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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하)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문학 속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과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출구』의 후반부에서 식수는 그리스 비극, 독일 근대 문학 작품 그리고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통해 이 작품들을 여성적 글쓰기와 연관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우선 아이스퀼로스의 그리스 비극 속에서 식수가 이 작품들의 인물들을 어떻게 새롭게 그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엥겔스는 『가족, 사회, 국가의 기원』에서 모권제 중심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그렸다. 이른바 모권의 세계사적 패배다. 이를 식수는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이야기를 통해서 입증 가능함을 보인다. 그러나 식수의 관점이 새로운 것은 그리스 신화, 비극 등에서 여성의 역할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이들의 긍정적인 역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진 5 : 코에포로이>│https://i.ytimg.com/vi/KJwputLOd8k/maxresdefault.jpg

 

식수는 그리스 비극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코에포로이』에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 등의 장면을, 클리템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인물을 통해 그린다. 서양 역사에서 부친 살해는 많이 주목되었지만, ‘모친 살해’는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오레스테스는 모친 살해로 결정적인 모권제 종식의 주요 인물이 되며, 식수는 이 사건을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장면으로 그린다.

트로이전쟁의 승리를 위해 남편 아가멤논이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여신들의 제물로 바치자 이에 분노한 클리템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그래서 클리템네스트라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인물로 부각된다. 클리템네스트라가 아버지를 살해한다는 계획을 미리 안 딸 엘렉트라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피신시킨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살해한 어머니를 복수하기 위해 살해한다.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이제 남성 중심적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모권제는 황혼을 맞이하게 되며 모권의 광채는 흩어진다. 오레스테스의 모친 살해로 옛날 모권제하에서 모계에 따라 이어지던 혈통의 방향을 바꾸는 피가 쏟아진다. 오레스테스는 가장 죄악인 행동 즉 ‘모친 살해’를 하였다. 이 모친 살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피와 말 사이의 투쟁에서 말(로고스, 남성 상징)과 의지로 하는 약속은 피(여성)의 끈보다 더 강하다고 아폴론은 주장한다. 이럼으로써 어머니에게 연결된 피의 끈은 느슨해지고 말에 연결된 끈은 팽팽해진다. 이후 육체와 정의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설립되어, 이성과 남성을 대변하는 말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식수는 모친을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전형적인 남성적 인물로만 그리진 않는다. 오레스테스는 남성적, 여성적이 아닌 중성적인 인물로 반은 능동적이며 반은 수동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들의 위대한 통치의 정지를 각인시키고 부권제로의 이행을 앞당긴, 그래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새긴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그리스 신화 속에서 유의해서 살펴봐야 할 인물들은 아가멤논도 아폴론도 오레스테스도 아닌 ‘여성들’이다. 식수는 클리템네스트라와 자매인 헬레네를 남성의 법의 지배를 받은 이 대지 위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위대한 여인으로 그린다. 그녀는 변질되지 않은 자, 얼굴 하나로 테세우스를 은퇴시킨 여자, 납치당하지만 영원히 승화된 여자, 매혹적인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는 세기를 통해 그 이름 속에 격리된 여자로 국한해 묘사되었다.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대조하여, 딸이 아버지에 대한 편향을 지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질투하는 여아의 복잡한 심리를 그린 상황을 말한다. 이런 엘렉트라를 식수는 이처럼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리지 않고, 이름 그대로 자석(electronic)처럼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역할로 그린다. 특히 엘렉트라의 혀를 강조하는데, 이는 여성의 무기인 수다를 혀로 상징하는 것이다. 모친 살해를 통해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의 새벽을 연 오레스테스의 혀에서 나온 말과 엘렉트라의 혀에서 나온 말은 다르다. 엘렉트라는 모권제의 쇠락함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엘렉트라는 여자 아닌-여자, 동시에 너무-여자, 모든 면에서 논리의 과잉으로 인한 미친 이성을 가진 여자이다. 즉 이성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뒤죽박죽의 존재가 된다. 오레스테스와 마찬가지로 엘렉트라도 모권제에서 부권제로 가는 이행기의 과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오레스테스인 남자 형제의 명령이 흐름-전기-엘렉트라성을 끊음으로써, 엘렉트라는 막대한 무기력으로 들어가고, 프로이트가 『모세와 유일신교』에서 언급했듯이, 이제 위대한 남자가 지닌 ‘정신성’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진보’와 ‘문명’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식수는 엘렉트라의 혀, 여성적 엘렉트라 등에서 엘렉트라의 역할만 어느 정도 부각하고 있을 뿐인데, 아쉬운 것은 클리템네스트라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지 못한 점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적 주인공의 역할, 즉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고 그 결과 자신의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여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역할인데, 이 역할에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적격이다. 그녀가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남성의 법칙의 세계를 어겼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지만, 그 벌을 받게 되는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모권제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 상황을 그려낸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진 6 : 펜테질리아>│https://media.s-bol.com/mZwrOqQppBp3/526×840.jpg

 

두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독일 근대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클라이스트(H. W. von Kleist, 1777~1811)가 쓴 『펜테질리아』이다. 이에 대한 식수의 해석 역시 통념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전쟁 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 의해 사망하고 이 때 아마존족의 여왕인 펜테질리아가 등장해 이 전쟁에 참여하여 그리스 측의 아킬레우스와 만나게 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연인 관계가 형성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식수가 이 이야기에서 핵심적으로 파악한 주제는 ‘사랑’이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에게서 태어난 연인은 모두 한결같다고 평가하면서 심지어는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다’라는 기묘하고 과감한 주장을 한다. 호메로스가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면, 클라이스트는 이 두 인물을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감있게 그린다. 그래서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펜테질리아로 파악한 것은 자연스럽다.

펜테질리아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면서 아킬레우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후, 그녀의 존재는 새롭게 열리게 된다. 통상적으로 트로이전쟁은 처음에는 전형적인 남성적 전쟁으로 그려지며 힘들의 충돌이 보인다. 그러나 아킬레우스가 여성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힘 대신에 평화가 중요해지는 국면에 들어선다. 식수는 클라이스트의 『펜테질리아』를 통해 아킬레우스를 다른 남자들과 다른 예외적 존재로, 사랑에 포획된 자로 해석한다. 펜테질리아는 아마존의 여왕으로 이 여성들이 취하는 행동 양식은 남성의 법, 전쟁과는 다르다. 펜테질리아는 여성적인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펜테질리아가 거둔 이 승리는 남성적 승리의 의미와 다르다. “남성은 파괴하기 위해 지배한다. 그러나 여성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지배한다. 여성은 지배공간을 파괴하기 위해 지배자를 지배한다.”(『출구』, 167-168쪽) 이 대목이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지배의 의미가 남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식수는 펜테질리아 속에서 광기를 본다. 광기 속에서 펜테질리아는 사랑의 끝을 향해 도약한다. 결국 클라이스트는 『펜테질리아』 작품 속에서 펜테질리아와 아킬레우스를 동일하게 보며, 심지어 클라이스트, 펜테질리아, 아킬레우스 다 동일한 인물로 보고 동일시하게 된다고 식수는 해석한다. 그래서 펜테질리아가 아킬레우스를 삼키고, 자기 체화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클라이스트 역시 펜테질리아가 되어 죽는다. 죽지 않고서는 펜테질리아가 될 수 없기에 그녀는 죽고 클라이스트도 역시 죽는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식수가 부각하고자 하는 것은 트로이전쟁의 힘의 논리 대신에 평화와 사랑이다.

 

세 번째로 식수가 그리는 이야기는 플루타르크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로마 시대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이다. 역사에는 실제로 사랑의 승리가 있었다. 지금까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안토니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명장군의 탁월한 자질과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지내다 생을 낭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식수는 안토니우스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영웅주의적 시각을 버려 그의 사랑꾼의 면모를 보여주며 제국의 시선을 버린 인물로 새롭게 그린다.

식수가 보기에 사랑이야말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사람의 공동 주제이자 존재 이유다.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한다. 통상 클레오파트라를 탁월한 미모를 지닌 인물로 그려 왔다. 그러나 식수는 클레오파트라를 미모보다는 대화술이 탁월한 존재로 평가한다. 그녀는 10개의 언어를 모두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욕망, 소비, 풍요의 인물로 그린다. 반면에 관대함의 영역에 있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 인물로 해석한다. 이런 부분이 식수의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기존 평가와 다른 부분이다. 대체로 안토니우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평가, 즉 용감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인 평가가 있는데, 식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수의 시각이 반드시 여성주의적 시각이라고만 볼 수 없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업적 위주의, 제국 위주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비하면, 안토니우스에 대한 다른 평가인 셈이다.

또한, 식수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통적인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새롭게 해석한다. 식수가 보기에 클레오파트라는 고고하고 자유로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자보다도 더 위대한 여자이다. 삶을 만들고 사랑하고 삶에 몰두하는 무한한 지성을 지닌 여성이자 예술이 된 여성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식수는 극적인 묘사와 평가를 한다. 이 마지막 죽음에서 두 사람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왕국들에서 멀리, 수많은 카이사르들에게서 멀리, 싸움판에서 멀리, 페니스와 검의 선망으로부터 멀리, 이 세상의 수많은 ‘재산’에서부터 멀리, 번드르르한 겉치레와 자존심에서부터 멀리 그들은 서로에게 조율된 채 아직도 살아 있다.”(『출구』, 199쪽) 이처럼 식수는 문학 속에 비추어진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완전히 새롭게 그렸고, 전형적인 남성들의 모습을 새롭게 해석했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방식에 따라 틀에 박힌 인물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진 7 :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https://m.media-amazon.com/images/I/6107cv4IdGL._SL1500_.jpg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가장 영감을 주고 영향을 준 현대 작가는 누구일까? 식수가 특별히 ‘여성적 글쓰기’라는 글이나 책을 쓴 적은 없지만,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식수가 쓴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1993년 출간)에는 그녀의 글쓰기의 성격이 암암리에 들어가 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칸』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사다리’와 ‘세 칸’이다. 사다리는 글쓰기를 은유하며, 가로로 연결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식수가 말하는 세 칸은 글쓰기를 배우고 익히는 세 종류의 학교, 즉 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이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작가들은 리스펙토르, 베른하르트, 츠베타예바, 바흐만, 카프카 등이다.

맨 처음 언급되는 망자(죽은 자)의 학교에서는 죽은 자들에 주목한다. 이들은 ‘내려가는 자들’, 가장 낮은 것들과 가장 깊은 것들을 찾아가는 탐험가이다. 망자의 학교는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한 죽음의 길로 들어설 필요성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식수가 보기에 글쓰기는 원초적인 그림,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그림을 복원하고 발굴하고 다시 찾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망자들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두 번째 꿈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꿈과 글쓰기 속에서 우리 몸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을 발견하기 위해 몸에서 몸으로 가는 여정에 착수해야 한다. 꿈의 학교에 가려면 침대부터 시작하여 무언가의 위치가 변해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이다. 앞에서 언급한 츠베타예바, 카프카, 리스펙토르, 주네, 바흐만은 모두 꿈꾸는 사람들이다. 또한, 식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은 깨어있는 의식의 영역에서 쓴 글과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낮 속에 숨겨진 밤을 글자 그대로 재발견해야 하는 일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러한 꿈의 학교는 『꿈의 해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방점과는 다르다. 프로이트에게는 꿈의 번득임이 더는 없다고 식수는 비판한다. 우리는 꿈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법을, 꿈을 파괴하는 모든 내적 외적 악마들을 불신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꿈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고 본다.

마지막 학교인 뿌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무엇일까? 식수가 말하는 뿌리는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근본, 계통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경계 건너기 혹은 경계 넘기이다. 즉 뿌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전통적인 방법과 다르게, 근본이 되는 정체성의 구획이 아닌, ‘경계 넘기’이다. 식수는 리스펙토르를 분석하면서 뿌리의 뿌리 없음을 폭로한다. 글쓰기의 사다리를 가로지르는 뿌리는 분리임과 동시에 통로이고, 단절임과 동시에 연속을 보여준다.

<사진 8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https://www.que-leer.com/wp-content/uploads/2020/12/claricelispector_fotoarquivodefamilia2_0.jpg

 

이 가운데에서 특히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작가는 브라질 현대 작가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Clarice Lispector, 1920-1977)이다. 리스펙토르는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는 작가인데, 그녀는 식수에 앞서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현실 속에서 여성의 갈등의 문제를 보여주었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시간』(1989)에서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으로 본다. 리스펙토르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거부하고 낯선 감각과 직관을 통해 글쓰기를 한 것을 식수는 기존의 언어를 해체하고 재탄생시킨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게다가 리스펙토르가 여성 억압을 해방하고자 하고 기존의 남성 중심주의적 언어체계를 뒤흔든다는 면에서 여성적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도했다고 식수는 보았다. 물론 리스펙토르가 페미니스트이거나 여성 이론에 기대어 작품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체험한 현실 속에서 문제화되지 않았던 여성의 내면세계 등을 난해하고 불가해한 글쓰기 방식으로 써 내려갔을 뿐이다. 1980년대 이후에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여성적 글쓰기가 일어났을 때, 특히 식수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로 받아들였으며, 그녀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았음을 여러 곳에서, 특히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식수의 페미니즘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유사 이래 남성 언어, 이성 언어만 있었던 근대시대까지, 남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고 주장해 왔다. 반대로 여성들은 남성의 언어를 빌어 몸에 맞지 않은 채, 자기 생각을 말하다가 말문이 막혀 침묵하거나, 사회의 뭇 남성, 명예 여성으로부터 비판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여성 언어를 찾고자 하는 시도, 여성적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시도는 페미니즘 3세대부터 본격적으로 있었다. 물론 현재 여성들이 여성의 언어를 완전히 찾아 자기 생각을 완벽하게 길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의 정체성을 다 담지 못하더라도 그러한 한계 상황에 봉착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상) “여성은 자기 육신을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난공불락의 언어를 창안해 내야 한다.”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3.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여성은 자기 육신을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난공불락의 언어를 창안해 내야 한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연세대)

 

<사진 1> : 엘렌 식수|https://www.thefamouspeople.com/profiles/images/hlne-cixous-1.png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 )는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제3세대 페미니즘을 이끈 여러 페미니스트들 가운데 신(新)프랑스 페미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헤겔, 프로이트, 라캉 등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라캉에게는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플라톤 이래 서양 전통 형이상학, 즉 남성 이성중심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고, 나아가 이를 전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이 썼던 주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 가운데 공통적으로 꼽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주제는 ‘여성적 글쓰기’(écriture féminine)가 될 것이다. 특히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의 선두로 평가될 수 있으며, 이 글에서도 이를 주목할 것이다.

<사진 2> : 『메두사의 웃음/출구』 한글본|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57495&srsltid=AfmBOopiOG8q9cPl24ee6udTp7GYMs0HWsNys-69QJHN5yqTUs-lfZC-

 

식수의 『메두사의 웃음』(1975)과 『출구』(1975)(『메두사의 웃음/출구』, 박혜영 옮김, 동문선, 2004, 이하 인용에서는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를 분리해서 쪽수 표기)는 그녀의 다양한 저작들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식수의 저작 목록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그녀는 특별히 철학자라고만 불리지 않고, 작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로 더 주목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저작 목록에는 적지 않은 소설들과 연극 대본들이 있다. 페미니스트로 평가받을 수 있는 대표적인 저작인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 등은 철학 저작이기보다는 에세이로 분류된다.

식수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자전적인 기록이 있다. 이는 『출구』의 앞부분의 ‘타자 살해’의 부분으로 식수가 태어난 배경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겪었던 성장 배경을 잘 적고 있는데 꽤 난해하다. ‘여성의 글쓰기에 다다름’ 바로 뒤에 이 부분을 식수가 배치해 놓았는데, 식수 자신이 왜 ‘여성적 글쓰기’에 다다르게 되었는지가 자신의 탄생 배경, 기원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식수의 국적은 프랑스이며 유대인으로 알제리의 옛 수도인 오랑에서 193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유대인이자 내과의사로 식수가 어렸을 때 죽었고, 어머니는 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남편이 죽은 후 산파(간호사)가 되었으며, 알제리에서 다른 프랑스 의사들이 마지막에 추방당했을 때 알제리를 빠져 나왔다. 식수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령인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다양한 인종 차별, 소수자 차별을 경험했다. 이때의 경험을 『출구』의 ‘타자 살해’에서 상세히 적고 있다. 그녀는 18세 이후에 결혼(10년 후 이혼)과 더불어 프랑스로 건너가서 영어 교수자격 시험을 보고 『율리시즈』를 쓴 제임스 조이스로 박사 논문을 쓰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식수의 연구 활동에서 철학 연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가늠이 안 되지만, 그 주 무대는 주로 문학, 창작의 영역이었고 발표한 글들도 소설, 비평, 에세이들이 많다.

식수는 어렸을 때 겪었던 다양한 차별들의 경험으로 활발한 현실 참여를 하였다. 특히 미셸 푸코와 1970년대 초반 GIP(Group d’information sur les prisons : 감옥정보그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의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를 읽어 보면, 곳곳에서 그 당시 겪었던 차별적 경험들이 새로운 글쓰기 문체로 바뀌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진 3> 메두사의 웃음 영어본│https://0701.static.prezi.com/preview/v2/ssgknompkvnhpnbnhboyng4ww76jc3sachvcdoaizecfr3dnitcq_3_0.png

 

『메두사의 웃음』과 『출구』에서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카락 가닥가닥이 뱀의 얼굴인 여성 괴물이다. 메두사는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남자들을 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가지며, 그만큼 남성들의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역사적으로 남성들은 자신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알 수 없는 신비의 대상을 늘 악마화해 왔는데, 중세시대에 똑똑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킨다든지, 잔 다르크를 마녀사냥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면에서 이 마녀사냥의 원조가 메두사인 여성 괴물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수가 메두사를 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탁월한 전략이다.

『메두사의 웃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글쓰기로 오게 만들어야 한다.”(『메두사의 웃음』, 9쪽) 이 문장에서 우리는 식수의 이 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왜 이 글을 쓰는가? 여성들 자신이 글을 쓰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다음 말이 더 극적이다. 여성적 글쓰기의 목표와 방법은 ‘여성들이 여성의 육체로부터 격리된 만큼이나 여성이 글쓰기에서 격리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식수의 여성들의 글쓰기의 특이점은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육체를 매개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해 식수는 과거, 옛것, 낡은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남성적인 옛것에서 벗어나 여성적인 새로운 것을 써야 함을 강조한다. 즉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에서 최소한 두 개의 얼굴과 두 가지 목표 즉 ‘파괴하기와 부숴 버리기’,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기와 투사하기’를 들고 있다. 스스로를 감추고 들여다보지 않았던 여성들을 향해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식수는 외친다.

전통적으로 글쓰기가 특권층의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왔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글쓰기는 여성에게 너무나 문턱이 높지만, 여성들이 글을 써야 함을, 멀리에서부터, ‘바깥’으로부터 돌아와야 함을 촉구한다. 역사적으로 여성 작가의 숫자는 지극히 미미했으며, 글쓰기는 지금까지 남성적인 경제에 의해 주도적으로 경영되어왔고, 여성의 억압이 재생산되는 장소였다. 그러한 글쓰기의 장소에서 여성은 이제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새롭게 가질 수 있으며, 전복적인 사상의 도약대가 될 수 있는 공간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씀으로써 새로운 반란적인 글쓰기를 창안해 낼 것이다. 그 변화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여성은 자신에 대해 글을 쓰면서 이제까지 몰수되었던 여성의 육체로 귀향하여, 육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가 이전의 남성들의 글쓰기와 전적으로 차이나는 점은 육체를 텍스트로 하는 글쓰기라는 점이다. 이성의 무기를 가진 남성의 글쓰기에 비해, 남성의 언어를 교란할 여성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여성의 언어는 자신의 육체에 기반하여 새로운 난공불락의 언어가 된다. 이러한 글쓰기의 행위가 이뤄짐으로써 여성에 의한 말의 장악이 나타나고, 여성 마음대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식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성 정체성 형성의 고전적인 양성성의 발달을 비판하면서, 남성의 결핍으로 남겨져 온 ‘검은 대륙’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비유를 거부한다. 식수는 여성이 거세되었다는 최악의 진실에 맞서 실제로 여성은 거세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메두사의 이미지를 가져온다. 그리스 신화에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된 “메두사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운 존재”(『메두사의 웃음』, 29쪽)로 더군다나 웃고 있다고 식수는 새롭게 그린다. 메두사의 웃음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남성들을 조롱하고 비웃는 그런 웃음이 아닐까? 여성은 거세, 혹은 머리 잘림을 두려워하는 남성들의 공포 앞에서 흔쾌히 그 공포를 비웃는다. 그래서 식수는 정신분석적인 울타리 속에 갇히지 말고 그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가로질러 가라고 강하게 제안한다. 이제 여성들은 길들여지지 않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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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웃음』이 분량이 짧고 간단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면, 『출구』(『출구』는 『새로 태어난 여성』에 수록)는 분량도 많고, 그 내용도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출구』는 엑소더스 즉 탈출을 의미한다. 어디로부터 탈출한다는 말인가? 지옥, 적들, 남성들 세계, 가부장 세계, 억압과 차별, 배제로 점철된 모순투성이의 현실로부터의 탈출이 아닐까 싶다. 『출구』는 억압된 현실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새로운 문인 셈이다. 헤겔 등의 철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스 비극, 문학 작품들과 근대 독일의 작가인 클라이스트 등의 문학 작품도 나온다. 『출구』의 전반부의 핵심 문제의식과 내용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남성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식수는 ‘여자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 속에는 남성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의 유구한 전통의 추적과 그 비판이 담겨 있다. 그 전통과 역사에는 어머니, 여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 여성은 존재하지 않음이 전제된다. 출발점에 전통적인 이분법 도식이 굳건하게 자리한다. “능동성/수동성, 아버지/어머니, 지적인 것/감정적인 것, 로고스/파토스, 남자/여자”(『출구』, 49쪽)처럼 사고는 항상 대립을 통해 움직였다. 계급화된, 이중적 대립, 우월한 것/열등한 것 등으로 말이다. 남성의 특권은 대립성으로 유지되며, 전통적으로 성적 차이의 문제는 능동성/수동성이라는 대립과 짝지워 다뤄지고 철학 속에서 항상 여성은 수동성 쪽으로 정리된다.

만일 이성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연대성, 남성들이 세우고 떠받치는 주춧돌이 산산히 부서진다면, 위대한 철학적 체계들, 전반적인 세계 질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이성 중심주의의 계획이 폭로된다면, 모든 역사는 달리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은 사고 가능하지 않은, 또 다른 사고가 온 사회의 기능을 변모시킬 것이라는 주장 속에 새로운 사고를 모색하고자 하는 식수의 의도가 명확히 보인다. 즉 여성에 의한 새로운 사유 혁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말이다.

남성, 이성 중심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심지어 타자를 살해해 온 적나라한 현실로 이어진다. 식수는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타자가 되고 경계인이 되는 경험을 겪었음을 토로한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식수는 ‘타자 살해’(『출구』, 64-68쪽)에서 자전적 기록을 적는다. 특히 프랑스 점령 국가인 알제리에서 원주민들이 받는 억압, 탄압 등을 얘기하고 있다. 그들이 겪는 폭력, 타자로서 대접받으면서 타자가 되어 가는 상황, 즉 타자는 다른 곳에 바깥에 존재한다고 식수는 말한다.

출신 자체가 타자의 경험을 안고 있고, 체제 재생산을 강요받지 않는, 어떤 탈출구로 식수는 글쓰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의 나라는 신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어떻게 왜 식수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식수는 힘과 권력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에서 심취했던 유년 시절의 헛된 꿈에서 벗어나 여성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억압과 남성의 성차별주의에 맞서 자신이 여성으로서 설 자리를 찾은 것이다. 식수는 타자와의 이런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가 ‘글쓰기’를 통해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여성의 욕망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공주에 얽힌 동화를 읽고 자랐다. 식수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화를 언급한다. 동화 속 잠자는 공주인 여성은 절대적으로 무력하므로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옛날 옛적의 동화들은 여자의 사랑과 운명에 대해 똑같이 기만적이고 잔인한 도식을 반복한다. 각각의 신화와 이야기에 늘 되풀이되는 것은 “우리 국가의 업무 안에 여성의 욕망을 위한 자리는 없다.”(『출구』, 58쪽)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욕망 성취를 위험한 것으로 취급해 왔다. 여자는 그림자, 남자의 빛을 위한 밤, 남자의 흰 빛을 위한 검은 빛이다. 남성의 체계, 그 공간에서 여자는 배제된 존재에 불과하다. 여성은 검은 대륙으로 취급받았고 여자들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으며, 자기의 집을 탐험하러 가지도 않았다. 여기서 식수는 여성에 은유된 검은 대륙이 검지도 않고, 탐험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항변하고 있다. 검은 대륙은 아직 탐험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식수가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식수는 프로이트의 거세 이론을 비판한다. 식수는 여성이 거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의 자기 고유의 제국은 하나의 두려움으로부터 출발하며, 그 두려움은 전형적인 남성적 분리의 두려움. 즉 거세 위협의 충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남성이 세운 자기 고유의 제국이 거세 위협의 충격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에 비해 여성들에게는 그 왕국을 벗어나서 출구로 나가면서 다시 돌아와야 함을 식수는 권고한다. “나가자. 여자들이 멀리서부터, 영원, 바깥, 황무지로부터 돌아온다. 여자들은 어린 시절로부터 돌아온다. 검은 대륙에 비유된 여성들은 아름답다”(『출구』, 68쪽)라고 식수는 주장한다.

프로이트가 설정한 여성적 상황의 ‘숙명성’은 사실 해부학적 ‘결함’의 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비도는 단 하나밖에 없으며, 리비도는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다. 성적 차이는 팔루스적 단계로부터 출발해 새겨진다. 소년, 소녀는 이 단계를 거치는데, 소녀는 일종의 작은 소년으로 취급된다. 두 성 모두에게 최초의 사랑의 대상은 어머니이며, 이성의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은 단지 소년에게 해당한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식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성적 차이는 단순히 해부학에 대한 판타즘(Phantasm)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해부학은 대부분 시각 행위에 근거할 뿐이며. 이는 관음증 환자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사람들은 질문한다. 그렇다고 이 질문이 여성의 욕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여자의 욕망을 위한 자리는 거의 없다. 여성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기본적인 인식도 없게 된다. 역사는 남성 중심주의만을 생산하고 기록했다. 식수가 보기에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이다. 남성 중심주의에서는 남자들도 불가피하게 손해를 본다. 물론 그 손해는 남녀, 다 심각하다. 그래서 식수는 이제 지금이야말로 변화시켜야 할 때이며, 또 다른 역사를 창안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세 번째, 여성적 글쓰기와 여성 주체성의 문제이다.

현존하는 남성적 언어 질서 즉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의 언어는 가능할까? 식수가 시도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일종의 여성적 상상계의 언어인가?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여성적 글쓰기를 통해 여성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서 여성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것인가?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가 여성 주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통로임을 보여 주려는 것인가?

식수는 “오늘날 글쓰기는 여성들의 것이다.”(『출구』, 98쪽)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여성적 글쓰기에는 ‘실천’이 중요하다. 그러나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단지 여성적 글쓰기를 여성적 글쓰기가 하는 ‘행위’ 안에서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실천은 결코 이론화되거나 제한되거나 코드화되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적 글쓰기는 ‘이론’이기도 하다. 여성적 글쓰기는 어느 정도 ‘이론적’이지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의 비이론적, 경험적 측면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권한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보다도 기존의 남성적 글쓰기와 차이가 나는 점은 ‘몸으로 글쓰기’라는 점이다. 이러한 몸으로 글쓰기의 전형을 식수는 어머니 됨에 있다고 본다. 어머니 됨은 자기-영속적이며, ‘남성적인’ 증여의 순환경제를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한다. 어머니 됨은 우리가 타자에게 ‘주는’ 증여/능력(gift)이다. 식수는 어머니 됨이 아마도 얻어질 수 있는 타자와의 가장 강렬하고 완전한 관계를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 내부의 경험, 타자를 위한 능력이라는 경험, 타자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되지 않는 변화이자 긍정적인 수용성이라는 경험을 갖는다.”(『출구』, 155쪽)라고 말한다. 물론 모든 여성이 다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충분한 공감을 얻기는 어렵다.

새로운 주체를 삶으로, 낯섦 속으로 내놓는 것을 사유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일이다. 이런 과정이 ‘낳는’ 글쓰기는 상징계의 엄격함과 영적 공허함으로부터 일보 물러설 수 있는 글쓰기이다. 즉 언어-이전에-오는 것’의 잔향을 듣기 위해 귀 기울이며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발화와 달리 글쓰기는 자신만의 시간에, 자신만의 말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비난하는 시선에 의해 제약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글 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또한 해방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해방은 ‘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몸을 재발견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

이제까지 여성은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여겨왔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식수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써야만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비-언어적’이고 ‘무의식적인, 본능적 충동들과 감각들에 귀 기울여야만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몸으로 글쓰기를 통해 여성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여성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식수는 몸의 언어로 침입해서 자신을 위해 언어를 전유하는 것, 언어를 소유하고 변형시키는 것이 ‘여성의 제스처’이자 ‘여성 주체성’이 확립되는 징표임을 시사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구태환 지음,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09.25)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논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2023)

 

서평: 김정철(숭실대 기독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구태환 선생님의 『논어』는 매우 친절하다. 『논어』가 ‘논어’인 까닭과, 공자와 공자의 제자 이야기, 공자의 사상이 오랜 시대에 걸쳐 고난에 시달리다가 현대에 이르러 다시 떠오르는 과정까지 놓치지 않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이런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전반부의 친절함을 넘어서면, 저자만의 『논어』 읽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가 그러하다. 일부 고전에 관한 해설은 현대의 독자인 우리와 중국 고대 춘추시대의 지식인 사이의 간극을 간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금도 마땅히 음미하여 되살려야 할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곧바로 해설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반부에서 현대의 독자와 고대의 성인 사이의 간극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논어』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으로 짚어낸 다음에야 저자는 비로소 『논어』의 구체적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라는 제목의 장절이 그러한 시대의 반전을 암시하고 있다. 더 이상 성인이나 일부 권력이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논어를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무렵 저자는 ‘주인’이라는 용어를 내세운다. 임시정부 이후 이 나라의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적 주체는 바로 ‘민’, ‘국민’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을 요청했던 공자의 발언이 현대에 빛을 발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봉건적인 성격을 거둬내고, 공자의 발언을 다시 살펴볼 때 고전은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저자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를 권한다.

그렇다고 현대사회가 군자, 성인들로 가득한 곳은 아니다. 우리는 군자일 수도 있고 소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자와 소인은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도 저자의 중요한 지적이다. 『논어』에 대해 “생존을 위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군자가 살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소한 이익 때문에 옳음을 외면하지 않는 삶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정의하는 이유다.

공자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 역시 『논어』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 배우기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學習) 제자와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며 어울리면서도,(交友) 때로는 엄하게 꾸짖는 인간적인 스승의 모습을 짧은 내용으로 응축해내고 있다. 평자의 첫 한문 선생님이었던 저자 역시 비슷한 면모를 지닌 듯하여 웃음이 났다. “공자가 제시하는 길은 대부분 일상적이고 평이하다. 진리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있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평은 공자가 누구보다 훌륭한 인간이자 스승이었기에 가능한 말이 아닐까.

공자와 유교를 대하는 태도가 마냥 긍정적이지만도 않은 점도 저자의 『논어』 읽기가 지닌 장점이다. 효와 예가 지닌 배타적인 측면과 묵자의 비판도 기꺼이 함께 논한다. 그리고 현대에 여전히 남아있는 배타적 가족주의를 비판한다. 이렇듯, 저자는 『논어』 속 공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점차 마무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같아짐(同)을 강제하지 않으면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하는(phil-harmony로 비유하기도 한다) 군자의 태도를 보면서 현대 민주주의의 일면을 발견한다.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하는(和而不同) 현대의 군자는 이제 더 이상 특정 계급이나 권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인으로서 『논어』 읽기의 핵심이자 고전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끝)


서평자 김정철: 한국고전번역원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일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남계 박세채의 『범학전편(範學全篇)』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조선시대 홍범(洪範) 관련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논저로 「박세채 『範學全篇』의 판본과 구성 고찰」 「낙저 이주천 「신증황극내편(新增皇極內篇)」의 특징과 가치」 「『홍범황극내편보해(洪範皇極內篇補解)』의 판본과 이순(李純)의 상수역학」 등이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강지은 지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서평: 함태원(한철연, 건국대)

 

이제 조금은 알려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가 없었는데도, 심지어 그 글이 한글로 번역된 글인데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는 단어를 다시 국어사전에 찾아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어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이 생각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생각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식하는 주관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을 ‘사물 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물 자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105쪽) 이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사물들을 우리가 그대로 알 수 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아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52쪽)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부터는 알 수 없으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인식의 두 원천을 감성과 지성이라 말한다. 먼저 감성은 “대상을 감각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수용력을 말한다. (92쪽)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직관이다. (97쪽) 그러나 아직 직관만으로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받아들인 직관이 무엇인지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하는 능력을 칸트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책상을 보고 느껴진 책상의 색에 대해서 ‘갈색’이라고 개념을 적용하는 능력이다. 이런 지성의 규칙이 바로 논리학이다. (107쪽)

그런데 이런 논리학은 대상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사고의 규칙만을 다룬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식 내용에는 논리학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 내용을 물을 수 있는 논리학으로 ‘초월적 논리학’을 제시한다. (109쪽) 이 초월적 논리학은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으로 나뉜다.

먼저 초월적 분석학에서는 선험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개념은 순수 지성 개념으로 범주라고도 부른다. (118쪽) 범주는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자 말하자면 모든 판단이 가지는 판단의 형식인 개념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직관에 개념을 적용할 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선험적인 개념이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무엇이 무엇이라고 필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칸트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런 범주는 어떻게 직관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칸트는 이 범주의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한다. 그것이 범주의 권리증명 즉, 연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역을 통해 이 범주는 현상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반면에 초월적 변증학에서는 어떻게 아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학에서는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추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초월적 가상이 있다. 칸트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름은 그냥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우리가 진짜로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즉,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물 자체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정은 지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 (2022, 저자: 이정은)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정은 교수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통치자는 누구인가? 군주이다. 그러니까 부제를 다시 설명하면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16세기에,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주장했고, 공화국을 주장한 사람은 헨리 8세 시대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이와 같은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는 1세기 후 필머와 로크로 이어진다.

다시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으로 돌아가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요소로는 행운(fortuna)에 의한 경우와 역량(virtú)에 의한 경우가 있습니다.”(115쪽, 강조는 필자) 타인의 무력은 외국군이나 용병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무력, 곧 자국 군대를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의 무력 이외에도 “타인의 호의”가 상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경우를 행운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당시 지배적이던 교황이 주던 권력 집단의 호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호의’, ‘동료 시민의 호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 체사레이고 체사레의 조카인 로렌초의 작은 아버지가 레오 10세 교황이었다. 곧 체사레와 로렌초는 행운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행운보다는 역량을 강조하는 것은 행운의 성질 때문이다. 곧 행운의 변덕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일개 시민이 군주가 되기 위한 2가지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역량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122쪽, 강조는 필자) 따라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군주국은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군주국이다.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시민형 군주국’이다. 그러니까 이정은 교수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교황의 지지라는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에 기초한 군주국이다.(12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의 좀 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주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명예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귀족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인민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인민의 목표가 귀족보다 더 명예롭기 때문인데, 가령 귀족은 그저 억압하려고만 드는데, 인민은 억압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124쪽, 강조는 필자) 이제, 다시 부제로 돌아가 보자.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부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이다.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이다.

정리하면,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군주국을 건설하려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전과 평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인민에게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인민의 호의가 없이는 군주의 통치는 가능하지 않다.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러한 군주와 인민의 상호관계를 다시금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성우 지음,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 (2021, 저자: 김성우)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김성우 교수의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권력의 기원을 찾다”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리 말하면 ‘저항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위임하고 신탁한 권력이 입법권이다. 신탁(trust)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탁자와 수탁자가 맺은 계약을 통해 성립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에서 신탁자는 누구일까? 신탁자는 국민이고 수탁자는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이다. 최고 권력자는 법에 의해서만 공적 인격(public person)을 부여받는다.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권(大權)을 쥔 통치자가 국민을 해롭게 하고, 공공선에 위반하는 일을 할 경우는 독재적 권력이다. 로크는 대권과 독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대권이란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법률의 지시가 없어도, 법의 직접적인 문구에 위반하면서까지도 몇몇 사안들과 관련해서 지배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것을 국민이 통치자에게 허락한 것이다.”(151쪽, 강조는 필자) “독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독재는 그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손아귀에 있는 권력을 유용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법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규칙으로 삼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자신의 여심, 복수, 탐욕 또는 다른 비정상적인 열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향한다.”(15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국민의 소유(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해 신탁자(국민)은 어떤 권리가 있을까? 로크는 부당하고 명백하게 불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력에만 무력으로 대항 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경우에 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과 인간에게 정당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155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조건 속에서 로크는 내부적 정부의 해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법부나 군주 중 어느 한쪽이 신탁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입법부는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려 할 때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부를 지배자로 내세우고자 할 때, 신탁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지배자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독재자가 된다.”(157 쪽, 강조는 필자)

요컨대 국민의 소유(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지 못하면 부당하고 불법적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해서만 저항권을 갖는다. 로크의 질문을 다시금 들어 보자. “정부의 목적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다음 중 어느 편이 인류에게 더 나은가? 국민이 독재자의 한계 없는 욕심에 노출되어 있는 쪽인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 재산을 파괴하는 독재자에게 때때로 저항하는 쪽인가?”(158-9쪽, 강조는 필자) 재판관은 누구인가? “통치자가 먼저 약속을 위반한 경우에는 통치권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며 국민은 최고 권력자로서 행동할 권리를 갖게 된다. 국민은 스스로 입법권을 계속 가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법권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159쪽,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 스스로 말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조배준 지음,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를 읽고

 

강건영(한철연 회원, 건국대)

 

조배준 선생님의 책은 베버가 전개하는 치밀한 논리를 충실하게 추적하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독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친절한 입문서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문학 고전들이 으레 그러하듯, 베버의 책 역시 ‘개신교의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는 단순한 요약으로만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피상적인 이해는 베버의 주장을 대단히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러한 명제는 그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인 것처럼 보이거나, 종교적 요인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전제로 삼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자본주의’, ‘정신’과 같이 베버가 사용하는 개념의 엄밀한 정의, 논리 전개의 독특성과 방법론상의 특징을 밝히며 이러한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임을 드러낸다.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재화교환, 가치측정, 이윤추구, 상호계약과 같은 경제활동을 포괄하는, 어느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베버의 연구대상은 17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전개되는 역사적인 ‘근대 자본주의’로 한정된다. 자유로운 재화의 교환이 가능한 시장, 복잡하고 전문적인 회계의 발달,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노동과 작업장 등 ‘(경제적) 합리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의 기원을 개신교 교리의 형성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베버의 진정한 논지인 것이다.

루터교의 ‘직업 소명’ 윤리와 칼뱅주의의 ‘예정설’을 계승한 청교도는 체계화된 노동을 통해 부를 추구하며 근검절약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과정에서 직업적 성취를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종교 의존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청교도들이 활약한 무대는 역설적으로 ‘세속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었다. ‘세속적 금욕주의’와 ‘직업 윤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생활양식인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통적 경제관계와 경제윤리를 밀어내고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초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베버의 분석은 서유럽의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적 형성이 갖는 특수한 성격을 종교적 윤리가 경제의 심급과 맺는 독특한 관계성 속에서 해석하고자 한 정교한 이론적 논의였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정에서는 필수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 거의 망각되었다. 베버 역시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초의 자본주의 정신이 이미 과거의 그것으로부터 대단히 멀어졌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저자는 베버가 제시하는 문제를 현재화하며, 베버의 논의를 통해 독자들이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색다른 이해, 현재에 대한 진단,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베버의 논의는 근대자본주의적 에토스의 형성이 어떻게 전통적 경제관계와 경제윤리를 극복하고 사회 전체를 합리화,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분석이지만, ‘경제적 에토스’분석의 방법론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제적 토대의 문제가 주체와 행위자의 문제에 맞닿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베버의 시대와 대단히 다른 원리로 경제적 행위자들의 에토스가 작동한다면, 그것에 대한 분석이 결국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내지는 ‘자본주의가 아닌 어떤 대안적 사회를 추구해야 하는가’와 같은 층위의 문제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평자 강건영: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재학, 사회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한상원 지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서평

 

이 현(한철연 회원, 건국대)

 

연대적인 자기 극복의 가능성

한상원 교수의 저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는 니체 사상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임과 동시에 니체를 넘어서는, 새롭고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한 또 하나의 철학서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으로 해석한 부분이다. 왜 저자는 하필 니체와 대립되는 철학자들 중 한 명인 칸트를 통해 니체에 접근한 것일까? 저자 역시 니체와 칸트 사이에 결코 만날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칸트를, 특히 규제적 이념을 해석의 틀로 가져온 이유는 내용적 측면이 아닌 구조적인 측면, ‘규제적 이념’이 지니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저자는 니체의 ‘영혼회귀’가 일종의 ‘규제적 이념’으로서 우리에 의해 ‘요청되는’ 사고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규제적 이념이라면, 니체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영혼회귀’라는 것이다. 칸트가 ‘인간이 자유로운 것처럼’,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위하라고 말했다면, 니체는 ‘마치 세계가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처럼’, ‘나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행동함으로써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최고의 삶이 되도록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접근으로 우리에게 니체의 문제의식을 좀 더 쉽게 전달한다. 칸트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했다면,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 고통의 몸부림이라면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니체의 답변은 바로 현존의 긍정, 자기 긍정이다. 이때 긍정은 무조건적인 자기애가 아니며, 보수적인 체념이나 순응도 아니다.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 즉 “건강한 자기 경멸”의 결과로 나타난다. 왜 나 자신을 경멸해야 하는가? 이는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때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은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진정한 자기 극복은 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건강한 자기 경멸을 통해 매 순간 자기의 모습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니체의 가르침은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니체를 경유하여 현시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우리는 미디어 속 타인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더욱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저자는 타율적인 자기 극복이 자기에 대한 혐오와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틀을 강요받는다. 우리는 건강한 자기 경멸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여겨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격한 멜랑콜리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니체를 넘어서는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려, 니체의 철학이 혁명적 사건의 철학이 되려면, 낙타처럼 땀 흘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사자의 함성을 내지르고 동시에 어린아이의 긍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들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적인 자기 극복을 넘어선 연대적인 자기 극복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평자 이현: 건국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크 라캉의 두 죽음 사이-주체 : 욕망과 충동의 윤리적 지평」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현재 말과활아카데미 [이현 라캉교실]에서 라캉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현대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대학·중용: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를 배우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대학·중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EBS 오늘을 읽는 클래식

 

인현정(한철연 회원)

 

‘도는 거시기다’

책을 읽다 보면, 국어사전을 일부러 찾게 되는 일이 있다. 아니, 한국 사람이, 아니, 배운 사람이 영어 사전도 아니고 왜 국어사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정말로, 호기심으로 네이버 사전을 즐겨 찾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책의 154쪽, 저자는 「중용」의 도를 설명하기 위해 <도(道)는 거시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책의 깨알 재미는 매 챕터 시작에 배치된 저자의 따뜻하고도 비근한 개인적 경험이라 자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바로 이 파격적 소제목의 문턱에서 코 찡끗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계백장군의 대사를 열거하며, 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까다로우면, 바로 ‘거시기’를 떠올리라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왜 나는 이것을 생각 못 했지? 필자 역시 수업에서 ‘도’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식적 설명은 늘 다음과 같았다: 1) ‘길’ 도, 2) ‘방법 수단’으로서 도 3) ‘말하다’의 도 4) ‘진리’, ‘보편적 이치’로서 도. 문헌의 전거를 따라, 그리고 네이버 사전의 친절한 문자 용례에 따라 이 4가지를 언급했었다. 그런데, 사실 저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도란 동양의 철학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해답이자 진리”였다.

이상의 4가지는 어찌 보면, ‘진짜 도’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가 사람이라면, 도는 우리에게 “나한테 그 4가지 없거든~”하고 놀릴 수도 있는 셈이다. 오히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시기’의 의미(/함의), 즉 ‘범위가 매우 넓어서 모든 사물에 적용되면서도, 모든 사물의 이치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이 ‘도’의 의미(/함의)에 다가가게 하는, 그러니까 겁내지 않고, 쫄지 않고, 성큼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최적의 입문 표현’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이참에 거시기의 정체를 잡고야 말 테다’ 결심한 필자는, p → q의 범주를 q → p로 확인해 보고자 국어사전을 찾았고, 여기에서 뜻밖의 미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거시기’의 뜻에는 필자가 원하는 의미가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opendict.korean.go.kr),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을 바로 말하기 거북할 때 쓴 군소리’, 이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거시기’는 분명한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바로 말하기 곤란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숨기려고도 사용한다. 심지어 얼른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가장 적합하기에 당당하게 쓰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이씹세기도 아닌 작금의 사전이, 현실 용례의 정직한 반영은커녕 이토록 의미를 협소하게 표현하고 있단 말인가. 아, 그래서 저자는 중용의 도는 가깝고도 멀다 강조하고 강조했던 것일까?

필자는 혹시 스스로가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하여 일부러 <황산벌>을 찾아 다시 봤다. 총관객 수가 27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국어사전을 만드는 거시기들이 270만 명의 의미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살지 않고서는, 어찌 거시기의 의미를 이토록 거시기하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거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필자는 84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지금 필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대학」의 가르침처럼, 탕왕이 그랫듯, 목욕통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겨두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거시기들을 거시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2024.07.15


서평자 인현정: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세종대와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하)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연효숙(여성과철학 분과)

페미니즘 역사에서 『제2의 성』이 미친 영향은 ‘서양철학사 다시 쓰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면에서 굉장하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을 논의할 때 구체적인 보편자인 ‘인간’을 거론하지만, 이 인간은 항상 ‘남성’으로서의 인간이었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성별 정체성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던진 도전적인 철학자를 보부아르로 봐도 좋을 것이다.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고전적인 문제제기인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상식이 된 생물학적 성과 문화, 사회적인 젠더 간의 구별은 이후 ‘성 정체성’(sexual identity) 논의에서 특히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사회 속 권력 관계 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위치지을 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과연 “여성은 누구인가?” 보부아르가 던진 질문과 논쟁 이후 이에 동의하든, 비판하든 간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름 대답하고 있다.

『젠더 트러블』(1989)로 페미니즘과 현대 철학계에 일약 스타로 등장한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er)는 이 책의 제1장인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의 서두에 다섯명의 사상가와 그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시몬느 드 보부아르) “엄밀히 말해 ‘여성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줄리아 크리스테바) “여성은 하나의 성을 갖지 않는다.”(뤼스 이리가레) “섹슈얼리티의 전개는 (….) 오늘의 성 관념을 만들어냈다.”(미셸 푸코) “성의 범주란, 이성애적 사회에 기초한 정치적 범주이다.”(모니크 위티그)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83쪽) 이는 여기서 맨 처음 순서로 등장하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이후 4명의 사상가들 그리고 버틀러에게 직,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에서 푸코를 제외하고 이들의 보부아르 관련 논의를 살펴 보자.

Wednesday 5th November 2004, Luce Irigaray, Belgian born (b.1930) philosopher, feminist, linguist and cultural theorist delivers a public lecture ‘Ethical Gestures Toward the Other’ at the University of Sussex, England, UK.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페미니즘에 남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의 범주에 대한 주목이다.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인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초기에 저술한 『반사경 :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1974)는 프로이트부터 시작하여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히 서양철학사를 역순으로 읽자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를 ‘반사경’처럼 뒤집어 읽고자 함이었다. 마치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인간, 남성에 대한 서양철학사를 ‘여성’을 초점으로 하여 다시 쓰고자 한 현대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리가레는 보부아르가 제기한 ‘여성’의 범주에 대한 문제를 좀 더 복잡하고 근본적인 논쟁으로 몰고 들어간다. 『하나이지 않은 성』(1977)에서 이리가레는 여성들의 성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 전통 형이상학,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가 굳건히 지켜진 이래, 남성 중심적인 언어 안에서는 여성들이 그러한 언어로 재현 불가능함을 이리가레는 주장한다. 즉 여성들은 언어의 부재나 불투명성을 대표하며 일의적인 남성 중심적인 언어에서 여성의 성은 규정 불가능하다. 이는 여성들이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기 때문이다.(『하나이지 않은 성』, 참조) 따라서 이리가레는 주체와 타자의 구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켰던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주체, 타자의 언어 역시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언어에 침윤되었으며, 보부아르는 암암리에 ‘본질의 형이상학’의 질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은 보부아르의 타자로서의 고정된 여성의 범주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니크 위티그(Monigque Wittig)는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이자 유몰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위티그는 급진적 레즈비언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보부아르의 성/젠더 구별을 전적으로 비판하였다. 위티그는 저서,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1992년 출간, 허윤 옮김, 행성B, 2020)에서 보부아르의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보부아르 당사자뿐 아니라 당대 페미니스트들을 동요시켰다. 보부아르의 그 말은 ‘여성’이란 원형이 있다는 걸 전제하며 그것은 결국 남/녀 이분법과 이성애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신의 섭리에 따른 구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위티그가 보부아르의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의식해 주장한 논문의 제목은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1981년 발표, 위의 책, 55-75쪽에 수록)이다. 성의 범주는 불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정치적인 제도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의미하며, 그 제도에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이유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 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으며, ‘섹스’의 범주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이고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5쪽) 이러한 위티그의 주장은 후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반복된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자연적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여성과 구분된 문화적 사회적인 젠더의 구별 이후 이를 페미니즘에 커다란 공적으로 당연시 여겼던 경향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인 셈이다. 또한 위티그는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우리가 유물론적 용어로 억압이라고 불렀던 것을 정의하고, 여성이 계급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 범주가 ‘남성’ 범주만큼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범주이며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7쪽)라고 하여, 유물론적 입장에서 여성 범주가 계급이자 원형없이 유동적임을 역설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이리가레, 시수 등과 함께 현대 프랑스 페미니즘 학계를 이끌고 있는 삼인방 중의 한사람이다. 문학 이론 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써 온 크리스테바가 페미니즘에 결정적으로 관여하여 기여한 책으로는 대표적으로 『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 책에서 충동의 이질성과 시적 언어의 다성적 가능성 사이의 필연적 인과 관계가 있음을 주목하였다.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가 억압할 수 없는 다성적 소리와 의미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언어적 사례로 보고 있다. 여기서 라캉의 언어관과 크리스테바의 언어관은 명확한 차이를 드러낸다. 라캉의 상징계가 모든 언어적 의미를 드러낸다면, 크리스테바의 언어는 상징계 이전의 ‘기호계’로 명명되어, 언어 속에서 작동될 수 있는 충동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맥락은 보부아르의 섹스/젠더 구분의 이분법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연관은 ‘몸’에 대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의 서양 철학사에서는 항상 영혼 만이 문제였지 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주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부아르는 비록 실존주의 주체, 타자의 철학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영혼 중심의 남성적 언어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한 셈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러한 보부아르의 의도를 간파하고 몸의 정치학과 기호계적 언어를 제시했는지는 명료하지 않다. 다만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상징계 중심의 인간 언어와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충동과 기호계를 찾았다는 면에서 보부아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징계 중심의 언어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찾을 수 있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즉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고 있다. “보부아르에게 젠더는 ‘구성된’ 것이지만 그의 공식에는 어떤 행위 주체(agent) 즉 어쨌든 젠더를 걸치거나 전유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는 다른 젠더도 걸칠 수 있는 코기토(cogito)가 암시되어 있다.”(『젠더 트러블』, 99쪽) 여기서 버틀러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별이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즉 여성이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적 강제 상황 아래서 있다면, 이 강제는 ‘섹스’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몸이 하나의 ‘상황’이라면, 언제나 이미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몸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고,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을 버틀러는 밝히고자 하였다. 버틀러에게는 섹스와 젠더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날 것인 해부학적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적 구별은 이제 해체되거나 무화되고 만다.

버틀러가 보기에 보부아르는 여성 혐오적인 실존주의 분석 안의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타자’를 구분한 후, 실존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주창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버틀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보부아르가 여성의 몸이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만, 보편적인 남성적 몸은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 않는 역설이다. 이에 따라 여자의 성은 몸에 국한되고, 완전히 부인된 남자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분명한 급진적 자유를 위한 육체적 도구가 된다. 이에 따라 “남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비체현의 보편성으로 노정되며, 또 여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부인된 육체성으로 구성되는가”(『젠더 트러블』, 106쪽)라는 질문이 노정된다. 보부아르는 여전히 정신/몸의 이분법을 주장하기 때문에, 정신은 남성성, 몸은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이 견지된다. 따라서 여자의 몸은 여전히 남성적 담론 안에서 표식되고 보편성으로서의 남성적 몸은 표식되지 않는 채 남아 있게 된다.

현대 페미니즘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여러 나라에서 ‘유목적 지식인’으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들뢰즈, 가타리의 유목주의, 그리고 현대 포스트휴먼 지식의 맥락과 연관된 페미니즘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에서 브라이도티는 보부아르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브라이도티 역시 보부아르의 섹스, 젠더의 구별 등에 관한 주제와 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1994)에서 보부아르가 여성이 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되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여성 운동의 주요 과제라고 보았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를 다뤘던 『유목적 주체』의 8장 ‘유목적 정치 기획으로서의 성차’에서 브라이도티는 특히 다양한 성차의 층위를 논의함으로써, ‘성차’에 대한 현대적 변신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보부아르 시대에 고전이 된, 인간 남성 일반에 대립되는 ‘대문자 여성’의 구성된 여성 주체를 어떻게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차이들’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의한다. 브라이도티는 각 여성들 내의 차이들, 심지어 자기 안의 복수성으로서의 여성들-되기의 변신을 자유롭게 제안하고 있다. 그만큼 브라이도티는 고전이 된 보부아르의 섹스/젠더의 이분법적 틀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체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제시한 섹스와 젠더의 구분으로 페미니즘 역사에서 핵심적인 논쟁점을 던진 대모 역할을 맡아 왔다. 그 후 페미니즘 역사에서 여성 문제를 둘러싼 시원에는 언제나 보부아르가 기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보부아르에 동의하든 신랄하게 비판하든 간에 논쟁의 시발점은 언제나 보부아르의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 이후 현대 페미니즘의 다채로운 갈래들의 기원에 보부아르의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 그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부아르는 ‘여성’ 범주를 최초로 문제시했다. 『제2의 성』의 제목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제1의 성이 남성이라면, 제2의 성이 여성이라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해 이리가레,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들이 각자 답을 내리고 있다. 둘째, 보부아르가 명시적으로 그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현대 페미니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인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제2의 성』의 유명한 명제가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위티그와 버틀러가 이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도전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셋째, 이러한 섹스/젠더의 구분은 결과적으로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이성 중심주의 서양철학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킨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그리고 버틀러 등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보부아르가 남긴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프랑스 엘리트 사회의 ‘명예 남성’으로 남았으며,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실천적인 각성과 거부, 저항, 투쟁의 강도는 강하게 남기지 못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상) (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