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데란다·그레이엄 하먼 대담, 김효진 옮김, 『실재론의 부상』(갈무리, 2025) 서평|글: 김진환(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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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의 부상』 서평

 

김진환 (단국대학교 외국어대학 조교수)

 

실재론이 부상했다. 2007년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열린 한 워크숍의 제목으로 사용된 일을 기점으로 ‘사변적 실재론’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관련 서적과 연구의 숫자뿐만 아니라, ‘After Speculative Realism’이라는 상징적인 제목의 저서를 통해 논의의 활발함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최초의 시작’ 이후, 딱 10년 만인 2017년에 해당 저서의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다시 8년 뒤, 비상 중인 실재론에 관한 이야기가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다.

이 책의 대담자 중 한 명이자 한국어판 서평을 쓴 ‘객체’인 그레이엄 하먼은 자신이 ‘새로운 철학’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후, 매우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책을 출간하고 있다. 하먼의 이런 모습은 일견 슬라보예 지젝을 닮아 있기도 하다. 학문의 활동 기반은 상이하겠으나, 어디에선가 하먼 스스로가 밝힌 것처럼, 지젝의 학문적 생산력은 그의 이론에 대한 왈가왈부와는 별도로 일정 정도의 존중을 받을 만하다. 그래서인지 하먼도 지젝의 ‘뒤를 따라’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앉으면 책 한 권 정도는 뚝딱인 지젝에게 ‘동어반복’이라는 비판이 있듯, 하먼도 유사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은 그토록 하먼이 ‘많은 말’을 함으로써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히 정리하기에 알맞은 책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책이 되어준다.

『실재론의 부상』은 ‘그레이엄 하먼’이라는 객체와 ‘마누엘 데란다’라는 객체의 만남에 관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일차적 이점은 하먼과 데란다 각각의 이론 체계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하먼이든 데란다든 둘 중 한 명에게만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하먼과 데란다 각자가 말하려는 바를 보다 명료히 정리할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목차를 보면 쉬이 다가가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 ‘실재론’, ‘유물론’, ‘반실재론’, ‘존재론’, ‘인지’, ‘시간’, ‘공간’, ‘과학’, ‘경험’ 등 그 자체로 책 한 권은 충분히 나올 주제들이 병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책 한 권에서 다룬다는 것이, 그것도 그다지 길지 않은 책에서 다룬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이 굳이 회의적일 필요는 없다.

이 지점에 이 책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이점이 있다.

 

하먼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지성사에서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서로의 노력을 알지 못한 채로 어떤 유사한 관념을 동시에 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본문 5쪽). 이는 당연히 자신과 데란다를 말한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 입문』(갈무리, 2023)이라는 저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뛰어난 동료들’로 레비 브라이언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을 언급한 바 있기도 하다(15쪽). 이 이야기는, 하먼이든 데란다든 결국 다른 여러 철학자/이론가들과 학문적 결을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재론의 부상』은 하먼과 데란다의 대담이지만, 결국은 현재와 과거의 대담이다. 현재의 대표는 하먼-데란다-브라이언트-보고스트-모턴(이 연쇄는 계속될 수 있다)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객체이고, 과거의 대표는 이곳에서 세세히 다룰 수는 없는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모두 동일한 과거의 철학자를 참조점 삼아 자신의 학문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철학자-객체들이다.

과거가 우리에게 반드시 의미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꼭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 시간을 초월한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 과거와 유의미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대화의 주제는 이제 주체중심적 세계관, 즉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로 구성된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책에 접근한다면, 독자는 하먼에 더 동의하거나 데란다에 더 동의하거나 할 필요성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먼이 이야기한 것처럼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공유하고 있을 수 있는 오늘날의 사유는 무엇인지에 집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대상화해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것을 ‘잘’ 이해하면 또한 그것을 ‘잘’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독법이 읽지 못하는 것은 대상화할 수 없는 것을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또한 언제나 ‘역사적’ 이론체계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대상화해 읽는 자신이 처한 위치다. 하먼도 데란다도 (사변적) 실재론도 역사의 특정 시점에 등장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될 유한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토마스 렘케(독일의 사회학자)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들[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접근과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실재론적 확신을 공유하지만, 현존하는 것에 관한 사변을, 존재를 (인간의) 사유와 지식의 범주들에 한정하지 않은 채로 실행할 것을 권함으로써 전통적인 실재론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사물의 통치』, 갈무리, 2024, 44쪽)

사변적 실재론은 실천적 개입이지 체계적 설명이 아니다. 여기에서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체계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세상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제공하는 데 (사변적) 실재론의 의의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실재론의 부상』은 실재론이 ‘실제로’ 부상했음을 이야기하려는 자기 변론이 아니다. 실재론이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유일하게 우리가 처한 21세기의 문제의식의 지평 위에 이 책이 위치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로의 의견에 반대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이론을 방어하면서도 그들이 공통으로 경계하는 것은 과거로의 ‘단순한’ 회귀다. 오늘날은 문제의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에 문제에 대한 담론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실재론은 ‘실재론’을 밀어내고 스스로 ‘새로운’ 실재론으로 부상 중이다.

 

☞ 실재론의부상-보도자료-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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