’과 ‘부정의함’을 들고 있다. 그런데 형상들이 존재하는 곳이 믿음(doxa)이 대상으로 하는 현상계가 아니라 진정한 앎epistēmē이 대상으로 하는 예지계라는 점에서 과연 ‘추함’ 이나 ‘부정의함’도 형상인가 그것은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의 ‘결핍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특히 to on의 진위적 용례가 to on의 참됨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곳 바로 뒤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오류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분명 이 점은 논란거리이긴 하다. 다만 이곳의 언급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추함’과 ‘부정의함’ 또한 ‘정말 다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자체로 추한 것, 부정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오류 불가능성 또한 ‘정말 추한 것, 부정의한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다.

* 그런데 이렇듯 플라톤이 예로 들은 형상의 실례를 통해 형상이 무엇인가를 접근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이곳 <국가>에서도 ‘아름다움’, ‘추함’, ‘정의’, ‘부정의함’ 등 뭔가 윤리적이거나 미적인 것 이외에 감각계 인공적 사물인 ‘침상’의 형상(597c)도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있음’, ‘없음’, ‘운동’, ‘정지’ 등 범주적인 것들(<파르메니데스 129d-e, 139b, <소피스테스> 254b-255e, <티마이오스> 35a 등)을 비롯해 ‘하나’, ‘둘’, ‘홀수’, ‘짝수’, ‘원’, ‘직선’, ‘도형’, 다름’, ‘같음’ 등 수학적이거나 논리적인 것들(<대히피아스 300d-302b, <파이드로스> 104a-c, 104e, <에우튀프론> 12d, <메논> 74b, 74d-e 등) 그리고 ‘눈’, ‘불’, ‘벌’, ‘흙’, ‘공기’, ‘물’, ‘불’ 등 자연물들(<파이드로스> 103c-105d, <메논> 72b-c, <티마이오스> 51b 등)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침상의 예처럼 형상의 그림자인 것들로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형상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어서 침상의 경우 그냥 비유로만 사용된 것이라 이해한다 해도 플라톤이 언급한 위와 같은 형상들의 다양한 예들은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는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실로 많은 논란과 의문을 수반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예들 대부분이 무언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사례들로 정의하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예시된 것임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형상은 모든 경우에서 늘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는 감각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 즉 ‘언제나 동일하게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것’(aei kata tauta hosautōs onta)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우리의 일상의 경험에서도 가까운 예로 일정한 음의 수적 비례 등 수와 논리,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론적 원리들이 수많은 아름다운 악곡들 배후에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리고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형상들과 행위들 또는 물체들과 어울림(koinonia)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장차 또 자세히 다루어지겠지만 이른바 감각적 물질세계에 대한 형상의 관여(metechein)로 설명되면서 실상의 세계, 예지계로서 형상계와 그 그림자의 세계로서 현상계의 내적 관계를 규정하는 토대가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형상들) 자신들끼리 서로 어울려’라는 부분은 예지계 형상들끼리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별도의 추가적인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과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형상들이 어울린다고 하면 형상들에게 어울리는 측면이 있어야 가능한데 형상들 각각은 어떤 것들과도 관계 맺지 않는 자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불변의 것으로서 관점이나 측면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플라톤은 이곳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관련하여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는 대신에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소피스테스>에서 그 문제를 독립적인 주제로 삼고 있어 우리는 <소피스테스>(250a-259d)를 통해 그 의문의 실마리를 부분적으로나마 풀 수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존재(ousia)와 운동(kinesis) 그리고 정지(stasis),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을 형상의 예로 들면서 운동과 정지 모두 일단은 있는 것으로서 존재성을 갖는 한, 존재에 의해 포괄된다고 말한다. 즉 운동도 정지도 존재와 일정하게 결합(koinonia)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그러면서도 이들 각각의 것과 다른 어떤 것이므로 이들 각각은 또 서로 다른 것으로 ‘다름’과 결합해 있을 뿐만 아니라 각기 그 자체로 자기 동일적이므로 ‘같음’과도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서 철자의 비유를 통해 형상들의 결합을 설명한다. 즉 자음 모음은 각각 그 자체 하나의 유(類, genos)이자 형상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글자를 이루고 글자는 다시 어울려 단어를 이룬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등이 일단 어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각형의 형상에서 3의 형상과 선분의 형상 각각이 결합했다 해서 그것들 각자의 일자성을 잃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자체로 자체성을 보전하면서 유와 종의 관계를 갖고 서로 결합한다. 물론 이것들은 무한대의 경우 수로 결합하거나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존재와 정지는 결합할 수 있되 정지와 운동은 결합할 수 없듯이 철자들이 아무런 철자술(grammatikē, 253a) 상의 규칙 없이 아무 자음과 모음들끼리 임의로 결합할 수는 없다. 이른바 최고류에 해당하는 형상은 종차를 이루어가며 가장 위쪽으로 섞이고 모이면서(synagein) 드러나는 형상이고 반대로 그러한 최고류의 형상이 분할(diairesis)되어 더 분할 될 수 없게 되면 그것이 최하종으로서 이를테면 철자에 해당하는 원자적 형상(atomon eidos)이 될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결합과 분할의 내적 관계와 규칙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 수 있는 능력이 곧 철학자가 최종적으로 습득해야 할 변증술(dialēktikē)이다.

* 이러한 형상들의 결합은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주 제작과정을 그리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이른바 형상들의 세계를 본(paradeigma)으로 삼아 그것을 보고 실제 자연 세계를 만든다. 이 경우 데미우르고스가 바라보는 형상들 가운데에는 개별 형상들도 있겠지만 ‘여럿이 조화롭게 어울린 자연 세계의 본’으로서 복합적 특성을 갖는 ‘결합된 형상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따로 자신이 본을 구상하지 않고 순전히 그 형상계의 본만을 보고 우주를 제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본으로서 제작 전에 주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제작하는 목표가 ‘좋은 우주’ 즉 ‘여럿들의 조화와 공존’에 있는 한 우주 전체에 섞여 그것을 통일적으로 관철하는 우주 세계의 본으로서 ‘좋음의 형상’ 또한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가>에서 앞으로 제시될 ‘좋음의 형상’은 형상계의 모든 형상들의 총체적인 결합과 관련한 형상으로서 우주 제작자가 가장 중시해야 할 본이라 할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이후의 철학사를 통해 예지계와 현상계를 가르는 두 세계 이론(Two worlds theory) 즉 이원론적 세계관의 토대로만 주목되면서 플라톤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는 그저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고 반대로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천상의 세계만을 실상의 세계로 생각하는 철학자로 평가되게 만들었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만 봐도 플라톤의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자연과학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근대 인문주의 내지 과학주의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철학사적 전통에서 플라톤 철학이 왜 ‘현상 구제론’ 즉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철학으로 불리고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플라톤의 형상론을 접하는 사람이면 보통의 경우 대부분 앞서 말한 두 세계 이론부터 떠올리지만, 현상 구제의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형상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多) 즉 복수의 형상들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플라톤이 형상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기본적으로 존재 세계에서 오직 부동의 일자만을 주장하는 종래의 파르메니데스주의를 혁파하고 존재 세계가 본래부터 여럿의 세계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 익히 알고 있듯이 플라톤 당대 혼란기 아테네를 지배하고 있었던 철학 사조는 파르메니데스주의를 이어받은 엘레아의 철학이었다. 아테네 철학은 소박한 물활론에서 시작하여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론(panta rhei)을 거쳐 파르메니데스 사상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급기야 엘레아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전통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자연(physis)과 관습(nomos)의 유기적 통일, 여럿과 운동이 철저히 부정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여럿과 운동의 부정은 그 자체로 현실 세계 다양한 존재자들의 존재성과 그것들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학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전란에 허덕이는 당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극복의 근거나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그들을 아예 극단적인 허무주의와 회의주의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덕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소피스트들은 엘레아적 논리주의를 이용하여 권력 지향적인 귀족들에게 궤변적 수사술과 처세술을 가르치며 사적인 이익을 취했고 그런 방식으로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으로 형성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에 기여했다. 물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현실과 지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엘레아주의에 대항하여 여럿과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없지 않았다. 특히 원자론자들은 엘레아주의자들을 의식하여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에 부합하는 이른바 원자(atom)의 존재를 상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원자들이 운동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원자들을 둘러싼 허공(kenos) 즉 없는 것(無)의 존재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요컨대 그들은 철학적으로 존재 세계가 여럿이자 운동하는 세계임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자론은 그런 방식으로 일정 부분 여럿과 운동을 구제할 수는 있었으나 플라톤이 보기에 그 운동의 기계론적인 성격은 그리스적 세계관의 토대로서 자연과 관습의 유기적 통일을 위한 합목적적 가치 지향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플라톤은 여럿과 운동의 근거도 확보하고 운동과 변화의 합목적적 가치지향도 가능할 수 있도록 고정치는 고정치대로, 운동치는 운동치대로, 관계치는 관계치대로 각각에 정당한 존재론적 기초를 부여하여 존재 세계에 파르메니데스적 일자들이 여럿이 있음과 동시에 그것들이 운동하는 것임을 밝히고 덧붙여 존재 세계의 총체적인 합목적적 가치의 지향 푯대로서 최고의 유적 형상이자 본으로서 ‘좋음’(to agathon)의 형상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의 형상론은 자연 세계 여럿의 존재와 인식의 근거로서 파르메니데스적 일자성을 형상들 각각에게 부여하여 여럿이 각각 그 자체로서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일차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세계에서는 운동치가 자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그에 이어 운동치는 고대 이래로 그랬던 것처럼 물질적 존재자들의 근본 속성으로 받아들이되 다만 그것들이 형상을 분유(metechein)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물질적 존재자들의 구분과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존재성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즉 플라톤은 고정치는 형상계에, 운동치는 물질적 현상계에 두고 그것들이 존재 세계에서 상호 관여의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존재 세계가 일정하게 여럿을 보전하면서도 상호 섞일 수 있는 관계치의 근거도 함께 마련한 것이다. 이로써 여럿이자 운동하는 현실이 존재론적으로 구제된 것이다. 이제 화살이 정지해있지 않고 날아가는 것이, 토끼가 거북이를 앞질러 달려가는 것 또한 더 이상의 가상이 아니고, 여러 가지 것들의 차이를 식별하고 구분하여 사물과 사태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 또한 더 이상의 허튼짓이 아니다.

* 그러나 현상계 존재자들은 형상의 분유치만 갖고 있으므로 한결같이 고정적이지 못하고 물질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완전한 분유치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상계의 존재자들을 대상으로 인식과 학술을 도모할 경우 형상 수준의 진리성 즉 에피스테메까지 이르지 못하고 믿음(doxa)이나 확신(pistis)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요컨대 그것들에 대한 학술적 성격은 본질적으로 ‘그럴듯한 수준의 설명’(eikos logos) 즉 개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계에서도 물질성을 최소로 갖고 있거나 물질성이 갖는 연장성만 지니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곧 수 또는 도형 다시 말해 수학적 기하학적 대상이다. 그러므로 지성(nous)을 통해 형상에 대한 에피스테메를 획득하는 변증술을 제외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학술로서 가장 에피스테메에 근접하는 일반 학술은 오직 수학과 기하학 그리고 수학적 논리학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기하학은 가정(hypothesis, 510c-d)도 수반하고 형상이 갖는 완전한 고정치까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분유치로서는 최고 수준의 고정치를 인식할 수 있는 학술인 만큼, 자연 세계를 탐구하는 모든 학술의 최선의 방법론적 토대가 된다. 이를테면 건축술, 조타술, 제화술 모두 최대한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기하학이 반드시 필요하고 오늘날 물리학과 생물학을 비롯한 개별과학 역시 본질적으로 수학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자체성(kath’ hauto)은 변증술을 통해 형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자기동일성(tauton)은 추론적 사고(dianoia)로서는 최고 단계 즉 최고 수준의 분유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수학과 기학학적 인식의 진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교육과정에도 수학과 기하학은 변증술을 익히기 위해 반드시 이수해야 할 전 단계 과목으로 제시된다.

* 가장 완전한 앎으로서 형상에 관한 앎은 변증술 즉 철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면, 당대의 일반 학술들(technai)(511b-c)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일반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들에게는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이 학적 인식의 최고 목표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자기동일성은 기본적으로 현상계 진리성이므로 진정한 앎이 갖는 자체성에 미치지 못하는 본질적으로 개연적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일반 학술로서 오늘날 개별과학 내지 자연과학은 절대지에 이를 수 없고 늘 그 절대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절대지에 근접하는 지식만 얻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자연학이 갖는 개연성에 만족하지 못해 형상을 자연세계 개체에 끌어들여 자연학의 진리성을 확보하고 이른바 경험과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갈릴레오 역학과 그 이후의 이론 물리학의 등장, 그리고 그것의 진리성은 그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고려하더라도 2,500년 전 제기된 플라톤의 형상론이 말을 너머 진상에 대한 직관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사상이나 종교는 물론, 오늘날 자연과학 내지 개별과학의 학문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것인지는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확인하지만, 플라톤의 형상론은 본질적으로 현상계의 학술적 해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 즉 현상계의 구제를 위해 제시된 이론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 위계에서 본다면 형상계가 최상이지만 플라톤이 기울인 관심의 위계에서 보면 현상계 즉 현실에 대한 관심이 최우위에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 실제로 이같이 형상의 인식과 현상계의 인식을 구분하는 위계적 구도를 현상계에서 똑같이 보편-개물의 구도로 적용할 경우. 오늘날 일반 학문의 기본 구도와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학문은 현상계 소여들을 귀납하여 보편적 개념으로 일반화하고 그 보편 개념들의 정합 관계를 통해 사물과 사태에 대한 개념적 인식을 도모하는데, 플라톤의 인식론 또한 보편 실재로서 형상들이 관여의 방식으로 개물들에 결합된 형상적 분유치들(현상계 사물의 공통 속성들을 일반화한 개념들)을 토대로 감각적 개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적 인식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그 기본 구도는 서로 비슷하다. 현상계 인공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보편이 드러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는 현상계의 사물들에 대한 일반 개념들은 개물들이 갖는 공통적 속성의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 위쪽의 방향으로 모여져서 주어지는 데 비해, 플라톤의 인식론에서는 그 반대로 실재하는 형상(아름다움 자체)이 위에 있고 개체들(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아래쪽으로 분유되는 방식으로 존재성을 획득하고 그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른바 형상이든 개념이든 이른바 보편자를 통해 개별자에 대한 인식과 식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즉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형상과 현상의 관계’와 현상계 내에서 ‘개념과 개체의 관계’는 마치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원상이고 하나는 보편-개별 관계의 모상인 양 구조적으로 닮아 있어, 비록 현상계의 인식이 분유치에 대한 개연적 설명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오늘날 학적 인식의 관점에서 현상계에서 사물들에 대한 개념적 인식과 그것의 정합적 체계화가 구조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비록 형상에 대한 인식이 참된 앎이고 그것에 이르는 학술이 변증술이자 철학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획득된 앎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플라톤 자신 대화편 어느 곳에서도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굳이 그 내용이 있다면 형상들의 실례 정도, 그것도 불분명한 수준 정도의 밖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그 자신을 포함 누군가 그것에 대한 앎을 획득했다는 언급도 없고 그저 철학자가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에서조차 형상계와 관련해서는 여러 형상들이 있다는 정도 외에 철학자가 아닌 일반적인 학자 수준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결국 형상계에 비교하여 비록 낮게 평가되고 있으나 바로 그 현상계가 일반 학술 차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학적 인식의 실질적인 중심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플라톤 또한 결코 현상계 영역을 허투루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이곳 형상론도 정의로운 국가를 논의하기 위한 이상적 푯대이자 토대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얼핏 세계를 물자체가 존재하는 예지계와 현상계로 나누고 실질적인 학적 인식을 현상계에 대한 오성(Verstand)의 인식으로 국한한 칸트(I. Kant)의 비판적 인식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에서도 신은 위계상 지고의 존재임에도 현실의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 요청(Postulat)되는 형식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에게서 신학은 위계상 최고의 학문임에도 도덕론에 부수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논쟁점을 갖고 있는 영역이 또 플라톤의 현상계이다. 바로 그 현상계에 대한 논의가 이곳 형상계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다루어진다. -끝-

다음 주제: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 제5권 끝 480a)

(2) 현상계와 믿음(doxa)(474c-476d)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7)

 

  1. 전쟁에 관한 일(466e-471c) 그리고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471c-474c)

 

제5권 [466e – 471c]

*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 파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뜬금없이 아래와 같이 전쟁에 관한 일들을 길게 늘어놓는다.

1) 아이들과 동반 출정의 이유와 안전을 위한 방책

* 전쟁πόλεμος과 관련한 경험ἐμπειρίᾳ과 구경θέα을 통해 장차 아이들이 훌륭한 수호자가 될 수 있도록 전쟁에 함께 출정해야 한다. (466e)

* 이때 이들의 안전ἀσφάλεια을 도모하기 위해서 경험과 연배에서 지도자ἡγεμονεύς이자 아이들의 인솔자παιδαγωγός이기에 충분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말 타는 법ἱππεύειν을 가르쳐 필요할 경우 가장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게 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467d)

2) 전사들 자신이 가져야 할 태도와 전사자에 대한 대우

* 전사στρατιώτης들 가운데 비겁κάκη하게 대오τάξις를 이탈하거나 무기ὅπλον를 버린다거나 혹은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자는 장인이나 농부로 보내야 한다.(468a) 산 채로 적들에게 잡힌 자는 적들οἱ πολεμία이 마음대로 하도록 선물로 줘 버려야 한다.(468b-c)

* 반대로 무훈을 세우고ἀριστεύσαντά 명성을 떨친εὐδοκιμήσαντα 자는 화관στέφανος을 수여하고 환영해야 하고 짝짓기 기회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무훈을 세우는 데 더 열심을 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서 우수한 자식들도 태어난다.(468c)

* 호메로스를 따라 젊은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에게 명예τιμή를 높여주는 것이 정당하다. 제사나 모든 행사에서 찬가ὕμνος와 함께 명예로운 자리와 고기, 그리고 가득 찬 술잔으로 명예를 높인다. 그것은 한창때 용감한 자들의 명예를 드높임과 동시에 체력을 증진시킨다.(468d-e)

* 출정 중 전사한 이들 가운데서 명성을 떨친 이들은 황금족γένος τοῦ χρυσοῦ으로 이야기하고 잘 장사 지낸 후 무덤을 돌보고 엎드려 절해야 한다. 또한, 특별히 훌륭하게 살다 죽었을 경우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을 관례νόμος로 삼아야 한다.(468e-469b)

3) 적들에 대한 태도

* 가능한 한 그리스인들이 이민족βάρβαρος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그들이 적일 경우에도 그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지 말아야 한다.(469b-c)

* 승리를 거두고서 죽은 자에게서 무기 외에 약탈해서는 안 된다. 시체를 약탈하거나 시신 수습을 방해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 땅을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해의 농작물καρπός만을 취한다.(469c-470b)

* 친족에 대한 적대행위는 ‘내분’στάσις이고 남에 대한 적대행위는 ‘전쟁’πόλεμός이다. 그리스가 병이 들어 내분을 벌이더라도 상대편의 농토를 유린하고 집을 불사르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한, 보모τροφό이자 어머니인 나라를 유린해서는 안 된다.(470b-d)

* 패배한 친족들은 싸울 상대가 아니라 화해διαλλάσσειν하게 될 상대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농작물 정도나 취하는 게 적정하다. 그리스인들은 훌륭하고 양식 있는ἀγαθοί τε καὶ ἥμεροι 사람들로서 그리스를 자신들의 조국으로 간주하고 사랑하며 공통의 종교의례를 갖는다.(470d-e)

* 친족과 내분이 있을 때도 그리스인들은 상대방을 노예로 삼거나 파멸시키는 식으로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σωφρονισταί이지 적이 아니다.(471a)

*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그들에게 적대자인 것이 아니라 매번 갈등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대자이다. 따라서 대다수가 친구인 상대방의 땅을 황무지로 만들거나 집을 무너뜨리지 말아야 한다.(471b)

* ‘아무 잘못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의해’ὑπὸ τῶν ἀναιτίων ἀλγούντων 책임자들οἱ αἴτιοι이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도달할 때까지만 갈등을 지속해야 한다.(471b)

* 땅을 유린하거나 집을 불사르지 말라는 것도 수호자들에게 법으로 제정해줘야 한다.(47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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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7d 아이들의 인솔자 : 아테네에서 이 역할은 노예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경험과 연배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춘 우수한 시민에게 그 역할이 맡겨져 있다. 플라톤은 아이들의 교육 과정에서부터 이미 혁신을 기하고 있다.

* 467d 말 타는 법 : 아테네 전투편제에서 기마병은 자신이 소유한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할 능력을 갖춘 소위 귀족 내지 지휘자급의 병과였다. 그에 따라 귀족들의 경우 승마교육이 중시되었다. 이곳에서도 수호자 계층에게 승마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 468c 이 문맥에서 글라우콘은 무공을 세웠을 경우 ‘출정 중 입맞춤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거절할 수 없게 해주어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 이것은 무공을 세운 자들에게 소년애를 마음껏 누리게 해야 한다는 글라우콘의 바람을 드러낸 말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 짝짓기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 이상을 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설사 동성 간 입맞춤이 허용되더라도 그것은 자식을 대하듯이 선의의 입맞춤이어야 함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403b) 플라톤은 남성과 남성 또는 여성과 여성의 결합은 자연에 어긋난 것으로 뻔뻔함(tolmēma)과 무절제(akrateia)의 소산으로 여긴다.(<법률> 63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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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답변을 최대한 늦춰 보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일종의 여담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내용상 전쟁 관련해서 이상국가가 택하고 있는 바람직한 정책들을 그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정 부분 주제와 연관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나마 플라톤의 전쟁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플라톤은 적대행위를 크게 동족끼리 싸우는 내분과 이민족과 싸우는 전쟁으로 나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에게서 전쟁은 오직 침입에 맞서는 방어 전쟁뿐이라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당대 아테네인 모두가 칭송하고 옹호하던 아테네의 패권적 침략 전쟁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메넥세노스> 해설 참고) 실제로 동족이건 이민족에 대해서건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있는 부분은 대화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내분과 전쟁 모두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나쁜 것이지만 플라톤은 앞서도 살폈듯이 내분을 특히 더 나쁜 것으로 간주한다. 이민족과의 전쟁도 나라의 내분이 없는 한 두려워할 게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단합하여 이민족인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은 장기간에 걸친 내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기본적으로 내분을 대처하는 방안이다. 우선 내분은 친족과 싸우는 것이므로 언젠가 화해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삶의 터전인 농토나 가옥을 파괴하거나 재물을 약탈하거나 시신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내분은 질병 상태인 만큼 질병의 원인이 되는 소수만이 적일 뿐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해당 나라의 모든 이가 적대자는 아니다. 친족들은 서로 좋은 뜻에서 상대방의 분별을 일깨워 주는 사람들이지 예속이나 파멸을 의도하여 서로에게 벌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갈등 내지 적대행위 또한 다만 그 불화의 장본인들이 벌을 받는 시점까지여야만 한다.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전쟁에서 동족을 적으로 대할 때 태도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 자신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과정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제국주의 아테네가 기원전 416년 동족 멜로스인들에 대해 저지른 참혹한 학살 사건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한 후 시민들 대부분을 무차별 학살하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때 멜로스 여성을 자신의 정부로 삼기도 했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또한 제1권의 내용을 구상하는데 기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5권 84-116 참고)

* 그리스 시대 동족끼리 그래왔듯이 오늘날 모든 나라는 민족과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인류애를 바탕으로 동등한 세계시민으로서 상호 존중 하에 국제간 평화를 도모하면서 올림픽과 국제적인 예술제 등 문화적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나라 간 민족 간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에 따라 오늘날에도 대규모 살상 무기의 제한 및 전쟁 포로의 인권적 처우 등 전쟁 관련 기본 규범 등 국가 간 전쟁 또는 분쟁 시 서로가 준수하고 노력해야 할 최소한의 규범과 그 해결책이 다각적으로 강구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규범들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을 비롯한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방침들을 들여다보면 이미 2500년 전 플라톤이 내놓은 위와 같은 제안들이 근본 원칙으로 관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 자신 평생 전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국가 근간을 마치 전시 체제 정부인 양 그리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통치의 이념을 들여다보면 그 자신 나라 간 사람들 간 평화와 안전 그리고 화해와 공존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 : 이상 국가의 가능성(471c-474c)

 

[471c-474c]

* 소크라테스가 기대와 다르게 전쟁 관련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자 글라우콘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이러다간 미뤄두었던 문제를 아예 잊어버리실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 후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생겨난다면 당연히 그런 온갖 좋은 것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 그러한 정치체제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득해 주기를 요구한다.(471c-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가까스로 두 개의 파도를 피했는데 삼중 파도 중 가장 크고 거친 파도로 내몰고 있다고 말한 후 그 주제가 통념에도 어긋나고 말을 꺼내기도 힘든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재촉이 거듭되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부정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하다가 논의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환기케 한 후 정의 자체αὐτόε δικαιοσύνη와 완전하게 τελέως 정의로운 사람, 부정의와 가장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탐구해온ἐζητοῦμεν 것은 그것들을 본παράδειγμα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그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행복εὐδαιμονία과 그 반대와 관련해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며 우리들 자신과 관련해서도 가능한 한 그것들과 가장 닮은 사람이 그러한 운명과 가장 닮은 운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지, 그것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ἀποδείκνυμι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472a-d)

* 이를테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본을 그림에다 충분히 표현한 화가가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까지 보여줄 수 없다 해서 그 화가를 폄하할 수 없듯이 설사 우리가 말로 만들어 온 훌륭한 나라의 본 그대로 나라를 수립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의 논의가 목적에 부응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72d-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행위πρᾶξις가 본래 말한 것λέξις 그대로 진리ἀληθεία에 다다를 수는ἐφάπτεσθαι 없는 만큼, 우리가 말로 설명한 나라가 실제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주기를 강요하기보다는 그 나라와 가장 비슷하게 경영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정도의 성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잘못 행해지고 있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게 해서’ὅτι ὀλιγίστων τὸν ἀριθμὸν καὶ σμικροτάτων τὴν δύναμιν 어떤 것을 바꾸어야 이런 방식의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를 찾아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73a-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뭔가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그 변화의 방법과 관련하여 “내가 보기에는 하나εἷς가 바뀌면 – 비록 그 하나가 작은 것은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 나라가 변화될 수 있다.”고 운을 뗀 후, 당대 아테네인들의 비웃음과 경멸에 휩쓸릴 정도로 가장 큰 파도에 비유했던 지금의 주제 즉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자신이 그동안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 속에 품고 눌러만 두었던 속내를 마침내 선언하듯 아래와 같이 털어놓는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나라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ἐὰν μή, ἦν δ᾽ ἐγώ, ἢ οἱ φιλόσοφοι βασιλεύσωσιν ἐν ταῖς πόλεσιν ἢ οἱ βασιλῆς τε νῦν λεγόμενοι καὶ δυνάσται φιλοσοφήσωσι γνησίως τε καὶ ἱκανῶς, καὶ τοῦτο εἰς ταὐτὸν συμπέσῃ, δύναμίς τε πολιτικὴ καὶ φιλοσοφία, τῶν δὲ νῦν πορευομένων χωρὶς ἐφ᾽ ἑκάτερον αἱ πολλαὶ φύσεις ἐξ ἀνάγκης ἀποκλεισθῶσιν, οὐκ ἔστι κακῶν παῦλα, ταῖς πόλεσι, δοκῶ δ᾽ οὐδὲ τῷ ἀνθρωπίνῳ γένει, οὐδὲ αὕτη ἡ πολιτεία μή ποτε πρότερον φυῇ τε 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καὶ φῶς ἡλίου ἴδῃ, ἣν νῦν λόγῳ διεληλύθαμεν. 요컨대 이것 이외에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행복해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οὐκ ἂν ἄλλη τις εὐδαιμονήσειεν οὔτε ἰδίᾳ οὔτε δημοσίᾳ.(473c-d)

* 소크라테스가 이처럼 비장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글라우콘은 크게 놀라워하며 그 소리가 불어올 충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그 소리를 듣고 아주 많은πολύς 사람들이, 그것도 만만치φαῦλος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이를테면, 겉옷을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각자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ὅπλον를 집어 들고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선생님께 있는 힘껏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글라우콘은 만약 소크라테스가 이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피해내지 못할 경우 그야말로 조롱거리가 될 수τωθαζόμενος 있음을 함께 우려하면서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주장을 온전히 다 펼쳐내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그 자신 호의εὔνοια와 격려παρακελεύεσθαι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논의에 잘 부응하겠다고ἐμμελέστερον 다짐한다.(473e-474a)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큰 동맹군을 제공해준다고 하니 그렇게 해보겠다고 언급한 후 철학자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경우 무엇보다도 먼저 그 철학자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를 규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게 분명해지면 왜 철학자들이 나라를 인도하는 것이 자연적 성향에 적합한 일인지가 드러나 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474b-c)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을 최대한 담보해낼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통치론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통치자로서 왜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7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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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폈듯이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이 재촉해왔던 주제는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글라우콘은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여러 가지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공동체적 처자공유 일반이 가져온 이로움으로 일반화한 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을 구현하고 있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내용상 처자 공유의 가능성이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글라우콘의 이러한 태도 전환이 크게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닐지라도 세 번째 파도를 헤쳐 가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주제가 처음과 다르게 보다 일반화된 주제로 슬그머니 전환 내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이에 따라 세 번째 파도의 주제는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 즉 플라톤이 지금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 국가가 과연 현실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로 재정립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에 대한 답을 내놓기 전에 그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기본 전제들을 먼저 언급한다. 즉 1) 말로 세운 이상 국가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다. 2) 행위는 말한 것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 없다. 3) 그러므로 이상 국가가 행위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증명할 수 없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기본 전제를 언급한 후에 그것을 토대로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의 성격 전환을 시도한다. 본 그대로 현실화는 불가능하지만, 본에 최대한 다가갈 수는 있다. 즉 본을 최대한 닮은 것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 이로써 이상국가의 가능성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상 국가와 최대한 닮은 나라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그것의 구현은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만족하기에 충분한 성과이자 실제 목적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그 목적을 현실에서 달성하는 방법의 최선으로 철학 통치론 내지 철학자 왕이 제시된다.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는 지금까지 말로 세운 그 정치체제가 ‘가능한 한도까지’εἰς τὸ δυνατὸν 자라나 햇빛을 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최대한 미룰 대로 미루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논의는 이렇게 논의의 최종 단계에서 최대한 닮은 나라의 구현 가능성으로 규정되고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조건으로서 철학자 왕의 극적인 등장으로 마무리된다. 이로써 제5권을 통해 철학과 철학자의 문제를 다루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 그러나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내용으로서 이곳과 다소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여러 곳 발견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상 국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그와 관련하여 <국가>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오늘날 권좌에 앉아 있거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 또는 그 자식들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애욕(eros)에 사로잡히는 것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가 일어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가 가능하다.(제6권 499c-e)

– 누군가가 왕들과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자손들이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사람만 생겨나고 나라가 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것들을 완전히 실행하기에 충분하다.(제7권 520e-521a)

– 진정한 철학자들이 여럿이든 한 명이든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 … 자신들의 나라를 바로잡을 경우, 나라와 정치체제와 관련한 우리의 기원이 전적으로 기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제7권 540d)

* 위에서 인용한 경우들은 언뜻 보기에 하나같이 철학자 왕이 나타날 경우, 우리가 이야기해온 나라와 정치체제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곳에 인용된 경우들은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내용 즉 본 그대로는 불가능하고 다만 최대한 그것과 닮은 나라만 가능하다는 언급과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위에서 새로 인용한 경우들을 자세히 잘 들여다보면 그 답이 나온다. 우선 그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말의 내용과 정황에 있어 지금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한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하나같이 권력과 철학의 결합을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논의 내용과 정황이 다르다면 몰라도 모두 같다면 인용된 경우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권력과 철학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의 의미 또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 제5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과 권력이 결합할 때 가능한 나라와 정치체제’는 본(本)으로서 정치체제가 아니라 분명코 ‘가능한 한도까지eis ton dynaton’ 본에 다가가 최대한 그 본과 닮은 나라와 정치체제이다. 요컨대 인용된 위의 경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라와 정치체제도 내용상 그와 다를 게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국가> 전체에서 상호 모순 없이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

*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이상 국가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말로 세운 이상 국가의 의미가 결코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3)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최대한 본에 가깝게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만족해야 한다. 5) 따라서 중요한 것은 최대한 본에 가까운 나라와 정치체제를 구현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일이다. 6) 그런데 그 방법을 찾는 최선의 길은 가능만 하다면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것’ 즉 가장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다. 7) 철학자가 왕이 되면 그러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위와 같은 논의 과정을 거쳐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확보하는 문제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 이상적 정치체제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상의 논의들을 플라톤의 우주론적 틀을 빌려와 분석하면 논의 구도가 좀 더 명확하게 해명된다. 무엇보다 먼저 여기에서 플라톤 우주론과 연관된 몇 가지 개념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플라톤은 말로 세운 이상 국가를 본(paradeigm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본(本)을 바라보고 현실로 구현해내려는 제작자 내지 실행자가 나온다. 그리고 그 제작자 내지 실행자에 의해 최대한 본에 가깝게 만들어진 실물 내지 모상이 나온다. 그런데 본과 제작자와 모상 등 3가지는 플라톤 우주론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것들에 적용해보면 ‘정의 자체’, ‘완전하게 정의로운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본’에 해당하고 ‘통치자’, ‘화가’는 ‘제작자’ 그리고 ‘정의 자체에 가장 닮은 사람’, ‘그림 속에 잘 그려진 아름다운 사람’은 각각 ‘모상’에 해당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제작자의 행위(praxis)는 본래 말한 것(lexis) 그대로 진리에 다다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작자는 본을 바라볼 수는 있되 행위로써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모상으로 구현할 수 없고 다만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을 구현해낼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제작자의 실제 목표는 본이 아니라 본과 최대한 가까운 모상이다. 실제로 여기서 화가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최대한 그림으로 잘 표현해내는 과정은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가 우주를 만드는 과정과 그대로 일치하고 본 또한 두 곳 모두 ‘paradeigma’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플라톤 연구자라면 모두가 동의하고 있듯이 <티마이오스>에서 그 paradeigma, 즉 본은 우주의 원상으로서 플라톤 존재론의 최상위 실재, 즉 이데아적인 일자성을 갖는 그 자체로 진상인 ‘자체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을 바라보면서 물질적 질료에 영혼을 결합하여 최대한 본과 닮은 것으로 우주를 만들어 낸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는 항성과 행성 등 여럿으로 이루어진 운동하는 다(多)의 세계이되 그 여럿은 각각 본의 일자적 ‘자체성’(kath’ auto on)을 닮은 ‘자기 동일성’(tauton)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다의 세계로서 우주 영혼으로 자기 운동하되 자기 동일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영원히 실재한다. 즉 우주는 절대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체이다.

* 그러나 그에 비하면 인간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신들에 의해 만들어져 우주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가사적(可死的) 존재로서 해체와 소멸을 면치 못한다. 요컨대 우주는 그 자체로 본의 모습 그대로 관철된 영원한 실재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본에 대한 앎은 가질 수 있어도 우주 영혼처럼 그것을 지속적이고도 항구적으로 보존하지 못한 채 신체가 갖는 무규정성으로 인해 평생 무지와 탐욕에 시달리는 가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행히 우주 영혼을 닮은 영혼의 이성 부분이 있어 그 자신 영혼의 자기 고양을 통해 비록 본 그대로는 아닐지라도 최대한 우주와 닮도록 자신을 도야할 수 있고 그것을 기초로 우주적 조화 원리에 따라 정의로운 나라도 만들 수 있다. 앞서 살폈듯이 이상 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이곳 논의에서도 말로 세운 이상적 정치체제는 본이 되고 현실 통치자는 그것을 본으로 삼아 최대한 그것을 닮은 나라를 만드는 제작자가 되며 최대한 본과 닮은 나라는 본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조건에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 국가가 된다.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지금 문제 삼는 주제인 이상국가가 현실국가로 가능한지 아닌지, 본이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는 애초부터 물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따질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에게서 본은 모상에 관여될 뿐 본 그대로 실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기서도 플라톤은 이상 국가의 가능성 문제를 아예 본을 최대한 닮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문제로 제한한 뒤 그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그 최선의 방도로서 결국 철학과 권력의 결합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 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 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그래서 <국가>는 이상 국가론이라고도 불린다. <국가>의 이상은 처음부터 현실화가 될 수 없음을 플라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법률>에 가서 그 현실화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플라톤은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고 그에 따라 현실에서 그 본을 말로 세운 후 최대한 그것을 닮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길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를 만드는 최선의 방도로서 플라톤이 도달한 것이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고 철학자 왕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이상적 논의를 기초로 그 연장선 위에서 본으로서 <국가>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기초해 구체적인 법률들이 발전적인 보완책으로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극이다.

* 이제 처자 공유와 관련한 모든 논의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고 고양되면서 마침내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본으로 삼아 최선의 현실적인 나라를 구현해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능력 내지 능력자를 찾는 일로 수렴되고 최종적으로 그 정점에서 드디어 철학과 철학자가 그 방법의 가히 유일하고도 핵심적인 요체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조건으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 즉 철학자 왕의 등장을 제시하자 대화 참여자들 모두는 큰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지금 아테네 현실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가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라고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물론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모를 리 없다. 사실 바로 이러한 반응이 나올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최대한 그 충격을 다소간 완화하기 위해서 세 가지 파도 등 다각적인 수준의 예비적 논의를 문학적 복선까지 끌어들여 주도면밀하게 전개한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애초에 예상하고 준비한 논의 구도대로 대화 참여자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막아서기보다는 그의 동맹군이 되어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호의와 격려로써 할 수 있는 수단을 다해 앞으로 전개될 논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노라 다짐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상적인 정치체제에 최대한 가깝게 갈 수 있는 관건으로 이른바 철학자 왕의 배출을 내세운 후 본격적으로 철학자가 어떤 사람이며 왜 그런 사람이 왕의 역할에 부합하는 자연적 적합성을 갖는지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 왕을 배출하려면 어떤 조건과 어떤 교육적 환경에 주어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국가>가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 영역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 결국,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철학자 왕의 등장을 통해 가능하고 철학자 왕의 등장은 철학자 교육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가능성의 영역인 한에서 각각의 단계는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성공적인 철학자 양성 교육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현실화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전제이자 조건이 된다. 그래서 플라톤 <국가> 논의의 정점으로 불리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 논의의 초점은 종국적으로 철학자의 교육 과정에 모여져 있다. 그런데 교육은 본질적으로 능력의 영역이고 능력의 영역은 그야말로 양상론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이다. 본에 대한 온전한 앎을 토대로 영원한 우주 실재를 제작한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현실 통치자는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받았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다. 그가 도모하는 일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며, 잘 되었다가도 흐트러질 수 있고 흐트러져 있다가도 다시 잘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지 본 또는 선의 이데아를 알아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그 본에 가까운 것을 행위를 통해 실제로 구현해내려는 의지와 능력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일례로 불가에서 어느 누가 성불을 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관 앞에서 어느 순간 판단을 그르쳐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가 성불했다고 함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푯대 삼아 다시 자신을 곧추세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굳건히 그것에로 다가갈 수 있는 하나같은 의지와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가능적 능력 또한 바로 그처럼 끊임없는 분투와 지적 긴장을 통해 최선에 다가가는 영혼의 자기 고양 능력이다. 요컨대 현실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의 구현 가능성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본성 그대로 앎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그에 부응하는 철학 통치자의 한결같은 실천을 통해 담보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이란 그 자체로 진정한 앎을 향한 분투 어린 수련과 실천 그 자체인 것이다.

*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현실에서 최대한 그에 가깝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철학자 왕 을 통해서 담보될 수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지성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담보하는 근본 바탕으로 일정한 수준에서 객관적인 표준과 안정성을 담보하는 법률이나 제도가 아닌 어떤 특정 사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은 법치와 인치의 특징을 비교해서 살필 때 그랬듯이 적지 않은 한계와 논쟁점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20세기 나치즘이나 파시즘 그리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가 초래한 비극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정치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어떤 사람’에 대한 기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단과 무지를 교묘하게 지혜로 포장하여 대놓고 참혹한 폭정을 일삼는 자’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어 가히 무망하기 그지없는 몽상에 불과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누구에게 최고 권력을 맡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고 권력을 기능적으로 분산하고 상호 잘 감시할 것인가가 핵심 관심 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통치자와 관련해서도 누가 훌륭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보다 누가 위험한 정치가인가를 찾아 통치에서 배제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게다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현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헤아려 가며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해도 문제해결이 쉽지 않을 판에 ‘수와 규모에 있어 가능한 한 제일 작은’ 한 가지 방식을 택해 일거에 해결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권력과 지성의 결합을 통한 정치의 지성화를 주장하는 플라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그 취지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나 법률에 한정하여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굳이 사람에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 어차피 그는 의심스럽기 때문에 – 그 권력자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정치의식 관련 덕목으로 요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앞서 살핀 대로 플라톤에게서 본과 모상, 이상과 현실은 서로가 각기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공존하는 것인 만큼 플라톤 정치철학 전체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면 본으로서 <국가>의 이상 국가론만이 아니라 최대한 그에 닮은 모상으로서 <법률>의 현실 국가론을 동시에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비판은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일정 부분 <법률>에서 고려되고 해소되고 있다.  – 끝 –

 

* 다음 주제 : B.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6)

 

  1.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

 

* 우선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 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의 논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적 목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점은 플라톤 스스로 주도면밀하게 구성한 이곳 전후의 논의 구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두 번째 파도를 논의하기 전에 플라톤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어떤 문학적 구성으로 어떻게 세 가지 파도와 관련한 전체 논의 국면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미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언급 중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해 청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제5권에 들어서며 새로운 주제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은 그 양성평등과 처자 공유의 문제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크게 곤혹스러워하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방식으로 그 문제 해명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크게 부각한다. 특히 처자공유의 가능성과 관련한 문제는 대화 참가자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자신 논의 자체를 회피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당혹스럽고 난감한 주제로 제기된다.

2)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난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자유로운 생각의 날개를 펼친 상태에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것은 가능성은 젖혀두고서라도 일단 이론적으로는 처자 공유의 문제가 공동체로서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처자 공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라는 핵심가치의 구현 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3) 이에 따라 이 가능성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세 번째 파도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라는 주제 자체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4) 아니나 다를까 글라우콘은 제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재촉하고 소크라테스는 마지못해 세 번째 파도인 가능성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곳 논의 국면에서 플라톤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를 최대의 관심사로 극대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는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가능하면 정의로운 나라의 핵심가치가 구현 가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가능성 문제를 슬그머니 정의로운 국가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로 바꾸어 말하는 것도 그 두 가지 가능성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5) 그러면 그 가능성은 어떻게 주어질까? 다음 강해에서 다루어지겠지만 그 가능성은 단적으로 ‘철학자 왕’을 통해 주어진다. 이렇게 보면 결국 세 파도와 관련한 이곳 논의 국면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관한 관심을 최고도로 끌어올린 다음 그 절정에서 그 불가능에 가까운 난관을 해소하는 종국의 열쇠로서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를 <국가> 논의의 최고 정점으로 끌어 올리려는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6) 이로써 플라톤이 왜 <국가> 전체 논의 구도에서 제5권을 새로운 논의 전환점으로 삼으면서 왜 세 파도를 끌어들였고 또 그 논의 전환점을 통해 무엇을 핵심 주제로 삼으려 했는지가 비로소 밝혀진다. 요컨대 세 가지 파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제5권에서 플라톤이 이제 집중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곧 철학과 철학자 왕의 문제이고 그에 따라 제5권-제7권은 정의로운 나라를 구현하는 유일한 토대로서 그 철학자 왕을 출현시킬 수 있는 철학과 그 교육 과정으로 채워진다. 이렇게 보면 정의로운 나라(제2권-제4권)의 구현 가능성의 문제는 그 철학자 왕의 가능성의 문제(497a-502c)가 되고 종국적으로는 철학자 왕을 담보하는 이상적인 교육의 문제(502c-541b)로 귀착한다.

* 그러나 이러한 교육 과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할까? 교육은 능력의 문제를 본질로 하고 있고 능력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 최소한 가능성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없다. 세 번째 파도를 다루는 부분에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가 다만 본(本: paradeigma)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리고 그럼에도 그것이 실천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그것에 있다. 플라톤의 철학 역시 지혜를 향한 사랑으로서 ‘사랑’ 즉 본질적으로 정신의 자기 고양을 통해 끊임없이 선의 이데아, 즉 지고의 진리에 다가가는 ‘분투’의 철학인 것이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논의는 해당 부분 강해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 이상이 세 파도와 관련한 논의 국면 전체가 갖는 기본 구도와 성격이다. 그러면 이제 서두에서 밝힌 취지에 맞게 그러한 논의 국면의 전체적인 이해를 배경에 두고 오늘 강해의 주제인 처자 공유의 목적에 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461e-466d]

* 플라톤은 우선 나라의 최대선이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고 그러한 나라의 결속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공유에 있음을 밝히고 그러한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를 통해 가능한 것임을 아래와 같이 밝힌다.

 

* 나라 수립을 위해서 가장 큰 좋은 것, 이것이 입법자가 법을 세울 때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συνδῇ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διασπᾷ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2a)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ἡδονῆ과 괴로움λύπη의 공유κοινωνία이다. (462b) 최대다수πλεῖστοι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ἐπὶ τὸ αὐτὸ κατὰ ταὐτ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경영되는 나라이다.(462c)

*‘우리 중 누군가가 손가락을 찌었을 경우, 몸 전체를 거쳐 영혼까지 뻗어 있으면서 안에 있는 다스리는 것에 의해 단일한 조직σύνταξις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πᾶσα ἡ κοινωνία가 손가락 찧은 것을 감지하고, 부분의 고통에 대해 전체가 모두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가 경영되는 방식이다.(462c-d) 다시 말해 ‘시민들 중 한 명’ἡ τοιαύτη πόλις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사람이 겪은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주장하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 나라에서는 통치자들과 민중δῆμος이 서로 시민πολίτης들이라고 부른다.(462e-463a)

* 그러나 다른 많은 나라의 민중들은 통치자를 군주δεσπότης라고 부르고 민주정체를 갖춘 나라에서는 그냥 그대로 통치자ἄρχων라고 부른다.(463a) 이에 비교해 우리의 나라에서 민중들은 통치자들을 시민들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구원자σωτήρ들이자 조력자들ἐπίκουροι이라고 부르고 통치자들은 민중을 보수를 주는 자μισθοδότης들이자 부양자τροφεύς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은 민중을 노예δοῦλος라고 부른다.(463b) 다른 나라에서는 통치자들 서로를 동료 통치자συνάρχων라 부르지만 우리의 나라에서는 동료 수호자συμφύλαξ라고 부른다.(463b)

* 다른 나라 통치자들의 경우 어떤 이들은 친족οἰκεῖος이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남ἀλλότριος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나라 수호자들은 누구를 만나든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또는 이들의 자손이나 조상을 만난 것으로 여긴다.(463c) 이 나라 통치자들은 이름만 친족이 아니라 이름에 따르는 모든 행동도 친척을 대하듯이 하도록 법을 정하여 어렸을 때부터 서로에 대해 공경하고 봉양하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함 등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하게 한다.(463d)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의 일이 잘되거나 잘못되었을 때 ‘내 일이 잘되었다’거나 ‘내 일이 잘못되었다’고 모두 한목소리를 낸다.(463e)

* 이러한 신념δόγμα을 갖고 이런 식의 표현을 사용하다 보면 우리의 시민들은 동일한 것을 최대로 공유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괴로움과 즐거움을 최대로 공유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주된 이유는 이 나라에 마련된 다른 제도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더해 수호자들이 여자와 아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a) 즉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64b)

 

[464b – 466d]

* 그런 연후 이제 소크라테스는 처자 공유를 기반으로 가능해진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 진정한 나라의 수호자들은 집도 토지도 다른 어떤 소유물도 사적으로 갖지 말아야 하며, 다만 수호의 보수로 다른 이들에게서 양식을 받아 그들 모두가 공동으로 소비해야 한다.(464b) 참된 수호자란 이 사람은 이것을, 저 사람은 저것을 ‘내 것’이라고 부르면서 남들과 상관없이 혼자 여자와 아이도 따로 가지고 사사로운 일들에 대해 사사로운 즐거움과 아픔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것’에 대한 하나의 신념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 할 수 있는 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사람이다.(464c) 요컨대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따라 그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소송이나 고소도 없으며 돈이나 자식과 친척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464d-e)

* 그들 사이에서 폭력이나 폭행으로 고소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며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 또는 부모와 자식 간에 폭력을 쓰거나 모욕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두려움 δέος과 염치αἰδώς가 그런 일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법으로 인해 모든 영역에서 이 사람들은 반목함이 없이 서로서로 평화εἰρήνη롭게 지내게 될 것이다.(464e-465b)

* 그리고 이들이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라의 다른 계층 사람들이 이들과 반목하거나 혹은 자기들 서로 간에 반목을 하게 될 위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와 같은 아주 사소한 나쁜 것들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등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ἀγεννής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465c) 이들은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가 사는 복된μακάριος 삶보다 더 복되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경기 우승자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수호자들이 가진 것 중에 작은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수호자들이 거둔 승리는 더욱 훌륭한 것이며, 그들은 나라를 구한 명예를 누리고 공공기금으로 자신은 물론 자식까지 삶의 필요한 모든 것이 제공되어 죽어서도 걸맞은 장례가 치러진다.(465d-e)

*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나라 안의 한 집단에 주목해서 그 집단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할 수 있는 한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466a) 그리고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οἱ Ὀλυμπιονῖκαι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더 나은 것으로 드러났다면, 그것은 구두장이들의 삶이나 다른 어떤 장인들의 삶, 농부들의 삶 등과는 비교가 안 된다.(466b) 수호자들이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몰지각하고 유치한 믿음에 사로잡혀 우리가 이야기한 삶을 고수하지 못하고 나라 안의 모든 것을 권력을 행사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쪽으로 이끌린다면, 그는 ‘반이 전체보다 많다’πλέον ἥμισυ παντός고 이야기한 헤시오도스가 진실로 지혜로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466b-c)

*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교육받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는 일을 공유해야 한다. 여자들이 남자들과 공유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전시이건 아니건 그러한 공유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이자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다른 동물의 경우처럼 인간에게도 그러한 공유가 생기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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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3b 조력자들 : 이곳에서 조력자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epikouroi는 수호자 계층에서 통치자 계층과 전사 계층을 구분하면서 전사들을 통치자의 ‘보조자들’ 또는 ‘조력자들’로 부를 때(414b, 416a, 420a 등등) 사용한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는 민중들이 통치자들을 부를 때 쓰는 말로 나온다. 즉 수호자들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사람이고 통치자들은 민중들을 보조하는 사람이다.

* 464b ‘우리의 나라에서 가장 큰 좋은 것의 원인은 조력자들이 아이와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466a ‘우리의 조력자들의 삶이 올림피아 경기 우승자들의 삶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왜 ‘수호자들’이란 말을 쓰지 않고 ‘조력자들’이라는 말을 썼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J. Adam 해당 부분 note 참고)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수호자 계층 가운데 통치자들이 아닌 전사 계급 즉 ‘보조자’ 내지 ‘조력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자 공유와 관련한 대부분 문맥에서는 일관되게 수호자들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바로 앞서 통치자들을 조력자들로 불렀던 것에 기초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 465c ‘가난한 자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일, 아이 양육과 하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벌이에서 생기는 곤란함과 고생, 즉 여기서 좀 빌리고 저기서 좀 떼먹는 등’ : 아테네 당대 현실의 경제적 실상을 보여주지만, 가난이 초래하는 일상의 양태로서 오늘의 현실과도 크게 다를 게 없다.

* 465c 온갖 방법으로 돈을 끌어모아 아내나 하인들에게 맡겨 가계를 꾸리도록 하는 일 누가 봐도 뻔하고 비루한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 수호자 집단 내에 하인이나 노예도 없음을 보여준다.

* 466a ‘시민들의 것 모두를 가질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수호자가 과연 행복한가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 제4권을 시작하면서 아데이만토스가 제기한 비판이다.(419a)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들의 관점에 서 있다.(<정치학> 1264b15-24 참고)

* 466b ‘반이 전체보다 많다’ :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40 참고. 권력자들이 모두 나라의 반을 갖겠다고 한다면 그 모두를 합칠 경우, 전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이 나라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냉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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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이곳의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곳에서 제시된 이상적 공동체의 핵심 요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 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위와 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지만 앞선 강해에서도 여러 번 소개되었듯이 다양한 형태의 정치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기존의 논쟁들을 염두에 두면서 다시 한번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석을 더 하자면 아래와 같다.

 

* 1)의 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흔히들 내거는 총화단결이라는 슬로건을 떠올리거나 일체의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나라 전체를 위해 하나의 대오를 강조하는 군국주의적인 획일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연상은 플라톤의 나라와 거리가 멀다.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들은 각기 자연적 본성에 따라 서로 다른 각기 고유의 역할을 갖고 그들 간의 분업적 의존을 통해 각기의 본성적 욕망을 최대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획일적이 아니다. 여기서 하나의 나라라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역할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음악에서도 조화는 획일적인 같은 음들이 그저 하나같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음들이 각각의 고유한 음가를 가진 상태에서 마치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 하나 됨이란 같은 것들끼리의 획일적인 통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다움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들 상호 간의 조화를 통해서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의 목적은 통치를 수행하는 권력자의 이익이 아니라 통치 대상인 시민의 이익과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을 좋아하는 것이 통치자의 본성인 한에서 통치자 또한 충실한 통치의 수행을 통해 그 스스로 행복을 얻는다.

* ‘누군가가 손가락을 찧었을 때 단일한 조직을 이루는 전체 공동체가 아픔을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462c-d)라는 말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유기체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평가를 낳기도 했다. 20세기 전체주의자들이 내건 국가유기체설에 따르면 개인과 나라의 관계는 유기체에서 유기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위들과 몸 전체의 관계와 동일하다. 유기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그 역할과 기능 또한 자신들 개개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체로서 몸의 생존을 위해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은 국가를 떠나 결코 독립적일 수 없으며 역할과 기능 또한 개인 자신이 아니라 전체로서 국가의 보전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단일 생명체가 생명을 잃으면 그것을 구성하는 부위도 존재할 수 없듯이 국가가 없으면 개인도 없다. 그리고 생체 부위들 일부가 손상되거나 기능을 상실해도 생명체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듯이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개인들은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고 희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나라는 과연 이와 같은 국가유기체설에 토대를 둔 전체주의 국가일까? 일단 유기체라는 말만 고려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유기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개인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영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고 나라를 구성하는 계층들 또한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플라톤의 나라에서 그 유기체를 구성하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의 각 계층이다. 개인 차원에서도 유기체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은 신체적 부위들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각기 다른 영혼들이다. 그리고 개인들은 분업적인 상호 의존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희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 욕망을 최선으로 발휘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개인 고유의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고 의지한다.

*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국가>의 논의 자체가 어떤 개인이 더 행복한가를 주제로 출발하였으며 나라에 대한 논의는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서 분명하게 살피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국가>에서 개인 내부 영혼들 간의 조화에 기초한 개인 자신의 행복이 논제로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플라톤의 나라에서 ‘개인은 단지 나라의 이익을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다’ 또는 ‘개인들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은 사회적으로 상호 의존적 존재이므로 개인의 행복 또한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담보된다는 앎 즉 절제의 덕을 토대로 기꺼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절제라는 그러한 공동의 덕목 아래 자신의 본성에 충실할수록 가장 행복한 개인이 되고 또 동시에 가장 충실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앞선 강해에서도 살폈듯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

* 2)의 내용에서 ‘시민들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 이 말에서 특히 ‘시민들 중 한 명’이란 표현은 플라톤의 나라가 그 자체로 얼마나 국가주의와 거리가 먼지를 잘 보여준다. 정의로운 공동체란 특정 계층이 다른 계층의 희생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나라가 아니라 최대다수가 동일한 것에 대해서 동일한 방식으로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면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체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나라이다. 그러한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나라가 나라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발상은 어디에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 3)의 내용 또한 플라톤의 나라를 권력에 따른 철저한 위계 사회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통치자와 민중은 군주와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방식으로 함께 정의로운 나라를 일구어가는 서로가 똑같은 시민의 관계이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부를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단지 민중의 안녕을 보전하고 그들을 보조하는 대가로 민중이 기꺼이 제공하는 보수를 받는 자들이다. 보수라는 말이 사용자가 피고용인에게 주는 대가라는 점에서 굳이 말하자면 플라톤의 나라에서는 민중들이 사용자이고 통치자들은 피고용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를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근대사회 이후에 성립된 사회계약론은 이기적 개인들의 배타적 이해관계 속에서 상호 의심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한 규정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관계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각기 고유한 역할을 토대로 상호 호혜의 관점에서 자발적이고도 협동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관계이고 무엇보다 이기적 개인이 아닌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의심이 아닌 덕과 믿음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관계이다.

4)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가져다주는 이로움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이로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1)에서 최선으로 언급된 ‘나라의 내분을 막고 하나 됨’이라는 입법의 목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이 나라에서 가장 나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나라의 분열 특히 그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이다. 나라의 최악을 초래하는 통치자들의 내분은 역사적인 사실들에 기초해보더라도 기본적으로 권력과 재력 등 특권의 부당한 독점이 주된 원인이고 그 특권의 중심에는 가문과 가족 등 혈연과 가족주의로 뭉쳐진 기득권 집단들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직접 겪은 아테네 히피아스 참주정과 시켈리아의 디오니소스 참주정 모두 직계 가족 간 세습으로 이루어진 폭압적 참주정이었다. 오늘날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가까이 우리와 관련해서도 북한 역시 3대에 걸친 부자 세습으로 이루어진 독재국가이다. 오늘날 막강한 힘을 갖고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른바 재벌들 또한 대부분 부자간 세습을 통해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대규모 종교집단에서도 세습에 의해 권력이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누리는 부유함 또한 대부분 가족 간 상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상속 과정에서 그들 서로도 분열되지만, 그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빈부의 사회적 양극화를 초래하면서 그 자체로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된다. 요컨대 나라나 사회 또는 개인들이 서로 갈라져 분열하고 싸우는 원인 한 가운데는 가족이기주의와 물질적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자들일수록 그러한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피폐상은 당사자 개인들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불행을 낳는다. 우리나라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도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의 사리사욕과 폭행, 권력의 남용과 책임회피가 나라가 분열되든 말든 아무런 두려움이나 염치없이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뻔뻔하게 자행되고 있다.

* 한편 가족이기주의가 초래하는 폐해가 심대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가족주의가 갖는 혈연적 친밀감과 연대감은 그 집단의 긍정적인 결속에 큰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가족이기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배제하기 위해서 수호자들에게 일상 형태의 가족 구성은 철저히 금하지만 그 대신 4)에서처럼 수호자 집단의 짝짓기를 통해 출산된 공통의 자식들과 친족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친밀한 가족 내지 친족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통해 수호자 집단 고유의 가족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1262a-b)에서 플라톤이 가족 확장을 통해 얻고자 하는 구성원들 간의 친애(philia) 사랑은 마치 많은 물을 섞으면 농도가 묽어지는 것처럼 오히려 줄어들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굳이 처자의 공유는 농부 계급에서 더 유용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정한 신념과 소명으로 무장된 수호자 집단의 경우 오히려 일상의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가족적 연대감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분명 플라톤이 주장하는 수호자 집단 내 가족의 확장은 그러한 생각에 기초해 있다.

* 5)의 내용은 많은 사람에 의해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만약 가장 소박하고 단순하게 공산주의를 규정하여 ‘사적 소유를 제한하고 공공의 소유에 기반을 둔 정치 사회 경제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으로 정의한다면 분명 플라톤의 나라는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정의되어 왔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규정하는 문제 역시 그 자체로 애매함과 불분명함을 안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의 나라를 공산주의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특정 시대 특히 근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현실사회주의가 표방하고 있는 공산주의에 준거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나라와 현대 공산주의 국가 간의 공통점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흔히들 일컫는 사적 소유의 금지만 해도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경우 개인 수준에서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금지하고 있는 것은 생산 수단이 아니라 재산의 사적 소유의 금지이고 그것도 특정 수호자 집단에만 한정된 것이다. 수호자 집단을 제외한 일반 시민들의 경우는 생산 수단을 비롯하여 재산과 가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부도 축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의 나라는 현대적 의미의 공산주의와 거리가 멀고 굳이 연관시킨다고 해도 정치체제 전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소수 권력자 집단에 국한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나라들 대부분은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정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거나 권력자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플라톤의 나라는 권력자들에게 사적 탐욕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현대의 여느 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플라톤의 구상은 그 금지의 수준이 권력자 집단 내 가족제도의 폐지까지 포함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그러나 가히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권력자들의 사리사욕을 금하고 있는 플라톤의 나라는 구현 가능성 이전에 그 철두철미함 그 자체로 정치권력이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지향해야 할 궁극적이고도 이상적인 도덕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좀 더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플라톤이 제시하고 있는 위와 같은 공동체의 핵심가치와 목표를 아래와 같이 풀어 쓸 경우, 정치체제와 크게 상관없이 최소한 명분에서 그 나라 정치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행동 강령으로 가히 손색이 없다.

1) 나는 나 자신과 가족과 관련한 사사로운 이익을 좇지 않는다.

2) 나는 정해진 보수 이외에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않는다.

3) 나는 시민 한 사람의 고통과 기쁨을 나 자신의 고통과 기쁨으로 여긴다.

4) 나는 시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같은 시민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5) 나는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시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힘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는 수호자들끼리 소송하거나 고소하는 일, 폭력이나 폭행을 저지르는 일도 없고 돈이나 혈연으로 인한 내분 또한 없다. 그리고 그에 따라 수호자들과 다른 계층들 사이에도 반목이 없고 다른 계층들 내부 사람들끼리도 반목할 위험이 없다.

*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집단이 처자 공유를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초로 삼았을 때 갖게 될 이로움을 이렇게 언급한 후 수호자들의 통치 목표가 이미 제4권에서 말한 것처럼(419a) 나라 안 한 집단의 행복이 아니라 나라 사람들 모두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라가 갖는 이러한 이로움은 모두 모두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교육받고 함께 아이들을 양육하며 함께 다른 시민들을 수호하고 함께 서로를 공유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통치의 본성이 시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통치자의 본성에 부합하는 한, 통치자 자신 또한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을 누린다고 이곳 논의를 마무리 한다.

* 이곳 서두에서 밝힌 대로 이곳의 논의는 논의 구도상 앞서 제시한 수호자 집단의 처자 공유가 공동체적 공유 일반의 기반임을 밝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 공동체적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다시 말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 부분의 논의는 <국가> 논의 구도 전체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처음 대화 참여자들이 요구한 대로 이런 이상적인 나라를 담보하는 처자의 공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즉 처자 공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 예상되는 논의 국면에서 뜬금없이 정의로운 나라의 수호자들이 맞이하게 될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길게(466e-471c) 늘어놓는다. 앞서 미리 밝힌 대로 이러한 주제의 일탈은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를 여전히 곤혹스러워하는 소크라테스의 심리 상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기를 고대하는 대화 참여자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당혹감과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려는 일종의 문학적 복선이다. 세 가지 파도가 논의의 주제임을 고려하면 이 부분의 논의는 일종의 여담에 해당한다. 그럼 다음 강해에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끝-

* 다음 강해 : 2. 두 번째 파도(III) : 전쟁에 관한 일(466d-471c)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55)

 

III.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제5권-제7권)

  1. 난관과 고려 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두 번째 파도(1) : 처자의 공유(457b-461d)

 

[457b-461d]

* 양성의 평등한 역할과 관련한 첫 번째 파도를 넘어선 후에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헤쳐 나가야 할 파도로서 이른바 처자의 공유 즉 수호자 집단에서 배우자 공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수호자φύλαξ들과 여성수호자φυλακίς들이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하고δυνατά 이롭다ὠφέλιμα는 점에서 우리의 주장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 후 바로 처자의 공유 문제를 꺼내든다.(457b-c) 처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여자들 모두가 이 남자들 모두에게 공유되어서κοινός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사적으로ἰδίᾳ 함께 살지 않으며 아이들도 공유되어서 어떤 부모도 자식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어떤 아이도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457d)

* 이에 글라우콘은 그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의심을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이로움과 관련해서는 그것이 가장 크게 좋은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 것임은 논쟁ἀμφισβήτησις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57d)

* 그럼에도 글라우콘은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 많은 논쟁이 불가피하니 가능성과 이로움 모두에 대해 논의해주길 요구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로움에 관한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유익함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7e) 다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허락만 한다면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지금은 그것들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그것들의 구체적인 방책이 무엇이고 그것의 실제 운용이 나라와 수호자들에게 어떤 근거에서 가장 이득이 되는지를συμφορώτατ᾽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458a-b)

* 글라우콘이 그것을 허용하자 소크라테스는 우선 배우자 공유의 문제가 통치자에 의해 어떻게 법제화되고 실제로 운용되는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남자들을 선발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한 그들과 본성이 같은ὁμοφυής 여자들을 선발하여 주거와 식사를 공동으로 하고 누구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체단련이나 그 밖의 양육을 받으면서 함께 지내게 한다.(458c) 그렇게 어울리다 보면 이들은 타고난 필연성 즉 성적인 필연성ἐρωτικός ἀνάγκη에 의해 서로의 교합μίξις으로 이끌리게 된다.(458d)

2) 그런데 행복한 이들의 나라에서는ἐν εὐδαιμόνων πόλει 이 서로의 교합이 무질서하면 경건한ὅσιος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짝짓기γάμος는 최대한 신성한ἱερός 짝짓기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이로운 짝짓기가 신성한 짝짓기이다.(458e)

3) 가장 이로운 짝짓기는 동물들의 경우에서 제일 나은 새끼를 얻으려고 할 때 그리 하듯이 인간 종τὸ τῶν ἀνθρώπων γένος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한창때ἐξ ἀκμαζόντων 혈통 좋은 자들끼리 짝짓기를 해야 최고의ἄκρον 통치자들을 얻는다.(459a-b)

4)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의사가 환자를 위해 약 처방을 할 때 그러하듯이 통치자들이 과감하게 처방을 해야 하는데 그 처방은 곧 거짓ψεῦδος과 속임수ἀπάτη이다. 즉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의 이로움을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많이 써야 한다. 짝짓기와 아이 낳기παιδοποιία의 영역에서 그것은 ‘옳음’τὸ ὀρθὸν이고 그 크기 또한 특히 작지 않다.(459c) 왜냐하면 가장 뛰어난 남자와 여자들끼리 최대한 자주 관계를 갖게 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막아서 우수한 자손들을 낳아 무리ποίμνιον가 가능한 한 최고의 상태가 되고 수호자 집단ἀγέλη τῶν φυλάκων 또한 가능한 한 가장 내분이 없는ἀστασίαστος 상태가 되게 하려면 이 모든 일이 통치자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459d-e)

5) 그리고 이러한 속임수는 축제나 제의 몇을 법으로 정해서 거기에서 신랑νυμφίος과 신부νύμφη들이 만나도록 하되 짝이 맺어질 때마다 그 못난 사람들이 통치자가 아니라 운τύχη을 탓하도록 교묘한κομψός 제비뽑기κλῆρος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460a) 그리고 이때 그렇게 맺어지는 짝짓기에 어울리는 찬가들도 지어야 하고 짝짓기의 수가 얼마가 되게 할지도 정해져야 한다. 전쟁이나 질병이나 그런 모든 것들을 잘 고려해서 가능한 한 남자들의 수를 동일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전쟁이나 그 밖의 영역에서 뛰어난 이들에게는 특전γέρας과 상ἆθλον 특히 여자들과 잠자리συγκοίμησις를 같이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ἐξουσία를 아낌없이 주어 이런 자들로부터 씨를 받아σπείρωνται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을 두어야 한다.(460b)

7) 이때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그들이 받아서 양육소σηκός로 데려가 나라의 어떤 구역μέρος에 따로 떨어져 거주하는 보육인τροφός들 손에 맡기고 못난 자들의 자식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의 자식이라도 불구인ἀνάπηρος 경우에는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ἀπόρρητος 은밀한ἄδηλος 장소에 적절하게 감추어κατακρύψουσιν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엄마들이 젖이 불면 양육소로 데리고 가되 자기 자식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고 그 밖에 힘든 일은 유모나 보모에게 넘겨주도록 해서 엄마들을 돌보게 해야 한다.(460c-d)

8) 여자는 20살부터 시작해서 40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고, 남자는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한창때 25세를 지나고 나면 그때부터 55살까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460e)

9) 만약 이와 달리 이들보다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은 사람이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위한 출산에 끼어들어 몰래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그러한 제사θυσία와 기원εὐχή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무절제ἀκράτεια를 수반한 어둠σκότος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461a) 그리고 아직 아이 낳는 시기에 있는 남자라도 통치자의 주선을 거치지 않고 적령기의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동일한 법이 적용된다. 그가 나라에 신성하지 않고 공인되지 못한 서출νόθος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461b)

10) 그러나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아이 낳을 적령기를 벗어나면 자식이나 손자, 부모뻘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해도 되되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태아나 아기가 생긴다면 그런 아이에게 양육이 없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461c)

11) 이 경우 짝짓기가 이루어진 후 열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달에 태어난 자식들은 누구든 그들 모두의 아들이나 딸이고 그들은 아버지가 되고 마찬가지로 얘들의 자식들은 손자 손녀가 되고 그들은 다시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 그리고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자식을 생산하던 시기에 태어난 자식들은 모두 형제와 자매라고 불러야 한다. 이들끼리 교합은 금지되며 다만 남매지간의 경우는 제비뽑기가 그렇게 나오고 퓌티아 사제가 승인할 경우 동침이 허락된다.(46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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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서 ‘교합’μίξις 2)에서 ‘짝짓기’γάμος란 말은 각각 ‘성교’와 ‘결혼’으로도 옮길 수 있는 말이다. 이들의 짝짓기는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축제와 제의를 동반하는 신성한 결혼 의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 4)에서 거짓과 속임수가 ‘크기가 작지 않은 옳음’인 이유는 장차 수호자가 될 우수한 자손들을 출산할 수 있는 방책이자 무엇보다도 그들의 내분을 막을 수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의 ‘최대선’τὸ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다.(462a) 곧이어 밝혀지겠지만 처자 공유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이로움 또한 나라의 내분을 막고 결속을 이루는데 있다.

* 5)에서 ‘한 나라가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나라의 인구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곳은 수호자 집단과 관련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다소 어색하다. 수호자 집단은 전체 인구 비중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423c에서 나라 전체의 크기와 관련해서 이미 같은 말을 했음을 고려하면 아마도 생산자 계층의 인구수도 당연히 통제 대상임을 전제하고 한 말일 것이다. 우수한 수호자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언급도 앞의 언급과 다소 상충하지만, 이 말은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 6)에서 ‘아이를 기르고 양육하는 관리들ἀρχαὶ’ : 여성의 역할에서 가사 노동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계급사회에서 특권 여성이 노예들에게 고생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에 따라 육아 및 가사 노동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은 별도의 관리들 즉 분업에 따른 전문적인 직업군에게 위탁된다. 여성의 사회참여에 따라, 가사 노동이 분리되고 또 그에 따라서 가사 노동이 일정한 직업군으로 전문화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양태와 일정 부분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의 가사 노동은 공적 노동으로 그 대가가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비록 소수 집단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여성과 가사 노동의 분리가 제도적으로 관철된 최초의 사회이기도 하다.

* 7)에서 ‘못난 자들의 자식과 불구자’ : 불구로 태어난 아기들을 유기하는 것(apothesis)은 당대 아테네의 일상화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영아유기는 이유를 불문하고 용납해서는 안 될 반인권적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못난 아이들’의 경우 어떻게 했는지는 여기서 불분명하다. 다만 <국가>의 주장을 요약하고 있다는 <티마이오스> 19a의 내용에 따르면 ‘못난 자들의 자식들은 도시의 다른 영역으로 은밀하게 분산하여 키우되 아이들이 자라나는 동안 항상 그들을 지켜보면서 가치 있는 아이들은 다시 올려보내고 거꾸로 우수한 자들의 자손도 열등해질 경우 아래로 내려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때 ‘도시의 다른 영역’ 또는 ‘아래’가 의미하는 것은 앞서 건국 신화 부분에서도 살폈듯이 생산자 계층 또는 그들의 생활 영역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이상 국가에서는 불구가 아닌 한 이른바 못난 아이들도 양육과 교육의 결과에 따라 우수해질 경우 다시 수호자가 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나라의 분업적 구성원의 하나로 그에 적합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 11)의 내용은 처자의 공유가 분명 가족의 해체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가족의 공동체적 확장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곧이어 처자 공유의 이로움을 다루면서 이기적 가족주의의 해체가 가져다주는 장점을 공동체의 확장 차원에서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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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상국가에서 법으로 정해야 할 처자 공유란 그 내용이 ‘남성 수호자들과 여성 수호자들 모두가 서로 배우자가 되고 태어난 아이들 또한 그들 모두의 자식으로 공유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양성의 평등에 관한 첫 번째 문제처럼 가능성과 유익성의 측면에서 두 번째 문제 즉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만 글라우콘은 가능성은 물론 유익성도 의심스럽다며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유익성과 관련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장 크게 좋은 것’이어서 그 문제는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가능성만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이로움마저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에 가능성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우선 처자 공유의 유익성에 대한 논의부터 꺼내든다. 이로써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두 번째 파도는 크게는 처자공유의 문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자 공유에 어떤 이로움이 있는가의 문제로 구체화 되고,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는 이상적인 정치체제 자체의 가능성의 문제로 슬그머니 확대되면서(472b) 소크라테스가 해명해야 할 세 번째 파도를 구성하게 된다. 첫 번 째 파도보다 두 번째 파도가 그리고 두 번째 파도보다 세 번째 파도가 더 큰 난관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처자 공유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이러한 서두적 논의는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의 문제를 비롯해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기하는 정치체제 전반의 실현 가능성에 관한 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도 궁극적으로 플라톤이 해명해야 할 가장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처자 공유의 유익함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글라우콘에게 ‘게으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다니며 자신만의 생각의 잔치를 벌이곤 하듯이’ 일단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마음껏 이야기하겠다고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이 장면은 논거가 비교적 분명한 유익함을 전면에 세워 처자 공유 주장의 정당성을 우선 확보해두려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유익성에 반비례하여 그 가능성의 문제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은 처자 공유의 이로움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분명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야 함에도 소크라테스가 엉뚱한 주제를 끌고 들어와 이리저리 그 논의를 미루면서 시간을 끄는 장면(466e-471)에서도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제법 지루하다고 할 정도로 길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 장면은 결국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의도적인 논의 지연을 알아차린 글라우콘의 항의를 접하고서야 끝이 나고 그제에서야 비로소 세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가능성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러한 장면 구성들은 모두 처자 공유의 문제가 유익함에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지만, 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플라톤이 생각하기에도 얼마나 어렵고 난감한 주제인지를 플라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이 또한 처자 공유 문자의 문제를 바라보는 플라톤 나름의 긴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인 것이다.

* 사실 첫 번째 파도인 양성평등의 문제의 경우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힘들었을지라도 최소한 시대 현실에 따라 가능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발전적 변화로 평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파도인 처자 공유의 문제(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가 아닌 전적인 배우자 상호 공유)는 아테네 사회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어떤 사회에서 현존했었던 적도 없을 정도로 어느 시대 그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실현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나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중시되는 오늘날의 경우 그것은 용납 여부는커녕 아예 말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제시하는 처자 공유의 문제는 그 자신도 비록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 구상 자체만으로도 오늘날 수많은 비평가의 혹독한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 이상국가의 제반 구상을 여러 측면에서 해명하고 옹호하려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이 처자 공유의 문제만큼은 누구도 예외 없이 가장 크고 심각한 난관이자 어떻든 피하고 싶은 곤혹스러운 주제로 받아들여 진다. 플라톤 저명한 주석가 앤너스도 해당 논의 부분에서 처자 공유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 방식으로 일거에 터무니없는 제안으로 아예 도외시하고 있다. (J. Annas(1981) 181-184쪽 참고)

* 플라톤의 처자 공유 문제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아래와 같이 다각적인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플라톤은 하등동물에 대한 유비에서도 보듯이 동물의 품종 개량에 기울이는 것과 동일한 관심을 수호자 집단의 우생학적 개선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의 품종 개량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이, 인간의 우생학적 개량 역시 인간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처자의 공유가 국가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 의사와 무관하게 권력 집단에 의해 특정 계층에게 강제의 형식으로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의 구상에는 전체주의 내지 국가주의적 이념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2) 게다가 비록 통치계급에 한정되긴 할지라도 결혼과 출산 및 양육이 철저히 국가 소수 권력자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기초한 정교한 제도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개인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 또는 사적 영역에서의 행복 추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있다. 사실 개인 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성적 욕구는 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플라톤도 인정하고 있다. 정교한 속임수를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것이 조작된 것임이 드러날 경우 그 불만족이 초래하는 위험의 크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그 속임수가 ‘크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459c) 당사자보다도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이 그들의 행복에 충분히 더 부응할 정도로 지고의 지혜를 갖고 있으며 또 그들에 의해서만 그 지혜의 구현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지고의 지혜가 과연 존재하는지 검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존재한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에 의해 그것이 구현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정반대로 그러한 믿음은 실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폭압과 불행을 초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구상은 최소한 형식에서 나치가 국가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자행한 우생학에 기초한 폭력적 인종주의와 구조적으로 차이가 없다.

3) 실제 역사적인 사례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설사 대의명분이 선하다 해도 ‘사랑 없는 정의는 잔인’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주체적 욕망과 개개인의 특수한 정황 그리고 비합리적 감성을 배제한 채, 오직 소수 권력의 독단과 형식적인 정치 이성에 기초해 정치적 실천 방안이 수립될 경우 그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준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충분히 경험하고 확인했다. 처자의 공유 문제는 플라톤의 이성주의가 역사적 경험에 대한 고려 없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고 정당화할 경우, 얼마나 참담하고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처자 공유가 우리에게 안겨다 주는 엄청난 당혹감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용납 여부와 무관하게 비록 어렵긴 하지만 구상 차원에서나마 플라톤이 그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일정 부분 존재했음을 살피는 것 또한 <국가>의 이상적 구상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 일단을 살피면 아래와 같다.

1) 우선 플라톤이 살던 아테네 당대에는 결혼 당사자들에게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관념 자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근대 개인주의가 확립된 이후에 생긴 것일 뿐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고대 아테네 남성들에게 결혼은 이곳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에서 그저 출산을 위한 짝짓기로 받아들여 지고 있었고 성적인 욕망은 이른바 창녀로 불리는 여성들과의 성매매나 소년애를 통해 충족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혼 또는 결혼 상대조차 당사자가 아닌 부친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 결정의 배경에는 최대한 명문 집안 내지 가문과의 혈연 동맹을 통한 이권 확보에 대한 고려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국가>에서는 그 가부장적 권력이 소수의 국가 권력으로 대치되고 결혼이 소규모 가문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는 공동체 수준의 구성과 처자의 전면적인 공유로까지 크게 확대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혼 당사자들 모두 기본적으로 후계의 생산 말고는 ‘개인적 사랑이나 성적 욕망에 기초한 자유로운 선택’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결혼과 관련한 이러한 고려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집안 어른이나 부친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정혼(定婚) 관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처자의 공유 차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평이나 비판을 가하지 않고 다만 처자 공유라는 공동체적 가족의 확장이 플라톤의 기대와 달리 결코 혈연적 애착의 증대로 귀결되지 않음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II, i-vi)

2) 그리고 우생학에 기초한 플라톤의 구상은 – 특히 나치 인종주의의 야만성과 연계되면서 – 그야말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그려진 폭력적 동물 사육과 품종 개량에 버금가는 위험천만한 발상으로, 아예 언급조차 금기시될 정도로 비판받고 있지만, 우생학적 관념 자체는 오늘날 인간의 건강한 삶과 복지를 위한 의제로 현대과학 전반에 걸쳐 다각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죄악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가족계획과 관련한 안전하고 효과 높은 피임약의 개발, 결혼 당사자들의 건강진단서 교환, 우수하고 건강한 정자를 확보하기 위한 정자은행의 노력, 태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등은 모두 일정 부분 개인들의 우생학적 고려, 또는 유전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최근 급속하게 발전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와 줄기세포 연구 분야를 들여다보면 인간 유전학에 기초한 기술과학의 발전 차원에서 질병의 치료와 삶의 복지를 위한 우생학적인 관점이 유의미하게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그러나 그러한 유전공학적 시도가 확장 발전하는 현대적 상황 자체가 갖는 위험 또한 상존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본래의 생물학적 생태적 자연 상태를 인위적으로 수정 조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오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추동하는 배후에는 자연의 생태적 환경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생학적 고려와 그에 따른 유전공학의 발전이 오늘날 불가피한 현실로 상존하는 한,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관리가 필연적으로 다시 요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우생학적 구상에 대한 주된 비판 근거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대한 이성적 개입과 통제가 이제는 거꾸로 왜곡된 인간 욕망을 바로 잡는 철학적 기초로 다시 소환되는 것이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어떻게 왜 발생했고 그것이 과연 인간과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이성적으로 따져 묻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지향을 지니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이성적으로 모색하고 그에 맞추어 이성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플라톤 이성주의의 핵심적이고도 일관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4) 다만 문제는 그것을 따져 묻고 모색하며 실천하는 플라톤 이성주의의 실천 주체가 최소한 정치영역에서만은 이른바 소수 철학자 집단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생학적 판단과 실행은 오로지 그들 소수에 의해서만 기획되고 통제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플라톤의 왕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참함의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역사적 경험을 안겨 준 나치와 스탈린의 독재정과 연계되면서, 시민 대중과 개인들의 권익이 아닌 국가 전체와 소수 권력층의 이익만을 위한 이른바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의 진전에 따라 오늘날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비평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이 비록 왕정의 구조는 갖고 있으나 그 체제를 시민 대중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국가전체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전체주의적 폭압체제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 강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가 국가주의 내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철학자왕 자신들을 포함하여 각기 다양한 본성의 계발을 통해 행복을 획득하는 개인들의 집합으로서 이른바 공동체주의에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피력해 왔다. 플라톤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인 네틀쉽도 이 부분에 주해를 달면서 플라톤의 철학자왕정이 지향하는 개체성과 공동체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추상 속의 개인, 문자 그대로 모든 타인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개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그런 공동체란 없으며, 남자든 여자든 개인에 의해서 공유되지 않는, 그들이 살고 있지 않는, 그런 공동의 삶이나 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개체성이란, 그 참다운 의미에서 보면, 이 공동의 삶이나 이익에 참여함으로써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적 봉사에 헌신하는 공복(公僕)이란 그 봉사 때문에 개인이 되기를 중단한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장 이익적인 구두쇠가 자신의 일에 ‘자기 자신’을 최대한 집어넣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의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공동의 이익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던져 넣을 때, 그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개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개체성은 더욱 위대한 것으로 살아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플라톤이 보고 있었던 것은 개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통하여 개체성을 가능한 최상의 정도로까지 끌어 올리는 일이었다.‘(R. L Nettleship(1925) Lectures on the Republic of Plato.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 김안중, 홍윤경 역, 교육과학사 2010. 182쪽)

 

* 아무려나 일부 집단의 처자 공유가 구상으로라도 일정 부분 가능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주장의 강도와는 다르게 그것의 현실적 가능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실제로 플라톤은 세 번째 파도에서 그 가능성의 문제를 슬그머니 이상 국가 일반의 실현 가능성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는 데다 그마저 꼭 그것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다만 본(本)으로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실제로 <국가>의 이상적 구상이 실물로서 현실화된 것이라 평가되는 <법률>에서 첫 번째 파도인 남녀평등은 일정 부분 구체적인 제도로 반영하고 있지만, 이 처자 공유의 문제는 전체를 통틀어 아예 한마디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

*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에 대해서만은 아주 구체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언급하려 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처자의 공유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비록 의심스러울지라도 만약 그것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법제화된다면 그것이 나라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최소한 자신이 왜 처자의 공유 문제를 이상 국가를 구성하는 매우 중대한 과제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철학적 정당성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현실적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이성적 사고 차원에서 그가 내세우는 처자의 공유가 과연 어떤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요컨대 이 부분은 내용적으로 처자 공유 자체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다만 그러한 구상을 통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철학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담아내는데 방점이 있다. 특히 이 부분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공산주의 체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해설은 다음 강해에서 다루기로 한다. -끝-

* 다음 주제 : 2. 두 번째 파도(II), 처자 공유의 궁극적 목적 : 나라의 결속, 고통과 기쁨의 공유[461e-466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