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

 

[514a-517c]

* 이제 우리의 논의는 제7권에 들어섰다.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에 이어 동굴의 비유를 꺼내 들면서 우선 그것의 기본 성격이  ‘교육받음παιδεία과 교육받지 못함ἀπαιδευσία과 관련해서 본 우리 본성φύσις의 상태πάθος와 비슷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자ἀπείκασον는 말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살려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C1>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지하에 있는 동굴σπήλαιον 형태의 거처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거처는 동굴의 폭만큼 넓은 입구εἴσοδος가 빛φάος 쪽으로 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ἐκ παίδων 다리σκέλος와 목αὐχήν이 묶여 있어ὄντας ἐν δεσμοῖς 머리κεφαλή를 돌릴 수 없는 채 앞πρόσθεν만 보게 되어있다.(514a).

b) 그들 뒤쪽으로는 위쪽으로ἄνωθεν 멀리 불빛φάος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πῦρ과 수감자δεσμώτης들 사이에는 수감자들 위에 가로로 길ὁδός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담장τειχίον이 세워져 있다. 담장은 인형극 하는θαυματοποιός 사람들이 인형들θαῦμα만 보이게 사람들 앞에 쳐 놓은 가림막παράφραγμα같은 것이다.(514b-c)

c) 이 담장을 따라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돌이나 나무나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인물상ἀνδριάς이나 다른 동물 모형ζῷα λίθινά을 담장 위로 쳐들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면서φθεγγομένους 어떤 이들은 조용히 이것들을 들고 다닌다.(515a)

* 글라우콘이 ‘이상한ἄτοπος 비유εἰκών와 이상한 수감자들’이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ὅμοιος 자들’이라고 말하고 아래와 같이 비유를 이어간다.(515a)

d) 그들은 저 불로 인해 자기들 맞은편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σκιά들을 보는 것 외에 자신들의 모습이나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 뒤에서 운반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서로 대화διαλέγεσθαι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들을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515a-b)

e) 그들의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ἠχώ도,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중에 누군가가τις 소리를 내면φθέγξαιτο, 그들은 그 소리를τό φθεγγόμενον 벽 위를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515b) 그래서 그들은 인공물σκευαστής들의 그림자들만을 오로지 참된 것τὸ ἀληθὲς이라고 믿는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본성에 맞게φύσει 일어났을 때 즉 그들이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ἀφροσύνη이 치유ἴασις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515c)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누군가가 풀려나서는λυθείη 일어서서ἀνίστασθαι 고개를 돌리고περιάγειν τὸν αὐχένα 걸어가 빛φάος을 보도록ἀναβλέπειν 갑자기ἐξαίφνης 강제된다고ἀναγκάζοιτο 해보자.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ἀλγοῖ, 전에 그 그림자들만을 보았던 원본들ἐκεῖνα을 눈부심μαρμαρυγή 때문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515c-d)

g) 누군가가 그에게 전에는 그가 엉터리φλυαρία를 보았는데 이제는 ‘있는ὄντος 것’에 더 가까이 왔고 ‘더 있는μᾶλλον ὄντα 것’들을 향해 있어서 더 제대로ὀρθός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지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는 당혹해하며 전에 보았던 것들을 지금 지목되는 것들보다 더 참된ἀληθέστερα 것으로 여길 것이다.(515d)

h) 그리고 또 빛 자체 αὐτὸ τὸ φῶς를 보도록 그를 강제한다면ἀναγκάζοι, 그는 눈ὄμμα이 아파서ἀλγεῖν 자신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φεύγειν 하고 그것들이 지금 제시되는 것들보다 실제로 더 명확한σαφέστερα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15e)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거칠고τραχύς 가파른ἀνάντης 오르막길ἀνάβασις을 통해 그를 억지로βίᾳ 끌고 가면서 태양의 빛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기ἐξελκύσειεν 전에는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ὀδυνᾶσθαι 끌려온ἑλκόμενον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ἀγανακτεῖν(515e-516a)

j) 그럼에도 그 누군가가 그를 태양의 빛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서 빛에 도달하면 햇빛이 눈에 가득 차서μεστός 우리가 지금 참되다ἀληθής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가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ῥᾷστα 볼 것이고, 다음에는 인간들이나 다른 것들의 물에 비친 영상 εἴδωλα을 볼 것이다.(516a)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과 인간 및 다른 것들의 영상을 본 후에 차츰 익숙해지면 마침내 그것들 자체 αὐτά를 볼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는 하늘οὐρανός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구경할 텐데, 낮에 태양과 태양의 빛을 볼 때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을 볼 때 더 쉽게 구경할θεάσαιτο 수 있을 것이다.(516a)

l)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태양ἥλιος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양 자신의 자리ἕδρα가 아닌 물이나 다른 데에 비친 영상들φαντάσματα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장소χώρᾳ에 있는 태양 그것 자체αὐτὸν καθ᾽ αὑτὸν를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을 것θεάσασθαι이다.(516b)

m) 그러고 나면 그는 비로소 태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될συλλογίζοιτο 것이다. 즉 태양은 계절과 해를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ἐν τῷ ὁρωμένῳ τόπῳ 모든 것을 관장하는ἐπιτροπεύων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αἴτια이다. (516b-c) 글라우콘 역시 그러고 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 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벽 위를 지나다니는 것들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이 먼저 가고 어떤 것들이 나중에 가며 또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곤 하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며,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τιμή와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등을 탐내고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τιμωμένους 권세 부리는ἐνδυναστεύοντας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믿으며 그곳 사람들처럼 사느니,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을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 침침한 상태에서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다시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그곳에 갇혀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풀려나와 태양을 보고 다시 내려간 사람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517a)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517a)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실제로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렇게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이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1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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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지하 동굴은 위 쪽(입구 쪽)으로  경사가 진 형태이지만 설명에 따라 횡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위 정리 글에 나오는 다섯 단계(C1, C2, C3, C4, C5)는 플라톤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을 보면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핀 선분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에 국한해서 보면 거의 상응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 간의 상응 관계를 단계별로 구분해 연구해 왔고 우리 논의 또한 설명의 편의상 그간 대체로 합의된 구분에 따른 것이다. 다만 C5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동굴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각별하게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따로 구분해 표시한 것이다.

선분의 비유 L1 L2 L3 L4
영상 실물 도형들 형상들
동굴의 비유 C1 C2 C3 C4
모형들 그림자 모형들(인형들) 실물의 그림자 실물들

* 그러나 그 상응관계에 대한 이해가 비유들 전체 또는 플라톤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 비유들에 나타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상응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 비유는 다만 비유인데다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 자체가 이미 각 비유 나름의 취지와 목적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제시된 비유들 간의 모든 표현들을 마치 암호해독하듯 서로 연관지어 보려거나 특정 비유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비유의 진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인식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수감자들과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풀려난 수감자를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 등정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동굴의 비유는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선분의 비유에 비해 좀 더 다각적이고도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기술 또한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다른 비유들의 표현들과 서로 비교해가며 무리해서 짜맞추려할 경우 플라톤의 진의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나중 또 거론되겠지만 미리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를테면 선분의 비유에서 L2가 L1의 상위 인식 단계이듯이 동굴의 위 방향이 진리 인식에 가까운 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C2에서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C1에 나오는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상위의 사람들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굴의 비유에서 수감자와 모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선분의 비유에서처럼 명백성을 기준으로 한 인식 능력상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비교 범주가 다른 계급적 신분적 차이라 할 것이다. 차츰 드러나겠지만 온갖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그들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풀려난 수감자들이 다다라야 할 인식 상 상위 단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피해가야 할 사람들이다. 설사 앎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그들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결코 지자(智者)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만 한정해야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확대해서 추정할 것까지는 없다. 굳이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과 관련하여 선분의 비유와 상응하는 단계가 있다면 오직 오름길의 과정에서 인식 상태가 변화 발전하는 수감자들의 경우 정도일 것이다. 또 동굴의 비유에서 모형을 들고 가는 사람들에 비교되는 사람을 들자면 수감자를 바깥 세계로 이끌고 가는 그 누군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동굴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소피스트들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자들 즉 철학자들이다.

* 이 점을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에 앞서 각 단계별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 스스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할 때 밝혔듯이 동굴의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사항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본성과 관련한 상태의 변화라는 점이다.

 

<C1> 다리와 목이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이곳 수감자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결박되어 갇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자들’(515a)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겪는 특수한 수감 상태를 플라톤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자의 생각을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비유와 관련한 전체 상황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플라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본성의 상태와 교육받은 본성의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유 상 수감의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말하는 수감 또는 결박의 상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릇된 정보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본성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상의 표현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에 빠져 있는 경우들을 표현할 때 ‘사로잡혀 있다’, ‘갇혀 있다’는 말을 쓰곤 한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의 경우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경우 ‘우리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b) 514b ‘위쪽으로’ἄνωθεν : 이 표현은 플라톤이 교육의 방향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자가 누군가를 위쪽으로 이끄는 모습’(175b)은 <국가>에서 자신이 그렸던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동굴 바깥쪽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국가> 515e)을 연상하며 쓰기라도 한 듯 내용이 아주 똑같다.(<소피스트> 216c, <파이드로스> 109a ff, 키케로 <신들의 본성>de nat. deor. II 95,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47—453도 참고)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불빛과 수감자들 사이 가로로 난 길을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은 수감자들 위쪽에 있으나 그들이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앞서 비유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을 거론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어떤 연구자들은 C1의 수감자들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그 사람들이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연관시켜 C1과 L1의 상응관계가 갖는 한계와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분의 비유에서 우리 일상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아닌 실물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은 동굴의 비유상 C1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원본 즉 모형들이 있는 C2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에서 ‘우리들’은 사실 차원에서 그냥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 차원에서 우리들을 수감자로  표현한  말이라는 점에서 범주상 등치해서  비교할 수는  없다.   L1과 C1을 같은 단계로 상응시킨 것은 앞서도 살폈듯이 인식 대상의 명백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L1 영상에 상응하여 모형의 그림자가 있는 C1을 상응시킨 것뿐이다. 그러한 비판은 두 비유들 나름의 취지와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람이란 요소를 기계적으로 등치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선분의 비유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사람이 논의의 직접적인 요소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비유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낮은 인식 단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플라톤이 우리 일상인들 모두가 그림자들만 보고 산다고 여겼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든 논란들은 비유들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그 비유들 간의 상응관계에 있다는 문제의식이 너무 지나쳐 그 상응관계의 통일성에 대한 연구에 필요 이상으로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영미를 중심으로 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연구자들이 비유들의 상관관계의 통일성을 둘러싸고 옹호의 입장이건 반박의 입장이건 시시콜콜할 정도의 미시적인 문제들까지 끌여들여 갑론을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해 67 강성훈(2008) 참고) 사소하게는 동굴의 비유 상 C1에서 C2로 고개를 돌려 불빛을 보고 눈부셔하는 것과 달리 선분의 비유 상 L1 영상에서 L2 실물을 볼 때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그런 연장 선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지 굳이 무리해서 적용 범위에 사람이나 정황까지 일일이 다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각 비유들은 나름의 각기 다른 비유 목적을 갖고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된 것들을 어떻게든 일일이 다  연결 상응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상응관계의 통일성을 밝히는데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부 전통 해석가들이나 또는 그것을 비판 또는 옹호하기 위해 비유 속 모든 표현들을 지나치게 논리적 요소로 환원시켜 분석적으로 살펴 보려는 현대 비평가들이나  그들 모두  플라톤이 각 비유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그 모든 논의에 중심에 놓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오르듯 플라톤의 진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21세기 들어오면서 호메로스 시가에 대한 오랜 동안의 분석적 미시적 접근이 초래한 폐해를 반성하여 <Who killed Homer>(V. D. Hanson, J Heath, 2001)란 책이 출간되었는데 어쩌면 머지않아 비슷한 취지에서 <Who killed Plato>란 책이 출간될지도 모른다.

c) 인형극에서처럼 가림막 담장 위로 모형을 들고 소리 내며 오가는 사람들은 왜곡된 정보와 사실을 생산하고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당대 기득권자들과 선동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영합하고 부역하는 소피스트들 내지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이들의 선동에 사로잡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보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일삼는 대다수의 사람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가리킨다.

d) 이곳에 그려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의심이 증폭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일방적으로 지배층이 만들어 유포한 정보만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현란한 수사술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내지 의욕 자체를 상실한 채, 거짓과 편견, 독단과 아집으로 분열과 혐오의 언어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나라와 서로를 파괴하는 이기적 송사와 분열에 매몰되어 있었다.

e)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 벽면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모두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2차적으로 전달된 간접적인 정보들이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의존하는 정보 대부분은 간접 정보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보들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사람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그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함께 의심도 하고 대화도 해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소통과 대화의 여유조차 갖기 힘든 대중들이 그러한 소통 능력을 함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치 권력자들은 대중의 소통 능력을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 능력으로만 여겨 되레 그 능력의 신장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사실 대규모로 정보 생산 능력을 갖춘 일부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에 맞추어 정보를 가공하여 나라 전체가 울릴 정도로 대규모로 소리 내어 유포할 경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달리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주류 언론집단과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을 뚫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를 끌어내린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515c ‘다음과 같은 일이 본성에 맞게 일어났을 때’ : 이곳에서 ‘본성에 맞게physei 일어났을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실제로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로 볼 수 있고(Ast, Stallbaum), 수감자가 언젠가는 풀려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연스런 진행 과정에 따라 풀려났을 때’(J. Schneider, 박종현) 또는 ‘풀려남은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일어난다’(R. L. Nettleship)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수감자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앞서 살폈듯이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것을 곧이곧대로 실제 죄수로 감옥 생활을 하다가 만기 등의 이유로 석방되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하면서 플라톤이 그 비유가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받은 자의 본성physis의 상태를 닮은 것’이라고 한 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수감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만기출소같이 어떤 수동적인 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감자 자신 어떤 일을 계기로 수감 상태가 본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그 미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수감자가 맞이한 어떤 계기란 이를테면 플라톤 자신이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건 누구의 소개로건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을 만나 철학을 접하고 무언가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상황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어둠 속에서 빛과 진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본성에 거스르는’(para physin)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풀려남은 그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 역본(2025년 말 출간 예정)은 ‘결박에서 해방된 상태가 그들의 본성에 맞는다’는 취지에서 physei를 ‘본성에 맞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 수감자는 이같이 수감 상태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제되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곧 철학 교육이 개시되는 상태 즉 이어지는 C2의 상태라 하겠다. 빛을 향한 오름길에서 교육적 당위를 처음에 강제로 느끼는 것이나 이내 그것을 감내하려 마음을 먹는 것 모두 가능성으로서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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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2,500년 전에 기술된 플라톤의 동굴 속 장면은 오늘날 누군가가 제작한 특정 내용이나 스토리를 담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 스크린에 상연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바라보는 현대 극장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 닮아있다. 물론 우리는 극장을 나와 실제 일상의 생활을 보내지만, 일상에서조차 대부분 정보는 대자본을 토대로 세워진 정보 통신업체가 제작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 등 사이버 문화에 크게 의존해 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 매체 등 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장치가 크게 발전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들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균형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어떤 형태로건 이미 형성된 신념을 배타적으로 더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정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음식점이든 공공장소든 불문하고 특정 종편 방송만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일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발과 목이 묶인 채 벽면에 비친 모형들의 그림자와 그곳에서 반향된 소리들만을 보고 들으며 그것들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재료들로 모형을 만들어 그림자들을 비추어내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수감자들의 그러한 상태를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모형들을 좀 더 많은 공과 땀을 들여 제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이고 수감자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힌 그만큼 더 많고 큰 규모로 왜곡된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한과 문화교류를 증진하는데 앞장섰던 우리나라 어느 문화인류학자조차 북한을 극장국가로 칭하고 있는 것도(『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공저, 창비, 2013) 그리고 우리 사회 주류 언론인 조중동과 그들의 기득권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종편들 그리고 혐오와 분노만을 부추기는 극우 유투버들 모두가 가히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짜 뉴스와 정보조작의 온상으로 전락한 것도 플라톤이 그토록 우려했던 동굴 속 정황과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실로 그것은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광기 어린 프로퍼갠더 정책은 물론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 문화와 정보 사회가 갖는 어두운 면들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 반지성과 대중의 집단 심리의 허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한 플라톤의 성찰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매우 유효하고 적확한 비판이자 진심 어린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와 연관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지 상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동굴 속 상태 일반을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종교적 지평에로까지 확장해서 음미해보면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은 물론 종교 철학과 문명 비판, 정신 분석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하고 극복해야 할 철학적 난제들과 문제의식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C2 단계에서 C5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동굴의 비유 내용을 살펴가며 그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어가기로 한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소개 글 :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김교빈)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김교빈(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철학)

 

이 글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의 여섯 번째 발문(추천서문, 35~38쪽)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에 게재합니다.

 

2009년 7월 31일 한국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그리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5년 6월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네스코의 선정 과정을 거쳐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전통의학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기신의 초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서술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인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랜 인문학의 전통을 지녀왔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인문이 나머지 둘을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인문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천문과 지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인본주의와 인문의식의 출발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문학을 의미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럴 아츠(Liveral Arts)’는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하는 그리스에서 노예 교육과 달리 자유민인 그리스 시민의 소양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했다. 그래서 ‘리버럴 아츠’는 오늘날에도 인문학을 뜻하는 동시에 교양 교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인간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 사유를 밖으로 표현해 낸 예술까지를 인문의 범주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는 신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사고를 뜻하며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불타오른 인문정신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담긴 인문정신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의 첫 편은 「내경(內景)」이고 두 번째 편은 「외형(外形)」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편이 붙어있다. 만약 『동의보감』이 병증의 원인과 증세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뒤의 세 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근대시기의 그렇고 그런 의학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과 처방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 몸의 겉과 속, 그리고 사람과 사람 밖의 자연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깃든 사람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몸 안의 장부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몸 안의 구조와 몸 밖의 신체 부위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사람의 몸과 자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강은 무엇이고 질병은 무엇인지,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양생법이 필요한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를 설명하는 정(精)·기(氣)·신(神)이 무엇인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면서 당시의 의학이 도달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은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보편성만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라는 말은 『동의보감』 서문에 있는 것처럼 당시 중국에 있던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동의보감』 출간 284년 뒤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도 ‘동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약재와 처방 모두에서 그 이전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의료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향약집성방』에 수록된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처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본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어떤 책인가?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의학을 풀어낸 책이다. 특히 저자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그 사유의 기반인 기철학을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최종덕은 기를 사유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하였고,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란 물질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란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라고 부연하였다.

최종덕은 매우 폭 넓은 공부를 해 왔다.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기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얼마 안 가 ‘기(氣)철학분과’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다른 학회들과 달리 분과 모임들로 나뉘어 있고, 분과들은 매 주 정기적으로 모여 세미나를 진행한다. 1989년 학회 창립과 동시에 내 제안으로 시작된 ‘기철학분과’는 동양철학 연구자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인원이 늘면서 동양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의학 연구자와 과학철학 연구자인 최종덕 교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 대상 텍스트도 대표적인 기철학자 장횡거의 『정몽(正蒙)』이나 방이지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 『동의보감』, 『격치고(格致藁)』 같은 전통의학 서적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기철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고, 동양철학 연구자들 또한 전통의학과 자연철학으로 논의를 깊여갔다.

최종덕은 기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면서 ‘개인의 건강이나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영역의 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사회적 비판기능 내지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생산 역량을 지닌 기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관점은 ‘과학적 접근방식과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한 것이다. 특히 최종덕은 전통의학을 ‘자연주의 의학’이자 ‘유기체 의학’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잘 담아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써 낸 것이다. 최종덕이 전통의학, 기철학, 물리학, 자연철학 등의 여러 분야를 날줄과 씨줄 삼아 자유자재로 엮은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만난 독자들은 전통철학과 현대철학, 기철학과 자연철학을 동시에 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울러 이 책이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을 융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교빈 씀)


필자 김교빈: (재)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철학 에세이》, 《하곡 정제두》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화담집》, 《강좌 한국철학》, 《기학의 모험》,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중국의 고대 논리》,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 《중국 의학과 철학》, 《기의 철학》 등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 앞의 강해에서 우리는 다른 비유들과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가 갖는 고유성에 주안점을 두고 그 기본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론 내지 존재론적 위계가 제5권에서 플라톤이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의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선분의 비유에 관한 두 번째 강해는 미리 말한 것처럼 선분의 비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갖는 중대성과 그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기로 한다.

* 그것을 위해 우선 플라톤이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하여 제5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과 이곳 선분의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간략히 도표로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 제5권에서(474c-480a) 플라톤은 <표1>에서 보듯이 인식의 상태를 ‘무지’agnoia와 ‘앎’gnōmē, epistēmē으로 크게 구분하고 그 무지와 앎 사이에 ‘중간적인 것’(metaxy ti)으로서 ‘믿음(의견)’doxa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앎은 ‘있는 것’, ‘자체적인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고 믿음(의견)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선분의 비유에 와서는 <표2>에서 보듯이 무지의 경우가 빠지고 인식의 상태로서 두 단계 즉 ‘앎’과 ‘믿음(의견)’은 전체 4단계 즉 ‘상상’eikasia, ‘확신’pistis, ‘사고’dianoia, ‘지성적 앎’noēsis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면 제5권의 앎과 믿음은 선분의 비유에서 세분화된 그 4단계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서로 상응·연관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선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noēsis과 ‘사고’dianoia가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으로 묶여있음에 주목하면 언뜻 그 두 단계가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단계 중 ‘사고’ 단계는 가정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가정의 원리(archē anypothetos)로서 ‘자체적인 것’ 즉 ‘있는 것’(to on)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5권의 ‘앎’이 될 수 없다. 그에 비해 ‘지성적 앎’noēsis은  아무 가정들 없이 형상들만을 사용해서 그것을 통해 형상들 자체에 이르는 앎(510b)이라는 점에서 제5권의 ‘앎’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과 ‘사고’ 둘 다 ‘가지적 영역’으로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지성적인 앎’noēsis의 단계만이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 4단계 중 오직 ‘지성적 앎’(L4)만이 제5권의 ‘앎’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머지 단계들(L1, L2, L3) 즉 ‘사고’, ‘확신’, ‘상상’의 상태들은 원천적으로 그 ‘앎’과 배타적으로 차별되는 것인 한, 모두 ‘믿음’(의견)doxa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표3> 참고) 그러나 플라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를 ‘지성적 앎’과 묶어 ‘가지적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고 나중 534a에 가서도 그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성적 앎’과 ‘사고’가 원천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은 왜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 둘을 함께 묶어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앎과 믿음과 관련한 제5권의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입장에 변화를 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추가적인 보완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것은 이제 선분의 비유에서 가지적 영역의 것으로 제시된 ‘사고’dianoia가 어떤 철학적 성격과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앞에서도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 중 ‘지성적 앎’만이 제5권의 ‘앎’과 동일하게 ‘형상적 앎’인 한, 나머지 단계들은 모두 제5권 기준으로 ‘믿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글라우콘이 선분의 비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사고’를 ‘믿음doxa과 지성nous 사이에 있는 것’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511d)과 부딪친다. ‘믿음’과 ‘믿음과 지성 사이’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분의 비유 자체가 기본적으로 doxa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다가 그 세분화 단계에서 사고가 앎일 수 없다면 사고가 치울 칠 방향은 doxa쪽 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점에서 ‘믿음’doxa이란 말이 선분의 비유 중간에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가(중간에 나오는 그에 준한 표현 ‘to doxaston’(믿음의 대상)이란 말도(510a) 다만, 선분의 비유 상 가시계와 가지계의 관계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to doxaston과  to gnōston의 관계처럼 모사와 원본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비유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그것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는 것도 눈에 띤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제5권의 doxa와 비교하여 그 범위를 ‘사고dianoia’ 아래 단계 즉 확신pistis과 상상eikasia으로 좁혀 설정했음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변증술을 설명할 때 선분의 비유를 꺼내 들어  ‘지성적 앎과 사고’는 noesis로 부르고 ‘확신과 상상’은  스스로도 직접 doxa라고 말하고 있다.(534a)  어쨌거나 논쟁의 소지는 있어 보이지만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글라우콘의 말을 아래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왜 처음에 doxa란 말을 쓰지 않다가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쓰게 한 후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확신과 상상에 국한하여  그 말을 쓰고 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일정 부분 있어 보인다.

* 우선 <표1>에서 보듯 믿음은 앎(있는 것)과 무지(없는 것) 사이에서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성립하는 인식 상태이다. 그리고 앎과 믿음(의견)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경계만 있을 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은 없다. 글라우콘의 말에서 지성을 ‘있는 것’으로 보고 믿음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볼 경우 설사 그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 즉 본질적으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과 앎이라는 당구공이 닿아 있을 때 접점은 하나이고 그 당구공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그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는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당구공의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자면 추론적 사고 자체는 원천적으로 앎이라는 당구공에 속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에 속해 있되. 다만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앎의 방향 쪽 극단 표면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고는 비물질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에 닿아 있지만 기하학적 사유 공간의 연장성을 포함하고 있고 그 연장성은 무규정성의 근본 특징인 한, 기본적으로는 믿음(의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비물질성 뿐만 아니라 공간적 연장성까지도 탈각해야 비로소 앎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서 무규정성을 가장 적게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형상적 앎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존재론적 관점에서건 인식론적 관점에서건 믿음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은 여전히 불가피해 보이긴 하지만 믿음(의견)을 어떤 관점에서 어디에 위치시키건 간에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가지적 영역의 범위를 형상적 앎에만 국한하지 않고 최소한 수학과 기하학 같은 전문 기술들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은 앎과 믿음, 무지의 존재론적 위상과 관련하여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그것의 존재론적 특성을 ‘무규정성’apeiron으로 규정한다. 무규정성은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형상(to on) 쪽 극단에 이르면 ‘자기동일성’tauton으로까지 나타날 수도 있고 반대로 무(無mē on)쪽 극단에 이르면 관계맺음의 원리로서 타자성heteron의 극치로 나타날 수도 있다. 추론적 사고 대상으로서 수학적 기하학적인 것들은 모두 사유 공간에서 공간적 연장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규정성apeiron을 갖는 것이되, 다만 형상 쪽을 향한 최상위 극단에서 물질적 무규정성을 탈각해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다. 기하학적 공간 또는 사유 공간에서 길이가 동일한 여러 삼각형들이 하나의 삼각형으로 합동하여 하나의 삼각형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데아의 자체성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영역에 위치하지만,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으면서 이데아적인 ‘자체성’kath’ hauto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보전함으로써 말로 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 수학과 기하학의 토대가 된다. 철학의 목적은 영혼의 고양을 통해 무규정성의 본질로서 타자성에 역행하여 자기동일성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변증술적 지성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철학의 수행은 영혼의 능력에 따라 그 목적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이 늘 사랑을 지속하는 것인 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철학의 완성은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분투’, ‘위대한 영혼에로의 자기 확장’ 그 자체라 할 것이다.

* 요컨대 제5권의 엄격한 이분법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사고는 <표3>이 보여주듯 앎과 차별되어 믿음(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비록 가시적 모상을 가정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시적 영역과도 관계있지만, 결론은 비가시적 도형 자체로 마무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앎에로의 상승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를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라우콘과 사고를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는 소크라테스가 양립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지성nous과 공통의 어원을 갖는 noēsis와 noētos란 말을 사용할 때 아무 사전 설명 없이 어떤 때는 앎과 사고 모두를 묶어 noētos<표2>나 noēsis(534a)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noēsis를 ‘앎’epistēmē에만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표>2, 제5권) 이것은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에 와서 noētos와 noēsis란 표현을 의도를 갖고 다소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앎epistēmē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엄격하게 유지하면서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의 믿음의 영역을 세분화하여 ‘사고’의 단계를 분리해내고 나머지 단계들을 앞서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좁은 의미의 doxa로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의 범위를 일정 부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술을 통한 형상적 앎뿐만 아니라 ‘사고’ 단계의 앎 즉 수학과 기하학 등 추론을 기반으로 한 전문 기술적 앎 또한 학문적 기초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기하학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성 자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살폈듯이 이성은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사고 단계와 앎의 단계 그 모두에 걸쳐 있다. 철학은 종국적으로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수행은 변증법적 문답 능력을 통해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말과 논리로 이루어진다. 지성에 의한 형상적 앎만이 아니라 사고에 기초한 수학과 기하학 등 전문 기술들technai의 대상 또한 그 자체로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철학적·학문적 탐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학술들을 변증술이 형상적 앎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표현하고 있다.(533d) 요컨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는 현상 구제 차원에서 형상적 앎 아래 단계의 인식 상태들 즉 현상계에 대한 학적 탐문의 길을 확립하는데 크게 비중이 실려 있던 것이다. 

 

*  선분의 비유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단순히 인식론적 명백성의 순차적 단계와 특징 보다는 그 배면에 깔린 존재론적 위상 특히 사고 단계의 위상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이 학적 인식의 확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존재론을 끌어들여 각 단계가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살핀 셈이다. 이제 끝으로 이상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면서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제5권에서 앎과 믿음의 구분과 선분의 비유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로 나누건 넷으로 나누건 ‘지성적 앎’으로서 앎의 단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변함이 없다. 즉 선분의 비유에서 앎의 존재론적 위상 변경에 대한 언급은 없다. 특히 태양의 비유와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상응하는 앎의 단계가 별도의 지위를 갖고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다른 이데아들보다 철학적 위계상 우월한 것일지라도 최소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하나같이 자체적인 존재이자 인식론적으로도 동일한 앎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2) 이것은 결국 선분의 비유의 주요 목적이 ‘형상적 앎’을 보완하고 해명하는 것보다는 그 하위 단계로서 믿음의 단계를 보다 세부적인 단계들로 나누어 그 단계들 각각이 갖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는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인식 과정 전체를 연속해서 상승하는 것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중간적인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 ‘믿음’doxa의 스펙트럼이 최하 ‘상상’의 단계에서 ‘확신’을 거쳐 ‘사고’로까지 분화되면서 각기의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앎에로 상승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특히 플라톤이 ‘사고’를 존재론적으로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고 있다는 것은 지고의 앎으로서 형상적 앎의 위상을 이전의 입장 그대로 보전 유지함과 동시에 하위 대상으로서 수학 또는 기하학적 대상들이 갖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위상을 재정립하여 그 자신 가지적 학문 영역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 역시 변증술의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나 형상적 자체성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가질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4) 그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가시적 영역도 다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으로 세분화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실물을 다루는 일반 기술들과 시가술, 수사술, 미술 등 모방과 꾸밈, 허구와 과장 등을 기반으로 한 기술들을 구분함과 동시에 그러한 기술들이 갖는 나름의 위상도 의미 있게 함께 재정립하려는 의도 또한 담고 있다. 이점에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 ‘사고’dianoia가 서로를 고리로 모상eikōn과 원본의 관계를 갖고 상승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게 주목해야 한다. 특히 최하위 인식 단계로서 ‘상상’eikasia의 경우는 환상과 억측,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감성의 개입 등 명확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게 평가되는 단계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결코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든 일상인의 심리상태에서든 늘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상’은 정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와 청소년기 단계에서는 장차 맞이할 성년기 영혼 형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 삶에서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플라톤이 제3권에서 시가(詩歌)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특히 어린이와 청년기 교육 과정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시가 교육에 상당한 정도의 비중을 할애한 것도 그 때문이다.(376e-403c) 사실 시가는 말과 언어의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선법과 리듬에 허구와 과장까지 포함하고 있어 일부 시인들과 권력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러한 시인들과 그들이 지은 신화나 시가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심적 상태에 시가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얼마나 심대한 것인지 특히 이성적 사고가 채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이나 청소년기에는 얼마나 심각할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전통적인 신화나 시가들을 비판하되 신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건국신화가 보여주듯이 이상 국가에 걸맞은 새로운 시가들을 만들어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는 물론이고 성인 이후에도 시민이라면 누구도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상’은 선분의 비유에서 최하위의 인식단계에 속하지만, 삶에 미치는 비중과 중요성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이 갖는 양면적 영향의 크기만큼 교육의 대상으로서도 매우 중대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제3권에서 시가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시가(詩歌) 즉 리듬과 화음은 영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으므로 …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는 훌륭하지 못한 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보고 싫어하는 대신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며 기뻐하며 영혼 속에 받아들여 … 나중에 이성적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 제일 반길 것이다”(401d-402a)

5)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말의 꾸밈과 과장을 마다않는 수사술rethorikē은 물론 실재의 모사에 대한 모사 즉 이차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고 있는 회화를 비롯한 모방술(mimetikē)도 시가술이 갖는 양면성 차원에서 함께 비판된다. 그것 또한 앞서 말한 상상의 특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술은 소피스트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민주정 치하에서 설득적 언사 대신 말의 꾸밈과 과장의 방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기술로 변질되어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었다. 대화편 제목들의 상당수에 소피스트의 이름이 내걸려 있고 내용에서 상당 부분 그들이 구사하는 수사술에 대한 냉혹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 진실 왜곡과 정치적 선동의 기술로 수사술을 철저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시가에 대한 양면적 태도가 보여주듯이 설득력을 강화하는 말의 기술로서 수사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경우를 보면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역설적인 방식으로나마 수사술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핵심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자체가 이미 상황 설정이나 인물 설정, 대화의 구성 전개 등에서 말의 문학적 꾸밈과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비롯해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은유들 또한 하나같이 모두 말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시가적 표현 기법이다. 그리고 회화 내지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차적인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불분명함과 왜곡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술과 조각은 신들과 신들의 거처를 아름답게 또는 웅장하게 꾸미고 그것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즉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폄하는 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정확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제기된 것이지 그것이 삶에서 갖는 가치까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철학과 병행하여 마치 죽은 돌에서 생명을 끌어내듯이 조각을 생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 ‘영상(影像)’(image)이란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받아들여 지듯이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폄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위대한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치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 자체가 내용상 이미 위대한 철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형식에서 문학적 허구임 또한 분명하다. 플라톤이 학적 정확성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을 기준으로 예술의 위상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은 진실이어도 플라톤이 삶에서 예술이 갖는 가치까지 폄하하고 부정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과 모방mimēsis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제3권(392c-398b)에도 나오지만 나중 제10권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진다.

6) 그리고 ‘확신’pistis 단계의 인식 상태와 그 대상으로서 실물 세계들 또한 ‘사고’dianoia의 모상으로 사고의 하위 단계이지만 인간 삶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물론이고 관심사와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심에 있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삶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 수많은 기술들 이를테면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일반 기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기술들이다. ‘확신’의 대상이 ‘사고’ 대상의 모상이 된다는 것 역시 내림의 과정에서 보면 현실의 실물들이 ‘사고’를 통해 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해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일반 기술 모두는 기본적으로 경험적 숙달과 관련되어 있지만 일정부분 수학과 기하학에 의존해 있어 개연적이나마 기술적 앎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현상 구제의 일환으로 실물을 형상의 분여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7) 결국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에서 ‘믿음’(의견)으로만 구분되었던 인식 상태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구제 차원에서 실질적인 현실 문제의 방책으로서 수학과 기하학의 방법은 물론 제반 기술들 나름의 학적인 위상과 성격을 최대한 뒷받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고’ 단계를 ‘가지적 영역’에까지 확장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 형상적 앎만을 중시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 상태인 믿음의 영역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영역에서 형상적 앎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앎의 상태로 추론적 사고를 설정함으로써 전문 학술들의 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 추가적으로 확신과 상상도 따로 구분하여 그 차이가 갖는 고유한 의미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최정점으로 하는 존재 및 인식 세계의 기본 구도를 보여준 후, 선분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형상적 앎에 이르기 위해 어떠한 하위 단계의 인식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각 단계의 인식들이 현실의 기술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학적으로 어떤 위상을 갖는지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8)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문 기술들과 일반 기술들을 학문적 차원에서 근세 자연과학들을 비교해보자면 선분의 비유는 근세 자연과학적 인식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주요 개념들을 이미 선구적으로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적 문답과 숙고를 거듭하여 영혼이 고양된 상태에서 마침내 첫 원리를 획득하고 다시 그 원리를 토대로 가정들에게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플라톤적 앎의 구도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일원리에 이른 후 그 제일원리를 토대로 연역의 방식으로 개별 지식들의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제일철학과 인식론적으로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에서 ‘확신’과 ‘상상’의 단계는 근대 경험론이 그랬듯이 그 상위 단계로서 최소한의 학적 분별력인 사고dianoia 작용을 배제하고 지식의 원천을 그저 감각적 경험에만 한정했을 경우 왜 회의론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칸트(I. Kant)의 인식론도 관점과 해석만 다를 뿐 근본 틀에서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관조(觀照)theōria의 대상인 플라톤의 형상계를 물자체라는 불가지의 세계로 상정하여 학적 인식에서 배제하는 대신 사고의 단계에서 작동하는 이성의 역할에 주목하여 이성을 주관에 내재하는 인식의 보편적 구성 원리로 삼아 감각적 경험적 지각들을 인간 나름의 보편적 지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단계만 하향되었을 뿐 칸트 역시 현상의 구제 즉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칸트가 인식론에서 배제하였던 물자체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실천철학의 과제로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후의 철학사적 전통에서 특히 근현대 비합리주의자들에 의해 그 물자체의 세계가 오히려 철학적 탐문이 육박해 들어가야 할 참된 실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비록 관점과 용어는 달라도 말과 논리 너머의 플라톤적인 예지계가 침묵의 형식으로건 형이상학적 이념의 형식으로건 철학의 근본 문제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궁극의 관심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All philosophy is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라고 말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이 결코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9) 요컨대 플라톤 철학은 철학적 위계에서 보면 분명 이데아가 지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지닌 관심의 중대성 차원에서 보면 형상적 앎의 내림 과정 즉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구제 차원에서 말과 논리로 성립되는 전문 기술들(오늘날의 개별과학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그저 형상이라는 추상적 관념만 좇는 비현실적 사상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독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후대 철학자들이 자기 철학을 내세우기 위해 아전인수적으로 가해졌던 그릇된 해석에 크게 의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근본적으로 삶의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공존과 조화, 지성과 균형의 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문 기술들이 아무리 현실에서 필요할지라도 형상적 앎을 결여했을 경우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권력과 욕망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철학이 전문 기술들이 갖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무시한 채 형상적 앎을 내세워 고답적인 이론에만 머무는 경우 그것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선과 아집, 폭력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만약 플라톤 철학이 말과 논리를 넘어 형상적 앎에 대한 지적 직관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매달렸다면 플라톤 철학은 철학사에서 결코 철학적 사유의 모태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신비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철학 또는 기독교 신학의 보완물 정도로 운위되었을지 모른다.

 

*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보완하는 일환으로 이상과 같이 선분의 비유를 살핀 후, 이제 제7권에 들어가 그 선분의 비유에 나타난 현실 구제의 구도와 세부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좀 더 실천적이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더 종합적으로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따라 그곳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도 당연히 다루어진다. <국가> 제6권은 이렇게 선분의 비유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국가> 제6권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서평]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함태원(건국대)

 

칸트 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칸트가 위대한 철학자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지럽고 머리 아픈 칸트의 철학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철학을 전공하는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칸트라고 한다면 고개부터 저을 정도로 칸트 철학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칸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는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칸트의 위대한 업적의 비결을 ‘루틴’이라고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루틴을 세우고 이 루틴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칸트야 주변 시민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라 불리는 규칙적인 사람이었으니, 루틴을 지켜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칸트가 아침에 일어나 5분간은 침대에서 그 무엇보다 유혹적인 아침잠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 하인이 커피를 타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커피를 달라고 보채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하지만 칸트가 자기 루틴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이 아침잠에 약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루틴에 이를 포함했다. 칸트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36쪽)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루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루틴을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지도에 목적지도 표시하지 않고 항해를 나갈 수는 없으니 어디로 갈지부터 체크해야 한다. 목적지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도 우리는 칸트 덕에 “진리는 대상에 있지 않고, 내가 구성하는 것”(61쪽)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이다.

그럼, 루틴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우선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든 우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루틴을 완성하고 유지해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을까? 내가 좋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걸까?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도 좋다고 했다면, 칸트가 이토록 이름나있는 인류의 스승은 아니었을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도덕법칙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어려운 법칙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햄버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햄버거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저기 옆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조카의 햄버거를 빼앗아 먹으면 안 된다. 경찰이 아무리 몸이 괴롭고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벌어지는 범죄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것을 지키면 될 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도덕법칙은 자율로서 자신이 세우는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법칙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나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나 칸트의 요점은 이 법칙을 언제나 그리고 확고하게 고수하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몸이 힘들다고, 내가 지금 몹시 허기져 있다고 범죄 현장을 외면하거나 강도 행위를 벌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세운 그 원칙을 공고하게 유지하면 도덕법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 “자율적으로 행하되 그 행위가 도덕법칙인 한에서 행동하자”.(111쪽) 자유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칸트처럼 하루하루 삶의 루틴을 만들어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이유는 엄격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쓴소리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선생님들의 말은 언제나 옳지만 듣기 싫은 소리로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위대한 일은 언제나 고되고 힘든 법이다. 시작하는 25년 새해, 칸트처럼 하루하루 나의 루틴을 정해 지켜나가며 위대한 일을 이뤄내보자.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선분의 비유(509c-513c) – (I)

 

[509c-513c]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해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신령스러운 넘어섬이라고 놀라워 한 후 그것이 갖고 있는 태양과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조금도 빠짐없이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509c)

* 이에 소크라테스는 남겨 놓은 이야기가 많고 또 많은 것을 빠뜨리게 될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시 한 번 가지적인νοητός 영역τόπος과 가시적인ὁρατός 영역을 구분한 후 그 두 영역에 있는 두 가지 부류γένος들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뉜’δίχα τετμημένην 선분γραμμή에 비유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기 시작한다.(509d)

1) 크기가 다른ἄνισα 두 부분τμῆμα으로 나뉜 선분을 다시 동일한 비율로 ‘가시적인 종류의 부분’τό τοῦ ὁρωμένου γένος과  ‘가지적인 종류의 부분’τὸ τοῦ νοουμένου γένος으로 나눈다.

2) 이것들을 서로 간의 상대적인 명확성σαφήνεια과 불명확성ἀσαφείᾳ의 관점에서 보면 가시적인 종류의 한 부분은 모상εἰκών들이다.(509e) 이 모상들은 그림자σκιά들, ‘물에 비친 영상들’τὰ ἐν τοῖς ὕδασι φαντάσματα, 밝고 조밀하고 매끄럽게 만들어진 것들에 비친 영상들 그런 모든 것들이다. 가시적인 종류의 다른 한 부분은 이 모상들이 닮아있는 원본들, 즉 우리 주위의 동물들 τά περὶ ἡμᾶς ζῷς과 모든 식물들 τὸ φυτευτὸν, 그리고 인공물τὸ σκευαστὸν의 종류 전체이다.(510a)

3) ‘진리와 진리 아님’ἀληθείᾳ τε καὶ μή의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가시적인 부분은 믿음(의견)의 대상τὸ δοξαστὸν이 앎의 대상τὸ γνωστόν과 맺고 있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닮은 것τὸ ὁμοιωθὲν이 그것이 닮아있는 원본τὸ ᾧ ὡμοιώθη과 맺게 되도록 나뉘었다.(510a)

4) 그리고 가지적인 것의 부분의 경우, 한쪽은 앞에서 모방되었던μιμηθεῖσιν 것들을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하면서 영혼이 가정ὑπόθεσις으로부터 출발해서 첫 원리ἀρχή가 아니라 결론τελευτή을 향해 진행하며 탐구ζητεῖ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고, 다른 쪽은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서 ‘가정이 놓이지 않은 첫 원리’(무가정의 원리)를 향해 나아가며 저쪽에서 사용한 모상들 없이 형상εἶδος들 자체αὐτός만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통해 탐구μέθοδος를 해나가는 부분이다.(510b)

* 소크라테스가 가지적인 것의 부분들을 ‘가정’이란 말을 끌어들여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계산술λογισμός이나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홀수τό περιττὸν와 짝수τὸ ἄρτιον, 도형들τὰ σχήματα과 세 종류εἶδος의 각γωνία 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다른 어떤 것들을 가정으로 놓고서는 마치 이런 것들을 아는εἰδότες 사람들인 양, 그에 대한 어떤 설명λόγος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 모두에게 분명한 것으로 여긴다.(510c)

2)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것들을 검토해가면서 일관성이 유지되는 방식으로ὁμολογουμένως 그들이 애초에 고찰하고자 했던 것에까지 도달한다.(510d)

3) 기하학자, 계산술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ὁρωμένος 도형εἶδος들을 사용하며 이것들에 대해 논의를 하지만, 그들이 사고하는διανοούμενοι 대상은 이것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닮아있는 그 원본들’οἷς ταῦτα ἔοικ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는 사각형τετράγωνος이나 대각선διάμετρος이 아니라 ‘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αὐτῆς를 ‘염두에 두고’ποιοῦνται 논의를 하는 것이다.(510d-e)

4)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그린 바로 그것들을(그것들의 경우 그것들의 그림자σκιά나 물ὕδωρ에 비친 모상εἰκών들도 있다) 이번에는 모상으로 사용하는데(510e) 그렇게 하는 까닭은 사고διανοίᾳ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ἰδεῖν 저것들 자체αὐτὰ ἐκεῖνα(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를 보기 위해서이다.(510e)

5) 이것들은 가지적인 부류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것의 탐구ζήτησις에서 영혼은 가정을 사용하도록 강제되고ἀναγκαζομένην 가정들보다 더 위로 넘어갈ἀνωτέρω ἐκβαίνειν 능력이 없어서 ‘첫 원리’ἀρχή로 나아가지는 못한다.(511a) 그리고 그 아래의 것들에 의해 모방되며 그 아래의 것들에 비해서는 분명한ἐναργής 것이라고 판단되고δεδοξασμένοις 존중받는τετιμημένοις 것들, 바로 그것들을 그들은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한다. 이런 것들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그와 유사한ἀδελφή 전문기술들τέχναι에서 일어나는 일이다.(511a)

* 소크라테스는 가지적인 부류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으로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이러한 경우란 이성 자체αὐτὸς ὁ λόγος가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을 통해’τῇ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δυνάμει 파악하는 경우로서 여기에서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가정이 놓이지 않은ἀνυποθέτου(무가정의)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τοῦ παντὸς ἀρχὴ에 이를 때까지 거기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ὁρμή이자 디딤 발판ἐπίβασις 같은 것으로 삼는다.(511b) 그리고 그렇게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이성은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결론까지 그런 식으로 내려간다.καταβαίνῃ.(511b)

2) 이러한 파악 방식은 감각될 수 있는 것αἰσθητῷ은 어떤 것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를 사용해서 형상들을 통해 형상들로 나아가 형상들로 끝을 맺는 방식이다.εἴδεσιν αὐτοῖς δι᾽ αὐτῶν εἰς αὐτά, καὶ τελευτᾷ εἰς εἴδη”(511b)

*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설명에 글라우콘은 엄청난συχνός 일ἔργον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한 후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자기 나름으로 정리한다.

1) 전문기술이 고찰하는 부분보다 ‘변증술적 대화를 할 줄 아는 앎’τὸ ὑπὸ τῆς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ἐπιστήμης이 고찰하는θεωρούμενον ‘있는 것’το ὄντος과 ‘가지적인 것’το νοητος의 부분이 ‘더 명확한 것’σαφέστερον이라고 규정διορίζειν할 수 있다.(511c)

2) 전문기술들에서는 가정들이 첫 원리들이며, 자신들이 구경하는 것들을 감각이 아니라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θεᾶσθαι 강제되지만, 첫 원리를 향해 올라가지ἀνελθόντες 않고 가정들로부터 그것들을 살펴보기σκοπεῖν 때문에 이들이 그것들에 관해 지성νοῦς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511c-d)

3) 기하학자나 그런 사람들의 상태는 지성이 아니라 사고διάνοια라고 부르는 것 같다. 사고dianoia는 믿음δόξα과 지성의 중간μεταξύ에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511d)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의 설명을 아주 충분히 잘 받아들였다고 평가한 후, 위에서 설명한 네 부분τμῆμα에 상응해서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영혼의 상태παθήματα가 생긴다고 말한다. 요컨대 맨 윗부분에 ‘지성적 앎’νόησις이 두 번째 부분에 사고διάνοια가, 세 번째 부분에는 확신πίστις이, 마지막 부분에 짐작εἰκασία이 할당된다. 이것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진리 ἀληθεία에 참여하는μετέχει 만큼 명확성σαφήνεια에 참여하며 그것들은 그 비율에 따라ἀνὰ λόγον 배열을 이룬다.(511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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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9d-e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 동일한 비율로 나누게: ‘크기가 다른(an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크기가 같은(an 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 경우 ‘크기가 다른’으로 읽는다. 이에 따라 구분된 선분을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L1          L2          L3               L4

l——–l—————l—————l————————-l

 

L1과 L2 = 가시적인 종류의 것

L1 = 모상들(그림자, 영상) L2 = 실물들(식물, 동물, 인공물)

L3와 L4 = 가지적인 종류의 것

L3 = 가정들(수, 도형, 각)을 놓고 가는 것, L4 = 무가정적인 것, 첫 원리, 형상들-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른 각 선의 길이 비율

L1 : L2 = L3 : L4 = L1+L2 : L3+L4

* 각 선의 비율은 명확성에 있어 가시적인 것에 대한 가지적인 것의 우위와

각 영역 내에서 L1에 대한 L2의 우위, L3에 대한 L4의 우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L1보다는 L2가, L2보다는 L3가, L3보다는 L4가 명확성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제 크기를 보면 L2와 L3가 같다.

* 각선들의 길이가 명확성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L2와 L3가 같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 같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과 표를 통해 드러내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를 고려하면 도표 상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길이로 나타날지를 플라톤 자신 미처 몰랐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음 강해에서 살피겠지만 명백성과 관련한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차이가 분명하지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L2와 L3가 근본적으로 믿음의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L1도 존재론적으로는 같은 믿음의 지위에 있음에도 길이는 그 보다 짧다는 것과 부딪친다.

* 플라톤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선분의 비유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믿음’은 그리스어 doxa의 역어이다. 그런데 이번 강해에서는 ‘믿음’이라는 역어가 선분의 비유에 나오는 ‘확신pistis’이란 역어와 혼동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믿음’에 ‘의견’이란 말을 병기했다. 플라톤에게 pistis는 doxa에 포함된 것이되 신뢰성에서 상상보다는 높은 사고보다는 낮은 수준의 생각과 견해를 말한다.

* L3의 대상이 홀수, 짝수, 도형들, 각으로 예시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L3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들’ta mathēmatika로 부르고 있다.(<형이상학> A.987b15) 플라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하학이나 이와 유사한 학술들’(511b) 즉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이 다루는 대상들로 표현하고 있다.

* ‘사고’dianoia는 사전적 의미에서 뭔가를 목적으로 하는 지적인 궁리이되 논리적 추론이나 설명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적 사고를 말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그 말은 기하학 등 전문 학술들의 인식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 511b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dialegesthai dynamis : 이 표현은 나중 변증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곳(531c-535a)에서도 언급되고(533a) <필레보스> 57e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이것은 ‘있는 것들'(ta onta)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구경(thea)하도록 이끄는 영혼의 힘’(532c)으로 그 상승의 극치에서 마침내 형상 즉  ‘있는 것'(to on)을 본다(idein).  dialegesthai의 일차적 의미는 ‘대화(문답)'(454a 등)이지만 이곳에서 ‘변증술적 문답’으로 옮긴 것은 그 문답과 문답의 극치에서 변증술의 완성으로서 지성적 앎(noēin, epistēmē) 내지 관조(theōria)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511b ‘내려간다.’katabainē’ : 이성이 첫 원리를 파악한 후 다시 거꾸로 사고 단계로 내려갈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 ‘내려간다.’katabainō는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갈 때도(516e) 쓰이고 <국가> 첫 구절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다’(327a)에도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 첫 강해 때도 언급했듯이 <국가> 첫 구절에 모종의 상징성을 부여하여 그 말과 연계지어 그 말들이 ‘현상의 구제’를 함축하는 말로 다소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기도 한다.

* 511c에서는 ‘본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변증술적 문답을 할 줄 아는 앎이 고찰하는 있는’이란 구절에서 ‘고찰하는’으로 번역된 ‘theōroumenon’(원형 theōreō)이고, 또 하나는 ‘전문기술들에서는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 강제되지만’이란 구절에서 ‘구경하도록’으로 번역된 ‘theasthai’(원형 theaomai)이다. 둘 다 기본적으로 ‘본다’(look at, see)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전자는 의미상 speculate, consider 등 지적 사유와 고찰의 뜻을 포함하고 있고, 후자는 오늘날 극장theatre의 어원 theatron에서 thea가 의미하듯 ‘관망’view as spectators의 의미가 크다. 플라톤은 여기서 앎과 사고 단계의 차이에 준해 그 표현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476a에서 ‘앎을 좋아하는 철학자들’과 대비하여 ‘전문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echnos을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heamōn로 일컫고 있는데 이 때 theamōn도 theaomai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theaomai를 ‘구경하다’로 번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일상어의 이러한 미묘한 차이까지 의식하면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사소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플라톤철학 연구자라면 텍스트상의 이러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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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과의 유사성만은 빠짐없이 다시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글라우콘의 요구(509c)에 따라 제시된 비유들이다. 즉 우리가 지금 다루게 될 선분의 비유와 이어지는 동굴의 비유는 모두 태양의 비유와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분의 비유는 태양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전체 구도상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동굴의 비유 또한 동굴과 바깥세계, 어둠 속 횃불과 대낮의 대비 형식으로 내용상 비슷한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그 두 영역 모두 다시 각기 마치 명백성의 단계를 보여주듯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학자들은 그 모든 비유가 아래와 같이 대체로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4단계로 구분되어 있다고 여긴다.

*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는 물론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관건이 되는 핵심 주제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국가>에서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직접적인 전거는 위의 세 가지 비유들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 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세 비유 간의 상호 관계 특히 각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단계별 영역 간 유사성과 상응 관계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들이 전체 플라톤 철학과 관련하여 어떤 철학적 함축을 지닌 것인지를 오랫동안 탐문해왔다.(우리나라에서도 주요 해석가들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자세하게 비교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강성훈, 「플라톤의 『국가』에서 선분의 비유와 동굴 비유」, 『철학 사상』 V.27,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그러나 그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세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이 과연 철학적으로 음미할 만한 정도의 유비적인 상응 관계를 지니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사성에 기초한 그 상응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각 비유를 통해 다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고유 의도를 간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어 왔다. 어쨌거나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은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 동굴의 비유까지 살핀 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세 비유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 비유 간 차별성과 고유성을 살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선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만 비교해 보아도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두 비유는 비록 구조상 동일하게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이라는 공통의 구분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두 영역을 구분하는 이유와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태양이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은 가지적인 영역의 인식론적 하위 단계가 아니라 가시적인 영역의 태양으로부터 가지적인 영역의 좋음의 이데아를 유비적으로 추론하기 위해 별도로 상정된 상호 등치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해 전체로는 네 부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영역별로 분리된 상태에서 동일하게 두 부분 즉 형상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로 구분된다. 그리고 논의 내용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태양이 빛을 비추는 대낮의 실물과 눈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가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이데아와 영혼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형상 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은 유비관계를 갖는 등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위계가 있는 상하 관계를 갖는 비등치적 영역이다. 게다가 두 영역은 위계상 상하 단계로 갖고 있으면서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 단계까지 고르게 다루어지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사고’dianoia 단계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태양의 비유는 두 영역 간의 유비적 비유를 통해 기본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의 근본 특성과 위상을 드러내려는데 기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는 그 좋음의 이데아가 속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의 인식론적 단계들까지 자세하게 다루는 방식으로 오히려 하위의 인식 단계들 특히 추론적 사고가 인식의 방법에서 어떻게 형상적 앎과 관계를 지니면서 그 형상적 앎에로 상승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기본 목적이 있어 보인다.

* 선분의 비유에서 이러한 상승의 측면을 들여다보자면, 가시적 영역의 영상과 실물의 관계는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를 가지면서 다시 또 그 실물들은 윗 단계인 가지적인 영역의 ‘사고’의 모상이 된다. 즉 ‘사고’는 영상의 원본인 실물들을 다시 모상들로 이용하여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인식한 후 다시 또 그것을 발판으로 형상에로 다가간다. 즉 각각 단계는 상호 위계 관계를 가지면서 종국적으로 이데아 즉 형상들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로 이어진다. 요컨대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은 진리를 향한 연속적인 상승의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삼각형과 대각선을 기준으로 보면 ‘물에 비친 그림자’ 수준(영상eikasia 단계)에서 ‘실제 그려진 삼각형과 대각선’으로 상승하고(확신pistis 단계) 이것들은 사고에 의해 모상들로 이용되면서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로 상승한다.(사고dianoia)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증술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지성적 앎noēsis)에 이른다. 선분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위계적 단계들과 그 단계들이 갖는 인식 방법상의 상승은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세계를 향해 올라가는 도정anodos의 단계들과 상응되면서 그 철학적 의미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었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다룬다)

*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이 ‘확신’의 ‘모상’이 되고 다시 ‘확신’이 ‘사고’의 ‘모상’이 되고 그 ‘사고’를 토대로 마지막에 ‘지성적 앎’에 이르는 이러한 상승의 과정은 결국 최상의 인식 상태로서 ‘지성적 앎’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뒤집어 보면 최하의 인식 상태로서 ‘상상’eikasia조차도 인식의 출발점에서 그 상승의 디딤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상상은 그 자체로 실물의 그림자로 감정에 치우치거나 정확성에서 낮은 상태의 인식을 의미하지만 무조건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에게 늘 상존하는 상태이고 특히 어린이 단계에서는 영혼의 구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찌감치 시가(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3권에서 이미 어린 아이들의 감정적인 인식 상태를 부정하긴 커녕 오히려 그 상태에 합당한 방식에 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경우 나중에 이성을 받아들이는 데 더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401b-403c)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의 단계는 다만 정확성의 기준에서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해에서 다시 다룬다.

* ‘도형’(510b)의 그리스 원어는 ‘형상’의 뜻도 가지고 있는 eidos이다. 그런데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eidos는 일상적 용례 그대로 기하학자들이 가정으로 놓고 들어가는 ‘눈에 보이는 그려진 도형들’(510d)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eidos는 형상과 구별하여 도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510d-e를 보면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도형이되 최소한 눈에 보이지 않는 도형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지성적 앎의 단계에서 성립하는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기하학자들이 기하학적인 지식을 구성하거나 설명할 때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일단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학 교사나 기하학자들이 칠판에 도형들을 그리며 설명을 할 때 그들 모두는 칠판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라보지만 정작 머릿속으로는 그 그림들 배후에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떠올리며 그 설명을 이해한다. 요컨대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기하학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와 같은 도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도형들을 그릴 때 염두에 두고 있는 도형들은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추론적 사고 단계에서 성립하는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는 비록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지만 일단 머릿속 사유 공간 이른바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서 연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장성은 이차원·삼차원 공간이 갖는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나 형상들이 있는 세계는 그러한 연장성조차 탈각해 있다. 즉 형상계는 관계맺음의 조건으로서 연장성이 성립하지 않는, 말 그대로 형상이 형상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형상적 자체 존재로서 삼각형 또는 대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기하학자들은 사고 단계에서 어쨌거나 유클리드 공간 속 연장성을 갖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앎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이를테면 기하학자들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직각 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 각각의 제곱의 합과 같다)를 증명할 때 도형들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정리가 공리임을 증명해내는 것과 같다. ‘두 원의 접점은 하나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두 점을 잇는 직선이다’ ,‘평행하는 두 선은 만나지 않는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등 이른바 기하학적 공리들도 모두 기하학자들에 의해 선과 도형과 각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증명 가능하고 또 그렇게 증명된 공리들로부터 다른 수많은 기하학적인 결론들이 도출될 수 있다.   ‘결론teleutē을 향해 진행한다’(510b)는 말도 그러한 도출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기하학자들이나 계산술 또는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 모두,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수와 도형들 각(角)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존재하는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그 수와 도형들 각이 왜 그것으로 그렇게 있는지 그 각각의 내적 본성은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당연히 그것으로 그렇게 있다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학술을 진행한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가정’hypothesis이란 이처럼 그러한 학자들이 학술을 수행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그것으로 있다고 받아들인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놓고 들어가는 것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정들은 바로 그처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가설’과 차이가 있다. 이른바 과학에서 말하는 가설은 ‘둘 이상의 변인들 간의 관계에 관한 일종의 추측 즉, 둘 이상의 변인 또는 현상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검증되지 않은 명제’로서 추후 검증할 수 있도록 기술된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응답’이다. 그러나 이곳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가정들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가정이나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가정 모두 스스로 진리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인식상 모종의 결핍을 공통으로 안고 있다. 사고 단계의 가정들은 최소한의 학적 지위를 보전하기위해 자체적인 존재로서 형상적 앎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고, 자연과학의 가설들 역시 사실들과 정합성을 보전할  때까지만 진리성을 보전할 뿐 본질적으로 개연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자연과학은 개연성 너머 자체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고 단계의 전문 학술들이 근대 자연과학에 해당한다면 플라톤은 이미 자연과학적 진리가 왜 확률적이자 개연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궤뚫어 보고 있는 셈이다. 

*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학술들 즉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은 이와 같이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추론을 통해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이성에 의한 변증술적인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로 향하는 발판이 되고 종국적으로 일정 단계에 이르면 지성을 통해 형상들에 대한 앎과 그 총체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이른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을 ‘기하학이나 그와 유사한 전문기술들technai’로 바꾸어 부르는데(511b) 플라톤은 이러한 학술들을 나중 변증술을 설명하는 단계에 가서 변증술의 획득을 위한 예비교과목(521c-531c)에 속하는 학술들로 구체화한다.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및 화성학 등이 그것이다. 이곳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 즉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와 도형들의 본성과 존재론적 위상, 그에 따른 수학의 학적 위상 등에 대한 논의는 추후 예비교과목과 변증술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플라톤은 이제 가지적 영역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 즉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지성적 앎oēsis에 대해 언급한다.(511b-c) 플라톤은 그것을 ‘이성 자체’auos ho logos가 변증술적 대화의 능력을 통해 파악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즉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무가정적인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에 이르기까지의 출발점이자 디딤 발판 같은 것으로 삼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이 단계에서 첫 원리에 이르는 역할의 주체를 ‘이성’logos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log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설명 또는 추론을 의미하는데 플라톤은 마지막 단계의 앎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그 이성이란 표현과 지성적 앎noēsis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지성적 앎이 종국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지성nous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이성과 지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이성과 지성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추론적 사고에서부터 지성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연속적인데다가 그 과정 대부분을 기본적으로 이성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532a에서 ‘이성은 좋은 것 자체를 행해 출발하고 그것을 파악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이성은 가지적 영역 전체에 걸쳐 변증법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가정들을 출발점이자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이 지성적 앎에로의 상승을 견인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 게다가 이성은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그런 식으로 다시 결론 쪽으로 내려간다.katabainē’(511c) 이 말은 기하학자가 지성을 통해 형상을 포착한 후 올라온 방식 그대로 재정립된 사고 단계로 내려갔을 때 그의 사고 과정에서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은 변증술적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에로의 오름도 담보하지만, 그 첫 원리를 깨달은 후 다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전문 학술들의 가정들의 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그것을 통해 내리는 결론들에도 전문 학술로서 최소한의 학문적 지위를 갖게 해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성은 감각적인 것은 일체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사용해서 형상들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린다.(511b-c) 이 결론은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을 가지고 내리는 결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이다.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사고는 오름 과정의 극치에서 지성nous을 통해 형상들에서 연원하는 존재 및 인식 근거를 제공받아 내림의 과정에서 형상에 의존하되 말로 할 수 있는 학적인 앎의 기초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지성적 앎 없이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만을 토대로 다다르는 결론은 설사 연역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연역이 의존하는 상위 명제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없지만, 그 모태가 되는 첫 원리에 대한 앎을 통해 가정들의 존재 및 인식 근거가 확보될 경우, 그것들을 통해 다시 재정립된 사고 내지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은 말과 논리로 성립하는 이론적 학문으로서 비로소 기초적인 학적 보편성과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앎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나중 그러한 지성적 앎을 획득하는 변증술(531c-535a)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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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심각하게 되물어 보아야 할 의문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지금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와 같은 인식론적 위계가 조금 앞서 제5권에서 존재론에 기초해서 플라톤이 상당히 공력을 들여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한 원칙적인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5권에서는 앎epistēmē과 믿음(의견)doxa이 원천적으로 구분되면서 앎의 형상성이 배타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믿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가지적인 영역에 속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분에 비유에 와서 플라톤은, 앎의 단계는 제5권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것과 원천적으로 구분되었던 하위 인식 단계에 모종의 단계 즉 ‘사고’dianoia라는 단계를 두어 그것까지도 가지적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도대체 플라톤은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히 상당 분량의 존재론적 논의를 토대로 그토록 강조해온 앎과 믿음(의견)의 원천적 차별성을 접어 둔 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앎의 단계에 미치지 못하는 단계까지 설정하여 그것을 가지적 영역의 범위에 포함토록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5권에서 피력한 그 자신의 앎에 관한 근본 입장에 수정을 가하는 것일까 아님 추가적인 보완일까? 추가적인 보완이라면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의도하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전체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다음 강해에서 그에 관한 이러한 물음들에 필자 나름의 답을 제시하면서 선분의 비유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 –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강해(66)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507b-509b]

*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이면서 우선

‘보이기는 하지만 사유되는 것은 아닌’ 가시적(可視的)인 영역과 ‘사유νοεῖσθαι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 가시적인 세계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πολλὰ καλά과 ‘많은 좋은 것들’πολλὰ ἀγαθὰ이 있으며 그렇게 ‘각각의 것들’ἕκαστα은 ‘많은 것들’πολλὰ로 있다.

2) 지성적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αὐτὸ καλὸν와 ‘좋은 것 자체’αὐτὸ ἀγαθόν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형상(이데아)ἰδέα 하나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τιθέντες, 그 하나의 ‘형상’에 따라 각각을 ‘그것으로 있는 것’ὃ ἔστιν이라고 부른다.(507b)

* 그런 연후 우선 가시적인 세계에서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을 시각ὄψις과 비교하면서 ‘보는ὁρᾶν 힘δύναμις‘’과 ‘보이는ὁρᾶσθαι 것의 힘’이 다른 감각과 달리 뭔가 제3의 종류의 더 필요하다는 논의를 아래와 같이 전개한 후 그 제3의 종류의 것으로 빛φάος과 그 빛의 주체로서 태양ἥλιος을 끌어들인다.

1) 감각들을 만든 자δημιουργός는 다른 감각 능력에 비해 ‘보는 힘‘과 ‘보이는 힘‘을 만드는 데 비싼 값을 치렀다.(507c) 이를테면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은 듣고 지각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 없지만 ‘시각ὄψις의 힘’과 ‘보이는 것의 힘’은 뭔가를 더 필요로 한다.(507d)

2) 그 뭔가 제3의 종류의 것γένος τρίτον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ὄμμα 속에 있는 시각ὄψις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ἐν αὐτοῖς 색χρῶμα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507d) 빛은 ‘보는 감각’ἡ τοῦ ὁρᾶν αἴσθησις과 ‘보이는 힘’ ἡ τοῦ ὁρᾶσθαι δύναμις을 묶어놓은 멍에ζυγός로 다른 것들을 묶는 멍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507e-508a)

3) 하늘의 신들θεῶν 중에서 빛을 주관하여 시각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해 주고 보이는 것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태양ἥλιος이다.(508a)

4) 태양과 눈의 관계 : 시각은 태양이 아니고, 시각이 들어 있는 눈ὄμμα도 태양이 아니지만, 감각과 관련된 기관 중에서 눈은 가장 태양과 비슷하다.

5) 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치 태양에서 흘러넘친ἐπίρρυτος 것처럼 태양으로부터 분배 받아ταμιευομένην 가지는 것이다.

6) 그런데 태양은 시각의 원인αἴτια이면서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 요컨대 태양이 좋음τἀγαθὸν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좋음이 낳은 태양은 좋음 자신과 유비ἀνάλογος를 이룬다.(508b) 그러므로 ‘가지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νοητῷ τόπῳ 좋음이 지성νόος 및 사유되는 것들τὰ νοούμενα과 맺는 관계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ὁρατῷ τόπῳ 태양이 시각 및 보이는 것들τὰ ὁρώμενα과 맺는 관계와 같다(508c).

*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더 해서 위 두 영역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508c-e)

* 결국 ‘대낮의 빛’은 ‘진리와 실재’ἀλήθειά τε καὶ τὸ ὄν와 대응되면서 사물을 비추는 대낮의 빛의 주체로 ‘태양’이 제시되고, 그에 상응하여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주체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태양의 비유가 완성된다.

*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태양의 비유를 들어 가시적인 영역에서 대낮의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게 해 주듯이 좋음의 이데아(좋음의 형상, 선(善)의 이데아) 역시 ‘아는 자’(영혼)에게τῷ γιγνώσκοντι ‘아는 힘’(지성)을 부여하고ἀποδιδὸν ‘알려지는 것들’에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진리’ἀλήθεια를 제공한다.παρέχον (508e)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인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기도 하다.(508e)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빛과 시각이 ‘태양과 비슷한 것’ἡλιοειδῆ이나 태양이 아니듯이 앎과 진리 모두 ‘좋음과 비슷한 것’ἀγαθοειδῆ이지만 좋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좋음은 앎과 진리보다 한층 더 크게 ‘존중받아야 마땅한’τιμητέος 것이라 말한다.(508e-509a)

* 글라우콘은 이 말을 듣고 ‘앎과 진리를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아름다움에서 이들을 넘어선다ὑπὲρ ἐστίν니 정말 엄청난 아름다움ἀμήχανος κάλλος을 말씀하고 있다’고 놀라워하며 ‘선생님은 분명 그것을 즐거움ἡδονὴ라고 하시진 않겠지요?’라고 되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는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닮은 점(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εἰκών 유사점)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서 고찰한다.(509a)

* 즉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태양은 그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γένεσις과 성장αὔξησις과 양육τροφή도 제공하듯이, 알려지는 것들의 경우도 그것들이 ‘알려짐’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것’τὸ εἶναί, 즉 그것들의 ‘있음’οὐσία 모두 ‘좋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 받는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좋음은 ‘지위πρεσβεία와 능력δύναμις’에서 ‘있음(본질)’οὐσία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ὑπερέχοντος 것임도 확인한다.(509b)

* 그러자 글라우콘은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익살스레γελοίως ‘신령스러운 넘어섬’(신적인 우월성)δαιμονίας ὑπερβολῆς이라 대꾸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된 탓을 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강요한 대화 상대자들에게 돌린다. 그래도 글라우콘은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게속 해 주기를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현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상정했던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 지성에 의해 알려지는 가지적인 것의 영역을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킨 후 이제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5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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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d ‘빛이 없으면 눈 속에 있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en autois 색chrōma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 이 문장에서 문법상 ‘거기에’가 가리키는 것은 눈이다. 색이 사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각론에 따르면 시각과 대상 각각에 동류의 것(syngenes)이 있고 그 동류의 것이 서로 닮아 있어 교합이 이루어질 때 시각이 성립한다. 오늘날처럼 색이 눈의 망막에 비칠 때 시각이 발생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눈에도 색이 있어 그 색이 사물을 향해 나가고 동시에 사물에 있는 같은 색이 그 시선 상에서 만날 때 특정 색에 대한 지각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가시계와 가지계와 관련한 플라톤의 인식론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동류의 것과 동류의 것’, ‘닮은 것(ho homoios)과 닮은 것’끼리의 교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서 490b에서도 플라톤은 가시계의 시각이 그러하듯이 가지계에서도 “‘영혼의 이성 부분’이 대상 쪽에 ‘참으로 있는 것’(to on ontos, 이데아)에 ‘접근’하여plēsiasas 그것과 ‘교합’하여migeis ‘지성’nous과 ‘진리’alētheia를 ‘낳고’ ‘앎’epstēmē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 509a ‘선생님은 분명 그것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좋음을 엄청난 아름다움이라 말하자 보통 사람들의 경우 여전히 무제약적으로 좋은 것은 즐거움(쾌락)이라는 생각에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알면서도 짓굿게 되묻는다. 좋음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505b-c에서 이미 논박되었음에도.

* 509c ‘익살스레’geloiōs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소산 정도밖에 이야기 못한다고 하고서 좋음의 엄청난 우월성까지 이야기하자 글라우콘은 처음 말은 내숭이냐라는 듯 익살을 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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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선 플라톤에게 인식 내지 존재 세계는 크게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인 세계로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청각이나 미각 같은 경우 소리와 맛이 각각 귀와 혀에 주어지면 바로 청각과 미각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유독 시각의 경우에는 아무리 색깔이 눈앞에 주어져도 빛이 없으면 시각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각은 빛이라는 제3의 것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은 이처럼 시각 세계에서 빛이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듯이 가지적인 세계에서도 그 빛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지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무언가 제3의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가시 세계에서 빛 내지 태양이 하는 역할로부터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추론해 낸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서로 유비 관계(analogon)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소산 내지 이자 같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508b-c)

* 그러므로 가시계와 가지계에서 각기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상호 대응하여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

1) 우선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가시적 세계에는 ‘태양’과 시각 능력으로서 ‘눈’ 그리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많은 것들’이 있다면 가지적 세계에는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와 지성적 인식 능력으로서 ‘영혼’과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각기 하나인 ‘형상(이데아)들’이 있다.

2) 가시적 세계에서 태양은 인식 주관과 대상 쪽 모두에 각각 빛을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즉 눈에는 맑은 시각 능력 ‘보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사물에는 사물의 빛깔을 비추어 그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태양의 빛은 그 양쪽의 힘들을 마치 멍에처럼 서로 연결하여 눈에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즉 눈은 태양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빛을 받아 함께 그 빛으로 사물에서 생긴 보이는 힘과 연결하여 맑은 시각을 성립시킨다.

3)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주관인 영혼과 그 지성적 인식 대상인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마치 태양이 빛을 부여하듯 ‘진리와 실재’를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영혼은 그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지성적 인식 대상을 대뜸 알아차리는 인식(앎) 능력 즉 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이데아들 역시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각기 이데아로 드러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즉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부여받은 영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지성적인 대상들에 자연스레 고착함(머무름apereisētai)으로써 지성의 힘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epistēmē)을 즉각적으로 성립시킨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란 영혼과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진리와 실재라는 빛을 비추어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508e) 다시 말해 좋음의 이데아는 영혼에는 앎을 이데아들에는 진리성을 부여하여 가지적인 세계에서의 지성적 인식 가능성을 완결시키는 근거 즉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눈이 부셔 오랫동안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듯이(508b) 좋음의 이데아도 쉽지는 않지만, 불가지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508e)

4) 그러나 가시적인 영역에서건 가지적인 영역에서건 낮은 단계의 인식 또한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인 세계의 경우 대낮의 태양 빛이 아닌 밤의 어두운 빛이 펴져 있을 때는 눈 속에 맑은 시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침침해서 거의 눈먼 것과 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의 경우도 영혼이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 소멸하는 것에 고착할 때는 영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의견doxa만을 갖게 된다.(508d) 이와 같은 양쪽 세계에서 각기 열등한 인식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면서 각 비유들의 인식 단계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 대응되는지도 논란 거리가 된다.

5) 그런데 이제 더욱 주목할 것은 이후(508e)의 논의에 접어들면서 좋음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근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고 이 인식과 진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식과 진리와도 다르며 그것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이다.(508e) 그것은 마치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과 시각이 태양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태양 자체는 아니듯이 가지적인 영역에서도 인식과 진리가 좋음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좋음 자체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아닌 것과 같다. 좋음의 상태는 그보다 한 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509a)

*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있음’(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그저 단순한 ‘있음’ 정도가 아니라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ousia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이라는 것이다.(509b)  글라우콘이 놀라 익살을 떨며 말하듯 그것은 ‘신적인 우월성’, ‘신령스러운 넘어섬’daimonias hyperbolē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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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수행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앞서도 누누이 밝혔듯이 그 설명 자체가 비유에 기반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의 핵심 부분마저 자신의 말임에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것인 양 설정할 정도로(509b) 자신조차 처음부터 확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이자(利子) 내지 소생(506e-507a) 정도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해석은 비유가 갖는 애매성 만큼이나 학자마다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 어느 것도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플라톤의 대작 중 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의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 철학적 중요성과 체계 내 위상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난망하기는 할지라도 플라톤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에 대한 해명이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탐문이 오늘날까지도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지금부터 필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해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함에 첫 번째 부딪치는 난관은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임에도 다른 대화편에서는 좋음 자체라는 일반적인 형상 차원의 것으로만 다루어질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단초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에서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자 왕’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그곳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나라와 시민들에게 재앙이 그칠 날이 없다’(501e)는 종국의 관점에서 철학자 왕의 등장을 그 자신의 정치철학의 최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좋음의 이데아는 바로 그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인 앎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근본적으로 정치철학의 최상의 원리로서 일단 정치적 앎 내지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은 놀랍게도 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이데아들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차별의 정도에서 그 이데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월적 우월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말 그대로 이데아 가운데 하나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데아들의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로서 지위와 능력에서 다른 이데아들을 훨씬 넘어서는 가히 이데아 중 이데아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좋음의 이데아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좋음의 이데아 또한 자체적 존재로서 다른 이데아들과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초월적 우월성의 내용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질상 다른 이데아들과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서 우리는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좋음의 이데아가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재앙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주어지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회, 우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앎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앎은 존재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철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역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 간의 유기적인 내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수행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이자 정치가는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통해 우주 자연 및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제반 요인들을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정치 지도자 내지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다.

* 사실 ‘좋음’to agathon은 실천철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善)’의 의미와 적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면서 각자의 욕망을 최선으로 추구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화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절제의 덕을 통해 온전하게 확인한다. 사실 ousia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존재나 실체 또는 재산의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구성체에서 개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 또는 ‘됨됨이’로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 이데아들에게 부여하는 이른바 본질(ousia)이란 앎과 덕 등 제반 가치 존재들을 포함하여 ‘알려지는 것들’로서 이데아들이 각기 본질로 지니는 고유한 내적 됨됨이, 제 고유한 값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럿polla’으로 구성된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그 ousia란 다양한 계층들과 개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연관 하에서 각자 갖고 있어야 할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등 제반 덕목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에게 그런 ousia를 제공하고 개별 이데아는 그 총체적 연관에 대한 앎을 토대로 고유의 ousia를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개별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지위와 힘에서 그것보다 한결 넘어서는 초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자 즉 ‘변증술에 능한 자’를 본질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534b)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고유한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고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통치자로 하여금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에게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최상의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궁극의 앎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최선의 유익함을 담보해주는 총체적 앎과 실천의 궁극적 지표로서 특별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그러한 우월성을 플라톤 말기의 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론을 우주의 생성과 기원 차원에서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여럿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을 위해 ‘좋음’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오직 그것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선한 우주를 제작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제작 목표와 그 원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철학자 왕의 국가 건설 목표와 그 원리로 그대로 이어진다. 즉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은 ‘좋음’은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이상 국가를 세우면서 철학적 앎의 본으로 삼고 있는 ‘좋음의 이데아’ 바로 그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에 따라 우주 제작과정에서 우주적 조화와 공존을 구현한 그대로 철학자 왕 또한 ‘좋음의 이데아’에 따라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곧 좋음의 이데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존재 세계 내 서로 다른 이데아들의 위상을 정해주고 자연과 나라 등 여럿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또 다른 이데아인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좋음의 이데아 또한 이데아인 한, 타자와 관계 맺음이 불가한 자체적인 존재인데 그러한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이데아들의 조화와 공존에 관계할 수 있는가? 그 관계 맺음의 성질 자체가 자체적 존재로서 이데아의 근본 성격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사실은 이데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한 논의는 이데아들의 상호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있는 <소피스트>,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정의(定義) 대상의 유적 형상을 최후의 종적 형상들에까지 분할하는 <파이드로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직조술을 다루는 <정치가>의 논점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형상들의 나눔(454a)과 상호간의 결합(476a)은 <국가>에서도 일단 언급은 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는 <국가> 이후 후기 작품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여럿의 조화를 규정하고 관장하는 성질이 이데아로서 자체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까닭도 따로 없다. 왜냐하면 관계 맺음이나 조화라는 성질 자체는 마치 수적 비례가 내포하는 객관적 성질처럼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 채 자체적 존재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이데아도 3개의 직선들이 직선의 이데아로서 각기 자체성을 보전한 채 결합된 하나의 이데아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변화나 관계 맺음 내지 타자성은 그 이데아가 물질적 무규정성과 섞이거나 분여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내포 상 다른 이데아들에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고 그 이데아들의 총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나 이데아 세계에서는 다만 홀로 무(無)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자체적 존재로 있을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성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데아적 자체성을 갖는 이데아로 각기 그 자체로 있다가 다만 그 이데아들이 각기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물질적 타자성을 매개로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그 위계 관계는 현실화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각기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와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신체로 결합되면서 같은 신체 부위의 하나인 두뇌의 지배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총체적인 유기적 안정성과 조화를 보전하는 이치와 같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지휘자와 개별 연주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휘자의 이데아와 개별 연주자들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는 각기 하나의 이데아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즉 동등하게 서로 자체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그대로 있다가 오케스트라라는 관계 맺음의 장에 들어서면 비로소 타자성을 통해 역할과 위계성을 드러내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함께 생산하게 되는 격이다.

* 이렇듯 이데아들은 이데아 세계에서 서로 관계 맺음 없이 각기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 이데아들은  서로 다른  고유 성질을 각기 내포하면서 데미우르고스의 제작행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우주 자연의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그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하나이되 다른 이데아들과의 총체적 연관성과 규정성을 자체성으로 갖고 있는 또 다른 성질의 이데아인 것이다.

*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좁혀 보면 사회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의 내적 관계를 그 고유 욕망에 따라 조화롭게 공존케 하되 그것을 통해 나라 전체의 좋음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이데아인 것이다. 여럿의 세계가 상호 의존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한,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고려는 코스모스로서 우주 자연을 비롯해 인간 사회 나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 해결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련된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그것들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나라와 시민들의 유익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이면서 다른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우월성을 갖는 근본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앎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는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개별 이데아들의 고유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상호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고의 철학적 앎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신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에 언제나 전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을 가지자로 언급하고(486a) 철학 교육에서 실재to on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 봄’synopsis을 강조하는 것도(537c), 철학자 왕에게 요구되는 변증술의 궁극 목표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두는 것도(534c) 그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모음과 나눔을 통한 변증술과 관련하여 ‘모음’agein을 ‘여러 군데로 흐트러져 있는 것들을 ‘총괄하여 봄으로써’ synorōnta 하나의 이데아mia idea로 모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265d)

* 이처럼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과 그것에 대한 총괄적이고도 전면적인 답변을 간취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망의 극치에 형이상학적 탐문이 자리하고 있다면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사에서 그 형이상학적 탐문의 총체성과 영원성을 기초 지우는 지고의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상학이 말 그대로 지적 욕망의 극치에서 성립하고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또한 그 욕망의 소산인 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합리주의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의심과 탐문 하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비주의 내지 비합리주의까지 포괄하는, 말 그대로 ‘신령스러울 정도의 넘어섬’으로서  존재세계 전체에 대한 근원적 숙고로서 거대 담론과 세계관 철학의  시원적 원상paradeigma이라 할 것이다.  

* 끝으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는 플라톤의 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태양이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는 생물학적 표현과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와 본질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표현이 내용적으로 상호 등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490b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표현들을 상기하면 왜 그것들이 서로 상호 등치가 되는지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의 빛이 그리하듯 영혼과 이데아 양쪽에 진리성과 실재성을 제공하여 영혼에게는 지성nous을 이데아들에게는 본질ousia을 갖추게 하고 그들을 서로 동류의 것들로 만나게 하여 앎(인식)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490b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은 이와 동일한 내용을 이곳 태양의 비유에서 그런 것처럼 생물학적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영혼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데아)이 서로 ‘동류의 것’임을 ‘사랑’으로 포착하여 서로 ‘접근’하고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고’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되게 ‘살며’ 그것을 ‘양육’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영혼과 이데아에 미치는 이러한 과정은 플라톤 스스로 태양이 시각과 사물에 미치는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그대로 지성과 진리와 앎을 생성과 성장, 양육시키는 것과 자연스럽게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인 한 자체성을 가진 부동자임에도 어떻게 태양의 빛처럼 무언가를 제공하는 작용력을 갖는 운동자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의 빛과 같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 대상에 비춘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 빛의 작용력이 그러하듯 좋음의 이데아 또한 분명 뭔가 이데아들에 작용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가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을 ‘한층 넘어서’hyperchontos 이처럼 빛과도 같은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말은 마치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차별을 넘어 능동자로서 신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과 난점들은 철학사를 통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에 급기야 신비주의 내지 신학적 성격까지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사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능동자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유출하는 일자와 연계지어 논의되었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의 선성을 해명하는 근거로까지 인용되었다. 

*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능동적 작용력과 관련한 의문 역시 그것이 갖고 있는 내적 관계성과 총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해명될 수 있다. 앞서 누차 살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다른 개별 이데아들과 달리 그 개별 이데아들로 구성되는 우주 자연의 총체적인 진상 및 그 내적 연관과 관련한 지고의 앎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로 하여금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이데아들 전체와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고유한 위상을 갖고 그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지 즉 개별 이데아로서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앎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개별 이데아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존재하되 선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연관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같은 이데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총체성과 개별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데아들과 다르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 양육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 주관과 대상 모두에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여 능동적인 지성을 통해 앎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 점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을 본으로 삼아 지성을 통해 영원하고 선한 우주를 제작한 것처럼, 나라에서 철학 통치자들도 그러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앎을 토대로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시민들에게 본성에 맞는 고유 위상을 부여하고 모두의 유익함을 관철한다. 데미우르고스가 신으로 불리듯 철학자 왕 또한 말 그대로 지위와 능력에서 위계상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지성의 결합의 극치를 규정하고 그 실현을 담보하는 신령스러운daimonias 원리인 것이다.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존재 세계를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들로 크게 구분한 후 가시적인 영역에서 태양의 역할에 주목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지적인 영역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역할을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좋음의 이데아는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존재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위상을 갖는 존재로서 확립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 좋음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앎의 체계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어떤 인식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선분의 비유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가시계와 가지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지성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2월 제15차 정기세미나 영상│『중국현대철학사론』(2020)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발제:이병창 │2024.12.20.

이규성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발제 세미나

-주제: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발제: 이병창 선생님
-일시: 2024년 12월 20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모택동의 사상 즉 마오주의는 흔히 중국 현실에 적용되는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은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실천적 과정 속에서 피의 경험을 통해 탄생한 사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규성 선생은 마오주의를 모택동의 청년기 사상의 영향을 통해 이해하는 독특한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규성 선생은 청년기 사상이 후일 문화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만이 아니라 마오주의의 혁명 전략 속에서 관철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관점이 옳은가 보다 그런 관점을 취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규성 선생이 사상적으로 모색하는 지향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발표원고: 중국현대철학사-마오(발표)+후기(공개)

다음 세미나(2025년 2월 21일 금요일 오후 4시 한철연) – 주제 :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MGw6ZlGY948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서평: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독서가 마무리될 때쯤, ‘12․3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 독후감을 쓰는 오늘 12월 10일 현재, 탄핵안의 자동 폐기에 뒤이어 이곳 남한의 주권대행자 윤석열은 사실상 모든 행정권한을 잃고 있다(그럼에도 권리상 그는 여전히 행정부 수반이자 군통수권자이다). 내게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43장 「풍요를 해방하라」에 담긴 내용은, 여기 계엄의 비상시를 달리 재생산하려는 입법권력에 대해, 그 국회의사당 입법권력의 정면을 점유한 인파人波의 비상시적인 힘에 관해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회집하고 있는 그 인파를 홀러웨이가 말하는 “무리rabble” “어긋나는 자들misfitters” “비복종자들”로 새겨 보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을 듯하다.

그들 무리, 어긋나는 자들 속에는 법치주의적 시스템 혹은 자유/자본주의적 헌정질서 안에서within 그것을 거스르며Against 그 너머를 향해 가는Beyond 일상적이고도 편재하는 클리나멘(원자의 측정 불가능한 이탈/편위偏位 운동)의 계기들이 잉태되어 있다. 그들 무리의 어긋남이 일으키는 관계적 균열의 효과를 탐지․분석․구성하려는 홀러웨이의 일관된 의지가 “소망적 희망”과 “이성적 희망”을 구분하는 준칙이 된다. 이성적 희망과는 반대로 소망적 희망은 희망 없는 시대를 연장하고 위기와 절멸이 지연되게 만드는, 체제 내화되고 있는 범용한-안전한 감정, 말하자면 체제를 조바꿈하면서 보전하는 전前-종말론적 근본정조이다. 이성적 희망, 그것의 형질․벡터․이념을 달리 표출하기 위해 다시 인용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책에 거듭 인용되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맑스, 1857)의 한 대목이 그것이다.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풍요Reichtum란 보편적 교환을 통해 창출된 인간적 필요, 능력, 쾌락, 생산력 등의 보편성 외의 다른 무엇일까? … [풍요란] 이전의 역사적 발전 이외의 어떤 전제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총체성 [외의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모든 인간적 능력의 발전을 (사전에 결정된 잣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으로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인 전개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특수성으로 생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은 어디인가? 자신이 이미 되어진 어떤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절대적인 생성 운동 속에 있으려고 애쓰는 곳은 어디인가?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또는 한계 부여됨으로써 균형 잡게 되는 국가권력적 기관들 간의 비밀리에 일원화된 연계망이 공개됨으로써 파열될 때에, 여기 계엄령의 해제 및 탄핵안 폐기 이후 친위쿠데타와 여당의 연성쿠데타가 내란죄 구성요건과 위헌정당 해산 요건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여파의 때에, 그러니까 “오래된 것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한 위기의 때,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나는 그 공백 시기[인테레그눔]”(A. 그람시)에 무리는 계엄령의 목표가 공화적 분립을 파기한 내전적 통치력의 한계 없는 완전체․총체였음을 우선적으로 인식한다. 암세포가 퍼진 주권대행체와 이를 중심에 둔 말기적 권력계가 사실상 이미 폐절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힘의 구축이 권리상 아직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태, 낡은 노모스의 정당성 근거와 합법성 보위가 벌써 [박]탈정초Entsetzung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노모스의 취득이 여전히 수행되지 않고 있는 여기의 궐위상태[공위(空位)상태].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무리는 계엄령의 벡터에 따라 재정초될 권력관계라는 것이 최종심으로서 재량적 생살여탈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생명 통할의 총체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정하는바, 우선 무리는 ‘선량한 국민’과 불온한 비국민을 구별하는 총체적 내전권력(초법적 내전정체)의 정립을 저지하는 힘으로서, 그런 총-통에의 의지 및 총통이라는 최종목적을 절단하는 폭(권/위)력으로서, 다르게 생산되는 ‘총체성’의 이념을 체현하고 발현시킬 수 있다. 이 과정을 집약하는 홀러웨이의 중심 테제가 “풍요를 해방하라”이다. 그런 과정/소송을 홀러웨이와 함께 집약하면서도 달리 전개시켜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풍요’라는 번역어의 성립 사정에 대한 옮긴이 조정환의 문장들이다: “번역본으로 『자본』을 접한 우리는 ‘풍요’라는 단어의 자리에 대개 ‘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맑스가 사용한 독일어 원어는 Reichtum이다. 홀러웨이는 독일어 Reichtum을 대개의 영문 번역에서 사용된 wealth로 번역하지 않고 richness로 번역했다. 이런 독해 전략을 통해 wealth를 부르주아적 형식의 ‘부’로, richness를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진 ‘풍요’로 해석하는 개념 분할이 성립하는 것이다. 명사로 쓰일 때(Reich) 나라, 제국 등을 의미하게 되는 독일어 형용사 reich는 어원적으로 power(ful)을 함축하고 있다. 이 때문에 reich는 넘쳐흐르는 힘을 지시하기에 적절한 용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우리말 ‘부’가 아니라 ‘풍요’라고 옮겼다. 어원적으로 부유할 富부자는 넉넉함이 집 안에 가두어진 모양(즉 곳간의 풍요)을 가리킨다. 반면 풍년 豊풍자는 그릇 위에 가득 담긴 음식이 넘칠 것 같은 형상을 가리키고 넉넉할 饒요자도 먹을 것이 넘치는 모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풍부, 풍성 등 풍요와 결합된 넘쳐흐름의 언어들은 드물지 않다. 이 풍요는 흘러웨이에게서 존재론적 역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풍요의 해방, 그것은 궐위상태 속의 무리에게 가장 가까이 접선되고 있는 새로운 노모스 창출의 근원이자 방법이다. 그것은 어긋나는 무리에 의해, 무엇보다 궐위상태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형될 수 있을 구원적 사회구성체의 목표이자 산물이다. 그러나 사정은 단란하게 단선적이지 않은데, 무엇보다 궐위상태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병적 증상들이 폭발하는 위기적 시간이 궐위상태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이라는 순수통치의 별/이념형, 다시 말해 하달된 명령에서 벗어나는 일은 엄중히嚴 삼가도록 하는戒, 삼엄하게 자제시키는, 알아서 무념이 되게 하는 계엄령martial law, 내전권력의 법통할권. 달리 상기시키건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치안-축적의 명령어 속으로, 그 암구호 속으로 합성된 사회를 재생산하는 군정적 노모스. 그 낡은 노모스 바깥으로 어긋나면서 모여드는 자들, 말하자면 회집하는 아웃-로out-law. 그러나 그 무리의 클리나멘은 궐위상태 속에서 탄핵-재선출이라는 법치주의적 헌정질서의 회로와 접선되기 십상이다. 그런 한에서, 궐위상태란 떠나온 안전지대/고향으로의 회귀와 그런 고향으로부터의 진정한 어긋남, 공공의 안전이라는 보험법적 보장체제로의 환류와 그런 체제로부터의 탈구out of joint라는 상충하는 벡터의 전장이자 적대적 토포스들의 연계체이다. 인용된 맑스의 질문 형식으로 된 희망의 출처, 즉 ‘스스로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과 ‘절대적 생성 운동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홀러웨이는 답한다: “집회나 코뮌이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말하면서-듣는 운동이다. 그것은 미리-정의된 선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있는-곳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다. 이는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심지어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의 유토피아적 핵심, 그들의 존엄, 그들의 고통, 그들의 꿈을 만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인-나I-that-is-We와 나인 우리We-that-is-I의 상호 인정을 향해 손을 뻗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는 풍요의 합류이다. 그것은 상품 교환, 화폐, 국가 그리고 법을 통해 확립되는 사회적 결속에 대립하는 사회적 결속의 구축이다.” 궐위상태라는 전장에서 접선되는 유토피아적 핵심. 이 블로흐적 희망-유토피아 곁에 자리매김해 놓게 되는 것은 새로운 노모스의 장소성을 표현하면서 그 노모스의 창출과 접선되고 있는 “아-토포스A-Topos” 혹은 “유-토포스U-Topos”(없는/없애는 장소)론이다: “유토피아라는 인공적인 낱말 속에는 대지의 낡은 노모스가 근거해 있는 모든 현장확정들의 거대한 지양Aufhebung 가능성이 함축적인 선율로 표명되고 있다.”(칼 슈미트) 그런 지양의 실험적 가능성과 원상회복적 불가능성이 더불어 잠재해 있는 궐위상태 속에서 “희망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저항이 반란으로 넘쳐흐르는 정도 만큼이며 서로 다른 억압상태들을 연결하는 점들을 적어도 도식적으로라도 잇기join 시작하는 정도 만큼이다.”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과 절망은 반대말이 아니다. 절망을 단념하지 않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절망이 희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반복하는 절망이, 그런 절망 속에서 차이의 조형 가능성에 내기를 거는 일이 진정한 절망의 조건이자 현명한 희망docta spes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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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6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좋음의 이데아 서론(502c-507a)

 

*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501e) 플라톤은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토록 꺼내고 싶었던 생각 즉 철학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필연적 정당성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사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통치자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철학 통치자를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털어놓는 것은, 만일 그렇게 했을 경우 아예 논의 시작부터가 어렵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화자들은 물론 선입견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제4권까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제5권 이후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논의 방향을 전환한 후 그것을 계기로 이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 국면에서 플라톤은 무엇보다 우선 철학자가 세상의 평판과 달리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적합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그러한 철학 통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즉 철학 통치자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제시하려 한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제 철학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과정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의 가장 크고 중요한 배움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이데아’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가 핵심 논의 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 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자리한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제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계획했던 철학적 논의의 최정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제7권 ‘동굴의 비유’까지 이어지는 가히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502c-50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통치자들을 언급하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그랬지만 이의제기에 답하다 보니 그렇게 논의를 미룬 것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502d)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더는 주저함ὄκνος이 없이 정치체제의 구원자들οἱ σωτῆρες이자 가장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εστάτος 수호자들로서 철학 통치자들이 임명되어야 함을 과감히 선언한다.(503b) 물론 철학 통치자들 역시 지난번 언급했던(제4권 412b-415d)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과 자격들을 갖추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은 물론(503a) 기억력과 재치 활달하고νεανικός 민첩한 성향, 차분함ἡσυχία과 진중함βεβαιότης 등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503d) 특히 소크라테스는 시험과 훈련을 통해 이들의 성향이 과연 ‘가장 큰 배울 거리’μαθήματα μέγιστα도 감당할 힘이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다른 일들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503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가장 큰 배울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영혼의 세 부분을 나누면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 각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했던 때(제4권 436a ff)를 환기케 한 후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περίοδος가 있음에도 그 당시에는 엄밀성이 결여한 채로 이야기했음을 토로한다.(504a-b) 그때는 그것을 재는 척도μέτρον가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의 척도도 아님에도 당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에게 가장 불필요한 일이다.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은 더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수고만큼 배우는데도 더 큰 수고를 해야 한다.(504c)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장 크고 가장 적절한 배울 거리의 마지막 지점’τοῦ μεγίστου τε καὶ μάλιστα προσήκοντος μαθήματος ἐπὶ τέλος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덕들에 대한 밑그림일 뿐이고 이제 그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해내는 일, 즉 그것들을 가능하면 엄밀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애를 써야 하며 그 엄밀성도 가장 커야 한다고 말한다.(504d) 그런 연후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테이만토스를 향해 ‘좋음의 형상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ὄφελος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그것은 마치 좋음을 빼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음ἀγαθός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φρονεῖν하고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것’καλὸν καὶ ἀγαθὸν에 대해서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는 것이다.(505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πολλοῖ들은 좋음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φρόνησις이라 여긴다고 말한 후 후자의 경우는 그게 어떤 현명함인지를 밝혀줄 수 없어서, 결국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505b). 그들은 좋음이 뭔지 모른다고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우습게도 자기들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우리를 그걸 아는 사람인 듯이 대한다. 그것이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좋음’이란 이름을 그들이 언급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505c)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쁜 즐거움이 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동일한 것들이 좋으면서 나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505c)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δίκαια 것들과 아름다운 καλὰ 것들과 관련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택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또 그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τὰ ὄντα을 추구한다.ζητοῦσιν. 좋은 것의 경우 이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ἀτιμάζει.(505d)

* 게다가 모든 영혼이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런 뭔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ἀπομαντευομένη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λαβεῖν할 수 없어 당혹해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자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게 될 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이러한 것에 대해 그토록 깜깜한σκοτόω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505e)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좋은지’ὅπῃ ποτὲ ἀγαθά ἐστιν를 모르는 경우 별 가치가 없는οὐ ἄξιον 사람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두게 될 것이다. (506a) 그것들을 아는 수호자가 정치체제를 감독ἐπισκοπή할 때 우리의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질서 잡힐 것이다.(506b)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좋음τὸ ἀγαθὸν이 앎ἐπιστήμη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이것들 말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지를 묻는다. 이제 좋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생각 말고 자기 생각,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δόγμα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것들에 관해 씨름해 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신념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506b)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다’라고 답한다.(506c)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믿음δόξα은 그중 최고의 것αἱ βέλτισται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추하고 눈먼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성이νόος 없는 채로 ‘참인 믿음’ἀληθές τι δοξάζοντες을 갖고 눈먼 채로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좋음에 대해 직접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부디 여기에서 물러서지 말고 지금까지 정의와 절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신διῆλθες 것처럼 그런 식으로 좋음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506d)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거면 충분하고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ὅπως μὴ οὐχ οἷός τ᾽ ἔσομαι 열심히 해 봐야προθυμούμενος 흉한 꼴ἀσχήμων이나 보이고 비웃음γέλωτα을 사게 될 것 같으니 비록 이야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αὐτὸ μὲν τί ποτ᾽ ἐστὶ τἀγαθὸν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ἐάσωμεν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지닌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πλέον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괜찮다면 좋음은 말고 ‘좋음의 자식ἔκγονός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ὁμοιότατος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 아버지πατήρ에 대한 이야기διήγησις는 다음 기회에 갚아주셔도 된다고 말한다.(506e)

* 그리하여 마침내 좋음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τὸν τόκον τε καὶ ἔκγονον αὐτοῦ τοῦ ἀγαθοῦ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 나름의 생각τοῦ δοκοῦντος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50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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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b 가장 엄밀한 의미의akribestos : ‘엄밀한’의 그리스어 akribēs는 exact, accurate, precise 즉 ‘정확한’, ‘엄밀한’의 의미를 물론 갖지만 내용적으로 ‘자세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관련하여 부족이나 결핍 상태가 없는 순전하고도 완벽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03d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정치가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술 즉 통치술의 기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요소나 반대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결합해 내는 기술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는 이러한 통치술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씨줄과 날줄을 하나로 엮는 직조술의 비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반대적인 것(to anantion)이나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하나로 공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나라에서 공동체적 현실로 구현되어야 하는 한, 그것들은 동시에 하나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그러한 반대적 성향들을 이미 자신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정치가> 281a-283b 참고)

* 504 b ‘정의와 절제, 용기 및 지혜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우회로(迂廻路) perihodos : 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patrol, survey in thought) 이 우회로는 제4권 435d에서 언급되었고 곧이어서 504d에서도 ‘에돌아 가야 할περιιτέον 더 먼 길’이란 말로 다시 또 언급된다. 제4권 435d에서 그 말이 언급되는 배경을 지금의 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개인의 혼과 연결지어 논의하면서 정말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관습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덕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 수준을 넘어,  철학 통치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덕목들의 기초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덕에 관한 완벽한 논의임을 소크라테스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철학 통치자를 입에 올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논의 수준의 적절성에 따라  이상국가의 철학적 덕목으로  새롭게 다시 확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6권 지금의 논의 국면에서 그것은 논의의 척도상 결코 완벽하지도 적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언급했었던 ‘그 덕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논의가 ‘좋음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토대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504c-d에서도 그 길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이 에돌아 가야할 더 먼 길’로 언급되면서 내용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훈련을 통한 심도 있는 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이 이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우회로’perihodos의 의미는 지름길을 갈 수도 있는데 길게 돌아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학 통치자로서 다다라야 할 지고의 목표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 단순히 말해 ‘보다 길고 먼 길’을 의미한다.

* 그런데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의 관점에서 플라톤이 그 먼 길을 왜 우회의 의미를 지니는 perihodos란 말로 사용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 스스로 이미 두 가지 복합적인 의도를 갖고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나는 텍스트상 의미한 그대로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회로perihodos라는 말의 원래 뜻(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그대로, 말로 나라를 세우던 단계에서는 논의 정황상 철학 통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일단 그때 수준에 맞추어 논의하는데 만족하되, 다만 정확한 척도에 맞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 차원에서 그 기초가 될 내용들을 두루 잘 살펴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라톤은 논의의 성격과 정황을 고려하여 통치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논의를 에둘러 미뤄오다가 제6권에 와서야 불가불 털어놓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502d)

* 우회로의 의미를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가 좋음의 이데아로 향한 멀고 긴 철학적 준비와 논의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면밀한 우회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핵심 주제로 철인 통치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처음부터 당장 철학자나 철학 통치자 이야기를 꺼내들면 대화 자체가 출발조차도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 및 대화 전개의 문학적 구성(plot)상 1) 일반 공통관심사인 개인의 행복과 정의를 화두로 꺼낸 후 2)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 다음, 3) 말로 세운 이상국가론을 펼치고, 4) 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빌미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자신의 애초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길고 먼 우회로를 에둘러 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같이 자신의 속내인 철학 통치론을 <국가> 논의의 정점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후 논의의 후반부를 현실 국가론과의 비교를 통해 최초의 정의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조정해가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본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는 마치 등산할 때처럼 등정에 앞서 행하는 준비운동 단계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 올라선 정상의 모습, 내려오는 과정,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고 산행을 뒤돌아보는 과정까지, 진리라는 산을 오르는 위대한 등반여정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 505a ‘좋음의 형상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으니 말이네’ : 이곳 소크라테스의 언급만 보면 좋음의 형상과 그것의 쓸모나 유용성이 여러 번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좋음이란 말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형상으로 언급된 곳(476a)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음이 쓸모나 이로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다(<메논> 87e-88e,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형상 일반의 차원에서 언급되었거나 좋은 것과 관련한 일반적인 논의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이곳에서처럼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이곳의 언급은 아마도 대화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데이만토스와 플라톤 사이에 그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던가 아니면 좋음을 매우 특별한 형상으로 언급하기 전에 좋음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카르미데스>173 a, <에우튀데모스> 280e, 289a, <라케스> 199c, <뤼시스> 219b, <파이돈> 69b 참고)

* 506b-c ‘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이라 여긴다’ : 이 주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각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즐거움에  좋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나쁜 즐거움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 주장의 자기 당착을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혜’라는 답이 주어지자 다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너도 알고 있잖아?’라는 식으로 다시 ‘좋음’이라고 답하는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506d ‘앎이 없는 믿음, 지성이 없는 채로 참인 믿음 : 플라톤은 앎과 믿음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나중 선분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앞서 시민적 덕을 언급할 때도 그랬듯이 믿음이라도 모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다만 통치자들가 갖추어야 앎과 엄격히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눈먼 상태로 언급되고 있을 뿐, 시민적 덕 또는 시민적 용기 등 이른바 올바른 믿음(aretē doxa)은 덕에 준하는 것으로서 앎에 상당 정도 관여되어 있다.

* 507a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 : 이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tokos는 그 자체로 ‘자식’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금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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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드디어 철학 통치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좋음의 형상’(ē tou agathou idea)을 언급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좋음’(to agathon)이란 말 자체는 우리말 역본 색인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좋음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 비로소 쓸모 있고 이롭게’ 되며, 나아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이 없다’고까지(505a) 말하는 것은 이곳에 처음이고 유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좋음 말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해도 좋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505b)까지 말한다. 사실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함으로 여기지만 그들 모두 좋음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인 한 ‘그렇게 보이는 것’(ta dokouta)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ta onta)을 추구한다.(505d) 겉만 정의롭거나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있으나 겉만 좋은 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좋은 것과 관련해서만은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한다. 요컨대 좋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 좋음에 대한 추구가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에게 무제약적인 한,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들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개인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통치 이념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표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민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지고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 통치자가 알아야 하는 앎들 가운에 최고의 앎이다. 실제로 좋은 것의 획득은 진정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결코 좋음에 대해 캄캄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505e) 그러나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할까? 누군가에게 좋은 것은 누군가에게 나쁘기도 한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좋은 것은 공리주의 주장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이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는 무제약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약적으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앎이다.  그리고 철학 통치자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 모두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 통치자의 앎을 통해 진정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의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철학 통치자에게 그 사람은 강제와 징벌을  통한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기초한 교육과 설득,  교정과 변화를 통해 공동체적 조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다시 끌어 안아야 할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가히 신적인 토대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그 자체로 지고의 좋음을 구유하고 있는 영원 불변의 실재이다. 그러한 한, 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우주적 좋음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그 참되고 객관적인 앎을 구성하는 지고의 형상이 다름 아닌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을 무제약적으로 다 좋게 하는 것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에게 그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이르러야 할 지고의 앎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낭만의 끝이 어디인지, 정치적, 도덕적 이상주의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히 절망이라 할 정도의 시대 현실에서조차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회의와 데카당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이상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 <국가>에서 플라톤이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와 개인의 덕들 즉 지혜와 용기와 절제 정의의 덕들이다. 사실 그 덕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기본적인 사주덕(四柱德)으로 이미 익숙한 덕목들이다. 그러다 플라톤에 와서 그러한 덕목들은 단순한 관습상의 경험심리학적 차원을 넘어 나라와 개인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게 확립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들마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부터 단칼에 그 좋음의 이데아의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내려앉는다. 이것은 아예 <국가> 논의의 시작부터 플라톤 스스로 그 철학적 덕목들조차 전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제반 철학적 덕목들조차 넘어서는 자신의 철학에서 최고 최상의 지위를 갖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특히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좋음의 형상’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한 그 모든 덕목들의 ‘쓸모와 이로움’ 말 그대로  홍익(弘益)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지 못한다면 설사 다른 그 어떤 것들을 알아도 아무 이로움ophelos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게다가 현명함phronesis과 관련해서도 좋음에 대해서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ktēsis이 없다고도 말한다.(505b) 나중 태양의 비유를 다룰 때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지고의 우월성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하나만 미리 소개하자면 이 좋음의 이데아는 ‘앎epistēmē과 진리alētheia 보다 한층 더 아름답고kalos 그것의 원인aitia으로서 지위prosbeia와 능력dynamis에서 있음ousia을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으로까지 언급되고 있다.(508e-509b).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마지막 결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제작의 기본 목표 내지 합목정성을 오로지 ‘좋음’에서 찾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앞서도 간략히 밝혔지만 좋음의 이데아가 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토대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철학자와 철학자 통치체제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왜 가히 신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는지를 미리 짐작케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이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열심히 해 봐야 흉한 꼴이나 보이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갖는 자기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좋음의 자식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후에 펼쳐질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자신의 그 생각을 오로지 비유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른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 비유들 모두는 그가 예고한 대로 좋음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비록 플라톤 철학에서 지고의 위상을 갖는 철학적 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비유로서만 제시되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좋음’(to Platōnos agathon)이란 말이 그의 시대에서 모호한 말을 가리키는 속담으로까지 사용되었겠는가!(J. Adam. 해당 부분 참고)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이 합리주의 철학의 극치라 일컬어지면서도 지고의 철학적 원리와 관련해서는 추론과 설명(logos)을 넘어서는  이른바 변증술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포리아이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근원적 우월성은 플라톤 철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되레 탐구의 열망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플라톤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고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철학적 성과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철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 배경이 되었다.

*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전개의 이와 같은 특성상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 좋음의 이데아를 주제로 하는 차후 몇 차례 강해는 일단 해당 부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설에 우선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비유들 각각을 살피면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한 일정 부분 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비유들 전체를 살펴본 후 그것들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논의의 전반적인 구도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끝-

 

<다음 주제>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2024.10.18. 영상

◎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주제: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4년 10월 18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이규성 사상 연구 모임에서는 요즈음 이규성 선생이 지은 『중국현대철학사론』(2020)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비트겐슈타인 발표로 한 번 건너 뛰고,
6월에 읽은 서론에 이어서 1장 진독수(陳獨秀) 편을 10월에 읽습니다.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NiCr_Yn8GW0?si=Mmc6EkDDteXqb4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