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마누엘 데란다·그레이엄 하먼 대담, 김효진 옮김, 『실재론의 부상』(갈무리, 2025) 서평|글: 김진환(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의 부상』 서평

 

김진환 (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이 부상했다.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열린 한 워크숍의 제목으로 사용된 일을 기점으로 ‘사변적 실재론’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관련 서적과 연구의 숫자뿐만 아니라, ‘After 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저서를 통해 논의의 활발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최초의 시작’ 이후, 딱 10년 만인 2017년에 해당 저서의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다시 8년 뒤, 비상 중인 실재론에 관한 이야기가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다.

이 책의 대담자 중 한 명이자 한국어판 서평을 쓴 ‘객체’인 그레이엄 하먼은 자신이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출간하고 있다. 하먼의 이런 모습은 일견 슬라보예 지젝을 닮아 있기도 하다. 학문의 활동 기반은 상이하겠으나, 어디에선가 하먼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지젝의 학문적 생산력은 그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와는 별도로 일정 정도의 존중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하먼도 지젝의 ‘뒤를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앉으면 책 한 권 정도는 뚝딱인 지젝에게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이 있듯, 하먼도 유사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은 그토록 하먼이 ‘많은 말’을 함으로써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히 정리하기에 알맞은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 되어준다.

『실재론의 부상』은 ‘그레이엄 하먼’이라는 객체와 ‘마누엘 데란다’라는 객체의 만남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차적 이점은 하먼과 데란다 각각의 이론 체계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하먼이든 데란다든 둘 중 한 명에게만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하먼과 데란다 각자가 말하려는 바를 보다 명료히 정리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 쉬이 다가가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 ‘실재론’, ‘유물론’, ‘반실재론’, ‘존재론’, ‘인지’, ‘시간’, ‘공간’, ‘과학’, ‘경험’ 등 그 자체로 책 한 권은 충분히 나올 주제들이 병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책 한 권에서 다룬다는 것이, 그것도 그다지 길지 않은 책에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이 굳이 회의적일 필요는 없다.

이 지점에 이 책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이점이 있다.

 

하먼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지성사에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노력을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유사한 관념을 동시에 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본문 5쪽). 이는 당연히 자신과 데란다를 말한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 입문』(갈무리, 2023)이라는 저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뛰어난 동료들’로 레비 브라이언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을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15쪽). 이 이야기는, 하먼이든 데란다든 결국 다른 여러 철학자/이론가들과 학문적 결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재론의 부상』은 하먼과 데란다의 대담이지만, 결국은 현재와 과거의 대담이다. 현재의 대표는 하먼-데란다-브라이언트-보고스트-모턴(이 연쇄는 계속될 수 있다)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객체이고, 과거의 대표는 이곳에서 세세히 다룰 수는 없는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과거의 철학자를 참조점 삼아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객체들이다.

과거가 우리에게 반드시 의미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시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 과거와 유의미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는 이제 주체중심적 세계관, 즉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구성된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책에 접근한다면, 독자는 하먼에 더 동의하거나 데란다에 더 동의하거나 할 필요성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공유하고 있을 수 있는 오늘날의 사유는 무엇인지에 집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대상화해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또한 그것을 ‘잘’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독법이 읽지 못하는 것은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또한 언제나 ‘역사적’ 이론체계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대상화해 읽는 자신이 처한 위치다. 하먼도 데란다도 (사변적) 실재론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 등장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될 유한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토마스 렘케(독일의 사회학자)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들[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접근과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실재론적 확신을 공유하지만, 현존하는 것에 관한 사변을, 존재를 (인간의) 사유와 지식의 범주들에 한정하지 않은 채로 실행할 것을 권함으로써 전통적인 실재론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사물의 통치』, 갈무리, 2024, 44쪽)

사변적 실재론은 실천적 개입이지 체계적 설명이 아니다. 여기에서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체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세상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제공하는 데 (사변적) 실재론의 의의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재론의 부상』은 실재론이 ‘실제로’ 부상했음을 이야기하려는 자기 변론이 아니다. 실재론이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유일하게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문제의식의 지평 위에 이 책이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로의 의견에 반대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면서도 그들이 공통으로 경계하는 것은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다. 오늘날은 문제의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에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실재론은 ‘실재론’을 밀어내고 스스로 ‘새로운’ 실재론으로 부상 중이다.

 

☞ 실재론의부상-보도자료-fin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1)

 

  1.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2.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 이제 동굴의 비유에서 우리가 논의의 편의상 구분한 단계들 중 마지막 단계 <C5>가 남았다. <C5> 단계는 동굴 바깥 세계와 태양을 본 사람이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516c-517a) 그런데 정작 소크라테스가 그리고 있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은 당혹스럽게도 동굴 바깥 세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경을 이겨낸 보람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가면서 맞이하는 고난의 과정을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동굴의 비유는 이렇게 일단 마무리된다. 그러나 비유 자체로는 그렇게 끝나지만 철학자가 맞이하는 난관과 관련한 플라톤 나름의 추가적인 해명이 제법 짧지 않은 분량(517a-521b)으로 덧붙여 있다. 그 해명을 위해 플라톤은 우선 앞서 살핀 난관의 내용(516e-517a)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517d-518b) 그런 연후 그러한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좋음의 형상이 갖는 중대성을 언급하고 그런 만큼 그것에 이르기 위한 획기적인 교육 방식에 대한 논의를 수행한 후 마지막으로 그것을 토대로 철학자가 왜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지에 관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 추가적인 논의 내용을 단락으로 소구분하면 아래와 같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루어지는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의 기본 방향은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 즉 철학자를 기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에 관한 논의의 마중물이자 바탕이 된다.

1) 우선 플라톤은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3) 끝으로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논구한다.(519c-521c)

 

이에 따라 동굴의 비유에 관한 세 번째 강해는 <C4>를 다룰 때 그랬듯이 <C5> 단계의 비유 내용을 작게 잘라 차례로 살핀 다음 추가적인 해명으로서 위의 1), 2), 3)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 내용을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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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소크라테스는 태양이야말로 바깥 세계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벽면 위 그림자들의 움직임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가장 잘 기억하며 그것을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τιμή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존경과 권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사느니 그는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는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에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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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가 동료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다시 내려가는 동기가 이곳에서는 그들에 대한 ‘불쌍함’eleein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의 현실 참여의 동기가 일단 그 본성적 자발성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가 현실 참여를 원하지 않을 경우 벌로 그것을 강제해야 한다(347c)는 제1권의 주장과 일단 어긋나 보인다. 철학자가 동굴 속으로 돌아가는 이유 내지 철학자의 현실 참여, 정치 참여와 관련한 논의는 동굴의 비유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앞서 제시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3)에서(519c-521c) 다시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 동굴의 비유는 철학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이겨내고 수감자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동굴 속 상황에 대한 이러한 기술은 철학자의 수감자 구출 과정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플라톤 또한 이미 절감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갑작스런 빛과 어둠이 주는 혼란과 그것이 갖는 의미 또한 동굴의 비유의 추가적인 논의 부분 1)에서(517a-518b) 재론되므로 그곳에서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사람에게 인정 욕구는 본능이라 할 정도로 가장 강력한 욕구 중 하나이다. 특히 동굴 속 사람들 즉 세속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칭찬과 명예, 존경과 권세에 대한 욕구는 그 인정 욕구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들에게는 동굴 속 그림자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한, 인정 욕구의 대상과 기준 또한 그림자들로부터 주어진다.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이 크고 예리할수록 그곳 세계의 일에 밝고 그만큼 더 큰 명예와 칭찬을 누린다. 이들에게 바깥 세계에 대한 진실은 오히려 인정 욕구를 방해하는 거짓으로 여겨질 뿐이다. 플라톤이 동굴 속 사람들로 그리고 있는 대상이 당대 아테네 지식인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아테네 대중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아주 예민하여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험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러한 경험에서 그들의 영악함을 능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이기는 길은 그들보다 많은 경험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경험들이 갖는 한계와 무지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무엇보다도 철학자는 이미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이 그들의 확신과 달리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고 시민들은 물론 플라톤과 같은 젊은이들을 일깨우는데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일이었다. 플라톤이 비유의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스승 소크라테스를 떠올렸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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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비유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해명>(517a-521b)

1) 철학자가 동굴 바깥에서 종국적으로 맞이하는 것이 좋음의 형상임을 재차 확인한 후 왜 그것이 그를 동굴로 이끄는 근거가 되고 또 왜 그것이 장차 그가 동굴 속에서 겪게 될 난관들을 이겨내고 그 소임을 완수케 하는 힘의 원천이 되는지를 해명한다.(517a-518b)

[517a-518b]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τίθημι(517b)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τεκοῦσα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517b-c)

* 그리고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그들의 영혼이 그 위에서 지내기διατρίβειν를 항상 열망한다.ἐπείγονται(517c) 그런데 누군가 신적인 것들을 관조θεωρία하다가 인간적인 나쁜 것들 옆으로 와서 주위의 어둠에 충분히 익숙해지기 전 눈이 아직 침침한ἀμβλυώττων 동안에, 정의의 그림자τοῦ δικαίου σκιά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ἄγαλμα들과 관련해 법정δικαστήριον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경합을 벌이도록ἀγωνίζεσθαι 강제되는 경우, 즉 정의 자체를 αὐ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본ἰδόντων 적이 없는 자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ὑπολαμβάνεται 있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도록διαμιλλᾶσθαι 강제되는 경우, 그는 볼품없고 아주 우스워 보인다.(518d,e)

* 그런데 지각νόος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가지 경우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의 눈의 혼란ἐπιτάραξις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빛φάος에서부터 어둠σκότος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인데 그런 사람은 영혼과 관련해서도 그런 동일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혼이 혼란에 빠져 뭔가를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보면, 무턱대고 웃지 않고 그 영혼이 더 밝은φανός 삶βίος으로부터 와서 익숙하지 않아 어두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큰 무지ἀηθεία로부터 더 밝은 곳으로 와서 더 밝은 빛 때문에 눈부셔하는μαρμαρυγῆς 것인지를 살필 것이다.(518a) 그렇게 해서 앞의 경우는 그 영혼의 상태πάθος와 삶을 행복하다고εὐδαιμονίσειεν 여길 것이며, 뒤의 경우는 불쌍하다ἐλεήσειεν고 여길 것이다. 설사 뒤의 경우를 두고 웃으려 한다고 하더라도, 이때의 웃음은 위에 있는 빛으로부터 내려온 경우에 대한 웃음보다는 비웃음καταγέλαστος을 덜 살 만한 웃음일 것이다.(51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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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7b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논란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동굴의 비유를 앞서의 비유들에 적용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감옥의 거처’에 대응하는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말하는 ‘가시적 영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감옥의 불빛’과 ‘태양의 힘’의 경우 동굴의 비유와 태양의 비유간의 대응이면서 가시계와 가지계의 대조적 대응인데 비해 ‘감옥의 거처’와 ‘가시적 영역’의 경우는 둘 다 가시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상응적 대응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앞의 경우도 대조적 대응으로 해석하여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 세계’ 즉 가지적 영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둘 다 동굴의 비유에만 국한된 해석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다른 비유에 적용해서 언급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에서 ‘곳’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hedra가 일반적인 ‘곳’의 의미도 있지만 ‘앉는 자리’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 결박된 채 앉아 있던 ‘감옥의 거처’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둘 다 같은 동굴의 비유이면서 동일 장소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apomoionta 즉 ‘대응이나 비교 또는 닮은’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해석이건 동굴의 비유와 다른 비유들이 갖는 상호 대응적 연관성을 크게 해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유를 이해하는데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517b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형상’이다. : 좋음의 형상은 <C4> 단계에서 태양이라는 표현으로만 언급되고 있지만 태양의 비유에서 보듯이 그 태양이 ‘좋음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508e-509b) 이 점을 고려하면 ‘동굴 바깥에 나온 사람이 태양을 그 자체로 본다.’(516b)는 표현은 이미 <C4> 단계에서도 ‘좋음의 형상’이 언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형상을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이자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또한 태양의 비유에서 그것을 ‘앎과 진리의 원인’(508e)이자 ‘지성의 원천’(508d)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 점에서 보면 좋음의 형상에 관한 이곳의 언급은 추가적인 정보 없이 앞서의 언급을 반복하고 재확인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좋음의 형상’을 다시 끌어들인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좋음의 형상이 기본적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내려가야 하는 원천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것은 그가 동굴로 내려갈 때 직면하는 온갖 역경에 맞서 싸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의 근원이자 푯대가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지각 있게 행동할 사람은 좋음의 형상을 보아야한다’(517c)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사실 좋음의 형상에 이른 자들은 인간사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고 신적인 것을 관조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동굴에 다시 내려갈 경우 그 만큼 더 앞이 캄캄해 보여 어둠에 익숙한 자들이 보는 것을 보지도 못할뿐더러 동굴 속 벽면 그림자들에 대한 경험 또한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따라 동굴 바깥 정의 자체를 본적도 없이 오로지 동굴 속 정의의 그림자만을 경험하고 그것만을 정의의 기준으로 여기는 자들과 다툴 경우 당장은 그들을 이길 재간이 없고 설사 정의 자체를 그들에게 들려준 준다고 해도 애초부터 그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거짓말로 들려 오히려 철학자들이 거짓을 일삼는 자로 웃음거리가 되기 일 쑤이다. 그럼에도 동굴 속에서도 잠간의 침침한 상태를 이겨내고 어둠에 적응한 뒤 진정으로 끝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음은 오히려 형상에 대한 앎을 통해 그들이 내세우는 경험이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만 아는 자는 그것의 원인이자 실체로서 실물을 알고 다시 그림자를 보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결국에 가면 이런 사람이 그림자들도 월등하게 더 잘 본다.(520c) 실로 그림자의 세계를 넘어 그것과 전혀 차원이 다른 지고의 형상적 앎으로서 좋음의 형상을 깨우쳤을 때에 비로소 그 앎의 진실성이 가져다주는 자부심의 크기만큼 그림자에 불과한 세속적 권세와 탐욕에 찰나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 무심함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굳건함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적 진실에 대한 불퇴전의 확신이 온 영혼을 휘감고 있을 때에만 그림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일상의 분노를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이 차오르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의지 또한 샘솟듯 터져 나온다. 실로 좋음의 형상은 지각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유일한 토대인 것이다. 

* 518a ‘두 가지 눈의 혼란’ : 눈이 혼란을 겪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갑자기 빛에서부터 어둠으로 옮겨온 경우와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옮겨온 경우가 그것이다. 그 때 눈이 부셔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에게 둘 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다.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 영혼과 관련해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특히 자기 성향까지 거슬러가며 밝은 곳을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혼란을 겪는 영혼의 모습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면서 겪는 영혼의 모습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이자 더 많은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영혼의 상태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다.  동굴로 내려가는 영혼은 이미 밝은 삶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깨달은 상태의 행복eudaimonizein한 영혼이고 그에 비해 동굴에서 올라오는 영혼은 아직은 여전히 어둠 속 동굴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쌍eudaimonizein한 영혼이다.(516a)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두 경우를 살피면서 그 점을 알아차린다.(518b)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동굴을 들어갈 때건 나올 때건 영혼이 겪는 혼란을 보고 우스꽝스럽게 여기거나 비웃음을 던지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은 그 두 경우들을 살펴 구분하고 무턱대고 웃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어떤 경우건 결코 비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설사 만약 그들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있다면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동굴로 내려가는 이유가 어처구니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동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보다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아무려나 보통 사람들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철학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놀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음의 형상에서 나오는 자부심 즉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으로 흔들림없이 늘 행복하다.

* 517d ‘정의의 그림자들이나 그 그림자들을 생기게 한 조각상’ : 정의의 그림자들을 생기게 하는 조각상들(agalmata)이 정의의 위상과 관련하여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가 논란거리이다. 다만 이것들은 결박된 사람들이 눈과 몸을 돌린 후 그리고 바깥에 나가기 전에 즉 정의 자체에 대한 앎을 향한 중간 단계에서 보게 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정의 자체의 모상으로서 ’법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피스트> 234c, <정치가> 303c 참고(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 517e ‘논쟁을 벌이도록 강제되는 경우’ : 이 부분 역시 소크라테스가 법률의 해석을 둘러싸고 재판관들과 논쟁을 벌이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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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좋음의 형상이 갖는 그러한 중대성 그 만큼 그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그리고 그것에 상응할 만큼의 태도의 전환을 위해 어떠한 교육적 방책이 필요한지를 논구한다(518c-519c)

 

[518c-519c]

* 이것이 진실이라면 교육παιδεία이란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앎ἐπιστήμη이 없는 경우에 마치 보지 못하는 눈에 시각ὄψις을 넣어주듯이 자신들이 앎을 넣어주는 것ἐντιθέντες’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σὺν ὅλῳ τῷ σώματι στρέφειν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δύναμις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ὄργανον 역시 ‘영혼 전체와 함께’σὺν ὅλῃ τῇ ψυχῇ 전환περιακτέον시키는 것이다. 즉 ‘있는 것’τὸ ὂν과 ‘있는 것에서 가장 밝은 것’τοῦ ὄντος τὸ φανότατον을 구경하고서도θεωμένη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518c) 그 능력과 기관을 영혼 전체와 함께 생성되는 것으로부터ἐκ τοῦ γιγνομένου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가장 밝은 것은 ‘좋음’이다.(518b-d)

* 이것은 전환περιαγωγή을 위한 기술τέχνη 즉 ‘어떤 방식τρόπος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ἀνύσιμος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기술은 그 기관에 시각을 넣어주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관에게 바라보아야βλέποντι 할 쪽을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이다.(518d)

* 그런데 영혼의 덕ἀρετή 중 다른 것들은 신체의 탁월함ἀρετή처럼 습관ἔθος과 훈련ἄσκησις을 통해 형성되지만 똑똑함το φρονῆσαι의 덕은 ‘더 신적인’θειοτέρου 것에 속하는 것으로 그 힘을 결코 잃는 법이 없고, 전환이 이루어지는 방향에 따라 쓸모 있고χρήσιμος 이롭게ὠφέλιμος 되기도 하고 또한 쓸모없고 해롭게βλαβερός 되기도 한다.(518e) 못됐지만πονηρός 지혜롭다σοφός고 하는 사람들의 허접한 영혼조차 자신이 향해 있는 쪽의 것들을 예리하게ὀξέως 분간하는데διορᾷ 매우 뛰어나다. 그들의 영혼이 악덕κακία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더 예리하게 보며 그럴수록 그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낸다.(519a)

* 하지만 그들에게서 그러한 본성을 가진 이 부분을 아주 어려서부터 다듬어 생성γένεσις과 동족인συγγενής 것들을 쳐냈더라면, 그러니까 음식물이나 그러한 것들에 대한 즐거움ἡδονή과 식탐λιχνεία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ὄψις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이 부분을 해방시켜 참된 것들τὰ ἀληθῆ을 향해 방향을 돌리게 했더라면, 동일한 사람들의 동일한 이 부분이 저 참된 것들을 또 가장 예리하게 보았을 것이다.(519b)

* 그렇게 보면 교육받지 못하고 진리를 경험하지 못한ἄπειρος 자들도, 또 죽을 때까지 교육 속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허용된 자들도,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럴 법하고 필연적이다. 앞사람들은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그들이 행할 모든 일을 할 때 반드시 가늠해보아야 할 하나의 표적을 삶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뒷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이미 복 받은 자들의 섬들μακάρων νήσος로 이주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519c)

* 그렇다면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과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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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b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 이 기관은 몸에 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상응하여 영혼에 자리하고 있는 ‘지성’nous을 가리킨다.

* 518d ‘어떤 방식trpos으로 하면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anysimos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 :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에 이르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어려운 그 만큼 학생들이 그것을 최대한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효율적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고의 교육 방식은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치는 일이다.

* 좋음의 형상은 지고의 참된 존재로서 앎과 지성의 근거이자 철학자를 동굴로 이끌고 또 그곳에서 온전히 소임을 완수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좋음의 형상에 대한 앎이 철학자로 하여금 세속적 삶에 대한 환멸을 넘어서 비로소 불쌍함과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하고 오로지 그것만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실행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음의 형상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 쪽으로 눈을 돌릴 수 없듯이, 각자의 영혼 안에 있는 앎을 위한 능력과 각자가 앎을 얻는 데 사용하는 기관, 즉 지성을 ‘영혼 전체와 함께’ 전환periagōgē시키는 것이다. 온갖 쾌락과 생성하는 것들에 꽉 들러붙어서 납추처럼 영혼의 시선을 아래로 돌려버리는 것들로부터 지성을 해방시켜 오로지 참된 것들을 향하도록 방향을 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앎을 넣어주는’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형상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방책은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으로 그 기관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과 연관된 기술technē’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술이 무엇인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좋음의 형상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교과들이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전환을 위한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책이자 기술이란 다름 아닌 그 교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 영혼 전체의 전환을 위한 그러한 기술들은 장차 살피게 되겠지만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을 거쳐 종국적으로 변증술로 완성된다. 요컨대 철학 교육의 요체는 영혼의 전환에 있는 것이다.(521c) 이 점에서 이 부분은 다음 주제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그 중요성과 관련한 서론의 성격을 갖고 있다.

* 518b ‘어떤 이들이 공언하는 것처럼’, 518c ‘앎을 넣어주는 것’: 여기서 어떤 이들이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프로타고라스> 319a, <고르기아스> 447c 참고) 플라톤이 여기서 공격하는 교육에 대한 지극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견해는 좁게는 유모들의 교육방식 즉 ‘암기 위주의 주입식’을 포함하여 넓게는 일방향적 연설 기술에 매달리는 당대 소피스트들과 이소크라테스의 교육 방식을 암시한다.(345b 참고). <향연> 175d에서도 이러한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곳에서 아가톤은 ‘소크라테스와 접촉함으로 해서 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마치 ‘잔속의 물이 털실을 타고 더 가득한 잔에서부터 더 빈 잔으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J. Adam. 해당 노트 참고) 소피스트들 역시 ‘앎을 영혼에 넣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앎의 힘 또는 능력으로서 지성nous은 우리 안에 있는 모종의 신적인 것으로서 이미 영혼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상기설과 산파술은 그러한 바탕위에 서 있다.(<메논> 81a, <파이돈> 72e-76d). 플라톤은 교육이 눈먼 눈에 시각을 넣는 것이라는 소피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는 몸에 이미 눈이 있듯이 지성을 갖추고 있고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 앎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은 영혼 속에 존재하지만 생성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힘에 가려지고 약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늘 직면해 있다. 이를테면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모든 덕들이 영혼 속 그 지성을 굳건하게 하는데 하나같이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오히려 지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는 힘이 된다.

* 518e ‘똑똑함’to phronēsai의 덕 : 이 말은 ‘지혜 또는 현명함’phronēsis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플라톤은 phronēsis를 4권 428b, 433b 이후 6권, 7권에서 ‘지성적 현명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최소한 이곳에서만은 이 말을 to phronēsai(phroneō 동사의 아오리스트 부정형에 관사를 붙인 것)로 바꿔 표현하는 방식으로 phronēsis, sophia와 다소 의미가 다른, 즉 ‘현실적인 영리함’ 내지 ‘영악함’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 지성을 생성되는 것으로부터 지켜 내고 흐트러진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영혼의 덕들 가운데 대부분은 신체의 덕처럼 습관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지만 앞서 말한 ‘똑똑함’의 덕은 아무나 갖추고 있지 않고 또 훈련을 통해 가질 수도 없는 이른바 타고난 자질로서 갖고 있는 선천적인 덕이다. 그것은 뛰어난 영악함으로 자신을 향해 있는 것들을 예리하게 분간할 줄 하는 능력이자 결코 그 힘을 잃는 법도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본성적 탁월함은 태어나면서부터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아 그들의 영혼이 악덕에 봉사하도록 강제될 경우 그 만큼 더 많은 나쁜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 똑똑함의 덕을 갖춘 자들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영혼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지 않고 참된 것들 향하도록 보다 각별한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똑똑함을 거론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같은 자들일 것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알키비아데스만큼 본성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드물지만 또 알키비아데스만큼 그 명민함과 똑똑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는 물론 온갖 악덕을 저지른 경우도 드물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수많은 알키비아데스들이 그것도 제도 교육을 통해 공공연하게 선망의 대상으로 길러진다.

* 518d 신체의 덕 : 영혼의 덕에 관한 이곳의 언급이 신체의 덕들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다만 영혼의 덕 가운데 똑똑함의 덕이 갖는 이중적 성격을 드러내 그것에 대한 각별한 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선천적이고 본성적인 성향일지라도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이 어떠한 가에 따라 그 성향이 초래하는 결과가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자연적 성향이든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의 좋음은커녕 악덕이 발현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설사 영혼의 좋은 자연적 성향일지라도 그것의 탁월함 특히 윤리적 덕과 관련한 탁월함은 종국적으로는 형상적 앎을 통해 완성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습관 형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03a 14-17 비교 참고) 그러므로 특히 장차 나라를 다스려갈 사람들을 길러 내기 위해서는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 즉 좋음의 형상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 방치하지 말고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 끊임없이 교육하는 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 신적 요소라는 말 자체가 불멸성과 보편성을 함축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지성을 정점으로 하는 플라톤의 교육론은 이미 어느 한 시대가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뿐만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그것을 접할 때조차도 그들의 삶에 도움을 줄 정도의 것이어야 하고(498d)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것은 ‘누가 자신으로 하여금 유익한 삶과 무익한 삶을 구별하며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고 또한 그럴 줄 알도록 해 줄 것인지를 어떻게든 배우고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학문’이어야 한다.(618c) 미켈란젤로는 모든 대리석 덩어리에 상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조각가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장애가 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잘라낸다. 플라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앎의 능력으로서 영혼 본래의 훌륭함과 순수함이 온전하게 드러날 때까지 영혼을 부자연스럽게 가리고 있는 것들을 잘라내고 거둬내는 것이 교육의 본령이자 선생이 해야 할 일로 여겼다. 사실 플라톤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 중 그의 교육이론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마도 고대든 현대든 모든 교육 문헌에서 <국가>의 이 부분만큼 교육의 목적과 범위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오한 견해를 취하거나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불굴의 용기와 꺼지지 않는 희망을 불어넣기에 잘 어울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J. Adam 해당 부분 노트, 부록 II 참조) -끝-

 

다음 강해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IV) – 마지막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이규성 철학 연구회 2025년 2월 제16차 정기세미나│『중국현대철학사론』(2020)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인현정│2024.02.21.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 제16차 이규성 철학(사상) 연구 모임

-주제: 3장. ‘융회’의 철학과 ‘공령’의 미학: 종백화(宗白華)

-발제: 인현정 선생님

-일시: 2025년 2월 21일(금) 오후 4시

-장소: 한철연 세미나실 & 줌회의실 (온오프병행)

이번 발제는 중국현대철학사론 3장에 관한 것인데, 종백화라는 철학자는 생소합니다. 종백화는 1920년대 유럽 유학을 하고 돌아와 해방 이후 북경대 미학 교수를 지냈군요. 사회주의 시대 교수였으니,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미학을 주로 다루지 않았나 했는데, 이규성 선생이 정리한 내용을 보니, 그와는 상당히 다른 것 같습니다.

이규성 선생은 종백화의 미학 사상을 융회와 공령의 미학이라 규정했는데, 융회는 아마도 베르그송 철학적 맥락 같고 공령 즉 비움이란 동양의 미학적 정신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시대 중국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니 놀랍습니다.

종백화가 지은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칸트 미학이나 괴테 미학이 다루어져 있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발전되는 미학 사상에도 종백화가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백화는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학 사상가인데 이런 종백화의 미학사상울 이규성 선생의 사상이 발굴했다는 것 자체가 이규성 선생의 사상적 안목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유튜브 출처: https://youtu.be/jmviN52PoR8?si=HbVR_DtoRB8zpBmX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0)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결박된 수감자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갑자기 강제된다.’ 이것은 일상의 타성적 앎과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끌려 새로운 배움의 길에 들어서는 상황을 보여준다. 교육의 의미와 목표 그리고 그것의 당위적 성격을 행위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이것만큼 근사한 말도 없어 보인다. 교육은 ‘고개를 돌려 걸어가 빛을 보도록’ 즉 바람직한 변화를 위한 반성적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고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강제를 기꺼이 감내한다.

g)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과정은 자신이 보고 알았던 것들에 대한 회의와 부정을 수반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실제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 누군가가 지금 보는 것이 더 참된 것에 가깝다고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다그쳐 묻고 대답을 요구한다면 당장에는 전에 본 것이 더 참된 것으로 여겨져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h) 게다가 지금 모형들을 비추는 불빛 자체까지 보도록 강제될 경우, 그는 눈이 아픈 데에다 역광으로 되레 지금 보고 있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아, 전에 보았던 것들이 더 명확한 것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왔던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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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답법적 논박술 이른바 엘렝코스elenchos는 기존에 일상적 상식으로 갖고 있던 생각이나 판단이 갖는 오류를 집요할 정도의 문답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교육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곳곳에는 이러한 엘렝코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이 난문aporia에 빠지거나 오류로 판명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자기를 기만했다고 화를 내며 이전의 생각으로 돌아가 막무가내 고집을 피우거나 아예 대화 자체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국가> 제1권만 해도 문답의 첫 상대로 나오는 케팔로스 노인은 자신의 주장이 궁지에 몰리자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대화를 맡기고 제사를 핑계로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있고 또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철저하게 논파되었음에도 되레 흥분하며 처음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고집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이들과 달리 폴레마르코스처럼 그리고 이곳 풀려난 수감자처럼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논박을 감내하면서 새로운 배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처럼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의 테아이테토스처럼 소크라테스의 동반자가 되어 소크라테스의 의도에 따라 문답에 충실하게 부응하면서 진실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비유에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누군가에 이끌려 동굴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본성에 맞게 배움의 길에 들어설 만큼 본성상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순수함의 정도와 크기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성향을 기반으로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는 오름길이 너무 힘들어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만 해도 잘했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길을 포기하거나 옛날의 타성이 몸에 배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모형들을 움직여가며 수감자들의 생각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정하는 사람들이 갖은 권력이 부러워 그들에 영합하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따라 모형들을 연구하고 제작하는 일을 떠맡기도 할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적 논박술은 논박을 통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지 자체를 위축시키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힘들지만 새롭게 진실로 다가가는 계기와 동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이른바 산파술maieutikē적 성격을 갖고 있다.(<테아이테토스> 148e-151d, 161a) 이른바 철학의 출발로서 ‘놀람’thaumazein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은 후 새롭게 다가온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촉발된 앎을 향한 호기심 어린 기대와 열망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과 기대에 부응하듯 자기반성을 통해 C2상태에 들어선 그 누군가는 점차 불빛에도 익숙해지고 본성에 맞추어 배움도 하나둘 잘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에 보았던 것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들에 불과하고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것들의 원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앎은 본질적으로 동굴 속 불빛 아래에서 깨달은 앎인 한, 아직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벽면에 비춘 그림자의 원본들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굴 바깥에 실재하는 실물들의 모형들 즉 그것들의 모상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굴 속 불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이른바 감각적 가시적 의견에 불과하고 동굴 바깥 태양의 빛을 받아 이루어지는 실재적 가지적 앎을 모사한 정도의 낮은 단계의 앎이다. 이에 따라 동굴 속 불빛 아래 눈부심을 통한 모상에서 원본에로의 상승은 동굴 바깥 세계 태양 빛 아래 실물들과 인간들을 접하면서 다시 이루어지고 종국적으로 빛의 원천인 태양을 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 앎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대상이자 목표에 이르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동굴 속 즉 믿음의 세계에서도 앎을 향한 깨달음 내지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을 어둠에서 불빛 쪽으로 돌리는 태도의 전환periagōgē은 나중 소크라테스가 밝히고 있듯(517c) 눈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함께 돌리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실로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러한 정도의 전환은 당연히 동굴 바깥 즉 가지적 앎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태도의 전환은 한발 한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작고도 수많은 지적 결단과 선택들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과 선택들 또한 전에 갖고 있었던 것들을 뒤로하고 새롭게 전진하는 것인 한, 그 또한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일종의 태도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지적인 앎을 향한 태도의 전환은 이처럼 가시적 세계에서 믿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즉 동굴 속에서 고개를 돌려 빛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태도의 전환이란 현명함phronein의 덕까지 포함하여 올바른 방향을 향한 영혼의 덕aretē 전체의 전환을 의미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혼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그러하듯이 이런 작은 규모의 태도의 전환들이 쌓이고 쌓여 몸에 밸 정도로 습관ethos화되고 단련askēsis이 된 상태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518a-519b) 그림자에서 모형으로, 모형에서 실물의 그림자로, 실물의 그림자에서 실물로, 실물에서 진정한 실재로의 상승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진정한 혁명이나 해탈이 그러하듯이 정의 자체 진실 자체를 향한 끊임없는 자기 다짐과 분투 속에서  그것을 딛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영혼의 오름길에 들어선 이들의 지적 결단과 선택들은 본성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굴 바깥을 보고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그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비유 상 누군가를 이끄는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온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동굴 속에서도 이미 지성nous이 들어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학 교육이 믿음의 한계를 들여다보고 그 믿음을 넘어서게 하는 지성의 훈련이라면 이렇게 철학의 인도를 받는 그 누군가의 영혼은 그 훈련을 통해 ‘믿음’을 넘어 ‘사고’를 거쳐 ‘형상적 앎’에 이를 정도로 점차 순수함이 더해지고 그만큼 더 강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설사 그가 아직 동굴 속에 있을지라도 최소한 등정anodos을 감행하고 있는 한, 본성에 맞게 이미 그는 그 지성의 인도를 감내하고 수용하는 앎을 갖추고 있다. 굳이 이 앎의 단계를 앞서 살핀 이상 국가에서 찾는다면 나라의 구성원들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앎 즉 철학자왕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앎으로서 절제sophrosynē의 덕aretē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바탕이 없으면 동굴로부터의 탈출 즉 철학의 지배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 교육은 그 길고 지난한 교육과정을 통해 소수의 철학자 왕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하고도 다양한 본성을 일깨우고 그에 맞는 그들의 탁월함aretē 또한 길러낸다. 이상 국가는 그와 같은 다양한 탁월함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동굴 속 불빛에 점차 익숙해진 그 누군가는 그것에 비친 모형들도 충분히 잘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또 그것들이 옛날 자기가 본 벽면 그림자들의 원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를 이끌고 가는 사람은 그 모형들 역시 동굴 바깥 실재하는 것들의 모사에 불과한 것임을 깨우쳐 주면서 다시 그를 부추겨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로 그를 인도한다. 지금까지의 길도 쉽지 않은 오름길이지만 ‘거칠고trachys 가파른anantēs’이란 표현이 여기서만 쓰일 정도로 C3 단계의 오름길은 동굴 바깥에 이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동굴 속 오름길 중 가장 험난하고 가파른 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동굴은 벽면에서 입구까지 똑같은 경사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불빛을 지나면서 위로 꺾여 경사의 정도가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오름길에는 C2 단계의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다만 동굴 밖 멀리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만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오르는 사람은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지만 그를 이끄는 사람은 가파른 길을 다 오를 때까지 그만큼 더 그를 강압함에 따라 그는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j) 그리고 이곳에서는 앞에서 본 모형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질 않아 뭔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동굴 입구까지 도달했음에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 지금까지 기대했던 참된 것은 차치하고 아무것도 볼 수가 없어 또다시 놀람과 불안에 휩싸인다. 그러나 누군가 여전히 그를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차츰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으로 동굴 바깥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 물 같은 것에 비친 인간들의 영상들을 접하면서 비로소 동굴 바깥 실재 세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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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3의 상태를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면 추론적 사고 단계에 상응한다. 그리고 C3 단계의 오름길이 앞의 길에 비해 거칠고 가파른 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단계가 이전 단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전의 단계는 감각적 경험이 중시되는 가시적 세계이고 이후의 단계는 감각이 탈각되고 추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물 공간이 아니라 논리적 공간에서 추론적 사고가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에서 추론적 사고 단계는 가지적인 세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음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511d) 이 점을 고려하면 C3의 동굴 속 위치는 끝에 가서 실물의 그림자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굴 바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동굴 속 불빛 즉 감각의 세계를 떠나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파르고 험난한 추론적 사고의 길 즉 오름길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C3의 위치는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중간 즉 경계인 동굴 입구 위아래로 걸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와 비교하여 눈에 띄는 차이가 있다면 선분의 비유에서는 추론적 사고가 상대적으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과 달리 이곳 C3 단계는 가장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것 역시 비유 간 취지와 성격이 각기 다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C3 단계의 철학적 특징보다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는 막바지 어려움이 강조되고 철학적으로는 동굴 바깥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비추는 실재 세계와 그로부터 다시 어둠 속 동굴로 귀환하는 여정이 가장 큰 비중을 갖고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분의 비유 상 수학적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 동굴 바깥 실물들과 인간들의 그림자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C1의 대상과 C2의 대상 간의 관계 역시 상상(L1)과 확신(L2)의 관계가 그렇듯이, C3와 C4의 대상 또한 둘 다 가지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이지만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에 있는 것들임을 보여준다.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은 그림자들과 영상들을 본 후 차츰 익숙해지면서 동굴 바깥 실물들과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들 ‘자체’auto를 본다. 그 실물들과 인간들 자체를 보았다는 것은 ‘형상’eidos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깥쪽 실물들은 원천적으로 동굴 속 모형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것이 곧 원본 즉 형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금방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경우 수감자들과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이끌고 오는 사람들 모두 인간의 모형일 뿐이고 바깥쪽 사람들만이 인간의 원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또한 동굴 속과 동굴 바깥 자체라는 비유 자체가 현상과 본질, 믿음과 형상의 대비를 함축하는 한, 비록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동굴 속에 있는 사람과 동굴 바깥 또는 동굴 바깥을 이미 경험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동굴 바깥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신이 햇빛 아래에서 같은 사람임을 깨달은 순간 그 누군가는 이미 이전의 자신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타인들은 물론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타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앎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동굴 바깥 세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원천, 태양을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 자체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하늘 위 태양을 보았다가는 눈이 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부터 구경하고 낮에도 희미한 윤곽일지라도 구름 속 안개 속 태양의 모습을 보는데도 열성을 기울여야 한다. 앞서도 살폈듯이 궁극의 깨달음은 마지막 단계에서 관조를 통해 통으로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열성어린 고행의 오름길이 보여주듯이 단계마다 작고도 수많은 깨달음들이 하나하나 점진적으로 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l) 그러한 열성 어린 마음가짐과 준비 끝에 마침내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것도 잠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깐일지라도 태양이 인간과 동식물을 비롯한 이 존재세계를 낳고 기르는 지고의 실재임을 깨닫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그는 태양이야말로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이자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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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의 단계인 L4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따로 언급되지 않지만 그것에 상응하는 이곳 C4에서는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L4와 C4가 상응 관계상 아주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C4에도 이미 태양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C5를 따로 구분하여 그곳에 태양을 위치시킨 것 또한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굴의 비유에서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C5를 따로 독립시켜 구분한 것이다. 아무려나 이 구분들은 플라톤이 설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구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염두에 두기로 하자.

* 여기까지가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속 수감자가 본성에 맞게 풀려나 누군가에 이끌려 힘들고 가파른 오름길을 지나 동굴 바깥에 이르러 실물들의 그림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태양을 보기까지의 여정이다. 이러한 여정은 직접적으로는 무교육 상태에서 교육 상태로 발전 전환하는 과정 다시 말해 배움의 가장 아래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교육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점에서 그것은 마치 <향연>에서 디오티마가 그리고 있듯 어떤 인도자에 이끌려 아름다움을 보도록 강제되어 몸의 아름다움에서 부터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여럿을 거쳐 마침내 아름다움 자체, 단일한 형상에 이르는 모습(210a-212a)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제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문제들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과정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우선 수감되어 결박된 상태는 현실 정치 일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정치 지배 권력의 대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관철된 상태를 보여주고 ‘일어나 고개를 돌리고 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그 정치적 억압이 갖는 부당함에 눈을 뜬 후 각성된 비판적 문제의식과 용기로 궐기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파른 오름길에서 때론 달아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불안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바깥에까지 이르는 것은 온갖 불리한 여건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워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일깨워주듯 개인 차원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는 무의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비합리적 초자아의 지배를 도덕의 이름으로 평생을 참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개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도 어떤 계기로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에 눈을 뜨고 정신 분석가들의 진단과 충고에 이끌릴 경우, 그는 점차 자신을 견고하게 에워싸고 있던 온갖 자책과 위선, 죄의식과 심리적 장애를 이겨내고 자신의 원천적인 욕망을 스스로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 욕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아를 되찾곤 한다.

* 성서에는 늙은 나이에 간신히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는 몇 줄도 안 되는 그 짧은 내용(<창세기> 22장 1-19절)을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의 실존적 삶의 정황으로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그 심적 고뇌를 철저히 음미하고 세세하게 풀어내 <공포와 전율>(Furcht und Zitter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이 산을 오르는 과정은 종교와 관련한 상황이라는 차이만 제외하면 동굴의 비유 속 그 누군가의 여정과 크게 닮아있다. 그 내용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은 백세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자식 하나를 얻어 행복에 잠겨 있었지만, 그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신에 순종해야 하는 믿음에 따라 아내 사라도 모르게 홀로 어린 자식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오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은 물론 왜 제사에 쓸 제물은 없냐는 이삭의 물음에 가슴 찢어지는 자괴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또 나중 자식을 제물로 바친 후 돌아와 주변으로부터 쏟아질 차가운 시선과 비난 그것도 자식을 죽인 아버지 천륜을 어긴 자라는 최악의 도덕적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지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 모두가 신의 명령에 반하는 세속적 인간적 집착임을 깨닫고 산 위에 올라 오롯이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슴에 안고 신의 명령대로 어린 자식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험을 이겨내고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그 모든 세상 욕망 일체를 내던지는 그 결단의 순간 그에게 멈추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 후 그에게 신앙의 선조라는 명예와 함께 장차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 모래만큼 자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세상의 축복까지 내려진다.

* 이렇듯 동굴의 비유 전 과정은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어떤 영역 어떤 형태이건 정치적 억압과 해방, 종교적 죄와 구원, 미망과 해탈, 개인의 심적 장애와 극복, 비판적 자기반성을 통한 태도의 중대 전환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두루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동굴의 비유가 단순히 그 주제들과 관련하여 앎과 무지, 빛과 어둠, 타락과 구원, 동굴의 바깥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플라톤을 경직된 이원론의 원조라 부르는 통속적 이해는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존재와 무(無) 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무한정자’apeiron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고 나면 금방 풀리는 곡해에 불과하다. 동굴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굴의 비유는 단순히 동굴 속과 바깥만 이 아니라 결박에서 풀려난 사람이 오름길에서는 물론 다시 동굴로 귀환하는 내림 길에서 온갖 난관들을 이겨내는 과정 즉 동굴 속과 바깥 사이metaxy에서 분투하는 과정 역시 역동적인 방식으로 매우 큰 비중을 두고 진지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리고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명백성과 관련한 4가지 단계에 상응하는 학문들의 위계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다. 벽면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영상과 모방을 소재로 한 미술과 시가술의 영역을, 모형과 인공물들이 존재하는 단계는 제작과 관련한 일반 전문 기술 즉 경험과학의 영역을, 실물의 그림자를 보는 단계는 수학과 기하학, 산술의 영역을, 그리고 동굴 바깥에서 실물과 인간들은 물론 태양이 그것을 비추는 단계는 철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영역의 위계적 상승은 그것을 모두 배제하고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과 확신 그리고 사고가 각기 자기의 단계를 참의 단계로 여기는 것은 그릇된 것이지만, 형상이라는 지식을 정점으로 그것으로부터 기초를 제공받고 그 등급에 비례하여 명백성을 드러내면서 삶에 필요한 기술 수준의 앎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온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 그러나 동굴의 비유가 위와 같이 정치와 종교, 개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적 함축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것 역시 기본적으로 지성주의를 표방하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사에 나타난 여타의 다양한 철학 사상들과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로 각기 고유한 문제의식과 목표를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들 모두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진단과 처방에서 제각각이다. 특히 동굴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해방과 탈출, 구원과 실재 세계로서 동굴 밖 세계, 즉 단일하고도 지고의 지위를 갖는 실재로서 태양(좋음의 이데아)이 모든 것들의 근본 원인이 되고 이해의 궁극 근거가 되는 플라톤의 세계는 범신론적 종교는 물론 상대주의 또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내세우는 모든 철학 사상들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 그럼에도 플라톤 철학이 동굴의 비유를 매개로 그러한 철학 사상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진실을 향한 투쟁과 실천은 포기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어떤 철학적 지향을 갖든 치열하고도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을 통해 집요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철학적 실천 자체가 보다 ‘좋은’agathos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pistis과 희망elpis, 그 구현을 위한 지혜sophia와 용기andreia를 끊임없이 북돋고 견인한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서구 지성사에서 위대한 사상들이 공유하고 있는 진실을 향한 그와 같은 여정이 철학적인 깊이와 체계를 갖고 처음으로 음미되고 성찰된 것은 2500년 전 플라톤에 서부터였다는 것도 의미 있게 되새겨 볼 일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그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누군가는 이제 각고의 노력 끝에 태양이 비추는 동굴 바깥에 도달했음에 행복해하지만 다른 한편 지금도 동굴 속에서 결박 상태에 있을 동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롭다. 그래서 그는 결국 동굴 속에서 본성에 맞게 태도의 전환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들을 동굴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동굴의 비유(514a-521b) – (III)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서평|글: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허하라

– 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김은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

 

칠순의 아버지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빠르게 몸의 기능들을 잃어갔다. 아침 산책을 나서지 못할 만큼 걸음걸이는 불안정했고,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줄 수 없을 만큼 손떨림이 심했다. 식탁에서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쾌락을 누리기는커녕 음식을 흘리며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병이 깊어지던 시절의 아버지는 증상의 일부로서 얼굴 근육이 굳어갔지만 많이 놀라고 슬프고 상처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돌이킬 수 없는 끝을 향해 가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의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문화의 관행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환자로 치료에 임하고 가부장답게 징징대지 않고 씩씩한 척 연기하며 몰락을 향해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를 읽으면서 아버지의 투병 과정과 죽음 직전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질병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간의 삶 속에서 추방된 ‘타자’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질병을 말할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가족에게 자신의 병을 말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간의 거리를 허물지 못했다.

의료사회학자인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는 분류하자면 학술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프고 죽고’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조건에 대한 온전한 사유를 가로막는 근대 의학(“모더니스트 의학”)과 인간에 대한 전능성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주체 철학을 학자로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심장병과 고환암 선고를 받고 투병했던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일반적인 학술서와 구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픈 사람의 좌절과 고독에 공감하며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만성피로증후군을 겪고 있는 주디스 자루쉬스의 말을 인용해 저자는 “심각한 질병은 심각한 질병은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의 인생을 안내해 오던 “목적지와 지도”를 잃게 만든다. 아픈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배워야만 한다.”(50)고 침통함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아픈 사람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지도로 살 수 없으므로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명료한 진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제 욕망을 내려놓고,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껴보자는 식의 뻔하고 기만적인 조언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언제나 치료의 객체, 즉 대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요구받으며 자신의 질병을 낯선 것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당신의 질병을 새롭게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질병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아픈 몸에 대해 말하고 이를 통해 질병과 더불어 살며 새로운 자아를 창조하자고 말한다.

아픈 몸이 말하도록 하자고 저자는 설득한다. 생각해보면 질병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것인데도 우리는 질병에 대해 정교하고도 솔직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부분의 아픈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회복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언어나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막연히 좋아지기를 바라며 의학에 자신을 맡기고,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좀처럼 사유하지 않는다. 근대의학의 권위와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혹은 전능한 인간의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아픈 사람은 자신의 질병에 관해 말하고, 그것과 화해할 틈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렇듯 자신의 질병 경험을 설명할 언어를 억눌릴 때, 아픈 사람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노출되는 것만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기회와 권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대 의학과 주체중심주의에 의해 입이 틀어 막혔던 아픈 사람이 인간의 취약성을 폭로하고, 아픈 사람을 병리화,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질병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픈 사람이야말로 이야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다. 안톤 체홉의 단편 「애수」는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이며, 삶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 늙은 마부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말을 몰며, 손님에게 아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마부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고, 아들의 상실이라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수용해 가는 방식이다. 이 소설은 마부가 자신의 슬픔을 들어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자신처럼 늙은 말에게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됨으로써 고통은 이야기와 청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픈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의사와 회복에 대한 낙관만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는 고통, 즉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인 것이다. 아픈 사람은 질병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구성하는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 이야기가 치유와 회복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아픈 사람들을 식민화하고, 더 지독한 암흑과 절망 속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암 환자였던 경험을 토대로 아픈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야기라고 하면서도,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누고 그 특징과 의의 및 한계를 분석한다. 복원의 서사는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에 바탕을 둔 것으로 투병기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저자는 복원 서사를 제도 의학과 병원 너머의 더 강력한 이해관계 집단들이 질병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모든 고통에는 치료약이 있다는 모더니스트 기대”가 투영된 이 서사는 환자가 의학의 권위에 순응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환자에게서 필멸의 현실과 책임을 박탈한다. ‘혼돈’은 질병의 좌절과 공포에 노출되어 앞으로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절망에 파 먹힌 이의 이야기 유형이다. 혼돈 서사는 “비(非)-자아-이야기”(222)로 고통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간 순서의 감각도 없고 고통에서 목적을 발견하는 자아도 없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서사성이 결여되어 있고 구멍도 많다. 혼돈 서사의 주체는 자신을 삶의 근본적인 우연성에 통제 없이 휩쓸린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며, 수치심과 절망에 압도되어 타인에게 지원이나 위안조차 기대하지 않는다. 혼돈의 서사는 아픈 사람들을 절망에 가두고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극복이 필요한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만의 질병 ‘이야기’를 만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는 서사 유형이다. 탐구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질병이라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아픈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써나가야 하는가’다. 저자는 올리버 색스나 오드리 로드의 투병기를 탐구 서사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비록 질병은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의 중단이지만, 질병을 통해 우리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또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한 인격의 변화나 자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암에 걸린 오드리 로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프고 유방을 도려낸 여성들과 연대함으로써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소수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을 열었다.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불행이나 고통은 단순히 우리의 주체 역량을 갉아먹기에 부정되거나 회피해야 할 나쁜 대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현장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집중을 촉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윤리적 정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출판·독서 시장에서는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질병 경험을 고백하는 1인칭 자기 서사들이 문화적, 미학적 우세종이 되고 있다. 그간 의학은 진단과 설명의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질병을 사회와 철저하게 분리시키고, 아픈 사람을 의학의 권위를 증명할 수단으로 객체화, 상품화해 왔다. 물론 정확한 진단과 치료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는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의학의 진보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 경험은 질병이 한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학적 서사로는 해명될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으로 통합해낼 수 있는 당사자들의 질병에 대한 말하기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질병이 단순히 자기관리의 실패나 삶의 중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당사자가 자신의 병에 대해 말하고 해석 주체로서의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당사자의 이야기는 정상을 자처하는 이들의 자기 확신을 무너뜨릴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로 흘러 들어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는 시의적절하고도 긴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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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몸을이야기하기-보도자료-fin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9)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

 

[514a-517a]

* 이제 우리의 논의는 제7권에 들어섰다.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에 이어 동굴의 비유를 꺼내 들면서 우선 그것의 기본 성격이  ‘교육받음παιδεία과 교육받지 못함ἀπαιδευσία과 관련해서 본 우리 본성φύσις의 상태πάθος와 비슷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자ἀπείκασον는 말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살려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C1>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지하에 있는 동굴σπήλαιον 형태의 거처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거처는 동굴의 폭만큼 넓은 입구εἴσοδος가 빛φάος 쪽으로 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ἐκ παίδων 다리σκέλος와 목αὐχήν이 묶여 있어ὄντας ἐν δεσμοῖς 머리κεφαλή를 돌릴 수 없는 채 앞πρόσθεν만 보게 되어있다.(514a).

b) 그들 뒤쪽으로는 위쪽으로ἄνωθεν 멀리 불빛φάος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πῦρ과 수감자δεσμώτης들 사이에는 수감자들 위에 가로로 길ὁδός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담장τειχίον이 세워져 있다. 담장은 인형극 하는θαυματοποιός 사람들이 인형들θαῦμα만 보이게 사람들 앞에 쳐 놓은 가림막παράφραγμα같은 것이다.(514b-c)

c) 이 담장을 따라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돌이나 나무나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인물상ἀνδριάς이나 다른 동물 모형ζῷα λίθινά을 담장 위로 쳐들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면서φθεγγομένους 어떤 이들은 조용히 이것들을 들고 다닌다.(515a)

* 글라우콘이 ‘이상한ἄτοπος 비유εἰκών와 이상한 수감자들’이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ὅμοιος 자들’이라고 말하고 아래와 같이 비유를 이어간다.(515a)

d) 그들은 저 불로 인해 자기들 맞은편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σκιά들을 보는 것 외에 자신들의 모습이나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 뒤에서 운반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서로 대화διαλέγεσθαι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들을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515a-b)

e) 그들의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ἠχώ도,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중에 누군가가τις 소리를 내면φθέγξαιτο, 그들은 그 소리를τό φθεγγόμενον 벽 위를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515b) 그래서 그들은 인공물σκευαστής들의 그림자들만을 오로지 참된 것τὸ ἀληθὲς이라고 믿는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본성에 맞게φύσει 일어났을 때 즉 그들이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ἀφροσύνη이 치유ἴασις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515c)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누군가가 풀려나서는λυθείη 일어서서ἀνίστασθαι 고개를 돌리고περιάγειν τὸν αὐχένα 걸어가 빛φάος을 보도록ἀναβλέπειν 갑자기ἐξαίφνης 강제된다고ἀναγκάζοιτο 해보자.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ἀλγοῖ, 전에 그 그림자들만을 보았던 원본들ἐκεῖνα을 눈부심μαρμαρυγή 때문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515c-d)

g) 누군가가 그에게 전에는 그가 엉터리φλυαρία를 보았는데 이제는 ‘있는ὄντος 것’에 더 가까이 왔고 ‘더 있는μᾶλλον ὄντα 것’들을 향해 있어서 더 제대로ὀρθός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지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는 당혹해하며 전에 보았던 것들을 지금 지목되는 것들보다 더 참된ἀληθέστερα 것으로 여길 것이다.(515d)

h) 그리고 또 빛 자체 αὐτὸ τὸ φῶς를 보도록 그를 강제한다면ἀναγκάζοι, 그는 눈ὄμμα이 아파서ἀλγεῖν 자신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φεύγειν 하고 그것들이 지금 제시되는 것들보다 실제로 더 명확한σαφέστερα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15e)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거칠고τραχύς 가파른ἀνάντης 오르막길ἀνάβασις을 통해 그를 억지로βίᾳ 끌고 가면서 태양의 빛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기ἐξελκύσειεν 전에는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ὀδυνᾶσθαι 끌려온ἑλκόμενον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ἀγανακτεῖν(515e-516a)

j) 그럼에도 그 누군가가 그를 태양의 빛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서 빛에 도달하면 햇빛이 눈에 가득 차서μεστός 우리가 지금 참되다ἀληθής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가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ῥᾷστα 볼 것이고, 다음에는 인간들이나 다른 것들의 물에 비친 영상 εἴδωλα을 볼 것이다.(516a)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과 인간 및 다른 것들의 영상을 본 후에 차츰 익숙해지면 마침내 그것들 자체 αὐτά를 볼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는 하늘οὐρανός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구경할 텐데, 낮에 태양과 태양의 빛을 볼 때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을 볼 때 더 쉽게 구경할θεάσαιτο 수 있을 것이다.(516a)

l)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태양ἥλιος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양 자신의 자리ἕδρα가 아닌 물이나 다른 데에 비친 영상들φαντάσματα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장소χώρᾳ에 있는 태양 그것 자체αὐτὸν καθ᾽ αὑτὸν를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을 것θεάσασθαι이다.(516b)

m) 그러고 나면 그는 비로소 태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될συλλογίζοιτο 것이다. 즉 태양은 계절과 해를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ἐν τῷ ὁρωμένῳ τόπῳ 모든 것을 관장하는ἐπιτροπεύων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αἴτια이다. (516b-c) 글라우콘 역시 그러고 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 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벽 위를 지나다니는 것들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이 먼저 가고 어떤 것들이 나중에 가며 또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곤 하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며,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τιμή와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등을 탐내고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τιμωμένους 권세 부리는ἐνδυναστεύοντας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믿으며 그곳 사람들처럼 사느니,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을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 침침한 상태에서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다시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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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지하 동굴은 위 쪽(입구 쪽)으로  경사가 진 형태이지만 설명에 따라 횡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위 정리 글에 나오는 다섯 단계(C1, C2, C3, C4, C5)는 플라톤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을 보면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핀 선분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에 국한해서 보면 거의 상응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 간의 상응 관계를 단계별로 구분해 연구해 왔고 우리 논의 또한 설명의 편의상 그간 대체로 합의된 구분에 따른 것이다. 다만 C5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동굴의 비유에서 태양 즉 좋음의 이데아가 각별히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물론 태양은 C4에서부터 언급되지만) 그것을 토대로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단계까지 추가되어 있어 그것까지 포함해서 독립적으로 따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선분의 비유 L1 L2 L3 L4
영상 실물 도형들 형상들
동굴의 비유 C1 C2 C3 C4
모형들 그림자 모형들(인형들) 실물의 그림자 실물들

* 그러나 그 상응관계에 대한 이해가 비유들 전체 또는 플라톤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 비유들에 나타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상응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 비유는 다만 비유인데다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 자체가 이미 각 비유 나름의 취지와 목적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제시된 비유들 간의 모든 표현들을 마치 암호해독하듯 서로 연관지어 보려거나 특정 비유적 표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비유의 진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인식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수감자들과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풀려난 수감자를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 등정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동굴의 비유는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선분의 비유에 비해 좀 더 다각적이고도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기술 또한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다른 비유들의 표현들과 서로 비교해가며 무리해서 짜맞추려할 경우 플라톤의 진의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나중 또 거론되겠지만 미리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를테면 선분의 비유에서 L2가 L1의 상위 인식 단계이듯이 동굴의 위 방향이 진리 인식에 가까운 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C2에서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C1에 나오는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상위의 사람들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굴의 비유에서 수감자와 모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선분의 비유에서처럼 명백성을 기준으로 한 인식 능력상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비교 범주가 다른 계급적 신분적 차이라 할 것이다. 차츰 드러나겠지만 온갖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그들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풀려난 수감자들이 다다라야 할 인식 상 상위 단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피해가야 할 사람들이다. 설사 앎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그들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결코 지자(智者)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만 한정해야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확대해서 추정할 것까지는 없다. 굳이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과 관련하여 선분의 비유와 상응하는 단계가 있다면 오직 오름길의 과정에서 인식 상태가 변화 발전하는 수감자들의 경우 정도일 것이다. 또 동굴의 비유에서 모형을 들고 가는 사람들에 비교되는 사람을 들자면 수감자를 바깥 세계로 이끌고 가는 그 누군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동굴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소피스트들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자들 즉 철학자들이다.

* 이 점을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에 앞서 각 단계별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 스스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할 때 밝혔듯이 동굴의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사항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본성과 관련한 상태의 변화라는 점이다.

 

<C1> 다리와 목이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이곳 수감자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결박되어 갇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자들’(515a)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겪는 특수한 수감 상태를 플라톤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자의 생각을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비유와 관련한 전체 상황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플라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본성의 상태와 교육받은 본성의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유 상 수감의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말하는 수감 또는 결박의 상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릇된 정보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본성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상의 표현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에 빠져 있는 경우들을 표현할 때 ‘사로잡혀 있다’, ‘갇혀 있다’는 말을 쓰곤 한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의 경우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경우 ‘우리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b) 514b ‘위쪽으로’ἄνωθεν : 이 표현은 플라톤이 교육의 방향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자가 누군가를 위쪽으로 이끄는 모습’(175b)은 <국가>에서 자신이 그렸던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동굴 바깥쪽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국가> 515e)을 연상하며 쓰기라도 한 듯 내용이 아주 똑같다.(<소피스트> 216c, <파이드로스> 109a ff, 키케로 <신들의 본성>de nat. deor. II 95,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47—453도 참고)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불빛과 수감자들 사이 가로로 난 길을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은 수감자들 위쪽에 있으나 그들이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앞서 비유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을 거론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어떤 연구자들은 C1의 수감자들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그 사람들이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연관시켜 C1과 L1의 상응관계가 갖는 한계와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분의 비유에서 우리 일상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아닌 실물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은 동굴의 비유상 C1의 세계가 아니라 그림자의 원본 즉 모형들이 있는 C2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말한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에서 ‘우리들’은 사실 차원에서 그냥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벽면의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유 차원에서 우리들을 수감자로  표현한  말이라는 점에서 범주상 등치해서  비교할 수는  없다.   L1과 C1을 같은 단계로 상응시킨 것은 앞서도 살폈듯이 인식 대상의 명백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L1 영상에 상응하여 모형의 그림자가 있는 C1을 상응시킨 것뿐이다. 그러한 비판은 두 비유들 나름의 취지와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람이란 요소를 기계적으로 등치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선분의 비유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사람이 논의의 직접적인 요소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비유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낮은 인식 단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플라톤이 우리 일상인들 모두가 그림자들만 보고 산다고 여겼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든 논란들은 비유들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그 비유들 간의 상응관계에 있다는 문제의식이 너무 지나쳐 그 상응관계의 통일성에 대한 연구에 필요 이상으로  매달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영미를 중심으로 분석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연구자들이 비유들의 상관관계의 통일성을 둘러싸고 옹호의 입장이건 반박의 입장이건 시시콜콜할 정도의 미시적인 문제들까지 끌여들여 갑론을박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해 67 강성훈(2008) 참고) 사소하게는 동굴의 비유 상 C1에서 C2로 고개를 돌려 불빛을 보고 눈부셔하는 것과 달리 선분의 비유 상 L1 영상에서 L2 실물을 볼 때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그런 연장 선상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지 굳이 무리해서 적용 범위에 사람이나 정황까지 일일이 다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각 비유들은 나름의 각기 다른 비유 목적을 갖고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된 것들을 어떻게든 일일이 다  연결 상응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상응관계의 통일성을 밝히는데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부 전통 해석가들이나 또는 그것을 비판 또는 옹호하기 위해 비유 속 모든 표현들을 지나치게 논리적 요소로 환원시켜 분석적으로 살펴 보려는 현대 비평가들이나  그들 모두  플라톤이 각 비유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그 모든 논의에 중심에 놓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오르듯 플라톤의 진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21세기 들어오면서 호메로스 시가에 대한 오랜 동안의 분석적 미시적 접근이 초래한 폐해를 반성하여 <Who killed Homer>(V. D. Hanson, J Heath, 2001)란 책이 출간되었는데 어쩌면 머지않아 비슷한 취지에서 <Who killed Plato>란 책이 출간될지도 모른다.

c) 인형극에서처럼 가림막 담장 위로 모형을 들고 소리 내며 오가는 사람들은 왜곡된 정보와 사실을 생산하고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당대 기득권자들과 선동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영합하고 부역하는 소피스트들 내지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이들의 선동에 사로잡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보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일삼는 대다수의 사람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가리킨다.

d) 이곳에 그려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의심이 증폭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일방적으로 지배층이 만들어 유포한 정보만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현란한 수사술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내지 의욕 자체를 상실한 채, 거짓과 편견, 독단과 아집으로 분열과 혐오의 언어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나라와 서로를 파괴하는 이기적 송사와 분열에 매몰되어 있었다.

e)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 벽면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모두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2차적으로 전달된 간접적인 정보들이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의존하는 정보 대부분은 간접 정보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보들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사람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그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함께 의심도 하고 대화도 해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소통과 대화의 여유조차 갖기 힘든 대중들이 그러한 소통 능력을 함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치 권력자들은 대중의 소통 능력을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 능력으로만 여겨 되레 그 능력의 신장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사실 대규모로 정보 생산 능력을 갖춘 일부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에 맞추어 정보를 가공하여 나라 전체가 울릴 정도로 대규모로 소리 내어 유포할 경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달리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주류 언론집단과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을 뚫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를 끌어내린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515c ‘다음과 같은 일이 본성에 맞게 일어났을 때’ : 이곳에서 ‘본성에 맞게physei 일어났을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실제로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로 볼 수 있고(Ast, Stallbaum), 수감자가 언젠가는 풀려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연스런 진행 과정에 따라 풀려났을 때’(J. Schneider, 박종현) 또는 ‘풀려남은 아무도 모르는 방식으로 일어난다’(R. L. Nettleship)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수감자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앞서 살폈듯이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것을 곧이곧대로 실제 죄수로 감옥 생활을 하다가 만기 등의 이유로 석방되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하면서 플라톤이 그 비유가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받은 자의 본성physis의 상태를 닮은 것’이라고 한 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수감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만기출소같이 어떤 수동적인 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감자 자신 어떤 일을 계기로 수감 상태가 본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그 미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수감자가 맞이한 어떤 계기란 이를테면 플라톤 자신이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건 누구의 소개로건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을 만나 철학을 접하고 무언가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상황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어둠 속에서 빛과 진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본성에 거스르는’(para physin)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풀려남은 그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 역본(2025년 말 출간 예정)은 ‘결박에서 해방된 상태가 그들의 본성에 맞는다’는 취지에서 physei를 ‘본성에 맞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 수감자는 이같이 수감 상태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제되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곧 철학 교육이 개시되는 상태 즉 이어지는 C2의 상태라 하겠다. 빛을 향한 오름길에서 교육적 당위를 처음에 강제로 느끼는 것이나 이내 그것을 감내하려 마음을 먹는 것 모두 가능성으로서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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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2,500년 전에 기술된 플라톤의 동굴 속 장면은 오늘날 누군가가 제작한 특정 내용이나 스토리를 담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 스크린에 상연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바라보는 현대 극장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 닮아있다. 물론 우리는 극장을 나와 실제 일상의 생활을 보내지만, 일상에서조차 대부분 정보는 대자본을 토대로 세워진 정보 통신업체가 제작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 등 사이버 문화에 크게 의존해 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 매체 등 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장치가 크게 발전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들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균형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어떤 형태로건 이미 형성된 신념을 배타적으로 더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정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음식점이든 공공장소든 불문하고 특정 종편 방송만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일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발과 목이 묶인 채 벽면에 비친 모형들의 그림자와 그곳에서 반향된 소리들만을 보고 들으며 그것들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재료들로 모형을 만들어 그림자들을 비추어내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수감자들의 그러한 상태를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모형들을 좀 더 많은 공과 땀을 들여 제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이고 수감자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힌 그만큼 더 많고 큰 규모로 왜곡된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한과 문화교류를 증진하는데 앞장섰던 우리나라 어느 문화인류학자조차 북한을 극장국가로 칭하고 있는 것도(『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공저, 창비, 2013) 그리고 우리 사회 주류 언론인 조중동과 그들의 기득권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종편들 그리고 혐오와 분노만을 부추기는 극우 유투버들 모두가 가히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짜 뉴스와 정보조작의 온상으로 전락한 것도 플라톤이 그토록 우려했던 동굴 속 정황과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실로 그것은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광기 어린 프로퍼갠더 정책은 물론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 문화와 정보 사회가 갖는 어두운 면들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 반지성과 대중의 집단 심리의 허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한 플라톤의 성찰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매우 유효하고 적확한 비판이자 진심 어린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와 연관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지 상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동굴 속 상태 일반을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종교적 지평에로까지 확장해서 음미해보면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은 물론 종교 철학과 문명 비판, 정신 분석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하고 극복해야 할 철학적 난제들과 문제의식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C2 단계에서 C5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동굴의 비유 내용을 살펴가며 그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어가기로 한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 소개 글 :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김교빈)

자연철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전통의학

 

김교빈(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철학)

 

이 글은 『한의학의 자연철학』(2025)의 여섯 번째 발문(추천서문, 35~38쪽)으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에 게재합니다.

 

2009년 7월 31일 한국 전통의학을 대표하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그리고 뒤늦은 감이 있지만 2015년 6월 국보 319호로 지정되었다. 『동의보감』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네스코의 선정 과정을 거쳐 인류 모두가 보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을 기반으로 전통의학 이론의 핵심 개념인 정기신의 초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서술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인류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오랜 인문학의 전통을 지녀왔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학문을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인문이 나머지 둘을 포괄한다고 생각했다. 인문이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면 천문과 지문은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한다는 생각이 인본주의와 인문의식의 출발이었다. 이 같은 생각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인문학을 의미하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럴 아츠(Liveral Arts)’는 민주주의의 출발이라고 하는 그리스에서 노예 교육과 달리 자유민인 그리스 시민의 소양을 가르치는 교육을 의미했다. 그래서 ‘리버럴 아츠’는 오늘날에도 인문학을 뜻하는 동시에 교양 교육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인간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 사유를 밖으로 표현해 낸 예술까지를 인문의 범주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을 뜻하는 또 다른 용어인 휴머니티스(humanities)는 신 중심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사고를 뜻하며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불타오른 인문정신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에 담긴 인문정신은 책의 구성에 잘 드러나 있다. 『동의보감』의 첫 편은 「내경(內景)」이고 두 번째 편은 「외형(外形)」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잡병(雜病)」, 「탕액(湯液)」, 「침구(鍼灸)」편이 붙어있다. 만약 『동의보감』이 병증의 원인과 증세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치료법을 제시하는 뒤의 세 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면 전근대시기의 그렇고 그런 의학책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구체적인 질병과 처방을 말하기에 앞서 사람 몸의 겉과 속, 그리고 사람과 사람 밖의 자연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과 인체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깃든 사람의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몸 안의 장부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몸 안의 구조와 몸 밖의 신체 부위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사람의 몸과 자연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건강은 무엇이고 질병은 무엇인지, 생명을 지키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양생법이 필요한지, 생리(生理)와 병리(病理)를 설명하는 정(精)·기(氣)·신(神)이 무엇인지.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면서 당시의 의학이 도달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은 패러다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보편성만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라는 말은 『동의보감』 서문에 있는 것처럼 당시 중국에 있던 남의(南醫)와 북의(北醫)에 대한 우리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동의보감』 출간 284년 뒤에 나온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도 ‘동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독자적인 의학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구나 『동의보감』은 약재와 처방 모두에서 그 이전 몇 백 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의료역량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향약집성방』에 수록된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약재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처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본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어떤 책인가? 『한의학의 자연철학』은 인문학의 토대 위에서 『동의보감』과 『동의수세보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통의학을 풀어낸 책이다. 특히 저자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그 사유의 기반인 기철학을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최종덕은 기를 사유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을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라고 하였고, ‘자연주의적 유물론이란 물질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존재’란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라고 부연하였다.

최종덕은 매우 폭 넓은 공부를 해 왔다.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기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처음 만났고, 얼마 안 가 ‘기(氣)철학분과’에서 보게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다른 학회들과 달리 분과 모임들로 나뉘어 있고, 분과들은 매 주 정기적으로 모여 세미나를 진행한다. 1989년 학회 창립과 동시에 내 제안으로 시작된 ‘기철학분과’는 동양철학 연구자 세 명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점점 인원이 늘면서 동양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한의학 연구자와 과학철학 연구자인 최종덕 교수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 대상 텍스트도 대표적인 기철학자 장횡거의 『정몽(正蒙)』이나 방이지의 『물리소지(物理小識)』 뿐만 아니라 『황제내경』, 『동의보감』, 『격치고(格致藁)』 같은 전통의학 서적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덕은 전통의학과 기철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갔고, 동양철학 연구자들 또한 전통의학과 자연철학으로 논의를 깊여갔다.

최종덕은 기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면서 ‘개인의 건강이나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신비적인 영역의 기가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사회적 비판기능 내지는 바람직한 사회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생산 역량을 지닌 기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관점은 ‘과학적 접근방식과 철학적 접근방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한 것이다. 특히 최종덕은 전통의학을 ‘자연주의 의학’이자 ‘유기체 의학’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잘 담아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써 낸 것이다. 최종덕이 전통의학, 기철학, 물리학, 자연철학 등의 여러 분야를 날줄과 씨줄 삼아 자유자재로 엮은 『한의학의 자연철학』을 만난 독자들은 전통철학과 현대철학, 기철학과 자연철학을 동시에 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아울러 이 책이 동(東)과 서(西), 고(古)와 금(今)을 융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눈뜸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교빈 씀)


필자 김교빈: (재)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철학 에세이》, 《하곡 정제두》등이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화담집》, 《강좌 한국철학》, 《기학의 모험》, 《동양철학과 한의학》 등이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중국의 고대 논리》, 《중국 고대철학의 세계》, 《중국 의학과 철학》, 《기의 철학》 등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8)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 선분의 비유(509c-513c) – (II)

 

* 앞의 강해에서 우리는 다른 비유들과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가 갖는 고유성에 주안점을 두고 그 기본 개요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선분의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론 내지 존재론적 위계가 제5권에서 플라톤이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의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에 주목하였다. 선분의 비유에 관한 두 번째 강해는 미리 말한 것처럼 선분의 비유의 고유성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갖는 중대성과 그 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피기로 한다.

* 그것을 위해 우선 플라톤이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하여 제5권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과 이곳 선분의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간략히 도표로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 제5권에서(474c-480a) 플라톤은 <표1>에서 보듯이 인식의 상태를 ‘무지’agnoia와 ‘앎’gnōmē, epistēmē으로 크게 구분하고 그 무지와 앎 사이에 ‘중간적인 것’(metaxy ti)으로서 ‘믿음(의견)’doxa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앎은 ‘있는 것’, ‘자체적인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고 믿음(의견)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선분의 비유에 와서는 <표2>에서 보듯이 무지의 경우가 빠지고 인식의 상태로서 두 단계 즉 ‘앎’과 ‘믿음(의견)’은 전체 4단계 즉 ‘상상’eikasia, ‘확신’pistis, ‘사고’dianoia, ‘지성적 앎’noēsis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면 제5권의 앎과 믿음은 선분의 비유에서 세분화된 그 4단계들과 비교하여 어떻게 서로 상응·연관 관계를 갖는 것일까? 우선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noēsis과 ‘사고’dianoia가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으로 묶여있음에 주목하면 언뜻 그 두 단계가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단계 중 ‘사고’ 단계는 가정들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가정의 원리(archē anypothetos)로서 ‘자체적인 것’ 즉 ‘있는 것’(to on)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5권의 ‘앎’이 될 수 없다. 그에 비해 ‘지성적 앎’noēsis은  아무 가정들 없이 형상들만을 사용해서 그것을 통해 형상들 자체에 이르는 앎(510b)이라는 점에서 제5권의 ‘앎’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것은 선분의 비유에서 ‘지성적 앎’과 ‘사고’ 둘 다 ‘가지적 영역’으로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지성적인 앎’noēsis의 단계만이 제5권의 ‘앎’epistēmē에 상응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 4단계 중 오직 ‘지성적 앎’(L4)만이 제5권의 ‘앎’과 일치하는 것이고, 나머지 단계들(L1, L2, L3) 즉 ‘사고’, ‘확신’, ‘상상’의 상태들은 원천적으로 그 ‘앎’과 배타적으로 차별되는 것인 한, 모두 ‘믿음’(의견)doxa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표3> 참고) 그러나 플라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고’를 ‘지성적 앎’과 묶어 ‘가지적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고 나중 534a에 가서도 그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성적 앎’과 ‘사고’가 원천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임에도 플라톤은 왜 선분의 비유에서 그것 둘을 함께 묶어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앎과 믿음과 관련한 제5권의 입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입장에 변화를 가하는 것일까 아니면 추가적인 보완을 의미하는 것일까?

* 이것은 이제 선분의 비유에서 가지적 영역의 것으로 제시된 ‘사고’dianoia가 어떤 철학적 성격과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우선 앞에서도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 중 ‘지성적 앎’만이 제5권의 ‘앎’과 동일하게 ‘형상적 앎’인 한, 나머지 단계들은 모두 제5권 기준으로 ‘믿음’에 속하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글라우콘이 선분의 비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을 정리하면서 ‘사고’를 ‘믿음doxa과 지성nous 사이에 있는 것’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511d)과 부딪친다. ‘믿음’과 ‘믿음과 지성 사이’는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분의 비유 자체가 기본적으로 doxa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데다가 그 세분화 단계에서 사고가 앎일 수 없다면 사고가 치울 칠 방향은 doxa쪽 밖에 없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점에서 ‘믿음’doxa이란 말이 선분의 비유 중간에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다가(중간에 나오는 그에 준한 표현 ‘to doxaston’(믿음의 대상)이란 말도(510a) 다만, 선분의 비유 상 가시계와 가지계의 관계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to doxaston과  to gnōston의 관계처럼 모사와 원본 관계라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다.) 비유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그것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는 것도 눈에 띤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제5권의 doxa와 비교하여 그 범위를 ‘사고dianoia’ 아래 단계 즉 확신pistis과 상상eikasia으로 좁혀 설정했음을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나중 변증술을 설명할 때 선분의 비유를 꺼내 들어  ‘지성적 앎과 사고’는 noesis로 부르고 ‘확신과 상상’은  스스로도 직접 doxa라고 말하고 있다.(534a)  어쨌거나 논쟁의 소지는 있어 보이지만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는 글라우콘의 말을 아래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 보면,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왜 처음에 doxa란 말을 쓰지 않다가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쓰게 한 후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확신과 상상에 국한하여  그 말을 쓰고 있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일정 부분 있어 보인다.

* 우선 <표1>에서 보듯 믿음은 앎(있는 것)과 무지(없는 것) 사이에서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대상으로 성립하는 인식 상태이다. 그리고 앎과 믿음(의견)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경계만 있을 뿐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 것은 없다. 글라우콘의 말에서 지성을 ‘있는 것’으로 보고 믿음을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볼 경우 설사 그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결국은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 즉 본질적으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과 앎이라는 당구공이 닿아 있을 때 접점은 하나이고 그 당구공들 ‘사이에 있는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그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독립적인 존재론적 지위는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당구공의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하자면 추론적 사고 자체는 원천적으로 앎이라는 당구공에 속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에 속해 있되. 다만 믿음(의견)이라는 당구공의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앎의 방향 쪽 극단 표면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사고는 비물질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형상적 앎에 닿아 있지만 기하학적 사유 공간의 연장성을 포함하고 있고 그 연장성은 무규정성의 근본 특징인 한, 기본적으로는 믿음(의견)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비물질성 뿐만 아니라 공간적 연장성까지도 탈각해야 비로소 앎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서 무규정성을 가장 적게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형상적 앎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다. 아무려나 존재론적 관점에서건 인식론적 관점에서건 믿음의 위상과 관련하여 논란은 여전히 불가피해 보이긴 하지만 믿음(의견)을 어떤 관점에서 어디에 위치시키건 간에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가지적 영역의 범위를 형상적 앎에만 국한하지 않고 최소한 수학과 기하학 같은 전문 기술들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 소은(素隱) 박홍규 선생은 앎과 믿음, 무지의 존재론적 위상과 관련하여 ‘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서 그것의 존재론적 특성을 ‘무규정성’apeiron으로 규정한다. 무규정성은 양상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으로 형상(to on) 쪽 극단에 이르면 ‘자기동일성’tauton으로까지 나타날 수도 있고 반대로 무(無mē on)쪽 극단에 이르면 관계맺음의 원리로서 타자성heteron의 극치로 나타날 수도 있다. 추론적 사고 대상으로서 수학적 기하학적인 것들은 모두 사유 공간에서 공간적 연장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무규정성apeiron을 갖는 것이되, 다만 형상 쪽을 향한 최상위 극단에서 물질적 무규정성을 탈각해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보전한다. 기하학적 공간 또는 사유 공간에서 길이가 동일한 여러 삼각형들이 하나의 삼각형으로 합동하여 하나의 삼각형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데아의 자체성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에서 무규정성을 갖는 믿음의 영역에 위치하지만,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으면서 이데아적인 ‘자체성’kath’ hauto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보전함으로써 말로 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 수학과 기하학의 토대가 된다. 철학의 목적은 영혼의 고양을 통해 무규정성의 본질로서 타자성에 역행하여 자기동일성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변증술적 지성을 통해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철학의 수행은 영혼의 능력에 따라 그 목적을 이룰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이 늘 사랑을 지속하는 것인 한, 살아 있는 인간에게 철학의 완성은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분투’, ‘위대한 영혼에로의 자기 확장’ 그 자체라 할 것이다.

* 요컨대 제5권의 엄격한 이분법적 기준에서 보면 분명 사고는 <표3>이 보여주듯 앎과 차별되어 믿음(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선분의 비유를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비록 가시적 모상을 가정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가시적 영역과도 관계있지만, 결론은 비가시적 도형 자체로 마무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앎에로의 상승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가지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고를 ‘믿음과 지성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글라우콘과 사고를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는 소크라테스가 양립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지성nous과 공통의 어원을 갖는 noēsis와 noētos란 말을 사용할 때 아무 사전 설명 없이 어떤 때는 앎과 사고 모두를 묶어 noētos<표2>나 noēsis(534a)이란 말을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noēsis를 ‘앎’epistēmē에만 한정하여 쓰기도 한다.(<표>2, 제5권) 이것은 플라톤 자신 선분의 비유에 와서 noētos와 noēsis란 표현을 의도를 갖고 다소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앎epistēmē이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엄격하게 유지하면서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의 믿음의 영역을 세분화하여 ‘사고’의 단계를 분리해내고 나머지 단계들을 앞서 글라우콘이 말한 대로 좁은 의미의 doxa로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가지적 영역’noētos topos의 범위를 일정 부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술을 통한 형상적 앎뿐만 아니라 ‘사고’ 단계의 앎 즉 수학과 기하학 등 추론을 기반으로 한 전문 기술적 앎 또한 학문적 기초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기하학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성 자체가 수행하는 역할을 살폈듯이 이성은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사고 단계와 앎의 단계 그 모두에 걸쳐 있다. 철학은 종국적으로 형상적 앎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수행은 변증법적 문답 능력을 통해 오름의 과정에서건 내림의 과정에서건 말과 논리로 이루어진다. 지성에 의한 형상적 앎만이 아니라 사고에 기초한 수학과 기하학 등 전문 기술들technai의 대상 또한 그 자체로 일정 부분 의미 있는 철학적·학문적 탐구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학술들을 변증술이 형상적 앎에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표현하고 있다.(533d) 요컨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는 현상 구제 차원에서 형상적 앎 아래 단계의 인식 상태들 즉 현상계에 대한 학적 탐문의 길을 확립하는데 크게 비중이 실려 있던 것이다. 

 

*  선분의 비유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단순히 인식론적 명백성의 순차적 단계와 특징 보다는 그 배면에 깔린 존재론적 위상 특히 사고 단계의 위상에 주안점을 두고 그것이 학적 인식의 확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존재론을 끌어들여 각 단계가 갖는 인식론적 의미를 살핀 셈이다. 이제 끝으로 이상의 논의를 전체적으로 종합하면서  필자 나름의 관점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음미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제5권에서 앎과 믿음의 구분과 선분의 비유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로 나누건 넷으로 나누건 ‘지성적 앎’으로서 앎의 단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은 변함이 없다. 즉 선분의 비유에서 앎의 존재론적 위상 변경에 대한 언급은 없다. 특히 태양의 비유와 비교하여 선분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에 상응하는 앎의 단계가 별도의 지위를 갖고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것은 좋음의 이데아가 다른 이데아들보다 철학적 위계상 우월한 것일지라도 최소한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하나같이 자체적인 존재이자 인식론적으로도 동일한 앎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2) 이것은 결국 선분의 비유의 주요 목적이 ‘형상적 앎’을 보완하고 해명하는 것보다는 그 하위 단계로서 믿음의 단계를 보다 세부적인 단계들로 나누어 그 단계들 각각이 갖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선분의 비유는 형상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인식 과정 전체를 연속해서 상승하는 것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중간적인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 ‘믿음’doxa의 스펙트럼이 최하 ‘상상’의 단계에서 ‘확신’을 거쳐 ‘사고’로까지 분화되면서 각기의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앎에로 상승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3) 특히 플라톤이 ‘사고’를 존재론적으로 앎과 분명하게 구분하면서도 가지적 영역에 포함케 하고 있다는 것은 지고의 앎으로서 형상적 앎의 위상을 이전의 입장 그대로 보전 유지함과 동시에 하위 대상으로서 수학 또는 기하학적 대상들이 갖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위상을 재정립하여 그 자신 가지적 학문 영역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 역시 변증술의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나 형상적 자체성에 버금가는 ‘자기 동일성’tauton을 가질 수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4) 그뿐만 아니라 플라톤은 가시적 영역도 다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으로 세분화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실물을 다루는 일반 기술들과 시가술, 수사술, 미술 등 모방과 꾸밈, 허구와 과장 등을 기반으로 한 기술들을 구분함과 동시에 그러한 기술들이 갖는 나름의 위상도 의미 있게 함께 재정립하려는 의도 또한 담고 있다. 이점에서 ‘상상’eikasia과 ‘확신’pistis, ‘사고’dianoia가 서로를 고리로 모상eikōn과 원본의 관계를 갖고 상승한다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게 주목해야 한다. 특히 최하위 인식 단계로서 ‘상상’eikasia의 경우는 환상과 억측,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감성의 개입 등 명확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게 평가되는 단계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결코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다른 한편 인간의 정신적 발달 과정에서든 일상인의 심리상태에서든 늘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상상’은 정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와 청소년기 단계에서는 장차 맞이할 성년기 영혼 형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플라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인간 삶에서 결코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플라톤이 제3권에서 시가(詩歌)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특히 어린이와 청년기 교육 과정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 시가 교육에 상당한 정도의 비중을 할애한 것도 그 때문이다.(376e-403c) 사실 시가는 말과 언어의 형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선법과 리듬에 허구와 과장까지 포함하고 있어 일부 시인들과 권력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러한 시인들과 그들이 지은 신화나 시가들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교육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플라톤은 인간의 심적 상태에 시가가 차지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얼마나 심대한 것인지 특히 이성적 사고가 채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이나 청소년기에는 얼마나 심각할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전통적인 신화나 시가들을 비판하되 신화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건국신화가 보여주듯이 이상 국가에 걸맞은 새로운 시가들을 만들어 그것을 어린 시절부터는 물론이고 성인 이후에도 시민이라면 누구도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할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상’은 선분의 비유에서 최하위의 인식단계에 속하지만, 삶에 미치는 비중과 중요성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것이 갖는 양면적 영향의 크기만큼 교육의 대상으로서도 매우 중대한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제3권에서 시가교육의 목적과 관련하여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아래와 같은 언급은 그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시가(詩歌) 즉 리듬과 화음은 영혼의 내면으로 가장 깊숙이 젖어 들며 우아함을 대동함으로써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으므로 … 시가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는 훌륭하지 못한 것을 가장 민감하게 알아보고 싫어하는 대신 아름다운 것들은 칭찬하며 기뻐하며 영혼 속에 받아들여 … 나중에 이성적 논거를 접하게 되면 그 친근성 덕에 그걸 알아보고 제일 반길 것이다”(401d-402a)

5)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말의 꾸밈과 과장을 마다않는 수사술rethorikē은 물론 실재의 모사에 대한 모사 즉 이차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고 있는 회화를 비롯한 모방술(mimetikē)도 시가술이 갖는 양면성 차원에서 함께 비판된다. 그것 또한 앞서 말한 상상의 특징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사술은 소피스트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민주정 치하에서 설득적 언사 대신 말의 꾸밈과 과장의 방식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기술로 변질되어 종국에는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끄는 큰 원인이 되었다. 대화편 제목들의 상당수에 소피스트의 이름이 내걸려 있고 내용에서 상당 부분 그들이 구사하는 수사술에 대한 냉혹한 비판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 진실 왜곡과 정치적 선동의 기술로 수사술을 철저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시가에 대한 양면적 태도가 보여주듯이 설득력을 강화하는 말의 기술로서 수사술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대화편 <메넥세노스>의 경우를 보면 플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록 역설적인 방식으로나마 수사술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핵심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대화편들 자체가 이미 상황 설정이나 인물 설정, 대화의 구성 전개 등에서 말의 문학적 꾸밈과 허구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의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를 비롯해 그가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은유들 또한 하나같이 모두 말로 이루어지는 문학적 시가적 표현 기법이다. 그리고 회화 내지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이차적인 모방을 주된 기술로 삼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불분명함과 왜곡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학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미술과 조각은 신들과 신들의 거처를 아름답게 또는 웅장하게 꾸미고 그것을 통해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감성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즉 미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과 폄하는 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정확성과 객관성을 기준으로 제기된 것이지 그것이 삶에서 갖는 가치까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철학과 병행하여 마치 죽은 돌에서 생명을 끌어내듯이 조각을 생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다.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 ‘영상(影像)’(image)이란 표현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받아들여 지듯이 말 그대로 ‘상상에 불과하다’는 폄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위대한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치하의 용어로도 쓰일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비유 자체가 내용상 이미 위대한 철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럼에도 형식에서 문학적 허구임 또한 분명하다. 플라톤이 학적 정확성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을 기준으로 예술의 위상을 낮게 평가했다는 말은 진실이어도 플라톤이 삶에서 예술이 갖는 가치까지 폄하하고 부정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과 모방mimēsis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제3권(392c-398b)에도 나오지만 나중 제10권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어진다.

6) 그리고 ‘확신’pistis 단계의 인식 상태와 그 대상으로서 실물 세계들 또한 ‘사고’dianoia의 모상으로 사고의 하위 단계이지만 인간 삶의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물론이고 관심사와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가장 중심에 있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 삶의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 수많은 기술들 이를테면 의술, 건축술, 제화술. 조타술 등 일반 기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끊임없이 인용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현실의 기술들이다. ‘확신’의 대상이 ‘사고’ 대상의 모상이 된다는 것 역시 내림의 과정에서 보면 현실의 실물들이 ‘사고’를 통해 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해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일반 기술 모두는 기본적으로 경험적 숙달과 관련되어 있지만 일정부분 수학과 기하학에 의존해 있어 개연적이나마 기술적 앎의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현상 구제의 일환으로 실물을 형상의 분여물로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7) 결국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제5권에서 ‘믿음’(의견)으로만 구분되었던 인식 상태를 세분화하는 방식으로 현실 구제 차원에서 실질적인 현실 문제의 방책으로서 수학과 기하학의 방법은 물론 제반 기술들 나름의 학적인 위상과 성격을 최대한 뒷받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고’ 단계를 ‘가지적 영역’에까지 확장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 형상적 앎만을 중시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인식 상태인 믿음의 영역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전통적 해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영역에서 형상적 앎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앎의 상태로 추론적 사고를 설정함으로써 전문 학술들의 학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고 나아가 추가적으로 확신과 상상도 따로 구분하여 그 차이가 갖는 고유한 의미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즉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최정점으로 하는 존재 및 인식 세계의 기본 구도를 보여준 후, 선분의 비유를 통해 그러한 형상적 앎에 이르기 위해 어떠한 하위 단계의 인식들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각 단계의 인식들이 현실의 기술들과 어떻게 연관되고 학적으로 어떤 위상을 갖는지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8)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문 기술들과 일반 기술들을 학문적 차원에서 근세 자연과학들을 비교해보자면 선분의 비유는 근세 자연과학적 인식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주요 개념들을 이미 선구적으로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적 문답과 숙고를 거듭하여 영혼이 고양된 상태에서 마침내 첫 원리를 획득하고 다시 그 원리를 토대로 가정들에게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플라톤적 앎의 구도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일원리에 이른 후 그 제일원리를 토대로 연역의 방식으로 개별 지식들의 진리성을 부여해주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제일철학과 인식론적으로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선분의 비유에서 ‘확신’과 ‘상상’의 단계는 근대 경험론이 그랬듯이 그 상위 단계로서 최소한의 학적 분별력인 사고dianoia 작용을 배제하고 지식의 원천을 그저 감각적 경험에만 한정했을 경우 왜 회의론에 빠질 수 밖에  없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칸트(I. Kant)의 인식론도 관점과 해석만 다를 뿐 근본 틀에서 ‘선분의 비유’의 단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칸트는 관조(觀照)theōria의 대상인 플라톤의 형상계를 물자체라는 불가지의 세계로 상정하여 학적 인식에서 배제하는 대신 사고의 단계에서 작동하는 이성의 역할에 주목하여 이성을 주관에 내재하는 인식의 보편적 구성 원리로 삼아 감각적 경험적 지각들을 인간 나름의 보편적 지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단계만 하향되었을 뿐 칸트 역시 현상의 구제 즉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칸트가 인식론에서 배제하였던 물자체의 세계를 어쩔 수 없이 실천철학의 과제로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이후의 철학사적 전통에서 특히 근현대 비합리주의자들에 의해 그 물자체의 세계가 오히려 철학적 탐문이 육박해 들어가야 할 참된 실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도, 비록 관점과 용어는 달라도 말과 논리 너머의 플라톤적인 예지계가 침묵의 형식으로건 형이상학적 이념의 형식으로건 철학의 근본 문제로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궁극의 관심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서구 역사에 나타난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이다’(All philosophy is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라고 말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이 결코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9) 요컨대 플라톤 철학은 철학적 위계에서 보면 분명 이데아가 지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지닌 관심의 중대성 차원에서 보면 형상적 앎의 내림 과정 즉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구제 차원에서 말과 논리로 성립되는 전문 기술들(오늘날의 개별과학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 철학을 그저 형상이라는 추상적 관념만 좇는 비현실적 사상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독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후대 철학자들이 자기 철학을 내세우기 위해 아전인수적으로 가해졌던 그릇된 해석에 크게 의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근본적으로 삶의 근원적 문제해결을 위한 공존과 조화, 지성과 균형의 원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문 기술들이 아무리 현실에서 필요할지라도 형상적 앎을 결여했을 경우 그것은 방향을 잃은 채 권력과 욕망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철학이 전문 기술들이 갖는 실질적인 유용성을 무시한 채 형상적 앎을 내세워 고답적인 이론에만 머무는 경우 그것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선과 아집, 폭력에 부역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삶 모두를 무너뜨린다. 만약 플라톤 철학이 말과 논리를 넘어 형상적 앎에 대한 지적 직관만을 강조하고 그것에만 매달렸다면 플라톤 철학은 철학사에서 결코 철학적 사유의 모태로 평가받지 못하고 그저 신비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교철학 또는 기독교 신학의 보완물 정도로 운위되었을지 모른다.

 

* 플라톤은 태양의 비유를 보완하는 일환으로 이상과 같이 선분의 비유를 살핀 후, 이제 제7권에 들어가 그 선분의 비유에 나타난 현실 구제의 구도와 세부 단계들을 동굴의 비유를 통해 좀 더 실천적이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더 종합적으로 실감 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따라 그곳에서는 좋음의 이데아도 당연히 다루어진다. <국가> 제6권은 이렇게 선분의 비유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국가> 제6권 끝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동굴의 비유(514a-521b)

[서평]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강지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읽고

 

함태원(건국대)

 

칸트 철학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칸트가 위대한 철학자이자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기야 어지럽고 머리 아픈 칸트의 철학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철학을 전공하는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칸트라고 한다면 고개부터 저을 정도로 칸트 철학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칸트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는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만한 일이다. 이 책은 칸트의 위대한 업적의 비결을 ‘루틴’이라고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루틴을 세우고 이 루틴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칸트야 주변 시민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추는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라 불리는 규칙적인 사람이었으니, 루틴을 지켜내는 일이야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칸트가 아침에 일어나 5분간은 침대에서 그 무엇보다 유혹적인 아침잠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또 하인이 커피를 타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커피를 달라고 보채던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은? 하지만 칸트가 자기 루틴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런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이 아침잠에 약하고 커피를 너무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자기 루틴에 이를 포함했다. 칸트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나의 즐거움”(36쪽)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루틴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루틴을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지도에 목적지도 표시하지 않고 항해를 나갈 수는 없으니 어디로 갈지부터 체크해야 한다. 목적지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행히도 우리는 칸트 덕에 “진리는 대상에 있지 않고, 내가 구성하는 것”(61쪽)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이다.

그럼, 루틴은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우선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보자.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든 우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부터 시작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루틴을 완성하고 유지해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을까? 내가 좋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괜찮은 걸까? 단순하게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도 좋다고 했다면, 칸트가 이토록 이름나있는 인류의 스승은 아니었을 것이다.

칸트의 대답은 도덕법칙에 따라서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도덕법칙이라니! 이름만 들어도 현기증이 나는 어려운 법칙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햄버거를 참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햄버거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저기 옆에서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조카의 햄버거를 빼앗아 먹으면 안 된다. 경찰이 아무리 몸이 괴롭고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옆에서 벌어지는 범죄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도덕법칙은 당연한 것을 지키면 될 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 도덕법칙은 자율로서 자신이 세우는 것이라 말한다. 즉, 이 법칙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나의 자유에 달려있다. 그러나 칸트의 요점은 이 법칙을 언제나 그리고 확고하게 고수하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몸이 힘들다고, 내가 지금 몹시 허기져 있다고 범죄 현장을 외면하거나 강도 행위를 벌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세운 그 원칙을 공고하게 유지하면 도덕법칙을 지켜나갈 수 있다. “자율적으로 행하되 그 행위가 도덕법칙인 한에서 행동하자”.(111쪽) 자유는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칸트처럼 하루하루 삶의 루틴을 만들어 살아가는 일은 분명히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이유는 엄격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쓴소리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선생님들의 말은 언제나 옳지만 듣기 싫은 소리로 되어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위대한 일은 언제나 고되고 힘든 법이다. 시작하는 25년 새해, 칸트처럼 하루하루 나의 루틴을 정해 지켜나가며 위대한 일을 이뤄내보자.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67)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3.선분의 비유(509c-513c) – (I)

 

[509c-513c]

* 소크라테스가 좋음의 이데아가 갖는 특별한 지위에 대해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신령스러운 넘어섬이라고 놀라워 한 후 그것이 갖고 있는 태양과의 유사성과 관련하여 조금도 빠짐없이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509c)

* 이에 소크라테스는 남겨 놓은 이야기가 많고 또 많은 것을 빠뜨리게 될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이야기하겠다고 말한 후 다시 한 번 가지적인νοητός 영역τόπος과 가시적인ὁρατός 영역을 구분한 후 그 두 영역에 있는 두 가지 부류γένος들을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나뉜’δίχα τετμημένην 선분γραμμή에 비유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하기 시작한다.(509d)

1) 크기가 다른ἄνισα 두 부분τμῆμα으로 나뉜 선분을 다시 동일한 비율로 ‘가시적인 종류의 부분’τό τοῦ ὁρωμένου γένος과  ‘가지적인 종류의 부분’τὸ τοῦ νοουμένου γένος으로 나눈다.

2) 이것들을 서로 간의 상대적인 명확성σαφήνεια과 불명확성ἀσαφείᾳ의 관점에서 보면 가시적인 종류의 한 부분은 모상εἰκών들이다.(509e) 이 모상들은 그림자σκιά들, ‘물에 비친 영상들’τὰ ἐν τοῖς ὕδασι φαντάσματα, 밝고 조밀하고 매끄럽게 만들어진 것들에 비친 영상들 그런 모든 것들이다. 가시적인 종류의 다른 한 부분은 이 모상들이 닮아있는 원본들, 즉 우리 주위의 동물들 τά περὶ ἡμᾶς ζῷς과 모든 식물들 τὸ φυτευτὸν, 그리고 인공물τὸ σκευαστὸν의 종류 전체이다.(510a)

3) ‘진리와 진리 아님’ἀληθείᾳ τε καὶ μή의 관점에서 보면 위와 같은 가시적인 부분은 믿음(의견)의 대상τὸ δοξαστὸν이 앎의 대상τὸ γνωστόν과 맺고 있는 관계와 마찬가지로, 닮은 것τὸ ὁμοιωθὲν이 그것이 닮아있는 원본τὸ ᾧ ὡμοιώθη과 맺게 되도록 나뉘었다.(510a)

4) 그리고 가지적인 것의 부분의 경우, 한쪽은 앞에서 모방되었던μιμηθεῖσιν 것들을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하면서 영혼이 가정ὑπόθεσις으로부터 출발해서 첫 원리ἀρχή가 아니라 결론τελευτή을 향해 진행하며 탐구ζητεῖ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고, 다른 쪽은 가정으로부터 출발해서 ‘가정이 놓이지 않은 첫 원리’(무가정의 원리)를 향해 나아가며 저쪽에서 사용한 모상들 없이 형상εἶδος들 자체αὐτός만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통해 탐구μέθοδος를 해나가는 부분이다.(510b)

* 소크라테스가 가지적인 것의 부분들을 ‘가정’이란 말을 끌어들여 설명하자 글라우콘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1)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계산술λογισμός이나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홀수τό περιττὸν와 짝수τὸ ἄρτιον, 도형들τὰ σχήματα과 세 종류εἶδος의 각γωνία 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다른 어떤 것들을 가정으로 놓고서는 마치 이런 것들을 아는εἰδότες 사람들인 양, 그에 대한 어떤 설명λόγος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것, 모두에게 분명한 것으로 여긴다.(510c)

2)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머지 것들을 검토해가면서 일관성이 유지되는 방식으로ὁμολογουμένως 그들이 애초에 고찰하고자 했던 것에까지 도달한다.(510d)

3) 기하학자, 계산술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ὁρωμένος 도형εἶδος들을 사용하며 이것들에 대해 논의를 하지만, 그들이 사고하는διανοούμενοι 대상은 이것들이 아니라 ‘이것들이 닮아있는 그 원본들’οἷς ταῦτα ἔοικ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는 사각형τετράγωνος이나 대각선διάμετρος이 아니라 ‘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αὐτῆς를 ‘염두에 두고’ποιοῦνται 논의를 하는 것이다.(510d-e)

4)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고 그린 바로 그것들을(그것들의 경우 그것들의 그림자σκιά나 물ὕδωρ에 비친 모상εἰκών들도 있다) 이번에는 모상으로 사용하는데(510e) 그렇게 하는 까닭은 사고διανοίᾳ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ἰδεῖν 저것들 자체αὐτὰ ἐκεῖνα(사각형 자체나 대각선 자체)를 보기 위해서이다.(510e)

5) 이것들은 가지적인 부류에 속하는 것이지만 이것의 탐구ζήτησις에서 영혼은 가정을 사용하도록 강제되고ἀναγκαζομένην 가정들보다 더 위로 넘어갈ἀνωτέρω ἐκβαίνειν 능력이 없어서 ‘첫 원리’ἀρχή로 나아가지는 못한다.(511a) 그리고 그 아래의 것들에 의해 모방되며 그 아래의 것들에 비해서는 분명한ἐναργής 것이라고 판단되고δεδοξασμένοις 존중받는τετιμημένοις 것들, 바로 그것들을 그들은 모상εἰκών으로 사용한다. 이런 것들이 기하학γεωμετρία이나 그와 유사한ἀδελφή 전문기술들τέχναι에서 일어나는 일이다.(511a)

* 소크라테스는 가지적인 부류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으로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아래와 같이 언급한다.

1) 이러한 경우란 이성 자체αὐτὸς ὁ λόγος가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을 통해’τῇ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δυνάμει 파악하는 경우로서 여기에서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가정이 놓이지 않은ἀνυποθέτου(무가정의)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τοῦ παντὸς ἀρχὴ에 이를 때까지 거기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ὁρμή이자 디딤 발판ἐπίβασις 같은 것으로 삼는다.(511b) 그리고 그렇게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이성은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결론까지 그런 식으로 내려간다.καταβαίνῃ.(511b)

2) 이러한 파악 방식은 감각될 수 있는 것αἰσθητῷ은 어떤 것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를 사용해서 형상들을 통해 형상들로 나아가 형상들로 끝을 맺는 방식이다.εἴδεσιν αὐτοῖς δι᾽ αὐτῶν εἰς αὐτά, καὶ τελευτᾷ εἰς εἴδη”(511b)

* 소크라테스의 이와 같은 설명에 글라우콘은 엄청난συχνός 일ἔργον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한 후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자기 나름으로 정리한다.

1) 전문기술이 고찰하는 부분보다 ‘변증술적 대화를 할 줄 아는 앎’τὸ ὑπὸ τῆς τοῦ διαλέγεσθαι ἐπιστήμης이 고찰하는θεωρούμενον ‘있는 것’το ὄντος과 ‘가지적인 것’το νοητος의 부분이 ‘더 명확한 것’σαφέστερον이라고 규정διορίζειν할 수 있다.(511c)

2) 전문기술들에서는 가정들이 첫 원리들이며, 자신들이 구경하는 것들을 감각이 아니라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θεᾶσθαι 강제되지만, 첫 원리를 향해 올라가지ἀνελθόντες 않고 가정들로부터 그것들을 살펴보기σκοπεῖν 때문에 이들이 그것들에 관해 지성νοῦς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511c-d)

3) 기하학자나 그런 사람들의 상태는 지성이 아니라 사고διάνοια라고 부르는 것 같다. 사고dianoia는 믿음δόξα과 지성의 중간μεταξύ에 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511d)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이 자신의 설명을 아주 충분히 잘 받아들였다고 평가한 후, 위에서 설명한 네 부분τμῆμα에 상응해서 아래와 같이 네 가지 영혼의 상태παθήματα가 생긴다고 말한다. 요컨대 맨 윗부분에 ‘지성적 앎’νόησις이 두 번째 부분에 사고διάνοια가, 세 번째 부분에는 확신πίστις이, 마지막 부분에 짐작εἰκασία이 할당된다. 이것들이 대상으로 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진리 ἀληθεία에 참여하는μετέχει 만큼 명확성σαφήνεια에 참여하며 그것들은 그 비율에 따라ἀνὰ λόγον 배열을 이룬다.(511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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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9d-e ‘크기가 다른 두 부분으로 … 동일한 비율로 나누게: ‘크기가 다른(an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크기가 같은(an isa)’으로 읽어야 하는지 논란이 있지만 대부분 경우 ‘크기가 다른’으로 읽는다. 이에 따라 구분된 선분을 도표화하면 아래와 같다.

 

    L1          L2          L3               L4

l——–l—————l—————l————————-l

 

L1과 L2 = 가시적인 종류의 것

L1 = 모상들(그림자, 영상) L2 = 실물들(식물, 동물, 인공물)

L3와 L4 = 가지적인 종류의 것

L3 = 가정들(수, 도형, 각)을 놓고 가는 것, L4 = 무가정적인 것, 첫 원리, 형상들-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른 각 선의 길이 비율

L1 : L2 = L3 : L4 = L1+L2 : L3+L4

* 각 선의 비율은 명확성에 있어 가시적인 것에 대한 가지적인 것의 우위와

각 영역 내에서 L1에 대한 L2의 우위, L3에 대한 L4의 우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L1보다는 L2가, L2보다는 L3가, L3보다는 L4가 명확성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제 크기를 보면 L2와 L3가 같다.

* 각선들의 길이가 명확성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L2와 L3가 같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연구자들은 선분의 비유에서 그 같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과 표를 통해 드러내려는 플라톤의 기본 의도를 고려하면 도표 상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같은 길이로 나타날지를 플라톤 자신 미처 몰랐을 수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다음 강해에서 살피겠지만 명백성과 관련한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차이가 분명하지만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L2와 L3가 근본적으로 믿음의 지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L1도 존재론적으로는 같은 믿음의 지위에 있음에도 길이는 그 보다 짧다는 것과 부딪친다.

* 플라톤이 위에서 말하고 있는 선분의 비유의 내용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믿음’은 그리스어 doxa의 역어이다. 그런데 이번 강해에서는 ‘믿음’이라는 역어가 선분의 비유에 나오는 ‘확신pistis’이란 역어와 혼동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믿음’에 ‘의견’이란 말을 병기했다. 플라톤에게 pistis는 doxa에 포함된 것이되 신뢰성에서 상상보다는 높은 사고보다는 낮은 수준의 생각과 견해를 말한다.

* L3의 대상이 홀수, 짝수, 도형들, 각으로 예시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L3의 대상을 ‘수학적인 것들’ta mathēmatika로 부르고 있다.(<형이상학> A.987b15) 플라톤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하학이나 이와 유사한 학술들’(511b) 즉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기하학, 천문학, 화성학이 다루는 대상들로 표현하고 있다.

* ‘사고’dianoia는 사전적 의미에서 뭔가를 목적으로 하는 지적인 궁리이되 논리적 추론이나 설명을 기반으로 하는 개념적 사고를 말한다. 선분의 비유에서 그 말은 기하학 등 전문 학술들의 인식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 511b ‘변증술적 대화(문답)의 능력’dialegesthai dynamis : 이 표현은 나중 변증술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곳(531c-535a)에서도 언급되고(533a) <필레보스> 57e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이것은 ‘있는 것들'(ta onta)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구경(thea)하도록 이끄는 영혼의 힘’(532c)으로 그 상승의 극치에서 마침내 형상 즉  ‘있는 것'(to on)을 본다(idein).  dialegesthai의 일차적 의미는 ‘대화(문답)'(454a 등)이지만 이곳에서 ‘변증술적 문답’으로 옮긴 것은 그 문답과 문답의 극치에서 변증술의 완성으로서 지성적 앎(noēin, epistēmē) 내지 관조(theōria)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511b ‘내려간다.’katabainē’ : 이성이 첫 원리를 파악한 후 다시 거꾸로 사고 단계로 내려갈 때 사용되고 있는 동사 ‘내려간다.’katabainō는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를 본 사람이 다시 동굴로 내려갈 때도(516e) 쓰이고 <국가> 첫 구절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다’(327a)에도 나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 첫 강해 때도 언급했듯이 <국가> 첫 구절에 모종의 상징성을 부여하여 그 말과 연계지어 그 말들이 ‘현상의 구제’를 함축하는 말로 다소 과도하게 의미 부여하기도 한다.

* 511c에서는 ‘본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두 군데 나온다. 하나는 ‘변증술적 문답을 할 줄 아는 앎이 고찰하는 있는’이란 구절에서 ‘고찰하는’으로 번역된 ‘theōroumenon’(원형 theōreō)이고, 또 하나는 ‘전문기술들에서는 사고를 통해서 구경하도록 강제되지만’이란 구절에서 ‘구경하도록’으로 번역된 ‘theasthai’(원형 theaomai)이다. 둘 다 기본적으로 ‘본다’(look at, see)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전자는 의미상 speculate, consider 등 지적 사유와 고찰의 뜻을 포함하고 있고, 후자는 오늘날 극장theatre의 어원 theatron에서 thea가 의미하듯 ‘관망’view as spectators의 의미가 크다. 플라톤은 여기서 앎과 사고 단계의 차이에 준해 그 표현들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476a에서 ‘앎을 좋아하는 철학자들’과 대비하여 ‘전문 기술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echnos을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philotheamōn로 일컫고 있는데 이 때 theamōn도 theaomai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theaomai를 ‘구경하다’로 번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일상어의 이러한 미묘한 차이까지 의식하면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사소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플라톤철학 연구자라면 텍스트상의 이러한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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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과의 유사성만은 빠짐없이 다시 자세히 설명해 달라’는 글라우콘의 요구(509c)에 따라 제시된 비유들이다. 즉 우리가 지금 다루게 될 선분의 비유와 이어지는 동굴의 비유는 모두 태양의 비유와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선분의 비유는 태양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전체 구도상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동굴의 비유 또한 동굴과 바깥세계, 어둠 속 횃불과 대낮의 대비 형식으로 내용상 비슷한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게다가 그 두 영역 모두 다시 각기 마치 명백성의 단계를 보여주듯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학자들은 그 모든 비유가 아래와 같이 대체로 비슷하게 전체적으로 4단계로 구분되어 있다고 여긴다.

* 좋음의 이데아는 <국가>는 물론 플라톤 철학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관건이 되는 핵심 주제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국가>에서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직접적인 전거는 위의 세 가지 비유들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 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세 비유 간의 상호 관계 특히 각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단계별 영역 간 유사성과 상응 관계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들이 전체 플라톤 철학과 관련하여 어떤 철학적 함축을 지닌 것인지를 오랫동안 탐문해왔다.(우리나라에서도 주요 해석가들의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러한 상응 관계를 자세하게 비교 분석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강성훈, 「플라톤의 『국가』에서 선분의 비유와 동굴 비유」, 『철학 사상』 V.27,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그러나 그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세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영역들이 과연 철학적으로 음미할 만한 정도의 유비적인 상응 관계를 지니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유사성에 기초한 그 상응 관계에 대한 연구들이 오히려 좋음의 이데아와 관련하여 플라톤이 각 비유를 통해 다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고유 의도를 간과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함께 제기되어 왔다. 어쨌거나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은 한 가지 비유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 세 비유의 영역별 단계별 유사성과 상응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 동굴의 비유까지 살핀 후 종합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세 비유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 비유 간 차별성과 고유성을 살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선 앞서 살핀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만 비교해 보아도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이 발견된다. 그 두 비유는 비록 구조상 동일하게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이라는 공통의 구분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게 두 영역을 구분하는 이유와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태양이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은 가지적인 영역의 인식론적 하위 단계가 아니라 가시적인 영역의 태양으로부터 가지적인 영역의 좋음의 이데아를 유비적으로 추론하기 위해 별도로 상정된 상호 등치적인 영역이다. 다시 말해 전체로는 네 부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영역별로 분리된 상태에서 동일하게 두 부분 즉 형상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로 구분된다. 그리고 논의 내용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태양이 빛을 비추는 대낮의 실물과 눈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좋음의 이데아가 진리와 실재를 비추는 이데아와 영혼에 집중되어 있다. 즉 형상 쪽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에서 가시적인 영역과 가지적인 영역은 유비관계를 갖는 등치적인 영역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위계가 있는 상하 관계를 갖는 비등치적 영역이다. 게다가 두 영역은 위계상 상하 단계로 갖고 있으면서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 단계까지 고르게 다루어지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사고’dianoia 단계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태양의 비유는 두 영역 간의 유비적 비유를 통해 기본적으로 좋음의 이데아의 근본 특성과 위상을 드러내려는데 기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선분의 비유는 그 좋음의 이데아가 속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뿐만 아니라 그 하위의 인식론적 단계들까지 자세하게 다루는 방식으로 오히려 하위의 인식 단계들 특히 추론적 사고가 인식의 방법에서 어떻게 형상적 앎과 관계를 지니면서 그 형상적 앎에로 상승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기본 목적이 있어 보인다.

* 선분의 비유에서 이러한 상승의 측면을 들여다보자면, 가시적 영역의 영상과 실물의 관계는 서로 ‘모상과 원본의 관계’를 가지면서 다시 또 그 실물들은 윗 단계인 가지적인 영역의 ‘사고’의 모상이 된다. 즉 ‘사고’는 영상의 원본인 실물들을 다시 모상들로 이용하여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인식한 후 다시 또 그것을 발판으로 형상에로 다가간다. 즉 각각 단계는 상호 위계 관계를 가지면서 종국적으로 이데아 즉 형상들이 있는 지성적 앎의 단계로 이어진다. 요컨대 가시적 영역과 가지적 영역은 진리를 향한 연속적인 상승의 과정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까 삼각형과 대각선을 기준으로 보면 ‘물에 비친 그림자’ 수준(영상eikasia 단계)에서 ‘실제 그려진 삼각형과 대각선’으로 상승하고(확신pistis 단계) 이것들은 사고에 의해 모상들로 이용되면서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로 상승한다.(사고dianoia)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증술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형상적 앎(지성적 앎noēsis)에 이른다. 선분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위계적 단계들과 그 단계들이 갖는 인식 방법상의 상승은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세계를 향해 올라가는 도정anodos의 단계들과 상응되면서 그 철학적 의미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제기되었다.(이와 관련한 논의는 나중 동굴의 비유에서 다룬다)

*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이 ‘확신’의 ‘모상’이 되고 다시 ‘확신’이 ‘사고’의 ‘모상’이 되고 그 ‘사고’를 토대로 마지막에 ‘지성적 앎’에 이르는 이러한 상승의 과정은 결국 최상의 인식 상태로서 ‘지성적 앎’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긴 하지만 뒤집어 보면 최하의 인식 상태로서 ‘상상’eikasia조차도 인식의 출발점에서 그 상승의 디딤돌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상상은 그 자체로 실물의 그림자로 감정에 치우치거나 정확성에서 낮은 상태의 인식을 의미하지만 무조건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인간에게 늘 상존하는 상태이고 특히 어린이 단계에서는 영혼의 구성에 가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일찌감치 시가(mousikē) 교육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3권에서 이미 어린 아이들의 감정적인 인식 상태를 부정하긴 커녕 오히려 그 상태에 합당한 방식에 따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경우 나중에 이성을 받아들이는 데 더 좋은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401b-403c) 선분의 비유에서 상상의 단계는 다만 정확성의 기준에서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강해에서 다시 다룬다.

* ‘도형’(510b)의 그리스 원어는 ‘형상’의 뜻도 가지고 있는 eidos이다. 그런데 형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eidos는 일상적 용례 그대로 기하학자들이 가정으로 놓고 들어가는 ‘눈에 보이는 그려진 도형들’(510d)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eidos는 형상과 구별하여 도형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510d-e를 보면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그것들은 도형이되 최소한 눈에 보이지 않는 도형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지성적 앎의 단계에서 성립하는 ‘자체적 존재’로서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사실 기하학자들이 기하학적인 지식을 구성하거나 설명할 때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일단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다. 이를테면 수학 교사나 기하학자들이 칠판에 도형들을 그리며 설명을 할 때 그들 모두는 칠판에 그려진 그림들을 바라보지만 정작 머릿속으로는 그 그림들 배후에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를 떠올리며 그 설명을 이해한다. 요컨대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기하학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그와 같은 도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기하학자들이 도형들을 그릴 때 염두에 두고 있는 도형들은 형상으로서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추론적 사고 단계에서 성립하는 삼각형 자체와 대각선 자체는 비록 눈에 보이는 도형은 아니지만 일단 머릿속 사유 공간 이른바 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에서 연장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장성은 이차원·삼차원 공간이 갖는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나 형상들이 있는 세계는 그러한 연장성조차 탈각해 있다. 즉 형상계는 관계맺음의 조건으로서 연장성이 성립하지 않는, 말 그대로 형상이 형상 자체로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추상적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삼각형 자체, 대각선 자체는 형상적 자체 존재로서 삼각형 또는 대각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기하학자들은 사고 단계에서 어쨌거나 유클리드 공간 속 연장성을 갖는 도형들을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앎에 이르고 그것을 토대로 결론을 내린다. 이를테면 기하학자들이 피타고라스의 정리(직각 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나머지 변 각각의 제곱의 합과 같다)를 증명할 때 도형들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정리가 공리임을 증명해내는 것과 같다. ‘두 원의 접점은 하나이다’,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두 점을 잇는 직선이다’ ,‘평행하는 두 선은 만나지 않는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등 이른바 기하학적 공리들도 모두 기하학자들에 의해 선과 도형과 각들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증명 가능하고 또 그렇게 증명된 공리들로부터 다른 수많은 기하학적인 결론들이 도출될 수 있다.   ‘결론teleutē을 향해 진행한다’(510b)는 말도 그러한 도출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때 기하학자들이나 계산술 또는 그러한 것들을 하는 사람들 모두,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수와 도형들 각(角) 같은 것들을 처음부터 존재하는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그 수와 도형들 각이 왜 그것으로 그렇게 있는지 그 각각의 내적 본성은 무엇인지는 묻지 않고 당연히 그것으로 그렇게 있다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학술을 진행한다. 플라톤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가정’hypothesis이란 이처럼 그러한 학자들이 학술을 수행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그것으로 있다고 받아들인 것 즉 ‘당연한 것으로 놓고 들어가는 것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정들은 바로 그처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가설’과 차이가 있다. 이른바 과학에서 말하는 가설은 ‘둘 이상의 변인들 간의 관계에 관한 일종의 추측 즉, 둘 이상의 변인 또는 현상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검증되지 않은 명제’로서 추후 검증할 수 있도록 기술된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응답’이다. 그러나 이곳 사고 단계에서 언급되는 가정들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당연히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들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하는 가정이나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가정 모두 스스로 진리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인식상 모종의 결핍을 공통으로 안고 있다. 사고 단계의 가정들은 최소한의 학적 지위를 보전하기위해 자체적인 존재로서 형상적 앎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고, 자연과학의 가설들 역시 사실들과 정합성을 보전할  때까지만 진리성을 보전할 뿐 본질적으로 개연성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자연과학은 개연성 너머 자체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고 단계의 전문 학술들이 근대 자연과학에 해당한다면 플라톤은 이미 자연과학적 진리가 왜 확률적이자 개연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궤뚫어 보고 있는 셈이다. 

* ‘사고’ 단계를 구성하는 학술들 즉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은 이와 같이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사용하여 추론을 통해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 결론들은 이성에 의한 변증술적인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로 향하는 발판이 되고 종국적으로 일정 단계에 이르면 지성을 통해 형상들에 대한 앎과 그 총체로서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에 이른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하학이나 계산술이나 그러한 것들’을 ‘기하학이나 그와 유사한 전문기술들technai’로 바꾸어 부르는데(511b) 플라톤은 이러한 학술들을 나중 변증술을 설명하는 단계에 가서 변증술의 획득을 위한 예비교과목(521c-531c)에 속하는 학술들로 구체화한다. 수학,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및 화성학 등이 그것이다. 이곳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 즉 당연한 조건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와 도형들의 본성과 존재론적 위상, 그에 따른 수학의 학적 위상 등에 대한 논의는 추후 예비교과목과 변증술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 플라톤은 이제 가지적 영역에서 기하학이나 계산술과 같이 가정을 사용하는 경우를 위와 같이 언급한 후에 가지적인 것의 다른 한쪽 부분 즉 가정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지성적 앎oēsis에 대해 언급한다.(511b-c) 플라톤은 그것을 ‘이성 자체’auos ho logos가 변증술적 대화의 능력을 통해 파악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즉 이성은 가정들을 ‘첫 원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정들로 삼아 그 가정들을 ‘무가정적인 것’, 즉 ‘모든 것의 첫 원리’에 이르기까지의 출발점이자 디딤 발판 같은 것으로 삼는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플라톤 자신 이 단계에서 첫 원리에 이르는 역할의 주체를 ‘이성’logos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logo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설명 또는 추론을 의미하는데 플라톤은 마지막 단계의 앎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그 이성이란 표현과 지성적 앎noēsis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지성적 앎이 종국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지성nous을 통해 완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분명 이성과 지성은 다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이곳에서 이성과 지성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추론적 사고에서부터 지성적 앎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자체가 연속적인데다가 그 과정 대부분을 기본적으로 이성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532a에서 ‘이성은 좋은 것 자체를 행해 출발하고 그것을 파악하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이성은 가지적 영역 전체에 걸쳐 변증법적 문답의 능력을 통해 가정들을 출발점이자 발판으로 삼아 끊임없이 지성적 앎에로의 상승을 견인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 게다가 이성은 ‘첫 원리를 파악하고 나면 다시 거꾸로 첫 원리에 근거를 둔 것들에 의존하면서 그런 식으로 다시 결론 쪽으로 내려간다.katabainē’(511c) 이 말은 기하학자가 지성을 통해 형상을 포착한 후 올라온 방식 그대로 재정립된 사고 단계로 내려갔을 때 그의 사고 과정에서 이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은 변증술적 대화(문답) 능력을 통해 첫 원리에로의 오름도 담보하지만, 그 첫 원리를 깨달은 후 다시 내려오는 과정에서 전문 학술들의 가정들의 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그것을 통해 내리는 결론들에도 전문 학술로서 최소한의 학문적 지위를 갖게 해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성은 감각적인 것은 일체 이용하지 않고 형상들 자체만을 사용해서 형상들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린다.(511b-c) 이 결론은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을 가지고 내리는 결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이다. 가정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사고는 오름 과정의 극치에서 지성nous을 통해 형상들에서 연원하는 존재 및 인식 근거를 제공받아 내림의 과정에서 형상에 의존하되 말로 할 수 있는 학적인 앎의 기초를 비로소 갖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지성적 앎 없이 사고 단계에서 가정들만을 토대로 다다르는 결론은 설사 연역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연역이 의존하는 상위 명제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학적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없지만, 그 모태가 되는 첫 원리에 대한 앎을 통해 가정들의 존재 및 인식 근거가 확보될 경우, 그것들을 통해 다시 재정립된 사고 내지 기하학을 비롯한 전문 학술들은 말과 논리로 성립하는 이론적 학문으로서 비로소 기초적인 학적 보편성과 객관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성적 앎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나중 그러한 지성적 앎을 획득하는 변증술(531c-535a)을 다루면서 보다 자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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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심각하게 되물어 보아야 할 의문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지금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와 같은 인식론적 위계가 조금 앞서 제5권에서 존재론에 기초해서 플라톤이 상당히 공력을 들여 피력하고 있는 앎과 믿음(의견)과 관련한 원칙적인 위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제5권에서는 앎epistēmē과 믿음(의견)doxa이 원천적으로 구분되면서 앎의 형상성이 배타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믿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가지적인 영역에 속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선분에 비유에 와서 플라톤은, 앎의 단계는 제5권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것과 원천적으로 구분되었던 하위 인식 단계에 모종의 단계 즉 ‘사고’dianoia라는 단계를 두어 그것까지도 가지적 영역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도대체 플라톤은 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히 상당 분량의 존재론적 논의를 토대로 그토록 강조해온 앎과 믿음(의견)의 원천적 차별성을 접어 둔 채 선분의 비유를 통해 앎의 단계에 미치지 못하는 단계까지 설정하여 그것을 가지적 영역의 범위에 포함토록 하는 것일까? 그것은 제5권에서 피력한 그 자신의 앎에 관한 근본 입장에 수정을 가하는 것일까 아님 추가적인 보완일까? 추가적인 보완이라면 그것을 통해 플라톤이 의도하고자 했던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전체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다음 강해에서 그에 관한 이러한 물음들에 필자 나름의 답을 제시하면서 선분의 비유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 –

 

다음 주제 :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선분의 비유(509c-513c) –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