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la Vie)은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과정 [천 하룻밤 이야기]
삶(la Vie)은 난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과정이다.
– 2026 01 20 대한(大寒), 올해는 대한 추위를 한다. 겨울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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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나긴 역사에서 삶의 고통 또는 비참함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석기 시대에는 자연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집단화를 거치면서 자신감을 갖는 인간은 먹거리 해결과 거주지를 구축에 힘쓰면서, 나름의 제도에서 배치와 배열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먹거리와 잠자리(주거)에 대해 하늘(책력)과 토지생산(분배)이 제시하는 문제로부터 공동체에서 상부상조와 조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철기 이래로 생산력의 발달은 도시와 국가 속에서 제도를 만들어 안전과 편리를 보장하고자 하였다.
의식의 발전과 생산력의 발달로 국가체제의 확립은 계급의 지위에 따라 삶의 양식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백성없는 제도와 체제는 없다는 것도 상층은 잘 알고 있었다. 인민의 자각은 질병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세뇌당한 인민은 하늘에 이상을 투영하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인민은 스스로 자치와 자율로서 세상을 조성하고 하였다. 그런데 규소 시대에, 신에 매이지 않는 자연의 자발성이 있듯이, 인민이 지적 체계와 제도의 체제와 다른 자발성이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자발성의 발현과 수렴이 인민의 행복과 안정을 보장해주는 방법을 만들 수 있을까? 인민의 교육과 창발이 새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하리라.
상층에 속하는 검찰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장난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표면상에서 이재명정부와 정청래 당대표는 시민의 힘을 믿고 있으나, 오랜 제도상의 공론장은 여전히 기울어져 있다. 여론의 장으로 올라오는 시민의식은 이미 응원봉에서 표출되었고, 누리소통을 통한 대중의 평결 논장이 열려있다. 조국혁신당과 진보당이 다발의 함성을 내고 있다. 정부는 말한다.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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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인식의 역사에서 지식의 범위 또는 위상은 추상화하여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에 걸려있다고 한다. 동양에서도 막연하게나마 사상(四象)에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의 기원을 둘로 나누어보면 에피스테메와 독사가 있듯이, 동양에서 음양이 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그 원인 또는 기원으로서 하나 또는 태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은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서양에서는 흥미롭게도 이 기원 또는 원질이 한편으로 자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영혼이라고 한다. 전자에서는 탐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후자에서는 탐구의 주체로 삼았다. 이런 구별이 불분명하지만, 인식측면에서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토대로 하였다. 이런 대립을 세계의 운동과 인간의 인식 사이의 대비로 생각한 쪽이 퓌타고라스 학파였다면서, 틀을 만들려고 한 쪽이 플라톤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삶의 측면에서 세계영혼과 인간영혼의 연대와 연결로 보는 스토아학자들도 있었다. 철학사는 이런 두 방향의 진행 방식이 로고스와 에토스의 방향처럼 보았다. 그러면 인간의 감정과 공명은 어디에 속하는가? 이원적 구분에서 이것들은 에토스에 속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자연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파토스는 인간에 내속하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그 내속성 또는 내재성의 기원이 하늘의 운행에 투사되어 있다고도 한다.
우리말에는 이런 표현들을 연결해보자. 장하다, 훌륭타 등은 삶의 터전에서 체제와 제도와 제도 속에서 행위에 관한 것으로 에토스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잘났다, 멋지다 등은 인간의 내속성에서 드러나는 성격들로서 파토스에 속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는 자연 또는 대상을 다룸에서 다른 이들보다 처리하는 방식이 순조롭고 질서에 맞는 경우에 똑똑하다, 영리하다고 하며, 인식적인 로고스가 발달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 로고스 측면은 수학들의 교육에 익숙한 이들에게 속한다. 그런데 에토스는 그 터전의 문화에 잘 맞추어 살아가는 경우에 가깝고, 파토스의 경우에는 놀이(승부의 한판)와 음율(거의 모든 공연문화)에서 신체를 사용하여 잘 흡수하고 발산하는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고스에는 과학과 기술에 더하여 논리학과 수학을 연관시키고, 에토스에는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처럼 입말과 문자화에 연관이 많다고 하며, 파토스에는 스포츠와 연예계를 대응시키는데 익숙하다.
이 부류들이 공시태로서 분류(위상)를 갖는 평면들을 상층에 로고스, 표면에 에토스, 심층에 파토스로 여기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퓌타고라스를 비판적 수용하면서라고 한다. 그런데 로고스와 파토스의 양면성을 이끄는 영혼을 가정한 것은 플라톤의 장점이라고 하는데, 이런 양면성의 발생과 확장의 장면도 퓌타고라스학파의 수학적 분류에서 왔다고 한다.
크게 두 부류로서, 하나는 산술학과 기하학, 다른 하나는 천문학(책력)과 음율(율려)이라 한다. 기나긴 서양의 교육에서 이 두 부류가 청소년의 성장에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후자들에 속하는 책력과 음율이 파토스에 속한다고 하면, 의아해 할 것이다. 이집트와 수메르 이래로 삶의 토대로서 하늘의 운행과 몸의 활동은 로고스가 먼저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소년의 교육에서 음율과 놀이(계절에 따른)가 기초이다. 초등학생은 뛰고 놀면서, 노래하고 신체운동을 한다. 그리고 산수를 다음으로 기하학을 배우고, 중등에서 좌표기하학을 고등에서 미적분과 행렬을 배운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서양 학문의 공시적 분류가 그럴듯하다.
그런데 역사적 발전에서 의식의 확장과 심화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할 것이다. 로고스의 측면의 발달은 수학사의 발전과 상응하면서 발전과 확장을 이어왔다. 그 영역의 다양함에서 수학은 일찍이 수학들이라는 복수 표현을 했다. 그리고 에토스 측면은 아마도 정의(正義)에 관련이 많다. 정의는 4상 또는 4가지 선분의 비유에서 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동양에서 태극에서 발현처럼 여기듯이, 어쩌면 서양에서도 세계영혼(일자)의 발현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이 영혼이 용기와 절제라는 두 마리 말을 몰아간다고 비유하였을 것이고, 게다가 이런 세 가지 위상이 하나의 신체 또는 세계영혼 속에 들어있다면, 세 가지를 분할 또는 수학적 비례가 아니라, 조화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토스의 평면에서는 조화와 공감, 나아가 자연과 공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파토스는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문학가들은 그리스 시민이 글자를 쓸 줄 몰라도 그리스 연극(희극이든, 비극이든)을 통해 공동체의 삶의 결속시켰다는 점을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렇다. 니체도 강조하지만 아테네 시절에 철학이 뒷전이었고 비극시인과 희극시인들이 먼저이다. 각 도시국가 지역에서 열리는 2년제 올림피아와 4년제 올림피아에서 연극을 상연하고 우승자를 뽑는 것은 시대의 정신을 높이고, 또는 시대의 인물(상징성, 예로서 테세우스, 외디푸스)을 내세워 여론을 형성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올림피아에서는 놀이(운동)과 음율의 경쟁도 있었다. 연극의 대사는 음율이었다. 아테네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제국을 형성하면서 지중해의 중심이었을 때, 주도층은 파토스를 인도하는 극작가였고, 로고스를 이끈 이들은 마치 수도원에서처럼 비밀스런 집단을 형성하고 영혼의 행방을 고민했던 퓌타고라스주의자로서 아르퀴타스(전435경-347경)와 아카데미아를 세운 플라톤(전428-348)이었을 것이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플라톤은 하늘과 땅의 이중성을 연대 또는 상응으로 풀어보려고 하였고, 그의 사상에서는 영혼이 이중적 역량(스키조)을 가졌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체의 영혼과 세계의 영혼 사이에 통일성을 새로운 공동체에서 조화(정의)를 제도의 틀로 만들어 보려고 법률(노모이)을 썼다고 한다. 즉 에토스 측면에서 역시 사회제도와 이상도시의 체제를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라 한다. 서양의 사상이 아테네라는 도시국가가 제국화 되었을 때부터, 국가체제와 사회제도를 지적 체계에 맞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통시태 측면에서 서양 철학사는 한편으로 인간적인 역량의 갈래들인,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은 각각의 길에 자기 정합성을 만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식과 지식의 체계로서 4분할로서 이데아, 도형, 물체, 그림자로 나누어, 각각이 자기 방식의 위상을 만들려 하고, 학문으로서 자기 영역과 방법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수학들, 논리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경제학 정립할 것이고, 그리고 20세기에 규소시대에 정보과학(또는 기술정보) 등이 각자의 자기정합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게다기 이를 확장하여 적용하는 학제간(interdisciplinaire) 연대가 중요과제로 떠오르면서, 학문의 영역들은 대상의 학문에서 다양체의 학문, 현상의 관계에서 사건의 연관으로 전환하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이런 변역의 과정에서, 공시태를 먼저 사유하는 우주론적 입장과 통시태를 중요시하는 우주발생론적 입장이 대립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철의 시대에 관계의 정립으로서 지식의 구성과 구축이 우선하던 시기에 비해, 규소시대에 연관의 다원성에 비추어 사건의 조성과 조화를 먼저 생각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한 사회에서 구성과 구축의 공론장을 먼저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의 생성과 연관에서 여론화가 먼저이고 그 다양한 담론들이 평결장에서 상호공감과 조성의 조화를 찾아가려 한다. 그 다음의 그 진행을 밀고나가 선견지명(πρόνοια)과 같은 평결문이라는 합의를 끌어내고 함께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런 평결이 인민의 누리소통, 어쩌면 생성인공지능의 도움으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 중경, 선후, 강온의 배열을 시행함에서 우주발생론으로부터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항상 말하곤 하는 좌파51% 우파49%의 조성에서 평결들이 조화를 이룰 것이다. (59LL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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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생각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자치성을 생각한 “빛들세기(18세기)에는 생물학의 발생과정을 생각했던 뷔퐁(1707-1788)이 자연에서 발생과 생장이 기수(산술학)도 이분화도 아닌 다양한 발현이라 생각하였고, 각각은 고유한 계열(la série)이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계열의 발생은 수들의 순서도 비례의 분배도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기 노력의 과정이라고 본 것은 그 후배인 라마르크(1744-1829)였다. 자연 속에서 사물을 형성하게 하는 정신(지성, 누스, 신)이 외부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변형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연이 신에서 벗어나 자치성과 자율성을 갖는다는 생각을 한 것은 “빛들세기”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였다. 물체나 생명체는 지성의 산물이라기보다 자연의 자기 창조에 의한 생성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물학은 아직 이를 자기 방법으로 정립의 시기에 이르지 못했다.
여전히 사물은 정신(오성, 지성)의 산물이다. 이를 해석하는 방식의 탐구는 지속되었다. 사물을 분할하여 대상화하고 상징화(symbole)하려는 수학자 벤(1834-1923)은 다이아그램으로 이분법과 기수의 설명으로 불편한 부조리를 해결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프로이트(1856-1939)는 영혼의 3분할을 자아, 이드, 초자아로 나누었고, 이를 크리스트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불합리를 넘어서려는 방식으로 라깡(1902–1981)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바꾸어 놓았다. 리우츠신(劉慈欣, 유자흔, 1963-) 삼체론도 그 일종일 것이다. 중국에서 기원후 2세기경의 전쟁이야기를 삼국시대라 하지만, 그 당대에는 여러 나라들의 각축에서 위나라 우세였다는 것은 사실이라 한다.
이에 비해 제도에서 3원성을 다루는 이들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의 분화 속에서 에토스를 중심에 두고 로고스로 풀이하며, 소설과 역사해설의 이야기는 인민의 파토스를 첨가하여 인민에게 교육용으로 쓴다. 그리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시대에도, 신화의 이야기를 연극무대에 올리고 시민의식을 고양했던 것과도 같다.
산술학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의 빅데이터는, 기독교 반달족이 불태웠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징키스칸 손자인 훌라구칸이 파괴했던 바빌론 도서관, 중국 강희제(1661-1722)의 한림원(또는 국자감)의 서고 등의 새로운 형태일 것이다. 이 정보기술이 확장은 도서관 확장보다 더 뛰어나게, 참고서를 찾게 해준 것이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이 학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물을 배치와 배열에 관계없이도 찾아내고 가르쳐 주는 것이 일반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식과 전승은 도서관과 정보체계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화되어 체계화된 지식이 생산의 과정과 여러 갈래를 보여주는 것은 지구의 자전운동과 지층 속에도 있고, 나아가 다양한 생명체의 DNA 속에도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연이 자율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산한 다양한 자료들이 지층처럼 생명체 안에 압축되어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성형 인공지능(the Generative artificial intelligence, GAI)이 이런 발생과정과 분화과정(이종과 별종의 발생)에 대해 과정을 잘 표출하게 되는 시절이 곧 올 것이라 생각한다.
도서관 이용과 같은 또는 참고서 찾아보기와 같은 일반인공지능(AGI)의 발달에 자극을 받아, 생성형인공지능(GAI)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인간은 터전에서 삶의 어려움, 고통과 비참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겉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인공지능(AGI)을 통해 탐욕과 재산축적이 먼저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영혼으로 느끼고 사는 인민과 대중은 그래도 인간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런 노력을 하는 이들이 자연과 세계의 흐름에 내재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자든 식자든 알고있다. 인민이 물과 같아서 제도를 띄울 수도 있고 뒤엎을 수도 있다.
시대 변역에서 새로운 창안과 발명이 나올 것이고, 그에 걸맞는 인물도 도래할 것이다. 그 풍토와 터전이 어쩌면 동방의 끝에 있을 것 같다. 인민이 다양한 평론이 등장하는 이 시대에서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
(4:29, 59LMA)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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