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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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

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생성의 역사에 관해 연구자들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일부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MEW판 독일 이데올로기 그 가운데 특히 포이어바흐 장이 위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표시한다. 잘못하면 기존에 알려진 마르크스 엥겔스 역사적 유물론의 정체가 의심스러워질 판이다. 국내에서 정문길 교수님의 독일 이데올로기 편집에 관한 논문을 읽은 연구자는 더욱 그러하다.  정문길 선생은 그 차이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판본을 직접 비교 대조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때문에 그 차이가 과장되면서 위작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발생한 것 같다.

필자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하면서 MEW3권을 기초로 번역했지만, 영어본과 MEGA2에 나오는 포이어바흐 장을 함께 번역해 실었다. 1권에는 MEW3 포이어바흐 장이  2권에는 MEGA2와 영어본 의 포이어바흐 장이 실렸다. 이 자리에서 포이어바흐 장의 원본이 지니는 의미를 밝히려 한다.(필자가 양자를 동시에 번역한 것은 두 개의 편집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MEW 3 은 아도라츠키가 편집한 포이어바흐 장에 기초한 것인데,   원본의 구절을 추가하거나 배제한 것은 없다. 다만 원본의 구절을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했다. 그러나  MEGA 1,  영어본, 그리고 최근 발간된 MEGA2은   리야노프스키가 발굴한 원본 그대로를 살리려 했다. 그 결과 주요 내용은 인류 역사를 시험 삼아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따라 스케치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스케치를 넘어서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한 것은  1848년 2워 혁명 이후다.

(위의 원본을 살리려는 각 시도들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전지를 반으로 나누어서 왼쪽에 쓴 원문을 오른쪽에서 고쳤는데, 고친 부분이 왼쪽의 앞뒤에 어느 부분에 들어가는지를 편집자가 달리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마르크스의 의도를 알면 어렵지 않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아도라츠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기의 편집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여백에 남긴 표시에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백의 표시가 꼭 그렇게 옮기라는 지시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위작이니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기존의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가 의심될 여지도 없다.

다만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의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원리가 오늘날 확립된 원리와 다르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는 분업의 전개를 중심으로 했고 아직 생산력이나 생산관계라는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다. 생산력과 생산 관계 개념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가서야 확립된다. 분업과 생산관계는 서로 다른데, 분업은 교환이나 분배까지 포함한 더 포괄적 개념이어서, 실제 역사에서 전개된 정치적 투쟁을 이해하는데서는 생산관계 개념보다 더 도움이 된다. 물론 분업의 전개 자체를 다시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통해 설명해야 마땅하리라.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관한 돕- 스위지 논쟁은 바로 생산관계 중심이냐 아니면 분업(교환관계)를 중심으로 하느냐 하는 논쟁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 논쟁을 해결하는 데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생각으로는 역사를 볼 때 분업과 생산관계 개념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충분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포이어바흐 장 원본을 발간하는 것은 기존의 생산관계 중심의 역사적 유물론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겠다.(필자는 이 부분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발간하는 잡지여서 연구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필자는 지금하는 작업을 마친 다음 이 논문을 개편해서 학회지에 발표하려 한다.)

아래는 각 판본의 편집자가 밝힌 생성의 역사다. 필자의 능력으로 그 이상의 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려 한다. 다만 그 가운데 MEGA2의 편집자는 200쪽에 달라는 방대한 생성사를 서술했다. 다만 너무 방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해 필자가 간단하게 요약해 두었으니, 특히 이 부분을 참조로 하기 바란다.

덧불일 것은 포이어바흐 테제는 독일 이데올로기가 작성되기 전에 이미(45년 초) 작성되었다. 포이어바흐 테제는 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장과는 시기, 문체, 내용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독일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것인데, 편집자들이 이 테제를 독일 이데올로기에 집어넣은 것은 독일이데올로기가 작성되기(대체로 46년 겨울) 전에 이미 마르크스가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의 원리에 도달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작성에 동기를 준 것은 슈티르너의 포이어바흐 비판인데, 마르크스 엥겔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슈티르너의 충격과 무관하게 이미 구성됐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또 2권의 내용은 편집자마다 다르다. 모제스 헤스와 관계, 출판의 문제 등 때문에 추가되고 배제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부분과 무관하다.

후기3 『독일 이데올로기』 성립의 역사에 관해(필자가 번역한 독일 이데올로기 번역본의 1411-1432쪽 부분)

독일 이데올로기의 작성과정은 W, CW, GA2가 각각 해명한다. 아래 각 판본이 밝힌 작성과정을 정리했다.

1) MEW
[W는 주 2에서 해명한다. CW 주 7은 이 내용을 보완했다.]
『독일 이데올로기, 최근 독일 철학의 대표자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 그리고 진정 사회주의의 여러 예언자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5~46에 집필한 저서이다.
1845년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이 저서를 집필하기로 결심하고, 1845년 9월 열정을 다해 이 작업에 착수했다. 초고는 약 50매의 인쇄 전지 분량이고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의 내용은 원칙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의 완성된 기본 논제와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의 철학적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반면 2권이 담는 내용은 진정 사회주의의 여러 대변자의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CW 보완:1845년 봄(4월 초) 엥겔스가 브뤼셀에 왔을 때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당시 겨우 골격을 갖추기 시작했던 역사에 관한 그의 유물론적 견해를 요약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에 관한 청년 헤겔주의자의 관념론적 견해나 포이어바흐의 엉성한 유물론에 대항해 자기들의 유물론적 견해를 내세우려는 의도로 철학 저서를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기획의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가 작성됐다. 1845년 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청년 헤겔주의자와 진정 사회주의자를 겨냥한 두 권의 저서를 작성하기로 확정적인 계획을 세웠다. 1845년 가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저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작업의 과정에서 저서의 계획과 구성이 여러 번 변화했다. 모제스 헤스는 그 가운데 두 장을 작성하기로 요청받았다. 그러나 청년 헤겔주의자 루게Arnold Ruge에 대항해 헤스가 작성한 장은 1권에 넣기로 했으나 『독일 이데올로기』의 최종판에서 배제됐다. 헤스가 진정 사회주의자 쿨만Kuhlmann을 다루는 장은 2권에 넣기로 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편집했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주요 작업은 원래 1846년 봄에 끝을 맺었다. 이 시기에 1권의 대부분이-즉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견해를 비판한 장(「라이프치히 공의회」)-끝났으며 2권의 대부분도 끝났다. 1권의 첫 부분(포이어바흐의 견해에 대한 비판)은 1846년 후반기까지 계속됐지만, 끝을 맺지 못했다. [CW 보완: 1권 서론 초안은 8월 중순 전에 마르크스가 작성했다. 2권의 결론 장에 해당하는 엥겔스의 「진정 사회주의자」는 1847년 1월에서 4월 사이에 작성됐다.]
그들은 1846년 5월 초 1권의 초고 주요 부분을 바이데마이어Joseph Weydemeyer의 베스트팔렌에 있는 인쇄소로 보냈다. 바이데마이어는 출판을 위한 재정적 도움을 받기 위해 그곳에 있는 사업가들-진정 사회주의자인 마이어Julius Meyer와 램펠Rudolf Rempel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했다. 2권의 대부분이 베스트팔렌에 도착한 이후 마이어와 헴펠은 마르크스에게 1846년 1월 13일에 보낸 편지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출판에 대한 재정 지원을 거부했다. 1846~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저서를 출판하기 위해 새로운 출판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난관에 부딪혀 성과 없이 끝났다. 그 난관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경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판업자들이 계속 거부한 것 때문이다. 출판업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반대하는 노선[즉 진정 사회주의]의 대표자들에 대개 공감했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살아 있는 동안 저서 가운데 단지 한 장 즉 『독일 이데올로기』 2권 4장이 잡지 『베스트팔렌 증기선Westfahlen Dampfboot』(1847년 8월과 9월)에 실렸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1권 2장 중 몇몇 쪽과 일치하는 내용이 익명으로 잡지 『사회의 거울Gesellschafstspiegelss』(1846년 1월 「소식과 메모」 난, 6~8쪽)에 소개됐을 뿐이다. 기사가 작성된 날짜는 브뤼셀, 12월 20일이다.
『사회의 거울』 4권(「소식과 메모」 난, 93~96쪽)에는 『독일 이데올로기』 2권 4장과 여기저기 일치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저서의 제목과 1, 2권의 표제는 초고 속에 적혀 있지 않다. 이 제목과 표제는1847년 4월 9일 트리어 신문에 소개된, 마르크스가 그륀Karl Grün을 반박하는 메모[「칼 그륀에 대한 포고」]에 근거한다.
1장 「포이어바흐」의 표제 설정이나 자료 정돈은 초고의 모퉁이에 적어 놓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방주에 근거한 것이다. 성 막스 부분을 두 부분으로-1) 『유일자와 그 소유』와 2) 『변호를 위한 주석』-구분한 것은 이 장의 처음에 제시된 저자의 지침에 따르고 또한 이 장 전체 내용에 근거해서 판단한 결과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2권 2, 3장은 초고에 없었다. [추가: 아마도 마르크스/엥겔스의 「크리게에 반대하는 통문」과 엥겔스의 논문 「독일 사회주의의 시와 산문」이 이 부분에 해당할 것이다.]

2) MECW주 7) 추가
[역자: CW주의 앞부분은-앞에서 보완한 부문만 빼고 W와 같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뒷부분만 추가한다.]

수고는 상당히 처참한 상태다. 종이는 노랗게 변했고 곳곳이 손상됐다. “쥐가 쏠아 먹음으로 이룬 비판”이라는 말을 마르크스는 후일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수고의 「서문」에 썼는데, 이 말은 수많은 쪽에 그 흔적을 남겼다. 또 다른 여러 쪽이 누락됐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서문」과 변경하거나 추가한 것 중 어떤 것은 마르크스가 필기한 것이다. 그러나 수고는 대부분 엥겔스가 필기한 것이다. 다만 2권의 5장과 1권의 3장 몇 쪽은 요셉 바이더마이어가 필기한 것이다. 통상적인 일이지만, 각 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주요 텍스트는 왼편에, 추가나 개정은 오른편에 있다. 많은 쪽은 저자들이 직접 삭제했으며, 몇몇 쪽은 베른슈타인을 통해 삭제됐다(이 점은 반S. Bahn이 『사회사 국제 논평집』 7권, 1962년, 1부에 실린 그의 논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약간의 텍스트 보완」이라는 논문에서 지적됐다.
읽을 수 없게 된 말과 구절은 가능하다면 그때마다 손상되지 않은 부분에 기초해 재구성됐다. 그런 재구성된 구절은 꺾쇠 속에 넣어졌다.[역주: 번역의 형편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런 표시를 지웠음을 양해해 달라.]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몇 마디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 말을 마찬가지로 꺾쇠에 넣어 인쇄했다. 수고에서 나타나는 글의 중단은 각주에서 지적됐다. 여백에 쓴 메모와 삭제된 쪽 중 중요한 것은 각주[노트]에서 복구됐다.[역주: 편집상의 필요 때문에 본문에 집어넣어 노트로 표시했다.] 이 각주는 별표로 표시되고 반면 편집자의 노트는 번호를 매겨 지시됐다. 베른슈타인이 삭제한 쪽은 해독이 가능한 한 복원됐다.
엥겔스가 죽은 후 『독일 이데올로기』의 수고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37년간에 걸쳐서 그 반도 인쇄하지 못했다. 「3장 성 막스」의 한 부분은 1903~4년 베른슈타인Bernstein이 출판했다.(마르크스와 엥겔스, 「3. 성 막스」, 『사회주의 자료집』, 소책자 3권, 1~4월과 7~8월, 슈투트가르트, 1903/『사회주의 자료집』, 소책자 4권, 5~9월, 슈투트가르트, 1904) 이 장의 다른 부분 즉 「나의 자기 향락」 부분은 1913년 발표됐다.(마르크스, 「나의 향락」, 『노동자 문예』, 뮌헨, 8권과 9권, 1913년 3월) 마이어Gustav Meyer가 1921년 「라이프치히 공의회」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쪽과 「2장 성 브루노」를 출판했다.(엥겔스와 마르크스, 「라이프치히 공의회」, 『사회과학과 사회 정치학 서고』, 47권, 소책자 3, 튜빙엔, 1921 참조) 「1장 포이어바흐」 즉 가장 중요한 이 장은 192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를 통해 처음으로 발간됐다.(『마르크스 엥겔스 서고』, 1권) 그리고 독일에서는 1926년 『마르크스 엥겔스 서고』, 1권으로 발간됐다. 우리에게 전승된 전체 저서는 (나중에 발견되고 『사회사 국제 논평』, 7권, 1962년도 1부에 실린 6쪽을 제외한다면) 1932년 소련 중앙의 산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소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GA1]』, 5권 1부로 발간됐다.
1장의 최초 영어판은 러시아판에서 번역했으며, 미국의 잡지 『마르크스주의자』 4호(1926년 7월)에 발표됐다. 이 장의 몇몇 부분은 독일어판에서 번역됐고, 1933년 3월 영국의 잡지 『노동 월간』 15권 3호에 실렸다. 1장의 「포이어바흐」와 2권 「진정 사회주의」의 영어 번역은 『독일 이데올로기』1부, 3부라는 제목으로 1938년 로렌스와 위샤르트Lawrence & Wishard 출판사가 출판했다. 전체 저서의 영어 번역본[CW 5권]은 1권 1장의 한 쪽(수고 29쪽)을 제외하고는, 1964년 모스크바 프로그레스Progress 출판사를 통해 발간됐다.

3) CW주 8)
[여기서는 특별히 포이어바흐 장의 성립 과정을 설명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1장[포이어바흐 장]의 수고는 여러 분리된 문서 형태로 우리에게 전승된다. 이 문서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일반적인 계획을 변화한 데 기인한다.
처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 바우어, 슈티르너를 동시에 다루는 비판적인 저서[H5a에 해당]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들은 바우어와 슈티르너를 다른 장에 다루기로 결정했다.(2장 성 브루노 3장 성 막스) 그리고 1장은 일반적 소개를 담는 장으로 설정됐다. 이 소개는 포이어바흐에 반대하는 그들의 고유한 견해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래 수고에서 바우어와 슈티르너와 관련해 썼던 구절들을 삭제한 다음 이를 2장과 3장으로 옮겼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포이어바흐에 관한 장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첫 부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어서 그들은 2장을 작성하고 3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슈티르너의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던 과정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가지 이론적인 전환을 겪게 됐다. 이런 전환 가운데서 그들은 역사에 대한 고유한 유물론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에 따라서 그들은 이런 전환 가운데 두 가지를 슈티르너의 장에서 포이어바흐 장으로 옮겼다. 첫 번째는-6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슈티르너의 관념론적 견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작성됐다. 그 견해란 곧 역사는 정신을 통해 지배된다는 것이다.(이런 전환의 내용은 원래 「D. 위계체제」절에 존재했다.) 두 번째 비판적인 전환은-37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슈티르너가 부르주아 사회, 경쟁 그리고 사적 소유자 사이의 관계, 국가, 법에 대해 가졌던 견해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어 작성됐다.(슈티르너의 장에 있던 이 구절은 다른 구절로 대체됐다.) 이 두 가지 전환은 연대기적으로 볼 때 포이어바흐의 장 가운데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을 이룬다.
포이어바흐의 장을 이루는 세 부분의 쪽은(1~72까지) 마르크스가 매겼으며 전체 장의 휘갈겨 쓴 복사본을 이룬다. 수고의 쪽 3~7과 36~39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대체적인 얼개를 개정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정서된 복사본을 작성했다. 그 처음 부분은 두 판본이 있다. 우리는 수고의 다소간 독립된 네 가지 부분을 발견했다.(대체적인 복사본에 속한 세 부분과 정서된 복사본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현재 편집본에서 포이어바흐 장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A절 앞부분]은 정서본인데 복합적인 단편들로 이루어진다. 둘째 부분[A절 뒷부분]은 전체 장의 원래 핵심을 포괄한다. 셋째 부분[B절]과 넷째 부분[C절]은 슈티르너의 장에서 옮겨온 이론적으로 전환을 이룬 부분이다. 각 부분은 전체적으로 일관되며 논리적으로 정합적이다. 각 부분은 서로 보완하며 함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개념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네 가지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부분은 소개, 헤겔 이후 독일 철학이 지닌 관념론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의 전제, 본질, 일반적 윤곽에 해당한다.
두 번째 부분은 역사 발전에 관한 유물론적인 개념이며,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에서 나오는 결론,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 일반에 대한 비판, 특히 청년 헤겔주의자와 포이어바흐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역사에 대한 관념론적 개념의 기원을 다룬다.
네 번째 부분는 생산력의 발전, 노동 분업, 소유의 형성, 사회의 계급적 구조, 정치적 상부구조, 사회적 의식의 형식을 다룬다.
수고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비교해 보면 이 장의 논리적 구조를 추출할 수 있으며 저자들이 가졌던 의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장의 일반적 계획을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서술하고 이어서 역사에 대한 관념론자의 개념에 대비되는 유물론자의 개념을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관념론자의 개념을 비판한다. 이 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즉 저자들의 전제-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그들의 이론에서 나오는 결론이라는 구조이다.
대체로 이 장의 계획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도에 부합해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 서술(1절 서론과 1항, 2절 1항)
2) 유물론자가 지닌 역사 개념의 전제(1절 2항)
3) 생산(2절 3~5항, 1절 3항, 4절 1~5항), 교류(4절 6~10항), 정치적 상부구조(4절 2항), 사회적 의식의 형식(3절 1항, 4절 12항)
4) 유물론자의 역사 개념에서 나오는 결론과 요약(2절 6~7항, 1절 4항)
5) 관념주의자의 역사 개념에 대한 비판과 특히 청년 헤겔주의자 또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비판(2절 8~9항, 3절 1항)

수고의 전체 제목은 「1장 포이어바흐」이다. 1888년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초고를 정리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수고를 발견했고 그것을 다시 읽었다. 그는 이 장의 마지막에 “1장 포이어바흐, 유물론자의 견해와 관념론자의 견해의 대립”이라고 메모했다.
이장의 부분들은 세부 절로 나누어진다. 이 세부 구분은 편집자[CW의 편집자]가 한 것이며, 이 편집자가 제목의 대부분을 붙였다. 편집자에 의한 제목이나 모든 편집자의 언급은 괄호 속에 있다.
수고의 쪽은 이 책에 지시된다. 정서본(1, 2)은 엥겔스가 부분적으로 쪽수를 매겼으며 ‘정서본1, 2’ 등으로 매겨져 있다. 저자가 번호를 매기지 않은 정서본의 첫 번째 판본의 쪽은 ‘낱장1, 2’ 등으로 매겨져 있다. 휘갈려쓴 세 초고의 쪽은 마르크스가 매긴 것이며, ‘수고1, 2’ 등으로 표시된다.
1장에서 수고의 다른 부분의 배열과 세부 구분은 러시아판과 같다. 이 판은 『철학의 문제Voprosy Filosofii』 10, 11호(모스크바, 1965)에 실린 것이다.

4) GA2의 부록의 설명
[역주: 전체 약 200쪽에 걸치는 상당히 긴 설명이다. 간단한 요약해 서술했다.]

(1) 동기
『독일 이데올로기』는 1845년 10월부터 1847년 4/5월까지 작성됐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작성의 의도가 변화했다. 그 이유는 우선 사상적으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의 입장이 긍정에서 비판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며 또 마르크스, 엥겔스가 진정 사회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단절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처음 수고를 작성하게 된 동기는 마르크스가 바우어와 슈티르너에게서 포이어바흐의 아류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신성 가족』(1845)에서 바우어를 비판하자 바우어가 『비간트』 계간지 3호(1845년 10월)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특징』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마르크스를 포이어바흐의 아류로 비판했다. 슈티르너 역시 1845년 4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발표하면서 마르크스의 원류인 포이어바흐를 비판하자, 포이어바흐는 『비간트』 2호(1845년 6월)에 이를 반박했다. 슈티르너는 이에 대해서 『비간트』 3호에 『슈티르너에 대한 비평가들』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직접으로는 포이어바흐를, 간접으로는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마르크스 사상에서 포이어바흐는 기초였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도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국의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포이어바흐를 벗어났다. 1845년 초 작성한 「포이어바흐 테제」를 비롯한 수고들은 마르크스가 이미 독자적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직 포이어바흐에 대한 단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우어와 슈티르너의 비판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서술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 『신성 가족』을 통해 바우어를 비판할 때까지만 해도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스와 함께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이 사회주의는 프루동에서 연원한 사회주의다. 그러나 1845년경에 이르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벗어나 공산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845년 12월 브뤼셀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동맹’에 속하는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독일 사회주의자의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스와 함께 루게 등 자유주의자와 대결했으니, 진정 사회주의자와의 차이를 분명히 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수고의 작성
마르크스는 처음 1845년 10월 말 기존의 계간지에 발표하기 위해 바우어 비판에 착수했다. 대체로 11월 말에 이르러 바우어 비판은 완성됐다. 그런데 1845년 11월 말에 이르러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스 등의 독일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계간지를 발간하는 계획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계획을 2권으로 확대했다. 1권은 바우어를 넘어 슈티르너까지 비판할 예정이었다.
1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동시에 작성했다. 두 사람은 새벽까지 한줄 한줄 토론하면서 글을 써갔으나, 주도적인 역할은 마르크스가 맡았다. 나중에 이를 정서하는 책임은 엥겔스가 담당했다. 부분적으로 바이데마이어가 담당하기도 했다. 정서된 원고 옆에 마르크스가 다시 수정하는 글을 달아 교정했다.
2권은 진정 사회주의자(헤스 등)와 함께 작성하기로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2권에서는 각기 독자적인 글을 작성했다. 전체적인 편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으로 책임졌다. 다른 기고자들의 글은 마르크스, 엥겔스가 개입해서 부분적으로 교정했다.
계획이 세워지자 11월 말부터 마르크스는 슈티르너 비판에 착수했다. 이런 비판 과정 중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할 필요성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슈티르너는 개인의 관점에서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를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는데, 마르크스는 이때 이런 관점이 한면에서는 타당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적 존재가 추상적인 만큼 슈티르너의 개인도 비역사적인 추상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 시기가 대강 1846년 3월 경이며, 이때 마르크스는 슈티르너의 사적 소유와 국가, 법의 관계를 비판할 무렵이었다. 그는 이 부분의 일부(H5c: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발전)를 떼어 내어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하는 서론으로 쓰기로 했다. 기왕에 썼던 부분 중 슈티르너의 위계체제를 비판한 부분 중의 일부(H5b: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개념) 그리고 바우어 비판의 일부(H5a: 욕망에서 생산, 역사적 생산으로 즉 역사의 논리적 구성)를 결합했다. 이렇게 마르크스가 자기의 입장을 밝히는 서론 격으로 모아놓은 부분은 내용상 포이어바흐 비판과 중첩되므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의 장 즉 1장으로 변화됐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여전히 포이어바흐의 입장에 머무르는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마르스와 엥겔스는 2권을 쓰면서 독일 사회주의(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하는 원고를 작성했다. 이때가 1846년 2월에서 4월 사이이다. 진정 사회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주로 헤스에 집중됐다. 특히 그가 발표한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1943)와 『사회의 거울』에 발표한 『최근 철학자들』(1845년 6월)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다.
1권의 중심 원고는 1846년 3월 24일 완성했고, 엥겔스와 바이데마이어가 필사했다. 1846년 4월 3장 슈티르너 비판 부분의 정서도 마쳐서,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원고를 베스트팔렌으로 보냈다. 4월 중순에서 5월 말 사이에는 2장 바우어 비판의 정서도 마쳤다. 그러나 아직 1장 포이어바흐 장은 여전히 개편하는 중이었다. 이어서 2권 진정 사회주의 비판(H12, 2권 1장), 칼 그륀 비판(H13, 2권 4장)도 원고를 완성했다.
계간지 발간 합의 이후 2권에 실릴 다른 작가들의 글은 베르트Georg Weerth, 베르네이즈Karl Ludwig Bernays, 바이틀링Wilhelm Weitling, 헤스Mose Hess의 글이다. 공산주의자 바이틀링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헤스와 가까운 진정 사회주의자다. 2권에 실리는 다른 작가 즉 진정 사회주의자의 원고도 이 시기에 완성됐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른 작가의 원고는 거의 수정 없이 편집했으나 헤스가 쿨만을 비판한 원고(2권 5장)에 대해서는 엥겔스가 개입해서 헤스의 비판적 논조를 더 강화했다. 이런 작업은 1847년 5월 말까지 전개됐다.

(3) 수고 발간의 난파
마르크스는 프랑스 체류 시기(1843~1845)에 루게와 『독불 연보』를 편집했다. 이 연보가 중단된 이후, 마르크스는 진정 사회주의자 피트만이 주도하는 『라인 연보』의 편집자로 추천됐으나, 마르크스는 피트만과 협력을 거부했다. 대신 공산주의자 바이틀링과 영국에서 계간지를 발간하려 했다. 『라인 연보』도 곧 탄압을 받자, 출판사 사장인 레스케는 마르크스와 검열받지 않는 계간지를 발간하기로 계획했다. 1845년 11월 말 사업가이자 진정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율리우스 마이어와 루돌프 램펠이 이 계간지의 재정을 지원하기로 약속하면서 계간지 발간이 가능하게 됐다. 이 시기에 앞에서 말했듯이 마르크스,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2권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계간지 발간 계획이 좌초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마르크스, 엥겔스가 진정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가진 것이 진정 사회주의자에게 알려진 것도 한 원인이 됐다. 브뤼셀에서 한때 공동생활을 하기도 한 헤스와의 충돌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런 충돌 이후 헤스는 1846년 3월 말 벨버Velver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스를 추종하는 사업가 메이어와 램펠과도 소원해졌다.
게다가 메이어와 램펠은 이 시기 재정적인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재정을 보조할 서적 판매상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럼펠은 1846년 1월 서적상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정을 들어서 헤스에게 편지를 내어 계간지 발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사이 일어난 헤스와 마르크스의 충돌은 갈등을 강화했다. 결국 1846년 5월 기존의 합의는 해소되고 말았다. 마르크스는 이를 직접 듣지 못했고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간접으로 전해 들었다.
계간지 발간이 난파한 다음에도 마르크스, 엥겔스는 원고를 단행본으로 발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런 사이 1847년 6월에 1장 포이어바흐 장의 개편이 시도됐다.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쪽을 다시 매겼다. 원고는 다시 정서를 시작했다. 이 정서는 주로 엥겔스가 맡았다. 그래서 정서본(H3, H5)이 남았다. 그리고 1장 서문을 썼다. 두 번이나 쓴 것(H2, H3)을 폐기하고 새로 썼다. 남아 있는 H4가 최종 완성된 1장 서문이다. 최종적으로 1권 서문(H1)이 마르크스를 통해 독자적으로 작성됐다.
거듭된 출판 시도는 끝내 좌절됐다. 처음 2권으로 단행본을 발간하려던 계획은 다시 축소해 2권 가운데 다시 다른 작가의 글을 배제한 채 1권으로 통합해서 발간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했다.
베스트팔렌에 보냈던 원고는 바이데마이어를 통해 쾰른의 다니엘에게 전달됐으나 1847년 겨울 쾰른의 원고는 다시 마르크스의 손으로 돌아왔다. 마르크스는 돌아온 원고 중 슈티르너 부분(H11)의 구조를 개편하고, 축약하고 쪽수를 부여했다. 엥겔스는 진정 사회주의를 다시 비판할 필요성을 느끼고 글(H15)을 다시 작성했다. 마르크스, 엥겔스는 그때까지도 출판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판이 지지부진한 사이 헤스가 쓴 루게 비판 논문 『도토레 그라찌아노』는 『독일 브뤼셀 신문』 1847년 8/9월 호에 독자적으로 발표됐다. 2권 가운데 진정 사회주의자인 벡과 그륀을 비판하는 2장과 4장은 1847년 말에 『독일 브뤼셀 신문』에 독자적으로 발표됐다. 그때 제목이 「진정 사회주의의 시와 산문」이다.
결국 1847년 겨울에 이르면 출판의 모든 시도가 포기됐다. 원고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아직 분명한 이름이나 구조도 부여되지 않았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름과 구조를 유추할 수는 있다. 1846년 여름 계간지에 실릴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고와 1847년 겨울 단행본 출판을 위한 광고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전자에서 우리는 수고의 구조를 알 수 있고 후자에서 우리는 수고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이 『독일 이데올로기』이다.

(4) 전승
12년 뒤 마르크스는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해』 서문에서 『독일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자기 해명에 두었다는 언급을 남겼다. 그는 역사에 관한 자기 이해가 분명해진 다음 수고는 쥐가 쏠아 먹는 대로 방치했다고 한다.
마르크스 사후에 원고는 엥겔스 손으로 넘어갔다. 엥겔스는 유고를 편제했으며, 1장 포이어바흐 장에 제목을 부여했다. 엥겔스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에서 수고를 참고했다고 했으며,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 「포이어바흐 테제」를 조금 수정해 실었다. 그는 수고를 세 뭉치로 나누어 보관했다.
엥겔스 사후 유고는 베른슈타인과 베벨의 손에 나누어져 전달됐다. 그 후 1924년 리야자노프David Rjazanov의 손으로 마르크스 엥겔스 문고로 편집됐고, 1926년 독일어판으로 발간했다.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의 아도라츠키Vladimir Adoratskij가 새로 편집했다. 이 편집본은 1932년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Marx Engels Gesammelte Aausgabe』[GA1]로 발간됐다.
리야자노프는 1장을 수고의 쪽수 대로 편집했으나, 아도라츠키는 1장에서 마르크스가 방주로 남긴 편집 지시에 따라 재편했다. 아도라츠키판은 동독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arx Engels Werke)』(Dietz Verlag, 1958)(W, 3권)을 작성할 때 기초가 됐다.
그 후 W 편집을 비판하는 여러 시도가 등장했다. 1965년 소련공산당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에서 바가투리아Georgi Bagaturia가 리야자노프판에 따라 새로 편집했다. 이 편집본은 1966년 단행본으로 발간됐고, 1969년 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에서 영어본(Marx Engels Collected Works[CW])으로 출판됐다.
그 뒤 일본의 히로마쓰 와타루가 1장을 시험적으로 편집했으며, 2003 타우버트Inge Taubert 등이 다시 1장을 시험적으로 편집해 『마르크스 엥겔스 연보 2003』(연보판)에 발표했다. 최근 2018년 국제 마르크스 엥겔스 재단(Internationaenl Marx Engels Stiftung[IMES])은 마르크스 엥겔스 총서를 다시 출판하면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총서 1/5권(Marx Engels Gesammelte Aausgabe』[GA2])으로 발표했다. 이 판본은 라야자노프와 바가투리아의 판본을 따라 수고의 쪽에 따라 편집했다. 바가투리아가 1장의 수고에서 좌단과 우단으로 나누어진 글을 지그재그식으로 연결해 편집한 반면, GA2판은 수고의 좌, 우단을 그대로 편집해 수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다. 아래에서 W, CW(바가투리아판), GA2의 편집을 비교해 보았다.
참고로 각 판본의 출판 사항을 아래에 밝힌다.

W 3권:
원본:
소련 공산당 중앙위 부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연구소, GA1 5권, 1932
편집 고문: Vladimir Adoratskij
독일어판:
독일 민주 공화국 통일 사회당 부설 마르크스 레닌 연구소, W 3권, 1958
편집 Ludwig Arnold
교열 Walter Schulz

CW 5 권:
출판사: Progress, Moscow, 1969
Lawrence 8c Wishart, London, 1973
편집 고문: Georgi Bagaturia
편집자: Vladimir Bruschlinsky
서문, 주석, 주제 색인: Lev Churbanow
인물 색인, 인용문헌, 정기 간행물 색인: Nina Loiko
영어 번역:
라이프치히 공의회(2, 3장), 엥겔스 진정 사회주의자: Clemens Dutt
포이어바흐 장: W.Lough
2권: C.P.Mgill
영어판 편집: Maurice Cornforth, E. J. Hobsbawm, James Klugmann, Margaret
Mynatt. Salo Ryazanskaya,
감수: Lydia Belyakova, Nadezhda Rudenko, Victor Schnittke

GA2 5권:
책임: 국제 마르크스 엥겔스 재단
편집 위원회: Beatrix Bouvier, Fangguo Chai, Marcel van der Linden, Jürgen Herres, Gerald Hubmann, Götz Langkau, Izumi Omura, Teinosuke Otani, Claudia Reichel, Regina Roth, Ljudmila Vasina
출판: Walter de Gruyter, Berlin,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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