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8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 ‘그리스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정암학당’에서 열리고 있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상설 강좌”의 강의록입니다. 이 강의록은 매주 열리는 강좌 진행에 맞추어 본 웹진에 정기적으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원고를 게재해 주신 이정호 선생님과 정암학당에 감사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

 

[514a-517c]

* 이제 우리의 논의는 제7권에 들어섰다.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에 이어 동굴의 비유를 꺼내 들면서 우선 그것의 기본 성격이  ‘교육받음παιδεία과 교육받지 못함ἀπαιδευσία과 관련해서 본 우리 본성φύσις의 상태πάθος와 비슷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자ἀπείκασον는 말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살려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C1>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지하에 있는 동굴σπήλαιον 형태의 거처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거처는 동굴의 폭만큼 넓은 입구εἴσοδος가 빛φάος 쪽으로 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ἐκ παίδων 다리σκέλος와 목αὐχήν이 묶여 있어ὄντας ἐν δεσμοῖς 머리κεφαλή를 돌릴 수 없는 채 앞πρόσθεν만 보게 되어있다.(514a).

b) 그들 뒤쪽으로는 위쪽으로ἄνωθεν 멀리 불빛φάος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πῦρ과 수감자δεσμώτης들 사이에는 수감자들 위에 가로로 길ὁδός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담장τειχίον이 세워져 있다. 담장은 인형극 하는θαυματοποιός 사람들이 인형들θαῦμα만 보이게 사람들 앞에 쳐 놓은 가림막παράφραγμα같은 것이다.(514b-c)

c) 이 담장을 따라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돌이나 나무나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인물상ἀνδριάς이나 다른 동물 모형ζῷα λίθινά을 담장 위로 쳐들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면서φθεγγομένους 어떤 이들은 조용히 이것들을 들고 다닌다.(515a)

* 글라우콘이 ‘이상한ἄτοπος 비유εἰκών와 이상한 수감자들’이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ὅμοιος 자들’이라고 말하고 아래와 같이 비유를 이어간다.(515a)

d) 그들은 저 불로 인해 자기들 맞은편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σκιά들을 보는 것 외에 자신들의 모습이나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 뒤에서 운반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서로 대화διαλέγεσθαι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들을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515a-b)

e) 그들의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ἠχώ도,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중에 누군가가τις 소리를 내면φθέγξαιτο, 그들은 그 소리를τό φθεγγόμενον 벽 위를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515b) 그래서 그들은 인공물σκευαστής들의 그림자들만을 오로지 참된 것τὸ ἀληθὲς이라고 믿는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본성에 맞게φύσει 일어났을 때 즉 그들이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ἀφροσύνη이 치유ἴασις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515c)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누군가가 풀려나서는λυθείη 일어서서ἀνίστασθαι 고개를 돌리고περιάγειν τὸν αὐχένα 걸어가 빛φάος을 보도록ἀναβλέπειν 갑자기ἐξαίφνης 강제된다고ἀναγκάζοιτο 해보자.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ἀλγοῖ, 전에 그 그림자들만을 보았던 원본들ἐκεῖνα을 눈부심μαρμαρυγή 때문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515c-d)

g) 누군가가 그에게 전에는 그가 엉터리φλυαρία를 보았는데 이제는 ‘있는ὄντος 것’에 더 가까이 왔고 ‘더 있는μᾶλλον ὄντα 것’들을 향해 있어서 더 제대로ὀρθός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지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는 당혹해하며 전에 보았던 것들을 지금 지목되는 것들보다 더 참된ἀληθέστερα 것으로 여길 것이다.(515d)

h) 그리고 또 빛 자체 αὐτὸ τὸ φῶς를 보도록 그를 강제한다면ἀναγκάζοι, 그는 눈ὄμμα이 아파서ἀλγεῖν 자신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φεύγειν 하고 그것들이 지금 제시되는 것들보다 실제로 더 명확한σαφέστερα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15e)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거칠고τραχύς 가파른ἀνάντης 오르막길ἀνάβασις을 통해 그를 억지로βίᾳ 끌고 가면서 태양의 빛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기ἐξελκύσειεν 전에는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ὀδυνᾶσθαι 끌려온ἑλκόμενον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ἀγανακτεῖν(515e-516a)

j) 그럼에도 그 누군가가 그를 태양의 빛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서 빛에 도달하면 햇빛이 눈에 가득 차서μεστός 우리가 지금 참되다ἀληθής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가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ῥᾷστα 볼 것이고, 다음에는 인간들이나 다른 것들의 물에 비친 영상 εἴδωλα을 볼 것이다.(516a)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과 인간 및 다른 것들의 영상을 본 후에 차츰 익숙해지면 마침내 그것들 자체 αὐτά를 볼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는 하늘οὐρανός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구경할 텐데, 낮에 태양과 태양의 빛을 볼 때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을 볼 때 더 쉽게 구경할θεάσαιτο 수 있을 것이다.(516a)

l)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태양ἥλιος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양 자신의 자리ἕδρα가 아닌 물이나 다른 데에 비친 영상들φαντάσματα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장소χώρᾳ에 있는 태양 그것 자체αὐτὸν καθ᾽ αὑτὸν를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을 것θεάσασθαι이다.(516b)

m) 그러고 나면 그는 비로소 태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될συλλογίζοιτο 것이다. 즉 태양은 계절과 해를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ἐν τῷ ὁρωμένῳ τόπῳ 모든 것을 관장하는ἐπιτροπεύων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αἴτια이다. (516b-c) 글라우콘 역시 그러고 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 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벽 위를 지나다니는 것들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이 먼저 가고 어떤 것들이 나중에 가며 또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곤 하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며,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τιμή와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등을 탐내고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τιμωμένους 권세 부리는ἐνδυναστεύοντας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믿으며 그곳 사람들처럼 사느니,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을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 침침한 상태에서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다시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그곳에 갇혀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풀려나와 태양을 보고 다시 내려간 사람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517a)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517a)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실제로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렇게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이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1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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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지하 동굴은 위 쪽(입구 쪽)으로  경사가 진 형태이지만 설명에 따라 횡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위 정리 글에 나오는 다섯 단계(C1, C2, C3, C4, C5)는 플라톤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을 보면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핀 선분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에 국한해서 보면 거의 상응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 간의 상응 관계를 단계별로 구분해 연구해 왔고 우리 논의 또한 설명의 편의상 그간 대체로 합의된 구분에 따른 것이다. 다만 C5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동굴의 비유에서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각별히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물론 태양은 C4에서부터 언급되지만) 그것을 토대로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독립적으로 따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선분의 비유 L1 L2 L3 L4
영상 실물 도형들 형상들
동굴의 비유 C1 C2 C3 C4
모형들 그림자 모형들(인형들) 실물의 그림자 실물들

* 그러나 그 상응관계에 대한 이해가 비유들 전체 또는 플라톤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 비유들에 나타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상응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 비유는 다만 비유인데다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 자체가 이미 각 비유 나름의 취지와 목적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제시된 비유들 간의 모든 표현들을 마치 암호해독하듯 서로 연관지어 보려거나 특정 비유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비유의 진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인식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수감자들과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풀려난 수감자를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 등정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동굴의 비유는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선분의 비유에 비해 좀 더 다각적이고도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기술 또한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다른 비유들의 표현들과 서로 비교해가며 무리해서 짜맞추려할 경우 플라톤의 진의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나중 또 거론되겠지만 미리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를테면 선분의 비유에서 L2가 L1의 상위 인식 단계이듯이 동굴의 위 방향이 진리 인식에 가까운 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C2에서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C1에 나오는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상위의 사람들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굴의 비유에서 수감자와 모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선분의 비유에서처럼 명백성을 기준으로 한 인식 능력상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비교 범주가 다른 계급적 신분적 차이라 할 것이다. 차츰 드러나겠지만 온갖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그들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풀려난 수감자들이 다다라야 할 인식 상 상위 단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피해가야 할 사람들이다. 설사 앎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그들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결코 지자(智者)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만 한정해야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확대해서 추정할 것까지는 없다. 굳이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과 관련하여 선분의 비유와 상응하는 단계가 있다면 오직 오름길의 과정에서 인식 상태가 변화 발전하는 수감자들의 경우 정도일 것이다. 또 동굴의 비유에서 모형을 들고 가는 사람들에 비교되는 사람을 들자면 수감자를 바깥 세계로 이끌고 가는 그 누군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동굴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소피스트들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자들 즉 철학자들이다.

* 이 점을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에 앞서 각 단계별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 스스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할 때 밝혔듯이 동굴의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사항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본성과 관련한 상태의 변화라는 점이다.

 

<C1> 다리와 목이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이곳 수감자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결박되어 갇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자들’(515a)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겪는 특수한 수감 상태를 플라톤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자의 생각을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비유와 관련한 전체 상황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플라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본성의 상태와 교육받은 본성의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유 상 수감의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말하는 수감 또는 결박의 상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릇된 정보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본성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상의 표현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에 빠져 있는 경우들을 표현할 때 ‘사로잡혀 있다’, ‘갇혀 있다’는 말을 쓰곤 한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의 경우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경우 ‘우리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b) 514b ‘위쪽으로’ἄνωθεν : 이 표현은 플라톤이 교육의 방향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자가 누군가를 위쪽으로 이끄는 모습’(175b)은 <국가>에서 자신이 그렸던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동굴 바깥쪽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국가> 515e)을 연상하며 쓰기라도 한 듯 내용이 아주 똑같다.(<소피스트> 216c, <파이드로스> 109a ff, 키케로 <신들의 본성>de nat. deor. II 95,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47—453도 참고)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불빛과 수감자들 사이 가로로 난 길을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은 수감자들 위쪽에 있으나 그들이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앞서 비유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을 거론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어떤 연구자들은 C1의 수감자들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그 사람들이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연관시켜 C1과 L1의 상응관계가 갖는 한계와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분의 비유에서 우리 일상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아닌 실물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은 동굴의 비유상 C1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원본 즉 모형들이 있는 C2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에서 ‘우리들’은 사실 차원에서 그냥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 차원에서 우리들을 수감자로  표현한  말이라는 점에서 범주상 등치해서  비교할 수는  없다.   L1과 C1을 같은 단계로 상응시킨 것은 앞서도 살폈듯이 인식 대상의 명백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L1 영상에 상응하여 모형의 그림자가 있는 C1을 상응시킨 것뿐이다. 그러한 비판은 두 비유들 나름의 취지와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람이란 요소를 기계적으로 등치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선분의 비유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사람이 논의의 직접적인 요소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비유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낮은 인식 단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플라톤이 우리 일상인들 모두가 그림자들만 보고 산다고 여겼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든 논란들은 비유들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그 비유들 간의 상응관계에 있다는 문제의식이 너무 지나쳐 그 상응관계의 통일성에 대한 연구에 필요 이상으로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영미를 중심으로 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연구자들이 비유들의 상관관계의 통일성을 둘러싸고 옹호의 입장이건 반박의 입장이건 시시콜콜할 정도의 미시적인 문제들까지 끌여들여 갑론을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해 67 강성훈(2008) 참고) 사소하게는 동굴의 비유 상 C1에서 C2로 고개를 돌려 불빛을 보고 눈부셔하는 것과 달리 선분의 비유 상 L1 영상에서 L2 실물을 볼 때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그런 연장 선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지 굳이 무리해서 적용 범위에 사람이나 정황까지 일일이 다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각 비유들은 나름의 각기 다른 비유 목적을 갖고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된 것들을 어떻게든 일일이 다  연결 상응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상응관계의 통일성을 밝히는데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부 전통 해석가들이나 또는 그것을 비판 또는 옹호하기 위해 비유 속 모든 표현들을 지나치게 논리적 요소로 환원시켜 분석적으로 살펴 보려는 현대 비평가들이나  그들 모두  플라톤이 각 비유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그 모든 논의에 중심에 놓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오르듯 플라톤의 진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21세기 들어오면서 호메로스 시가에 대한 오랜 동안의 분석적 미시적 접근이 초래한 폐해를 반성하여 <Who killed Homer>(V. D. Hanson, J Heath, 2001)란 책이 출간되었는데 어쩌면 머지않아 비슷한 취지에서 <Who killed Plato>란 책이 출간될지도 모른다.

c) 인형극에서처럼 가림막 담장 위로 모형을 들고 소리 내며 오가는 사람들은 왜곡된 정보와 사실을 생산하고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당대 기득권자들과 선동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영합하고 부역하는 소피스트들 내지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이들의 선동에 사로잡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보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일삼는 대다수의 사람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가리킨다.

d) 이곳에 그려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의심이 증폭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일방적으로 지배층이 만들어 유포한 정보만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현란한 수사술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내지 의욕 자체를 상실한 채, 거짓과 편견, 독단과 아집으로 분열과 혐오의 언어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나라와 서로를 파괴하는 이기적 송사와 분열에 매몰되어 있었다.

e)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 벽면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모두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2차적으로 전달된 간접적인 정보들이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의존하는 정보 대부분은 간접 정보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보들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사람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그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함께 의심도 하고 대화도 해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소통과 대화의 여유조차 갖기 힘든 대중들이 그러한 소통 능력을 함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치 권력자들은 대중의 소통 능력을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 능력으로만 여겨 되레 그 능력의 신장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사실 대규모로 정보 생산 능력을 갖춘 일부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에 맞추어 정보를 가공하여 나라 전체가 울릴 정도로 대규모로 소리 내어 유포할 경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달리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주류 언론집단과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을 뚫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를 끌어내린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515c ‘다음과 같은 일이 본성에 맞게 일어났을 때’ : 이곳에서 ‘본성에 맞게physei 일어났을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실제로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로 볼 수 있고(Ast, Stallbaum), 수감자가 언젠가는 풀려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연스런 진행 과정에 따라 풀려났을 때’(J. Schneider, 박종현) 또는 ‘풀려남은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일어난다’(R. L. Nettleship)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수감자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앞서 살폈듯이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것을 곧이곧대로 실제 죄수로 감옥 생활을 하다가 만기 등의 이유로 석방되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하면서 플라톤이 그 비유가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받은 자의 본성physis의 상태를 닮은 것’이라고 한 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수감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만기출소같이 어떤 수동적인 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감자 자신 어떤 일을 계기로 수감 상태가 본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그 미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수감자가 맞이한 어떤 계기란 이를테면 플라톤 자신이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건 누구의 소개로건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을 만나 철학을 접하고 무언가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상황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어둠 속에서 빛과 진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본성에 거스르는’(para physin)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풀려남은 그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 역본(2025년 말 출간 예정)은 ‘결박에서 해방된 상태가 그들의 본성에 맞는다’는 취지에서 physei를 ‘본성에 맞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 수감자는 이같이 수감 상태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제되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곧 철학 교육이 개시되는 상태 즉 이어지는 C2의 상태라 하겠다. 빛을 향한 오름길에서 교육적 당위를 처음에 강제로 느끼는 것이나 이내 그것을 감내하려 마음을 먹는 것 모두 가능성으로서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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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2,500년 전에 기술된 플라톤의 동굴 속 장면은 오늘날 누군가가 제작한 특정 내용이나 스토리를 담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 스크린에 상연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바라보는 현대 극장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 닮아있다. 물론 우리는 극장을 나와 실제 일상의 생활을 보내지만, 일상에서조차 대부분 정보는 대자본을 토대로 세워진 정보 통신업체가 제작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 등 사이버 문화에 크게 의존해 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 매체 등 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장치가 크게 발전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들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균형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어떤 형태로건 이미 형성된 신념을 배타적으로 더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정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음식점이든 공공장소든 불문하고 특정 종편 방송만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일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발과 목이 묶인 채 벽면에 비친 모형들의 그림자와 그곳에서 반향된 소리들만을 보고 들으며 그것들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재료들로 모형을 만들어 그림자들을 비추어내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수감자들의 그러한 상태를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모형들을 좀 더 많은 공과 땀을 들여 제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이고 수감자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힌 그만큼 더 많고 큰 규모로 왜곡된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한과 문화교류를 증진하는데 앞장섰던 우리나라 어느 문화인류학자조차 북한을 극장국가로 칭하고 있는 것도(『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공저, 창비, 2013) 그리고 우리 사회 주류 언론인 조중동과 그들의 기득권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종편들 그리고 혐오와 분노만을 부추기는 극우 유투버들 모두가 가히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짜 뉴스와 정보조작의 온상으로 전락한 것도 플라톤이 그토록 우려했던 동굴 속 정황과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실로 그것은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광기 어린 프로퍼갠더 정책은 물론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 문화와 정보 사회가 갖는 어두운 면들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 반지성과 대중의 집단 심리의 허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한 플라톤의 성찰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매우 유효하고 적확한 비판이자 진심 어린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와 연관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지 상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동굴 속 상태 일반을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종교적 지평에로까지 확장해서 음미해보면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은 물론 종교 철학과 문명 비판, 정신 분석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하고 극복해야 할 철학적 난제들과 문제의식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C2 단계에서 C5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동굴의 비유 내용을 살펴가며 그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어가기로 한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 앞의 강해에서 우리는 다른 비유들과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가 갖는 고유성에 주안점을 두고 그 기본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론 내지 존재론적 위계가 제5권에서 플라톤이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의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선분의 비유에 관한 두 번째 강해는 미리 말한 것처럼 선분의 비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갖는 중대성과 그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기로 한다.

* 그것을 위해 우선 플라톤이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하여 제5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과 이곳 선분의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간략히 도표로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 제5권에서(474c-480a) 플라톤은 <표1>에서 보듯이 인식의 상태를 ‘무지’agnoia와 ‘앎’gnōmē, epistēmē으로 크게 구분하고 그 무지와 앎 사이에 ‘중간적인 것’(metaxy ti)으로서 ‘믿음(의견)’doxa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앎은 ‘있는 것’, ‘자체적인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고 믿음(의견)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선분의 비유에 와서는 <표2>에서 보듯이 무지의 경우가 빠지고 인식의 상태로서 두 단계 즉 ‘앎’과 ‘믿음(의견)’은 전체 4단계 즉 ‘상상’eikasia, ‘확신’pistis, ‘사고’dianoia, ‘지성적 앎’noēsis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면 제5권의 앎과 믿음은 선분의 비유에서 세분화된 그 4단계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서로 상응·연관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선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noēsis과 ‘사고’dianoia가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으로 묶여있음에 주목하면 언뜻 그 두 단계가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단계 중 ‘사고’ 단계는 가정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가정의 원리(archē anypothetos)로서 ‘자체적인 것’ 즉 ‘있는 것’(to on)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5권의 ‘앎’이 될 수 없다. 그에 비해 ‘지성적 앎’noēsis은  아무 가정들 없이 형상들만을 사용해서 그것을 통해 형상들 자체에 이르는 앎(510b)이라는 점에서 제5권의 ‘앎’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과 ‘사고’ 둘 다 ‘가지적 영역’으로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지성적인 앎’noēsis의 단계만이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 4단계 중 오직 ‘지성적 앎’(L4)만이 제5권의 ‘앎’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머지 단계들(L1, L2, L3) 즉 ‘사고’, ‘확신’, ‘상상’의 상태들은 원천적으로 그 ‘앎’과 배타적으로 차별되는 것인 한, 모두 ‘믿음’(의견)doxa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표3> 참고) 그러나 플라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를 ‘지성적 앎’과 묶어 ‘가지적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고 나중 534a에 가서도 그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성적 앎’과 ‘사고’가 원천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은 왜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 둘을 함께 묶어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앎과 믿음과 관련한 제5권의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입장에 변화를 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추가적인 보완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것은 이제 선분의 비유에서 가지적 영역의 것으로 제시된 ‘사고’dianoia가 어떤 철학적 성격과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앞에서도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 중 ‘지성적 앎’만이 제5권의 ‘앎’과 동일하게 ‘형상적 앎’인 한, 나머지 단계들은 모두 제5권 기준으로 ‘믿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글라우콘이 선분의 비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사고’를 ‘믿음doxa과 지성nous 사이에 있는 것’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511d)과 부딪친다. ‘믿음’과 ‘믿음과 지성 사이’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분의 비유 자체가 기본적으로 doxa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다가 그 세분화 단계에서 사고가 앎일 수 없다면 사고가 치울 칠 방향은 doxa쪽 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점에서 ‘믿음’doxa이란 말이 선분의 비유 중간에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가(중간에 나오는 그에 준한 표현 ‘to doxaston’(믿음의 대상)이란 말도(510a) 다만, 선분의 비유 상 가시계와 가지계의 관계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to doxaston과  to gnōston의 관계처럼 모사와 원본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비유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그것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는 것도 눈에 띤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제5권의 doxa와 비교하여 그 범위를 ‘사고dianoia’ 아래 단계 즉 확신pistis과 상상eikasia으로 좁혀 설정했음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변증술을 설명할 때 선분의 비유를 꺼내 들어  ‘지성적 앎과 사고’는 noesis로 부르고 ‘확신과 상상’은  스스로도 직접 doxa라고 말하고 있다.(534a)  어쨌거나 논쟁의 소지는 있어 보이지만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글라우콘의 말을 아래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왜 처음에 doxa란 말을 쓰지 않다가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쓰게 한 후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확신과 상상에 국한하여  그 말을 쓰고 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일정 부분 있어 보인다.

* 우선 <표1>에서 보듯 믿음은 앎(있는 것)과 무지(없는 것) 사이에서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성립하는 인식 상태이다. 그리고 앎과 믿음(의견)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경계만 있을 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은 없다. 글라우콘의 말에서 지성을 ‘있는 것’으로 보고 믿음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볼 경우 설사 그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 즉 본질적으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과 앎이라는 당구공이 닿아 있을 때 접점은 하나이고 그 당구공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그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는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당구공의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자면 추론적 사고 자체는 원천적으로 앎이라는 당구공에 속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에 속해 있되. 다만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앎의 방향 쪽 극단 표면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고는 비물질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에 닿아 있지만 기하학적 사유 공간의 연장성을 포함하고 있고 그 연장성은 무규정성의 근본 특징인 한, 기본적으로는 믿음(의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비물질성 뿐만 아니라 공간적 연장성까지도 탈각해야 비로소 앎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서 무규정성을 가장 적게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형상적 앎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존재론적 관점에서건 인식론적 관점에서건 믿음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은 여전히 불가피해 보이긴 하지만 믿음(의견)을 어떤 관점에서 어디에 위치시키건 간에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가지적 영역의 범위를 형상적 앎에만 국한하지 않고 최소한 수학과 기하학 같은 전문 기술들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은 앎과 믿음, 무지의 존재론적 위상과 관련하여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그것의 존재론적 특성을 ‘무규정성’apeiron으로 규정한다. 무규정성은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형상(to on) 쪽 극단에 이르면 ‘자기동일성’tauton으로까지 나타날 수도 있고 반대로 무(無mē on)쪽 극단에 이르면 관계맺음의 원리로서 타자성heteron의 극치로 나타날 수도 있다. 추론적 사고 대상으로서 수학적 기하학적인 것들은 모두 사유 공간에서 공간적 연장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규정성apeiron을 갖는 것이되, 다만 형상 쪽을 향한 최상위 극단에서 물질적 무규정성을 탈각해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다. 기하학적 공간 또는 사유 공간에서 길이가 동일한 여러 삼각형들이 하나의 삼각형으로 합동하여 하나의 삼각형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데아의 자체성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영역에 위치하지만,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으면서 이데아적인 ‘자체성’kath’ hauto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보전함으로써 말로 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 수학과 기하학의 토대가 된다. 철학의 목적은 영혼의 고양을 통해 무규정성의 본질로서 타자성에 역행하여 자기동일성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변증술적 지성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철학의 수행은 영혼의 능력에 따라 그 목적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이 늘 사랑을 지속하는 것인 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철학의 완성은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분투’, ‘위대한 영혼에로의 자기 확장’ 그 자체라 할 것이다.

* 요컨대 제5권의 엄격한 이분법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사고는 <표3>이 보여주듯 앎과 차별되어 믿음(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비록 가시적 모상을 가정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시적 영역과도 관계있지만, 결론은 비가시적 도형 자체로 마무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앎에로의 상승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를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라우콘과 사고를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는 소크라테스가 양립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지성nous과 공통의 어원을 갖는 noēsis와 noētos란 말을 사용할 때 아무 사전 설명 없이 어떤 때는 앎과 사고 모두를 묶어 noētos<표2>나 noēsis(534a)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noēsis를 ‘앎’epistēmē에만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표>2, 제5권) 이것은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에 와서 noētos와 noēsis란 표현을 의도를 갖고 다소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앎epistēmē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엄격하게 유지하면서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의 믿음의 영역을 세분화하여 ‘사고’의 단계를 분리해내고 나머지 단계들을 앞서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좁은 의미의 doxa로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의 범위를 일정 부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술을 통한 형상적 앎뿐만 아니라 ‘사고’ 단계의 앎 즉 수학과 기하학 등 추론을 기반으로 한 전문 기술적 앎 또한 학문적 기초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기하학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성 자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살폈듯이 이성은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사고 단계와 앎의 단계 그 모두에 걸쳐 있다. 철학은 종국적으로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수행은 변증법적 문답 능력을 통해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말과 논리로 이루어진다. 지성에 의한 형상적 앎만이 아니라 사고에 기초한 수학과 기하학 등 전문 기술들technai의 대상 또한 그 자체로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철학적·학문적 탐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학술들을 변증술이 형상적 앎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표현하고 있다.(533d) 요컨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는 현상 구제 차원에서 형상적 앎 아래 단계의 인식 상태들 즉 현상계에 대한 학적 탐문의 길을 확립하는데 크게 비중이 실려 있던 것이다. 

 

*  선분의 비유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단순히 인식론적 명백성의 순차적 단계와 특징 보다는 그 배면에 깔린 존재론적 위상 특히 사고 단계의 위상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이 학적 인식의 확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존재론을 끌어들여 각 단계가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살핀 셈이다. 이제 끝으로 이상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면서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제5권에서 앎과 믿음의 구분과 선분의 비유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로 나누건 넷으로 나누건 ‘지성적 앎’으로서 앎의 단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변함이 없다. 즉 선분의 비유에서 앎의 존재론적 위상 변경에 대한 언급은 없다. 특히 태양의 비유와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상응하는 앎의 단계가 별도의 지위를 갖고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다른 이데아들보다 철학적 위계상 우월한 것일지라도 최소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하나같이 자체적인 존재이자 인식론적으로도 동일한 앎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2) 이것은 결국 선분의 비유의 주요 목적이 ‘형상적 앎’을 보완하고 해명하는 것보다는 그 하위 단계로서 믿음의 단계를 보다 세부적인 단계들로 나누어 그 단계들 각각이 갖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는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인식 과정 전체를 연속해서 상승하는 것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중간적인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 ‘믿음’doxa의 스펙트럼이 최하 ‘상상’의 단계에서 ‘확신’을 거쳐 ‘사고’로까지 분화되면서 각기의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앎에로 상승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특히 플라톤이 ‘사고’를 존재론적으로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고 있다는 것은 지고의 앎으로서 형상적 앎의 위상을 이전의 입장 그대로 보전 유지함과 동시에 하위 대상으로서 수학 또는 기하학적 대상들이 갖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위상을 재정립하여 그 자신 가지적 학문 영역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 역시 변증술의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나 형상적 자체성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가질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4) 그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가시적 영역도 다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으로 세분화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실물을 다루는 일반 기술들과 시가술, 수사술, 미술 등 모방과 꾸밈, 허구와 과장 등을 기반으로 한 기술들을 구분함과 동시에 그러한 기술들이 갖는 나름의 위상도 의미 있게 함께 재정립하려는 의도 또한 담고 있다. 이점에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 ‘사고’dianoia가 서로를 고리로 모상eikōn과 원본의 관계를 갖고 상승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게 주목해야 한다. 특히 최하위 인식 단계로서 ‘상상’eikasia의 경우는 환상과 억측,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감성의 개입 등 명확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게 평가되는 단계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결코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든 일상인의 심리상태에서든 늘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상’은 정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와 청소년기 단계에서는 장차 맞이할 성년기 영혼 형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 삶에서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플라톤이 제3권에서 시가(詩歌)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특히 어린이와 청년기 교육 과정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시가 교육에 상당한 정도의 비중을 할애한 것도 그 때문이다.(376e-403c) 사실 시가는 말과 언어의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선법과 리듬에 허구와 과장까지 포함하고 있어 일부 시인들과 권력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러한 시인들과 그들이 지은 신화나 시가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심적 상태에 시가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얼마나 심대한 것인지 특히 이성적 사고가 채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이나 청소년기에는 얼마나 심각할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전통적인 신화나 시가들을 비판하되 신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건국신화가 보여주듯이 이상 국가에 걸맞은 새로운 시가들을 만들어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는 물론이고 성인 이후에도 시민이라면 누구도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상’은 선분의 비유에서 최하위의 인식단계에 속하지만, 삶에 미치는 비중과 중요성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이 갖는 양면적 영향의 크기만큼 교육의 대상으로서도 매우 중대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제3권에서 시가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시가(詩歌) 즉 리듬과 화음은 영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으므로 …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는 훌륭하지 못한 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보고 싫어하는 대신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며 기뻐하며 영혼 속에 받아들여 … 나중에 이성적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 제일 반길 것이다”(401d-402a)

5)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말의 꾸밈과 과장을 마다않는 수사술rethorikē은 물론 실재의 모사에 대한 모사 즉 이차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고 있는 회화를 비롯한 모방술(mimetikē)도 시가술이 갖는 양면성 차원에서 함께 비판된다. 그것 또한 앞서 말한 상상의 특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술은 소피스트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민주정 치하에서 설득적 언사 대신 말의 꾸밈과 과장의 방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기술로 변질되어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었다. 대화편 제목들의 상당수에 소피스트의 이름이 내걸려 있고 내용에서 상당 부분 그들이 구사하는 수사술에 대한 냉혹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 진실 왜곡과 정치적 선동의 기술로 수사술을 철저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시가에 대한 양면적 태도가 보여주듯이 설득력을 강화하는 말의 기술로서 수사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경우를 보면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역설적인 방식으로나마 수사술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핵심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자체가 이미 상황 설정이나 인물 설정, 대화의 구성 전개 등에서 말의 문학적 꾸밈과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비롯해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은유들 또한 하나같이 모두 말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시가적 표현 기법이다. 그리고 회화 내지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차적인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불분명함과 왜곡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술과 조각은 신들과 신들의 거처를 아름답게 또는 웅장하게 꾸미고 그것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즉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폄하는 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정확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제기된 것이지 그것이 삶에서 갖는 가치까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철학과 병행하여 마치 죽은 돌에서 생명을 끌어내듯이 조각을 생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 ‘영상(影像)’(image)이란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받아들여 지듯이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폄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위대한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치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 자체가 내용상 이미 위대한 철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형식에서 문학적 허구임 또한 분명하다. 플라톤이 학적 정확성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을 기준으로 예술의 위상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은 진실이어도 플라톤이 삶에서 예술이 갖는 가치까지 폄하하고 부정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과 모방mimēsis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제3권(392c-398b)에도 나오지만 나중 제10권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진다.

6) 그리고 ‘확신’pistis 단계의 인식 상태와 그 대상으로서 실물 세계들 또한 ‘사고’dianoia의 모상으로 사고의 하위 단계이지만 인간 삶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물론이고 관심사와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심에 있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삶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 수많은 기술들 이를테면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일반 기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기술들이다. ‘확신’의 대상이 ‘사고’ 대상의 모상이 된다는 것 역시 내림의 과정에서 보면 현실의 실물들이 ‘사고’를 통해 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해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일반 기술 모두는 기본적으로 경험적 숙달과 관련되어 있지만 일정부분 수학과 기하학에 의존해 있어 개연적이나마 기술적 앎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현상 구제의 일환으로 실물을 형상의 분여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7) 결국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에서 ‘믿음’(의견)으로만 구분되었던 인식 상태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구제 차원에서 실질적인 현실 문제의 방책으로서 수학과 기하학의 방법은 물론 제반 기술들 나름의 학적인 위상과 성격을 최대한 뒷받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고’ 단계를 ‘가지적 영역’에까지 확장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 형상적 앎만을 중시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 상태인 믿음의 영역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영역에서 형상적 앎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앎의 상태로 추론적 사고를 설정함으로써 전문 학술들의 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 추가적으로 확신과 상상도 따로 구분하여 그 차이가 갖는 고유한 의미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최정점으로 하는 존재 및 인식 세계의 기본 구도를 보여준 후, 선분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형상적 앎에 이르기 위해 어떠한 하위 단계의 인식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각 단계의 인식들이 현실의 기술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학적으로 어떤 위상을 갖는지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8)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문 기술들과 일반 기술들을 학문적 차원에서 근세 자연과학들을 비교해보자면 선분의 비유는 근세 자연과학적 인식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주요 개념들을 이미 선구적으로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적 문답과 숙고를 거듭하여 영혼이 고양된 상태에서 마침내 첫 원리를 획득하고 다시 그 원리를 토대로 가정들에게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플라톤적 앎의 구도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일원리에 이른 후 그 제일원리를 토대로 연역의 방식으로 개별 지식들의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제일철학과 인식론적으로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에서 ‘확신’과 ‘상상’의 단계는 근대 경험론이 그랬듯이 그 상위 단계로서 최소한의 학적 분별력인 사고dianoia 작용을 배제하고 지식의 원천을 그저 감각적 경험에만 한정했을 경우 왜 회의론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칸트(I. Kant)의 인식론도 관점과 해석만 다를 뿐 근본 틀에서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관조(觀照)theōria의 대상인 플라톤의 형상계를 물자체라는 불가지의 세계로 상정하여 학적 인식에서 배제하는 대신 사고의 단계에서 작동하는 이성의 역할에 주목하여 이성을 주관에 내재하는 인식의 보편적 구성 원리로 삼아 감각적 경험적 지각들을 인간 나름의 보편적 지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단계만 하향되었을 뿐 칸트 역시 현상의 구제 즉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칸트가 인식론에서 배제하였던 물자체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실천철학의 과제로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후의 철학사적 전통에서 특히 근현대 비합리주의자들에 의해 그 물자체의 세계가 오히려 철학적 탐문이 육박해 들어가야 할 참된 실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비록 관점과 용어는 달라도 말과 논리 너머의 플라톤적인 예지계가 침묵의 형식으로건 형이상학적 이념의 형식으로건 철학의 근본 문제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궁극의 관심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All philosophy is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라고 말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이 결코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9) 요컨대 플라톤 철학은 철학적 위계에서 보면 분명 이데아가 지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지닌 관심의 중대성 차원에서 보면 형상적 앎의 내림 과정 즉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구제 차원에서 말과 논리로 성립되는 전문 기술들(오늘날의 개별과학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그저 형상이라는 추상적 관념만 좇는 비현실적 사상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독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후대 철학자들이 자기 철학을 내세우기 위해 아전인수적으로 가해졌던 그릇된 해석에 크게 의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근본적으로 삶의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공존과 조화, 지성과 균형의 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문 기술들이 아무리 현실에서 필요할지라도 형상적 앎을 결여했을 경우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권력과 욕망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철학이 전문 기술들이 갖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무시한 채 형상적 앎을 내세워 고답적인 이론에만 머무는 경우 그것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선과 아집, 폭력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만약 플라톤 철학이 말과 논리를 넘어 형상적 앎에 대한 지적 직관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매달렸다면 플라톤 철학은 철학사에서 결코 철학적 사유의 모태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신비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철학 또는 기독교 신학의 보완물 정도로 운위되었을지 모른다.

 

*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보완하는 일환으로 이상과 같이 선분의 비유를 살핀 후, 이제 제7권에 들어가 그 선분의 비유에 나타난 현실 구제의 구도와 세부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좀 더 실천적이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더 종합적으로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따라 그곳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도 당연히 다루어진다. <국가> 제6권은 이렇게 선분의 비유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국가> 제6권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선분의 비유(509c-513c) – (I)

 

[509c-513c]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해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신령스러운 넘어섬이라고 놀라워 한 후 그것이 갖고 있는 태양과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조금도 빠짐없이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509c)

* 이에 소크라테스는 남겨 놓은 이야기가 많고 또 많은 것을 빠뜨리게 될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시 한 번 가지적인νοητός 영역τόπος과 가시적인ὁρατός 영역을 구분한 후 그 두 영역에 있는 두 가지 부류γένος들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뉜’δίχα τετμημένην 선분γραμμή에 비유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기 시작한다.(509d)

1) 크기가 다른ἄνισα 두 부분τμῆμα으로 나뉜 선분을 다시 동일한 비율로 ‘가시적인 종류의 부분’τό τοῦ ὁρωμένου γένος과  ‘가지적인 종류의 부분’τὸ τοῦ νοουμένου γένος으로 나눈다.

2) 이것들을 서로 간의 상대적인 명확성σαφήνεια과 불명확성ἀσαφείᾳ의 관점에서 보면 가시적인 종류의 한 부분은 모상εἰκών들이다.(509e) 이 모상들은 그림자σκιά들, ‘물에 비친 영상들’τὰ ἐν τοῖς ὕδασι φαντάσματα, 밝고 조밀하고 매끄럽게 만들어진 것들에 비친 영상들 그런 모든 것들이다. 가시적인 종류의 다른 한 부분은 이 모상들이 닮아있는 원본들, 즉 우리 주위의 동물들 τά περὶ ἡμᾶς ζῷς과 모든 식물들 τὸ φυτευτὸν, 그리고 인공물τὸ σκευαστὸν의 종류 전체이다.(510a)

3) ‘진리와 진리 아님’ἀληθείᾳ τε καὶ μή의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가시적인 부분은 믿음(의견)의 대상τὸ δοξαστὸν이 앎의 대상τὸ γνωστόν과 맺고 있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닮은 것τὸ ὁμοιωθὲν이 그것이 닮아있는 원본τὸ ᾧ ὡμοιώθη과 맺게 되도록 나뉘었다.(510a)

4) 그리고 가지적인 것의 부분의 경우, 한쪽은 앞에서 모방되었던μιμηθεῖσιν 것들을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하면서 영혼이 가정ὑπόθεσις으로부터 출발해서 첫 원리ἀρχή가 아니라 결론τελευτή을 향해 진행하며 탐구ζητεῖ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고, 다른 쪽은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서 ‘가정이 놓이지 않은 첫 원리’(무가정의 원리)를 향해 나아가며 저쪽에서 사용한 모상들 없이 형상εἶδος들 자체αὐτός만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통해 탐구μέθοδος를 해나가는 부분이다.(510b)

* 소크라테스가 가지적인 것의 부분들을 ‘가정’이란 말을 끌어들여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계산술λογισμός이나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홀수τό περιττὸν와 짝수τὸ ἄρτιον, 도형들τὰ σχήματα과 세 종류εἶδος의 각γωνία 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다른 어떤 것들을 가정으로 놓고서는 마치 이런 것들을 아는εἰδότες 사람들인 양, 그에 대한 어떤 설명λόγος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 모두에게 분명한 것으로 여긴다.(510c)

2)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것들을 검토해가면서 일관성이 유지되는 방식으로ὁμολογουμένως 그들이 애초에 고찰하고자 했던 것에까지 도달한다.(510d)

3) 기하학자, 계산술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ὁρωμένος 도형εἶδος들을 사용하며 이것들에 대해 논의를 하지만, 그들이 사고하는διανοούμενοι 대상은 이것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닮아있는 그 원본들’οἷς ταῦτα ἔοικ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는 사각형τετράγωνος이나 대각선διάμετρος이 아니라 ‘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αὐτῆς를 ‘염두에 두고’ποιοῦνται 논의를 하는 것이다.(510d-e)

4)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그린 바로 그것들을(그것들의 경우 그것들의 그림자σκιά나 물ὕδωρ에 비친 모상εἰκών들도 있다) 이번에는 모상으로 사용하는데(510e) 그렇게 하는 까닭은 사고διανοίᾳ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ἰδεῖν 저것들 자체αὐτὰ ἐκεῖνα(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를 보기 위해서이다.(510e)

5) 이것들은 가지적인 부류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것의 탐구ζήτησις에서 영혼은 가정을 사용하도록 강제되고ἀναγκαζομένην 가정들보다 더 위로 넘어갈ἀνωτέρω ἐκβαίνειν 능력이 없어서 ‘첫 원리’ἀρχή로 나아가지는 못한다.(511a) 그리고 그 아래의 것들에 의해 모방되며 그 아래의 것들에 비해서는 분명한ἐναργής 것이라고 판단되고δεδοξασμένοις 존중받는τετιμημένοις 것들, 바로 그것들을 그들은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한다. 이런 것들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그와 유사한ἀδελφή 전문기술들τέχναι에서 일어나는 일이다.(511a)

* 소크라테스는 가지적인 부류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으로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이러한 경우란 이성 자체αὐτὸς ὁ λόγος가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을 통해’τῇ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δυνάμει 파악하는 경우로서 여기에서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가정이 놓이지 않은ἀνυποθέτου(무가정의)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τοῦ παντὸς ἀρχὴ에 이를 때까지 거기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ὁρμή이자 디딤 발판ἐπίβασις 같은 것으로 삼는다.(511b) 그리고 그렇게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이성은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결론까지 그런 식으로 내려간다.καταβαίνῃ.(511b)

2) 이러한 파악 방식은 감각될 수 있는 것αἰσθητῷ은 어떤 것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를 사용해서 형상들을 통해 형상들로 나아가 형상들로 끝을 맺는 방식이다.εἴδεσιν αὐτοῖς δι᾽ αὐτῶν εἰς αὐτά, καὶ τελευτᾷ εἰς εἴδη”(511b)

*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설명에 글라우콘은 엄청난συχνός 일ἔργον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한 후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자기 나름으로 정리한다.

1) 전문기술이 고찰하는 부분보다 ‘변증술적 대화를 할 줄 아는 앎’τὸ ὑπὸ τῆς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ἐπιστήμης이 고찰하는θεωρούμενον ‘있는 것’το ὄντος과 ‘가지적인 것’το νοητος의 부분이 ‘더 명확한 것’σαφέστερον이라고 규정διορίζειν할 수 있다.(511c)

2) 전문기술들에서는 가정들이 첫 원리들이며, 자신들이 구경하는 것들을 감각이 아니라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θεᾶσθαι 강제되지만, 첫 원리를 향해 올라가지ἀνελθόντες 않고 가정들로부터 그것들을 살펴보기σκοπεῖν 때문에 이들이 그것들에 관해 지성νοῦς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511c-d)

3) 기하학자나 그런 사람들의 상태는 지성이 아니라 사고διάνοια라고 부르는 것 같다. 사고dianoia는 믿음δόξα과 지성의 중간μεταξύ에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511d)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의 설명을 아주 충분히 잘 받아들였다고 평가한 후, 위에서 설명한 네 부분τμῆμα에 상응해서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영혼의 상태παθήματα가 생긴다고 말한다. 요컨대 맨 윗부분에 ‘지성적 앎’νόησις이 두 번째 부분에 사고διάνοια가, 세 번째 부분에는 확신πίστις이, 마지막 부분에 짐작εἰκασία이 할당된다. 이것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진리 ἀληθεία에 참여하는μετέχει 만큼 명확성σαφήνεια에 참여하며 그것들은 그 비율에 따라ἀνὰ λόγον 배열을 이룬다.(511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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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9d-e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 동일한 비율로 나누게: ‘크기가 다른(an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크기가 같은(an 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 경우 ‘크기가 다른’으로 읽는다. 이에 따라 구분된 선분을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L1          L2          L3               L4

l——–l—————l—————l————————-l

 

L1과 L2 = 가시적인 종류의 것

L1 = 모상들(그림자, 영상) L2 = 실물들(식물, 동물, 인공물)

L3와 L4 = 가지적인 종류의 것

L3 = 가정들(수, 도형, 각)을 놓고 가는 것, L4 = 무가정적인 것, 첫 원리, 형상들-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른 각 선의 길이 비율

L1 : L2 = L3 : L4 = L1+L2 : L3+L4

* 각 선의 비율은 명확성에 있어 가시적인 것에 대한 가지적인 것의 우위와

각 영역 내에서 L1에 대한 L2의 우위, L3에 대한 L4의 우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L1보다는 L2가, L2보다는 L3가, L3보다는 L4가 명확성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제 크기를 보면 L2와 L3가 같다.

* 각선들의 길이가 명확성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L2와 L3가 같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 같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과 표를 통해 드러내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를 고려하면 도표 상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길이로 나타날지를 플라톤 자신 미처 몰랐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음 강해에서 살피겠지만 명백성과 관련한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차이가 분명하지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L2와 L3가 근본적으로 믿음의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L1도 존재론적으로는 같은 믿음의 지위에 있음에도 길이는 그 보다 짧다는 것과 부딪친다.

* 플라톤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선분의 비유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믿음’은 그리스어 doxa의 역어이다. 그런데 이번 강해에서는 ‘믿음’이라는 역어가 선분의 비유에 나오는 ‘확신pistis’이란 역어와 혼동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믿음’에 ‘의견’이란 말을 병기했다. 플라톤에게 pistis는 doxa에 포함된 것이되 신뢰성에서 상상보다는 높은 사고보다는 낮은 수준의 생각과 견해를 말한다.

* L3의 대상이 홀수, 짝수, 도형들, 각으로 예시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L3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들’ta mathēmatika로 부르고 있다.(<형이상학> A.987b15) 플라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하학이나 이와 유사한 학술들’(511b) 즉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이 다루는 대상들로 표현하고 있다.

* ‘사고’dianoia는 사전적 의미에서 뭔가를 목적으로 하는 지적인 궁리이되 논리적 추론이나 설명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적 사고를 말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그 말은 기하학 등 전문 학술들의 인식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 511b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dialegesthai dynamis : 이 표현은 나중 변증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곳(531c-535a)에서도 언급되고(533a) <필레보스> 57e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이것은 ‘있는 것들'(ta onta)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구경(thea)하도록 이끄는 영혼의 힘’(532c)으로 그 상승의 극치에서 마침내 형상 즉  ‘있는 것'(to on)을 본다(idein).  dialegesthai의 일차적 의미는 ‘대화(문답)'(454a 등)이지만 이곳에서 ‘변증술적 문답’으로 옮긴 것은 그 문답과 문답의 극치에서 변증술의 완성으로서 지성적 앎(noēin, epistēmē) 내지 관조(theōria)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511b ‘내려간다.’katabainē’ : 이성이 첫 원리를 파악한 후 다시 거꾸로 사고 단계로 내려갈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 ‘내려간다.’katabainō는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갈 때도(516e) 쓰이고 <국가> 첫 구절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다’(327a)에도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 첫 강해 때도 언급했듯이 <국가> 첫 구절에 모종의 상징성을 부여하여 그 말과 연계지어 그 말들이 ‘현상의 구제’를 함축하는 말로 다소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기도 한다.

* 511c에서는 ‘본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변증술적 문답을 할 줄 아는 앎이 고찰하는 있는’이란 구절에서 ‘고찰하는’으로 번역된 ‘theōroumenon’(원형 theōreō)이고, 또 하나는 ‘전문기술들에서는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 강제되지만’이란 구절에서 ‘구경하도록’으로 번역된 ‘theasthai’(원형 theaomai)이다. 둘 다 기본적으로 ‘본다’(look at, see)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전자는 의미상 speculate, consider 등 지적 사유와 고찰의 뜻을 포함하고 있고, 후자는 오늘날 극장theatre의 어원 theatron에서 thea가 의미하듯 ‘관망’view as spectators의 의미가 크다. 플라톤은 여기서 앎과 사고 단계의 차이에 준해 그 표현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476a에서 ‘앎을 좋아하는 철학자들’과 대비하여 ‘전문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echnos을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heamōn로 일컫고 있는데 이 때 theamōn도 theaomai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theaomai를 ‘구경하다’로 번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일상어의 이러한 미묘한 차이까지 의식하면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사소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플라톤철학 연구자라면 텍스트상의 이러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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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과의 유사성만은 빠짐없이 다시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글라우콘의 요구(509c)에 따라 제시된 비유들이다. 즉 우리가 지금 다루게 될 선분의 비유와 이어지는 동굴의 비유는 모두 태양의 비유와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분의 비유는 태양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전체 구도상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동굴의 비유 또한 동굴과 바깥세계, 어둠 속 횃불과 대낮의 대비 형식으로 내용상 비슷한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그 두 영역 모두 다시 각기 마치 명백성의 단계를 보여주듯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학자들은 그 모든 비유가 아래와 같이 대체로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4단계로 구분되어 있다고 여긴다.

*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는 물론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관건이 되는 핵심 주제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국가>에서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직접적인 전거는 위의 세 가지 비유들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 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세 비유 간의 상호 관계 특히 각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단계별 영역 간 유사성과 상응 관계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들이 전체 플라톤 철학과 관련하여 어떤 철학적 함축을 지닌 것인지를 오랫동안 탐문해왔다.(우리나라에서도 주요 해석가들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자세하게 비교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강성훈, 「플라톤의 『국가』에서 선분의 비유와 동굴 비유」, 『철학 사상』 V.27,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그러나 그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세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이 과연 철학적으로 음미할 만한 정도의 유비적인 상응 관계를 지니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사성에 기초한 그 상응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각 비유를 통해 다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고유 의도를 간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어 왔다. 어쨌거나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은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 동굴의 비유까지 살핀 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세 비유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 비유 간 차별성과 고유성을 살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선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만 비교해 보아도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두 비유는 비록 구조상 동일하게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이라는 공통의 구분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두 영역을 구분하는 이유와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태양이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은 가지적인 영역의 인식론적 하위 단계가 아니라 가시적인 영역의 태양으로부터 가지적인 영역의 좋음의 이데아를 유비적으로 추론하기 위해 별도로 상정된 상호 등치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해 전체로는 네 부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영역별로 분리된 상태에서 동일하게 두 부분 즉 형상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로 구분된다. 그리고 논의 내용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태양이 빛을 비추는 대낮의 실물과 눈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가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이데아와 영혼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형상 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은 유비관계를 갖는 등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위계가 있는 상하 관계를 갖는 비등치적 영역이다. 게다가 두 영역은 위계상 상하 단계로 갖고 있으면서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 단계까지 고르게 다루어지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사고’dianoia 단계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태양의 비유는 두 영역 간의 유비적 비유를 통해 기본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의 근본 특성과 위상을 드러내려는데 기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는 그 좋음의 이데아가 속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의 인식론적 단계들까지 자세하게 다루는 방식으로 오히려 하위의 인식 단계들 특히 추론적 사고가 인식의 방법에서 어떻게 형상적 앎과 관계를 지니면서 그 형상적 앎에로 상승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기본 목적이 있어 보인다.

* 선분의 비유에서 이러한 상승의 측면을 들여다보자면, 가시적 영역의 영상과 실물의 관계는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를 가지면서 다시 또 그 실물들은 윗 단계인 가지적인 영역의 ‘사고’의 모상이 된다. 즉 ‘사고’는 영상의 원본인 실물들을 다시 모상들로 이용하여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인식한 후 다시 또 그것을 발판으로 형상에로 다가간다. 즉 각각 단계는 상호 위계 관계를 가지면서 종국적으로 이데아 즉 형상들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로 이어진다. 요컨대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은 진리를 향한 연속적인 상승의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삼각형과 대각선을 기준으로 보면 ‘물에 비친 그림자’ 수준(영상eikasia 단계)에서 ‘실제 그려진 삼각형과 대각선’으로 상승하고(확신pistis 단계) 이것들은 사고에 의해 모상들로 이용되면서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로 상승한다.(사고dianoia)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증술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지성적 앎noēsis)에 이른다. 선분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위계적 단계들과 그 단계들이 갖는 인식 방법상의 상승은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세계를 향해 올라가는 도정anodos의 단계들과 상응되면서 그 철학적 의미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었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다룬다)

*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이 ‘확신’의 ‘모상’이 되고 다시 ‘확신’이 ‘사고’의 ‘모상’이 되고 그 ‘사고’를 토대로 마지막에 ‘지성적 앎’에 이르는 이러한 상승의 과정은 결국 최상의 인식 상태로서 ‘지성적 앎’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뒤집어 보면 최하의 인식 상태로서 ‘상상’eikasia조차도 인식의 출발점에서 그 상승의 디딤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상상은 그 자체로 실물의 그림자로 감정에 치우치거나 정확성에서 낮은 상태의 인식을 의미하지만 무조건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에게 늘 상존하는 상태이고 특히 어린이 단계에서는 영혼의 구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찌감치 시가(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3권에서 이미 어린 아이들의 감정적인 인식 상태를 부정하긴 커녕 오히려 그 상태에 합당한 방식에 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경우 나중에 이성을 받아들이는 데 더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401b-403c)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의 단계는 다만 정확성의 기준에서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해에서 다시 다룬다.

* ‘도형’(510b)의 그리스 원어는 ‘형상’의 뜻도 가지고 있는 eidos이다. 그런데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eidos는 일상적 용례 그대로 기하학자들이 가정으로 놓고 들어가는 ‘눈에 보이는 그려진 도형들’(510d)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eidos는 형상과 구별하여 도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510d-e를 보면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도형이되 최소한 눈에 보이지 않는 도형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지성적 앎의 단계에서 성립하는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기하학자들이 기하학적인 지식을 구성하거나 설명할 때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일단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학 교사나 기하학자들이 칠판에 도형들을 그리며 설명을 할 때 그들 모두는 칠판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라보지만 정작 머릿속으로는 그 그림들 배후에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떠올리며 그 설명을 이해한다. 요컨대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기하학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와 같은 도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도형들을 그릴 때 염두에 두고 있는 도형들은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추론적 사고 단계에서 성립하는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는 비록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지만 일단 머릿속 사유 공간 이른바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서 연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장성은 이차원·삼차원 공간이 갖는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나 형상들이 있는 세계는 그러한 연장성조차 탈각해 있다. 즉 형상계는 관계맺음의 조건으로서 연장성이 성립하지 않는, 말 그대로 형상이 형상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형상적 자체 존재로서 삼각형 또는 대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기하학자들은 사고 단계에서 어쨌거나 유클리드 공간 속 연장성을 갖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앎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이를테면 기하학자들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직각 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 각각의 제곱의 합과 같다)를 증명할 때 도형들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정리가 공리임을 증명해내는 것과 같다. ‘두 원의 접점은 하나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두 점을 잇는 직선이다’ ,‘평행하는 두 선은 만나지 않는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등 이른바 기하학적 공리들도 모두 기하학자들에 의해 선과 도형과 각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증명 가능하고 또 그렇게 증명된 공리들로부터 다른 수많은 기하학적인 결론들이 도출될 수 있다.   ‘결론teleutē을 향해 진행한다’(510b)는 말도 그러한 도출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기하학자들이나 계산술 또는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 모두,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수와 도형들 각(角)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존재하는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그 수와 도형들 각이 왜 그것으로 그렇게 있는지 그 각각의 내적 본성은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당연히 그것으로 그렇게 있다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학술을 진행한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가정’hypothesis이란 이처럼 그러한 학자들이 학술을 수행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그것으로 있다고 받아들인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놓고 들어가는 것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정들은 바로 그처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가설’과 차이가 있다. 이른바 과학에서 말하는 가설은 ‘둘 이상의 변인들 간의 관계에 관한 일종의 추측 즉, 둘 이상의 변인 또는 현상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검증되지 않은 명제’로서 추후 검증할 수 있도록 기술된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응답’이다. 그러나 이곳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가정들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가정이나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가정 모두 스스로 진리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인식상 모종의 결핍을 공통으로 안고 있다. 사고 단계의 가정들은 최소한의 학적 지위를 보전하기위해 자체적인 존재로서 형상적 앎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고, 자연과학의 가설들 역시 사실들과 정합성을 보전할  때까지만 진리성을 보전할 뿐 본질적으로 개연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자연과학은 개연성 너머 자체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고 단계의 전문 학술들이 근대 자연과학에 해당한다면 플라톤은 이미 자연과학적 진리가 왜 확률적이자 개연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궤뚫어 보고 있는 셈이다. 

*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학술들 즉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은 이와 같이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추론을 통해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이성에 의한 변증술적인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로 향하는 발판이 되고 종국적으로 일정 단계에 이르면 지성을 통해 형상들에 대한 앎과 그 총체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이른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을 ‘기하학이나 그와 유사한 전문기술들technai’로 바꾸어 부르는데(511b) 플라톤은 이러한 학술들을 나중 변증술을 설명하는 단계에 가서 변증술의 획득을 위한 예비교과목(521c-531c)에 속하는 학술들로 구체화한다.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및 화성학 등이 그것이다. 이곳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 즉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와 도형들의 본성과 존재론적 위상, 그에 따른 수학의 학적 위상 등에 대한 논의는 추후 예비교과목과 변증술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플라톤은 이제 가지적 영역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 즉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지성적 앎oēsis에 대해 언급한다.(511b-c) 플라톤은 그것을 ‘이성 자체’auos ho logos가 변증술적 대화의 능력을 통해 파악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즉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무가정적인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에 이르기까지의 출발점이자 디딤 발판 같은 것으로 삼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이 단계에서 첫 원리에 이르는 역할의 주체를 ‘이성’logos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log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설명 또는 추론을 의미하는데 플라톤은 마지막 단계의 앎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그 이성이란 표현과 지성적 앎noēsis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지성적 앎이 종국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지성nous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이성과 지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이성과 지성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추론적 사고에서부터 지성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연속적인데다가 그 과정 대부분을 기본적으로 이성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532a에서 ‘이성은 좋은 것 자체를 행해 출발하고 그것을 파악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이성은 가지적 영역 전체에 걸쳐 변증법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가정들을 출발점이자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이 지성적 앎에로의 상승을 견인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 게다가 이성은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그런 식으로 다시 결론 쪽으로 내려간다.katabainē’(511c) 이 말은 기하학자가 지성을 통해 형상을 포착한 후 올라온 방식 그대로 재정립된 사고 단계로 내려갔을 때 그의 사고 과정에서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은 변증술적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에로의 오름도 담보하지만, 그 첫 원리를 깨달은 후 다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전문 학술들의 가정들의 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그것을 통해 내리는 결론들에도 전문 학술로서 최소한의 학문적 지위를 갖게 해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성은 감각적인 것은 일체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사용해서 형상들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린다.(511b-c) 이 결론은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을 가지고 내리는 결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이다.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사고는 오름 과정의 극치에서 지성nous을 통해 형상들에서 연원하는 존재 및 인식 근거를 제공받아 내림의 과정에서 형상에 의존하되 말로 할 수 있는 학적인 앎의 기초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지성적 앎 없이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만을 토대로 다다르는 결론은 설사 연역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연역이 의존하는 상위 명제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없지만, 그 모태가 되는 첫 원리에 대한 앎을 통해 가정들의 존재 및 인식 근거가 확보될 경우, 그것들을 통해 다시 재정립된 사고 내지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은 말과 논리로 성립하는 이론적 학문으로서 비로소 기초적인 학적 보편성과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앎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나중 그러한 지성적 앎을 획득하는 변증술(531c-535a)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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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심각하게 되물어 보아야 할 의문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지금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와 같은 인식론적 위계가 조금 앞서 제5권에서 존재론에 기초해서 플라톤이 상당히 공력을 들여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한 원칙적인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5권에서는 앎epistēmē과 믿음(의견)doxa이 원천적으로 구분되면서 앎의 형상성이 배타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믿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가지적인 영역에 속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분에 비유에 와서 플라톤은, 앎의 단계는 제5권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것과 원천적으로 구분되었던 하위 인식 단계에 모종의 단계 즉 ‘사고’dianoia라는 단계를 두어 그것까지도 가지적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도대체 플라톤은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히 상당 분량의 존재론적 논의를 토대로 그토록 강조해온 앎과 믿음(의견)의 원천적 차별성을 접어 둔 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앎의 단계에 미치지 못하는 단계까지 설정하여 그것을 가지적 영역의 범위에 포함토록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5권에서 피력한 그 자신의 앎에 관한 근본 입장에 수정을 가하는 것일까 아님 추가적인 보완일까? 추가적인 보완이라면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의도하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전체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다음 강해에서 그에 관한 이러한 물음들에 필자 나름의 답을 제시하면서 선분의 비유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 –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강해(66)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507b-509b]

*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이면서 우선

‘보이기는 하지만 사유되는 것은 아닌’ 가시적(可視的)인 영역과 ‘사유νοεῖσθαι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 가시적인 세계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πολλὰ καλά과 ‘많은 좋은 것들’πολλὰ ἀγαθὰ이 있으며 그렇게 ‘각각의 것들’ἕκαστα은 ‘많은 것들’πολλὰ로 있다.

2) 지성적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αὐτὸ καλὸν와 ‘좋은 것 자체’αὐτὸ ἀγαθόν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형상(이데아)ἰδέα 하나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τιθέντες, 그 하나의 ‘형상’에 따라 각각을 ‘그것으로 있는 것’ὃ ἔστιν이라고 부른다.(507b)

* 그런 연후 우선 가시적인 세계에서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을 시각ὄψις과 비교하면서 ‘보는ὁρᾶν 힘δύναμις‘’과 ‘보이는ὁρᾶσθαι 것의 힘’이 다른 감각과 달리 뭔가 제3의 종류의 더 필요하다는 논의를 아래와 같이 전개한 후 그 제3의 종류의 것으로 빛φάος과 그 빛의 주체로서 태양ἥλιος을 끌어들인다.

1) 감각들을 만든 자δημιουργός는 다른 감각 능력에 비해 ‘보는 힘‘과 ‘보이는 힘‘을 만드는 데 비싼 값을 치렀다.(507c) 이를테면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은 듣고 지각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 없지만 ‘시각ὄψις의 힘’과 ‘보이는 것의 힘’은 뭔가를 더 필요로 한다.(507d)

2) 그 뭔가 제3의 종류의 것γένος τρίτον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ὄμμα 속에 있는 시각ὄψις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ἐν αὐτοῖς 색χρῶμα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507d) 빛은 ‘보는 감각’ἡ τοῦ ὁρᾶν αἴσθησις과 ‘보이는 힘’ ἡ τοῦ ὁρᾶσθαι δύναμις을 묶어놓은 멍에ζυγός로 다른 것들을 묶는 멍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507e-508a)

3) 하늘의 신들θεῶν 중에서 빛을 주관하여 시각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해 주고 보이는 것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태양ἥλιος이다.(508a)

4) 태양과 눈의 관계 : 시각은 태양이 아니고, 시각이 들어 있는 눈ὄμμα도 태양이 아니지만, 감각과 관련된 기관 중에서 눈은 가장 태양과 비슷하다.

5) 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치 태양에서 흘러넘친ἐπίρρυτος 것처럼 태양으로부터 분배 받아ταμιευομένην 가지는 것이다.

6) 그런데 태양은 시각의 원인αἴτια이면서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 요컨대 태양이 좋음τἀγαθὸν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좋음이 낳은 태양은 좋음 자신과 유비ἀνάλογος를 이룬다.(508b) 그러므로 ‘가지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νοητῷ τόπῳ 좋음이 지성νόος 및 사유되는 것들τὰ νοούμενα과 맺는 관계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ὁρατῷ τόπῳ 태양이 시각 및 보이는 것들τὰ ὁρώμενα과 맺는 관계와 같다(508c).

*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더 해서 위 두 영역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508c-e)

* 결국 ‘대낮의 빛’은 ‘진리와 실재’ἀλήθειά τε καὶ τὸ ὄν와 대응되면서 사물을 비추는 대낮의 빛의 주체로 ‘태양’이 제시되고, 그에 상응하여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주체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태양의 비유가 완성된다.

*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태양의 비유를 들어 가시적인 영역에서 대낮의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게 해 주듯이 좋음의 이데아(좋음의 형상, 선(善)의 이데아) 역시 ‘아는 자’(영혼)에게τῷ γιγνώσκοντι ‘아는 힘’(지성)을 부여하고ἀποδιδὸν ‘알려지는 것들’에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진리’ἀλήθεια를 제공한다.παρέχον (508e)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인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기도 하다.(508e)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빛과 시각이 ‘태양과 비슷한 것’ἡλιοειδῆ이나 태양이 아니듯이 앎과 진리 모두 ‘좋음과 비슷한 것’ἀγαθοειδῆ이지만 좋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좋음은 앎과 진리보다 한층 더 크게 ‘존중받아야 마땅한’τιμητέος 것이라 말한다.(508e-509a)

* 글라우콘은 이 말을 듣고 ‘앎과 진리를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아름다움에서 이들을 넘어선다ὑπὲρ ἐστίν니 정말 엄청난 아름다움ἀμήχανος κάλλος을 말씀하고 있다’고 놀라워하며 ‘선생님은 분명 그것을 즐거움ἡδονὴ라고 하시진 않겠지요?’라고 되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는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닮은 점(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εἰκών 유사점)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서 고찰한다.(509a)

* 즉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태양은 그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γένεσις과 성장αὔξησις과 양육τροφή도 제공하듯이, 알려지는 것들의 경우도 그것들이 ‘알려짐’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것’τὸ εἶναί, 즉 그것들의 ‘있음’οὐσία 모두 ‘좋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 받는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좋음은 ‘지위πρεσβεία와 능력δύναμις’에서 ‘있음(본질)’οὐσία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ὑπερέχοντος 것임도 확인한다.(509b)

* 그러자 글라우콘은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익살스레γελοίως ‘신령스러운 넘어섬’(신적인 우월성)δαιμονίας ὑπερβολῆς이라 대꾸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된 탓을 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강요한 대화 상대자들에게 돌린다. 그래도 글라우콘은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게속 해 주기를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현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상정했던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 지성에 의해 알려지는 가지적인 것의 영역을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킨 후 이제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5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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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d ‘빛이 없으면 눈 속에 있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en autois 색chrōma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 이 문장에서 문법상 ‘거기에’가 가리키는 것은 눈이다. 색이 사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각론에 따르면 시각과 대상 각각에 동류의 것(syngenes)이 있고 그 동류의 것이 서로 닮아 있어 교합이 이루어질 때 시각이 성립한다. 오늘날처럼 색이 눈의 망막에 비칠 때 시각이 발생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눈에도 색이 있어 그 색이 사물을 향해 나가고 동시에 사물에 있는 같은 색이 그 시선 상에서 만날 때 특정 색에 대한 지각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가시계와 가지계와 관련한 플라톤의 인식론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동류의 것과 동류의 것’, ‘닮은 것(ho homoios)과 닮은 것’끼리의 교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서 490b에서도 플라톤은 가시계의 시각이 그러하듯이 가지계에서도 “‘영혼의 이성 부분’이 대상 쪽에 ‘참으로 있는 것’(to on ontos, 이데아)에 ‘접근’하여plēsiasas 그것과 ‘교합’하여migeis ‘지성’nous과 ‘진리’alētheia를 ‘낳고’ ‘앎’epstēmē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 509a ‘선생님은 분명 그것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좋음을 엄청난 아름다움이라 말하자 보통 사람들의 경우 여전히 무제약적으로 좋은 것은 즐거움(쾌락)이라는 생각에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알면서도 짓굿게 되묻는다. 좋음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505b-c에서 이미 논박되었음에도.

* 509c ‘익살스레’geloiōs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소산 정도밖에 이야기 못한다고 하고서 좋음의 엄청난 우월성까지 이야기하자 글라우콘은 처음 말은 내숭이냐라는 듯 익살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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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선 플라톤에게 인식 내지 존재 세계는 크게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인 세계로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청각이나 미각 같은 경우 소리와 맛이 각각 귀와 혀에 주어지면 바로 청각과 미각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유독 시각의 경우에는 아무리 색깔이 눈앞에 주어져도 빛이 없으면 시각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각은 빛이라는 제3의 것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은 이처럼 시각 세계에서 빛이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듯이 가지적인 세계에서도 그 빛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지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무언가 제3의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가시 세계에서 빛 내지 태양이 하는 역할로부터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추론해 낸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서로 유비 관계(analogon)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소산 내지 이자 같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508b-c)

* 그러므로 가시계와 가지계에서 각기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상호 대응하여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

1) 우선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가시적 세계에는 ‘태양’과 시각 능력으로서 ‘눈’ 그리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많은 것들’이 있다면 가지적 세계에는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와 지성적 인식 능력으로서 ‘영혼’과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각기 하나인 ‘형상(이데아)들’이 있다.

2) 가시적 세계에서 태양은 인식 주관과 대상 쪽 모두에 각각 빛을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즉 눈에는 맑은 시각 능력 ‘보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사물에는 사물의 빛깔을 비추어 그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태양의 빛은 그 양쪽의 힘들을 마치 멍에처럼 서로 연결하여 눈에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즉 눈은 태양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빛을 받아 함께 그 빛으로 사물에서 생긴 보이는 힘과 연결하여 맑은 시각을 성립시킨다.

3)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주관인 영혼과 그 지성적 인식 대상인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마치 태양이 빛을 부여하듯 ‘진리와 실재’를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영혼은 그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지성적 인식 대상을 대뜸 알아차리는 인식(앎) 능력 즉 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이데아들 역시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각기 이데아로 드러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즉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부여받은 영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지성적인 대상들에 자연스레 고착함(머무름apereisētai)으로써 지성의 힘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epistēmē)을 즉각적으로 성립시킨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란 영혼과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진리와 실재라는 빛을 비추어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508e) 다시 말해 좋음의 이데아는 영혼에는 앎을 이데아들에는 진리성을 부여하여 가지적인 세계에서의 지성적 인식 가능성을 완결시키는 근거 즉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눈이 부셔 오랫동안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듯이(508b) 좋음의 이데아도 쉽지는 않지만, 불가지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508e)

4) 그러나 가시적인 영역에서건 가지적인 영역에서건 낮은 단계의 인식 또한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인 세계의 경우 대낮의 태양 빛이 아닌 밤의 어두운 빛이 펴져 있을 때는 눈 속에 맑은 시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침침해서 거의 눈먼 것과 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의 경우도 영혼이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 소멸하는 것에 고착할 때는 영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의견doxa만을 갖게 된다.(508d) 이와 같은 양쪽 세계에서 각기 열등한 인식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면서 각 비유들의 인식 단계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 대응되는지도 논란 거리가 된다.

5) 그런데 이제 더욱 주목할 것은 이후(508e)의 논의에 접어들면서 좋음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근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고 이 인식과 진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식과 진리와도 다르며 그것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이다.(508e) 그것은 마치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과 시각이 태양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태양 자체는 아니듯이 가지적인 영역에서도 인식과 진리가 좋음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좋음 자체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아닌 것과 같다. 좋음의 상태는 그보다 한 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509a)

*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있음’(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그저 단순한 ‘있음’ 정도가 아니라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ousia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이라는 것이다.(509b)  글라우콘이 놀라 익살을 떨며 말하듯 그것은 ‘신적인 우월성’, ‘신령스러운 넘어섬’daimonias hyperbolē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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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수행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앞서도 누누이 밝혔듯이 그 설명 자체가 비유에 기반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의 핵심 부분마저 자신의 말임에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것인 양 설정할 정도로(509b) 자신조차 처음부터 확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이자(利子) 내지 소생(506e-507a) 정도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해석은 비유가 갖는 애매성 만큼이나 학자마다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 어느 것도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플라톤의 대작 중 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의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 철학적 중요성과 체계 내 위상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난망하기는 할지라도 플라톤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에 대한 해명이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탐문이 오늘날까지도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지금부터 필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해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함에 첫 번째 부딪치는 난관은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임에도 다른 대화편에서는 좋음 자체라는 일반적인 형상 차원의 것으로만 다루어질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단초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에서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자 왕’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그곳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나라와 시민들에게 재앙이 그칠 날이 없다’(501e)는 종국의 관점에서 철학자 왕의 등장을 그 자신의 정치철학의 최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좋음의 이데아는 바로 그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인 앎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근본적으로 정치철학의 최상의 원리로서 일단 정치적 앎 내지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은 놀랍게도 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이데아들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차별의 정도에서 그 이데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월적 우월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말 그대로 이데아 가운데 하나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데아들의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로서 지위와 능력에서 다른 이데아들을 훨씬 넘어서는 가히 이데아 중 이데아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좋음의 이데아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좋음의 이데아 또한 자체적 존재로서 다른 이데아들과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초월적 우월성의 내용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질상 다른 이데아들과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서 우리는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좋음의 이데아가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재앙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주어지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회, 우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앎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앎은 존재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철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역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 간의 유기적인 내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수행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이자 정치가는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통해 우주 자연 및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제반 요인들을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정치 지도자 내지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다.

* 사실 ‘좋음’to agathon은 실천철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善)’의 의미와 적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면서 각자의 욕망을 최선으로 추구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화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절제의 덕을 통해 온전하게 확인한다. 사실 ousia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존재나 실체 또는 재산의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구성체에서 개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 또는 ‘됨됨이’로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 이데아들에게 부여하는 이른바 본질(ousia)이란 앎과 덕 등 제반 가치 존재들을 포함하여 ‘알려지는 것들’로서 이데아들이 각기 본질로 지니는 고유한 내적 됨됨이, 제 고유한 값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럿polla’으로 구성된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그 ousia란 다양한 계층들과 개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연관 하에서 각자 갖고 있어야 할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등 제반 덕목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에게 그런 ousia를 제공하고 개별 이데아는 그 총체적 연관에 대한 앎을 토대로 고유의 ousia를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개별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지위와 힘에서 그것보다 한결 넘어서는 초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자 즉 ‘변증술에 능한 자’를 본질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534b)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고유한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고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통치자로 하여금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에게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최상의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궁극의 앎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최선의 유익함을 담보해주는 총체적 앎과 실천의 궁극적 지표로서 특별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그러한 우월성을 플라톤 말기의 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론을 우주의 생성과 기원 차원에서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여럿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을 위해 ‘좋음’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오직 그것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선한 우주를 제작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제작 목표와 그 원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철학자 왕의 국가 건설 목표와 그 원리로 그대로 이어진다. 즉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은 ‘좋음’은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이상 국가를 세우면서 철학적 앎의 본으로 삼고 있는 ‘좋음의 이데아’ 바로 그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에 따라 우주 제작과정에서 우주적 조화와 공존을 구현한 그대로 철학자 왕 또한 ‘좋음의 이데아’에 따라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곧 좋음의 이데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존재 세계 내 서로 다른 이데아들의 위상을 정해주고 자연과 나라 등 여럿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또 다른 이데아인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좋음의 이데아 또한 이데아인 한, 타자와 관계 맺음이 불가한 자체적인 존재인데 그러한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이데아들의 조화와 공존에 관계할 수 있는가? 그 관계 맺음의 성질 자체가 자체적 존재로서 이데아의 근본 성격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사실은 이데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한 논의는 이데아들의 상호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있는 <소피스트>,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정의(定義) 대상의 유적 형상을 최후의 종적 형상들에까지 분할하는 <파이드로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직조술을 다루는 <정치가>의 논점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형상들의 나눔(454a)과 상호간의 결합(476a)은 <국가>에서도 일단 언급은 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는 <국가> 이후 후기 작품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여럿의 조화를 규정하고 관장하는 성질이 이데아로서 자체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까닭도 따로 없다. 왜냐하면 관계 맺음이나 조화라는 성질 자체는 마치 수적 비례가 내포하는 객관적 성질처럼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 채 자체적 존재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이데아도 3개의 직선들이 직선의 이데아로서 각기 자체성을 보전한 채 결합된 하나의 이데아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변화나 관계 맺음 내지 타자성은 그 이데아가 물질적 무규정성과 섞이거나 분여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내포 상 다른 이데아들에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고 그 이데아들의 총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나 이데아 세계에서는 다만 홀로 무(無)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자체적 존재로 있을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성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데아적 자체성을 갖는 이데아로 각기 그 자체로 있다가 다만 그 이데아들이 각기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물질적 타자성을 매개로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그 위계 관계는 현실화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각기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와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신체로 결합되면서 같은 신체 부위의 하나인 두뇌의 지배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총체적인 유기적 안정성과 조화를 보전하는 이치와 같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지휘자와 개별 연주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휘자의 이데아와 개별 연주자들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는 각기 하나의 이데아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즉 동등하게 서로 자체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그대로 있다가 오케스트라라는 관계 맺음의 장에 들어서면 비로소 타자성을 통해 역할과 위계성을 드러내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함께 생산하게 되는 격이다.

* 이렇듯 이데아들은 이데아 세계에서 서로 관계 맺음 없이 각기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 이데아들은  서로 다른  고유 성질을 각기 내포하면서 데미우르고스의 제작행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우주 자연의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그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하나이되 다른 이데아들과의 총체적 연관성과 규정성을 자체성으로 갖고 있는 또 다른 성질의 이데아인 것이다.

*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좁혀 보면 사회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의 내적 관계를 그 고유 욕망에 따라 조화롭게 공존케 하되 그것을 통해 나라 전체의 좋음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이데아인 것이다. 여럿의 세계가 상호 의존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한,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고려는 코스모스로서 우주 자연을 비롯해 인간 사회 나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 해결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련된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그것들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나라와 시민들의 유익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이면서 다른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우월성을 갖는 근본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앎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는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개별 이데아들의 고유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상호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고의 철학적 앎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신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에 언제나 전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을 가지자로 언급하고(486a) 철학 교육에서 실재to on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 봄’synopsis을 강조하는 것도(537c), 철학자 왕에게 요구되는 변증술의 궁극 목표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두는 것도(534c) 그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모음과 나눔을 통한 변증술과 관련하여 ‘모음’agein을 ‘여러 군데로 흐트러져 있는 것들을 ‘총괄하여 봄으로써’ synorōnta 하나의 이데아mia idea로 모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265d)

* 이처럼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과 그것에 대한 총괄적이고도 전면적인 답변을 간취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망의 극치에 형이상학적 탐문이 자리하고 있다면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사에서 그 형이상학적 탐문의 총체성과 영원성을 기초 지우는 지고의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상학이 말 그대로 지적 욕망의 극치에서 성립하고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또한 그 욕망의 소산인 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합리주의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의심과 탐문 하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비주의 내지 비합리주의까지 포괄하는, 말 그대로 ‘신령스러울 정도의 넘어섬’으로서  존재세계 전체에 대한 근원적 숙고로서 거대 담론과 세계관 철학의  시원적 원상paradeigma이라 할 것이다.  

* 끝으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는 플라톤의 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태양이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는 생물학적 표현과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와 본질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표현이 내용적으로 상호 등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490b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표현들을 상기하면 왜 그것들이 서로 상호 등치가 되는지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의 빛이 그리하듯 영혼과 이데아 양쪽에 진리성과 실재성을 제공하여 영혼에게는 지성nous을 이데아들에게는 본질ousia을 갖추게 하고 그들을 서로 동류의 것들로 만나게 하여 앎(인식)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490b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은 이와 동일한 내용을 이곳 태양의 비유에서 그런 것처럼 생물학적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영혼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데아)이 서로 ‘동류의 것’임을 ‘사랑’으로 포착하여 서로 ‘접근’하고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고’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되게 ‘살며’ 그것을 ‘양육’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영혼과 이데아에 미치는 이러한 과정은 플라톤 스스로 태양이 시각과 사물에 미치는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그대로 지성과 진리와 앎을 생성과 성장, 양육시키는 것과 자연스럽게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인 한 자체성을 가진 부동자임에도 어떻게 태양의 빛처럼 무언가를 제공하는 작용력을 갖는 운동자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의 빛과 같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 대상에 비춘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 빛의 작용력이 그러하듯 좋음의 이데아 또한 분명 뭔가 이데아들에 작용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가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을 ‘한층 넘어서’hyperchontos 이처럼 빛과도 같은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말은 마치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차별을 넘어 능동자로서 신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과 난점들은 철학사를 통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에 급기야 신비주의 내지 신학적 성격까지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사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능동자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유출하는 일자와 연계지어 논의되었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의 선성을 해명하는 근거로까지 인용되었다. 

*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능동적 작용력과 관련한 의문 역시 그것이 갖고 있는 내적 관계성과 총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해명될 수 있다. 앞서 누차 살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다른 개별 이데아들과 달리 그 개별 이데아들로 구성되는 우주 자연의 총체적인 진상 및 그 내적 연관과 관련한 지고의 앎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로 하여금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이데아들 전체와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고유한 위상을 갖고 그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지 즉 개별 이데아로서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앎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개별 이데아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존재하되 선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연관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같은 이데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총체성과 개별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데아들과 다르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 양육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 주관과 대상 모두에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여 능동적인 지성을 통해 앎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 점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을 본으로 삼아 지성을 통해 영원하고 선한 우주를 제작한 것처럼, 나라에서 철학 통치자들도 그러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앎을 토대로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시민들에게 본성에 맞는 고유 위상을 부여하고 모두의 유익함을 관철한다. 데미우르고스가 신으로 불리듯 철학자 왕 또한 말 그대로 지위와 능력에서 위계상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지성의 결합의 극치를 규정하고 그 실현을 담보하는 신령스러운daimonias 원리인 것이다.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존재 세계를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들로 크게 구분한 후 가시적인 영역에서 태양의 역할에 주목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지적인 영역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역할을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좋음의 이데아는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존재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위상을 갖는 존재로서 확립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 좋음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앎의 체계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어떤 인식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선분의 비유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가시계와 가지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지성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좋음의 이데아 서론(502c-507a)

 

*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501e) 플라톤은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토록 꺼내고 싶었던 생각 즉 철학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필연적 정당성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사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통치자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철학 통치자를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털어놓는 것은, 만일 그렇게 했을 경우 아예 논의 시작부터가 어렵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화자들은 물론 선입견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제4권까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제5권 이후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논의 방향을 전환한 후 그것을 계기로 이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 국면에서 플라톤은 무엇보다 우선 철학자가 세상의 평판과 달리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적합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그러한 철학 통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즉 철학 통치자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제시하려 한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제 철학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과정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의 가장 크고 중요한 배움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이데아’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가 핵심 논의 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 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자리한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제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계획했던 철학적 논의의 최정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제7권 ‘동굴의 비유’까지 이어지는 가히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502c-50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통치자들을 언급하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그랬지만 이의제기에 답하다 보니 그렇게 논의를 미룬 것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502d)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더는 주저함ὄκνος이 없이 정치체제의 구원자들οἱ σωτῆρες이자 가장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εστάτος 수호자들로서 철학 통치자들이 임명되어야 함을 과감히 선언한다.(503b) 물론 철학 통치자들 역시 지난번 언급했던(제4권 412b-415d)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과 자격들을 갖추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은 물론(503a) 기억력과 재치 활달하고νεανικός 민첩한 성향, 차분함ἡσυχία과 진중함βεβαιότης 등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503d) 특히 소크라테스는 시험과 훈련을 통해 이들의 성향이 과연 ‘가장 큰 배울 거리’μαθήματα μέγιστα도 감당할 힘이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다른 일들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503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가장 큰 배울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영혼의 세 부분을 나누면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 각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했던 때(제4권 436a ff)를 환기케 한 후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περίοδος가 있음에도 그 당시에는 엄밀성이 결여한 채로 이야기했음을 토로한다.(504a-b) 그때는 그것을 재는 척도μέτρον가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의 척도도 아님에도 당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에게 가장 불필요한 일이다.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은 더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수고만큼 배우는데도 더 큰 수고를 해야 한다.(504c)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장 크고 가장 적절한 배울 거리의 마지막 지점’τοῦ μεγίστου τε καὶ μάλιστα προσήκοντος μαθήματος ἐπὶ τέλος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덕들에 대한 밑그림일 뿐이고 이제 그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해내는 일, 즉 그것들을 가능하면 엄밀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애를 써야 하며 그 엄밀성도 가장 커야 한다고 말한다.(504d) 그런 연후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테이만토스를 향해 ‘좋음의 형상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ὄφελος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그것은 마치 좋음을 빼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음ἀγαθός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φρονεῖν하고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것’καλὸν καὶ ἀγαθὸν에 대해서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는 것이다.(505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πολλοῖ들은 좋음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φρόνησις이라 여긴다고 말한 후 후자의 경우는 그게 어떤 현명함인지를 밝혀줄 수 없어서, 결국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505b). 그들은 좋음이 뭔지 모른다고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우습게도 자기들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우리를 그걸 아는 사람인 듯이 대한다. 그것이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좋음’이란 이름을 그들이 언급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505c)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쁜 즐거움이 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동일한 것들이 좋으면서 나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505c)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δίκαια 것들과 아름다운 καλὰ 것들과 관련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택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또 그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τὰ ὄντα을 추구한다.ζητοῦσιν. 좋은 것의 경우 이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ἀτιμάζει.(505d)

* 게다가 모든 영혼이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런 뭔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ἀπομαντευομένη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λαβεῖν할 수 없어 당혹해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자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게 될 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이러한 것에 대해 그토록 깜깜한σκοτόω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505e)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좋은지’ὅπῃ ποτὲ ἀγαθά ἐστιν를 모르는 경우 별 가치가 없는οὐ ἄξιον 사람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두게 될 것이다. (506a) 그것들을 아는 수호자가 정치체제를 감독ἐπισκοπή할 때 우리의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질서 잡힐 것이다.(506b)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좋음τὸ ἀγαθὸν이 앎ἐπιστήμη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이것들 말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지를 묻는다. 이제 좋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생각 말고 자기 생각,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δόγμα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것들에 관해 씨름해 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신념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506b)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다’라고 답한다.(506c)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믿음δόξα은 그중 최고의 것αἱ βέλτισται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추하고 눈먼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성이νόος 없는 채로 ‘참인 믿음’ἀληθές τι δοξάζοντες을 갖고 눈먼 채로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좋음에 대해 직접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부디 여기에서 물러서지 말고 지금까지 정의와 절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신διῆλθες 것처럼 그런 식으로 좋음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506d)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거면 충분하고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ὅπως μὴ οὐχ οἷός τ᾽ ἔσομαι 열심히 해 봐야προθυμούμενος 흉한 꼴ἀσχήμων이나 보이고 비웃음γέλωτα을 사게 될 것 같으니 비록 이야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αὐτὸ μὲν τί ποτ᾽ ἐστὶ τἀγαθὸν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ἐάσωμεν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지닌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πλέον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괜찮다면 좋음은 말고 ‘좋음의 자식ἔκγονός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ὁμοιότατος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 아버지πατήρ에 대한 이야기διήγησις는 다음 기회에 갚아주셔도 된다고 말한다.(506e)

* 그리하여 마침내 좋음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τὸν τόκον τε καὶ ἔκγονον αὐτοῦ τοῦ ἀγαθοῦ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 나름의 생각τοῦ δοκοῦντος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50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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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b 가장 엄밀한 의미의akribestos : ‘엄밀한’의 그리스어 akribēs는 exact, accurate, precise 즉 ‘정확한’, ‘엄밀한’의 의미를 물론 갖지만 내용적으로 ‘자세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관련하여 부족이나 결핍 상태가 없는 순전하고도 완벽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03d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정치가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술 즉 통치술의 기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요소나 반대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결합해 내는 기술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는 이러한 통치술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씨줄과 날줄을 하나로 엮는 직조술의 비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반대적인 것(to anantion)이나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하나로 공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나라에서 공동체적 현실로 구현되어야 하는 한, 그것들은 동시에 하나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그러한 반대적 성향들을 이미 자신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정치가> 281a-283b 참고)

* 504 b ‘정의와 절제, 용기 및 지혜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우회로(迂廻路) perihodos : 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patrol, survey in thought) 이 우회로는 제4권 435d에서 언급되었고 곧이어서 504d에서도 ‘에돌아 가야 할περιιτέον 더 먼 길’이란 말로 다시 또 언급된다. 제4권 435d에서 그 말이 언급되는 배경을 지금의 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개인의 혼과 연결지어 논의하면서 정말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관습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덕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 수준을 넘어,  철학 통치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덕목들의 기초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덕에 관한 완벽한 논의임을 소크라테스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철학 통치자를 입에 올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논의 수준의 적절성에 따라  이상국가의 철학적 덕목으로  새롭게 다시 확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6권 지금의 논의 국면에서 그것은 논의의 척도상 결코 완벽하지도 적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언급했었던 ‘그 덕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논의가 ‘좋음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토대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504c-d에서도 그 길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이 에돌아 가야할 더 먼 길’로 언급되면서 내용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훈련을 통한 심도 있는 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이 이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우회로’perihodos의 의미는 지름길을 갈 수도 있는데 길게 돌아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학 통치자로서 다다라야 할 지고의 목표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 단순히 말해 ‘보다 길고 먼 길’을 의미한다.

* 그런데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의 관점에서 플라톤이 그 먼 길을 왜 우회의 의미를 지니는 perihodos란 말로 사용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 스스로 이미 두 가지 복합적인 의도를 갖고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나는 텍스트상 의미한 그대로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회로perihodos라는 말의 원래 뜻(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그대로, 말로 나라를 세우던 단계에서는 논의 정황상 철학 통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일단 그때 수준에 맞추어 논의하는데 만족하되, 다만 정확한 척도에 맞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 차원에서 그 기초가 될 내용들을 두루 잘 살펴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라톤은 논의의 성격과 정황을 고려하여 통치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논의를 에둘러 미뤄오다가 제6권에 와서야 불가불 털어놓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502d)

* 우회로의 의미를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가 좋음의 이데아로 향한 멀고 긴 철학적 준비와 논의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면밀한 우회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핵심 주제로 철인 통치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처음부터 당장 철학자나 철학 통치자 이야기를 꺼내들면 대화 자체가 출발조차도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 및 대화 전개의 문학적 구성(plot)상 1) 일반 공통관심사인 개인의 행복과 정의를 화두로 꺼낸 후 2)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 다음, 3) 말로 세운 이상국가론을 펼치고, 4) 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빌미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자신의 애초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길고 먼 우회로를 에둘러 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같이 자신의 속내인 철학 통치론을 <국가> 논의의 정점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후 논의의 후반부를 현실 국가론과의 비교를 통해 최초의 정의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조정해가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본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는 마치 등산할 때처럼 등정에 앞서 행하는 준비운동 단계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 올라선 정상의 모습, 내려오는 과정,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고 산행을 뒤돌아보는 과정까지, 진리라는 산을 오르는 위대한 등반여정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 505a ‘좋음의 형상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으니 말이네’ : 이곳 소크라테스의 언급만 보면 좋음의 형상과 그것의 쓸모나 유용성이 여러 번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좋음이란 말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형상으로 언급된 곳(476a)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음이 쓸모나 이로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다(<메논> 87e-88e,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형상 일반의 차원에서 언급되었거나 좋은 것과 관련한 일반적인 논의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이곳에서처럼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이곳의 언급은 아마도 대화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데이만토스와 플라톤 사이에 그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던가 아니면 좋음을 매우 특별한 형상으로 언급하기 전에 좋음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카르미데스>173 a, <에우튀데모스> 280e, 289a, <라케스> 199c, <뤼시스> 219b, <파이돈> 69b 참고)

* 506b-c ‘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이라 여긴다’ : 이 주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각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즐거움에  좋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나쁜 즐거움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 주장의 자기 당착을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혜’라는 답이 주어지자 다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너도 알고 있잖아?’라는 식으로 다시 ‘좋음’이라고 답하는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506d ‘앎이 없는 믿음, 지성이 없는 채로 참인 믿음 : 플라톤은 앎과 믿음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나중 선분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앞서 시민적 덕을 언급할 때도 그랬듯이 믿음이라도 모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다만 통치자들가 갖추어야 앎과 엄격히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눈먼 상태로 언급되고 있을 뿐, 시민적 덕 또는 시민적 용기 등 이른바 올바른 믿음(aretē doxa)은 덕에 준하는 것으로서 앎에 상당 정도 관여되어 있다.

* 507a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 : 이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tokos는 그 자체로 ‘자식’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금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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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드디어 철학 통치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좋음의 형상’(ē tou agathou idea)을 언급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좋음’(to agathon)이란 말 자체는 우리말 역본 색인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좋음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 비로소 쓸모 있고 이롭게’ 되며, 나아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이 없다’고까지(505a) 말하는 것은 이곳에 처음이고 유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좋음 말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해도 좋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505b)까지 말한다. 사실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함으로 여기지만 그들 모두 좋음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인 한 ‘그렇게 보이는 것’(ta dokouta)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ta onta)을 추구한다.(505d) 겉만 정의롭거나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있으나 겉만 좋은 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좋은 것과 관련해서만은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한다. 요컨대 좋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 좋음에 대한 추구가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에게 무제약적인 한,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들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개인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통치 이념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표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민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지고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 통치자가 알아야 하는 앎들 가운에 최고의 앎이다. 실제로 좋은 것의 획득은 진정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결코 좋음에 대해 캄캄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505e) 그러나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할까? 누군가에게 좋은 것은 누군가에게 나쁘기도 한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좋은 것은 공리주의 주장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이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는 무제약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약적으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앎이다.  그리고 철학 통치자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 모두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 통치자의 앎을 통해 진정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의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철학 통치자에게 그 사람은 강제와 징벌을  통한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기초한 교육과 설득,  교정과 변화를 통해 공동체적 조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다시 끌어 안아야 할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가히 신적인 토대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그 자체로 지고의 좋음을 구유하고 있는 영원 불변의 실재이다. 그러한 한, 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우주적 좋음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그 참되고 객관적인 앎을 구성하는 지고의 형상이 다름 아닌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을 무제약적으로 다 좋게 하는 것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에게 그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이르러야 할 지고의 앎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낭만의 끝이 어디인지, 정치적, 도덕적 이상주의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히 절망이라 할 정도의 시대 현실에서조차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회의와 데카당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이상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 <국가>에서 플라톤이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와 개인의 덕들 즉 지혜와 용기와 절제 정의의 덕들이다. 사실 그 덕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기본적인 사주덕(四柱德)으로 이미 익숙한 덕목들이다. 그러다 플라톤에 와서 그러한 덕목들은 단순한 관습상의 경험심리학적 차원을 넘어 나라와 개인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게 확립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들마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부터 단칼에 그 좋음의 이데아의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내려앉는다. 이것은 아예 <국가> 논의의 시작부터 플라톤 스스로 그 철학적 덕목들조차 전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제반 철학적 덕목들조차 넘어서는 자신의 철학에서 최고 최상의 지위를 갖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특히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좋음의 형상’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한 그 모든 덕목들의 ‘쓸모와 이로움’ 말 그대로  홍익(弘益)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지 못한다면 설사 다른 그 어떤 것들을 알아도 아무 이로움ophelos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게다가 현명함phronesis과 관련해서도 좋음에 대해서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ktēsis이 없다고도 말한다.(505b) 나중 태양의 비유를 다룰 때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지고의 우월성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하나만 미리 소개하자면 이 좋음의 이데아는 ‘앎epistēmē과 진리alētheia 보다 한층 더 아름답고kalos 그것의 원인aitia으로서 지위prosbeia와 능력dynamis에서 있음ousia을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으로까지 언급되고 있다.(508e-509b).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마지막 결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제작의 기본 목표 내지 합목정성을 오로지 ‘좋음’에서 찾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앞서도 간략히 밝혔지만 좋음의 이데아가 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토대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철학자와 철학자 통치체제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왜 가히 신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는지를 미리 짐작케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이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열심히 해 봐야 흉한 꼴이나 보이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갖는 자기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좋음의 자식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후에 펼쳐질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자신의 그 생각을 오로지 비유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른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 비유들 모두는 그가 예고한 대로 좋음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비록 플라톤 철학에서 지고의 위상을 갖는 철학적 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비유로서만 제시되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좋음’(to Platōnos agathon)이란 말이 그의 시대에서 모호한 말을 가리키는 속담으로까지 사용되었겠는가!(J. Adam. 해당 부분 참고)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이 합리주의 철학의 극치라 일컬어지면서도 지고의 철학적 원리와 관련해서는 추론과 설명(logos)을 넘어서는  이른바 변증술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포리아이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근원적 우월성은 플라톤 철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되레 탐구의 열망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플라톤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고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철학적 성과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철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 배경이 되었다.

*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전개의 이와 같은 특성상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 좋음의 이데아를 주제로 하는 차후 몇 차례 강해는 일단 해당 부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설에 우선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비유들 각각을 살피면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한 일정 부분 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비유들 전체를 살펴본 후 그것들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논의의 전반적인 구도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끝-

 

<다음 주제>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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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493a-495b]

* 다중οἱ πολλοί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철학자의 성향을 타락시키는 또 다른 집단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다중 스스로 기술의 경쟁자로 여기는 소피스트들을 꼽는다. ‘개인 보수획득술자  각각’ἕκαστος τῶν μισθαρνούντων ἰδιωτῶν으로서 소피스트들은 다중들이 모였을 때 형성되는 다중들의 신념δόγμα을 ‘지혜’σοφία라고 부른다.(493a) 이건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 센 짐승’θρέμματος μεγάλου καὶ ἰσχυροῦ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ὀργή 와 욕구ἐπιθυμί는 물론 그들이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그 모든 것을 알아내 기술τέχνη로 체계화하여συστησάμενος 그것을 지혜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493b) 그들은 이런 신념들과 욕구 중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름답거나 추한지, 좋거나 나쁜지, 또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등은 알지도 못한 채 이 모든 것들을 거대한 짐승ζῷον의 믿음δόξα에 따라 이름을 붙여 그 짐승이 기뻐하는χαίροι 것은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그 짐승이 기분 나빠하는ἄχθοιτο 것은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다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으면서, 불가피한 것τἀναγκαῖα을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그 불가피한 것이 좋은 것과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아예 본 적조차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ἄτοπος 교육자παιδευτής이다.(493c) 요컨대 그림γραφικῇ의 영역에서든 시가μουσικῇ의 영역에서든 정치πολιτικῇ의 영역에서든, 이처럼 다중의 분노ὀργή와 쾌락ἡδονή을 파악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소피스트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누군가가 다중과 어울리며 자신의 시나 다른 어떤 제작물이나 나라에 대한 봉사를 선보이면서 불가피한 ‘한도를 넘어서’πέρα 그들에게 맹종할 경우, 그것은 소위 ‘디오메데스의 필연’으로 그들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것들이 진정 좋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καταγέλαστος 만한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93d)

*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지혜는 이러한 소피스트들이나 다중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철학자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 또 ‘많은 각각의 것들’ τὰ πολλὰ ἕκαστα이 아닌 ‘각각의 것 자체’αὐτό τι ἕκαστον가 있다고 생각한다.(494a) 대중들πλῆθος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ἀδύνατος하다.(493e)

*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성향에 어떤 구원σωτηρία이 있다면 모를까 어떤 젊은이가 그 활동에 머무르면서 완성단계τέλος에까지 이르기는 절대 쉽지 않다. 그 젊은이가  ‘쉽게 배우는 능력’, ‘기억력’, ‘용기’, ‘호방함’ 등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그의 친지들과 시민들οἱ πολῖται,πολίτης은 그의 미래의 능력을 예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고 미리 아부도 떨고 추켜세우며 마냥 굽신거릴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이는 그리스인들Ἕλλην의 일들과 이방인들βαρβάροἱ의 일들을 모두 다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희망ἐλπί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결국 지성 νοῦς이 결여된 헛된 자부심σχηματισμός과 허세φρόνημα, 교만에 빠지게 된다. 특히 그가 큰 나라 시민으로 부유하고πλούσιος 혈통도 좋고γενναῖος  잘 생긴데다가εὐειδὴς 체격도 좋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494a-c) 그래서 그에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진실τἀληθῆ을 알려주면서 ”진정 지성을 갖추려면 지성에 노예 노릇을 하지δουλεύσαντι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어도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의 자연적 성향 때문에 그 이야기를 좀 알아듣고 마음을 돌려서 철학에 이끌릴 경우(494d) 그의 쓸모χρεία와 동료관계ἑταιρία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말릴 것이고 다른 한편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을 사적으로 음모를 꾸며ἐπιβουλεύοντας 공적으로 재판정ἀγών에 세울 것이다.(494e) 이렇듯 철학적 성향의 부분들 자체도, 나쁜 양육을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활동을 멀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소위 좋다고 하는 것들, 즉 부와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욱 더 타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최고의 활동에 적합한 최선의 성향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어떻게 몰락ὄλεθρος하고 파멸διαφθορά하는지 다시 말해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타락한 소수의 사람이 우수한 자질의 크기만큼 나라들에게나 개인들에게나 가장 큰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49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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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a-e : 이곳에서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정의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다중들이 말하는 지혜(sophia)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가 극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소피스트들에게 지혜는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대중의 욕구를  알아내서 체계화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불가피한 것’(tanankaia)’(493c)으로 여기는 것(대중들의 믿음(doxa)이나 신념(dogma) 혹은 물질적 필요,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디오메데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오딧세우스에게 행한 불가피한 대응 같은 것인 양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비웃음을 살만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에 따라 대중이 이러한 믿음과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아테네의 민주정 아래에 있는 이상, 대중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철학자들의 지혜와 정의,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아름답거나 정의롭다고 믿고 있는 ‘많은 각각의 것들’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이다.

* 494c-495b : 철학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정말 철학자가 그래서가 아니다.  그것은 배의 비유에서 살폈듯이,  다만 피폐한 아테네의 정치체제 즉 아테네 민주정 그 자체가  소수의 진정한 철학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물론  그 밖에 다수의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철학에 대한 나쁜 평판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나 그러한 피폐한 환경 하에서 타락한 철학자 또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자질들의 우수함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해악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저질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495b)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적 자질에 더해 부유함과 혈통, 훌륭한 외모와 체격까지 젊은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자라나면서 어떻게 헛된 자부심과 허세에 빠지게 되는지 그래서 나라와 개인에 얼마나 큰 해악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철학적으로 돌려세우는 노력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추었지만 끝내 타락한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라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실제로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는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둘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으로서  철학적 자질도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체격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는 18세 전후 포테다이아 전투에 출전했다가 소크라테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자처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철학자가 되기에는 그의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정계에 뛰어든 이후 뛰어난 능력으로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실책으로 권력에서 밀려났음에도 적대국이었던 스파르타로까지 망명하는 등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망명지에서 다시 아테네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  고도의 술책을 동반한 정치적 기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군의 능력도 자신을 영원히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결국 평생 정치적 풍운아로 살다가 기원전 404년 자객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플라톤의 대화편 <알키비아데스>, <향연>에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기본적으로 철학보다는 정치적 야망에 젖어 있던 알키비아데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를 철학에로 이끌고 가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은 대화편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알키비아데스 I> 104a-b,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I 16 1—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키비아데스’ 1. 4, 4. 1 등 참고)

* 아무려나 나라를 몰락과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에는 알키비아데스 같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젊은이가 타락하여 그 범상치 않은 뛰어남으로 오히려 나라를 더 큰 곤경으로 끌고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라를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로 자라날 젊은이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원천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시종일관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다름 아닌 아테네 민주정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체제로서 아테네 민주정이 그대로 존속하는 한, 최고의 활동에 가장 최선의 성향의 몰락과 파멸은 불 보듯 뻔하며 그에 따라 종국적으로 나라가 몰락하고 파멸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민주정일지라도 철학자 모두를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그러한 피폐한 정치체제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처음부터 신의 섭리moira와 구원sōzein에 따라(492e) 철학적 성향을 끝까지 보전하며 그것이 일러주는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불멸의 증표이다. 요컨대 민주정과 참주정을 비롯한 현실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여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들을 온전히 길러내고, 그들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 즉 철학자 왕정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플라톤이 이상국가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과제였던 것이다.

* 아무려나 이곳 논의의 목표는 그러한 철학자 왕정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이전에, 왜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나라를 파괴하는 나쁜 악당이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밝혀 철학과 철학자를 세상의 평판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이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철학적 자질들을 타락시켜 나라를 근본적으로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철학자 개인이 아닌 제도로서 민주정 그 자체임을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져다주는 배경에는 제도로서 민주정과 그 치하에서 타락한 철학자들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타락한 철학자들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이 마치 진정한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지만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는 가짜 철학자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런 연 후 철학이 비난 받은 현실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진정한 철학자들이 왜 소수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논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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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 – 497a)

 

[495c]

* 소크라테스는 이제 황량하고ἐρῆμος 불완전한ἀτελής 상태로 친족이 없는 고아ὀρφανός처럼 내버려진 철학이 그 밖의 또 어떤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인간 나부랭이ἀνθρώπιον들이 멋진 명칭들과 외관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철학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감옥εἱργμός에서 탈옥해서 신전τό ἱερό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 작업βαναυσία에서 탈출해ἀποδιδράσκοντες 철학으로 뛰어들었기ἐκπηδῶσιν 때문이다. 그것은 대머리φαλακρός에 작달막한 대장장이χαλκεύς가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자마자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생각διανόημα과 믿음δόξα에서 진실로 궤변σόφισμα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γέννα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φρόνησις은 결여한 서자νόθος를 낳을 것이다.(495c-496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걸맞고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결국 테아게스Θεάγες 등 일부의 경우를 포함해 정말 극소수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의 경우도 ‘영적인 신호’τὸ δαιμόνιον σημεῖον가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이 얼마나 즐겁고 축복된 것인지를 맛본 한편 대중의 광기μανία를 또 충분히 목도한 까닭에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마치 짐승들 사이에 떨어진 것처럼 혼자 모든 야만ἄγριος 족속에 맞서기에 충분하지도 않아, 부정의에 가담하지도 않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σύμμαχος ἐπὶ τὴν τῷ δικαίῳ에 원군으로 함께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라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겨울철χειμών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기 일만 하게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불법ἀνομία과 불경한ἀνόσιος 일들로부터 정결함καθαρός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삶을 떠날ἀπαλλαγήν 때 아름다운 희망ἐλπίς을 가지고 평안하고ἴλαος 너그러운εὐμενής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496a-e)

* 이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τὰ ἐλάχ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최대의 것τὰ μέγ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도 아니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에게 맞는προσηκούσης 정치체제를 만났다면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αὐξήσεται 사적인ἴδιος 것들과 함께 공적인κοινός 것들도 구해냈을 텐데 σώσει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49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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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5c-e : 철학이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는 텅 빈 철학의 자리에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작업으로 몸이 망가진 것처럼 영혼도 그렇게 깨지고 부서진 상태로’(495e) 자신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도 않는 철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가짜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우선은 소크라테스가 가짜 철학자를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로서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란 수공업 가문 출신으로서 부를 축적한 후 철학자 행세를 하려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그 가짜 철학자를 ‘생각과 믿음에서 진실로 궤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은 결여한 서자를 낳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을 추가로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에는 소피스트 또는 그들을 추종하며 교양인 행세를 하는 일군의 젊은이들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프로타고라스> 318e 참고)

*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플라톤이 가짜 철학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 기원전 436-338)를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소크라테스는 아울로스를 만들어 큰돈을 번 구리 세공업 가문 출신으로 그 부를 토대로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 고르기아스 등으로부터 수사학 교육을 받은 후 위대한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로서 평판을 누렸지만 정작  스스로는 ‘철학자’(philosophos)로 불리기를 바랐던(<안티도시스> 271 ff.)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소크라테스는 당대 유명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수사학 학교를 세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마케도니아와의 화친을 통해 몰락해가는 아테네를 구하려 온갖 힘을 쏟았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플라톤은 <파이드로스>(279a-b)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그에 대한 아주 짧은 평가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서도 이소크라테스를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철저히 도외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현대의 주석가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짜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를 소환하여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쏟아붓고 있다.

* 495e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 : 이소크라테스가 대머리에 작달막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그는 여늬 젊은이들 처럼 수사학을 배운 후 정계 진출을 꿈꾸었으나 목소리가 작고 소심한데다 가세까지 기울어  소장을 작성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뛰어난 수사학적 지식으로 큰  돈을 벌어 규모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버금가는 수사학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인들로 부터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받는 방식으로 말년에는 부친을 넘어설 정도로 큰 부를 이루었다고도 전해진다. (J. Adam. 해당 노트, 김봉철 <이소크라테스> 신서원 2004 참고)

*이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이후 서양 철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서양 지성사에서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라는 기록은 쉽게 접할 수 있어도 철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거의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접어들어 플라톤에 의해 다만 궤변을 일삼던 자들로 폄하되었던 소피스트들이 당대 철학사적 전환을 이끈 사상가들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에 발맞추어, 특히 근대 통일 국가를 열망하던 독일 사상계에서 이소크라테스의 범그리스주의가 크게 주목을 받은 이래, 이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당대 시대현실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관을 내세운 선구적인 철학자로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와 조화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폴리스들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아테네 제국주의와 이소크라테스가 지지했던 강대국 마케도니아 중심의 범그리스주의는 다(多)의 공존으로 표징되는 전통 그리스 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 제국주의와 범그리스주의는 알렉산더를 통해 헬레니즘적 팽창주의로 이어져 고대 사회의 붕괴를 거쳐 군사적 사상적 세계주의와 기독교의 세계동포주의와 결합하여 종래에는 거대 로마제국을 탄생시켰고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오늘날 근대 제국주의와 세계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 496a 소수의 철학자가 남게 되는 경우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우들로 1) 고귀하고 훌륭하게 자라난 사람이 망명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방해 없이 철학에 머물게 되는 경우 2) 위대한 혼을 가진 자자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국사를 깔보고 철학에 머무는 경우 3) 아주 소수의 훌륭한 성향을 가진 자가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철학에 머무는 경우 4) 테아게스처럼 병치레로 정치하기가 힘들어 하는 수 없이 철학을 하는 경우 5)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신호를 접한 경우를 들고 있다. 주석가들은 1)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시라쿠사에서 탈출해 아테네로 망명한 플라톤의 친구 디온(Dion)을, 2)의 경우는 비록 에페소스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왕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철학의 길을 택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를, 3)의 경우는 여기서처럼 신적인 은혜로 타락의 유혹을 이겨내고 철학에 머문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Phaidon) 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을(플라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4)의 경우는 테아게스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철학에 머문 사람들을, 5)의 경우는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전 어떤 때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오직 그에게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496 b-c ‘영적인 신호’ to daimonion sēmeion : daimonion은 형용사형으로서 정관사 ‘to’가 앞에 붙어 추상명사가 되면서 ‘신성’(Divinity)과 ‘신력’(divine Power)의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에게서 오는 특별한 신호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31c-d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에 대해 한 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가히 신적인 수준의 냉철한 철학적 자기 반성력을 지칭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수호신으로서 daimōn이란 말이 제10권 617e에 나오고 <파이드로스> 242b-c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제제로서 ‘익숙한 신호’(to eiōthos sēmeion)란 말이 나온다.

* 496c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 : 앞서 492e-493a에서 우리는 다중의 광기가 지배하는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것인지를 살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절망감은 그대로 이어져 민주정 체제에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건전한 행동도 할 수 없음이 처절하게 토로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겨울철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과 불경한 일들로부터 정결함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살다가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평안하고 너그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만족한 삶이라는 것이다.(496c-e)

* 이곳에서 나타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무력감, 현실 도피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이 갖는 실천적 성격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실망감마저 안겨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강해 62에서도 자세히 살폈듯이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혁명적 결론을 보다 절실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적 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이상국가론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점진적 개선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점진적 개혁이론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 현실에서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구상하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 철학자 왕의 출현을 담보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강해 62’를 다시 참조할 것)

* 플라톤의 이러한 의도는 이어지는 아데이만토스와의 대화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적인 성품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태에 대해 어찌 보면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토로하고 있다. 아데이만토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 소수의 사람이 행하는 일들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를 위로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반대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소수의 철학자들이 최대의 것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것은 앞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이 소수 철학자들의 소극적인 행동 방책에 대한 변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장차 소수 철학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적극적인 행동 방책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다 절실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이자 일종의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내심 의도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철학자들의 신념 유지를 위한 소극적인 삶의 방식을 자조 섞인 마음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걸맞은 철학자 왕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내적 성장은 물론 공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축하는 것임을 보다 절실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삶이 과연 이렇게 끝나야 할 것인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절규인 것이다. 진정 그들이 수행해야  마땅한 일은 따로 있다. 철학자의 목표는 현실 도피를 통한 유유자적한 삶이 아니라 진상에 대한 지적 인식과 실천을 통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비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비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언급을 모두 마무리하고 태세를 전환하여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을 논의 주제로 다시 꺼내 든다. – 끝 –

 

<다음 주제>

  1. 4.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497a – 502c)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1

 

[489e-493e]

* 소크라테스는 이제 뛰어난 자연적 성향φύσις을 타고 난 사람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되게πονηρὸς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렇게 못되게 된 것을 철학 탓αἰτία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를 함께 설명하려 한다.(489e). 그런데 그러한 설명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언급했던 그 훌륭하고 뛰어난καλόν τε κἀγαθὸν 사람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그 성향이 잘 발현되었을 경우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배움을 사랑하는 자’φιλομαθής로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통원하여 진리ἀλήθεια를 추구하는 사람이다.(490a), 그는 ‘있는 것’τὸ ὂν을 향해 매진ἁμιλλᾶσθαι하고 그것에 적합한 영혼의 부분으로ᾧ ψυχῆς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ο ὃ ἔστιν ἑκάστον의 본성에 접할 때까지 열정ἔρως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혼의 그 부분을 통해 ‘참으로 있는 것’과 결합하여μιγείς 지성νοῦς과 진리ἀλήθεια를 낳는다. 그리고 그는 그 앎을 가지고γνοίη ‘진실한 삶’ἀληθῶς ζῴη을 살며 진실한 양육τρέφειν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진통ὠδίς에서 벗어난다.(490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가무단χορός의 구성원들이 그러하듯 뛰어난 사람에게 따라 붙는 자연적 성향들로서 건전하고ὑγιής 정의로운 성품ἦθος과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비롯해 용기 ἀνδρεία,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 쉽게 배우는 능력εὐμάθεια, 기억력μνήμη 등을 언급한다.(490c) 이러한 서두적 언급은 철학자들이 타락했다고 비방διαβολή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들이 어떻게 왜 타락했는지를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490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1) 이러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διόλλυται, 2) 다중들에게 쓸모없다ἄχρηστος고 여겨졌던 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파멸에서 벗어나는지(490e)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면서 철학자들이 타락한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온 가짜 철학자들이 자신들에 걸맞지 않게ἀνάξιος 어떠한 방식과 활동ἐπιτήδευμα으로 잘못을 저질러 철학에게 나쁜 평판δόξα을 가져다주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91a)

* 그런데 위와 같은 3가지 논제 가운데 우선 소수ὀλίγος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에 관해 논의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놀랍게도 앞서 언급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들에 더해 아름다움κάλλος과 부πλοῦτος, 신체의 강함ἰσχὺς, 힘 있는 가문συγγένεια ἐρρωμένη,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모든 것들이 역설적으로 그 자연적 성향들을 못되게 만들어 영혼을 파멸시키고 철학을 멀리하게 하여 결국은 철학자들을 타락에 빠트린다고 말한다.(491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전체적ὅλος으로 제대로ὀρθῶς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이렇게 해서 시작된 1)의 논제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식물φυτόν이든 동물ζῷον이든 모든 씨앗σπέρμα이나 새끼들의 경우 적절한 양분τροφή이나 계절ὥρα, 장소τόπος를 얻지 못했을 경우 더 힘 있는ἐρρωμενέστερον 것일수록 그만큼 더 적절한πρεπόντων 것들을 결여하게 되어 단순히 좋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최고의 자연적 성향이 그에 맞지 않는ἀλλοτριωτέρον 양육을 받으면 그저 그런φαῦλος 성향보다 더 나쁘게 되어버린다.(491d)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가장 좋은 영혼이 나쁜 교육παιδαγωγία을 받았을 때 특별히 나쁘게 된다. 그러므로 큰 부정의τὰ μεγάλα ἀδικήματα와 극단적인ἄκρητος 못됨πονηρία은 활기찬νεανικός 자연적 성향이 양육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되었을 때 생기며, 반대로 약한ἀσθενής 자연적 성향은 큰 좋은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하고 큰 나쁜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한다.(491e) 요컨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의 경우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ἀρετὴ을 이루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신들 중에 누군가라도 도와주지 않는 한, 이번에는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49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을 타락시키는 이유 즉 그러한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누가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힌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소크라테스가 가장 나쁜 양육 주체로 꼽는 집단은 소피스트들이 아닌 다중들ὁὶ πολλοί이다. 그는 설사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해도 다중들에 비하면 정작 이렇다 할 게 없다고 말한다.(492a) 진정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러한 사적인ἰδιωτικός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μεγίστος 소피스트들 바로 다중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젊은이든 늙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들을 가장 완전하게 교육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낸다.(492b) 다중들은 민회ἐκκλησία나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극장θέατρον, 군대 막사στρατόπεδον,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σύλλογος에서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일삼는데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그 비난과 창찬의 소리가 두 배로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τὸ νέος는 그러한 비난과 칭찬에 휩쓸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적인 교육παιδεία ἰδιωτικ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아름답고καλὰ 추하다고αἰσχρὰ 주장하며, 그들이 하는 활동을 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492c) 게다가 교육자οἱ παιδευταί이자 소피스트인 다중들은 자신들의 설득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을 행동으로 강제ἀνάγκη하여 시민권을 박탈ἀτιμία하고 벌금χρῆμα이나 사형θάνατος 등으로 징계한다κολάζουσι. 그러므로 어떤 소피스트 또는 어느 누구도 이들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한 시도자체가 어리석은ἄνοια 일이다.(492d) 그리고 신적인θεῖον 성품ἦθος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들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παρὰ τὴν τούτων παιδείαν을 받아 덕ἀρετὴ과 관련해서 다른 종류의 성품이 생기는 일은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 안에서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면 그는 신의 섭리μοῖρα로 구원σώζεῖν을 받은 것이다.(49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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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e ‘못 되다’poneros : 플라톤은 이곳 문맥에서 이 말을 ‘타락phthora’, ‘철저히 파멸되다diollymi’라는 말과 함께 ‘철학적 성향의 전락 또는 붕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490e 참고) 기독교 주기도문 중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rhysai hemas apo tou ponerou라는 구절에서 ‘악’의 원어 또한 그 말이다.

* 489e ‘훌륭하고 뛰어난kalon te kagathon’ : 플라톤이 가장 훌륭한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최고의 수식어. 당연히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489e 앞서 이야기 했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 철학자의 성향과 관련하여 앞서 484a부터 487a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가리킨다. 487a에서는 그것을 기억력이 좋음, 쉽게 배움, 호방함과 정중함, 진리와 올바름, 용기와 절제 등으로 요약하고 있고, 이곳 490c에서도 건전함과 정의로움이 더해지면서 그것들 모두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 490a-d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내세우고 있는 철학자에 대한 변론은 철학자의 타고난 성향이 아무런 장애나 방해 없이 발현될 경우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관한 언급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성향이 타락하지 않고 제대로 발현 되었을 때의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논하기 전에 이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부터 먼저 제시하려는 까닭은 타락과 무관한 원래 상태부터 이야기해야 다중들이 제기하고 있는 철학자의 타락 내용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진정한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거론하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영혼의 상태를 갖는지를 규정(490d)하려 한다.

* 490b 영혼의 이 부분이 그와 결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아야 : 이곳에서는 철학자가 갖는 철학적 인식의 특성이 남녀의 결합과 출산 및 양육 과정의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다. 즉 철학자가 갖고 있는 영혼의 부분으로서 지성nous은 ‘있는 것’to on에 열정eros으로 다가가 그것과 결합mignumi(‘성교’의 뜻도 있다)하여 자식으로서 지성은 물론 진리를 출산하고 그 자식을 진실되게 양육할 때까지 진통ōdis을 멈추지 않는다. 산파술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철학자는 스스로 지성과 진리를 낳는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 지성과 진리를 낳도록 이끌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있는 것’,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는 이데아를 가리키고 ‘각각의 많은 것들’ta polla hekasta은 그 이데아가 관여된 현상계 사물 또는 사태들이다. 이처럼 영혼과 존재의 결합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대화편들(<파이드로스> 246e-247d, <향연> 210a-212a, <테아이테토스> 156a ff)에도 나타나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그 결합은 신비적인 특성을 갖고 그려진다. 어떤 이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통이 상대에게 열정으로 다가 가는 데에서 부터 결합하여 낳고 양육할 때까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철학적 인식에 다가가는 것은 물론 그것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고 보전하고 실천하는 과정 전체가 진통인 셈이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관점에서 철학은 실로 그 자체로 고통을 수반하는 고도의 지적인 탐문이자 비판적 자기 반성 그리고 실천인 것이다.(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490c 가무단chorus : 서로가 서로에게 부합하고 함께 어울리는 무리를 의미한다.

* 490d ‘일부는 쓸모없고 나머지 대다수는 완전히 나쁜 사람’ : 어떤 원전 역본에서는 ‘일부는 쓸모없고 다른 일부는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문 ‘다른 일부’에 해당하는 원문은 ‘polus(대다수)’이다. 즉 ‘다른 일부’라는 번역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진정한 소수 철학자들과 다수의 타락한 철학자들 간의 수적 대비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역이다. 원전 역본임을 자부하려면 소소하지만 이러한 부분도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490e-491a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무용성에 관한 논의에 이어 철학자의 타락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를 미리 밝힌다. 요컨대 우선 1) 철학자가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다룬다. 그다음 2) 그럼에도 그런 가운데 어떻게 소수의 철학자가 그 타락을 면하게 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가짜 철학자들이 어떤 행태를 범하면서 철학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지를 살핀다.

* 491b-491e : 이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요즘 사람들도 흔히들 말하듯 ‘똑똑한 놈이 나쁜 짓하면 덜 똑똑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초래한다.’, ‘도둑질도 더 똑똑하고 더 힘센 도둑이 더 큰 도둑질을 한다.’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설명들은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철학자가 갖고 있는 자연적 성향들의 목록을 보면 진리와 정의뿐만 아니라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타고난 성향이 뛰어난 젊은이가 타락을 했다고 말할 경우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의지가 줄어들었거나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자연적 성향 내지 능력이 줄어들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타고난 철학적 성향의 타락이란 그가 열거한 수많은 자연적 성향들 중 이를테면 진리와 정의 등 ‘있는 것’을 향한 성향의 타락에 한정해야 하고 목적이나 가치와 무관한 다른 일반 기능적 능력은 제외된다고 보아야 할까? 소크라테스도 보다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더 크고 나쁜 일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을 때(491e) 그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이미 타락한 자에게도 활기찬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일관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 중 어떤 것은 타락하고 어떤 것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곳에서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명들 모두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성향들의 예를 들고 그 성향들의 타락을 설명하려 하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더 자세하게 알려 주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하게’akribēs 말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hōlos ‘제대로’ortōs 파악해야 그것이 분명하게 이해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핀 대로 사실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분명해보이지만 자연적 성향들을 개별적인 성향들 차원에서 자세하게 나누어 설명할 경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 자연적 성향들을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의도와 설명이 어떻게 일관성을 갖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연적 성향들의 타락은 개별 성향들 차원에서 각각의 성향들의 타락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적 성향들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속에 드러나는 그 자연적 성향들 전체의 타락 다시 말해 그러한 성향들 전체의 담지자로서 철학자 자신의 인격 내지 품성ēthos의 타락을 말한다. 이를테면 용기와 절제 등이 타락한다는 것은 성향들의 개별적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향들이 다른 성향들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과연 진리와 정의의 성격을 더욱 보전하고 관철하는 쪽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기와 절제, 뛰어난 기억력과 호방함, 강건한 신체 등 모든 타고난 성향들은 개별적으로 기능적 뛰어남을 갖고 있을지라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와 정의가 아닌 거짓과 부정의를 드러내는 것들로 작용할 경우 이미 그것은 타락한 성향들이며 게다가 그 기능적 뛰어남으로 그 작용력을 배가시킬 경우 그 성향들은 더욱 타락한 성향들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자의 타락 여부는 그가 자연적 성향으로 갖고 있는 뛰어난 성향들이 어떤 양육을 통해 어떤 총체적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식물이나 동물, 씨앗의 경우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체가 나쁜 환경이나 토양에서 양육될 경우 더 강한 성향을 가진 것일수록 더 오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면 있지 그 강함 때문에 더 빨리 시들거나 죽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호박씨가 나쁘게 양육된다고 해도 병들고 허약한 호박은 될지언정 호박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철학적 성향이 나쁜 환경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다만 철학적 성향 자체는 다만 줄어들거나 약해질 뿐이지 그 반대의 다른 성향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위와 다르게 플라톤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씨앗이든 험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일수록 애초의 특성보다 훨씬 더 거칠고 억센 특성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환경 조건이 아주 나쁜 곳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일수록 그 생명체들은 건강에 좋지 않은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쁜 환경에서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나쁜 환경에 적응하여 그 나쁜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 492a에서 결론 내리고 있듯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을 이루게 되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그 성향의 뛰어남이 크면 클수록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참주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들로 태어나 참주에 의해 자신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양육되었을 경우 그 아들은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더욱 사악하고 못된poneros 참주, 타락한 참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이러한 사례는 민주정 치하에서 권력을 꿈꾸는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젊은이들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고 태어날 지라도 그가 태어난 곳이 민주정 치하라면 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타락을 면치 못할 것임을 통탄스러운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 492a ‘자네도 다중들처럼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타락한 젊은이들이 있으며, 타락시키는 일을 이렇다 할 만하게 하는 사적인 소피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다는 다중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젊은이들의 타락과 관련하여 소피스트들에게 돌릴 이렇다 할만한 탓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우리는 젊은이의 타락과 관련하여 ‘사적인idiōtikos 소피스트’ 즉 소피스트와 ‘위대한megistos 소피스트’ 즉 다중이 대비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그 발언은 그 둘을 대비하면서 다중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해 사적인 소피스트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수사적 차원에서 언급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중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다중들도 소피스트라고 부르면서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정작 소피스트들에게는 ‘사적인’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사적인’의 원어 idiōtikos가 ‘아무렇게나 하는’, ‘비전문가적인’, ‘아마추어적인’이란 의미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이 문맥에서 소피스트를 옹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그들을 폄하하고 경멸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듯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다중의 기호에만 영합하여 그들로부터 보수를 받고 살아가는’(493a) 일개 지식 장사꾼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피스트의 영향력이 주로 젊은이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다중의 영향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실로 막강하다. 요컨대 이 문맥에서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으려는 대상은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다중들인 것이다.

* 492b ‘대중’plēthos : 전번 강해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dēmos)’과 관련하여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도 쓰고 있고 여기에서처럼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이 표현들은 민중 일반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굳이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민중dēmos은 넓은 의미의 people 즉 일반 대중이라는 계급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다중hoi polloi은 ‘소수의 사람들’hoi holigoi과 대비하여 말 그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는 수적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대중plēthos 또한 원어 자체가 양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거의 동의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군중ochlos은 어원상 ‘동요하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집단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상태의 다중 또는 대중’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politēs는 도시국가 구성원 전체 즉 시민 또는 국민을 나타내는 말이다.

* 492b ‘민회나 법정이나 극장, 군대 막사,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 : 이 문맥은 앞서 언급된 ‘위대한 소피스트로서 다중’이 그저 다중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회나 법정, 극장과 공공 대중 집회’라는 모종의 정치 사회적 시스템이 일상적으로 확립된 이른바 ‘민주정 치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임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서 꼽고 있는 다중은 그냥 다중이 아니라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하고, 여기에 더해서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비난과 칭찬의 소리를 두 배로 만들 수 있는’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에서 중추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이른바 군중으로서 다중인 것이다. 사실 다중 또는 대중은 민주정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다중은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물며 철인왕정 치하의 다중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전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499e-500b) 이렇게 보면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다중 그 자체라기보다는 다중을 군중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근본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른바 정치체제로서 민주정인 것이다. 위대한 소피스트들이 지배하는 이런 민주정체 하에서는 어떠한 사적인 교육도 맥을 못 출 뿐만 아니라 일부 말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시민권 박탈이나 벌금, 사형 등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징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 그 흐름에 휩쓸려가 타락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소크라테스가 493e에서 ‘대중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때 대중 역시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가 아니라 아테네 민주정 치하의 다중에 대한 것이라 할 것이다.

* 492e-493a의 내용은 그야말로 민주정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는 절망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에 대항하여 그들과 다른 의견을 표출할 수도 없고 설사 표출을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을 받아 덕과 관련하여 인간으로서 다른 종류의 성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가히 신의 섭리가 그를 구원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 우리는 이러한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관련하여 근대 이후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토대로 아래와 같이 비판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은 때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 공론의 장을 통해 독립된 개인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현대 민주주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법 앞의 평등과 자유권을 보장하며 그것을 토대로 개인은 어떠한 국가적 폭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중이 군중화 된다고 해서 반드시 반지성적으로 휩쓸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촛불혁명이 그랬듯이 다중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고 연대하여 그 결집된 힘을 통해 정치적 억압과 불합리성을 개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중이 이와 같이 집단적인 지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현대 민주주의의 대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 플라톤이 현대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면 여기에서 표출될 정도의 절망감으로 민주정을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민주정 비판은 당대 아테네 민주정 그것도 저물어 가는 혼돈기 아테네 민주정의 피폐상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당대 민주정에 대한 그의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가 한편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적으로 뒤돌아보게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성찰을 적지 않이 담고 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다중 자체가 아니다.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플라톤은 다중 역시 철학적 교유와 소통을 통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다(499e) 문제는 아테네라는 특수한 민주정 체제가 대중의 지배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대중의 의사 결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중 자신이 아니라 아무런 공동체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저 대중들의 욕망에만 부응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의 선동 기술을 마치 지혜인 양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비록 사적인 소피스트들이지만 그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귀족 청년들과 선동정치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고 그 영향이 종국적으로 선동정치가들을 통해 다중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존재로 등극시킬 만큼 그 폐해의 크기는 가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하다. 무엇보다 아테네 민주정은 이들의 피폐한 영향력을 통제 또는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개선의 여지도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오로지 그들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배양 장치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중의 욕망을 지배하고 그들의 분노와 쾌락을 파악하는 기술을 체계화한 후 이른바 그것을 지혜라는 이름으로 사적 소송 기술 영역에서 만이 아니라 정치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결과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소송과 음해 정치적 선동이 난무하는, 거대하고 힘센 짐승들이 미치듯이 날뛰는 무도한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린 아테네 민주정과 비교하여 역사적 등장 배경은 물론 인구와 규모, 제도의 복잡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핵심 가치를 보존하려는 여러 가지 대의적 법적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다중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관한 문제 즉 공론의 장으로서 언론 영역에 한정하여 그 근본 문제점을 들여다 볼 경우, 최소한 현대 민주주의와 아테네 민주정이 갖는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론의 장 역시 여전히 아테네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다중의 욕망과 권력에 영합한 지식인들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사결정 또한 비록 다수결에 따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 권력 등 소수의 특권적 지배 엘리트들이 생산한 담론들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황금지상주의에 압도되어 있는 한, 다중들의 욕망 또한 이기적이고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는 모두가 인정하듯 거의 정글이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아예 이러한 사회의 정글화를 마치 인류 모두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문명사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상황이 이러하니 비록 현대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는 해도 최소한 현대인이 느끼는 절망감은 당대 현실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과 비교하여 그리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이 절망한 그 만큼 실제로 혼란을 거듭한 끝에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역설적으로 아테네를 멸망시킨 그 제국주의를 내세워 이른바 세계화 전략을 실행한 첫 번째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과 마케도니아가 채택한 최초의 제국주의 내지 세계화 전략은 로마를 거쳐 오늘날 근대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미국과 유럽 등 제국주의 강국들의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되살아 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치 제국주의 아테네 민주정이 걸어왔던 길 그대로 세계는 나날이 힘센 짐승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해가면서 급기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플라톤이 우려한 그대로 그것도 가히 세계적 차원에서 극우주의자들과 그들을 등에 업은 정치가들이 날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폄하했는지 그 생각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비판하고 철인왕정을 통해 정치의 지성화를 주창하게 되었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 주제>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1)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9d)

[487b-488e]

*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데’τοῦ ἐρωτᾶν καὶ ἀποκρίνεσθαι 경험이 없는ἀπειρία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논변λόγος에 의해 조금씩 잘못 이끌려가 논변의 마지막에 가서 처음 이야기와 반대되는 것에 직면하듯이 오늘날 누군가는 ‘선생님께 말로는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반박ἐναντιόομαι을 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실제로 목도 한다ἔργῳ δὲ ὁρᾶν’고 주장한다.(487b-c) 즉 ‘젊어서 철학을 시작하여 그만두지 않고 더 오래도록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완전히 못된’παμπόνηρος 사람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기이한ἀλλόκοτος 사람이 되고. 또, 그중 가장 괜찮아ἐπιεικής 보이는 사람들조차 선생님께서 찬양하시는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을 통해 그것을 접하고πάσχοντας 나면, 나라에 쓸모없는ἄχρηστος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진실τἀληθῆ이라고 수긍을 한다.(487d)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철학자들이 그처럼 나라에 쓸모없다면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제5권 473c-d)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다시 묻는다.(487e)

*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질문은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비유εἰκών에 익숙하지 않음οὐκ εἴωθας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토록 ‘증명하기 어려운’δυσαπόδεικτος 논의는 비유를 들어 그것도 여러 개를 합한 비유를 써서 변명할ἀπολογέομαι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나라와 관련해서 겪는 경험τὸ πάθος은 너무도 어려워 그러한 일을 단순히 하나로 묶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화가들이 염소, 사슴이나 그러한 것들을 몇 가지 동물을 섞어서 그리듯이 아주 고생스러울 정도의 비유로서 배ναός의 비유를 들어 여러 척의 배든 한 척의 배든,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한다.(488a)

* 앞으로 펼칠 설명의 편의상 소크라테스의 비유 전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배주인ναύκληρος은 덩치μέγεθος나 힘ῥώμη은 배에 탄 누구보다도 앞서지만, 귀가 어둡고ὑπόκωφος 근시인데다가ὁρῶντα βραχύ 항해술ναυτική과 관련된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로 짧네. 선원ναύτης들은 각자가 자신이 키(舵)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키잡이κυβερνήτης를 누가할지 서로 다투고 있네. 그 기술을 배운μαθόντα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διδάσκαλος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διδακτός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르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찢어죽일κατατέμνειν 준비까지 되어 있지.(488a-b)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πείθωσιν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ἐκβάλλοντας. 그리고 점잖은γενναῖος 배 주인을 약μανδραγόρας이나 술μέθη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συμποδίσαντας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εὐωχουμένους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488c)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πείθοντες 폭력을 가하든βιαζόμενοι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ναυτική이 있고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쓸모없다고 비난하고 말이지. 그들은 진정한 키잡이에 대해서, 진정으로 배의 지배자ὁ ἀρχικός가 되려는 사람은 한 해의 계절ὥρα들과 하늘οὐρανός과 별들ἄστρων과 바람πνεῦμα, 그리고 그 기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네.(488d) 또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τέχνη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κυβερνητική을 학습μελέτη하거나 습득λαβεῖ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이런 일들이 배에서 벌어지는 경우에, 이런 상태의 배에 탄 선원들은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μετεωροσκόπος, 수다쟁이ἀδολέσχης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489a)

* 소크라테스는 이 비유가 어떤 점에서 나라들을 닮았는지를 재확인한 후 아데이만토스에게 우선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데 대해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이 비유를 가르쳐주고, 그들이 존중받는다면 그것이 훨씬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을 설득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철학에 몸담은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οἱ πολλοί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μὴ χρωμένος 사람들을 탓해야지αἰτιᾶσθαι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489b)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89c)

*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활동ἐπιτήδευμα이 그 반대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εὐδοκιμεῖν을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장 크고 강력한 모함διαβολή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러한 활동을 한다고 자처하는φάσκοντας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덧붙인다.(48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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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7e ‘철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는 나라들에서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 :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제5권 473c-d에서 아래와 같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을 환기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에서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오직 한쪽에만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성향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제지되지 않는 한, 나라들에, 아니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최선의 정치체제가 철학자 왕정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자 정치와 철학의 결합으로서 플라톤 정치철학의 궁극적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명제로서 제6권 499b-c 및 501c에서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된다. 플라톤은 이에 따라 <국가> 논의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6권과 7권에서 바로 이 철학자 왕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가 이상 국가 건설의 실질적인 관건으로서 제시된다.

* 487e – 488a :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본적으로 문답을 통해 논증의 극한까지 밀고 들어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소크라테스는 말로 풀어 설명하기 힘든 난제들의 경우 그것의 총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자주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 신화나 속담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이어 온 아데이만토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이라 말하고 그에 대해 아데이만토스가 거꾸로 소크라테스가 비유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은 앞으로 논의될 주제들이 비유를 끌어 들어야 할 정도로 설명이 간단치 않은 문제들임을 미리 보여주는 일련의 수사적 장치라 할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이 비유를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논의 주제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예고하고 있고, 아데이만토스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답할 정도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 짐짓 우쭐하여 그렇게 반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자신을 놀린다고 핀잔을 준 후 실제로 자신이 해명해야 주제가 그야말로 ‘증명하기 어려운’ 아주 힘든 난제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무용성에 대한 반박 정도를 넘어 앞으로 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철학자왕 체제는 과거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장할 수도 말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앞서 평생의 고뇌를 통해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는 한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고백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 체제 그것은 플라톤에게 결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가히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이데아적인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철학자 왕 체제는 인간 이성이 상정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체제이자 그에 따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치체제의 이상적 원상(paradegma) 그 자체인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정치가>편에서도 최상의 이상적인 정치가로서 그와 같은 철학자 왕의 존재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진실성을 논리적 증명 대신 신화와 비유를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다.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이 <정치가> 편을 강의하면서(『박홍규 전집』, 제4권 <후기철학 강의>. ‘정치가 편’ 참고) 그 신화 자체를 다름 아닌 설명 너머의 진실이자 원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에서도 아테네 현실에서 철학자들이 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가와 관련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제7권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핵심 논제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적 논법의 토대를 이루는 문답법은 물론이려니와 앞서 그 자신 예고한 그대로 마치 주도면밀하게 미리 상정해 둔 일련의 기획으로 여겨질 정도로 의미심장한 수준의 비유, 즉 배의 비유를 비롯해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을 차례로 끌어들이고 있다.

* 488a : ‘배의 비유’에서 ‘배’는 나라(polis)를, ‘선주’는 민중(dēmos)을, ‘선원들’은 선동 정치가들(dēmagōgoi)을, ‘진정한 키잡이’(kybernētēs)는 철학자를 가리킨다. 내용에 비추어 보면 배로 비유된 이 나라는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던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를 가리킨다.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은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고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곳 배의 비유에서 플라톤은 위와 같은 다중이나 민중을 비록 배의 주인이지만 귀가 어둡고 근시안을 가진 사람으로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문맥에서는(493a, c) 아예 ‘짐승’(to zōon)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현대 비평가들 대부분은 플라톤이 민중을 매우 낮게 폄하하고 있으며 그에게 민중은 그저 우중(愚衆)에 불과하다고 시종일관 비난해왔다. 그러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비난과 공격의 초점은 선주인 민중이 아니라 선주를 겁박하여 배를 자기 멋대로 끌고 가려는 선원들 즉 선동 정치가들에 집중되어 있으며 ‘짐승’이라는 표현 또한 그러한 선동 정치가들에 의해 잘못 길들여진 상태의 민중에 한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문맥(499e-500b)에서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그곳에서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플라톤은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거친 태도를 지니게 된 이유 또한 ‘마치 잔치에서 법석을 떠는 술꾼들처럼 어울리지 않게 바깥에 있다가 부적절하게 철학에 뛰어 들어와서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 철학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그런 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민중이 처음부터 우중이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고 충분히 바르고 좋은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을 익힐 경우, 훌륭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앞서 살핀 이상 국가만을 보더라도 민중에 해당하는 대다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급과 더불어 절제의 덕을 기초로 조화롭게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본성에 맞는 삶을 온전하게 구현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누리고 동시에 나라의 공동체적 삶에도 참여하는 분별 있는 시민들이다. 사실 그의 이상 국가론에 나타난 민중 일반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생각은 플라톤이 살던 시대가 아테네에서 여성 및 노예 등은 물론 정치적 권한을 가진 시민들 상당수조차 문맹에 불과하여 도편추방 투표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플라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민중들에 대해 플라톤의 인식과 비교할만한 수준의 철학자나 정치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플라톤의 민중관에는 기본적으로 민중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귀족 엘리트의 온정주의(paternalis)적 연민 의식이 깔려 있고 그에 따라 민중을 오직 그들의 지배를 통해서만 계몽될 수 있는 수동적 집단으로 여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가> 8권에서 플라톤이 그리는 민주정의 등장 배경을 보면 오히려 민중은 스스로 생존적 저항을 토대로 지식인이나 귀족 등 기득권 과두 집단의 피폐한 지배를 뒤엎고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을 쟁취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비록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량까지는 아니지만, 민주정이 보여주듯 최소한 민중이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떠나서 일단 정치적 의사결정의 최종권한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일삼는 지식인 집단의 왜곡된 욕망에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민중을 위한답시고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들어선 30인 과두정의 횡포를 바라보며 차라리 이전 민주정의 시기가 황금으로 보일 정도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편지> 324d) 그리고 제8권을 살필 때도 다루겠지만 민주정 치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중들의 불법적인 욕망까지도 앞장서 부추기고 영합하는 선동 정치가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는 오늘날 실제로건 명분으로건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국가들이 한편으로 안고 있는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은 제8권에서 그러한 선동정치가들의 행태가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가장 참혹한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의 나락에 빠트리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등장 배경에 대한 선구적 성찰을 담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 철학자 왕정이 지향하는 정치철학에는 통치자의 숫자가 아니라 통치 권력의 지성화가 핵심 과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의 지성화를 지상과제로 여긴 플라톤이 만약 오늘날 되살아나서 파리코뮨이나 한국 민주주의에서 1980년 광주 항쟁, 촛불 혁명이 보여준 이른바 민중 집단의 지성적 양태들을 목도한다면 그는 민주주의에서도 자신의 정치 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또 다른 종류의 새롭고도 실질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관련 논의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 2017. 이정호 ‘플라톤과 정치철학’ 참고)

* ‘그 기술을 배운 적도 없고 자신의 선생이나 자신이 그 기술을 배운 기간을 제시할 수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 기술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488b) ‘누가 키를 어떻게 잡을지는 사람들이 누구를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와 상관없는 전문 기술임에도 그들은 그러한 키잡이 기술을 학습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89a) : 플라톤에게 정치는 하나의 전문적인 기술 영역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정치의 기술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배움과 습득에 의해 획득되는 전문 기술이자 그 모든 전문 기술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 기술이다. 사실 기술의 전문성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을 존중하지만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성을 배제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 선 현대 비평가들에 의하면 플라톤은 도덕 내지 실천적 정치철학적 지식을 과학적, 수학적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여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당위를 판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존재(Sein)와 당위(Sollen)는 근원적인 차이를 갖는 것이다. 즉, 어떠한 정치적 결론도 그 자체가 도덕적, 정치적이 아닌 전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의 총화가 당위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에 대한 모든 진리는 비록 발견되거나 입증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예측할 수 없는 비합리적 변수로 가득 찬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현실문제 해결에 해답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의 기술 관련한 언급에서 자주 발견되는 일반기술과 통치기술 간의 유추는 전체론(holism)적 관점에서 일반화된 잘못된 것이며 통치기술로 비유된 항해술 또한 목적선정과 관련된 기술이 아닌 이동기술일 뿐이라는 것이다.(이정호, ‘플라톤과 민주주의’, <서양고전학 연구> 1989 참고)

* 인간의 삶의 현실과 관련한 제반 문제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침의 근원이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제반 사물과 사태 및 가치에 대한 모종의 객관적이고도 총체적인 원리 내지 근원이 존재한다는 신념 위에 이른바 합리주의 정치철학이 서 있다면, 플라톤은 분명 합리주의 정치철학자이자 내용 또한 가장 선명하다고 할 정도로 급진적인 이성주의자라 말할 수 있다. 사실 피폐한 정치이념으로서 파시즘, 나치즘은 물론이려니와 헤겔 철학, 마르크스주의, 로마 가톨릭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사상, 캘빈의 제네바, 그리고 동양의 왕도정치 및 고대 유가사상이 지향하는 정치철학 역시 분분들을 관통하는 총체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보면 모두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wholism) 계열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그들의 합리주의적 가치의 본질에 대한 세계관적 규정을 달리하며 그에 기초하여 그들이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치 및 행복의 개념 또한 현격한 차이를 갖고 있다. 따라서 특정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적 주장이 표방하는 구체적 방안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비판될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여타의 주장들이 내세우는 각각 교의의 가치 및 내적 본질은 그것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다. 더욱이 공유된 목적과 본성적 욕구의 실현을 통해 협동적 삶을 추구하는 일정한 세계관 철학에 기초한 공동체적 사회관계로의 꿈은 그것이 표방하는 그 나름의 가치와 특정의 사회관계적, 민족적, 역사적 체험을 밀접히 결합하면서 사회관계상의 모순과 갈등이 심화한 국면에선 오히려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통합욕구를 객관화시킨다. 그리고 합리주의 내지 전체론이 함축하는 가치의 표준적 정당성의 객관화는 그에 기초한 인간 생활의 질서화를 위한, 그리고 이상적 사회관계에로의 인간의 진보적인 해방의식을 선도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유의미성을 보존한 채, 세계관 철학으로서의 지속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 488c ‘그들은 그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넘기라고 요구하며 온갖 짓을 다 하지. 때때로 자신들은 설득하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이 설득을 하게 될 때면, 그 다른 이들을 죽이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네. 그리고 점잖은 배 주인을 약이나 술이나 그 밖의 것으로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서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서 배를 지배하고, 술 마시고 잔치를 벌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할 법한 방식으로 항해를 하네.’ : 플라톤의 이 말은 세계사적 정치 현실에서는 물론 오늘날 한국의 정치 현실 이를테면 박정희,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정권에서 박근혜, 이명박을 거쳐 오늘날 윤석열에게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우리가 겪거나 또 현재 겪고 있는 피폐한 정치적 경험들(김대중 납치 살해 미수 사건, 전두환의 광주 민중 학살, 국풍 및 3S 등 국민 위무정책, 이명박의 다스 소유 등 권력의 사유화, 박근혜 정권 비선 실세, 문고리 3인방의 국정농단, 작금 윤석열의 무도한 행태 등)을 그야말로 마치 미리 내다보았기나 한 것처럼 실감 나도록 그려내고 있다.

* 488c 점잖은gennaios 선주 : 민중을 나타내는 선주를 플라톤은 점잖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의 그리스 원어 gennaios는 ‘출신이 좋은’, ‘고상한’의 뜻을 함께 갖고 있다. 원어가 갖는 있는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했다면 이 말은 아테네 민중이 아테네 시민(hoi politai)로서 이방인(barbaros)에 비교해서 훌륭한 출신 성분을 갖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대체로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반어적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훌륭한 민족임에도 아둔하게 선동 정치에 휩쓸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gennaios의 반어적 용례는 <국가> 454a, 363a, 544c에도 있고 <작은 히티아스> 370d, <정치가> 274e, <소피스트> 231b 등에도 있다.

* 489a ‘진정으로 키잡이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실은 별이나 구경하는 자, 수다쟁이이며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에도 철학이나 인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현실과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내뱉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인문학은 건축에 비유하면 기초이다. 기초는 건물을 굳건하게 세우는 데 필수지만, 하나같이 늘 어둠 속 바닥에 묻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번듯한 건물 안에서 먹고 살고 때론 더 번듯한 건물들을 칭송하거나 부러워할지언정 그 건물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초가 삐죽 지상으로 나오면 그것으로 건물은 다 무너진다. 그래서 기초는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누가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스스로 기뻐하며 그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기꺼이 짊어지는 마음으로서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이다. 여기 배의 비유에서도 철학자는 평판에 상관없이 진정 키잡이가 갖추어야 할 지식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자부심을 지니고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488d ‘여기에 더해서 배 주인을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자신들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을, 항해술이 있고 키잡이 기술이 있으며 배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하지.’ : 선원들에게 항해술,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 기술은 일반 전문적인 기술처럼 배우거나 습득할 수 있는 기술(technē)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선동 정치가들로 하여금 설득하든 폭력을 가하든 그들이 대중들을 지배하도록 도움을 주는 데 능한 사람들이 소유한 기술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사이비 기술자들을 선원들과 구별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능한 사람들’로 부른다. 이처럼 권력에 기생하고 그들의 주구(走狗) 역할을 하는 사이비 기술자들이 곧 소피스트들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어지는 문맥에서(493b,c) 이들 소피스트들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피스트들은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센 짐승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와 욕구를 숙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그들에게 가까이 가고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곤 하며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등 함께 지내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이런 모든 것을 알아내고서는 그는 이것을 지혜sophia라고 부르고 기술로 체계화한 후에’ 보수를 받고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인 것이다. 혹자는 대중의 기분과 욕망을 잘 알아내려는 소피스트의 태도야말로 민중에 대한 이해에 힘쓰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닌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민중을 지배하는데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도 챙기려는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태도이다. 그야말로 권력의 주구로서 권력에 부역하는데 진심인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소피스트의 태도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주류 언론 집단과 곡학아세에 목을 매고 있는 지식인 집단은 지금도 하나같이 권력에 기생하여 권력자들과 자신들의 기득권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489b ‘철학에 몸담는 사람 중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대중들에게 쓸모없게 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야지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 이 말은 철학과 철학자의 무용성을 제기하는 아데이만토스의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요컨대 철학자들이 쓸모없게 여겨지게 된 것은 철학자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아테네 민주정 아래에서 권력을 좌지우지한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에 부역한 소피스트들이 철학자들을 무시하고 박해하고 대중들 또한 그들의 주장과 태도에 휩쓸려 철학자들을 그야말로 쓸모없는 사람들로 매도한 데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자들이야말로 키잡이 기술, 즉 나라를 통치하는데 진정으로 가장 쓸모 있는 기술자임에도 그것을 못 알아보고 오히려 폭력적 수단으로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들 때문에 철학의 무용성이 마치 진실인 양 잘못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아프면 의사들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듯,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누구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문간으로 가야만 하지 다스리는 자가 진정으로 뭔가 유능한 자라면 다스림을 받을 자들에게 다스림을 받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해 왜 철학자들은 그들을 곡해하고 박해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진정한 능력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부족함도 마찬가지로 탓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사라면 먼저 환자에게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반문할 수 있다. 철학의 무용성과 관련하여 설사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잘한 것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문은 사실 역사적 소크라테스에게는 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있겠지만 정작 플라톤에게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역사적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당대 권력자들과 지식인들의 무지를 비판하고 그들을 일깨우려다 목숨까지 잃었지만, 배의 비유에서 정작 철학자는 별을 구경하는 자 아니면 그냥 수다쟁이로 그려질 뿐 저항이나 투쟁의 모습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반성적 사고에 투철한 플라톤이 철학의 무용성을 오로지 아테네 민주정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에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뭔가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물론 앞으로의 논의에 비추어 보면 플라톤은 반지성적 민주정에 기대어 민주정의 개선에 힘쓰는 일은 이미 기대 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도 플라톤은 이미 민주정을 결코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싹틔울 수 없고 그에 따라 선동 정치가들과 소피스트들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대중이 길들여지는 체제로 그리고 있고 제8권에 가면 민주정을 아예 태어날 때 본성으로 갖고 있던 자연적 소질마저 물질적인 욕망으로 획일화하여 구성원들 모두를 짐승처럼 서로를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가는 피폐한 정치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이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플라톤에게 철학자로서 진정 좀 더 잘 할 수 있고 잘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논의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아테네 민주정을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원천적으로 민주정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대안으로서 철학자왕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삶의 행적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 플라톤 자신은 민주정체의 개선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무망한 일로 여기고 있었는지가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그곳에서 ‘잘못된 정치체제의 개선을 기대하며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런 나라들의 법률 상태는 행운을 동반할 놀랄 정도의 대책 없이는 거의 구제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326a)고 고백할 정도로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플라톤은 ‘개인의 일이든 나랏일이든 모름지기 정의로운 것 모두는 철학을 통해 알아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국가> 이곳에서 언급한 말 그대로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가히 그의 정치철학적 결론이라 할 만한 신념을 이미 그때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플라톤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개선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듯이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국가>를 통해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성적 통치체제의 구현을 담보하는 주체가 철학자인 한, 바로 그 훌륭한 철학자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양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 교육론을 이상 국가론의 핵심 주제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선명성과 급진성에서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한 그의 이상주의적 철학자왕 체제는 민주정과 참주정 등 기존의 피폐한 정치체제가 플라톤 자신에게 안겨 준 커다란 충격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시켈리아에서의 정치 실험의 실패가 가져다준 근원적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처럼 플라톤은 그가 겪은 피폐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절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말년으로 가면서 정치적 현실 참여는 아예 접어 버리고 그 대신 아카데미아에 처박혀 장차 언젠가는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에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철학자왕정을 구상한 후 그것의 구현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조건을 탐색하고 교육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정치 참여와 관련한 플라톤의 태도를 현실적 개선 자체를 부정하고 고고하게 불타협적인 원칙만을 고수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점진적 개선을 위한 현실 인식도 원칙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주어졌을 때 올바른 방향 및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 또한 현실 국가를 바람직한 최상의 국가로 견인하기 위한 동력이자 방향타로 제시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가장 말년에 쓴 <법률>도 <국가>의 철학자왕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칙을 유지하되 현실적 적용 차원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라 할 것이다.

* 플라톤의 <편지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현실 정치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치적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말년 플라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일례로 플라톤은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말도 하고 지도자에게 조언도 하되, 만약 전혀 조언을 들어줄 자세가 없거나 조언 때문에 권력자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게 뻔한 경우에는 조언을 거두어들여야 한다.’(<편지들> 330d-331d 참고) 그리고 아테네가 멸망하던 절체절명의 시기 아테네의 장래를 두고 데모스테네스와 이소크라테스 등 수많은 지식인이 마케도니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때에도, 플라톤은 해외에서 나라의 입법관련 자문을 구하는 제자들의 요구는 응했을지언정 그들의 논쟁에 일체 개입하지 않은 채 아카데미아에서 오직 제자들을 교육하고 집필하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앞서 살핀 대로 민주정 아테네는 물론 필립포스의 마케도니아 역시 플라톤이 꿈꾸었던 이상 국가와는 원천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절망의 끝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그리스의 운명과 세계사의 새로운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플라톤은 이곳에서(496d) 민주정 치하 철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그 자신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바람을 피해 모두를 헤아려 보며 조용히 자기의 일을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저작들이 기울대로 기울어 버린 당대의 그리스 현실을 넘어 인류 일반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전해지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플라톤의 그 소망은 로마와 기독교 철학을 거쳐 그 후 철학사의 위대한 지표가 되었다.(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편지들>, 이정호 ‘플라톤의 생애’ 참고)

*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 하에서 최고 활동으로서 철학이 왜 원천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드디어 해명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무용성이 결코 철학과 철학자의 탓은 아니라는 게 해명되었긴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어쨌거나 처음에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처음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둘 타락하여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서 철학과 철학자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철학에 발을 들여놓거나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님에도 마치 자신이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비난과 모함은 더욱 치명적이다.(489d) 이에 따라 앞에서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일부 미리 거론되기도 했지만,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일부가 왜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와 더불어 철학과 철학자에 먹칠하는 가짜 철학자들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B.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8e-495b)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0)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a)
  철학자의 자질(제6권 484a-487a)

* 제5권에서 소크라테스는 말로 세운 나라가 실제로 행위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 나라의 통치자가 철학자일 경우 최대한 그에 가깝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대화 참가자들 모두는 철학자가 뭐길래 소크라테스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따라 과연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철학자란 진리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그 진리가 다름 아닌 언제나 한결같이 존재하는 형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 형상이 일상인들의 믿음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언급되면서 이른바 플라톤의 형상론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제6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철학자가 어떻게 나라의 수호자이자 통치자로서도 적합한지를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의 자질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철학자의 자질이 얼마나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제6권 484a-487a]

*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곧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질을 주제로 다음의 논의를 이어가려 한다. 그런데 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φύλαξ이자 지도자ἡγεμονεύς로 지혜로운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 사람은 무엇보다 ‘이 나라의 법νόμος과 수행할 일들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수호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갖추어야 할 그 능력의 기본 조건이 다름 아닌 ‘좋은 시력을 갖춘’ὀξὺ ὁρῶντα 감찰τηρεῖν 능력에 있음을 밝힌 후 그 감찰 능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484a-b)

* 수호자는 무릇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γνῶσις을 가지고 영혼ψυχῇ 안에 뚜렷한 본 παράδειγμα으로서 가장 참된 것τὸ ἀληθέστατον을 바라보고ἀποβλέποντες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κἀκεῖσε ἀεὶ ἀναφέροντές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καὶ θεώμενοι ὡς οἷόν τε ἀκριβέστατα있어야 한다.(484c)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한 이 땅에서의 법규τά νόμιμα를 설정τίθεσθαί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화가γραφεύς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τι τυφλῶν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게다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ἐμπειρία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덕ἀρετή의 다른 어떤 부분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들이다.(484d)

*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을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연적 성향φύσις 즉 자질을 갖추었기에 그러한 능력들을 두루 다 가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시작한다.(485a)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적 성향은 아래와 같다.

1) 그들은 항상 있으며ἀεὶ οὔσης 생성γένεσις과 소멸φθορά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μὴ πλανωμένης 저 존재οὐσία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배움μαθήματός과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ἀεὶ ἐρῶσιν.(485b)

2) 그들은 그 모두와 사랑에 빠져 있어서, 큰 부분이든 작은 부분이든 더 가치 있는 부분이든 덜 가치 있는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포기하지 않는다οὔτε ἀφίενται.

3) 그들은 거짓 없음ἀψεύδεια,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거짓τὸ ψεῦδος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 진리ἀλήθεια를 좋아한다στέργειν. 자연적 성향상 누군가에 대한 정욕을 가진ἐρωτικός 사람은 그 애인과 친족이고syggenes 그에게 속한oikeios 모든 것πᾶν을 반기는 것이 전적으로 필연적인 한, 진리보다 지혜σοφίᾳ와 더 가까운 것은 없다.(485c) 그러므로 진정으로 ‘배움을 사랑하는’φιλομαθής 사람은 어려서부터 곧장 모든 진리를 가능한 한 최대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

4) 그들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ἡδονή들을 추구하며 육체σῶμα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은 저버린다.(485d)

5) 그들은 분별σώφρων이 있어서 결코 ‘돈을 사랑하는’φιλοχρήματος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돈과 많은 소비δαπάνη에 몰두σπουδάζειν하지 않는다.(485e)

6)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할ἐπορέξεσθαι 영혼에게 좀스러움 σμικρολογία이란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과 모든 시간χρόνος과 모든 존재οὐσία에 대해 관조θεωρία함을 갖춘 정신διανοίᾳ을 지닌 사람에게 인간적인 삶은 뭔가 대단한μέγας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θάνατος도 무서운δεῖνος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486a) 비겁하고δειλός 자유인답지 못한ἀνελευθερίος 자연적 성향은 참된 지혜·사랑과 상관이 없다. 이에 더해 그들은 규율이 있고(품행이 단정하고)κόσμιος 허풍ἀλαζών을 떨지도 않는 사람으로서 계약을 파기하지δυσσύμβολος 않는 사람들이다.(486b)

7) 그들은 영혼이 정의롭고 온순하며ἥμερος 쉽게 배우고εὐμαθὴς 기억력μνημονικός이 좋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보존σῴζειν하는 사람이다.(486c-d)

8) 그들은 균형ἐμμετρία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므로 본래적 성향τὸ αὐτοφυής상 균형 잡히고 우아한εὔχαρις 정신διάνοια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이 그들을 있는 것 각각의 형상ἰδέα으로 이끌어 준다.(486d)

9) 있는ὄντος 것에 충분하게ἱκανῶς, 그리고 완전하게 τελέως 참여할μεταλήψεσθαι 영혼에게 이 각각의 것들은 필수적이며ἀναγκαίη 상호 연관된ἑπόμενα 것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기억력이 좋고νήμων 쉽게 배우며εὐμαθής 호방하고μεγαλοπρεπής 우아하며εὔχαρις 진리ἀληθεία, 정의δικαιοσύνη, 용기ἀνδρεία, 절제σωφροσύνη와 친구φίλος이자 친족적인συγγενής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육παιδείᾳ과 연륜ἡλικία에서 원숙해지면τελειωθεῖσι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ἐπιτρέπειν.(486e-48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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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4a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과 어떻게 다른지를 구분해보려면 논의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국가> 논의의 근본 출발점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형제의 요청(362-367)에 따라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플라톤은 이곳 말고도 이점을 <국가> 중간중간에 여러 번 환기하고 있는데(420b-c, 427d, 434d-435a, 445a-b, 427b, 545d, 588b) 이것에 주목하여 일부 학자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하는 근본 관심사가 정치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행복한 삶과 관련한 윤리학 내지 도덕철학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그에 기초하여 dikaiosynē도 ‘정의’justice보다도 ‘올바름’righteousness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 강해 서두에서 <국가>의 원제 politeia의 의미를 설명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시민적 삶, 폴리스적 삶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구분 자체가 특별히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철학과 윤리학을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배타적 이기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의식이 확립된 근대 이후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오도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형제의 요청에 응하면서 곧바로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통해 아무런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개인을 국가로 확장하는 것도 플라톤 스스로 이미 politeia 즉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개인의 삶과 시민적 삶의 방식을 별개로 여기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플라톤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영혼에 대해서도 ‘정의롭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 특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성격을 보다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 더 타당성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본 강해에서도 수시로 강조했듯이 20세기 일부 비평가들의 견해들처럼 플라톤이 개인의 삶을 국가주의에 복속시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국가>에서 정의로운 이상 국가의 통치 목표는 그 대상인 시민들 모두의 행복이며, 개인들 또한 어떤 계층에 속하건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본성에 따른 직책을 기꺼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나랏일에 참여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은 물론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도 부합하는 것임을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는 절제의 덕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시민들 각각의 행복을 담보하는 통치의 방식으로 공동체로서 국가의 이익과 안전을 구현하는 나라이다.

* 484c ‘수호자는 진실로 있는 것 각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영혼 안에 뚜렷한 본으로서 가장 참된 것을 바라보고 항상 거기에 조회하며 가능한 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구절은 우주를 제작하면서 오직 본으로서 원상만을 바라보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주를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려 하는 <티마이오스>의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고 운영하는 통치자 즉 철인 통치자의 이상적 모델인 것이다. 이곳에서 본(paradeigma)은 <티마이오스>에서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내용적으로 공히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apoblepontes) 관찰하고(theomenoi) 조회한다(anapherontes)는 말은 이데아에 대한 앎 즉 장차 다루어질 변증술의 기초가 기본적으로 철학적 직관 내지 관조(theoria)에 기초해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철학자 왕을 다루는 제6권 500c, 500e-501c에서 여기서 언급된 본에 대한 관조가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아담(J. Adam)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아에 대한 철학자의 지식이 단순히 인식적 가치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으로서도 가치가 있음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이 땅에서의 법규를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설정하고 세워진 것은 수호해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 철학자가 이상적인 나라에서 태어났을 경우 그 나라는 이미 형상에 기초하여 세워진 나라이므로 그는 단지 이미 확립된 법규를 수호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철학자들은 현실 국가의 개선을 위해 바람직한 법률을 세우고 관철하려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J. Adam 해당 노트 참고)

* 484d 화가(grapheus)들이나 눈이 먼 사람들은 위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화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술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시가 교육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에게 음악과 조각 등 조화미와 관련한 예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이곳과 10권에서 화가에 대한 비판은 화가가 형상의 모상으로서 현실의 대상을 또다시 모상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형상적 앎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 484d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empeiria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 : ‘경험’의 그리스 원어 empeiria는 영어로 ‘experience’, acquaintace with’, ‘practice, without knowledge of principles’의 뜻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도 그 말을 사전적 의미와 크게 벗어나지 않게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첫째는 넓은 의미에서 ‘~을 접해 본 적이 있음’이라는 경험 일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원리적 추론과 지식이 아닌 ‘감각적 경험이나 지각’으로 좁혀 사용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익숙함’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467d, 529e, 601c)가 있다. <국가>에서 첫째의 경우는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584e)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지식이나 감각과 상관없이 ‘접해 보았음’ 일반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로서, 위의 용례 외에 ‘앎이나 이득에서 오는 즐거움에 대한 경험’(582a), ‘문답하는 것에 대한 무경험’(apeiria)(487b), ‘진리에 대한 무체험’(apeiros)(519b), ‘교과들을 경험한 자’(533a), ‘사려분별과 덕에 대한 경험’(585e) 등의 용례가 있다. 그리고 셋째의 경우는 ‘경험과 연령에 있어서(467d), ‘기하학에 익숙한 사람’(tis emperos)(529e), ‘사용함에 있어 가장 경험이 많은 자’(601c) 등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는 경험을 ‘감각적 경험’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용례로서 대부분 원리적 추론, 실재나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거나 대비해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험이 아닌 지식을 이용함으로써’(409c), ‘권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422c), ‘전투 관련 경험과 관찰에 의해서’(467a), ‘이들이 (앎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도 남들에 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539e) 등의 용례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나라의 수호자이자 지도자들은 경험에서도 이들보다 전혀 빠지지 않고’(484d)라는 이곳의 표현 또한 이 둘째 용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경험’은 원리적 사고로서 ‘사려분별(pronesis) 또는 이성적 추론’(logos)(582a)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것은 설사 그 경험이 수없이 축적되더라도 진정한 앎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의 단계상 본질적으로 낮은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유념할 것은 비록 경험이 진정한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것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앞서 앎보다 믿음이 지식의 단계에서 저급한 수준의 것이지만 믿음이 실제 생활 영역에서 기술적 훈련을 통해 학술의 수준까지 고양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를 수호하는 수호자들에게 전쟁 전체에 대한 정책적 결정과 전략에 대한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투 역량의 향상을 위한 지휘 및 전투 등 전쟁 실무 능력의 향상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 실무 역량의 향상은 실제 전투 경험을 포함 그에 준하는 상황에서 끊임없는 반복적 관찰과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을 통해 획득되는 지성적 앎의 능력과 더불어 반복적인 연습과 체험을 통해 몸에 밸 정도로 숙달된 신체 능력이자 실천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수호자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체육을 통한 끊임없는 신체 단련은 물론 경험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도록 35세부터 50세까지 15년 동안 전쟁 지휘 및 관직의 수행 등 실무 경험을 쌓게 하고 그것을 마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자들을 통치자로 뽑아 최고의 철학 교육으로서 변증술을 익히게 하는 것이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지성적 앎은 물론이고 통치와 관련한 어떠한 경험도 쌓지 않은 자가 그저 권력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졸지에 최고 통치자가 되어 분별없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현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실로 통탄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근세 합리론과 경험론(empiricism)을 이야기할 때 ‘경험’의 의미도 이 두 번째 용례에 기초해 있다. 그래서 경험론이 말하는 지식은 경험적 감각자료들의 귀납에 의해 개념적 일반지의 지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귀납지가 귀납적 비약(inductive leap)을 전제로 성립하는 한, 플라톤이 이미 포착하고 있듯이 그것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는 개연지일 뿐이다. 플라톤에게 보편지는 형상적 앎 또는 그에 준한 수학적 기하학적 지식으로부터 연역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형상적 앎과 감각적 경험을 통한 믿음 모두 일정 수준에서 모두 각기 인간 삶의 보전에 기여하는 한, 플라톤에게 있어 그 각각은 비록 인식론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모두 각각의 영역에서 앎으로서 고유성과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이 형상적 앎을 논리적 추론 차원을 넘어선 소수 철학자들의 직관지로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왜 칸트가 근대 과학지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과학지를 ‘인간 나름의 해석’ 즉 지각에 대한 오성의 구성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늘날 과학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왜 가설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해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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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하면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직위로서 수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374d) 수호자(phylax)는 나중(414b)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taleis)로서 통치자들(hoi archontes)과 그들의 보조자들(epikouroi) 내지 협력자들(boētoi)로서 전사들(stratiōtas)을 두루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플라톤 이상 국가의 최고 지도자는 수호자에서 통치자로 좁혀졌다가 이곳에서부터 그 통치자가 다시 철인 통치자로 더욱 좁혀진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성향이나 자질도 처음 포괄적으로 제시된 이후 점차로 보다 구체적인 자질들이 추가되면서 이곳에서 철학자의 자질이 언급되고 있다. 물론 주제 상으로는 철학자가 지닌 자연적 성향이나 자질로 언급되고 있지만, 이 철학자들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서도 적합하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 만큼 내용적으로는 철학자의 자질이면서도 동시에 통치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장차 철인 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제시되고 있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지금까지 언급된 수호자와 통치자들의 자연적 성향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것들이 특히 추가되었을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호자의 성향을 다룰 때(375a-376c)와 달리 지혜의 친족이자 진리로서 ‘형상’(idea)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때에도 용기와 더불어 배움과 지혜가 주요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때 배움과 지혜에는 보조자들이 갖는 ‘올바른 믿음’(orthē doxa)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임에 비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철학자들의 배움은 ‘존재’(ousia)를 보여 줄 수 있는 ‘배움’이고(485b) 지혜를 사랑하는 것 또한 우아한 정신으로 참된 앎 곧 ‘형상’(idea)에 다가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486d) 그리고 보조자들이 아닌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을 언급할 때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dogma)과 소신(doxa)이 추가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412e) 이곳에서처럼 형상에로 이끌린다거나 그것을 열망했다거나 하는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 수호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도덕과 지식이 하나라는 전제를 염두에 둘지라도 기본적으로 도덕의 고양에 크게 방점이 주어져 언급되었다면 지금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과 관련해서는 영혼의 고양을 통해 존재 내지 형상에로 다가가는 것에(486d-e) 크게 방점이 찍혀 있다.(J. Adam 497c note 참고)

* 그러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 하나하나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위 요약문 1) :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수호자의 자질에 더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서 가장 먼저 ‘생성과 소멸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존재ousia’가 자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철인 통치의 근본 토대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에 ‘항상 사랑에 빠져 있다’함은 철학자이자 통치자로서 존재를 향한 지향이 결코 잠정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과 열정을 수반하면서 늘 항상성을 갖고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위 요약문 2) : 철학적 지향이 그러하듯 철학 통치 또한 총체성과 전면성을 가지며 어떠한 것도 따로 차별해서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철인 통치자라고 한다면 특정 계층, 특정 대상, 특정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크건 작건, 가치가 더 있건 덜 있건 간에 상관없이 통치와 관련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것들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그 문제 해결에 다가서며 동시에 그러한 노력을 결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철학적 문제의식의 전면성 내지 총체성과 더불어 문제 해결에 있어 철학 통치자에게 불타협적 끈기와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위 요약문 3) : ‘어떤 식으로도 거짓(to pseudos)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미워하며’라는 말은 플라톤이 특수한 조건에서 ‘통치자의 거짓말’이 옹호될 수 있다는 내용(414b 등)과 상충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하게 플라톤적 의미에서 ‘진리를 향한 영혼의 결여에서 나오는 무지’를 의미한다. 다만 플라톤은 엄밀한 의미의 앎을 가진 통치자가 자신이 아닌 대상의 이익을 분명하게 담보하는 전제하에서 거짓말을 허용한다. 그들은 자연적 성향상 정욕을 가진 사람이 애인을 대하듯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반기는 사람들이므로 결코 진실을 결여한 거짓과 가까이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지혜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위 요약문 4), 5) : 철학자란 배울 거리들과 그러한 모든 것을 향해서 욕구의 물길이 뚫린 사람들로서 욕구의 물길이 크게 뚫린 그만큼 영혼 그 자체의 즐거움 쪽으로 깊숙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 깊숙이 가 있는 그만큼 분별력 또한 뚜렷해져 육체로부터 생기는 즐거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은 아예 생겨날 여지가 없고 그에 따라 감각적 향락을 위한 소비도 없다.

위 요약문 6) : 철학자의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전체 모두를 항상 추구하며 그에 따라 전혀 좀스럽지 않고 반대로 호방하게 모든 시간과 모든 존재를 관조하는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다. 중국 송대 지식인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에서 노래하듯 물여아개무진야이우하선호(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 세상 만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거늘 달리 또 무엇을 부러워하랴)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이란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고 죽음도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행위에서 비겁할 이유가 없다. 공자가 70세에 이른 사람의 경지를 일컬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고 했듯이 철학자는 자유인답게 늘 자유롭게 행동하지만 어떤 행위를 해도 지혜사랑 안에 있으므로 규율에서 벗어나지 않고 허풍도 떨지 않으며 매사에 있어 사회적 연대나 계약에 어긋남이 없다.

위 요약문 7) : 여기에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로서 정의로움과 온순함에 더해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이 강조되고 있다. 1)에서 6)까지 언급된 내용들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일정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우수한 학습력과 기억력은 그것들에 비해 다분히 천부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 통치자는 그 스스로도 이미 건국신화를 통해 황금족으로 따로 구분했듯이(415b) 자격에서부터 원천적으로 소수 엘리트로 제한될 수밖에 없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위 요약문 8), 9) :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균형과 동족이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 통치자란 위와 같은 성향들을 영혼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시켜가면서 균형 잡히고 우아한 정신으로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존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통치의 궁극적 이념으로서 형상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은 기억력이 좋고 쉽게 배우며 호방하고 우아하며 진리 정의, 용기, 절제와 친구이자 친족인 사람들이다. 위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은 통치자들이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자질로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교육과 연륜에서 원숙해지면 바로 그들에게만 나라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이와 같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들은 하나같이 도덕과 지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이념으로서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마키아벨리즘과 철저히 대척적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즘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그러하듯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자 개인이나 파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그것은 당대의 참주정의 목표와 그대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설사 그러한 통속적 이해와 달리 마키아벨리즘을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의도한 그대로 ‘수단의 도덕적 선악과 관계없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치 행위에 있어 그 유용성과 효율성만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연 그러한 정치이념이 말 그대로 과연 ‘정치 현실에서 국익을 위한 공적 권력의 성공적인 유지와 관리를 담보’해왔는지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근대 이후 개인적인 관계에서건 계층 간 나라 간 관계에서건 배타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이른바 냉혹한 현실에서 그것은 나름 성공적인 평가를 받아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평가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치 현실에 대한 단기적 진단에 토대를 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그러한 처방은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거나 치유하기보다는 그 질곡을 더욱 부채질하고 강화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배타적 자국 이기주의와 패권주의에 토대를 둔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불평등의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원천적으로 국제간 평화 공존이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이른바 나라이건 개인이건 ‘신의와 약속’은 자기 보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며 오로지 살길은 각자도생하며 각자 의심의 눈을 부릅뜨고 배타적 경쟁력을 갖는 힘을 키우는 것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을 견인한 산업혁명은 오늘날 막대한 자본력과 정보 통신 기술의 융합을 토대로 하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개인 간 계층 간 나라 간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를 마치 문명 발전이 수반하는 불가피한 실재로 정당화하면서 나날이 그 끝을 모를 정도로 기세를 떨쳐가고 있다. 그 최전선에 도구적 지식인들이 창궐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소한 통속적인 의미에서 오늘날 마키아벨리즘은 강대한 나라에게는 타국에 대한 패권적 억압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가 되어 불평등한 국제질서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반대로 약소국에서는 정치권력의 폭압성과 기득권 세력의 피폐성을 정당화하고 약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열패성을 마치 숙명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구 환경 및 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초래한 생태적 위기는 강대국 약소국을 막론하고 세계 시민들 모두를 앞이 빤히 보일 정도의 문명적 재앙으로 점점 더 몰아가고 있다. 게다가 정치 영역에서도 미국의 트럼프 등을 비롯한 극우주의자들이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고 서구에서 쥐꼬리만큼이나마 연명하고 있었던 톨레랑스도 이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윤석열이란 무도한 자가 검찰, 언론, 종교 등 강고한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형식 민주주의의 약점을 이용하여 통치 권력을 장악한 후 하루가 멀게 반민중적 횡포를 일삼고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이끈 민중의 저력을 보여주듯 24년 3월 현재 다가올 총선을 앞두고 피폐한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가 나날이 커지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 사회적 진보의 전망은 물질문명에 눈이 멀어 문명적 재앙을 선도하는 초국적 자본과 각 나라의 기득권 세력이 갖는 위세 등등함에 비하면 여전히 너무도 미약한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혁명적 변화의 시작이 민초들의 자각에서부터 시작했듯이 시민 모두가 담론 생산자가 되어 비판적 담론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조직화해가면서 그 씨앗을 더욱 크게 키우고 더욱 넓게 퍼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한 지식인들의 낭만적 이상론으로 불리면서 그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플라톤이 여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진리를 향해 터져 나오는 욕구의 물길처럼 이상을 향한 인간의 정신과 의지가 내뿜는 힘은 결코 현실에 압도되거나 줄어들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의 영역에서건 현실 분석의 영역에서건 마키아벨리즘의 냉철함과 영악함을 크게 압도하는 진보에 대한 절실한 열망을 토대로 철저함과 진지함을 하나같이 보전하고 키워가면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견인해 나갈 것이다. 정치의 지성화를 본질로 하는 플라톤의 관점은 분명 원리적 사고의 측면에서 그러한 진보적 담론 형성과 투쟁에 일조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정치철학이 간과하고 있는 문명과 인간 본성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플라톤의 성찰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의 발전과 변화를 꿈꾸며 고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시 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이란 게 결코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상수도 진실도 아니라는 것을 큰 울림으로 일깨워주고 있다. 세계 사상사의 전체 흐름이 보여주듯이 현대 물질문명 각 영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개별적인 분석과 미시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시대의 모순을 딛고 문명의 전환을 꿈꾸면서 그 모든 고려 요소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아우르고 통합하는 형이상학적 거대 담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형이상학이 매몰된 현금의 철학적 정황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생태적 연대와 소통을 기반으로 세계관 차원에서 문명의 전환을 모색하는 이 시대의 한국 철학자 이규성(李圭成, 1952-2021)의 철학이 필자에게 빛나게 다가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 그러나 철학자의 자질이 통치자의 자질로도 유효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마치 철학에 대한 현대인의 의구심을 선구적으로 궤 뚫어 보기나 한 듯이 이내 아데이만토스의 반박에 부딪친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그와 같이 주장을 해도 현실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설사 그러한 자질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철학자들 대다수가 스스로 그러한 자질들을 나라의 공적 이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이들이 되거나 반대로 그 소질들을 개인의 이익과 영달에 이용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의 그러한 지적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현재의 상황에서 철학자가 그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유를 냉정한 눈으로 분석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임을 철저히 밝혀내야 철학자에 대한 현실 인식을 온전하게 바로잡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

다음 강해 B. 3. 철학이 비난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여겨지는 이유(487b-488e)

2) 철학자들이 스스로 타락하는 이유(488e-495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