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상)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효숙(여성과철학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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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시중에 유통되는 이 문장은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해 무지하거나 적대적인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 봄 직한 말이다. 이 문장의 출전이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Gallimard, 1949)이며, 이 책의 필자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성』을 완독한 사람을 손에 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엄청난 분량 때문이고, 이 책에서 언급된 보부아르의 어마어마한 식견에 대해 감탄하다가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제2의 성』은 페미니즘 역사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여성 권리의 옹호』만큼이나 고전주의 반열에 들어갈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페미니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력과 논쟁을 불러 왔다는 점이 이 책의 중요성이자 미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보부아르 역시 이 책 만큼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킨 20세기의 유명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소설가, 극작가,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여성주의자), 참여 지식인 그리고 사르트르의 계약 결혼 당사자 등 보부아르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넘쳐난다. 이 가운데에서도 보부아르를 특징짓는 점은 보부아르가 활약한 활동 영역의 다양함과 함께 보부아르를 유명세로 이끌었던 『제2의 성』이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차이의 페미니즘으로의 길을 개척해 준 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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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이 출간된 해는 1949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완성되었다. 알다시피 두 개의 큰 세계 전쟁을 겪은 인류에게 남은 것은 전쟁의 폐허와 상처, 죽음, 불안, 공포뿐이었다. 특히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자국 땅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세계 대전의 상흔으로부터 비켜 갈 수 없었다. 이러한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다. 서구의 근대 문명 특히 인간 중심주의적 기조가 자가당착으로 도달하게 된, 두 개의 전쟁 후에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성, 과학, 확신이 아니라, 죽음, 운명, 실존 등 인간과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에 대해 보부아르 자신이 어떤 자각을 가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책을 쓸 때 보부아르는 ‘인간’에 대한 근대의 보편적 물음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실존주의적 물음을 던졌다. 물론 이때 보부아르는 아직 페미니스트도 아니었고 페미니즘 운동사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즉 “나에게 여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보부아르가 묻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여성’에 대한 그의 연구가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 역사에서 이 책과 저자가 차지하는 위상과 위치는 어느 정도인가? 보부아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현대 페미니즘의 많은 논쟁점을 살펴본다면, 그 한가운데 보부아르의 이 책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인가? 또 보부아르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제2의 성』은 제1권, 사실과 신화, 제2권, 체험, 이렇게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 여성을 둘러싼 이론적인 배경, 논쟁 등을 다뤘다면, 제2권에서는 여성의 성장 과정과 여성이 놓인 상황 등을 다루면서 여성 해방에 대한 대안을 결론으로 맺고 있다.
이 책 제1권 ‘사실과 신화’의 서론에서 보부아르는 자신이 여자에 관해 책을 쓰는 것을 오랫동안 주저해 왔다는 심경을 토로한다. 이어서 남자가 ‘주체’이고 절대적이며, 여자는 ‘타자’라고 하여 남성과 여성 관계를 실존주의적 범주로 규정하여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제1부인 ‘운명’에서는 여성의 운명을 결정지어 온 세가지 관점을 분석한다. 첫째, 생물학적 조건에서 볼 때, “여자? 아주 간단하지”라고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한다. “여자란 자궁이고, 난소이며 암컷이다. 여자를 규정하기에 이 말이면 충분해”(『제2의 성』, 이정순 옮김, 을유문화사, 47쪽, 이하 인용에서는 쪽수만 표기)라고 말한 이 부분은 동물, 유기체, 인류(인간)에 대한 암수 구별의 생물학적 설명을 통한 여성의 규정이다. 그러나 “생물학은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인 여자가 왜 타자이냐는 질문에 답변을 주기에 부족하다. 역사의 흐름에서 여자의 자연적 본질이 어떻게 파악됐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인류가 여자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78쪽)라고 생물학을 비판한다.
둘째, 보부아르는 정신분석학의 관점을 빌어 “정신분석학이 정신생리학의 영역에서 이룩한 지대한 발전은 어떤 요소도 인간적 의미를 띠지 않고서는 정신적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신체-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체험한 신체이다. 여자는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것에 따라서 여자다. ….. 생물학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음핵 같은 기관이 체험적 상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를 규정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여자는 자연을 자기의 감성에서 다시 파악해 자신을 규정해 나간다.”(79쪽) 그러나 보부아르는 “프로이트는 여자의 운명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운명에 대해 먼저 기술하였고 거기서 몇 가지 특징만 수정한 채 그대로 여자의 운명을 기술했던 것이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섹슈얼리티가 남자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독립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80쪽)라고 신랄하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셋째, 보부아르는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에서 가부장제의 등장으로 여성의 역사적인 패배를 언급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의의와 한계를 논의한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밝힌 것은 남성 노동 중심으로의 변환, 일부일처제의 등장이다. 이에 대한 보부아르의 비판은, 공유재산(공산주의)에서 사유제로의 이행의 설명에 대한 근거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다소 복잡한 우회로를 통해 여자의 경제적 상황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103쪽)에서 보듯이 엥겔스의 견해는 경제적 일원론에 머물고 만다는 점이다.
위의 세 가지 견해에 대해 보부아르는 “우리는 인간이 몸, 성생활 기술을 인간 존재의 총체적 전망에서 파악할 때만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할 것이다. 근력, 음경, 도구의 가치는 가치의 세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가치는 실존자가 존재를 향해 자기를 초월하는 기본적 계획에 의해 결정”(103쪽)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에 바로 보부아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자기 견해가 전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제2부 ‘역사’에서 남녀의 기나긴 불평등의 역사를 추적한다. 우선 유목 사회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여자의 종속을 선사학과 민속학 등의 자료를 통해 검토하는데, 이는 엥겔스가 철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 이행을 다룬 것에 견줘 보면 여성 억압의 역사를 더 일찍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농경사회로 진입한 후 1949년까지 서구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지배, 억압했는지 그 반복 강화의 역사를 검토한다. 그렇다면 이 여성을 억압한 역사의 결론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점하고 있는 경제적 특권, 그들의 사회적 가치, 결혼의 위세, 남자의 지원 유용성 등 모든 것이 여자들에게 남자의 마음에 들기를 열렬히 원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여전히 전체적으로 종속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 결과,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를 규정하는 대로 자신을 인식하고 선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남자가 꿈꾸는 여자를 묘사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남자를 위한 여자의 존재 방식은 여자의 구체적 조건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220쪽)라고 여성 억압의 역사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제 보부아르는 제3부에서는 여성 신화를 고찰한다. 보부아르가 여성 신화를 고찰하는 것은 남성들이 자기 우월의 정당화를 위해 여성들에게 투사한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모든 신화는 자기의 희망과 두려움을 초월적인 하늘을 향해 투사시키는 주체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들은 자신들을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계획이 반영될 남성 신화를 창조하지 못했다.”(226쪽)에서 보듯이, 여성들이 신화를 창조하지 못한 이유를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주체와 타자로 놓고 여성이 여전히 타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다만 여성들을 주제로 한 신화는 이브 신화, 생명과 수태 신화, 처녀성 신화, 동정녀 마리아 신화, 어머니 신화, 착한 아내 신화, 뮤즈 신과 같은 여성적 신비의 신화 등이다. 여기서 문제는 여성을 여성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하고, 여성의 신비화를 통해 여성 타자의 모습이 구현됨을 보이는 것이다. “단지 여자는 비본질의 양태로 모든 것이다. 즉 여자는 완전히 타자다. 그리고 타자로서 여자는 그녀 자신 외의 다른 것이고, 여자에게서 기대되는 것과 다른 것이다.”(298쪽) 결국 여자는 영속적인 빗나감, 실존의 빗나감 자체에 머물고 말 뿐이다.
이어서 보봐르는 여성 신화의 이상과 같은 분석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작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신화의 개별적이고 혼합적인 모습을 몇몇 유명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를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작가들은 여성 폄하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런 여성 신화를 극복하기 위해 보부아르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주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끝으로 여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에 의해 살게 될 때, 여자는 완전한 한 인간이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제2권의 ‘체험’의 제1부 ‘형성’의 제1장의 유년기의 첫머리에 보부아르의 『제2의 성』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389쪽) 이 명제는 현대 페미니즘에서 성(sex)과 젠더(gender) 간의 구분에 대한 원초적인 출전에 해당한다. 이 명제만큼 논쟁을 많이 불러 일으킨 명제도 없을 것이다. 보부아르 후대의 많은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한 번 이상 거론하지 않는 적이 없을 정도이다. 이어서 보부아르는 여성의 유년기부터, 사춘기를 거쳐 사춘기 이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성에 입문하는 과정, 동성애 등을 다룬다. 이는 마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서 성생활의 형성 과정을 보부아르는 실존주의적 입장에 입각해 일관되게 재해석한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은 프로이트가 설명한 논거와는 분명 차이를 보인다.
제2부의 여성의 ‘상황’에서는 결혼한 여성, 어머니, 사교 생활, 매춘부와 첩, 성숙기에서 노년기를 그린다. 특히 결혼에 대해 비판적인 보부아르의 견해를 청취할 필요가 있다. 결혼이 ‘자주적인 두 사람 간에 자유롭게 합의한 하나의 결합’이라고 정의되지만, 결혼에서 두 배우자는 동등하게 지위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여성이 경제 주권을 부분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여성의 수동적 지위는 결혼을 통해 더 강화된다. 결혼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 제도적인 결함에 기인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특히 여성에게 경제적 조건을 보장해 주어야 하고, 남성들의 각성 등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이슈는 보부아르의 ‘모성애’에 대한 입장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출산은 여성에게 ‘기쁨’과 ‘존재의 정당화’를 가져다 주는, 여성에게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러나 보부아르는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그 견해 속에 들어있는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출산한 어머니와 아이와의 관계 역시 복잡하고 양가의 감정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3부 ‘정당화’에서는 여성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경우들, 나르시시즘, 사랑 그리고 신비주의 여성에 대해 논의한다. 여성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에 대해 이는 자기 숭배, 자기 사랑을 통해 자유를 확신하고자 하는 거짓 도피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성이 사랑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평소에 길들여진 수동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여성은 사랑의 태도에서 남자와의 상호적 관계를 견지하기 보다는 그 사랑에 스스로 예속되어 간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자기 도피와 포기가 아닌, 강건함과 자기 확립을 위해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이뤄진다고 보았다. 흔히 여성들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현실을 피하고 자기의 실존을 최고의 인격으로 구현해 줄 수 있는 전체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비주의 태도는 여성에게 주체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며, 자유의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이제 『제2의 성』의 최종 결론으로 가보자.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을까? ‘제4부 해방을 향해’에서 이에 대한 답을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또 『제2의 성』을 제일 유명하게 만들었던 명제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처럼, 보부아르는 이 책에서 여성의 열등성이 선천적이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여자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세워야 할 것은 그녀의 ‘상황’이지 신비스러운 ‘본질’이 아니다.”(965쪽)라고 말하며,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는 여자의 가능성이 억압되어 인류의 손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여자 자신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여자가 마침내 모든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할 때라는 것”(967쪽)임을 여성 해방을 위해 강조하고 있다. 보부아르는 맨 마지막 ‘결론’의 실천적인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여자와 남자가 진정으로 ‘평등’해지기 위해 법, 제도, 풍습, 여론, 그리고 모든 사회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980쪽)라고 묻는다. 그리고 제시한 대안, 결론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관계’임을 주장하며,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지배의 “숭고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와 남자가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분명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988쪽)라고 말하며 이 책의 대단원을 맺는다. 이 마지막 맺음말을 통해 보부아르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보부아르가 주장하는 여성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 차이를 넘어서 우애를 확립하자는 주장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와 대립을 강조하기보다는 우애로 상징되는 ‘평등’의 가치를 획득하자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보부아르는 남성과 여성 간에 존재하는 ‘차이 속에서의 평등’을 강조했을까? 아니면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부각하고자 했을까? 비록 보부아르가 섹스, 젠더 간의 구별과 차이를 통해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을지라도 보부아르 자신은 차이보다는 평등과 우애에 무게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맺음말에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은 다소 맥이 빠지고 싱겁다. 여자와 남자 간의 자연적인 관계, 그리고 자연적 차이를 넘어 우애를 확립하자고 하는 보부아르의 결론에서 실천적인 페미니즘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두꺼운 분량을 할애해 쓴 보부아르의 역작은 결국 여자와 남자의 우애를 위한 것일까? 제1세대 마지막 페미니스트에게 우리가 너무 지나친 기대를 걸 수는 없겠고, 이후 현대 차이의 페미니즘에 논쟁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