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66)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강해(66)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507b-509b]

*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태양의 비유를 끌어들이면서 우선

‘보이기는 하지만 사유되는 것은 아닌’ 가시적(可視的)인 영역과 ‘사유νοεῖσθαι는 되지만 보이지는 않는’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1) 가시적인 세계에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πολλὰ καλά과 ‘많은 좋은 것들’πολλὰ ἀγαθὰ이 있으며 그렇게 ‘각각의 것들’ἕκαστα은 ‘많은 것들’πολλὰ로 있다.

2) 지성적인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αὐτὸ καλὸν와 ‘좋은 것 자체’αὐτὸ ἀγαθόν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형상(이데아)ἰδέα 하나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여τιθέντες, 그 하나의 ‘형상’에 따라 각각을 ‘그것으로 있는 것’ὃ ἔστιν이라고 부른다.(507b)

* 그런 연후 우선 가시적인 세계에서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을 시각ὄψις과 비교하면서 ‘보는ὁρᾶν 힘δύναμις‘’과 ‘보이는ὁρᾶσθαι 것의 힘’이 다른 감각과 달리 뭔가 제3의 종류의 더 필요하다는 논의를 아래와 같이 전개한 후 그 제3의 종류의 것으로 빛φάος과 그 빛의 주체로서 태양ἥλιος을 끌어들인다.

1) 감각들을 만든 자δημιουργός는 다른 감각 능력에 비해 ‘보는 힘‘과 ‘보이는 힘‘을 만드는 데 비싼 값을 치렀다.(507c) 이를테면 청각 등 다른 감각들은 듣고 지각하는데 필요한 다른 어떤 종류의 것이 없지만 ‘시각ὄψις의 힘’과 ‘보이는 것의 힘’은 뭔가를 더 필요로 한다.(507d)

2) 그 뭔가 제3의 종류의 것γένος τρίτον은 다름 아닌 빛이다. 빛이 없으면 눈ὄμμα 속에 있는 시각ὄψις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ἐν αὐτοῖς 색χρῶμα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507d) 빛은 ‘보는 감각’ἡ τοῦ ὁρᾶν αἴσθησις과 ‘보이는 힘’ ἡ τοῦ ὁρᾶσθαι δύναμις을 묶어놓은 멍에ζυγός로 다른 것들을 묶는 멍에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다.(507e-508a)

3) 하늘의 신들θεῶν 중에서 빛을 주관하여 시각이 가장 잘 볼 수 있게 해 주고 보이는 것들이 가장 잘 보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태양ἥλιος이다.(508a)

4) 태양과 눈의 관계 : 시각은 태양이 아니고, 시각이 들어 있는 눈ὄμμα도 태양이 아니지만, 감각과 관련된 기관 중에서 눈은 가장 태양과 비슷하다.

5) 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마치 태양에서 흘러넘친ἐπίρρυτος 것처럼 태양으로부터 분배 받아ταμιευομένην 가지는 것이다.

6) 그런데 태양은 시각의 원인αἴτια이면서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 요컨대 태양이 좋음τἀγαθὸν의 자식이라고 한다면 좋음이 낳은 태양은 좋음 자신과 유비ἀνάλογος를 이룬다.(508b) 그러므로 ‘가지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νοητῷ τόπῳ 좋음이 지성νόος 및 사유되는 것들τὰ νοούμενα과 맺는 관계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서’ἐν τῷ ὁρατῷ τόπῳ 태양이 시각 및 보이는 것들τὰ ὁρώμενα과 맺는 관계와 같다(508c).

*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더 해서 위 두 영역의 유비적 대응관계를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508c-e)

* 결국 ‘대낮의 빛’은 ‘진리와 실재’ἀλήθειά τε καὶ τὸ ὄν와 대응되면서 사물을 비추는 대낮의 빛의 주체로 ‘태양’이 제시되고, 그에 상응하여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주체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제시됨으로써 이른바 태양의 비유가 완성된다.

*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태양의 비유를 들어 가시적인 영역에서 대낮의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보이게 해 주듯이 좋음의 이데아(좋음의 형상, 선(善)의 이데아) 역시 ‘아는 자’(영혼)에게τῷ γιγνώσκοντι ‘아는 힘’(지성)을 부여하고ἀποδιδὸν ‘알려지는 것들’에τοῖς γιγνωσκομένοις ‘진리’ἀλήθεια를 제공한다.παρέχον (508e)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앎과 진리의 원인인 동시에 ‘알려지는 것’이기도 하다.(508e)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빛과 시각이 ‘태양과 비슷한 것’ἡλιοειδῆ이나 태양이 아니듯이 앎과 진리 모두 ‘좋음과 비슷한 것’ἀγαθοειδῆ이지만 좋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좋음은 앎과 진리보다 한층 더 크게 ‘존중받아야 마땅한’τιμητέος 것이라 말한다.(508e-509a)

* 글라우콘은 이 말을 듣고 ‘앎과 진리를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아름다움에서 이들을 ’넘어선다‘ὑπὲρ ἐστίν니 정말 ’엄청난 아름다움‘ἀμήχανος κάλλος을 말씀하고 있다고 놀라워하며 그것이 즐거움ἡδονὴ은 아닐 거라 여기는지를 되묻는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치고는(그것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은 505b-c에서 이미 논박되었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과 닮은 점(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εἰκών 유사점)을 아래와 같이 추가해서 고찰한다.(509a)

* 즉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태양은 그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보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γένεσις과 성장αὔξησις과 양육τροφή도 제공하듯이, 알려지는 것들의 경우도 그것들이 ‘알려짐’τὸ γιγνώσκεσθαι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것’τὸ εἶναί, 즉 그것들의 ‘있음’οὐσία 모두 ‘좋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확인 받는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좋음은 ‘지위πρεσβεία와 능력δύναμις’에서 ‘있음(본질)’οὐσία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ὑπερέχοντος 것임도 확인한다.(509b)

* 그러자 글라우콘은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익살스레 ‘신령스러운 넘어섬’(신적인 우월성)δαιμονίας ὑπερβολῆς이라 대꾸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된 탓을 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강요한 대화 상대자들에게 돌린다. 그래도 글라우콘은 이야기를 멈추지 말고 게속 해 주기를 요구하고 소크라테스는 현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노라 다시 다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상정했던 가시적인 것의 영역과 지성에 의해 알려지는 가지적인 것의 영역을 다시 한번 환기를 시킨 후 이제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이어간다. (50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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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d ‘빛이 없으면 눈 속에 있는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거기에en autois 색chrōma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 이 문장에서 문법상 ‘거기에’가 가리키는 것은 눈이다. 색이 사물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문장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시각론에 따르면 시각과 대상 각각에 동류의 것(syngenes)이 있고 그 동류의 것이 서로 닮아 있어 교합이 이루어질 때 시각이 성립한다. 오늘날처럼 색이 눈의 망막에 비칠 때 시각이 발생한다고 여긴 게 아니라 눈에도 색이 있어 그 색이 사물을 향해 나가고 동시에 사물에 있는 같은 색이 그 시선 상에서 만날 때 특정 색에 대한 지각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가시계와 가지계와 관련한 플라톤의 인식론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동류의 것과 동류의 것’, ‘닮은 것(ho homoios)과 닮은 것’끼리의 교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앞서 490b에서도 플라톤은 가시계의 시각이 그러하듯이 가지계에서도 “‘영혼의 이성 부분’이 대상 쪽에 ‘참으로 있는 것’(to on ontos, 이데아)에 ‘접근’하여plēsiasas 그것과 ‘교합’하여migeis ‘지성’nous과 ‘진리’alētheia를 ‘낳고’ ‘앎’epstēmē에 이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는 크게 아래와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우선 플라톤에게 인식 내지 존재 세계는 크게 감각적인 세계와 가지적인 세계로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청각이나 미각 같은 경우 소리와 맛이 각각 귀와 혀에 주어지면 바로 청각과 미각이 성립한다. 그렇지만 유독 시각의 경우에는 아무리 색깔이 눈앞에 주어져도 빛이 없으면 시각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시각은 빛이라는 제3의 것을 필요로 한다. 플라톤은 이처럼 시각 세계에서 빛이 수행하는 특별한 역할이 있듯이 가지적인 세계에서도 그 빛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지적 인식을 성립시키는 무언가 제3의 것이 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가시 세계에서 빛 내지 태양이 하는 역할로부터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의 역할을 유비적으로 추론해 낸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를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서로 유비 관계(analogon)에 있는 것으로 그것의 소산 내지 이자 같은 수준의 설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508b-c)

* 그러므로 가시계와 가지계에서 각기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상호 대응하여 유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고 있다.

1) 우선 인식과 존재와 관련하여 가시적 세계에는 ‘태양’과 시각 능력으로서 ‘눈’ 그리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많은 것들’이 있다면 가지적 세계에는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와 지성적 인식 능력으로서 ‘영혼’과 지성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각기 하나인 ‘형상(이데아)들’이 있다.

2) 가시적 세계에서 태양은 인식 주관과 대상 쪽 모두에 각각 빛을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즉 눈에는 맑은 시각 능력 ‘보는 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사물에는 사물의 빛깔을 비추어 그것들에게 ‘보이는 힘’을 생기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태양의 빛은 그 양쪽의 힘들을 마치 멍에처럼 서로 연결하여 눈에 사물들이 또렷이 보이게 한다. 즉 눈은 태양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빛을 받아 함께 그 빛으로 사물에서 생긴 보이는 힘과 연결하여 맑은 시각을 성립시킨다.

3)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주관인 영혼과 그 지성적 인식 대상인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마치 태양이 빛을 부여하듯 ‘진리와 실재’를 부여한다. 우선 인식 주관 쪽 영혼은 그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지성적 인식 대상을 대뜸 알아차리는 인식(앎) 능력 즉 지성을 갖는다. 그리고 인식 대상 쪽 즉 이데아들 역시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제공 받아 각기 이데아로 드러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즉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진리와 실재를 부여받은 영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지성적인 대상들에 자연스레 고착함(머무름apereisētai)으로써 지성의 힘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epistēmē)을 즉각적으로 성립시킨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란 영혼과 이데아들 양쪽 모두에 진리와 실재라는 빛을 비추어 ‘인식되는 것들에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508e) 다시 말해 좋음의 이데아는 영혼에는 앎을 이데아들에는 진리성을 부여하여 가지적인 세계에서의 지성적 인식 가능성을 완결시키는 근거 즉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이 눈이 부셔 오랫동안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자신에 의해 보이듯이(508b) 좋음의 이데아도 쉽지는 않지만, 불가지의 것이 아니라 영혼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508e)

4) 그러나 가시적인 영역에서건 가지적인 영역에서건 낮은 단계의 인식 또한 존재한다. 우선 가시적인 세계의 경우 대낮의 태양 빛이 아닌 밤의 어두운 빛이 펴져 있을 때는 눈 속에 맑은 시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침침해서 거의 눈먼 것과 같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지적인 세계의 경우도 영혼이 어둠과 섞인 것 즉 생성 소멸하는 것에 고착할 때는 영혼이 침침한 상태에 있게 되어 지성을 지니지 못한 채 단지 의견doxa만을 갖게 된다.(508d) 이와 같은 양쪽 세계에서 각기 열등한 인식의 단계는 나중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면서 각 비유들의 인식 단계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 대응되는지도 논란 거리가 된다.

5) 그런데 이제 더욱 주목할 것은 이후(508e)의 논의에 접어들면서 좋음의 이데아는 위와 같은 지성적 인식 가능성의 근거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고 이 인식과 진리 모두 아름다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식과 진리와도 다르며 그것보다 ‘한결 더 아름다운 것’이다.(508e) 그것은 마치 가시적인 영역에서 빛과 시각이 태양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태양 자체는 아니듯이 가지적인 영역에서도 인식과 진리가 좋음과 같다고 간주는 할지라도 좋음 자체 즉 좋음의 이데아는 아닌 것과 같다. 좋음의 상태는 그보다 한 층 더 귀중한 것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이다.(509a)

* 소크라테스는 태양의 비유에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있음’(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그저 단순한 ‘있음’ 정도가 아니라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ousia을 ‘저 너머로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이라는 것이다.(509b)  글라우콘이 놀라 익살을 떨며 말하듯 그것은 ‘신적인 우월성’, ‘신령스러운 넘어섬’daimonias hyperbolē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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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이 수행하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앞서도 누누이 밝혔듯이 그 설명 자체가 비유에 기반해 있는 데다가 그 내용의 핵심 부분마저 자신의 말임에도 글라우콘이 말하는 것인 양 설정할 정도로(509b) 자신조차 처음부터 확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단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이자(利子) 내지 소생(506e-507a) 정도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해석은 비유가 갖는 애매성 만큼이나 학자마다 다양하고 그에 ‘따라 그 해석 어느 것도 플라톤 자신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확정 지을 수도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플라톤의 대작 중 대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의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 가운데 철학적 중요성과 체계 내 위상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록 난망하기는 할지라도 플라톤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으로건 그것에 대한 해명이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탐문이 오늘날까지도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피해갈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지고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지금부터 필자가 서술하고자 하는 해석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함에 첫 번째 부딪치는 난관은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철학적 주제임에도 다른 대화편에서는 좋음 자체라는 일반적인 형상 차원의 것으로만 다루어질 뿐 그 이상의 것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점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를 이해하는 단초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에서 유일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철학자 왕’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그곳에서만 거론되고 있다. 그곳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기 전까지는 나라와 시민들에게 재앙이 그칠 날이 없다’(501e)는 종국의 관점에서 철학자 왕의 등장을 그 자신의 정치철학의 최상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좋음의 이데아는 바로 그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궁극적인 앎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근본적으로 정치철학의 최상의 원리로서 일단 정치적 앎 내지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플라톤은 놀랍게도 이 좋음의 이데아를 다른 이데아들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차별의 정도에서 그 이데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초월적 우월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말 그대로 이데아 가운데 하나임에도 오히려 다른 이데아들의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로서 지위와 능력에서 다른 이데아들을 훨씬 넘어서는 가히 이데아 중 이데아로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플라톤은 무슨 이유에서 이토록 좋음의 이데아에 특별한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좋음의 이데아 또한 자체적 존재로서 다른 이데아들과 차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초월적 우월성의 내용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질상 다른 이데아들과 과연 어떤 차별성을 갖는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는 단초로서 우리는 우선 앞서도 언급했듯이 좋음의 이데아가 철학자 왕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 앎의 차원에서 제시되었음을 꼽을 수 있다. 왜 플라톤은 철학자가 왕이 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재앙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주어지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과 사회, 우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앎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우주와 자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 앎은 존재 세계 전체에 관한 학문으로서 철학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철학은 우주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특수한 영역들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 간의 유기적인 내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수행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이자 정치가는 반드시 철학을 알아야 하고 그 앎을 통해 우주 자연 및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제반 요인들을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자들이 정치 지도자 내지 왕의 역할을 맡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다.

* 사실 ‘좋음’to agathon은 실천철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 선(善)’의 의미와 적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을 보전하면서 각자의 욕망을 최선으로 추구하면서 상호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화와 공존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내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고유한 역할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들은 그것을 통해 공동체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자기 자신의 유익함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가장 최선임을 절제의 덕을 통해 온전하게 확인한다. 사실 ousia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존재나 실체 또는 재산의 의미를 가지면서 어떤 구성체에서 개별자들이 ‘자기 자신의 재산’ 또는 ‘됨됨이’로 갖추고 있는 ‘진정한 본성’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 이데아들에게 부여하는 이른바 본질(ousia)이란 앎과 덕 등 제반 가치 존재들을 포함하여 ‘알려지는 것들’로서 이데아들이 각기 본질로 지니는 고유한 내적 됨됨이, 제 고유한 값을 뜻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럿polla’으로 구성된 나라의 측면에서 보면 그 ousia란 다양한 계층들과 개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연관 하에서 각자 갖고 있어야 할 지혜, 용기, 절제, 정의, 경건 등 제반 덕목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에게 그런 ousia를 제공하고 개별 이데아는 그 총체적 연관에 대한 앎을 토대로 고유의 ousia를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개별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지위와 힘에서 그것보다 한결 넘어서는 초월적 우월성을 지니는 것이다.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자 즉 ‘변증술에 능한 자’를 본질ousia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자(534b)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좋음의 이데아는 우주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계급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고유한 욕망을 최선으로 실현하고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즉 통치자로 하여금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에게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최상의 유익함을 제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궁극의 앎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최선의 유익함을 담보해주는 총체적 앎과 실천의 궁극적 지표로서 특별한 우월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그러한 우월성을 플라톤 말기의 대작 <티마이오스>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티마이오스>는 <국가>의 이상 국가론을 우주의 생성과 기원 차원에서 확고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써진 것이다.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우주 자연을 구성하는 여럿의 영원한 조화와 공존을 위해 ‘좋음’을 본(paradeigma)으로 삼아 오직 그것에 의거하여 가능한 한 가장 선한 우주를 제작한다. 이러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제작 목표와 그 원리는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철학자 왕의 국가 건설 목표와 그 원리로 그대로 이어진다. 즉 데미우르고스가 본으로 삼은 ‘좋음’은 <국가>에서 철학자 왕이 이상 국가를 세우면서 철학적 앎의 본으로 삼고 있는 ‘좋음의 이데아’ 바로 그것이다.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에 따라 우주 제작과정에서 우주적 조화와 공존을 구현한 그대로 철학자 왕 또한 ‘좋음의 이데아’에 따라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한다. 곧 좋음의 이데아는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점에서 존재 세계 내 서로 다른 이데아들의 위상을 정해주고 자연과 나라 등 여럿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그것들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또 다른 이데아인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좋음의 이데아 또한 이데아인 한, 타자와 관계 맺음이 불가한 자체적인 존재인데 그러한 이데아가 어떻게 다른 이데아들의 조화와 공존에 관계할 수 있는가? 그 관계 맺음의 성질 자체가 자체적 존재로서 이데아의 근본 성격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사실은 이데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에 관한 논의는 이데아들의 상호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있는 <소피스트>,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정의(定義) 대상의 유적 형상을 최후의 종적 형상들에까지 분할하는 <파이드로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직조술을 다루는 <정치가>의 논점과도 유기적으로 연관되고 그에 따른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긴 하다.(형상들의 나눔(454a)과 상호간의 결합(476a)은 <국가>에서도 일단 언급은 된다. <소피스트>와 <정치가>는 <국가> 이후 후기 작품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차치하고서라도 여럿의 조화를 규정하고 관장하는 성질이 이데아로서 자체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을 까닭도 따로 없다. 왜냐하면 관계 맺음이나 조화라는 성질 자체는 마치 수적 비례가 내포하는 객관적 성질처럼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 채 자체적 존재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이데아도 3개의 직선들이 직선의 이데아로서 각기 자체성을 보전한 채 결합된 하나의 이데아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변화나 관계 맺음 내지 타자성은 그 이데아가 물질적 무규정성과 섞이거나 분여 상태로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내포 상 다른 이데아들에 존재성과 진리성을 제공하고 그 이데아들의 총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나 이데아 세계에서는 다만 홀로 무(無)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정체성을 보전하면서 자체적 존재로 있을 뿐이다. 자체성은 타자성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각기 다른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데아적 자체성을 갖는 이데아로 각기 그 자체로 있다가 다만 그 이데아들이 각기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물질적 타자성을 매개로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그 위계 관계는 현실화된다. 그것은 마치 인간 유기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들이 각기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와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하나의 신체로 결합되면서 같은 신체 부위의 하나인 두뇌의 지배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총체적인 유기적 안정성과 조화를 보전하는 이치와 같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지휘자와 개별 연주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지휘자의 이데아와 개별 연주자들의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들 모두는 각기 하나의 이데아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갖고 있다. 즉 동등하게 서로 자체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각자 자기 그대로 있다가 오케스트라라는 관계 맺음의 장에 들어서면 비로소 타자성을 통해 역할과 위계성을 드러내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화로운 음악을 함께 생산하게 되는 격이다.

* 이렇듯 이데아들은 이데아 세계에서 서로 관계 맺음 없이 각기 그 자체적인 것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지위를 갖고 있지만 그 이데아들은  서로 다른  고유 성질을 각기 내포하면서 데미우르고스의 제작행위를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우주 자연의 유기적 총체성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그러한 이데아들 가운데 하나이되 다른 이데아들과의 총체적 연관성과 규정성을 자체성으로 갖고 있는 또 다른 성질의 이데아인 것이다.

* 재차 강조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정치철학적 관점으로 좁혀 보면 사회 공동체 내 모든 사람의 내적 관계를 그 고유 욕망에 따라 조화롭게 공존케 하되 그것을 통해 나라 전체의 좋음을 최대한으로 담보하는 힘을 고유 성질로 지니는 이데아인 것이다. 여럿의 세계가 상호 의존성과 유기성을 지니는 한,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고려는 코스모스로서 우주 자연을 비롯해 인간 사회 나아가 개인의 삶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 해결에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관련된 모든 요소가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고려되지 않으면 그것들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나라와 시민들의 유익성도 담보되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이면서 다른 이데아들과 비교하여 또 다른 우월성을 갖는 근본 이유도 그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통치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앎으로서 좋음의 이데아는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도 시사되고 있듯이 개별 이데아들의 고유 성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연관 하에서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 상호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지고의 철학적 앎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를 ‘신적이고 인간적인 모든 것에 언제나 전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마음’을 가지자로 언급하고(486a) 철학 교육에서 실재to on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 봄’synopsis을 강조하는 것도(537c), 철학자 왕에게 요구되는 변증술의 궁극 목표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두는 것도(534c) 그 때문이다. <파이드로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모음과 나눔을 통한 변증술과 관련하여 ‘모음’agein을 ‘여러 군데로 흐트러져 있는 것들을 ‘총괄하여 봄으로써’ synorōnta 하나의 이데아mia idea로 모으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265d)

* 이처럼 우주와 자연,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문과 그것에 대한 총괄적이고도 전면적인 답변을 간취하려는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망의 극치에 형이상학적 탐문이 자리하고 있다면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사에서 그 형이상학적 탐문의 총체성과 영원성을 기초 지우는 지고의 철학적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상학이 말 그대로 지적 욕망의 극치에서 성립하고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 또한 그 욕망의 소산인 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합리주의는 물론 그 한계에 대한 의심과 탐문 하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비주의 내지 비합리주의까지 포괄하는, 말 그대로 ‘신령스러울 정도의 넘어섬’으로서  존재세계 전체에 대한 근원적 숙고로서 거대 담론과 세계관 철학의  시원적 원상paradeigma이라 할 것이다.  

* 끝으로 태양 자신 생성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것들에게 보는 힘만이 아니라 ‘생성과 성장과 양육’도 제공하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에게 인식의 근거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근거(그것들이 ‘있는 것’to einai이자 ‘본질’ousia을 갖는 근거)도 제공한다는 플라톤의 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태양이 생성과 성장과 양육을 제공한다는 생물학적 표현과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와 본질을 제공한다는 존재론적 표현이 내용적으로 상호 등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490b에서 플라톤이 언급하고 있는 표현들을 상기하면 왜 그것들이 서로 상호 등치가 되는지 그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즉 이곳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의 빛이 그리하듯 영혼과 이데아 양쪽에 진리성과 실재성을 제공하여 영혼에게는 지성nous을 이데아들에게는 본질ousia을 갖추게 하고 그들을 서로 동류의 것들로 만나게 하여 앎(인식)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490b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은 이와 동일한 내용을 이곳 태양의 비유에서 그런 것처럼 생물학적 용어를 끌어들여 표현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영혼과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데아)이 서로 ‘동류의 것’임을 ‘사랑’으로 포착하여 서로 ‘접근’하고 ‘교합’하여 지성과 진리를 ‘낳고’ 앎에 이르게 되어 진실되게 ‘살며’ 그것을 ‘양육’한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좋음의 이데아가 영혼과 이데아에 미치는 이러한 과정은 플라톤 스스로 태양이 시각과 사물에 미치는 과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 그대로 지성과 진리와 앎을 생성과 성장, 양육시키는 것과 자연스럽게 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에 있어 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좋음의 이데아가 이데아인 한 자체성을 가진 부동자임에도 어떻게 태양의 빛처럼 무언가를 제공하는 작용력을 갖는 운동자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태양의 빛과 같이 진리와 실재를 인식 대상에 비춘다는 플라톤의 언급은 그 빛의 작용력이 그러하듯 좋음의 이데아 또한 분명 뭔가 이데아들에 작용력을 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좋음의 이데아가 ‘지위presbeia와 능력dynamis’에서 그 ‘있음’을 ‘한층 넘어서’hyperchontos 이처럼 빛과도 같은 작용력을 갖고 있다는 플라톤의 말은 마치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차별을 넘어 능동자로서 신적 우월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러한 의문과 난점들은 철학사를 통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좋음의 이데아에 급기야 신비주의 내지 신학적 성격까지 부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사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부동의 능동자나 플로티노스적인 의미에서 유출하는 일자와 연계지어 논의되었고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의 선성을 해명하는 근거로까지 인용되었다. 

*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능동적 작용력과 관련한 의문 역시 그것이 갖고 있는 내적 관계성과 총체성에 의해 일정 부분 해명될 수 있다. 앞서 누차 살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다른 개별 이데아들과 달리 그 개별 이데아들로 구성되는 우주 자연의 총체적인 진상 및 그 내적 연관과 관련한 지고의 앎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개별 이데아들로 하여금 그것 자체의 존재성을 부여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들 각각이 이데아들 전체와 관련하여 각각이 어떤 고유한 위상을 갖고 그 전체와 연관되어 있는지 즉 개별 이데아로서 자신의 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앎이다. 즉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개별 이데아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존재하되 선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연관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분명 존재론적으로 다른 이데아와 같은 이데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총체성과 개별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이데아들과 다르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태양이 생성과 성장, 양육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 주관과 대상 모두에 진리와 실재를 부여하여 능동적인 지성을 통해 앎과 진리를 성립시킨다. 그런 점에서도 좋음의 이데아는 마치 데미우르고스가 좋음을 본으로 삼아 지성을 통해 영원하고 선한 우주를 제작한 것처럼, 나라에서 철학 통치자들도 그러한 우주 자연의 총체적 앎을 토대로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시민들에게 본성에 맞는 고유 위상을 부여하고 모두의 유익함을 관철한다. 데미우르고스가 신으로 불리듯 철학자 왕 또한 말 그대로 지위와 능력에서 위계상 우월성을 갖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에서 정치와 지성의 결합의 극치를 규정하고 그 실현을 담보하는 신령스러운daimonias 원리인 것이다.

*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존재 세계를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들로 크게 구분한 후 가시적인 영역에서 태양의 역할에 주목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지적인 영역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역할을 유비추론의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 결과 좋음의 이데아는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존재 세계 전체에서 최고의 위상을 갖는 존재로서 확립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그 좋음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는 앎의 체계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어떤 인식론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분의 비유를 끌어들인다. 선분의 비유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가시계와 가지계 즉 감각적인 세계와 지성적인 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2월 제15차 정기세미나 영상│『중국현대철학사론』(2020)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발제:이병창 │2024.12.20.

이규성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발제 세미나

-주제: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발제: 이병창 선생님
-일시: 2024년 12월 20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모택동의 사상 즉 마오주의는 흔히 중국 현실에 적용되는 마르크스주의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은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실천적 과정 속에서 피의 경험을 통해 탄생한 사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이규성 선생은 마오주의를 모택동의 청년기 사상의 영향을 통해 이해하는 독특한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규성 선생은 청년기 사상이 후일 문화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만이 아니라 마오주의의 혁명 전략 속에서 관철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관점이 옳은가 보다 그런 관점을 취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이규성 선생이 사상적으로 모색하는 지향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발표원고: 중국현대철학사-마오(발표)+후기(공개)

다음 세미나(2025년 2월 21일 금요일 오후 4시 한철연) – 주제 :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MGw6ZlGY948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서평: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궐위상태(Interregnum)에서의 더 나은 실패를 위한 교본

존 홀러웨이, 『폭풍 다음에 불: 희망 없는 시대의 희망』(조정환 옮김, 갈무리, 2024)을 읽고

 

윤인로(『신정-정치』 저자)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독서가 마무리될 때쯤, ‘12․3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 독후감을 쓰는 오늘 12월 10일 현재, 탄핵안의 자동 폐기에 뒤이어 이곳 남한의 주권대행자 윤석열은 사실상 모든 행정권한을 잃고 있다(그럼에도 권리상 그는 여전히 행정부 수반이자 군통수권자이다). 내게 이 책 『폭풍 다음에 불』의 43장 「풍요를 해방하라」에 담긴 내용은, 여기 계엄의 비상시를 달리 재생산하려는 입법권력에 대해, 그 국회의사당 입법권력의 정면을 점유한 인파人波의 비상시적인 힘에 관해 살펴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회집하고 있는 그 인파를 홀러웨이가 말하는 “무리rabble” “어긋나는 자들misfitters” “비복종자들”로 새겨 보는 데에서 시작될 수 있을 듯하다.

그들 무리, 어긋나는 자들 속에는 법치주의적 시스템 혹은 자유/자본주의적 헌정질서 안에서within 그것을 거스르며Against 그 너머를 향해 가는Beyond 일상적이고도 편재하는 클리나멘(원자의 측정 불가능한 이탈/편위偏位 운동)의 계기들이 잉태되어 있다. 그들 무리의 어긋남이 일으키는 관계적 균열의 효과를 탐지․분석․구성하려는 홀러웨이의 일관된 의지가 “소망적 희망”과 “이성적 희망”을 구분하는 준칙이 된다. 이성적 희망과는 반대로 소망적 희망은 희망 없는 시대를 연장하고 위기와 절멸이 지연되게 만드는, 체제 내화되고 있는 범용한-안전한 감정, 말하자면 체제를 조바꿈하면서 보전하는 전前-종말론적 근본정조이다. 이성적 희망, 그것의 형질․벡터․이념을 달리 표출하기 위해 다시 인용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책에 거듭 인용되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맑스, 1857)의 한 대목이 그것이다.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풍요Reichtum란 보편적 교환을 통해 창출된 인간적 필요, 능력, 쾌락, 생산력 등의 보편성 외의 다른 무엇일까? … [풍요란] 이전의 역사적 발전 이외의 어떤 전제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총체성 [외의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모든 인간적 능력의 발전을 (사전에 결정된 잣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으로 만드는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인 전개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특수성으로 생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은 어디인가? 자신이 이미 되어진 어떤 것으로 남아 있지 않고 절대적인 생성 운동 속에 있으려고 애쓰는 곳은 어디인가?

 

‘제한된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질 때’, 또는 한계 부여됨으로써 균형 잡게 되는 국가권력적 기관들 간의 비밀리에 일원화된 연계망이 공개됨으로써 파열될 때에, 여기 계엄령의 해제 및 탄핵안 폐기 이후 친위쿠데타와 여당의 연성쿠데타가 내란죄 구성요건과 위헌정당 해산 요건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여파의 때에, 그러니까 “오래된 것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 새로운 것이 탄생하지 못한 위기의 때,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나는 그 공백 시기[인테레그눔]”(A. 그람시)에 무리는 계엄령의 목표가 공화적 분립을 파기한 내전적 통치력의 한계 없는 완전체․총체였음을 우선적으로 인식한다. 암세포가 퍼진 주권대행체와 이를 중심에 둔 말기적 권력계가 사실상 이미 폐절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힘의 구축이 권리상 아직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태, 낡은 노모스의 정당성 근거와 합법성 보위가 벌써 [박]탈정초Entsetzung되고 있음에도 새로운 노모스의 취득이 여전히 수행되지 않고 있는 여기의 궐위상태[공위(空位)상태]. 이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무리는 계엄령의 벡터에 따라 재정초될 권력관계라는 것이 최종심으로서 재량적 생살여탈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생명 통할의 총체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정하는바, 우선 무리는 ‘선량한 국민’과 불온한 비국민을 구별하는 총체적 내전권력(초법적 내전정체)의 정립을 저지하는 힘으로서, 그런 총-통에의 의지 및 총통이라는 최종목적을 절단하는 폭(권/위)력으로서, 다르게 생산되는 ‘총체성’의 이념을 체현하고 발현시킬 수 있다. 이 과정을 집약하는 홀러웨이의 중심 테제가 “풍요를 해방하라”이다. 그런 과정/소송을 홀러웨이와 함께 집약하면서도 달리 전개시켜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풍요’라는 번역어의 성립 사정에 대한 옮긴이 조정환의 문장들이다: “번역본으로 『자본』을 접한 우리는 ‘풍요’라는 단어의 자리에 대개 ‘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맑스가 사용한 독일어 원어는 Reichtum이다. 홀러웨이는 독일어 Reichtum을 대개의 영문 번역에서 사용된 wealth로 번역하지 않고 richness로 번역했다. 이런 독해 전략을 통해 wealth를 부르주아적 형식의 ‘부’로, richness를 부르주아적 형식이 벗겨진 ‘풍요’로 해석하는 개념 분할이 성립하는 것이다. 명사로 쓰일 때(Reich) 나라, 제국 등을 의미하게 되는 독일어 형용사 reich는 어원적으로 power(ful)을 함축하고 있다. 이 때문에 reich는 넘쳐흐르는 힘을 지시하기에 적절한 용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우리말 ‘부’가 아니라 ‘풍요’라고 옮겼다. 어원적으로 부유할 富부자는 넉넉함이 집 안에 가두어진 모양(즉 곳간의 풍요)을 가리킨다. 반면 풍년 豊풍자는 그릇 위에 가득 담긴 음식이 넘칠 것 같은 형상을 가리키고 넉넉할 饒요자도 먹을 것이 넘치는 모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풍부, 풍성 등 풍요와 결합된 넘쳐흐름의 언어들은 드물지 않다. 이 풍요는 흘러웨이에게서 존재론적 역량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풍요의 해방, 그것은 궐위상태 속의 무리에게 가장 가까이 접선되고 있는 새로운 노모스 창출의 근원이자 방법이다. 그것은 어긋나는 무리에 의해, 무엇보다 궐위상태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형될 수 있을 구원적 사회구성체의 목표이자 산물이다. 그러나 사정은 단란하게 단선적이지 않은데, 무엇보다 궐위상태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병적 증상들이 폭발하는 위기적 시간이 궐위상태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령이라는 순수통치의 별/이념형, 다시 말해 하달된 명령에서 벗어나는 일은 엄중히嚴 삼가도록 하는戒, 삼엄하게 자제시키는, 알아서 무념이 되게 하는 계엄령martial law, 내전권력의 법통할권. 달리 상기시키건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치안-축적의 명령어 속으로, 그 암구호 속으로 합성된 사회를 재생산하는 군정적 노모스. 그 낡은 노모스 바깥으로 어긋나면서 모여드는 자들, 말하자면 회집하는 아웃-로out-law. 그러나 그 무리의 클리나멘은 궐위상태 속에서 탄핵-재선출이라는 법치주의적 헌정질서의 회로와 접선되기 십상이다. 그런 한에서, 궐위상태란 떠나온 안전지대/고향으로의 회귀와 그런 고향으로부터의 진정한 어긋남, 공공의 안전이라는 보험법적 보장체제로의 환류와 그런 체제로부터의 탈구out of joint라는 상충하는 벡터의 전장이자 적대적 토포스들의 연계체이다. 인용된 맑스의 질문 형식으로 된 희망의 출처, 즉 ‘스스로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곳’과 ‘절대적 생성 운동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홀러웨이는 답한다: “집회나 코뮌이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말하면서-듣는 운동이다. 그것은 미리-정의된 선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있는-곳을 기초로 결집하는 것이다. 이는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심지어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의 유토피아적 핵심, 그들의 존엄, 그들의 고통, 그들의 꿈을 만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인-나I-that-is-We와 나인 우리We-that-is-I의 상호 인정을 향해 손을 뻗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회는 풍요의 합류이다. 그것은 상품 교환, 화폐, 국가 그리고 법을 통해 확립되는 사회적 결속에 대립하는 사회적 결속의 구축이다.” 궐위상태라는 전장에서 접선되는 유토피아적 핵심. 이 블로흐적 희망-유토피아 곁에 자리매김해 놓게 되는 것은 새로운 노모스의 장소성을 표현하면서 그 노모스의 창출과 접선되고 있는 “아-토포스A-Topos” 혹은 “유-토포스U-Topos”(없는/없애는 장소)론이다: “유토피아라는 인공적인 낱말 속에는 대지의 낡은 노모스가 근거해 있는 모든 현장확정들의 거대한 지양Aufhebung 가능성이 함축적인 선율로 표명되고 있다.”(칼 슈미트) 그런 지양의 실험적 가능성과 원상회복적 불가능성이 더불어 잠재해 있는 궐위상태 속에서 “희망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은 저항이 반란으로 넘쳐흐르는 정도 만큼이며 서로 다른 억압상태들을 연결하는 점들을 적어도 도식적으로라도 잇기join 시작하는 정도 만큼이다.”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과 절망은 반대말이 아니다. 절망을 단념하지 않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절망이 희망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반복하는 절망이, 그런 절망 속에서 차이의 조형 가능성에 내기를 거는 일이 진정한 절망의 조건이자 현명한 희망docta spes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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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65)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5)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좋음의 이데아 서론(502c-507a)

 

*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철학자)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501e) 플라톤은 마침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토록 꺼내고 싶었던 생각 즉 철학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필연적 정당성을 과감하게 선언한다. 사실 플라톤은 <국가> 제1권에서 통치자를 언급하기 시작할 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철학 통치자를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길고 먼 길을 돌아 지금에야 털어놓는 것은, 만일 그렇게 했을 경우 아예 논의 시작부터가 어렵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화자들은 물론 선입견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득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제4권까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기본 틀을 제시한 후 제5권 이후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논의 방향을 전환한 후 그것을 계기로 이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 국면에서 플라톤은 무엇보다 우선 철학자가 세상의 평판과 달리 과연 어떤 사람이기에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적합한지를 적극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그러한 철학 통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즉 철학 통치자가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는가를 심도 있게 제시하려 한다. 그리하여 논의는 이제 철학 통치자 즉 철학자 왕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과정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철학자 왕의 가장 크고 중요한 배움으로서 이른바 ‘좋음의 이데아’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가 핵심 논의 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우리에게 잘 알려 있듯이 ‘좋음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정점에 자리한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제 <국가>를 통해 플라톤이 계획했던 철학적 논의의 최정점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제7권 ‘동굴의 비유’까지 이어지는 가히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502c-507a]

* 소크라테스는 앞서 통치자들을 언급하면서 철학과 철학자를 끌어들이지 않은 것은 철학과 철학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의식해서 그랬지만 이의제기에 답하다 보니 그렇게 논의를 미룬 것이 지혜롭지 못했다고 고백한다.(502d)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더는 주저함ὄκνος이 없이 정치체제의 구원자들οἱ σωτῆρες이자 가장 엄밀한 의미의ἀκριβεστάτος 수호자들로서 철학 통치자들이 임명되어야 함을 과감히 선언한다.(503b) 물론 철학 통치자들 역시 지난번 언급했던(제4권 412b-415d) 통치자, 수호자의 자질과 자격들을 갖추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신념은 물론(503a) 기억력과 재치 활달하고νεανικός 민첩한 성향, 차분함ἡσυχία과 진중함βεβαιότης 등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503d) 특히 소크라테스는 시험과 훈련을 통해 이들의 성향이 과연 ‘가장 큰 배울 거리’μαθήματα μέγιστα도 감당할 힘이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다른 일들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503e)

*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그 가장 큰 배울거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영혼의 세 부분을 나누면서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지혜 각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했던 때(제4권 436a ff)를 환기케 한 후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περίοδος가 있음에도 그 당시에는 엄밀성이 결여한 채로 이야기했음을 토로한다.(504a-b) 그때는 그것을 재는 척도μέτρον가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불완전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어떤 것의 척도도 아님에도 당시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탐구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에게 가장 불필요한 일이다.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은 더 먼 길을 돌아서 가야하고 신체를 단련하는 수고만큼 배우는데도 더 큰 수고를 해야 한다.(504c)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가장 크고 가장 적절한 배울 거리의 마지막 지점’τοῦ μεγίστου τε καὶ μάλιστα προσήκοντος μαθήματος ἐπὶ τέλος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것인지를 되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덕들에 대한 밑그림일 뿐이고 이제 그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해내는 일, 즉 그것들을 가능하면 엄밀하고 순수하게 되도록 애를 써야 하며 그 엄밀성도 가장 커야 한다고 말한다.(504d) 그런 연후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테이만토스를 향해 ‘좋음의 형상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ὄφελος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그것은 마치 좋음을 빼고 어떤 것을 갖는 것은 아무 이로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좋음ἀγαθός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φρονεῖν하고 반대로 ‘아름답고 좋은 것’καλὸν καὶ ἀγαθὸν에 대해서는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는 것이다.(505b)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대중πολλοῖ들은 좋음을 즐거움ἡδονὴ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φρόνησις이라 여긴다고 말한 후 후자의 경우는 그게 어떤 현명함인지를 밝혀줄 수 없어서, 결국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한다.(505b). 그들은 좋음이 뭔지 모른다고 우리를 비난하면서도 우습게도 자기들이 이야기할 때는 다시 우리를 그걸 아는 사람인 듯이 대한다. 그것이 좋음에 대한 현명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좋음’이란 이름을 그들이 언급하기만 하면 우리가 그들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알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505c) 즐거움이 좋음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쁜 즐거움이 있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은 동일한 것들이 좋으면서 나쁘다는 데에 동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505c)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의로운δίκαια 것들과 아름다운 καλὰ 것들과 관련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래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택하여 행하고 소유하며 또 그래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것들과 관련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보이는 것’τὰ δοκοῦντα을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좋은 것’τὰ ὄντα을 추구한다.ζητοῦσιν. 좋은 것의 경우 이미 사람들 모두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ἀτιμάζει.(505d)

* 게다가 모든 영혼이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서, 그런 뭔가가 있으리라는 짐작은 하지만ἀπομαντευομένη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λαβεῖν할 수 없어 당혹해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자 우리가 모든 것을 맡기게 될 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이러한 것에 대해 그토록 깜깜한σκοτόω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505e)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좋은지’ὅπῃ ποτὲ ἀγαθά ἐστιν를 모르는 경우 별 가치가 없는οὐ ἄξιον 사람을 자신들의 수호자로 두게 될 것이다. (506a) 그것들을 아는 수호자가 정치체제를 감독ἐπισκοπή할 때 우리의 정치체제가 완벽하게 질서 잡힐 것이다.(506b)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좋음τὸ ἀγαθὸν이 앎ἐπιστήμη인지 즐거움인지 아니면 이것들 말고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지를 묻는다. 이제 좋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생각 말고 자기 생각,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신념δόγμα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것들에 관해 씨름해 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신념은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건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506b)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해 보이는지를 되묻는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아는 사람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지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괜찮다’라고 답한다.(506c)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믿음δόξα은 그중 최고의 것αἱ βέλτισται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추하고 눈먼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지성이νόος 없는 채로 ‘참인 믿음’ἀληθές τι δοξάζοντες을 갖고 눈먼 채로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금 좋음에 대해 직접 말한다면 그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부디 여기에서 물러서지 말고 지금까지 정의와 절제,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 말씀해주신διῆλθες 것처럼 그런 식으로 좋음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506d)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그거면 충분하고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ὅπως μὴ οὐχ οἷός τ᾽ ἔσομαι 열심히 해 봐야προθυμούμενος 흉한 꼴ἀσχήμων이나 보이고 비웃음γέλωτα을 사게 될 것 같으니 비록 이야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αὐτὸ μὲν τί ποτ᾽ ἐστὶ τἀγαθὸν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자ἐάσωμεν고 말한다. 그것에 대해 내가 지금 지닌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πλέον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괜찮다면 좋음은 말고 ‘좋음의 자식ἔκγονός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ὁμοιότατος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 아버지πατήρ에 대한 이야기διήγησις는 다음 기회에 갚아주셔도 된다고 말한다.(506e)

* 그리하여 마침내 좋음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τὸν τόκον τε καὶ ἔκγονον αὐτοῦ τοῦ ἀγαθοῦ 즉 좋음에 대한 소크라테스 나름의 생각τοῦ δοκοῦντος이 펼쳐지기에 이른다. (50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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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3b 가장 엄밀한 의미의akribestos : ‘엄밀한’의 그리스어 akribēs는 exact, accurate, precise 즉 ‘정확한’, ‘엄밀한’의 의미를 물론 갖지만 내용적으로 ‘자세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관련하여 부족이나 결핍 상태가 없는 순전하고도 완벽한’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03d 대조적인 양쪽 성향 모두를 훌륭하게 잘 갖추고 있어야 한다. : 정치가나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기술 즉 통치술의 기본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요소나 반대인 것들을 조화롭게 하나로 결합해 내는 기술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정치가>는 이러한 통치술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씨줄과 날줄을 하나로 엮는 직조술의 비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논리의 세계에서는 반대적인 것(to anantion)이나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하나로 공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그 현실이 나라에서 공동체적 현실로 구현되어야 하는 한, 그것들은 동시에 하나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통치자는 그러한 반대적 성향들을 이미 자신 안에서 하나로 조화롭게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정치가> 281a-283b 참고)

* 504 b ‘정의와 절제, 용기 및 지혜 그것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더 먼 다른 우회로’(우회로(迂廻路) perihodos : 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patrol, survey in thought) 이 우회로는 제4권 435d에서 언급되었고 곧이어서 504d에서도 ‘에돌아 가야 할περιιτέον 더 먼 길’이란 말로 다시 또 언급된다. 제4권 435d에서 그 말이 언급되는 배경을 지금의 논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정의, 절제, 용기, 지혜를 개인의 혼과 연결지어 논의하면서 정말 제대로 논의가 되려면  기존의 관습 차원에서 거론되어온 덕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 수준을 넘어,  철학 통치자의 영혼에 자리 잡은 덕목들의 기초에 관한 고도의 철학적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덕에 관한 완벽한 논의임을 소크라테스가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철학 통치자를 입에 올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 논의 수준의 적절성에 따라  이상국가의 철학적 덕목으로  새롭게 다시 확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제6권 지금의 논의 국면에서 그것은 논의의 척도상 결코 완벽하지도 적절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 언급했었던 ‘그 덕들을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우회로’를 따라가며 논의가 ‘좋음의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토대로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504c-d에서도 그 길은 ‘나라와 법의 수호자들이 에돌아 가야할 더 먼 길’로 언급되면서 내용적으로는 보다 심화된 훈련을 통한 심도 있는 논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플라톤이 이곳에서 표현하고 있는 ‘우회로’perihodos의 의미는 지름길을 갈 수도 있는데 길게 돌아서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학 통치자로서 다다라야 할 지고의 목표 즉 ‘좋음의 이데아’에 이르기까지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 단순히 말해 ‘보다 길고 먼 길’을 의미한다.

* 그런데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의 관점에서 플라톤이 그 먼 길을 왜 우회의 의미를 지니는 perihodos란 말로 사용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플라톤 스스로 이미 두 가지 복합적인 의도를 갖고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하나는 텍스트상 의미한 그대로 감내해야 할 길고도 힘든 철학적 훈련의 길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회로perihodos라는 말의 원래 뜻(going round, marching round, slow walk) 그대로, 말로 나라를 세우던 단계에서는 논의 정황상 철학 통치자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힘들어 일단 그때 수준에 맞추어 논의하는데 만족하되, 다만 정확한 척도에 맞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 차원에서 그 기초가 될 내용들을 두루 잘 살펴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플라톤은 논의의 성격과 정황을 고려하여 통치자의 임명 문제와 관련하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논의를 에둘러 미뤄오다가 제6권에 와서야 불가불 털어놓게 되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502d)

* 우회로의 의미를 이와 같이 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의 논의 과정 전체가 좋음의 이데아로 향한 멀고 긴 철학적 준비와 논의과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에서 주도면밀한 우회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핵심 주제로 철인 통치론을 염두에 두었으나 처음부터 당장 철학자나 철학 통치자 이야기를 꺼내들면 대화 자체가 출발조차도 못할 것을 우려하여 논의 및 대화 전개의 문학적 구성(plot)상 1) 일반 공통관심사인 개인의 행복과 정의를 화두로 꺼낸 후 2) 소문자 대문자 비유를 거쳐 국가에 관한 논의로 전환한 다음, 3) 말로 세운 이상국가론을 펼치고, 4) 그에 대한 이의 제기를 빌미로 철학과 철학 통치자에 관한 자신의 애초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게 길고 먼 우회로를 에둘러 가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같이 자신의 속내인 철학 통치론을 <국가> 논의의 정점에서 강력하게 피력한 후 논의의 후반부를 현실 국가론과의 비교를 통해 최초의 정의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게 조정해가면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본 강해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는 마치 등산할 때처럼 등정에 앞서 행하는 준비운동 단계부터 산을 오르는 과정, 올라선 정상의 모습, 내려오는 과정,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고 산행을 뒤돌아보는 과정까지, 진리라는 산을 오르는 위대한 등반여정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그려내고 있다.

* 505a ‘좋음의 형상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προσχρησάμενα 것들이 그것에 의해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네가 여러 번 들었으니 말이네’ : 이곳 소크라테스의 언급만 보면 좋음의 형상과 그것의 쓸모나 유용성이 여러 번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좋음이란 말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형상으로 언급된 곳(476a)도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음이 쓸모나 이로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도 있다(<메논> 87e-88e,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형상 일반의 차원에서 언급되었거나 좋은 것과 관련한 일반적인 논의 차원에서 거론된 것이지 이곳에서처럼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특별하고도 독자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 언급된 곳은 없다. 이곳의 언급은 아마도 대화편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아데이만토스와 플라톤 사이에 그와 관련한 언급이 있었던가 아니면 좋음을 매우 특별한 형상으로 언급하기 전에 좋음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다른 곳에서 일반적인 수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알키비아데스 II> 144d, 147d, <카르미데스>173 a, <에우튀데모스> 280e, 289a, <라케스> 199c, <뤼시스> 219b, <파이돈> 69b 참고)

* 506b-c ‘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보다 세련된 이들은 그걸 현명함이라 여긴다’ : 이 주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각기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즐거움에  좋은 즐거움만이 아니라 나쁜 즐거움도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그 주장의 자기 당착을 드러내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혜’라는 답이 주어지자 다시 그 ‘지혜’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에게 ‘너도 알고 있잖아?’라는 식으로 다시 ‘좋음’이라고 답하는 일종의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졌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506d ‘앎이 없는 믿음, 지성이 없는 채로 참인 믿음 : 플라톤은 앎과 믿음을 엄격히 구별한다. 그러나 나중 선분의 비유에서도 그렇고 앞서 시민적 덕을 언급할 때도 그랬듯이 믿음이라도 모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 인식론적 정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도 차이를 갖는 것이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존재론적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다만 통치자들가 갖추어야 앎과 엄격히 구분한다는 차원에서 눈먼 상태로 언급되고 있을 뿐, 시민적 덕 또는 시민적 용기 등 이른바 올바른 믿음(aretē doxa)은 덕에 준하는 것으로서 앎에 상당 정도 관여되어 있다.

* 507a ‘좋음 자체의 이자이자 자식’ : 이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tokos는 그 자체로 ‘자식’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원금이자 아버지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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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은 드디어 철학 통치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가장 큰 배울 거리’로서 ‘좋음의 형상’(ē tou agathou idea)을 언급한다. 물론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좋음’(to agathon)이란 말 자체는 우리말 역본 색인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좋음이 ‘가장 큰 배울 거리’이며 ‘정의로운 것들이나 다른 유용한 것들이 그것에 의해 비로소 쓸모 있고 이롭게’ 되며, 나아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이로움이 없다’고까지(505a) 말하는 것은 이곳에 처음이고 유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좋음 말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현명해도 좋음에 대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κτῆσις이 없다’(505b)까지 말한다. 사실 대중들은 좋음을 즐거움이라 여기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것을 현명함으로 여기지만 그들 모두 좋음을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정작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과 관련된 것인 한 ‘그렇게 보이는 것’(ta dokouta)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ta onta)을 추구한다.(505d) 겉만 정의롭거나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만족하거나 그 자체를 추구하는 사람은 있으나 겉만 좋은 것에 만족하거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좋은 것과 관련해서만은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것을 원한다. 요컨대 좋음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제약적인 것이다.

* 좋음에 대한 추구가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에게 무제약적인 한, 모든 사람들, 모든 시민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들은 그들 모두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와 개인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그들의 통치 이념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목표를 가능케 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점차 드러나겠지만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바로 그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민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지고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 통치자가 알아야 하는 앎들 가운에 최고의 앎이다. 실제로 좋은 것의 획득은 진정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결코 좋음에 대해 캄캄한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505e) 그러나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능할까? 누군가에게 좋은 것은 누군가에게 나쁘기도 한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실제로 좋은 것은 공리주의 주장대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이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게 좋음의 이데아는 무제약적으로 좋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약적으로 그것을 가져다주는 앎이다.  그리고 철학 통치자는 그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통해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착한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모든 시민들 각각에게 실제 좋은 것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 모두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철학 통치자의 앎을 통해 진정 좋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다. 이를테면 부정의한 행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철학 통치자에게 그 사람은 강제와 징벌을  통한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기초한 교육과 설득,  교정과 변화를 통해 공동체적 조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다시 끌어 안아야 할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음의 이데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가히 신적인 토대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그 자체로 지고의 좋음을 구유하고 있는 영원 불변의 실재이다. 그러한 한, 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우주적 좋음에 대한 참되고 객관적인 앎이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그 참되고 객관적인 앎을 구성하는 지고의 형상이 다름 아닌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을 무제약적으로 다 좋게 하는 것을 정치의 이념으로 하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에게 그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이르러야 할 지고의 앎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낭만의 끝이 어디인지, 정치적, 도덕적 이상주의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가히 절망이라 할 정도의 시대 현실에서조차 그  한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은  회의와 데카당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이상과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 <국가>에서 플라톤이 지금까지 논의해온 것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라와 개인의 덕들 즉 지혜와 용기와 절제 정의의 덕들이다. 사실 그 덕들은 그리스 사회에서 기본적인 사주덕(四柱德)으로 이미 익숙한 덕목들이다. 그러다 플라톤에 와서 그러한 덕목들은 단순한 관습상의 경험심리학적 차원을 넘어 나라와 개인 영혼을 구성하는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철학적 덕목들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렇게 새롭게 확립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덕들마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서론 격에 해당하는 이곳에서부터 단칼에 그 좋음의 이데아의 하위에 속하는 것으로 내려앉는다. 이것은 아예 <국가> 논의의 시작부터 플라톤 스스로 그 철학적 덕목들조차 전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에 의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좋음의 이데아는 제반 철학적 덕목들조차 넘어서는 자신의 철학에서 최고 최상의 지위를 갖는 형이상학적 원리였던 것이다. 특히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좋음의 형상’은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한 그 모든 덕목들의 ‘쓸모와 이로움’ 말 그대로  홍익(弘益)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알지 못한다면 설사 다른 그 어떤 것들을 알아도 아무 이로움ophelos이 없다고까지 말한다.(505a) 게다가 현명함phronesis과 관련해서도 좋음에 대해서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아무런 소용ktēsis이 없다고도 말한다.(505b) 나중 태양의 비유를 다룰 때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지고의 우월성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겠지만 그 하나만 미리 소개하자면 이 좋음의 이데아는 ‘앎epistēmē과 진리alētheia 보다 한층 더 아름답고kalos 그것의 원인aitia으로서 지위prosbeia와 능력dynamis에서 있음ousia을 한층 넘어서는hyperchontos 것’으로까지 언급되고 있다.(508e-509b).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마지막 결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제작자 데미우르고스가 제작의 기본 목표 내지 합목정성을 오로지 ‘좋음’에서 찾는 것과도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앞서도 간략히 밝혔지만 좋음의 이데아가 왜 플라톤 철학의 기본 토대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철학자와 철학자 통치체제의 이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그리고 그것이 후대 철학자들에 의해 왜 가히 신적인 위상을 갖는 것으로까지 받아 들여졌는지를 미리 짐작케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정작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은 그 자체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이 소크라테스 자신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이곳에서부터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고 열심히 해 봐야 흉한 꼴이나 보이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갖는 자기 생각에 이르는 것만도 벅차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하겠지만 ‘좋음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좋음의 자식이자 좋음과 가장 닮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제안한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이후에 펼쳐질 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자신의 그 생각을 오로지 비유들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른바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가 그것이다. 실제로 그 비유들 모두는 그가 예고한 대로 좋음의 이데아를 어떻게든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소크라테스 자신의 열의를 반영함과 동시에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비록 플라톤 철학에서 지고의 위상을 갖는 철학적 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비유로서만 제시되는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원천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플라톤의 좋음’(to Platōnos agathon)이란 말이 그의 시대에서 모호한 말을 가리키는 속담으로까지 사용되었겠는가!(J. Adam. 해당 부분 참고) 이러한 플라톤의 태도는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 ‘道可道 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한 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플라톤 철학이 합리주의 철학의 극치라 일컬어지면서도 지고의 철학적 원리와 관련해서는 추론과 설명(logos)을 넘어서는  이른바 변증술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포리아이자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로서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근원적 우월성은 플라톤 철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되레 탐구의 열망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 따라 플라톤 연구사를 되돌아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고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철학적 성과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해석을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반 철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을 불어넣는 배경이 되었다.

*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논의 전개의 이와 같은 특성상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 좋음의 이데아를 주제로 하는 차후 몇 차례 강해는 일단 해당 부분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설에 우선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물론 그 비유들 각각을 살피면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 또한 일정 부분 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비유들 전체를 살펴본 후 그것들에 대한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고찰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논의의 전반적인 구도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끝-

 

<다음 주제>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7b-509b)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2024.10.18. 영상

◎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10월 제14차 정기세미나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주제: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4년 10월 18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 & 줌(zoom) 병행

이규성 사상 연구 모임에서는 요즈음 이규성 선생이 지은 『중국현대철학사론』(2020)을 강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비트겐슈타인 발표로 한 번 건너 뛰고,
6월에 읽은 서론에 이어서 1장 진독수(陳獨秀) 편을 10월에 읽습니다.

 

○ 『중국현대철학사론』(2020) 목차
서론. 동서 ‘융회’와 현대 ‘신철학’
1장. ‘주권재민’과 사회주의: 진독수(陳獨秀)
2장. 자아의 발현과 무한생성의 실천론: 모택동(毛澤東)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4장. ‘자기학’으로서의 ‘생명철학’과 동서문화론: 양수명(梁漱溟)
5장. ‘체용불이’와 ‘흡벽’ 생성론: 웅십력(熊十力)
6장. 동서 ‘융회’와 형식주의 신이학: 풍우란(馮友蘭)
7장. ‘도’의 형이상학과 ‘이사겸중’의 지식론: 김악림(金岳霖)
8장. 변증법의 ‘합리적 내핵’과 심미적 ‘신철학’: 장세영(張世英)
결론. 상실과 전망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NiCr_Yn8GW0?si=Mmc6EkDDteXqb4WM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동아대)’|2023.12.08. 영상

지난 영상을 올립니다.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3년 12월 제9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연구’
-발제: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일시: 2023년 12월 8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동학사상에 관한 철학적 해석은 여러 갈래입니다만, 이규성 선생은 내외 합일이라는 자신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을 “안으로 개체의 활력이 자주적으로 표출되고 밖으로 다른 생명체들과의 우주적 연대성을 자각하는” 사상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내외 합일의 관점에서 동학사상은 한편으로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서 사상의 개벽”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조직화 운동”으로서 혁명적 실천 즉 역사적 개벽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이규성 선생의 철학적 모색에서 동학사상은 하나의 철학적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은 이돈화 선생과 김지하 시인의 동학 해석과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보여주는데, 이번 모임에서는 이규성 선생의 동학사상 해석을 놓고 토론해 보고자 합니다.

☞ 발표 원고: 이규성의동학사상연구 발표문 (이병창)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WpW-xBKSGjs?si=cTCF8SyBrE4YLSv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발표:이영철(부산대) 2024.08.16.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4년 8월 제13차 정기세미나

-주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 연구’
-발표: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이영철
-일시: 2024년 8월 16일(금) 오후 4시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5 SK리쳄블 1305호(zoom 병행)

이규성 선생의 사상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이규성 선생의 관심은 상당히 특이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했는데, 그것이 칸트가 물 자체에 대해 불가지론을 폈던 것과 같다고 본 것일까요?
쇼펜하우어가 칸트를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처럼, 이규성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서구 현대 철학을 비판하는 도구로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국내 대표적인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저서 대부분을 번역한 부산대 이영철 교수께서 이규성 선생의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연구의 전말을 분석해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 발표원고: [웹진발표문편집]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1jq1b3HsaUE?si=dOMWt2ne4q89gnLL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4)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4. 철학자 왕정과 그것의 실현 가능성(497a-502c)

 

*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은 가짜 철학자들을 활개 치게 만들어 철학에 대한 비난을 더욱 심화시켰고 소수의 철학자들은 현실 정치를 등지고 스스로 고고한 삶을 영위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자의 삶은 철학자로서 최대의 것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다. 철학자에게 최대의 것은 그에게 맞는 정치체제를 만나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 나라도 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대화의 주제는 과연 철학자에게 맞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옮겨진다.

 

[497a-502c]

1) 우선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런 정치체제πολιτεία가 오늘날의 정치체제들 중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497a) 이에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나라의 체제κατάστασις들 중 지혜를 사랑하는 자연적 성향φύσις에 걸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것들 안에서는 그러한 성향의 부류가 힘을 유지하기는커녕 이질적인 성품 ἦθος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그 체제가 다름 아닌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해가며 수립했던 나라일 것이라 생각한다.(497b)

2) 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즉 ‘정치체제의 원리λόγος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 하나가 나라 안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점에서 바로 그 나라라고 말한다.(497c) 그런데 그때는 제기된 반론들 때문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τὰ καλὰ τῷ ὄντι χαλεπά는 말도 있듯이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에 답하려 한다고 말한다.(497d)

3) 오늘날에는 철학 자질이 있는 청소년들이 철학 활동에서 떠나버리는 바람에 어른이 되어서 철학적 논의λόγος를 접해도 그것을 부차적인πάρεργος 것으로 여겨 결국 노년에 이르면 소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철학의 불꽃이 꺼져버린다.(497e-498a) 그러므로 나라가 제대로 철학을 대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파멸을 피하려면 민주정의 현실과 정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지혜 사랑을 접하게 하여 철학에 봉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영혼이 완성되기τελεοῦσθα 시작하는 시기에 영혼의 단련ἐπιτείνει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498b) 그리고 기력이 쇠해 정치와 군사 업무에서 벗어나면 그들은 비로소 세상일에서 떠나ἄφετος 철학의 들판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후 저승에서 살아온 삶에 어울리는 운명을 받게 된다.(498c)

4)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의 열의에 탄복하지만 트라쉬마코스를 위시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반발하며 어떻게도 설득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 자신의 논의를 접하고 그때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될 때까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8d)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하에서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ῥήματα ἐξεπίτηδες ἀλλήλοις ὡμοιωμένα에만 익숙해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는 까닭도 언급한다.(498e) 그들은 ‘말과 행동에서’ἔργῳ τε καὶ λόγῳ 완벽하게 덕ἀρετῇ과 닮은 사람이 권력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고(498e) ‘아름답고 자유로운’καλῶν τε καὶ ἐλευθέρων 논변을 충분히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그 논변이란 앎을 얻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리τὸ ἀληθὲς를 추구하고 반대로 명성δόξα과 말다툼ἔρις만을 목표로 삼는 교언τὰ κομψά과 쟁론τὰ ἐριστικὰ들에는 안녕을 고하는 논변이다.(499a)

5) 소크라테스는 이같이 서두적 결의를 표한 후 마침내 “소수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δυναστεία나 왕좌βασίλεια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θεία ἐπιπνοία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음”을 선언한다.(499b-c)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이며 무사 여신이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 비록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6) 이에 아데이만토스는 대중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499d)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를 향해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μὴ πάνυ οὕτω τῶν πολλῶν κατηγόρει 그들을 이기려 들지 말고μὴ φιλονικῶν 그들의 마음을 가라 앉게 하고παραμυθούμενος 배움 사랑φιλομάθεια에 대한 그들의 편견διαβολή을 해소해 주면서(499e) 어떤 사람들이 철학자인지 그들의 자연적 성향과 활동을 규정해서 잘 알려 주면 그들은 분명 다른 의견δόξ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500a) 왜냐하면 시기심 없고ἄφθονος 온순한πρᾶος 사람이 사납지 않은 사람에게 사납게χαλεπῶς 구는 법도 없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을 시기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사나운χαλεπός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00a) 결국 대중들이 철학에 대해 사나운 태도를 갖는 까닭은, 부적절하게οὐ προσῆκον 철학에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는 가짜 철학자들 때문이다.(500b)

7) 진정 철학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시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을 여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에 진정으로 생각이 향해 있어 ‘항상 동일하게κατὰ ταὐτὰ ἀεὶ 있는 것’들을 보고ὁρῶντας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κόσμῳ 이성에 맞는κατὰ λόγο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θεωμένους, 그것들을 모방하고μιμεῖσθαί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ἀφομοιοῦσθα 하는 사람들이다.(500c) 그러므로 철학자는 신적이고 질서 있는 것과 어울려서, 비록 어디에나 비방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가능한 한도까지 신적이고 질서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절제와 정의, 그리고 모든 대중적 덕δημοτικῆ ἀρετῆ을 구현하는 장인δημιουργός으로서 어떤 강제ἀνάγκη가 생겨서 이로 인해 그가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단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쓸 수밖에 없게 된다.(500d)

8) 철학자에 관한 이러한 말들이 진실임을 대중οἱ πολλοὶ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결코 철학자들에게 사납게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은 신적인 본παράδειγμα을 사용하는 화가διαγραφεύς들이 나라의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해도 나라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우리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500e) 그러나 철학자들이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개인이든 나라든 깨끗한 상태에서 넘겨받거나 그들이 직접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는 거기에 손을 대거나 법률을 써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것ὑπογράψασθα이다.(501a) 그들은 이를 완성해가면서 ‘양쪽을 반복적으로’πυκνά ἑκατέρωσε 살펴보며ἀποβλέποιεν 즉 한편으로 ‘본성상 정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 절제 있는 것’과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살펴보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 인간들 안에 있는 그런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밑그림을 채워간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섞어서 이것들로부터 ‘인간 상’τὸ ἀνδρείκελον을 합성해낸다. 호메로스가 말한 ‘신의 모습을 한 것’ θεοειδές이자 ‘신을 닮은 것’θεοείκελον이란 바로 그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501b)

9)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이 이처럼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리는 화가ζώγραφος임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사납게 굴었던 태도도 바뀌어 훨씬 온순해질 것이다.(501c) 그리고 그들은 철학자들이 ‘있는 것’τὸ ὄν과 진리 ἀληθεία를 상대로 사랑에 빠진 사람ἐραστής임을 철학자들의 자연적 성향 또한 그것에 알맞은 활동을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성향보다도 완벽하게 뛰어난 것이자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임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501d)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우리의 이야기에 대중들이 설득된 것πεπεισμένοι ἔστων으로 보면 어떨까 물은 후 그의 동의를 받아낸다.(501e)

10)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은 자연적 성향상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로 태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502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비록 왕들과 권력자들의 자손들이 구원받기σωθῆναι 어렵다는 데 동의하지만 모든 시대χρόνος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τὰ ἐπιτηδεύματα을 제정한다면, 시민πολίτης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502b) 요컨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것이 최선’βέλτιστα, εἴπερ δυνατά이다. 그리고 입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실현된다면 그것들이 가장 좋은ἄριστα 것들이고, 비록 실현이 어렵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50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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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497d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렵다’ta kala tō onti chalepa :  오늘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속담으로 435c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 497c ‘그때’, ‘한 가지’, ‘정치체제의 원리’ :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의 현실 정치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을 피력하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정치체제가 그들 서로가 제2권 369a에서 제4권 445d에 이르기까지 ‘말로 수립한 나라’(logopolis)라고 여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만 빼고 다른 모든 점들에서 그 나라임에 동의를 표한다. 그 한 가지의 핵심은 ‘정치체제의 원리(logos)를 이해하고 있는 부류의 존재’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이 부류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말로 나라를 세우는 제4권까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세간의 오해와 비난을 의식하여 그는 ‘통치자들(hoi archontes)’을 ‘철학자(philosophos)’로 명시하는 것을 피하고 ‘감독자(epistatēs)’(412a),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aristoi)’(412c), ‘완벽한 수호자들(phylakes pantaleis)’(414b)로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뺐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그때 통치자들의 임명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철학자들임을 밝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도 실토하고 있듯이(502d) 만약 그때 그 점을 밝혔다면 논의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할 정도로 반감을 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제4권까지 ‘말로 수립하는 나라’에서도 통치자들이 철학자임을 암시하는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크라테스도 503a에서 밝히고 있듯이 앞서 살핀 수호자의 성향과 교육(375a-412b),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412b-427c) 관련 부분과  그 후 제시된 통치자로서 철학자의 자질(484a-487a) 부분을 비교하면 양자가 일치하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특히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치체제의 원리(logos)가 기본적으로 나라에서건 혼에서건 ‘서로 다른 부분들의 조화의 원리’로서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이를테면 시가 교육을 다루는 402a를 보면 ‘제대로 시가 교육을 받은 자가 나중 커서 제대로 알아보는 준거’로서 ‘원리’(logos)(402a)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원리가 철학임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 ‘감독자’를 언급할 때도 그 감독자란 ‘완벽한 의미에서 가장 시가적이며 가장 조화로운 사람’(412a)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보면 여기서 말하는 ‘그때’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는 않지만, 내용상으로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할 때’로 보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 <국가>의 전체 구도를 논의할 때 살폈듯이 소크라테스는 제4권까지 말로 정의로운 나라를 수립한 후 이어서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제5권 서두에 대화자들이 처자공유 등의 문제에 대해 이의를 표명함에 따라 그 이의에 대한 논의가 제7권까지 이어지고 정작 부정의한 나라에 대해서는 제8권에 가서야 다루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일단 논의 순서상 일종의 일탈이다. 그러나 앞서 제5권 서두 내용을 살필 때 언급했듯이 이러한 논의의 일탈은 정작 플라톤이 가장 중요한 주제로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철학과 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 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국가> 서술 계획의 일환이다. 요컨대 대화자들의 이의 제기는 사정상 ‘그때’ 못 꺼낸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인 주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실질적인 이상국가로서 철학자 왕정을 다루기 위한 플라톤 나름의 주도면밀한 포석이었던 것이었다. <국가>에서 형식상 논의의 일탈로 보이는 제5권에서 제7권까지의 내용이 실제로는 <국가>의 핵심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 3) 497d- 498a : 이제 주제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철학을 대해야 파멸을 피할 수 있을까?”로 전환된다. 기존의 정치체제 특히 민주정에서는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최상의 존재로서 철학자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생존하기조차 힘들고 그 속에서 소수 살아남은 철학자들조차 현실을 등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진정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제대로 평가받고 제대로 그에 적합한 활동을 최선으로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정은 청년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나날이 뒤떨어지게 하여 어른이 된 후 철학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그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 속에서 설사 소수의 철학자들이 살아남았더라도 그들에게서 철학의 불꽃이 지속해서 타오르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민주정이 철학을 멀리하여 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하였다면 이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철학자 왕 정치체제가 들어서야 철학자가 가장 자신에 적합한 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으므로 나라를 파멸로부터 구해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 3) 498b-c :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철학자왕 체제에서 철학자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교육과 책무 전 과정을 아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연령 및 시기별 자세한 사항은 강해 45에서도 언급하였고 제7권 해당 부분에서도 살피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수호자들의 양성을 위한 청소년기의 시가 및 체육 교육이 어려서부터 18세까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 다음에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한 후 20세가 되면 그들 가운데 시험을 거쳐 수호자들이 선발된다.(537b-c)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변증술을 위한 예비 교육을 받고 30세가 되면 다시 선발 과정을 거쳐 보다 훌륭한 수호자들이 임명된다.(537d) 그리고 그들은 35세까지 5년 동안 집중적으로 철학 교육을 받고 그 후 15년 동안 철학 연구는 물론 전쟁의 지휘 및 관직도 맡아가며 통치자가 되기 위한 실무를 수행한다.(540a) 그리고 마침내 연장자로서 50세가 되었을 때 두루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 ‘좋음 자체’(to aghaton auto),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본으로 삼아 여생 동안 번갈아 가며 나라와 개개인들 그리고 자신들을 다스린다.(540b) 그리고 직무에서 해방되면 여생을 철학으로 소일하다 사후 ‘축복받은 자들의 섬들’로 간다.(519c, 540b)

* 4) 498d ‘트라쉬마코스와 다른 이들을 설득할 때까지, 혹은 그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러한 논의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의 삶에 도움이 될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철학과 정치의 결합을 얼마나 열망했는지 그리고 당대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이 그 철학적 논변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플라톤이 얼마나 열의를 갖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설득의 시도는 사람들이 이생에서는 물론 저승에서건 다시 태어나서건 그때 그 주장이 도움이 되는 것이라 깨달을 때까지 결코 포기될 수도 멈춰질 수도 없다. 그 긴 시간을 아데이만토스가 ‘참 짧은 시간을 말씀하시네요.’(498d)라고 반어적으로 답하는 것은 냉소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후까지 끌어들이고 이생의 기간을 그쯤이야 정도로 여기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대한 의구심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제10권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가 사후 영혼이 불멸하다면 이생의 시간들은 그저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자 글라우콘 또한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608c-d) 486a에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와 관련하여 인간적 삶의 시간과 구분되는 ‘모든 시간’(pas chronos)이 언급되고 있다. 저승과 혼의 불멸과 관련한 논의는 제10권에 가서(608c-621d)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 4) 498e ‘인위적으로 서로 닮게 만들어진 표현들’ : 이 말은 당대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가 수사학을 가르치며 즐겨 쓴 표현들을 가리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부류의 수사학자들을 가짜 철학자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법정에서든 사적인 교류에서든 오로지 명성과 말다툼(eris)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ta eristika)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에 반해 진정한 철학자는 저절로 짜임새와 운이 맞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자유로운 논변을 구사하고 말과 행동에서 덕과 같은 짜임새를 가지고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다.(499a)

* 5) 499b-c :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제기한다. 이 내용은 플라톤의 철학자 왕정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테제이자 플라톤 정치철학의 목표가 왜 철학과 정치 권력의 결합으로 운위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핵심 테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 <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 내용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표현상 다소 차이도 있어 그 부분들 전문을 소개하면 각기 아래와 같다.

i) 우선 <국가>에서 플라톤은 앞서 대화자들의 이의에 따라 제기된 난관들에 직면하여(471c-474c) 처음으로 통치자가 왜 철학자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면서 아래와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철학자들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는 자들과 권력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하나로 합쳐지고 오늘날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향하고 있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강제되지 않는 한, 사랑하는 글라우콘, 나라들에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 전체에도 나쁜 일들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말로 설명해온 바로 그 정치체제가 자랄 수 있는 한도까지 자라나서 햇빛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473c-d)

ii) 그런 연후 플라톤은 이곳에서 가짜 철학자들의 주장에 휩싸여 있는 대중들에게 철학자 왕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설득하고 환기한다는 차원에서 그 내용을 다시 또 아래와 같이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쓸모없다고 불리는 이 소수의 철학자들을 운이 좋게도 어떤 강제가 에워싸서,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라를 돌보며 나라에 봉사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아니면 오늘날 권좌나 왕좌에 앉아 있는 자들의 자식들, 또는 그들 자신이 어떤 ‘신적인 영감’에 의해서 진정한 철학에 대한 진정한 사랑ἔρος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499b-c)

iii)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플라톤은 그러한 철학자 왕정 체제의 실현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언급하면서 이 내용을 아래와 같이 또다시 꺼내 든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가 나라를 장악하게 되기 전에는 나라에도 시민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말로 꾸미고 있는 정치체제 또한 실제로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501e)

iv) 그런데 이 내용은 그의 <편지들> 가운데 일흔 살이 넘어 쓴 것으로 알려진 ‘일곱 번째 편지’에도 나온다. “올바르고 진실 되게 철학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아니면 각 나라의 권력자들이 모종의 신적 도움을 받아 진정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질 않을 것이다.”(<편지들> 326b).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 생각을 이미 자신의 첫 번째 시칠리아 방문 당시부터 그러니까 그의 나이 38세 전후쯤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 정치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왕정 사상이 중기 대화편인 <국가>에 와서야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초기 대화편을 집필하면서부터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국가>에서 나라를 건설하는 철학자의 모습(500c)과 플라톤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29a)이 활동 구도에서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펼친 철학자왕 사상을 말년에 가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론적으로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펼친 플라톤의 정치적 이상은 젊은 시절 이래 이상으로서 일관된 지위와 의미를 갖고 플라톤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다. 이점에서도 말년의 정치철학 저작 <법률>을 플라톤 신념의 변화에 따른 <국가>의 현실 수정판으로 여기는 일부 견해들은 잘못된 것이다. 누구라도 이상과 현실적 대안을 동시에 함께 가질 수 있듯이 플라톤 역시 <국가>의 이상은 최선의 이상 그대로, 최선의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의 세부 입법은 그 나름의 최선 그대로 그의 정치철학 전체를 구성하는 두 축으로 함께 병립해 있는 것이다.

* 7) 499e :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정치의 결합과 관련하여 대중을 설득하는 데 있어 이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 때까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겠다(498d)고 말하고 있는 것은 철학과 정치의 결합에 관한 논변이 플라톤에게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논변의 진실을 설득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지난한 것임을 함께 보여준다. 사실 설득의 기한에 사후의 시간까지 포함될 정도면 사실 이생에서 그것을 설득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대중들이 이런 이야기에 설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도 철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에 대중들 역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499d) 그러나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에게 ‘대중들을 아주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바로 반박한다.(499e)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바로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대중에 대한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그의 태도는 대중에 관해 이어지는 그의 말을 통해 이내 해소되는데 이 부분은 플라톤 대중관의 진면목을 들여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들이 설득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대중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가 빚어낸 선동정치와 소피스트들이 이끄는 그릇된 교육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철학에 뛰어들어 명성과 말다툼만을 목표로 교언과 쟁론을 일삼는 행태가 일상에 넘쳐난다. 게다가 대중들은 말과 행동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완벽하게 덕과 닮은 사람이 나라에서 권력을 갖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으므로 철학과 정치의 결합, 즉 철학자가 통치를 할 수 있기 전까지는 나라도 정치체제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정치체제가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것이며 또 있게 될 것(499d)이라는 확신으로 대중들이 그러한 정치체제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간다면 그들의 생각 또한 분명 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500a)

* 이곳에서 그려지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 즉 대중에 대한 폄하와 혐오와는 거리가 멀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대중이 사납고 시기심이 많은 것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민주정 아래에서 가짜 철학자들이 자기들끼리 욕하고 다투기를 즐기며 항상 사람들에 관해 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지 원래부터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굳이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사나운 경우란 소수에게나 있지 다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500a)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대중들의 생각과 태도가 본성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핀 ‘말로 수립한 나라’ 즉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들여다보면 그 나라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자 계급, 이른바 대중들은 절대 사납지 않고 다른 계층에 대한 시기심도 없다. 여기에서도(500d)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나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대중들이 알게 된다면 결코 그들이 사나워지지 않고 오히려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500a, d)

* 우리가 제4권에서 살폈듯이 말로 세운 이상국가의 생산자 계급은 다른 계층과 더불어 절제라는 덕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층과 갈등 없이 나라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곳에서 언급되는 내용에 비추어 표현하자면 요컨대 대중들은 훌륭한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철학자들의 말에 충분히 귀를 기울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논변을 통해 그들을 ‘설득’(peithos)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설득의 과정에는 어떠한 ‘강제’(anangchē)나 ‘폭력’(bia)도 개입되지 않는다. 설사 철학자의 설득이 성공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강제는커녕 하물며 이생을 넘어 그러한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들의 말의 진실을 깨달을 때까지 순전히 설득의 방식으로만 일관되게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의 대중관은 민주정 통치 아래 선동 정치가에 휩쓸려 군중심리에 빠진 상태의 대중에 대한 플라톤의 혹독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결코 대중 일반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시민으로서 절제와 대중적 덕을 갖춘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완성을 기약하기 힘든 정치체제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공동체 일원으로서 대중의 가능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그가 견지하고 있는 정치 원리에 기반하여 있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정치체제도 법을 갖춘 정치체제인 한에서는 강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곳에서도(499b, 500d) ‘강제’란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 말도 어떻게든 정무를 피해 철학에만 머물러 있으려는 철학자들에 대한 강제로 언급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와 대화자들이 수립하는 입법은 강제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나라건 개인이건 설득을 통한 내적 조화의 가능성을 보다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것이다. 실제로 훗날 <법률>에서 표명된 구체적인 법률들조차 징벌과 강제보다는 교육과 교정에 그 입법의 근본 취지가 자리하고 있다.

* 7) 500d ‘대중적 덕’dēmotikē aretē :  ‘철학과 지성 없이도 습관과 단련에 의해 생길 수 있는 시민적 덕'(<파이돈> 82a-b)을 의미한다.  제4권 430c에 나오는 ‘시민적 용기’도 이러한 덕에 해당한다.

* 8) 500c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500d ‘거기서 본ὁρᾷ 것을 가지고’ : 이 부분은 철학자들이 가짜 철학자들과 달리 어떻게 진정으로 ‘있는 것들’에 생각이 향해 있고 그에 따라 나라에서건 개인에서건 얼마나 철학자로서 통치자로서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들을 ‘보고’ 그것들이 모두가 정의롭고 모두가 질서 있고 이성에 맞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그것들을 모방하고 그것들과 최대한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자 모든 ‘대중적 덕’을 구현하는 장인(dēmiourgos)로서 거기서 본 것을 자기 자신과 사람들의 성품 안에 집어넣도록 애쓰는 사람들이다.(500d) 이들은 마치 신적인 본(paradeigma)을 사용하는 화가처럼 사람들의 성품과 나라를 마치 화판처럼 취급해서 우선 그것들을 깨끗하게 만든 후 본과 그림 양쪽을 반복적으로 ‘살펴보며’ 정치체제의 형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501a) 이러한 철학자들의 모습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서 언급된 이상 국가를 우주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플라톤 말년의 저작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플라톤이 여기서 치열할 정도의 열의를 갖고 그려내는 진정한 철학자의 모습들은 나라 차원에서건 개인 차원에서건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신적인 것’, ‘신을 닮은 것’으로 만들어가려는 플라톤 자신의 내적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지대하고 진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누차 언급했지만, 플라톤 철학은 위계상 ‘있는 것들’이 최상위에 있지만 진정 플라톤 자신이 정작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그 ‘있는 것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이 어떻게 현실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가, 즉 ‘지상에 있는 것들’의 구제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었다. 앞으로 살피게 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514a-521b)에서 철학자가 동굴에서 빠져 나와 참된 세계와 그것을 비추는 태양을 보았음에도 다시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철학자왕의 임무는 ‘있는 것들’을 보고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과 최대한 닮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원칙과 원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처자공유를 비롯한 수호자 집단의 공유 일반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 부분을 되돌아보면(464b–466d) 우리는 완벽한 수호자로서 철학자왕이 지향하는 핵심가치와 임무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2,500여 년 전 제시된 통치자의 임무와 지침들임에도 현금의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 윤석열의 행태와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뻔뻔하고 무도한 자인지,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대중이 기득권자들, 곡학아세를 일삼는 자들에 휘둘려 통치자를 잘못 뽑으면 얼마나 참담할 정도로 나라가 도탄에 빠트리는지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다. 그러한 견지에서 그것을 다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입법의 목표로 가장 좋은 것은 나라를 결속시켜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라를 분열시켜 하나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2) 나라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민 중 한 명이 좋든 나쁘든 어떤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을 자기의 일이라고 여기고 전체가 함께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라가 가장 좋은 정치체제와 법을 갖춘 나라이다

3) 통치자들은 민중을 구원하고 지키는 조력자이고 민중은 통치자들에게 보수를 주고 부양하는 자로서 서로를 똑같이 시민들로 불러야 한다.

4) 통치자들은 서로 형제자매, 부모와 자식 등 친족으로 부르고 서로를 공경하고 봉양하며 서로에 대해 경건하고 정의롭게 행해야 한다.

5) 수호자들은 집과 토지, 자식과 배우자 등 어떤 것도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해야 한다.

6) 통치자들은 두려움과 염치로써 폭력을 배제하고 모든 영역에서 시민들과 반목함이 없이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 10) 502c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 소크라테스는 가짜 철학자에 대비되는 진정한 철학자 특히 진정한 통치자로서 철학자 왕에 대한 논의와 그러한 논의의 설득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 철학자 왕정 체제 즉 ‘가장 아름다운 정치체제’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시 꺼내어 든다. 이 철학자 왕정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앞서 세 번째 파도로서 제기된 그때까지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의 가능성을 다루면서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강해 56 참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한 요약 선에서 그치기로 한다.

* 이상국가의 가능성과 관련한 플라톤의 답변을 요약하면 1) 말로 수립한 이상국가(logopolis)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본으로 삼아 그것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행위를 통해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3) 그와 같이 본과 최대한 닮은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권좌에 있는 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4) 결국 이상 국가의 가능성은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으로 귀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자왕의 존재 가능성은 이후에 제시될 교육과정이 제도화되는 한 ‘불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어렵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단 한 명만이라도 구원을 받아 타락을 면하고 어디선가 통치자가 되어 우리가 설명했던 법과 활동들을 제정한다면, 시민들이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국가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502b)

* 그러나 플라톤이 말한 이 가느다란 가능성에 기대어 플라톤 자신 이상국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구현하려 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그린 이상국가를 이상적 목표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 자신 불가능에 가까운 꿈에만 매달리는 몽상가가 아닌 한, 그것에 최대한 가까운 현실적인 대안을 병행하여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앞서도 누차 언급했듯이 어떤 이들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이상 국가가 본(本)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가 말년에 가서 그러한 가능성이 결국 무망함을 깨닫고 <국가>의 주장을 포기하고 <법률>에서 최선의 현실 국가론을 새로 구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기했다면 말년의 대작 <티마이오스>의 의도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상국가가 본 그대로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주장은 <국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상국가는 현실 통치자가 최대한 가까이 가기 위해 주어진 본일 뿐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철학자 왕정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라도 기대하고 제도화할 만할 정도로 쉽게 출현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플라톤에게 이상으로서 <국가>와 현실적 대안으로서 <법률>이 함께 병립하는 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플라톤은 우선 <국가>에서 가장 최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장차 만들어질 실물의 본이 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와 조건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본을 닮은 최선의 나라로 그가 도달한 것이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527c) 즉 철학과 권력의 결합으로서 철학자 왕정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상적 철학자 왕정의 원리를 최대한 현실적 조건에 부합하게 적용하여 관철한 것이 <법률>이다. 이렇게 보면 <법률>은 <국가>의 이상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이상이자 궁극적 지향이라는 깨달음과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세워진 실질적 대안인 것이다. 비록 <법률>에서는 철학자 왕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가>와 <법률>의 나라 모두 하나같이 철학과의 결합, 철학자들의 통치라는 기본 원리 위에 서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법률>에서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체득한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탐문을 토대로 <국가>의 입법 취지에 따라 나라를 실제 건설하는 형식으로 구체적인 법률들이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법률>은 이렇게 이상과 현실을 함께 고려하면서 그것의 연관을 순차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고자 한 플라톤의 평생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플라톤 정치철학의 위대한 두 축이다.

* 이제 철학자 왕정의 구현을 위한 다음 과정은 그 철학자를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의 이데아(502c-506b)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3)

 

  1.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2) 철학자들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489e-495b) – 2

 

[493a-495b]

* 다중οἱ πολλοί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철학자의 성향을 타락시키는 또 다른 집단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다중 스스로 기술의 경쟁자로 여기는 소피스트들을 꼽는다. ‘개인 보수획득술자  각각’ἕκαστος τῶν μισθαρνούντων ἰδιωτῶν으로서 소피스트들은 다중들이 모였을 때 형성되는 다중들의 신념δόγμα을 ‘지혜’σοφία라고 부른다.(493a) 이건 마치 누군가가 ‘거대하고 힘 센 짐승’θρέμματος μεγάλου καὶ ἰσχυροῦ을 기르면서 그 짐승의 분노ὀργή 와 욕구ἐπιθυμί는 물론 그들이 언제 그리고 무엇 때문에 거칠게 굴고 유순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어떤 소리를 듣고 온순해지고 사나워지는지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그 모든 것을 알아내 기술τέχνη로 체계화하여συστησάμενος 그것을 지혜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493b) 그들은 이런 신념들과 욕구 중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름답거나 추한지, 좋거나 나쁜지, 또 정의롭거나 부정의한지 등은 알지도 못한 채 이 모든 것들을 거대한 짐승ζῷον의 믿음δόξα에 따라 이름을 붙여 그 짐승이 기뻐하는χαίροι 것은 ‘좋은 것’이라고 부르고 그 짐승이 기분 나빠하는ἄχθοιτο 것은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들에 대해 다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으면서, 불가피한 것τἀναγκαῖα을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그 불가피한 것이 좋은 것과 실제로 얼마나 다른지는 아예 본 적조차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ἄτοπος 교육자παιδευτής이다.(493c) 요컨대 그림γραφικῇ의 영역에서든 시가μουσικῇ의 영역에서든 정치πολιτικῇ의 영역에서든, 이처럼 다중의 분노ὀργή와 쾌락ἡδονή을 파악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소피스트와 다를 게 없다. 만약 누군가가 다중과 어울리며 자신의 시나 다른 어떤 제작물이나 나라에 대한 봉사를 선보이면서 불가피한 ‘한도를 넘어서’πέρα 그들에게 맹종할 경우, 그것은 소위 ‘디오메데스의 필연’으로 그들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것들이 진정 좋고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설명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καταγέλαστος 만한 설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493d)

*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지혜는 이러한 소피스트들이나 다중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철학자들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닌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ὸν, 또 ‘많은 각각의 것들’ τὰ πολλὰ ἕκαστα이 아닌 ‘각각의 것 자체’αὐτό τι ἕκαστον가 있다고 생각한다.(494a) 대중들πλῆθος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이 철학자가 되는 일은 불가능ἀδύνατος하다.(493e)

* 이러한 상황에서 철학적 성향에 어떤 구원σωτηρία이 있다면 모를까 어떤 젊은이가 그 활동에 머무르면서 완성단계τέλος에까지 이르기는 절대 쉽지 않다. 그 젊은이가  ‘쉽게 배우는 능력’, ‘기억력’, ‘용기’, ‘호방함’ 등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모든 사람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그의 친지들과 시민들οἱ πολῖται,πολίτης은 그의 미래의 능력을 예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고 미리 아부도 떨고 추켜세우며 마냥 굽신거릴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젊은이는 그리스인들Ἕλλην의 일들과 이방인들βαρβάροἱ의 일들을 모두 다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형용할 수 없는 희망ἐλπί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결국 지성 νοῦς이 결여된 헛된 자부심σχηματισμός과 허세φρόνημα, 교만에 빠지게 된다. 특히 그가 큰 나라 시민으로 부유하고πλούσιος 혈통도 좋고γενναῖος  잘 생긴데다가εὐειδὴς 체격도 좋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494a-c) 그래서 그에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진실τἀληθῆ을 알려주면서 ”진정 지성을 갖추려면 지성에 노예 노릇을 하지δουλεύσαντι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주어도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의 자연적 성향 때문에 그 이야기를 좀 알아듣고 마음을 돌려서 철학에 이끌릴 경우(494d) 그의 쓸모χρεία와 동료관계ἑταιρία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그를 말릴 것이고 다른 한편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을 사적으로 음모를 꾸며ἐπιβουλεύοντας 공적으로 재판정ἀγών에 세울 것이다.(494e) 이렇듯 철학적 성향의 부분들 자체도, 나쁜 양육을 받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활동을 멀리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소위 좋다고 하는 것들, 즉 부와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일수록 더욱 더 타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최고의 활동에 적합한 최선의 성향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어떻게 몰락ὄλεθρος하고 파멸διαφθορά하는지 다시 말해 철학자가 현실에서 어떻게 타락하게 되는지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러한 타락한 소수의 사람이 우수한 자질의 크기만큼 나라들에게나 개인들에게나 가장 큰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495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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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3a-e : 이곳에서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와 정의 그리고 소피스트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다중들이 말하는 지혜(sophia)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가 극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소피스트들에게 지혜는 한 마디로 상황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대중의 욕구를  알아내서 체계화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불가피한 것’(tanankaia)’(493c)으로 여기는 것(대중들의 믿음(doxa)이나 신념(dogma) 혹은 물질적 필요, 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마치 디오메데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오딧세우스에게 행한 불가피한 대응 같은 것인 양 합리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혜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비웃음을 살만한 설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에 따라 대중이 이러한 믿음과 신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아테네의 민주정 아래에 있는 이상, 대중은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철학자들의 지혜와 정의, 아름다움은 대중들이 아름답거나 정의롭다고 믿고 있는 ‘많은 각각의 것들’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이다.

* 494c-495b : 철학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정말 철학자가 그래서가 아니다.  그것은 배의 비유에서 살폈듯이,  다만 피폐한 아테네의 정치체제 즉 아테네 민주정 그 자체가  소수의 진정한 철학자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그렇게 여겨질 뿐이다.  물론  그 밖에 다수의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철학에 대한 나쁜 평판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소피스트들과 다중이 지배하는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적, 교육적 환경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특히나 그러한 피폐한 환경 하에서 타락한 철학자 또는 젊은이들은 오히려 그 자질들의 우수함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해악보다 훨씬 더 큰 해악을 저질러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평판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495b)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적 자질에 더해 부유함과 혈통, 훌륭한 외모와 체격까지 젊은이가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자라나면서 어떻게 헛된 자부심과 허세에 빠지게 되는지 그래서 나라와 개인에 얼마나 큰 해악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그들을 어떻게든 다시 철학적으로 돌려세우는 노력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뛰어난 철학적 성향을 갖추었지만 끝내 타락한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라는 데에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견이 없다. 실제로 알키비아데스(기원전 450-404)는 페리클레스를 후견인으로 둘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으로서  철학적 자질도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체격을 갖춘 젊은이였다. 그는 18세 전후 포테다이아 전투에 출전했다가 소크라테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 스스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자처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철학자가 되기에는 그의 정치적 야망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는 정계에 뛰어든 이후 뛰어난 능력으로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실책으로 권력에서 밀려났음에도 적대국이었던 스파르타로까지 망명하는 등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 망명지에서 다시 아테네 정계에 복귀하기 위해  고도의 술책을 동반한 정치적 기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발군의 능력도 자신을 영원히 정계에서 퇴출시키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는 결국 평생 정치적 풍운아로 살다가 기원전 404년 자객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쳤다. 플라톤의 대화편 <알키비아데스>, <향연>에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대화가 실려 있는데 내용은 기본적으로 철학보다는 정치적 야망에 젖어 있던 알키비아데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그를 철학에로 이끌고 가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은 대화편이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알키비아데스 I> 104a-b,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VI 16 1—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키비아데스’ 1. 4, 4. 1 등 참고)

* 아무려나 나라를 몰락과 파멸로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에는 알키비아데스 같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젊은이가 타락하여 그 범상치 않은 뛰어남으로 오히려 나라를 더 큰 곤경으로 끌고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라를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장차 훌륭한 정치가로 자라날 젊은이들의 철학적 자질들을 원천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에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곳에서 시종일관 나라의 몰락과 파멸에 이끄는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다름 아닌 아테네 민주정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체제로서 아테네 민주정이 그대로 존속하는 한, 최고의 활동에 가장 최선의 성향의 몰락과 파멸은 불 보듯 뻔하며 그에 따라 종국적으로 나라가 몰락하고 파멸하는 것 또한 필연적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민주정일지라도 철학자 모두를 완전하게 파괴할 수는 없다. 그러한 피폐한 정치체제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처음부터 신의 섭리moira와 구원sōzein에 따라(492e) 철학적 성향을 끝까지 보전하며 그것이 일러주는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자들이 분명 존재한다. 무엇보다 플라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불멸의 증표이다. 요컨대 민주정과 참주정을 비롯한 현실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혁파하여 진정한 정치가로서 철학자들을 온전히 길러내고, 그들을 통치자로 내세우는 것 즉 철학자 왕정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플라톤이 이상국가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과제였던 것이다.

* 아무려나 이곳 논의의 목표는 그러한 철학자 왕정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이전에, 왜 철학자들이 타락하여 나라를 파괴하는 나쁜 악당이 되는지 그 이유를 먼저 밝혀 철학과 철학자를 세상의 평판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이다. 그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철학적 자질들을 타락시켜 나라를 근본적으로 망치는 가장 큰 원인이 철학자 개인이 아닌 제도로서 민주정 그 자체임을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철학자들에게 나쁜 평판을 가져다주는 배경에는 제도로서 민주정과 그 치하에서 타락한 철학자들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타락한 철학자들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자신이 마치 진정한 철학자인 양 자처하는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철학자의 성향을 흉내 내지만 결코 철학자가 될 수 없는 가짜 철학자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그런 연 후 철학이 비난 받은 현실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진정한 철학자들이 왜 소수가 되어 현실을 도피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함께 논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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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 – 497a)

 

[495c]

* 소크라테스는 이제 황량하고ἐρῆμος 불완전한ἀτελής 상태로 친족이 없는 고아ὀρφανός처럼 내버려진 철학이 그 밖의 또 어떤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에 전혀 걸맞지 않은 인간 나부랭이ἀνθρώπιον들이 멋진 명칭들과 외관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철학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감옥εἱργμός에서 탈옥해서 신전τό ἱερό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기뻐하면서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 작업βαναυσία에서 탈출해ἀποδιδράσκοντες 철학으로 뛰어들었기ἐκπηδῶσιν 때문이다. 그것은 대머리φαλακρός에 작달막한 대장장이χαλκεύς가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자마자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생각διανόημα과 믿음δόξα에서 진실로 궤변σόφισμα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γέννα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φρόνησις은 결여한 서자νόθος를 낳을 것이다.(495c-496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걸맞고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결국 테아게스Θεάγες 등 일부의 경우를 포함해 정말 극소수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의 경우도 ‘영적인 신호’τὸ δαιμόνιον σημεῖον가 있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이 얼마나 즐겁고 축복된 것인지를 맛본 한편 대중의 광기μανία를 또 충분히 목도한 까닭에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마치 짐승들 사이에 떨어진 것처럼 혼자 모든 야만ἄγριος 족속에 맞서기에 충분하지도 않아, 부정의에 가담하지도 않지만 ‘정의를 위한 싸움’σύμμαχος ἐπὶ τὴν τῷ δικαίῳ에 원군으로 함께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라나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득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겨울철χειμών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기 일만 하게 될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불법ἀνομία과 불경한ἀνόσιος 일들로부터 정결함καθαρός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이 땅에서의 삶을 살다가 삶을 떠날ἀπαλλαγήν 때 아름다운 희망ἐλπίς을 가지고 평안하고ἴλαος 너그러운εὐμενής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496a-e)

* 이에 대해 아데이만토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τὰ ἐλάχ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최대의 것τὰ μέγιστα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도 아니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에게 맞는προσηκούσης 정치체제를 만났다면 그 자신도 더 성장하고αὐξήσεται 사적인ἴδιος 것들과 함께 공적인κοινός 것들도 구해냈을 텐데 σώσει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49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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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5c-e : 철학이 비난받는 또 다른 이유는 텅 빈 철학의 자리에 이른바 가짜 철학자들이 비집고 들어와 ‘자신들의 기술 내지 수공작업으로 몸이 망가진 것처럼 영혼도 그렇게 깨지고 부서진 상태로’(495e) 자신의 자연적 성향에 맞지도 않는 철학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가짜 철학자가 과연 누구인지가 주석가들 사이에서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우선은 소크라테스가 가짜 철학자를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로서 돈을 벌어서 결박에서 풀려나 목욕재계하고 신랑처럼 꾸미고서는 주인 딸이 가난하고 홀로 되었다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란 수공업 가문 출신으로서 부를 축적한 후 철학자 행세를 하려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그 가짜 철학자를 ‘생각과 믿음에서 진실로 궤변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것들, 즉 적자가 아닌, 진정한 현명함은 결여한 서자를 낳는 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을 추가로 고려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가짜 철학자에는 소피스트 또는 그들을 추종하며 교양인 행세를 하는 일군의 젊은이들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프로타고라스> 318e 참고)

*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플라톤이 가짜 철학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로 이소크라테스(Isōkratēs 기원전 436-338)를 꼽고 있다. 왜냐하면 이소크라테스는 아울로스를 만들어 큰돈을 번 구리 세공업 가문 출신으로 그 부를 토대로 정치적 신분 상승을 위해 고르기아스 등으로부터 수사학 교육을 받은 후 위대한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로서 평판을 누렸지만 정작  스스로는 ‘철학자’(philosophos)로 불리기를 바랐던(<안티도시스> 271 ff.)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소크라테스는 당대 유명 교양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수사학 학교를 세워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강대국으로 부상한 마케도니아와의 화친을 통해 몰락해가는 아테네를 구하려 온갖 힘을 쏟았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플라톤은 <파이드로스>(279a-b)에서 소크라테스가 행한 그에 대한 아주 짧은 평가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서도 이소크라테스를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철저히 도외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지만 당대 아테네 사람들은 물론 현대의 주석가들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짜 철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를 소환하여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쏟아붓고 있다.

* 495e ‘대머리에 작달막한 대장장이’ : 이소크라테스가 대머리에 작달막하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다만 그는 여늬 젊은이들 처럼 수사학을 배운 후 정계 진출을 꿈꾸었으나 목소리가 작고 소심한데다 가세까지 기울어  소장을 작성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뛰어난 수사학적 지식으로 큰  돈을 벌어 규모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 버금가는 수사학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인들로 부터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싸게 받는 방식으로 말년에는 부친을 넘어설 정도로 큰 부를 이루었다고도 전해진다. (J. Adam. 해당 노트, 김봉철 <이소크라테스> 신서원 2004 참고)

*이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이후 서양 철학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서양 지성사에서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라는 기록은 쉽게 접할 수 있어도 철학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거의 힘들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접어들어 플라톤에 의해 다만 궤변을 일삼던 자들로 폄하되었던 소피스트들이 당대 철학사적 전환을 이끈 사상가들로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에 발맞추어, 특히 근대 통일 국가를 열망하던 독일 사상계에서 이소크라테스의 범그리스주의가 크게 주목을 받은 이래, 이소크라테스는 오늘날 당대 시대현실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세계관을 내세운 선구적인 철학자로 새롭게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질서와 조화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폴리스들의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아테네 제국주의와 이소크라테스가 지지했던 강대국 마케도니아 중심의 범그리스주의는 다(多)의 공존으로 표징되는 전통 그리스 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큰 위험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아테네 제국주의와 범그리스주의는 알렉산더를 통해 헬레니즘적 팽창주의로 이어져 고대 사회의 붕괴를 거쳐 군사적 사상적 세계주의와 기독교의 세계동포주의와 결합하여 종래에는 거대 로마제국을 탄생시켰고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오늘날 근대 제국주의와 세계주의의 역사적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 496a 소수의 철학자가 남게 되는 경우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경우들로 1) 고귀하고 훌륭하게 자라난 사람이 망명하여 자신의 성향에 따라 방해 없이 철학에 머물게 되는 경우 2) 위대한 혼을 가진 자자 작은 나라에 태어나서 국사를 깔보고 철학에 머무는 경우 3) 아주 소수의 훌륭한 성향을 가진 자가 다른 분야의 기술을 경시한 나머지 철학에 머무는 경우 4) 테아게스처럼 병치레로 정치하기가 힘들어 하는 수 없이 철학을 하는 경우 5)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신호를 접한 경우를 들고 있다. 주석가들은 1)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시라쿠사에서 탈출해 아테네로 망명한 플라톤의 친구 디온(Dion)을, 2)의 경우는 비록 에페소스가 작은 나라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왕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철학의 길을 택한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를, 3)의 경우는 여기서처럼 신적인 은혜로 타락의 유혹을 이겨내고 철학에 머문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Phaidon) 과 같은 극소수의 사람들을(플라톤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4)의 경우는 테아게스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철학에 머문 사람들을, 5)의 경우는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전 어떤 때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오직 그에게만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496 b-c ‘영적인 신호’ to daimonion sēmeion : daimonion은 형용사형으로서 정관사 ‘to’가 앞에 붙어 추상명사가 되면서 ‘신성’(Divinity)과 ‘신력’(divine Power)의 의미를 지닌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에게서 오는 특별한 신호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다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변명> 31c-d에서 소크라테스가 그것에 대해 한 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가히 신적인 수준의 냉철한 철학적 자기 반성력을 지칭하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수호신으로서 daimōn이란 말이 제10권 617e에 나오고 <파이드로스> 242b-c에는 자기 행동에 대한 제제로서 ‘익숙한 신호’(to eiōthos sēmeion)란 말이 나온다.

* 496c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어떠한 건전한ὑγιής 행동도 하지 않는다.’ : 앞서 492e-493a에서 우리는 다중의 광기가 지배하는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절망감이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것인지를 살폈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절망감은 그대로 이어져 민주정 체제에서 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어떠한 건전한 행동도 할 수 없음이 처절하게 토로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겨울철에 바람에 실려 오는 흙비를 피해 벽 아래 서 있듯이 잠자코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과 불경한 일들로부터 정결함과 정의를 유지한 상태로 살다가 아름다운 희망을 가지고 평안하고 너그러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만족한 삶이라는 것이다.(496c-e)

* 이곳에서 나타나는 민주정체에 대한 플라톤의 절망과 무력감, 현실 도피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플라톤 철학이 갖는 실천적 성격에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실망감마저 안겨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강해 62에서도 자세히 살폈듯이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철학하는 사람들이 권좌에 오르거나 권력자들이 철학을 하기 전에는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혁명적 결론을 보다 절실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방편적 논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이상국가론은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기대와 점진적 개선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려는 점진적 개혁이론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 현실에서 그러한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현실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청사진으로 평생의 숙고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던 것과 같은 정치적 지성의 극치로서 가히 이상에 가까운 철학자 통치체제를 구상하고 이어지는 논의를 통해 그 철학자 왕의 출현을 담보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강해 62’를 다시 참조할 것)

* 플라톤의 이러한 의도는 이어지는 아데이만토스와의 대화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신적인 성품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양태에 대해 어찌 보면 다소 자조적인 어투로 토로하고 있다. 아데이만토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 소수의 사람이 행하는 일들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고 소크라테스를 위로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반대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소수의 철학자들이 최대의 것을 성취하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것은 앞서 행한 소크라테스의 언급이 소수 철학자들의 소극적인 행동 방책에 대한 변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장차 소수 철학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적극적인 행동 방책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다 절실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이자 일종의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가 내심 의도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철학자들의 신념 유지를 위한 소극적인 삶의 방식을 자조 섞인 마음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걸맞은 철학자 왕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내적 성장은 물론 공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를 구축하는 것임을 보다 절실하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삶이 과연 이렇게 끝나야 할 것인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절규인 것이다. 진정 그들이 수행해야  마땅한 일은 따로 있다. 철학자의 목표는 현실 도피를 통한 유유자적한 삶이 아니라 진상에 대한 지적 인식과 실천을 통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 플라톤의 목표는 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이로써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비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  비방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언급을 모두 마무리하고 태세를 전환하여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을 논의 주제로 다시 꺼내 든다. – 끝 –

 

<다음 주제>

  1. 4. 철학자 왕정의 실현 가능성(497a – 502c)

202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 남기호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면서 – (1) 故 남기호 선생님 추모사 (2) 유작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남기호 저, 2023) 북콘서트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2024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특별행사

[남기호 선생님을 추모하고 기억하면서]

故 남기호 선생님(1970년 ~ 2023년 9월 4일, 향년 53세) 前 연세대 철학과 교수, 한철연 회원

 

지난 2024년 1월 한철연 신년회에서 거행된 故 남기호 선생님 추모행사 영상을 올립니다.

여러 회원 분들의 도움으로 남기호 선생님의 지난날을 함께 돌아보고 그의 학술을 토론할 수 있었습니다.

남기호 선생님의 학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더 활발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일시: 2024년 1월 11일(목) 14시
-장소: 한철연 강의실(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내용:
1) 故 남기호 회원의 학문적 생애 소개와 추모사 / 연효숙
2) 유작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남기호 저, 2023) 북콘서트 / 패널: 이병창, 이관형, 한길석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d2IngLIEvSQ?si=KUMMQNo2oRepD2q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