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강지은 지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내가 진짜 아는 것은 무엇인가』(2023)

 

서평: 함태원(한철연, 건국대)

 

이제 조금은 알려나?

 

『순수이성비판』을 처음 읽었을 때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문장에서 모르는 단어가 없었는데도, 심지어 그 글이 한글로 번역된 글인데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는 단어를 다시 국어사전에 찾아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어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이 생각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생각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인식하는 주관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과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을 ‘사물 자체(Ding an sich)’라고 불렀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물 자체를 온전히 알 수 없다. (105쪽) 이것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사물들을 우리가 그대로 알 수 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아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 세계에서 인간이 얼마나 알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52쪽)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이 어디까지 알 수 있고, 어디부터는 알 수 없으며,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칸트는 인식의 두 원천을 감성과 지성이라 말한다. 먼저 감성은 “대상을 감각하는 능력”으로 인간의 수용력을 말한다. (92쪽) 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인간은 대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직관이다. (97쪽) 그러나 아직 직관만으로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받아들인 직관이 무엇인지 사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고하는 능력을 칸트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책상을 보고 느껴진 책상의 색에 대해서 ‘갈색’이라고 개념을 적용하는 능력이다. 이런 지성의 규칙이 바로 논리학이다. (107쪽)

그런데 이런 논리학은 대상의 내용을 다루지 않고 사고의 규칙만을 다룬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식 내용에는 논리학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인식 내용을 물을 수 있는 논리학으로 ‘초월적 논리학’을 제시한다. (109쪽) 이 초월적 논리학은 초월적 분석학과 초월적 변증학으로 나뉜다.

먼저 초월적 분석학에서는 선험적으로 대상과 관계 맺는 개념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이 개념은 순수 지성 개념으로 범주라고도 부른다. (118쪽) 범주는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자 말하자면 모든 판단이 가지는 판단의 형식인 개념이다. 즉, 감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직관에 개념을 적용할 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하는 선험적인 개념이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무엇이 무엇이라고 필연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칸트는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런 범주는 어떻게 직관과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칸트는 이 범주의 적용할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한다. 그것이 범주의 권리증명 즉, 연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역을 통해 이 범주는 현상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반면에 초월적 변증학에서는 어떻게 아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증학에서는 모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추론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초월적 가상이 있다. 칸트는 이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름은 그냥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모르는 것은 아는 것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우리가 진짜로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 즉,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현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물 자체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서평자 함태원: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주된 관심사는 칸트의 실천철학 및 윤리형이상학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이정은 지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 (2022, 저자: 이정은)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정은 교수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통치자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통치자는 누구인가? 군주이다. 그러니까 부제를 다시 설명하면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이다. 16세기에,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주장했고, 공화국을 주장한 사람은 헨리 8세 시대의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이와 같은 군주국과 공화국에 대한 논의는 1세기 후 필머와 로크로 이어진다.

다시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으로 돌아가자. 마키아벨리는 군주국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토를 획득하는 방법에는 타인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와 자신의 무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요소로는 행운(fortuna)에 의한 경우와 역량(virtú)에 의한 경우가 있습니다.”(115쪽, 강조는 필자) 타인의 무력은 외국군이나 용병을 의미한다. 이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무력, 곧 자국 군대를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의 무력 이외에도 “타인의 호의”가 상황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그는 이와 같은 경우를 행운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 당시 지배적이던 교황이 주던 권력 집단의 호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호의’, ‘동료 시민의 호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아들이 체사레이고 체사레의 조카인 로렌초의 작은 아버지가 레오 10세 교황이었다. 곧 체사레와 로렌초는 행운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가 행운보다는 역량을 강조하는 것은 행운의 성질 때문이다. 곧 행운의 변덕 때문이다. 또한 마키아벨리는 일개 시민이 군주가 되기 위한 2가지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전적으로 사악한 수단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역량을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이라고 불러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권력을 잡을 수는 있어도,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122쪽, 강조는 필자) 따라서 그가 주장하고 싶은 군주국은 “동료 시민의 지지를 얻는” 군주국이다. 다시 말해 그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시민형 군주국’이다. 그러니까 이정은 교수가 말하듯이,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군주국은 교황의 지지라는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에 기초한 군주국이다.(12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의 좀 더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마키아벨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군주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명예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귀족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인민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인민의 목표가 귀족보다 더 명예롭기 때문인데, 가령 귀족은 그저 억압하려고만 드는데, 인민은 억압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124쪽, 강조는 필자) 이제, 다시 부제로 돌아가 보자. “군주는 어떻게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가”라는 부제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이다. 인민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남다른’ 행운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지지’라는 ‘일반적’ 행운이다.

정리하면,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군주국을 건설하려는 ‘역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안전과 평화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인민에게 평등과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인민의 호의가 없이는 군주의 통치는 가능하지 않다. 인민의 역량은 군주의 역량으로 인민을 이끌겠다는 인민의 결단이다. 이러한 군주와 인민의 상호관계를 다시금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고전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성우 지음,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 (2021, 저자: 김성우)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

 

박종성(건국대학교 초빙교수)

 

김성우 교수의 『로크의 정부론: 권력의 기원을 찾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제가 “권력의 기원을 찾다”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부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리 말하면 ‘저항권’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시민사회가 위임하고 신탁한 권력이 입법권이다. 신탁(trust)이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탁자와 수탁자가 맺은 계약을 통해 성립한다. 그렇다면 사회계약에서 신탁자는 누구일까? 신탁자는 국민이고 수탁자는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이다. 최고 권력자는 법에 의해서만 공적 인격(public person)을 부여받는다. 최고 권력자도 국민의 신탁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권(大權)을 쥔 통치자가 국민을 해롭게 하고, 공공선에 위반하는 일을 할 경우는 독재적 권력이다. 로크는 대권과 독재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대권이란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법률의 지시가 없어도, 법의 직접적인 문구에 위반하면서까지도 몇몇 사안들과 관련해서 지배자의 자유로운 선택을 할 것을 국민이 통치자에게 허락한 것이다.”(151쪽, 강조는 필자) “독재는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독재는 그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손아귀에 있는 권력을 유용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법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규칙으로 삼는다. 그렇게 되면 그의 명령과 행동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쪽이 아니라 자신의 여심, 복수, 탐욕 또는 다른 비정상적인 열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향한다.”(153쪽,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국민의 소유(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해 신탁자(국민)은 어떤 권리가 있을까? 로크는 부당하고 명백하게 불법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부당하고 불법적인 권력에만 무력으로 대항 할 수 있다. 이와 다른 경우에 대항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과 인간에게 정당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155쪽, 강조는 필자) 이러한 조건 속에서 로크는 내부적 정부의 해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법부나 군주 중 어느 한쪽이 신탁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입법부는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려 할 때나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일부를 지배자로 내세우고자 할 때, 신탁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이때 지배자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자의적으로 처리하는 독재자가 된다.”(157 쪽, 강조는 필자)

요컨대 국민의 소유(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지키지 못하면 부당하고 불법적 권력이다. 그리고 그 권력에 대해서만 저항권을 갖는다. 로크의 질문을 다시금 들어 보자. “정부의 목적은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다음 중 어느 편이 인류에게 더 나은가? 국민이 독재자의 한계 없는 욕심에 노출되어 있는 쪽인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 재산을 파괴하는 독재자에게 때때로 저항하는 쪽인가?”(158-9쪽, 강조는 필자) 재판관은 누구인가? “통치자가 먼저 약속을 위반한 경우에는 통치권이 다시 사회로 돌아가며 국민은 최고 권력자로서 행동할 권리를 갖게 된다. 국민은 스스로 입법권을 계속 가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 아니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법권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159쪽,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할 것인가? 그것도 우리 스스로 말이다.


서평자 박종성: 건국대학교 철학과에서 막스 슈티르너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고, 칼 맑스와 슈티르너 사상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 최근(2023)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하여 출간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조배준 지음,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무엇인가』를 읽고

 

강건영(한철연 회원, 건국대)

 

조배준 선생님의 책은 베버가 전개하는 치밀한 논리를 충실하게 추적하면서도, 독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독을 피해갈 수 있게 해주는 친절한 입문서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문학 고전들이 으레 그러하듯, 베버의 책 역시 ‘개신교의 종교적 윤리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는 단순한 요약으로만 잘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피상적인 이해는 베버의 주장을 대단히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러한 명제는 그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인 것처럼 보이거나, 종교적 요인을 자본주의의 필연적 전제로 삼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자본주의’, ‘정신’과 같이 베버가 사용하는 개념의 엄밀한 정의, 논리 전개의 독특성과 방법론상의 특징을 밝히며 이러한 이해가 대단히 피상적임을 드러낸다.

베버에게 자본주의는 재화교환, 가치측정, 이윤추구, 상호계약과 같은 경제활동을 포괄하는, 어느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베버의 연구대상은 17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전개되는 역사적인 ‘근대 자본주의’로 한정된다. 자유로운 재화의 교환이 가능한 시장, 복잡하고 전문적인 회계의 발달,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노동과 작업장 등 ‘(경제적) 합리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의 기원을 개신교 교리의 형성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베버의 진정한 논지인 것이다.

루터교의 ‘직업 소명’ 윤리와 칼뱅주의의 ‘예정설’을 계승한 청교도는 체계화된 노동을 통해 부를 추구하며 근검절약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과정에서 직업적 성취를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종교 의존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던 청교도들이 활약한 무대는 역설적으로 ‘세속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었다. ‘세속적 금욕주의’와 ‘직업 윤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생활양식인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통적 경제관계와 경제윤리를 밀어내고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는 초기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점에서 베버의 분석은 서유럽의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적 형성이 갖는 특수한 성격을 종교적 윤리가 경제의 심급과 맺는 독특한 관계성 속에서 해석하고자 한 정교한 이론적 논의였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정에서는 필수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 거의 망각되었다. 베버 역시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초의 자본주의 정신이 이미 과거의 그것으로부터 대단히 멀어졌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저자는 베버가 제시하는 문제를 현재화하며, 베버의 논의를 통해 독자들이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한 색다른 이해, 현재에 대한 진단,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베버의 논의는 근대자본주의적 에토스의 형성이 어떻게 전통적 경제관계와 경제윤리를 극복하고 사회 전체를 합리화,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분석이지만, ‘경제적 에토스’분석의 방법론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제적 토대의 문제가 주체와 행위자의 문제에 맞닿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베버의 시대와 대단히 다른 원리로 경제적 행위자들의 에토스가 작동한다면, 그것에 대한 분석이 결국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를 추구해야 하는가’ 내지는 ‘자본주의가 아닌 어떤 대안적 사회를 추구해야 하는가’와 같은 층위의 문제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평자 강건영: 건국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재학, 사회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한상원 지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2023)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서평

 

이 현(한철연 회원, 건국대)

 

연대적인 자기 극복의 가능성

한상원 교수의 저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는 니체 사상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임과 동시에 니체를 넘어서는, 새롭고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한 또 하나의 철학서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칸트적인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으로 해석한 부분이다. 왜 저자는 하필 니체와 대립되는 철학자들 중 한 명인 칸트를 통해 니체에 접근한 것일까? 저자 역시 니체와 칸트 사이에 결코 만날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칸트를, 특히 규제적 이념을 해석의 틀로 가져온 이유는 내용적 측면이 아닌 구조적인 측면, ‘규제적 이념’이 지니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저자는 니체의 ‘영혼회귀’가 일종의 ‘규제적 이념’으로서 우리에 의해 ‘요청되는’ 사고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규제적 이념이라면, 니체에게 있어서 ‘삶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영혼회귀’라는 것이다. 칸트가 ‘인간이 자유로운 것처럼’, ‘영혼이 불멸하는 것처럼’,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위하라고 말했다면, 니체는 ‘마치 세계가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처럼’, ‘나의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행동함으로써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최고의 삶이 되도록 만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접근으로 우리에게 니체의 문제의식을 좀 더 쉽게 전달한다. 칸트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했다면,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간의 삶이 고통의 몸부림이라면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는가? 니체의 답변은 바로 현존의 긍정, 자기 긍정이다. 이때 긍정은 무조건적인 자기애가 아니며, 보수적인 체념이나 순응도 아니다.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 즉 “건강한 자기 경멸”의 결과로 나타난다. 왜 나 자신을 경멸해야 하는가? 이는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때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은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완전한 소멸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진정한 자기 극복은 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건강한 자기 경멸을 통해 매 순간 자기의 모습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니체의 가르침은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니체를 경유하여 현시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우리는 미디어 속 타인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더욱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저자는 타율적인 자기 극복이 자기에 대한 혐오와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틀을 강요받는다. 우리는 건강한 자기 경멸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여겨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격한 멜랑콜리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우리가 니체를 넘어서는 니체의 독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을 빌려, 니체의 철학이 혁명적 사건의 철학이 되려면, 낙타처럼 땀 흘리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사자의 함성을 내지르고 동시에 어린아이의 긍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런 존재들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인적인 자기 극복을 넘어선 연대적인 자기 극복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평자 이현: 건국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크 라캉의 두 죽음 사이-주체 : 욕망과 충동의 윤리적 지평」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현재 말과활아카데미 [이현 라캉교실]에서 라캉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현대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대학·중용: 철학의 시대에서 정치를 배우다』(2022)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대학·중용』,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예호 지음, EBS 오늘을 읽는 클래식

 

인현정(한철연 회원)

 

‘도는 거시기다’

책을 읽다 보면, 국어사전을 일부러 찾게 되는 일이 있다. 아니, 한국 사람이, 아니, 배운 사람이 영어 사전도 아니고 왜 국어사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정말로, 호기심으로 네이버 사전을 즐겨 찾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책의 154쪽, 저자는 「중용」의 도를 설명하기 위해 <도(道)는 거시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책의 깨알 재미는 매 챕터 시작에 배치된 저자의 따뜻하고도 비근한 개인적 경험이라 자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바로 이 파격적 소제목의 문턱에서 코 찡끗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영화 <황산벌>에 등장하는 계백장군의 대사를 열거하며, 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까다로우면, 바로 ‘거시기’를 떠올리라 안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왜 나는 이것을 생각 못 했지? 필자 역시 수업에서 ‘도’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식적 설명은 늘 다음과 같았다: 1) ‘길’ 도, 2) ‘방법 수단’으로서 도 3) ‘말하다’의 도 4) ‘진리’, ‘보편적 이치’로서 도. 문헌의 전거를 따라, 그리고 네이버 사전의 친절한 문자 용례에 따라 이 4가지를 언급했었다. 그런데, 사실 저자가 설명하고 있듯이, “도란 동양의 철학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해답이자 진리”였다.

이상의 4가지는 어찌 보면, ‘진짜 도’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그릇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가 사람이라면, 도는 우리에게 “나한테 그 4가지 없거든~”하고 놀릴 수도 있는 셈이다. 오히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시기’의 의미(/함의), 즉 ‘범위가 매우 넓어서 모든 사물에 적용되면서도, 모든 사물의 이치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이 ‘도’의 의미(/함의)에 다가가게 하는, 그러니까 겁내지 않고, 쫄지 않고, 성큼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최적의 입문 표현’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이참에 거시기의 정체를 잡고야 말 테다’ 결심한 필자는, p → q의 범주를 q → p로 확인해 보고자 국어사전을 찾았고, 여기에서 뜻밖의 미궁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거시기’의 뜻에는 필자가 원하는 의미가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opendict.korean.go.kr),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하려는 말을 바로 말하기 거북할 때 쓴 군소리’, 이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거시기’는 분명한 어떤 사물을 가리킬 때도 사용한다. 바로 말하기 곤란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숨기려고도 사용한다. 심지어 얼른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가장 적합하기에 당당하게 쓰기도 한다! 그런데 어찌 이씹세기도 아닌 작금의 사전이, 현실 용례의 정직한 반영은커녕 이토록 의미를 협소하게 표현하고 있단 말인가. 아, 그래서 저자는 중용의 도는 가깝고도 멀다 강조하고 강조했던 것일까?

필자는 혹시 스스로가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우려하여 일부러 <황산벌>을 찾아 다시 봤다. 총관객 수가 27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국어사전을 만드는 거시기들이 270만 명의 의미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살지 않고서는, 어찌 거시기의 의미를 이토록 거시기하게 만들었는지, 도저히 거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필자는 84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지금 필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대학」의 가르침처럼, 탕왕이 그랫듯, 목욕통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겨두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당장 거시기들을 거시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날로 새롭게 하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2024.07.15


서평자 인현정: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세종대와 이화여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하)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기원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 영향사

 

연효숙(여성과철학 분과)

페미니즘 역사에서 『제2의 성』이 미친 영향은 ‘서양철학사 다시 쓰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면에서 굉장하다. 서양 철학사에서 인간을 논의할 때 구체적인 보편자인 ‘인간’을 거론하지만, 이 인간은 항상 ‘남성’으로서의 인간이었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성별 정체성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본격적으로 던진 도전적인 철학자를 보부아르로 봐도 좋을 것이다. 즉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고전적인 문제제기인 성(sex)과 젠더(gender)의 구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상식이 된 생물학적 성과 문화, 사회적인 젠더 간의 구별은 이후 ‘성 정체성’(sexual identity) 논의에서 특히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사회 속 권력 관계 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위치지을 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과연 “여성은 누구인가?” 보부아르가 던진 질문과 논쟁 이후 이에 동의하든, 비판하든 간에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나름 대답하고 있다.

『젠더 트러블』(1989)로 페미니즘과 현대 철학계에 일약 스타로 등장한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er)는 이 책의 제1장인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의 서두에 다섯명의 사상가와 그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시몬느 드 보부아르) “엄밀히 말해 ‘여성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줄리아 크리스테바) “여성은 하나의 성을 갖지 않는다.”(뤼스 이리가레) “섹슈얼리티의 전개는 (….) 오늘의 성 관념을 만들어냈다.”(미셸 푸코) “성의 범주란, 이성애적 사회에 기초한 정치적 범주이다.”(모니크 위티그)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83쪽) 이는 여기서 맨 처음 순서로 등장하는 보부아르의 명제가 이후 4명의 사상가들 그리고 버틀러에게 직,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 가운데에서 푸코를 제외하고 이들의 보부아르 관련 논의를 살펴 보자.

Wednesday 5th November 2004, Luce Irigaray, Belgian born (b.1930) philosopher, feminist, linguist and cultural theorist delivers a public lecture ‘Ethical Gestures Toward the Other’ at the University of Sussex, England, UK.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페미니즘에 남긴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여성’의 범주에 대한 주목이다. 벨기에 태생의 철학자, 페미니스트, 정신분석학자인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초기에 저술한 『반사경 : 타자인 여성에 대하여』(1974)는 프로이트부터 시작하여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히 서양철학사를 역순으로 읽자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를 ‘반사경’처럼 뒤집어 읽고자 함이었다. 마치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인간, 남성에 대한 서양철학사를 ‘여성’을 초점으로 하여 다시 쓰고자 한 현대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리가레는 보부아르가 제기한 ‘여성’의 범주에 대한 문제를 좀 더 복잡하고 근본적인 논쟁으로 몰고 들어간다. 『하나이지 않은 성』(1977)에서 이리가레는 여성들의 성이 ‘하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 전통 형이상학,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가 굳건히 지켜진 이래, 남성 중심적인 언어 안에서는 여성들이 그러한 언어로 재현 불가능함을 이리가레는 주장한다. 즉 여성들은 언어의 부재나 불투명성을 대표하며 일의적인 남성 중심적인 언어에서 여성의 성은 규정 불가능하다. 이는 여성들이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기 때문이다.(『하나이지 않은 성』, 참조) 따라서 이리가레는 주체와 타자의 구조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켰던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적 주체, 타자의 언어 역시 남근 로고스 중심주의 언어에 침윤되었으며, 보부아르는 암암리에 ‘본질의 형이상학’의 질서 속에서 남성과 여성을 대입시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은 보부아르의 타자로서의 고정된 여성의 범주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니크 위티그(Monigque Wittig)는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이자 유몰론적 페미니스트이다. 위티그는 급진적 레즈비언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보부아르의 성/젠더 구별을 전적으로 비판하였다. 위티그는 저서,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1992년 출간, 허윤 옮김, 행성B, 2020)에서 보부아르의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보부아르 당사자뿐 아니라 당대 페미니스트들을 동요시켰다. 보부아르의 그 말은 ‘여성’이란 원형이 있다는 걸 전제하며 그것은 결국 남/녀 이분법과 이성애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는 비판이다. 위티그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신의 섭리에 따른 구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위티그가 보부아르의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의식해 주장한 논문의 제목은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1981년 발표, 위의 책, 55-75쪽에 수록)이다. 성의 범주는 불변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정치적인 제도는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의미하며, 그 제도에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눌 이유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 간에는 아무 차이가 없으며, ‘섹스’의 범주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이고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5쪽) 이러한 위티그의 주장은 후에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거의 같은 취지로 반복된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자연적 생물학적 성으로서의 여성과 구분된 문화적 사회적인 젠더의 구별 이후 이를 페미니즘에 커다란 공적으로 당연시 여겼던 경향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인 셈이다. 또한 위티그는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는… 우리가 유물론적 용어로 억압이라고 불렀던 것을 정의하고, 여성이 계급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 범주가 ‘남성’ 범주만큼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범주이며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67쪽)라고 하여, 유물론적 입장에서 여성 범주가 계급이자 원형없이 유동적임을 역설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페미니즘 철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이리가레, 시수 등과 함께 현대 프랑스 페미니즘 학계를 이끌고 있는 삼인방 중의 한사람이다. 문학 이론 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써 온 크리스테바가 페미니즘에 결정적으로 관여하여 기여한 책으로는 대표적으로 『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이 책에서 충동의 이질성과 시적 언어의 다성적 가능성 사이의 필연적 인과 관계가 있음을 주목하였다.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가 억압할 수 없는 다성적 소리와 의미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언어적 사례로 보고 있다. 여기서 라캉의 언어관과 크리스테바의 언어관은 명확한 차이를 드러낸다. 라캉의 상징계가 모든 언어적 의미를 드러낸다면, 크리스테바의 언어는 상징계 이전의 ‘기호계’로 명명되어, 언어 속에서 작동될 수 있는 충동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맥락은 보부아르의 섹스/젠더 구분의 이분법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연관은 ‘몸’에 대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성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의 서양 철학사에서는 항상 영혼 만이 문제였지 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주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부아르는 비록 실존주의 주체, 타자의 철학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영혼 중심의 남성적 언어 담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한 셈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이러한 보부아르의 의도를 간파하고 몸의 정치학과 기호계적 언어를 제시했는지는 명료하지 않다. 다만 크리스테바가 라캉의 상징계 중심의 인간 언어와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충동과 기호계를 찾았다는 면에서 보부아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상징계 중심의 언어관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찾을 수 있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보부아르의 유명한 주장, 즉 섹스와 젠더의 구별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고 있다. “보부아르에게 젠더는 ‘구성된’ 것이지만 그의 공식에는 어떤 행위 주체(agent) 즉 어쨌든 젠더를 걸치거나 전유할 수 있고 원칙적으로는 다른 젠더도 걸칠 수 있는 코기토(cogito)가 암시되어 있다.”(『젠더 트러블』, 99쪽) 여기서 버틀러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별이 유효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한다. 즉 여성이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적 강제 상황 아래서 있다면, 이 강제는 ‘섹스’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몸이 하나의 ‘상황’이라면, 언제나 이미 문화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몸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고,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을 버틀러는 밝히고자 하였다. 버틀러에게는 섹스와 젠더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생물학적으로 날 것인 해부학적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섹스와 젠더의 이분법적 구별은 이제 해체되거나 무화되고 만다.

버틀러가 보기에 보부아르는 여성 혐오적인 실존주의 분석 안의 남성적 ‘주체’와 여성적 ‘타자’를 구분한 후, 실존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권리를 주창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 버틀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보부아르가 여성의 몸이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만, 보편적인 남성적 몸은 남성적 담론 안에 나타나지 않는 역설이다. 이에 따라 여자의 성은 몸에 국한되고, 완전히 부인된 남자의 몸은 역설적이게도 분명한 급진적 자유를 위한 육체적 도구가 된다. 이에 따라 “남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비체현의 보편성으로 노정되며, 또 여성성은 어떤 부정과 부인의 행위를 통해 부인된 육체성으로 구성되는가”(『젠더 트러블』, 106쪽)라는 질문이 노정된다. 보부아르는 여전히 정신/몸의 이분법을 주장하기 때문에, 정신은 남성성, 몸은 여성성이라는 이분법이 견지된다. 따라서 여자의 몸은 여전히 남성적 담론 안에서 표식되고 보편성으로서의 남성적 몸은 표식되지 않는 채 남아 있게 된다.

현대 페미니즘에서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고 이탈리아 출신으로 여러 나라에서 ‘유목적 지식인’으로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는 들뢰즈, 가타리의 유목주의, 그리고 현대 포스트휴먼 지식의 맥락과 연관된 페미니즘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에서 브라이도티는 보부아르에 대해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브라이도티 역시 보부아르의 섹스, 젠더의 구별 등에 관한 주제와 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1994)에서 보부아르가 여성이 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재현되어야 한다고 하며, 이것이 여성 운동의 주요 과제라고 보았다.

우리 시대 페미니즘에서 체현과 성차의 문제를 다뤘던 『유목적 주체』의 8장 ‘유목적 정치 기획으로서의 성차’에서 브라이도티는 특히 다양한 성차의 층위를 논의함으로써, ‘성차’에 대한 현대적 변신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보부아르 시대에 고전이 된, 인간 남성 일반에 대립되는 ‘대문자 여성’의 구성된 여성 주체를 어떻게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차이들’로 보여 주어야만 하는지를 치열하게 논의한다. 브라이도티는 각 여성들 내의 차이들, 심지어 자기 안의 복수성으로서의 여성들-되기의 변신을 자유롭게 제안하고 있다. 그만큼 브라이도티는 고전이 된 보부아르의 섹스/젠더의 이분법적 틀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를 체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제시한 섹스와 젠더의 구분으로 페미니즘 역사에서 핵심적인 논쟁점을 던진 대모 역할을 맡아 왔다. 그 후 페미니즘 역사에서 여성 문제를 둘러싼 시원에는 언제나 보부아르가 기원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보부아르에 동의하든 신랄하게 비판하든 간에 논쟁의 시발점은 언제나 보부아르의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부아르 이후 현대 페미니즘의 다채로운 갈래들의 기원에 보부아르의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의 영향력에 대한 평가, 그에 대한 현재적 의미를 어떻게 매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부아르는 ‘여성’ 범주를 최초로 문제시했다. 『제2의 성』의 제목이 가르치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제1의 성이 남성이라면, 제2의 성이 여성이라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해 이리가레,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 페미니스트들이 각자 답을 내리고 있다. 둘째, 보부아르가 명시적으로 그 용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현대 페미니즘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인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제2의 성』의 유명한 명제가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위티그와 버틀러가 이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도전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셋째, 이러한 섹스/젠더의 구분은 결과적으로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이성 중심주의 서양철학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몸, 특히 여성의 몸에 대한 철학적 논쟁을 일으킨 셈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리가레, 크리스테바 그리고 버틀러 등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보부아르가 남긴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프랑스 엘리트 사회의 ‘명예 남성’으로 남았으며, 제2의 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실천적인 각성과 거부, 저항, 투쟁의 강도는 강하게 남기지 못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상) (하) 끝.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상) –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

시몬느 드 보부아르, 『2의 성』()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출처: https://pictures.abebooks.com/inventory/md/md21869913397.jpg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시중에 유통되는 이 문장은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 봄 직한 말이다. 이 문장의 출전이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Gallimard, 1949)이며, 이 책의 필자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성』을 완독한 사람을 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엄청난 분량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보부아르의 어마어마한 식견에 대해 감탄하다가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성』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성 권리의 옹호』만큼이나 고전주의 반열에 들어갈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페미니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력과 논쟁을 불러 왔다는 점이 이 책의 중요성이자 미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보부아르 역시 이 책 만큼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킨 20세기의 유명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여성주의자), 참여 지식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당사자 등 보부아르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넘쳐난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부아르를 특징짓는 점은 보부아르가 활약한 활동 영역의 다양함과 함께 보부아르를 유명세로 이끌었던 『제2의 성』이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차이의 페미니즘으로의 길을 개척해 준 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이다.

출처: https://frenchintellectuals.files.wordpress.com/2017/12/simone-de-beauvoir-interview.png?w=944&h=631&crop=1

『제2의 성』이 출간된 해는 1949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완성되었다. 알다시피 두 개의 큰 세계 전쟁을 겪은 인류에게 남은 것은 전쟁의 폐허와 상처, 죽음, 불안, 공포뿐이었다. 특히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자국 땅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세계 대전의 상흔으로부터 비켜 갈 수 없었다.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서구의 근대 문명 특히 인간 중심주의적 기조가 자가당착으로 도달하게 된, 두 개의 전쟁 후에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성, 과학, 확신이 아니라, 죽음, 운명, 실존 등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에 대해 보부아르 자신이 어떤 자각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쓸 때 보부아르는 ‘인간’에 대한 근대의 보편적 물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실존주의적 물음을 던졌다. 물론 이때 보부아르는 아직 페미니스트도 아니었고 페미니즘 운동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즉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보부아르가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여성’에 대한 그의 연구가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 역사에서 이 책과 저자가 차지하는 위상과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 보부아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대 페미니즘의 많은 논쟁점을 살펴본다면, 그 한가운데 보부아르의 이 책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가? 또 보부아르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제2의 성』은 제1권, 사실과 신화, 제2권, 체험, 이렇게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 여성을 둘러싼 이론적인 배경, 논쟁 등을 다뤘다면, 제2권에서는 여성의 성장 과정과 여성이 놓인 상황 등을 다루면서 여성 해방에 대한 대안을 결론으로 맺고 있다.

이 책 제1권 ‘사실과 신화’의 서론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이 여자에 관해 책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주저해 왔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이어서 남자가 ‘주체’이고 절대적이며, 여자는 ‘타자’라고 하여 남성과 여성 관계를 실존주의적 범주로 규정하여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제1부인 ‘운명’에서는 여성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세가지 관점을 분석한다. 첫째, 생물학적 조건에서 볼 때, “여자? 아주 간단하지”라고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고, 난소이며 암컷이다. 여자를 규정하기에 이 말이면 충분해”(『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47쪽, 이하 인용에서는 쪽수만 표기)라고 말한 이 부분은 동물, 유기체, 인류(인간)에 대한 암수 구별의 생물학적 설명을 통한 여성의 규정이다. 그러나 “생물학은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인 여자가 왜 타자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주기에 부족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여자의 자연적 본질이 어떻게 파악됐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인류가 여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78쪽)라고 생물학을 비판한다.

둘째, 보부아르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빌어 “정신분석학이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지대한 발전은 어떤 요소도 인간적 의미를 띠지 않고서는 정신적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신체-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신체이다. 여자는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여자다. ….. 생물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핵 같은 기관이 체험적 상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여자는 자연을 자기의 감성에서 다시 파악해 자신을 규정해 나간다.”(79쪽) 그러나 보부아르는 “프로이트는 여자의 운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운명에 대해 먼저 기술하였고 거기서 몇 가지 특징만 수정한 채 그대로 여자의 운명을 기술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섹슈얼리티가 남자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80쪽)라고 신랄하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셋째, 보부아르는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에서 가부장제의 등장으로 여성의 역사적인 패배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의의와 한계를 논의한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밝힌 것은 남성 노동 중심으로의 변환, 일부일처제의 등장이다.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비판은, 공유재산(공산주의)에서 사유제로의 이행의 설명에 대한 근거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여자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103쪽)에서 보듯이 엥겔스의 견해는 경제적 일원론에 머물고 만다는 점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에 대해 보부아르는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 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103쪽)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바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전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제2부 ‘역사’에서 남녀의 기나긴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한다. 우선 유목 사회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자의 종속을 선사학과 민속학 등의 자료를 통해 검토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철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다룬 것에 견줘 보면 여성 억압의 역사를 더 일찍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농경사회로 진입한 후 1949년까지 서구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지배, 억압했는지 그 반복 강화의 역사를 검토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을 억압한 역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점하고 있는 경제적 특권, 그들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위세, 남자의 지원 유용성 등 모든 것이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에 들기를 열렬히 원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여전히 전체적으로 종속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인식하고 선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묘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남자를 위한 여자의 존재 방식은 여자의 구체적 조건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0쪽)라고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제 보부아르는 제3부에서는 여성 신화를 고찰한다. 보부아르가 여성 신화를 고찰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기 우월의 정당화를 위해 여성들에게 투사한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모든 신화는 자기의 희망과 두려움을 초월적인 하늘을 향해 투사시키는 주체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계획이 반영될 남성 신화를 창조하지 못했다.”(226쪽)에서 보듯이, 여성들이 신화를 창조하지 못한 이유를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주체와 타자로 놓고 여성이 여전히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다만 여성들을 주제로 한 신화는 이브 신화, 생명과 수태 신화, 처녀성 신화, 동정녀 마리아 신화, 어머니 신화, 착한 아내 신화, 뮤즈 신과 같은 여성적 신비의 신화 등이다. 여기서 문제는 여성을 여성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하고, 여성의 신비화를 통해 여성 타자의 모습이 구현됨을 보이는 것이다. “단지 여자는 비본질의 양태로 모든 것이다. 즉 여자는 완전히 타자다. 그리고 타자로서 여자는 그녀 자신 외의 다른 것이고, 여자에게서 기대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298쪽) 결국 여자는 영속적인 빗나감, 실존의 빗나감 자체에 머물고 말 뿐이다.

이어서 보봐르는 여성 신화의 이상과 같은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작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신화의 개별적이고 혼합적인 모습을 몇몇 유명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작가들은 여성 폄하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런 여성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보부아르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주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끝으로 여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는 완전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제2권의 ‘체험’의 제1부 ‘형성’의 제1장의 유년기의 첫머리에 보부아르의 『제2의 성』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389쪽) 이 명제는 현대 페미니즘에서 성(sex)과 젠더(gender) 간의 구분에 대한 원초적인 출전에 해당한다. 이 명제만큼 논쟁을 많이 불러 일으킨 명제도 없을 것이다. 보부아르 후대의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한 번 이상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을 정도이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여성의 유년기부터, 사춘기를 거쳐 사춘기 이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성에 입문하는 과정, 동성애 등을 다룬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성생활의 형성 과정을 보부아르는 실존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일관되게 재해석한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논거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제2부의 여성의 ‘상황’에서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 사교 생활, 매춘부와 첩, 성숙기에서 노년기를 그린다. 특히 결혼에 대해 비판적인 보부아르의 견해를 청취할 필요가 있다. 결혼이 ‘자주적인 두 사람 간에 자유롭게 합의한 하나의 결합’이라고 정의되지만, 결혼에서 두 배우자는 동등하게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경제 주권을 부분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여성의 수동적 지위는 결혼을 통해 더 강화된다. 결혼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 제도적인 결함에 기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히 여성에게 경제적 조건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남성들의 각성 등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이슈는 보부아르의 ‘모성애’에 대한 입장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출산은 여성에게 ‘기쁨’과 ‘존재의 정당화’를 가져다 주는, 여성에게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그 견해 속에 들어있는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출산한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 역시 복잡하고 양가의 감정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3부 ‘정당화’에서는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경우들,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신비주의 여성에 대해 논의한다. 여성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는 자기 숭배, 자기 사랑을 통해 자유를 확신하고자 하는 거짓 도피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성이 사랑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평소에 길들여진 수동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사랑의 태도에서 남자와의 상호적 관계를 견지하기 보다는 그 사랑에 스스로 예속되어 간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자기 도피와 포기가 아닌, 강건함과 자기 확립을 위해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흔히 여성들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현실을 피하고 자기의 실존을 최고의 인격으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전체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태도는 여성에게 주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며, 자유의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이제 『제2의 성』의 최종 결론으로 가보자.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제4부 해방을 향해’에서 이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또 『제2의 성』을 제일 유명하게 만들었던 명제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처럼,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여성의 열등성이 선천적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세워야 할 것은 그녀의 ‘상황’이지 신비스러운 ‘본질’이 아니다.”(965쪽)라고 말하며,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여자가 마침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라는 것”(967쪽)임을 여성 해방을 위해 강조하고 있다. 보부아르는 맨 마지막 ‘결론’의 실천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여자와 남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법, 제도, 풍습, 여론, 그리고 모든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980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제시한 대안, 결론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임을 주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지배의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와 남자가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988쪽)라고 말하며 이 책의 대단원을 맺는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통해 보부아르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 차이를 넘어서 우애를 확립하자는 주장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기보다는 우애로 상징되는 ‘평등’의 가치를 획득하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 간에 존재하는 ‘차이 속에서의 평등’을 강조했을까? 아니면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을까? 비록 보부아르가 섹스, 젠더 간의 구별과 차이를 통해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을지라도 보부아르 자신은 차이보다는 평등과 우애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맺음말에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다소 맥이 빠지고 싱겁다.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인 관계, 그리고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확립하자고 하는 보부아르의 결론에서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두꺼운 분량을 할애해 쓴 보부아르의 역작은 결국 여자와 남자의 우애를 위한 것일까?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에게 우리가 너무 지나친 기대를 걸 수는 없겠고, 이후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논쟁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 편에서 계속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김주일 지음,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 –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EBS 오늘 읽는 클래식]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2022)

 

진보성(한철연 회원)

 

정의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이게 나라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그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된 말이다. 지금은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상반된 의도를 담은 정치 공세의 구호로 쓰이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라(폴리스)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바탕이며 그 목적이기도 하다. “시민의 삶을 살거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살며, 공적인 삶과 관련해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동물”(18쪽)이 인간답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지칭하는 ‘나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의로운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일의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2022)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 국가와 시민의 관계, 사회와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서두에도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플라톤 『국가』의 원제는 ‘Politeia’로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뜻이 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윤리관이 담긴 『국가』는 플라톤의 유토피아인 ‘정의가 살아 있는 이상적인 국가’의 조건을 제시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또 어떻게 타락해 변해갈 수 있는지를 다중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플라톤의 스승이자 불의한 죽음을 맞았던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여 여러 사람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주제로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에서는 총 10권 분량의 『국가』 서설에 해당하는 1권의 대화 내용을 주로 다룬다.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파하며 정의의 실체를 논하는 내용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나누어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한 트라쉬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시종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를 묻”고 논박한다.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不正義)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100쪽)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지금 부정의한 통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지금 우리의 통치자들은 어떤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100~101쪽) 이런 모습이 통치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피치자는 위정자의 모순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감히 부정의를 저지르지 못하고 비난하며, 정의를 지키는 시늉을 한다. 치자와 피치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속셈을 가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가 이 모순을 견디며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101~102쪽) “우리 사회가 겪었던 최악의 통치 권력 중 하나였던 제5공화국이 내세웠던 국정지표가 ‘정의사회구현’이었던 것을 보면”(102쪽), 정의라는 이름 아래 모순의 사회가 유지된 역사는 가까운 과거사에서도 목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정의로운 자의 타율적 결핍은 심해지는 데 반해 부정의한 자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두고 부정의한 자의 ‘능력’이란 말로 칭송될 때 2,500년 전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현실화한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에 이르는 길』 후반부에는 플라톤이 주장한 정의로운 이상적인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 철학자가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종합적 견해를 다룬다. 사회 구성원 중 사적 소유를 허용하지 않는 수호자 계층을 지목하여 그들이 함양할 덕목과 함께 교육의 중요성, 제도권 안에서 공적인 삶의 태도 등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자들이 통치하는 철인정치의 가능성을 다채롭게 짚으며 정치체제뿐 아니라 이에 관계하는 인간의 영혼 및 이데아 개념, 문학 등도 거론하는 대목은 플라톤의 『국가』를 다시 읽어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 『국가』를 읽는 것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찾는 지적 여정의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정의에 이르는 길, 즉 정의로운 나라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연장으로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연재하는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의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㉚”의 한 대목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로운 나라란 부정의가 생겨나기 이전에 이른바 자연적 정의 상태가 존재하는 최초의 나라 같은 나라가 아니라 부정의가 함께 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통제하고 이겨내면서 정의를 보전해내는 그러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장차 플라톤이 구축하려는 나라가 바로 이러한 나라이다.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최초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러운 나라를 최대한 정화하여 최대한 정의를 보전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나라라 할 것이다.”1


서평자 진보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전임대우강의교수, (사)한철연 연구협력위원,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박은미 지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삶이 불쾌한가』(2021)

 

유현상(한철연 회원)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를 읽고

 

철학자들의 언어는 어렵다. 그들이 사용하는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누구나 아는 말로 표현해도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일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선택하는 과정은 철학자들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다.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고 인정받았던 하이데거조차도 자신의 사유를 표현할 언어의 한계를 느껴 한동안 집필을 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곤혹감의 표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 철학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읽는 것만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마음이 가지 않는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박은미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 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쇼펜하우어와 그의 대표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소개하기가 쉽지 않은 텍스트 임에도 핵심적인 이해를돕기에는 적절한 설명을 담고 있다. 핵심어인 ‘표상’ 개념에 대해서는 언어 분석적 접근을 통해, 그리고 ‘의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물자체’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쇼펜하우어의 세계 인식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세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인데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의 세계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덧붙여서 ‘의지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세계가 바로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세계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이보다 더 간명하게 소개하기란 쉽지 않다. 의지가 객관세계의 존재근거라면 표상은 인식 주관의 인식 내용의 근거라고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삶이 불쾌한가』는 세계 인식의 양상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단지 세계 인식에 관한 문제의식만을 담고 있지 않음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의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나의 밖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인식의 중요성, 즉 의지에 근거한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대상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고통스러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세계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적 관점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역동적 세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논리는 어쩌면 일종의 ‘죽어 있는 사고의 형식’일 수 있다. 헤겔은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자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 역시 법칙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심리학은 세계 못지않은 역동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지적 도전이다. 그 도전이 인간의 구체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진전을 이루어 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다양한 시도 역시 규칙성과 논리로 인간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는 점에서 생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구명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나타난 반합리주의 철학이 이성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철학의 주류적 흐름에 생(生)을 역동적인 모습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유 지평을 연 철학임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서평자 유현상: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