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1.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최상의 배움, 좋음의 이데아 서론(502c-506b)

 

*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501e) 플라톤은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토록 꺼내고 싶었던 생각 즉 철학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필연적 정당성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사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통치자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철학 통치자를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털어놓는 것은, 만일 그렇게 했을 경우 아예 논의 시작부터가 어렵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화자들은 물론 선입견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제4권까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제5권 이후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논의 방향을 전환한 후 그것을 계기로 이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 국면에서 플라톤은 무엇보다 우선 철학자가 세상의 평판과 달리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적합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그러한 철학 통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즉 철학 통치자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제시하려 한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제 철학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과정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의 가장 크고 중요한 배움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이데아’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가 핵심 논의 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 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자리한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제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계획했던 철학적 논의의 최정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제7권 ‘동굴의 비유’까지 이어지는 가히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502c-506b]

* 소크라테스는 앞서 통치자들을 언급하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그랬지만 이의제기에 답하다 보니 그렇게 논의를 미룬 것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502d)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더는 주저함ὄκνος이 없이 정치체제의 구원자들οἱ σωτῆρες이자 가장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εστάτος 수호자들로서 철학 통치자들이 임명되어야 함을 과감히 선언한다.(503b) 물론 철학 통치자들 역시 지난번 언급했던(제4권 412b-415d)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과 자격들을 갖추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은 물론(503a) 기억력과 재치 활달하고νεανικός 민첩한 성향, 차분함ἡσυχία과 진중함βεβαιότης 등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503d) 특히 소크라테스는 시험과 훈련을 통해 이들의 성향이 과연 ‘가장 큰 배울 거리’μαθήματα μέγιστα도 감당할 힘이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다른 일들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503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가장 큰 배울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영혼의 세 부분을 나누면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 각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했던 때(제4권 436a ff)를 환기케 한 후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περίοδος가 있음에도 그 당시에는 엄밀성이 결여한 채로 이야기했음을 토로한다.(504a-b) 그때는 그것을 재는 척도μέτρον가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의 척도도 아님에도 당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에게 가장 불필요한 일이다.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은 더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수고만큼 배우는데도 더 큰 수고를 해야 한다.(504c)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장 크고 가장 적절한 배울 거리의 마지막 지점’τοῦ μεγίστου τε καὶ μάλιστα προσήκοντος μαθήματος ἐπὶ τέλος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덕들에 대한 밑그림일 뿐이고 이제 그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해내는 일, 즉 그것들을 가능하면 엄밀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애를 써야 하며 그 엄밀성도 가장 커야 한다고 말한다.(504d) 그런 연후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테이만토스를 향해 ‘좋음의 형상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ὄφελος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그것은 마치 좋음을 빼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음ἀγαθός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φρονεῖν하고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것’καλὸν καὶ ἀγαθὸν에 대해서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는 것이다.(505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πολλοῖ들은 좋음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φρόνησις이라 여긴다고 말한 후 후자의 경우는 그게 어떤 현명함인지를 밝혀줄 수 없어서, 결국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505b). 그들은 좋음이 뭔지 모른다고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우습게도 자기들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우리를 그걸 아는 사람인 듯이 대한다. 그것이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좋음’이란 이름을 그들이 언급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505c)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쁜 즐거움이 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동일한 것들이 좋으면서 나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505c)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δίκαια 것들과 아름다운 καλὰ 것들과 관련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택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또 그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τὰ ὄντα을 추구한다.ζητοῦσιν. 좋은 것의 경우 이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ἀτιμάζει.(505d)

* 게다가 모든 영혼이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런 뭔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ἀπομαντευομένη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λαβεῖν할 수 없어 당혹해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자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게 될 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이러한 것에 대해 그토록 깜깜한σκοτόω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505e)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좋은지’ὅπῃ ποτὲ ἀγαθά ἐστιν를 모르는 경우 별 가치가 없는οὐ ἄξιον 사람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두게 될 것이다. (506a) 그것들을 아는 수호자가 정치체제를 감독ἐπισκοπή할 때 우리의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질서 잡힐 것이다.(506b)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좋음τὸ ἀγαθὸν이 앎ἐπιστήμη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이것들 말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지를 묻는다. 이제 좋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생각 말고 자기 생각,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δόγμα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것들에 관해 씨름해 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신념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506b)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다’라고 답한다.(506c)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믿음δόξα은 그중 최고의 것αἱ βέλτισται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추하고 눈먼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성이νόος 없는 채로 ‘참인 믿음’ἀληθές τι δοξάζοντες을 갖고 눈먼 채로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좋음에 대해 직접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부디 여기에서 물러서지 말고 지금까지 정의와 절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신διῆλθες 것처럼 그런 식으로 좋음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506d)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거면 충분하고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ὅπως μὴ οὐχ οἷός τ᾽ ἔσομαι 열심히 해 봐야προθυμούμενος 흉한 꼴ἀσχήμων이나 보이고 비웃음γέλωτα을 사게 될 것 같으니 비록 이야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αὐτὸ μὲν τί ποτ᾽ ἐστὶ τἀγαθὸν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ἐάσωμεν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지닌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πλέον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괜찮다면 좋음은 말고 ‘좋음의 자식ἔκγονός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ὁμοιότατος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 아버지πατήρ에 대한 이야기διήγησις는 다음 기회에 갚아주셔도 된다고 말한다.(506e)

* 그리하여 마침내 좋음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τὸν τόκον τε καὶ ἔκγονον αὐτοῦ τοῦ ἀγαθοῦ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 나름의 생각τοῦ δοκοῦντος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50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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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b 가장 엄밀한 의미의akribestos : ‘엄밀한’의 그리스어 akribēs는 exact, accurate, precise 즉 ‘정확한’, ‘엄밀한’의 의미를 물론 갖지만 내용적으로 ‘자세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관련하여 부족이나 결핍 상태가 없는 순전하고도 완벽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03d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정치가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술 즉 통치술의 기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요소나 반대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결합해 내는 기술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는 이러한 통치술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씨줄과 날줄을 하나로 엮는 직조술의 비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반대적인 것(to anantion)이나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하나로 공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나라에서 공동체적 현실로 구현되어야 하는 한, 그것들은 동시에 하나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그러한 반대적 성향들을 이미 자신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정치가> 281a-283b 참고)

* 504 b ‘정의와 절제, 용기 및 지혜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우회로(迂廻路) perihodos : 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patrol, survey in thought) 이 우회로는 제4권 435d에서 언급되었고 곧이어서 504d에서도 ‘에돌아 가야 할περιιτέον 더 먼 길’이란 말로 다시 또 언급된다. 제4권 435d에서 그 말이 언급되는 배경을 지금의 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개인의 혼과 연결지어 논의하면서 정말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관습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덕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 수준을 넘어,  철학 통치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덕목들의 기초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덕에 관한 완벽한 논의임을 소크라테스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철학 통치자를 입에 올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논의 수준의 적절성에 따라  이상국가의 철학적 덕목으로  새롭게 다시 확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6권 지금의 논의 국면에서 그것은 논의의 척도상 결코 완벽하지도 적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언급했었던 ‘그 덕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논의가 ‘좋음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토대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504c-d에서도 그 길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이 에돌아 가야할 더 먼 길’로 언급되면서 내용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훈련을 통한 심도 있는 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이 이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우회로’perihodos의 의미는 지름길을 갈 수도 있는데 길게 돌아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학 통치자로서 다다라야 할 지고의 목표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 단순히 말해 ‘보다 길고 먼 길’을 의미한다.

* 그런데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의 관점에서 플라톤이 그 먼 길을 왜 우회의 의미를 지니는 perihodos란 말로 사용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 스스로 이미 두 가지 복합적인 의도를 갖고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나는 텍스트상 의미한 그대로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회로perihodos라는 말의 원래 뜻(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그대로, 말로 나라를 세우던 단계에서는 논의 정황상 철학 통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일단 그때 수준에 맞추어 논의하는데 만족하되, 다만 정확한 척도에 맞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 차원에서 그 기초가 될 내용들을 두루 잘 살펴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라톤은 논의의 성격과 정황을 고려하여 통치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논의를 에둘러 미뤄오다가 제6권에 와서야 불가불 털어놓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502d)

* 우회로의 의미를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가 좋음의 이데아로 향한 멀고 긴 철학적 준비와 논의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면밀한 우회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핵심 주제로 철인 통치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처음부터 당장 철학자나 철학 통치자 이야기를 꺼내들면 대화 자체가 출발조차도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 및 대화 전개의 문학적 구성(plot)상 1) 일반 공통관심사인 개인의 행복과 정의를 화두로 꺼낸 후 2)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 다음, 3) 말로 세운 이상국가론을 펼치고, 4) 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빌미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자신의 애초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길고 먼 우회로를 에둘러 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같이 자신의 속내인 철학 통치론을 <국가> 논의의 정점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후 논의의 후반부를 현실 국가론과의 비교를 통해 최초의 정의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조정해가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본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는 마치 등산할 때처럼 등정에 앞서 행하는 준비운동 단계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 올라선 정상의 모습, 내려오는 과정,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고 산행을 뒤돌아보는 과정까지, 진리라는 산을 오르는 위대한 등반여정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 505a ‘좋음의 형상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으니 말이네’ : 이곳 소크라테스의 언급만 보면 좋음의 형상과 그것의 쓸모나 유용성이 여러 번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좋음이란 말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형상으로 언급된 곳(476a)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음이 쓸모나 이로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다(<메논> 87e-88e,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형상 일반의 차원에서 언급되었거나 좋은 것과 관련한 일반적인 논의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이곳에서처럼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이곳의 언급은 아마도 대화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데이만토스와 플라톤 사이에 그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던가 아니면 좋음을 매우 특별한 형상으로 언급하기 전에 좋음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카르미데스>173 a, <에우튀데모스> 280e, 289a, <라케스> 199c, <뤼시스> 219b, <파이돈> 69b 참고)

* 506d ‘앎이 없는 믿음, 지성이 없는 채로 참인 믿음 : 플라톤은 앎과 믿음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나중 선분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앞서 시민적 덕을 언급할 때도 그랬듯이 믿음이라도 모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다만 통치자들가 갖추어야 앎과 엄격히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눈먼 상태로 언급되고 있을 뿐, 시민적 덕 또는 시민적 용기 등 이른바 올바른 믿음(aretē doxa)은 덕에 준하는 것으로서 앎에 상당 정도 관여되어 있다.

* 507a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 : 이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tokos는 그 자체로 ‘자식’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금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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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드디어 철학 통치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좋음의 형상’(ē tou agathou idea)을 언급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좋음’(to agathon)이란 말 자체는 우리말 역본 색인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좋음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 비로소 쓸모 있고 이롭게’ 되며, 나아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이 없다’고까지(505a) 말하는 것은 이곳에 처음이고 유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좋음 말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해도 좋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505b)까지 말한다. 사실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함으로 여기지만 그들 모두 좋음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인 한 ‘그렇게 보이는 것’(ta dokouta)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ta onta)을 추구한다.(505d) 겉만 정의롭거나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있으나 겉만 좋은 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좋은 것과 관련해서만은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한다. 요컨대 좋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 좋음에 대한 추구가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에게 무제약적인 한,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들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개인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통치 이념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표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민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지고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 통치자가 알아야 하는 앎들 가운에 최고의 앎이다. 실제로 좋은 것의 획득은 진정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결코 좋음에 대해 캄캄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505e) 그러나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할까? 누군가에게 좋은 것은 누군가에게 나쁘기도 한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좋은 것은 공리주의 주장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이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는 무제약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약적으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앎이다.  그리고 철학 통치자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 모두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 통치자의 앎을 통해 진정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의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철학 통치자에게 그 사람은 강제와 징벌을  통한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기초한 교육과 설득,  교정과 변화를 통해 공동체적 조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다시 끌어 안아야 할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가히 신적인 토대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그 자체로 지고의 좋음을 구유하고 있는 영원 불변의 실재이다. 그러한 한, 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우주적 좋음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그 참되고 객관적인 앎을 구성하는 지고의 형상이 다름 아닌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을 무제약적으로 다 좋게 하는 것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에게 그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이르러야 할 지고의 앎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낭만의 끝이 어디인지, 정치적, 도덕적 이상주의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히 절망이라 할 정도의 시대 현실에서조차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회의와 데카당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이상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 <국가>에서 플라톤이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와 개인의 덕들 즉 지혜와 용기와 절제 정의의 덕들이다. 사실 그 덕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기본적인 사주덕(四柱德)으로 이미 익숙한 덕목들이다. 그러다 플라톤에 와서 그러한 덕목들은 단순한 관습상의 경험심리학적 차원을 넘어 나라와 개인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게 확립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들마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부터 단칼에 그 좋음의 이데아의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내려앉는다. 이것은 아예 <국가> 논의의 시작부터 플라톤 스스로 그 철학적 덕목들조차 전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제반 철학적 덕목들조차 넘어서는 자신의 철학에서 최고 최상의 지위를 갖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특히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좋음의 형상’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한 그 모든 덕목들의 ‘쓸모와 이로움’ 말 그대로  홍익(弘益)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지 못한다면 설사 다른 그 어떤 것들을 알아도 아무 이로움ophelos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게다가 현명함phronesis과 관련해서도 좋음에 대해서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ktēsis이 없다고도 말한다.(505b) 나중 태양의 비유를 다룰 때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지고의 우월성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하나만 미리 소개하자면 이 좋음의 이데아는 ‘앎epistēmē과 진리alētheia 보다 한층 더 아름답고kalos 그것의 원인aitia으로서 지위prosbeia와 능력dynamis에서 있음ousia을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으로까지 언급되고 있다.(508e-509b).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마지막 결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제작의 기본 목표 내지 합목정성을 오로지 ‘좋음’에서 찾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앞서도 간략히 밝혔지만 좋음의 이데아가 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토대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철학자와 철학자 통치체제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왜 가히 신전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는지를 미리 짐작케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이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열심히 해 봐야 흉한 꼴이나 보이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갖는 자기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좋음의 자식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후에 펼쳐질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자신의 그 생각을 오로지 비유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른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 비유들 모두는 그가 예고한 대로 좋음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비록 플라톤 철학에서 지고의 위상을 갖는 철학적 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비유로서만 제시되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좋음’(to Platōnos agathon)이란 말이 그의 시대에서 모호한 말을 가리키는 속담으로까지 사용되었겠는가!(J. Adam. 해당 부분 참고)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이 합리주의 철학의 극치라 일컬어지면서도 지고의 철학적 원리와 관련해서는 추론과 설명(logos)을 넘어서는  이른바 변증술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포리아이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근원적 우월성은 플라톤 철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되레 탐구의 열망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플라톤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고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철학적 성과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철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 배경이 되었다.

*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전개의 이와 같은 특성상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 좋음의 이데아를 주제로 하는 차후 몇 차례 강해는 일단 해당 부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설에 우선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비유들 각각을 살피면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한 일정 부분 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비유들 전체를 살펴본 후 그것들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논의의 전반적인 구도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끝-

 

<다음 주제>

  1.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6b-509b)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2024.10.18. 영상

◎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주제: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4년 10월 18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이규성 사상 연구 모임에서는 요즈음 이규성 선생이 지은 『중국현대철학사론』(2020)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비트겐슈타인 발표로 한 번 건너 뛰고,
6월에 읽은 서론에 이어서 1장 진독수(陳獨秀) 편을 10월에 읽습니다.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NiCr_Yn8GW0?si=Mmc6EkDDteXqb4WM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동아대)’|2023.12.08. 영상

지난 영상을 올립니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일시: 2023년 12월 8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학사상에 관한 철학적 해석은 여러 갈래입니다만, 이규성 선생은 내외 합일이라는 자신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을 “안으로 개체의 활력이 자주적으로 표출되고 밖으로 다른 생명체들과의 우주적 연대성을 자각하는” 사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내외 합일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은 한편으로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서 사상의 개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조직화 운동”으로서 혁명적 실천 즉 역사적 개벽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이규성 선생의 철학적 모색에서 동학사상은 하나의 철학적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은 이돈화 선생과 김지하 시인의 동학 해석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해석을 놓고 토론해 보고자 합니다.

☞ 발표 원고: 이규성의동학사상연구 발표문 (이병창)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WpW-xBKSGjs?si=cTCF8SyBrE4YLSv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발표:이영철(부산대) 2024.08.16.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
-발표: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이영철
-일시: 2024년 8월 16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규성 선생의 사상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이규성 선생의 관심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했는데, 그것이 칸트가 물 자체에 대해 불가지론을 폈던 것과 같다고 본 것일까요?
쇼펜하우어가 칸트를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처럼, 이규성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서구 현대 철학을 비판하는 도구로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내 대표적인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대부분을 번역한 부산대 이영철 교수께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연구의 전말을 분석해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 발표원고: [웹진발표문편집]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1jq1b3HsaUE?si=dOMWt2ne4q89gnLL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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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493a-495b]

* 다중οἱ πολλοί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철학자의 성향을 타락시키는 또 다른 집단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다중 스스로 기술의 경쟁자로 여기는 소피스트들을 꼽는다. ‘개인 보수획득술자  각각’ἕκαστος τῶν μισθαρνούντων ἰδιωτῶν으로서 소피스트들은 다중들이 모였을 때 형성되는 다중들의 신념δόγμα을 ‘지혜’σοφία라고 부른다.(493a) 이건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 센 짐승’θρέμματος μεγάλου καὶ ἰσχυροῦ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ὀργή 와 욕구ἐπιθυμί는 물론 그들이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그 모든 것을 알아내 기술τέχνη로 체계화하여συστησάμενος 그것을 지혜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493b) 그들은 이런 신념들과 욕구 중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름답거나 추한지, 좋거나 나쁜지, 또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등은 알지도 못한 채 이 모든 것들을 거대한 짐승ζῷον의 믿음δόξα에 따라 이름을 붙여 그 짐승이 기뻐하는χαίροι 것은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그 짐승이 기분 나빠하는ἄχθοιτο 것은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다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으면서, 불가피한 것τἀναγκαῖα을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그 불가피한 것이 좋은 것과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아예 본 적조차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ἄτοπος 교육자παιδευτής이다.(493c) 요컨대 그림γραφικῇ의 영역에서든 시가μουσικῇ의 영역에서든 정치πολιτικῇ의 영역에서든, 이처럼 다중의 분노ὀργή와 쾌락ἡδονή을 파악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소피스트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누군가가 다중과 어울리며 자신의 시나 다른 어떤 제작물이나 나라에 대한 봉사를 선보이면서 불가피한 ‘한도를 넘어서’πέρα 그들에게 맹종할 경우, 그것은 소위 ‘디오메데스의 필연’으로 그들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것들이 진정 좋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καταγέλαστος 만한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93d)

*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지혜는 이러한 소피스트들이나 다중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철학자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 또 ‘많은 각각의 것들’ τὰ πολλὰ ἕκαστα이 아닌 ‘각각의 것 자체’αὐτό τι ἕκαστον가 있다고 생각한다.(494a) 대중들πλῆθος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ἀδύνατος하다.(493e)

*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성향에 어떤 구원σωτηρία이 있다면 모를까 어떤 젊은이가 그 활동에 머무르면서 완성단계τέλος에까지 이르기는 절대 쉽지 않다. 그 젊은이가  ‘쉽게 배우는 능력’, ‘기억력’, ‘용기’, ‘호방함’ 등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그의 친지들과 시민들οἱ πολῖται,πολίτης은 그의 미래의 능력을 예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고 미리 아부도 떨고 추켜세우며 마냥 굽신거릴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이는 그리스인들Ἕλλην의 일들과 이방인들βαρβάροἱ의 일들을 모두 다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희망ἐλπί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결국 지성 νοῦς이 결여된 헛된 자부심σχηματισμός과 허세φρόνημα, 교만에 빠지게 된다. 특히 그가 큰 나라 시민으로 부유하고πλούσιος 혈통도 좋고γενναῖος  잘 생긴데다가εὐειδὴς 체격도 좋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494a-c) 그래서 그에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진실τἀληθῆ을 알려주면서 ”진정 지성을 갖추려면 지성에 노예 노릇을 하지δουλεύσαντι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어도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의 자연적 성향 때문에 그 이야기를 좀 알아듣고 마음을 돌려서 철학에 이끌릴 경우(494d) 그의 쓸모χρεία와 동료관계ἑταιρία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말릴 것이고 다른 한편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을 사적으로 음모를 꾸며ἐπιβουλεύοντας 공적으로 재판정ἀγών에 세울 것이다.(494e) 이렇듯 철학적 성향의 부분들 자체도, 나쁜 양육을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활동을 멀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소위 좋다고 하는 것들, 즉 부와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욱 더 타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최고의 활동에 적합한 최선의 성향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어떻게 몰락ὄλεθρος하고 파멸διαφθορά하는지 다시 말해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타락한 소수의 사람이 우수한 자질의 크기만큼 나라들에게나 개인들에게나 가장 큰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49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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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a-e : 이곳에서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정의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다중들이 말하는 지혜(sophia)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가 극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소피스트들에게 지혜는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대중의 욕구를  알아내서 체계화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불가피한 것’(tanankaia)’(493c)으로 여기는 것(대중들의 믿음(doxa)이나 신념(dogma) 혹은 물질적 필요,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디오메데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오딧세우스에게 행한 불가피한 대응 같은 것인 양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비웃음을 살만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에 따라 대중이 이러한 믿음과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아테네의 민주정 아래에 있는 이상, 대중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철학자들의 지혜와 정의,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아름답거나 정의롭다고 믿고 있는 ‘많은 각각의 것들’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이다.

* 494c-495b : 철학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정말 철학자가 그래서가 아니다.  그것은 배의 비유에서 살폈듯이,  다만 피폐한 아테네의 정치체제 즉 아테네 민주정 그 자체가  소수의 진정한 철학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물론  그 밖에 다수의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철학에 대한 나쁜 평판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나 그러한 피폐한 환경 하에서 타락한 철학자 또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자질들의 우수함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해악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저질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495b)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적 자질에 더해 부유함과 혈통, 훌륭한 외모와 체격까지 젊은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자라나면서 어떻게 헛된 자부심과 허세에 빠지게 되는지 그래서 나라와 개인에 얼마나 큰 해악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철학적으로 돌려세우는 노력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추었지만 끝내 타락한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라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실제로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는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둘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으로서  철학적 자질도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체격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는 18세 전후 포테다이아 전투에 출전했다가 소크라테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자처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철학자가 되기에는 그의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정계에 뛰어든 이후 뛰어난 능력으로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실책으로 권력에서 밀려났음에도 적대국이었던 스파르타로까지 망명하는 등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망명지에서 다시 아테네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  고도의 술책을 동반한 정치적 기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군의 능력도 자신을 영원히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결국 평생 정치적 풍운아로 살다가 기원전 404년 자객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플라톤의 대화편 <알키비아데스>, <향연>에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기본적으로 철학보다는 정치적 야망에 젖어 있던 알키비아데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를 철학에로 이끌고 가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은 대화편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알키비아데스 I> 104a-b,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I 16 1—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키비아데스’ 1. 4, 4. 1 등 참고)

* 아무려나 나라를 몰락과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에는 알키비아데스 같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젊은이가 타락하여 그 범상치 않은 뛰어남으로 오히려 나라를 더 큰 곤경으로 끌고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라를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로 자라날 젊은이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원천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시종일관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다름 아닌 아테네 민주정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체제로서 아테네 민주정이 그대로 존속하는 한, 최고의 활동에 가장 최선의 성향의 몰락과 파멸은 불 보듯 뻔하며 그에 따라 종국적으로 나라가 몰락하고 파멸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민주정일지라도 철학자 모두를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그러한 피폐한 정치체제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처음부터 신의 섭리moira와 구원sōzein에 따라(492e) 철학적 성향을 끝까지 보전하며 그것이 일러주는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불멸의 증표이다. 요컨대 민주정과 참주정을 비롯한 현실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여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들을 온전히 길러내고, 그들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 즉 철학자 왕정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플라톤이 이상국가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과제였던 것이다.

* 아무려나 이곳 논의의 목표는 그러한 철학자 왕정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이전에, 왜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나라를 파괴하는 나쁜 악당이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밝혀 철학과 철학자를 세상의 평판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이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철학적 자질들을 타락시켜 나라를 근본적으로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철학자 개인이 아닌 제도로서 민주정 그 자체임을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져다주는 배경에는 제도로서 민주정과 그 치하에서 타락한 철학자들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타락한 철학자들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이 마치 진정한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지만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는 가짜 철학자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런 연 후 철학이 비난 받은 현실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진정한 철학자들이 왜 소수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논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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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 – 497a)

 

[495c]

* 소크라테스는 이제 황량하고ἐρῆμος 불완전한ἀτελής 상태로 친족이 없는 고아ὀρφανός처럼 내버려진 철학이 그 밖의 또 어떤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인간 나부랭이ἀνθρώπιον들이 멋진 명칭들과 외관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철학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감옥εἱργμός에서 탈옥해서 신전τό ἱερό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 작업βαναυσία에서 탈출해ἀποδιδράσκοντες 철학으로 뛰어들었기ἐκπηδῶσιν 때문이다. 그것은 대머리φαλακρός에 작달막한 대장장이χαλκεύς가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자마자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생각διανόημα과 믿음δόξα에서 진실로 궤변σόφισμα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γέννα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φρόνησις은 결여한 서자νόθος를 낳을 것이다.(495c-496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걸맞고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결국 테아게스Θεάγες 등 일부의 경우를 포함해 정말 극소수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의 경우도 ‘영적인 신호’τὸ δαιμόνιον σημεῖον가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이 얼마나 즐겁고 축복된 것인지를 맛본 한편 대중의 광기μανία를 또 충분히 목도한 까닭에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마치 짐승들 사이에 떨어진 것처럼 혼자 모든 야만ἄγριος 족속에 맞서기에 충분하지도 않아, 부정의에 가담하지도 않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σύμμαχος ἐπὶ τὴν τῷ δικαίῳ에 원군으로 함께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라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겨울철χειμών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기 일만 하게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불법ἀνομία과 불경한ἀνόσιος 일들로부터 정결함καθαρός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삶을 떠날ἀπαλλαγήν 때 아름다운 희망ἐλπίς을 가지고 평안하고ἴλαος 너그러운εὐμενής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496a-e)

* 이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τὰ ἐλάχ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최대의 것τὰ μέγ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도 아니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에게 맞는προσηκούσης 정치체제를 만났다면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αὐξήσεται 사적인ἴδιος 것들과 함께 공적인κοινός 것들도 구해냈을 텐데 σώσει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49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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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5c-e : 철학이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는 텅 빈 철학의 자리에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작업으로 몸이 망가진 것처럼 영혼도 그렇게 깨지고 부서진 상태로’(495e) 자신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도 않는 철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가짜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우선은 소크라테스가 가짜 철학자를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로서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란 수공업 가문 출신으로서 부를 축적한 후 철학자 행세를 하려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그 가짜 철학자를 ‘생각과 믿음에서 진실로 궤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은 결여한 서자를 낳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을 추가로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에는 소피스트 또는 그들을 추종하며 교양인 행세를 하는 일군의 젊은이들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프로타고라스> 318e 참고)

*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플라톤이 가짜 철학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 기원전 436-338)를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소크라테스는 아울로스를 만들어 큰돈을 번 구리 세공업 가문 출신으로 그 부를 토대로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 고르기아스 등으로부터 수사학 교육을 받은 후 위대한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로서 평판을 누렸지만 정작  스스로는 ‘철학자’(philosophos)로 불리기를 바랐던(<안티도시스> 271 ff.)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소크라테스는 당대 유명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수사학 학교를 세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마케도니아와의 화친을 통해 몰락해가는 아테네를 구하려 온갖 힘을 쏟았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플라톤은 <파이드로스>(279a-b)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그에 대한 아주 짧은 평가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서도 이소크라테스를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철저히 도외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현대의 주석가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짜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를 소환하여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쏟아붓고 있다.

* 495e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 : 이소크라테스가 대머리에 작달막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그는 여늬 젊은이들 처럼 수사학을 배운 후 정계 진출을 꿈꾸었으나 목소리가 작고 소심한데다 가세까지 기울어  소장을 작성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뛰어난 수사학적 지식으로 큰  돈을 벌어 규모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버금가는 수사학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인들로 부터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받는 방식으로 말년에는 부친을 넘어설 정도로 큰 부를 이루었다고도 전해진다. (J. Adam. 해당 노트, 김봉철 <이소크라테스> 신서원 2004 참고)

*이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이후 서양 철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서양 지성사에서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라는 기록은 쉽게 접할 수 있어도 철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거의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접어들어 플라톤에 의해 다만 궤변을 일삼던 자들로 폄하되었던 소피스트들이 당대 철학사적 전환을 이끈 사상가들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에 발맞추어, 특히 근대 통일 국가를 열망하던 독일 사상계에서 이소크라테스의 범그리스주의가 크게 주목을 받은 이래, 이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당대 시대현실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관을 내세운 선구적인 철학자로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와 조화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폴리스들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아테네 제국주의와 이소크라테스가 지지했던 강대국 마케도니아 중심의 범그리스주의는 다(多)의 공존으로 표징되는 전통 그리스 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 제국주의와 범그리스주의는 알렉산더를 통해 헬레니즘적 팽창주의로 이어져 고대 사회의 붕괴를 거쳐 군사적 사상적 세계주의와 기독교의 세계동포주의와 결합하여 종래에는 거대 로마제국을 탄생시켰고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오늘날 근대 제국주의와 세계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 496a 소수의 철학자가 남게 되는 경우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우들로 1) 고귀하고 훌륭하게 자라난 사람이 망명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방해 없이 철학에 머물게 되는 경우 2) 위대한 혼을 가진 자자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국사를 깔보고 철학에 머무는 경우 3) 아주 소수의 훌륭한 성향을 가진 자가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철학에 머무는 경우 4) 테아게스처럼 병치레로 정치하기가 힘들어 하는 수 없이 철학을 하는 경우 5)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신호를 접한 경우를 들고 있다. 주석가들은 1)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시라쿠사에서 탈출해 아테네로 망명한 플라톤의 친구 디온(Dion)을, 2)의 경우는 비록 에페소스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왕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철학의 길을 택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를, 3)의 경우는 여기서처럼 신적인 은혜로 타락의 유혹을 이겨내고 철학에 머문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Phaidon) 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을(플라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4)의 경우는 테아게스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철학에 머문 사람들을, 5)의 경우는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전 어떤 때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오직 그에게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496 b-c ‘영적인 신호’ to daimonion sēmeion : daimonion은 형용사형으로서 정관사 ‘to’가 앞에 붙어 추상명사가 되면서 ‘신성’(Divinity)과 ‘신력’(divine Power)의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에게서 오는 특별한 신호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31c-d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에 대해 한 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가히 신적인 수준의 냉철한 철학적 자기 반성력을 지칭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수호신으로서 daimōn이란 말이 제10권 617e에 나오고 <파이드로스> 242b-c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제제로서 ‘익숙한 신호’(to eiōthos sēmeion)란 말이 나온다.

* 496c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 : 앞서 492e-493a에서 우리는 다중의 광기가 지배하는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것인지를 살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절망감은 그대로 이어져 민주정 체제에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건전한 행동도 할 수 없음이 처절하게 토로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겨울철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과 불경한 일들로부터 정결함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살다가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평안하고 너그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만족한 삶이라는 것이다.(496c-e)

* 이곳에서 나타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무력감, 현실 도피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이 갖는 실천적 성격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실망감마저 안겨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강해 62에서도 자세히 살폈듯이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혁명적 결론을 보다 절실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적 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이상국가론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점진적 개선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점진적 개혁이론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 현실에서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구상하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 철학자 왕의 출현을 담보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강해 62’를 다시 참조할 것)

* 플라톤의 이러한 의도는 이어지는 아데이만토스와의 대화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적인 성품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태에 대해 어찌 보면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토로하고 있다. 아데이만토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 소수의 사람이 행하는 일들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를 위로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반대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소수의 철학자들이 최대의 것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것은 앞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이 소수 철학자들의 소극적인 행동 방책에 대한 변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장차 소수 철학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적극적인 행동 방책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다 절실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이자 일종의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내심 의도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철학자들의 신념 유지를 위한 소극적인 삶의 방식을 자조 섞인 마음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걸맞은 철학자 왕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내적 성장은 물론 공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축하는 것임을 보다 절실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삶이 과연 이렇게 끝나야 할 것인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절규인 것이다. 진정 그들이 수행해야  마땅한 일은 따로 있다. 철학자의 목표는 현실 도피를 통한 유유자적한 삶이 아니라 진상에 대한 지적 인식과 실천을 통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비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비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언급을 모두 마무리하고 태세를 전환하여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을 논의 주제로 다시 꺼내 든다. – 끝 –

 

<다음 주제>

  1. 4.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497a – 502c)

202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 남기호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면서 – (1) 故 남기호 선생님 추모사 (2) 유작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남기호 저, 2023) 북콘서트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특별행사

[남기호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면서]

故 남기호 선생님(1970년 ~ 2023년 9월 4일, 향년 53세) 前 연세대 철학과 교수, 한철연 회원

 

지난 2024년 1월 한철연 신년회에서 거행된 故 남기호 선생님 추모행사 영상을 올립니다.

여러 회원 분들의 도움으로 남기호 선생님의 지난날을 함께 돌아보고 그의 학술을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남기호 선생님의 학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더 활발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일시: 2024년 1월 11일(목) 1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내용:
1) 故 남기호 회원의 학문적 생애 소개와 추모사 / 연효숙
2) 유작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남기호 저, 2023) 북콘서트 / 패널: 이병창, 이관형, 한길석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2IngLIEvSQ?si=KUMMQNo2oRepD2q7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2)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1

 

[489e-493e]

* 소크라테스는 이제 뛰어난 자연적 성향φύσις을 타고 난 사람들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못되게πονηρὸς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렇게 못되게 된 것을 철학 탓αἰτία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를 함께 설명하려 한다.(489e). 그런데 그러한 설명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언급했던 그 훌륭하고 뛰어난καλόν τε κἀγαθὸν 사람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그 성향이 잘 발현되었을 경우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배움을 사랑하는 자’φιλομαθής로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통원하여 진리ἀλήθεια를 추구하는 사람이다.(490a), 그는 ‘있는 것’τὸ ὂν을 향해 매진ἁμιλλᾶσθαι하고 그것에 적합한 영혼의 부분으로ᾧ ψυχῆς ‘각각의 있는 것 자체’αὐτο ὃ ἔστιν ἑκάστον의 본성에 접할 때까지 열정ἔρως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혼의 그 부분을 통해 ‘참으로 있는 것’과 결합하여μιγείς 지성νοῦς과 진리ἀλήθεια를 낳는다. 그리고 그는 그 앎을 가지고γνοίη ‘진실한 삶’ἀληθῶς ζῴη을 살며 진실한 양육τρέφειν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진통ὠδίς에서 벗어난다.(490b)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가무단χορός의 구성원들이 그러하듯 뛰어난 사람에게 따라 붙는 자연적 성향들로서 건전하고ὑγιής 정의로운 성품ἦθος과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비롯해 용기 ἀνδρεία, 호방함μεγαλοπρέπεια, 쉽게 배우는 능력εὐμάθεια, 기억력μνήμη 등을 언급한다.(490c) 이러한 서두적 언급은 철학자들이 타락했다고 비방διαβολή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들이 어떻게 왜 타락했는지를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490d)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비로소 1) 이러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διόλλυται, 2) 다중들에게 쓸모없다ἄχρηστος고 여겨졌던 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 파멸에서 벗어나는지(490e)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면서 철학자들이 타락한 자리를 대신 비집고 들어온 가짜 철학자들이 자신들에 걸맞지 않게ἀνάξιος 어떠한 방식과 활동ἐπιτήδευμα으로 잘못을 저질러 철학에게 나쁜 평판δόξα을 가져다주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491a)

* 그런데 위와 같은 3가지 논제 가운데 우선 소수ὀλίγος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뛰어난 자연적 성향이 어떻게 타락φθορά하고 파멸하는지’에 관해 논의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놀랍게도 앞서 언급한 뛰어난 자연적 성향들에 더해 아름다움κάλλος과 부πλοῦτος, 신체의 강함ἰσχὺς, 힘 있는 가문συγγένεια ἐρρωμένη, 그리고 이들과 유사한 모든 것들이 역설적으로 그 자연적 성향들을 못되게 만들어 영혼을 파멸시키고 철학을 멀리하게 하여 결국은 철학자들을 타락에 빠트린다고 말한다.(491b-c)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서는 전체적ὅλος으로 제대로ὀρθῶς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이렇게 해서 시작된 1)의 논제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식물φυτόν이든 동물ζῷον이든 모든 씨앗σπέρμα이나 새끼들의 경우 적절한 양분τροφή이나 계절ὥρα, 장소τόπος를 얻지 못했을 경우 더 힘 있는ἐρρωμενέστερον 것일수록 그만큼 더 적절한πρεπόντων 것들을 결여하게 되어 단순히 좋지 않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최고의 자연적 성향이 그에 맞지 않는ἀλλοτριωτέρον 양육을 받으면 그저 그런φαῦλος 성향보다 더 나쁘게 되어버린다.(491d)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가장 좋은 영혼이 나쁜 교육παιδαγωγία을 받았을 때 특별히 나쁘게 된다. 그러므로 큰 부정의τὰ μεγάλα ἀδικήματα와 극단적인ἄκρητος 못됨πονηρία은 활기찬νεανικός 자연적 성향이 양육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되었을 때 생기며, 반대로 약한ἀσθενής 자연적 성향은 큰 좋은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하고 큰 나쁜 일의 원인도 되지 못한다.(491e) 요컨대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의 경우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ἀρετὴ을 이루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신들 중에 누군가라도 도와주지 않는 한, 이번에는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49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을 타락시키는 이유 즉 그러한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누가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힌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소크라테스가 가장 나쁜 양육 주체로 꼽는 집단은 소피스트들이 아닌 다중들ὁὶ πολλοί이다. 그는 설사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해도 다중들에 비하면 정작 이렇다 할 게 없다고 말한다.(492a) 진정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러한 사적인ἰδιωτικός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μεγίστος 소피스트들 바로 다중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젊은이든 늙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들을 가장 완전하게 교육시켜서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낸다.(492b) 다중들은 민회ἐκκλησία나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극장θέατρον, 군대 막사στρατόπεδον,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σύλλογος에서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일삼는데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그 비난과 창찬의 소리가 두 배로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τὸ νέος는 그러한 비난과 칭찬에 휩쓸려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사적인 교육παιδεία ἰδιωτικ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것들을 아름답고καλὰ 추하다고αἰσχρὰ 주장하며, 그들이 하는 활동을 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된다.(492c) 게다가 교육자οἱ παιδευταί이자 소피스트인 다중들은 자신들의 설득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을 행동으로 강제ἀνάγκη하여 시민권을 박탈ἀτιμία하고 벌금χρῆμα이나 사형θάνατος 등으로 징계한다κολάζουσι. 그러므로 어떤 소피스트 또는 어느 누구도 이들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한 시도자체가 어리석은ἄνοια 일이다.(492d) 그리고 신적인θεῖον 성품ἦθος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이들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παρὰ τὴν τούτων παιδείαν을 받아 덕ἀρετὴ과 관련해서 다른 종류의 성품이 생기는 일은 과거, 현재, 미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정치체제πολιτεία 안에서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고 있다면 그는 신의 섭리μοῖρα로 구원σώζεῖν을 받은 것이다.(49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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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e ‘못 되다’poneros : 플라톤은 이곳 문맥에서 이 말을 ‘타락phthora’, ‘철저히 파멸되다diollymi’라는 말과 함께 ‘철학적 성향의 전락 또는 붕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490e 참고) 기독교 주기도문 중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소서’rhysai hemas apo tou ponerou라는 구절에서 ‘악’의 원어 또한 그 말이다.

* 489e ‘훌륭하고 뛰어난kalon te kagathon’ : 플라톤이 가장 훌륭한 사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최고의 수식어. 당연히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철학자이다.

*489e 앞서 이야기 했던 자연적 성향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 철학자의 성향과 관련하여 앞서 484a부터 487a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가리킨다. 487a에서는 그것을 기억력이 좋음, 쉽게 배움, 호방함과 정중함, 진리와 올바름, 용기와 절제 등으로 요약하고 있고, 이곳 490c에서도 건전함과 정의로움이 더해지면서 그것들 모두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 490a-d :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내세우고 있는 철학자에 대한 변론은 철학자의 타고난 성향이 아무런 장애나 방해 없이 발현될 경우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관한 언급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성향이 타락하지 않고 제대로 발현 되었을 때의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논하기 전에 이곳에서 가장 이상적인 철학자의 모습부터 먼저 제시하려는 까닭은 타락과 무관한 원래 상태부터 이야기해야 다중들이 제기하고 있는 철학자의 타락 내용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진정한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을 다시 거론하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어떤 영혼의 상태를 갖는지를 규정(490d)하려 한다.

* 490b 영혼의 이 부분이 그와 결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아야 : 이곳에서는 철학자가 갖는 철학적 인식의 특성이 남녀의 결합과 출산 및 양육 과정의 고통으로 비유되고 있다. 즉 철학자가 갖고 있는 영혼의 부분으로서 지성nous은 ‘있는 것’to on에 열정eros으로 다가가 그것과 결합mignumi(‘성교’의 뜻도 있다)하여 자식으로서 지성은 물론 진리를 출산하고 그 자식을 진실되게 양육할 때까지 진통ōdis을 멈추지 않는다. 산파술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철학자는 스스로 지성과 진리를 낳는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 지성과 진리를 낳도록 이끌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곳에서 ‘있는 것’, ‘각각의 있는 것 자체’auto ho estin hekaston는 이데아를 가리키고 ‘각각의 많은 것들’ta polla hekasta은 그 이데아가 관여된 현상계 사물 또는 사태들이다. 이처럼 영혼과 존재의 결합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대화편들(<파이드로스> 246e-247d, <향연> 210a-212a, <테아이테토스> 156a ff)에도 나타나고 특히 신플라톤주의에서 그 결합은 신비적인 특성을 갖고 그려진다. 어떤 이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통이 상대에게 열정으로 다가 가는 데에서 부터 결합하여 낳고 양육할 때까지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철학적 인식에 다가가는 것은 물론 그것을 통해 진리를 획득하고 보전하고 실천하는 과정 전체가 진통인 셈이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관점에서 철학은 실로 그 자체로 고통을 수반하는 고도의 지적인 탐문이자 비판적 자기 반성 그리고 실천인 것이다.(J. Adam 이 부분 노트 참고)

* 490c 가무단chorus : 서로가 서로에게 부합하고 함께 어울리는 무리를 의미한다.

* 490d ‘일부는 쓸모없고 나머지 대다수는 완전히 나쁜 사람’ : 어떤 원전 역본에서는 ‘일부는 쓸모없고 다른 일부는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번역문 ‘다른 일부’에 해당하는 원문은 ‘polus(대다수)’이다. 즉 ‘다른 일부’라는 번역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통해 나타내려고 하는 진정한 소수 철학자들과 다수의 타락한 철학자들 간의 수적 대비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역이다. 원전 역본임을 자부하려면 소소하지만 이러한 부분도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490e-491a : 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무용성에 관한 논의에 이어 철학자의 타락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를 미리 밝힌다. 요컨대 우선 1) 철학자가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다룬다. 그다음 2) 그럼에도 그런 가운데 어떻게 소수의 철학자가 그 타락을 면하게 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끝으로 3) 철학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가짜 철학자들이 어떤 행태를 범하면서 철학에 대한 평판을 나쁘게 만드는지를 살핀다.

* 491b-491e : 이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요즘 사람들도 흔히들 말하듯 ‘똑똑한 놈이 나쁜 짓하면 덜 똑똑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초래한다.’, ‘도둑질도 더 똑똑하고 더 힘센 도둑이 더 큰 도둑질을 한다.’는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설명들은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열거하고 있는 철학자가 갖고 있는 자연적 성향들의 목록을 보면 진리와 정의뿐만 아니라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타고난 성향이 뛰어난 젊은이가 타락을 했다고 말할 경우 진리와 정의에 대한 의지가 줄어들었거나 없어졌을지는 몰라도 용기 및 절제, 호방함, 뛰어난 기억력 등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자연적 성향 내지 능력이 줄어들거나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한 타고난 철학적 성향의 타락이란 그가 열거한 수많은 자연적 성향들 중 이를테면 진리와 정의 등 ‘있는 것’을 향한 성향의 타락에 한정해야 하고 목적이나 가치와 무관한 다른 일반 기능적 능력은 제외된다고 보아야 할까? 소크라테스도 보다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더 크고 나쁜 일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을 때(491e) 그 활기찬 자연적 성향이 이미 타락한 자에게도 활기찬 상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일관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들 중 어떤 것은 타락하고 어떤 것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느 곳에서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명들 모두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 소크라테스가 철학적 성향들의 예를 들고 그 성향들의 타락을 설명하려 하자 아데이만토스는 보다 더 자세하게 알려 주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세하게’akribēs 말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hōlos ‘제대로’ortōs 파악해야 그것이 분명하게 이해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핀 대로 사실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분명해보이지만 자연적 성향들을 개별적인 성향들 차원에서 자세하게 나누어 설명할 경우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언급하고 있는 대로 자연적 성향들을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제대로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의도와 설명이 어떻게 일관성을 갖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연적 성향들의 타락은 개별 성향들 차원에서 각각의 성향들의 타락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적 성향들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속에 드러나는 그 자연적 성향들 전체의 타락 다시 말해 그러한 성향들 전체의 담지자로서 철학자 자신의 인격 내지 품성ēthos의 타락을 말한다. 이를테면 용기와 절제 등이 타락한다는 것은 성향들의 개별적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향들이 다른 성향들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과연 진리와 정의의 성격을 더욱 보전하고 관철하는 쪽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기와 절제, 뛰어난 기억력과 호방함, 강건한 신체 등 모든 타고난 성향들은 개별적으로 기능적 뛰어남을 갖고 있을지라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리와 정의가 아닌 거짓과 부정의를 드러내는 것들로 작용할 경우 이미 그것은 타락한 성향들이며 게다가 그 기능적 뛰어남으로 그 작용력을 배가시킬 경우 그 성향들은 더욱 타락한 성향들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철학자의 타락 여부는 그가 자연적 성향으로 갖고 있는 뛰어난 성향들이 어떤 양육을 통해 어떤 총체적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예를 든 식물이나 동물, 씨앗의 경우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생명체가 나쁜 환경이나 토양에서 양육될 경우 더 강한 성향을 가진 것일수록 더 오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으면 있지 그 강함 때문에 더 빨리 시들거나 죽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호박씨가 나쁘게 양육된다고 해도 병들고 허약한 호박은 될지언정 호박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철학적 성향이 나쁜 환경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다만 철학적 성향 자체는 다만 줄어들거나 약해질 뿐이지 그 반대의 다른 성향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위와 다르게 플라톤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씨앗이든 험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일수록 애초의 특성보다 훨씬 더 거칠고 억센 특성을 갖고 있으며 게다가 환경 조건이 아주 나쁜 곳에서 살아남은 생명체일수록 그 생명체들은 건강에 좋지 않은 물질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쁜 환경에서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나쁜 환경에 적응하여 그 나쁜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매우 분명하다. 492a에서 결론 내리고 있듯이 철학자의 자연적 성향이 적절한 배움을 만나면 성장해서 모든 덕을 이루게 되지만 적절하지 못한 장소에 씨가 뿌려지고 태어나서 양육되면 그 성향의 뛰어남이 크면 클수록 완전히 그 반대가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참주의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들로 태어나 참주에 의해 자신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로 양육되었을 경우 그 아들은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더욱 사악하고 못된poneros 참주, 타락한 참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이러한 사례는 민주정 치하에서 권력을 꿈꾸는 뛰어난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젊은이들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고 태어날 지라도 그가 태어난 곳이 민주정 치하라면 그들 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타락을 면치 못할 것임을 통탄스러운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 492a ‘자네도 다중들처럼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타락한 젊은이들이 있으며, 타락시키는 일을 이렇다 할 만하게 하는 사적인 소피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이 말을 언뜻 들으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있다는 다중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젊은이들의 타락과 관련하여 소피스트들에게 돌릴 이렇다 할만한 탓이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우리는 젊은이의 타락과 관련하여 ‘사적인idiōtikos 소피스트’ 즉 소피스트와 ‘위대한megistos 소피스트’ 즉 다중이 대비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그 발언은 그 둘을 대비하면서 다중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해 사적인 소피스트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를 강조하는 수사적 차원에서 언급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중이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다중들도 소피스트라고 부르면서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붙이고 정작 소피스트들에게는 ‘사적인’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사적인’의 원어 idiōtikos가 ‘아무렇게나 하는’, ‘비전문가적인’, ‘아마추어적인’이란 의미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이 문맥에서 소피스트를 옹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그들을 폄하하고 경멸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 있듯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다중의 기호에만 영합하여 그들로부터 보수를 받고 살아가는’(493a) 일개 지식 장사꾼에 불과하다. 그리고 소피스트의 영향력이 주로 젊은이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다중의 영향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어낼 정도로 실로 막강하다. 요컨대 이 문맥에서 소크라테스가 문제 삼으려는 대상은 소피스트들이 아니라 다중들인 것이다.

* 492b ‘대중’plēthos : 전번 강해에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플라톤은 이곳 전후 문맥에서 ‘민중(dēmos)’과 관련하여 다중(hoi polloi, 489a, 490e, 492a, 493c, 500b)이란 말도 쓰고 있고 여기에서처럼 가끔 대중(plēthos, 492a, 494a)이나 군중(ochlos, 494a)이라는 말도 대신 쓰이고 있다. 이 표현들은 민중 일반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굳이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민중dēmos은 넓은 의미의 people 즉 일반 대중이라는 계급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다중hoi polloi은 ‘소수의 사람들’hoi holigoi과 대비하여 말 그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는 수적 의미를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대중plēthos 또한 원어 자체가 양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거의 동의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군중ochlos은 어원상 ‘동요하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집단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상태의 다중 또는 대중’을 표현하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politēs는 도시국가 구성원 전체 즉 시민 또는 국민을 나타내는 말이다.

* 492b ‘민회나 법정이나 극장, 군대 막사, 혹은 다른 어떤 공공 대중πλῆθος 집회’ : 이 문맥은 앞서 언급된 ‘위대한 소피스트로서 다중’이 그저 다중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회나 법정, 극장과 공공 대중 집회’라는 모종의 정치 사회적 시스템이 일상적으로 확립된 이른바 ‘민주정 치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임을 확인해 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타락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서 꼽고 있는 다중은 그냥 다중이 아니라 ‘큰 소리로 고함도 치고 박수도 치면서 비난과 칭찬을 극도로 하고, 여기에 더해서 바위와 그들이 있는 장소가 울려서 비난과 칭찬의 소리를 두 배로 만들 수 있는’ 민주정이라는 정치 체제에서 중추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이른바 군중으로서 다중인 것이다. 사실 다중 또는 대중은 민주정에서 뿐만 아니라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에서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다중은 귀족정이나 참주정 하물며 철인왕정 치하의 다중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전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다중의 수준을 폄하하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을 그런 식으로 비난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대중들이 배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철학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어 그런 상태에서 다시 문제를 바라보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499e-500b) 이렇게 보면 플라톤이 철학자의 타락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다중 그 자체라기보다는 다중을 군중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라의 근본 의사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른바 정치체제로서 민주정인 것이다. 위대한 소피스트들이 지배하는 이런 민주정체 하에서는 어떠한 사적인 교육도 맥을 못 출 뿐만 아니라 일부 말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시민권 박탈이나 벌금, 사형 등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징계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 아무리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거의 대부분 그 흐름에 휩쓸려가 타락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소크라테스가 493e에서 ‘대중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때 대중 역시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가 아니라 아테네 민주정 치하의 다중에 대한 것이라 할 것이다.

* 492e-493a의 내용은 그야말로 민주정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는 절망이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에 대항하여 그들과 다른 의견을 표출할 수도 없고 설사 표출을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가 없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민주정 체제 하에서는 다중의 교육에 반대되는 교육을 받아 덕과 관련하여 인간으로서 다른 종류의 성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약 어느 누가 신적인 성품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가히 신의 섭리가 그를 구원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 우리는 이러한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관련하여 근대 이후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를 토대로 아래와 같이 비판할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다중은 때론 군중심리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 공론의 장을 통해 독립된 개인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현대 민주주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물론 법 앞의 평등과 자유권을 보장하며 그것을 토대로 개인은 어떠한 국가적 폭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중이 군중화 된다고 해서 반드시 반지성적으로 휩쓸리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촛불혁명이 그랬듯이 다중 스스로 정치적 의사를 결집하고 연대하여 그 결집된 힘을 통해 정치적 억압과 불합리성을 개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중이 이와 같이 집단적인 지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현대 민주주의의 대의적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 플라톤이 현대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면 여기에서 표출될 정도의 절망감으로 민주정을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민주정 비판은 당대 아테네 민주정 그것도 저물어 가는 혼돈기 아테네 민주정의 피폐상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당대 민주정에 대한 그의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가 한편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반성적으로 뒤돌아보게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성찰을 적지 않이 담고 있다. 여러 번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다중 자체가 아니다. 전번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플라톤은 다중 역시 철학적 교유와 소통을 통해 충분히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분명하게 믿고 있다(499e) 문제는 아테네라는 특수한 민주정 체제가 대중의 지배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대중의 의사 결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중 자신이 아니라 아무런 공동체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저 대중들의 욕망에만 부응하여 개인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의 선동 기술을 마치 지혜인 양 돈을 받고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비록 사적인 소피스트들이지만 그들이 정치를 지망하는 귀족 청년들과 선동정치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고 그 영향이 종국적으로 선동정치가들을 통해 다중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존재로 등극시킬 만큼 그 폐해의 크기는 가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하다. 무엇보다 아테네 민주정은 이들의 피폐한 영향력을 통제 또는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개선의 여지도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오로지 그들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배양 장치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중의 욕망을 지배하고 그들의 분노와 쾌락을 파악하는 기술을 체계화한 후 이른바 그것을 지혜라는 이름으로 사적 소송 기술 영역에서 만이 아니라 정치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결과적으로 아테네 사회를 소송과 음해 정치적 선동이 난무하는, 거대하고 힘센 짐승들이 미치듯이 날뛰는 무도한 사회로 만들고 말았다.

*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린 아테네 민주정과 비교하여 역사적 등장 배경은 물론 인구와 규모, 제도의 복잡성 등 여러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라는 핵심 가치를 보존하려는 여러 가지 대의적 법적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다중의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관한 문제 즉 공론의 장으로서 언론 영역에 한정하여 그 근본 문제점을 들여다 볼 경우, 최소한 현대 민주주의와 아테네 민주정이 갖는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현대 민주주의의 공론의 장 역시 여전히 아테네 소피스트와 마찬가지로 다중의 욕망과 권력에 영합한 지식인들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에 따라 정치적 의사결정 또한 비록 다수결에 따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 권력 등 소수의 특권적 지배 엘리트들이 생산한 담론들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황금지상주의에 압도되어 있는 한, 다중들의 욕망 또한 이기적이고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는 모두가 인정하듯 거의 정글이 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아예 이러한 사회의 정글화를 마치 인류 모두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문명사적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상황이 이러하니 비록 현대사회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기는 해도 최소한 현대인이 느끼는 절망감은 당대 현실에 대해 플라톤이 느끼고 있는 절망감과 비교하여 그리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이 절망한 그 만큼 실제로 혼란을 거듭한 끝에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역설적으로 아테네를 멸망시킨 그 제국주의를 내세워 이른바 세계화 전략을 실행한 첫 번째 제국이 되었다. 그리고 아테네 민주정과 마케도니아가 채택한 최초의 제국주의 내지 세계화 전략은 로마를 거쳐 오늘날 근대 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미국과 유럽 등 제국주의 강국들의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되살아 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치 제국주의 아테네 민주정이 걸어왔던 길 그대로 세계는 나날이 힘센 짐승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모해가면서 급기야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플라톤이 우려한 그대로 그것도 가히 세계적 차원에서 극우주의자들과 그들을 등에 업은 정치가들이 날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폄하했는지 그 생각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플라톤이 왜 민주정을 비판하고 철인왕정을 통해 정치의 지성화를 주창하게 되었는지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 주제>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4월 제11차 정기세미나 “이규성의 함석헌 연구” 2024.04.12. (발표:이병창)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회 11차 연구모임 영상

2024년 4월 연구모임은 이병창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시절 이규성 선생과 함께 이대 뒤편 봉선사 인근에서 들었던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지금에 다시 이규성 선생 철학 연구모임 자리에서 되새기게 되니 사상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이병창)

-주제: 이규성의 함석헌 연구
-발표자: 이병창(한철연 회원)
-일시: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 리쳄블 1305호
-줌(zoom) 572 077 4954 (비번1111)

♦발표문 탑재 ☞ 이규성 선생의 함석헌 사상의 연구가 갖는 의미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KJASJfrrTqg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0월 제8차 정기세미나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2023.10.13. (발표:이병태)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2013년에 이규성 선생의 『한국현대철학사론』(2012)을 함께 읽었고,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서평이 실렸습니다.
2023년 10월 세미나는 지난 서평을 중심으로 서평자 이병태 선생님의 발표로 진행합니다.

◎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계간 학술지 『시대와 철학』 24권 4호에 실린 이병태의 글 「서평 : 우리 철학사의 창으로 본 미래 철학의 풍경 -『한국현대철학사론』 (이규성 지음,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2013)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아래 자료실 주소를 참조하세요.

‘시대와 철학’ – ‘2013’ – ’24권 4호’를 검색하여 텍스트를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   http://www.hanphil.or.kr/html/sub02_01.asp

-주제: ‘『한국현대철학사론』에 관하여’
-발표: 이병태(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일시: 2023년 10월 13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 진보 정치학교 교실
-진행: 줌(Zoom)온라인 회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zjmMA_ZiTMw?si=r68PzeCzNtWJ3d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