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 51-시공간은 무한한 것인가?
1)
시간, 공간은 무한한가? 앞에서도 밤하늘 무한한 천공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거나 시냇가 조약돌에서 아득한 시대 화석으로 남은 생물을 발견하면, 그 아득히 먼 시대를 상상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시간과 공간의 아득함에 관해 시인들은 많은 시를 지었는데, 헤겔은 양적 무한성을 다루면서 주석에서 할러의 시를 하나 인용한다.
숱한 산들처럼
엄청난 수를 쌓아 올리고
시간의 더미에 시간을, 세계의 더미에 세계를 쌓아 올리고
그리고 소스라칠 정도로 높은 곳에 올라가
아득하게 다시 너를 내려다보면,
수의 위력이 천 배가 증가하더라도,
아직도 너는 단 한 귀퉁이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수의 위력을 떨쳐버릴 때
너의 모습은 생생하게 내 앞에 떠오를 것이다
헤겔은 이 시의 앞부분은 무한한 시공간 앞에 느끼는 숭고함을 표현했으나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이 오히려 의미심장하다 한다. 즉 차라리 무한한 수의 위력을 떨쳐 버릴 때 오히려 무한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수의 위력이란 곧 무한 진행으로서 악 무한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진정한 무한의 모습은 곧 내재하는 무한성 즉 자기 부정성으로서 무한성일 것이다.
2)
우리 앞에 있는 세계의 무한성에 관한 논의는 곧바로 세계의 유한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반박당한다. 세계에 시초가 있어야 하고 우주는 그 한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이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주장을 통해서도 무한성에 관한 주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니, 형이상학의 세계는 곧 세계의 무한성과 유한성이라는 주장의 전장터가 되었다.
이런 전장을 최종적으로 흽쓸어 버리려 했던 철학자가 곧 칸트였으니,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무한성이라는 주장이든 유한성이라는 주장은 이율 배반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논증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칸트는 알다시피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 2편 2장에서 순수이성의 이율 배반을 다루면서 네 가지 이율 배반을 제시했다. 이 네 가지 이율 배반은 네 가지 판단형식의 범주 즉 질적 범주, 양적 범주, 관계적 범주, 양상적 범주에 각기 해당한다.
그 가운데 질적 범주에서 나타나는 이율 배반은 사물이 합성체인지 단순 실체인지 하는 이율 배반인데, 칸트는 이를 두 번째 이율 배반으로 다루었지만, 양적 범주보다 질적 범주를 우선하는 헤겔은 오히려 앞에서 질적 판단형식을 다룰 때 이미 다루었다.
헤겔은 양의 무한성을 논하는 가운데 칸트가 말한 첫 번째 이율 배반을 다룬다. 헤겔은 이 이율 배반이 양적인 것과 관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헤겔에서는 이 이율 배반이 두 번째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시간과 공간이 시초나 한계를 지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세계가 양적으로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헤겔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자신과 칸트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직관의 형식으로 보았다. 반면 헤겔은 시간과 공간은 사물의 상호 관계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이때 관계 방식은 바로 양적인 것의 방식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방식은 서로 동일한 일자와 일자의 외면적인 관계다. 나뭇잎과 나뭇잎, 물방울과 물방울의 관계에서 나뭇잎이나 물방울과 같은 구체적 대상을 제거한다면 바로 시간 공간적 관계가 된다. 이런 시간, 공간적 관계는 사물이 가진 모든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이 지닌 모든 구체적 관계를 추상한 가장 외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칸트와 같이 추상적인 직관의 형식으로 보든, 헤겔과 같이 사물의 가장 외면적인 관계로 보든 일단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헤겔은 이런 양적인 관계에서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과 무한성의 문제를 여기서(정량, c 절 양적 무한성, b 항 무한 진행, 주석 2) 다룬다.
4)
우선 정립은 세계가 유한하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시간에는 시초가 있으며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은 우선 이 정립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인용하면서 소개하는데,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지 않는다면 주어진 시점에 이르기까지 영원이 흘러가야 하며 세계 속에 상호 뒤따르는 사물 상태의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이런 계열이 무한하다는 것은 곧 이 계열이 계기적 종합을 통해서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한히 흐르는 세계 계열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의 시초는 세계가 현존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고 이것은 처음 증명되어야 했던 것이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29)
칸트의 증명은 간단하다. 시초가 없다면 어떤 현존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현존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한한 계열이 지나가야 하는데 이 무한한 계열을 다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어떤 현존이 있는 것을 분명하므로, 시초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어서 공간의 한계에 관한 칸트의 증명을 소개한다. 이 부분은 칸트의 증명을 헤겔이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된다.
“공간상 무한한 세계 부분들의 총괄을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세계가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주어진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 무한한 시간은 이미 흘러간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시간에 관한 증명의 앞부분에서 제시됐듯이 무한한 시간이 흘러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이 증명의 핵심은 곧 공간이 한계가 없다면, 이 공간을 총괄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데, 무한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공간은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을 우리가 총괄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된다.
5)
위와 같이 칸트의 정립을 소개한 다음 헤겔은 이를 비판하는데, 그의 비판은 칸트의 소위 귀류법적인 증명은 증명 속에 증명돼야 하는 것이 이미 전제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미 칸트는 시간에는 시초가 있고, 공간은 한계가 있어서 총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현존이 있으려면 요청되는 것인데, 증명을 통해 증명돼야 하는 사실이다. 칸트의 정립 증명은 시간의 시초가 있고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므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이니,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이 있기 위해서 반드시 시간의 시초와 공간의 한계가 있어야 하는가? 어떤 것은 그 시초를 모르는 것이거나 공간상 한계 없이 펼쳐지는 것이더라도 현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내 앞의 우주가 언제 생겼는지, 어디까지 펼쳐지는지 모르더라도, 내 앞에 우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증명되어야 하는 주장이 증명의 근저에 직접 놓여 있으므로 증명을 우회적으로 만들거나 증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원(영원은 여기서 다만 악 무한적인 시간이라는 형편없는 의미를 지닌다)이 흘러가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시점 또는 각 주어진 시점이 전제된다. 주어진 시점이란 곧 시간 속에 일정한 한계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증명에는 시간의 한계가 실제로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는 증명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립이 주장하는 것은 곧 세계가 시간상 시초를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재판, GW21, S.229)
6)
이어서 헤겔은 반정립을 살펴본다. 칸트가 말한 반정립은 세계는 시초를 갖지 않으며 공간상 한계도 갖지 않고 오히려 시간상이나 공간상으로 무한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칸트의 증명은 다음과 같다.
“세계가 시초를 갖는다 하자. 현존하는 이 시초에 앞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선행한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 즉 공허한 시간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공허한 시간 속에 어떤 사물의 발생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같은 시간의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 앞에서 비 현존의 조건에 앞서 구별된 현존의 조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속에서 사물의 많은 계열이 시작할 수 있지만, 세계 자체는 시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계는 지나간 시간과 관계하여 무한하다.”(칸트 재인용, 논리학 재판, GW21, S.231)
이 증명은 사물의 발생이 시간 속에 현존하는 조건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만일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시간에는 사물의 발생할 조건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물이 발생하려면 시초 앞에 시간에도 사물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세계의 시초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이 반드시 그 앞에 발생 조건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 아무 조건 없이 출현하는 사물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초 앞에 공허한 시간이 있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헤겔은 이런 생각 끝에, 칸트의 증명이 정립에 대한 증명과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발생 조건이 전제되는데, 이 발생 조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시초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시초가 없다는 것이 증명돼야 하는 과제인데 이미 발생 조건이라는 말 속에 함축적으로 전제되고 있다.
이어서 칸트는 공간에 한계가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는데, 이 증명은 시간의 무한성 증명과 같은 논리를 반복한다. 즉 사물의 공간이 한계가 있다면, 그 밖은 공허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면 공허한 공간 속에 사물의 공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시간의 무한성 증명에서는 조건이라는 개념이 이용됐다면 공간의 무한성 증명에는 관계 개념이 이용된다. 어떤 것이 공허와 관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무와 관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있으려면 공허가 아니어야 하고 사물의 공간은 다시 더 큰 사물 공간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결국, 사물의 공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발생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시간 앞의 시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면, 이미 공간 너머 공간을 전제하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증명돼야 할 것이 미리 전제된다고 하겠다.
7)
시공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는 중장은 동시에 성립하지 않으니, 칸트는 이를 이율 배반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이런 이율 배반이 나오는 이유는 사유의 범주, 판단의 형식을 경험적 개념에 적용하지 않고 물 자체의 개념 즉 시간, 공간, 우주, 세계와 같은 물 자체의 개념에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칸트는 이런 물 자체에는 유한성이나 무한성과 같은 사유의 범주를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하면서 거꾸로 말하자면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장이 시간과 공간에 동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곧 양적인 관계 즉 일자와 일자의 관계가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한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이다.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것은 곧 한계가 자기를 자기가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어떤 정량은 자기 내에 무한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헤겔은 칸트의 이율 배반을 비판함으로써 양적 무한성을 설명하려 했다.
헤겔은 칸트의 주장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세계에서 모순을 제거하고 반대로 모순을 정신 속으로 또는 이성 속으로 옮기고 그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립시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나약한 태도다. 사실상 정신은 모순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력하며 그러나 또한 모순을 해소할 줄도 알고 있다. 그러나 소위 세계는 어디에서도 모순이 없지 않으며 모순을 견딜 수 없고 그러므로 생성과 소멸에 희생된다.”(논리학 재판, GW21, S.232)
세계의 모순을 인정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분투의 정신이 여기에 표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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