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자본론 에세이1) [내가 읽는 『자본론』]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세 명의 대학생이 『자본론』을 읽기 위해 모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자본론』을 읽으며 더 선명해지고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본론』을 읽으며 읽은 내용이나 이들에게 남은 살아있는 얘기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남기려한다.
내가 자본론을 공부하는 이유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모든 일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나는 2008년에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교실 앞에 앉아 우리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셨고, 우리의 시험은 우리만의 동화를 써서 내는 거였다. 이렇듯, 맨날 숲에서 뛰어놀고, 흙 놀이를 하며 나무를 타다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첫 중간고사 광경은 나한테 신기한 경험이었다. 시험을 볼 때 우리는 가림판을 책상 가운데에 세워놔야 했고, 옆 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시험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시험은 아주 엄격한 일종의 경건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복도에서 쉬고 있는데, 그 당시에 제일 친하게 지냈던 지희가 내게로 왔다. 지희는 배실배실 웃으면서 “보경아, 우리 같이 63빌딩에서 뛰어내릴래?”하고 물어봤다. 깜짝 놀라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중간고사를 망해서 그렇다고 한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했던 그 친구의 말과 표정은 아직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겨우 12살이었다. 우리 사회에 뭔가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쉬는 시간에도 수학의 정석을 푸는 애들을 보면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같이 어엿한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독일의 친구들은 수영을 배우고, 숲으로 현장학습을 나가며 시 쓰는 법을 배우면서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한국의 나는 의자에 꼭 붙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순간 엄청난 공포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춘기의 불안함과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맞물리면서 친구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노트필기 하나 보여주지 않는 치사함, 등수와 내신 등급에 대한 사소한 거짓말들, 그리고 질투가 다분했다. 제일 친했던 친구는 나한테 “너 그렇게 살다가 좋은 대학 못가.”라는 말을 밥 먹듯 했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돈을 내고 방과 후 수업을 들어야했는데, 어떤 아이들은 ‘특별반’에서 심화 수업을 들었다. 창문 너머로 본 아이들은 지쳐있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섞이면 왠지 당당하고 반짝였다. 저렇게 똑똑해져만 가는 친구들을 언제 따라잡나 싶었다. 정말 내 인생은 망하게 될까? 전교 135등이라는 내 등수는 지지리도 나를 괴롭히고 우울 속으로 몰아넣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도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다. 어른들은 일하느라,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바빴다. 모두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듯했다. 외로웠다.
고등학교는 혁신학교에 다녔는데, 사실 학교가 나한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혁신학교가 내가 원했던 고등학교가 아니어서(나는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어 고등학교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중학교 졸업식 날 배정표를 받을 때 친구들과 함께 엉엉 울고 난리를 쳤다. 거짓말 안 하고 그 학교에 배정받은 모든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졸업식 때는 슬퍼서 울어야 하는데, 우리는 중학교 3년이 끝나는 걸 아쉬워할 겨를도 없이 걱정만 했다. 그 당시 설립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혁신학교는 날라리들이 많고 공부 못하는 애들만 가는 학교라서 거길 가면 인생이 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입학생들이 1년 내로 전학을 갔다. 하지만 첫 수업시간, 사회과목 선생님께서 박하사탕 한 봉지를 들고 오셨다. 사탕을 하나하나 까서 학생들 입에 넣어주셨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보자.’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나는 혁신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에는 종이 위에 찍히는 성적표 말고도 중요한 가치가 많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NGO 동아리에 들어가서 공정무역과 시민단체에 대해 배우며 따뜻한 가슴을 배우지 못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다른 모든 것들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예쁘다는 것도 배웠다. 학교에서 ‘날라리’라고 낙인찍어 소외시키는 애들은 그 누구보다 생각과 고민이 깊은 아이들이었다. 한 친구는 종이를 별모양으로 오리더니 “너는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적어서 나에게 줬다. 그 별은 아직도 내 일기장에 붙어있다. 공부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선생님들께서는 우리를 사랑해주셨고, 한 학생이라도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정말 많이 노력해 주셨다. 그 덕에 학생들도 나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생활하고 놀았다. 옆 학교가 소위 ‘좋은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이름만 현수막에 내걸 때, 우리 학교는 전교생의 이름이 적힌 거대한 무지개색깔 현수막을 달고 졸업식을 진행했다. 졸업식 때 하는 수상도, 전교생이 각자 하나의 상을 받을 수 있게끔 기획했다. 나는 ‘미스코리아상’을 받았다. 예뻐서가 아니라 세계를 평화롭게 하라고.
나의 학창시절이 이대로만 마무리되었다면 아마 『자본론』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4월 16일,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세월호가 침몰했으나 전원 구조됐다고 했다. 안심했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실이 아니었다. 주로 희생된 사람들은 동갑내기 또래들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가 제시하듯 그 어떤 구조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통신내용 조작도 이루어졌으며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부재했다. 이마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사건에 관심을 두고 분노하는 사람들을 좌파라고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슬펐을 뿐이고, 구조되지 못했던 게 아니라 구조되지 않았던 것이기에 분노했을 뿐이다. 가슴이 아픈 사람들이 좌파라면, 나는 기꺼이 한 명의 좌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내 삶과 모든 가치관을 540° 뒤집어 놓았다. 그 이후로 나는 삐딱해져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사건은 내 마음에 일종의 공포심과 조급함을 심었다. 이것 때문에 때로는 숨을 제대로 쉬는 것도 힘들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정부가 보인 모습들, 그리고 사회의 일부가 취한 행동들(일베의 어묵 먹기나, 폭식 투쟁, 어버이 연합의 시위와 같은)은 17살 머리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가다 한 무리가 작은 집회를 열고 있기에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나보다’하고는 가까이 가서 봤는데 어버이 연합이었다. 그 사람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유가족들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절 팔을 45도 위로 쭈욱 뻗더니(나치가 연상되었다), 함께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눈에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미어졌다. 자식이 있어 본 적 없는 나도 이렇게 아픈데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프지 않은 걸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나는 순진했다. 지금이야 그런 장면들을 마주칠 때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같은 데서 보면 푸르른 하늘과 녹음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성이 마녀의 저주에 의해 회색으로 변하고 식물들이 죽어 나가는 장면들이 있다. 나에게 세월호 사건은 그런 사건이었다. 삶이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건을 겪으니까 그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쌍용 자동차 부당해고 사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월세를 못 내, 그것도 자기 피붙이들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고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쟁 난민과 아파도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수치화되는 중요한 모든 무형의 것들, 교육을 둘러싼 허무한 정치적 싸움들, 사회가 손을 잡아주지 못한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정당화시키는 정치를 봤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대해 ‘왜?’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왜 우리의 삶은 이 모양인가?
어처구니없는 이 사회를 만들어낸 원인들은 여럿이 있겠지만, 초등학생 때부터 목격해 온 불행의 파편들에 대해 고민하면서 내가 어렴풋이 내린 커다란 결론은 ‘자본주의사회’였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이토록 고독해지고 치열한 삶을 사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교육의 문제, 노동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 복지와 권리의 문제, 심지어 인간의 외로움마저 모든 것은 결국 자본과 연결되었다. 화폐로 인해 우리 삶은 풍요롭고 간단해졌지만, 그것은 점점 거대해지면서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들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장밋빛 혁명을 꿈꾸기도 했다. 혁명은 쉬워보였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것처럼 수천 명의 학생을 모으고 서울 시내에 바리케이드를 세우자. 대학에 들어가면 운동권에 들어가서 자본주의와 불평등 교육의 뿌리를 뽑고 사람이 아프지 않은 사회를 만들자! 이렇게 다짐했다. 정말 쉬울 줄 알았다. 물론 그때 내가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거라곤 사실 ‘자본’ 그리고 ‘혁명’과 같은 키워드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마르크스를 사랑했고, 마르크스가 알고 보니 아주 추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스스로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했고, 대학에 다니면서 맑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허세 가득한 얼간이라는 걸 알고 실망하긴 했지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문제를 잘 파악하는 게 1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되고 『자본론』을 정말 읽기 시작했다. 『자본론』을 손에 잡은 것은 가슴이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한 발악이자, 이걸 읽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었다.
지금은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삶에 찌든 대학생일 뿐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대학에 왔지만 오히려 그 세상과 점점 괴리되는 아이러니도 겪는 중이다. 머리에 든 건 많아졌지만, 무기력도 그만큼 일상이 되었다. 배운 대로 살기란 쉽지 않다. 공부는 심지어 이가 알 낳듯, 마음에다가 얄궂은 오만을 낳는다. 게다가 무뎌진 탓에 ‘세상이 정말 그렇게 잘못됐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의 통증이 이젠 식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짜 사랑은 강렬했던 첫사랑 이후의 잔잔한 바다와 같은 사랑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도 그렇다. 마르크스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게 분석했던 자본, 그런 그의 사투에서 나는 여전히 작은 희망을 본다. 고민조차 하지 않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 사이에는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자본이 증식하는 속도나 방법들은 변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비집고 들어와 일상을 미묘하게 지배하고 있는 방식은 비슷하다. 그 연결고리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며 『자본론』을 읽기 시작했고, 이것들을 알아가면서 비록 내가 혁명은 일으키지 못할지언정 나의 삶과 내 주변은 바꿔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 뭉뚝하되 꾸준한 가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