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69)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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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69)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동굴의 비유(제7권 514a-521b) – (I)

 

[514a-517c]

* 이제 우리의 논의는 제7권에 들어섰다. 소크라테스는 선분의 비유에 이어 동굴의 비유를 꺼내 들면서 우선 그것의 기본 성격부터 밝힌다. 즉 동굴의 비유는 ‘교육받음παιδεία과 교육받지 못함ἀπαιδευσία과 관련해서 본 우리 본성φύσις의 상태πάθος와 비슷한 것’이라 밝힌다. 그런 연후 아래와 같이 상상해 보자ἀπείκασον는 말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한다. 동굴의 비유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최대한 살려 비교적 자세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C1>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지하에 있는 동굴σπήλαιον 형태의 거처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거처는 동굴의 폭만큼 넓은 입구εἴσοδος가 빛φάος 쪽으로 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ἐκ παίδων 다리σκέλος와 목αὐχήν이 묶여 있어ὄντας ἐν δεσμοῖς 머리κεφαλή를 돌릴 수 없는 채 앞πρόσθεν만 보게 되어있다.(514a).

b) 그들 뒤쪽으로는 위쪽으로ἄνωθεν 멀리 불빛φάος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πῦρ과 수감자δεσμώτης들 사이에는 수감자들 위에 가로로 길ὁδός이 나 있고 길을 따라 담장τειχίον이 세워져 있다. 담장은 인형극 하는θαυματοποιός 사람들이 인형들θαῦμα만 보이게 사람들 앞에 쳐 놓은 가림막παράφραγμα같은 것이다.(514b-c)

c) 이 담장을 따라서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돌이나 나무나 온갖 재료로 만들어진 인물상ἀνδριάς이나 다른 동물 모형ζῷα λίθινά을 담장 위로 쳐들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면서 어떤 이들은 조용히 이것들을 들고 다닌다.(515a)

* 글라우콘이 ‘이상한ἄτοπος 비유εἰκών와 이상한 수감자들’이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ὅμοιος 자들’이라고 말하고 아래와 같이 비유를 이어간다.(515a)

d) 그들은 저 불로 인해 자기들 맞은편 동굴 벽에 생긴 그림자σκιά들을 보는 것 외에 자신들의 모습이나 서로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들 뒤에서 운반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이 서로 대화διαλέγεσθαι를 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보는 것들을 ‘있는 것들’τὰ ὄντα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515a-b)

e) 그들의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ἠχώ도,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중에 누군가가τις 소리를 내면φθέγξαιτο, 그들은 그 소리를 벽 위를 지나다니는 그림자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한다.(515b) 그래서 그들은 인공물σκευαστής들의 그림자들만을 오로지 참된 것τὸ ἀληθὲς이라고 믿는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본성에 맞게φύσει 일어났을 때 즉 그들이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 그들의 어리석음ἀφροσύνη이 치유ἴασις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자고 말한다.(515c)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f) 누군가가 풀려나서는λυθείη 일어서서ἀνίστασθαι 고개를 돌리고περιάγειν τὸν αὐχένα 걸어가 빛φάος을 보도록ἀναβλέπειν 갑자기ἐξαίφνης 강제된다고ἀναγκάζοιτο 해보자. 그리고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ἀλγοῖ, 전에 그 그림자들만을 보았던 원본들ἐκεῖνα을 눈부심μαρμαρυγή 때문에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515c-d)

g) 누군가가 그에게 전에는 그가 엉터리φλυαρία를 보았는데 이제는 ‘있는ὄντος 것’에 더 가까이 왔고 ‘더 있는μᾶλλον ὄντα 것’들을 향해 있어서 더 제대로ὀρθός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게다가 담장을 따라 지나다니는 것들 각각을 그에게 지목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대답을 강요한다면, 그는 당혹해하며 전에 보았던 것들을 지금 지목되는 것들보다 더 참된ἀληθέστερα 것으로 여길 것이다.(515d)

h) 그리고 또 빛 자체 αὐτὸ τὸ φῶς를 보도록 그를 강제한다면ἀναγκάζοι, 그는 눈ὄμμα이 아파서ἀλγεῖν 자신이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쪽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φεύγειν 하고 그것들이 지금 제시되는 것들보다 실제로 더 명확한σαφέστερα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515e)

 

<C3> 누군가에 이끌려 거칠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동굴 바깥에 도달한 상태

 

i) 거기서부터 누군가가 거칠고τραχύς 가파른ἀνάντης 오르막길ἀνάβασις을 통해 그를 억지로βίᾳ 끌고 가면서 태양의 빛τὸ τοῦ ἡλίου φῶς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기ἐξελκύσειεν 전에는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ὀδυνᾶσθαι 끌려온ἑλκόμενον 것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ἀγανακτεῖν(515e-516a)

j) 그럼에도 그 누군가가 그를 태양의 빛까지 완전히 다 끌고 가서 빛에 도달하면 햇빛이 눈에 가득 차서μεστός 우리가 지금 참되다ἀληθής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단 하나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그가 위에 있는 것들을 보려면 익숙해짐συνήθεια이 필요할 것이다. 처음에는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을 제일 쉽게ῥᾷστα 볼 것이고, 다음에는 인간들이나 다른 것들의 물에 비친 영상 εἴδωλα을 볼 것이다.(516a)

 

<C4> 동굴 밖 빛에 점차 익숙해져 실물들 자체를 보고 하늘도 본 후 마침내 태양을 보게 된 상태

 

k) 동굴 밖 실물들의 그림자들과 인간 및 다른 것들의 영상을 본 후에 차츰 익숙해지면 마침내 그것들 자체 αὐτά를 볼 것이다. 이것들을 보고 나서는 하늘οὐρανός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구경할 텐데, 낮에 태양과 태양의 빛을 볼 때보다 밤에 별빛과 달빛을 볼 때 더 쉽게 구경할θεάσαιτο 수 있을 것이다.(516a)

l)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태양ἥλιος을 보게 될 것이다. 태양 자신의 자리ἕδρα가 아닌 물이나 다른 데에 비친 영상들φαντάσματα이 아니라 태양 자신의 장소χώρᾳ에 있는 태양 그것 자체αὐτὸν καθ᾽ αὑτὸν를 보고 그것이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을 것θεάσασθαι이다.(516b)

m) 그러고 나면 그는 비로소 태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하게 될συλλογίζοιτο 것이다. 즉 태양은 계절과 해를 가져다주고 눈에 보이는 영역의ἐν τῷ ὁρωμένῳ τόπῳ 모든 것을 관장하는ἐπιτροπεύων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는 그들이 보았던 저 모든 것들의 원인αἴτια이다. (516b-c) 글라우콘 역시 그러고 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C5> 태양을 본 후 처음 있던 거처 동료 수감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시 그곳으로 내려가는 상태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의 경우 아래와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n) 그는 처음에 있던 거처οἴκησις와 그곳에서의 지혜σοφία, 그리고 그때의 동료 수감자συνδεσμώτης들을 상기하고서, 자신은 자신의 변화μεταβολή 때문에 행복한데εὐδαιμονίζειν 그들은 불쌍하다ἐλεεῖν고 여길 것이다.(516c)

o) 그런데 거기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벽 위를 지나다니는 것들을 가장 예리하게 보고,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이 먼저 가고 어떤 것들이 나중에 가며 또 어떤 것들이 동시에 가곤 하는지를 가장 잘 기억하며,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그다음에 다가올 것을 가장 잘 예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명예τιμή와 칭찬ἔπαινος과 명예의 선물γέρας 등이 주어진다.(516c-d)

p)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와 칭찬 등을 탐내고 그들 사이에서 존경받고τιμωμένους 권세 부리는ἐνδυναστεύοντας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믿으며 그곳 사람들처럼 사느니, 호메로스 말대로 ‘제 땅도 없는 다른 사람 밑에서 머슴으로 밭일을 하는’ 처지가 되거나 또 다른 어떤 일을 겪더라도πεπονθέναι 차라리 그걸 받아들일 것이다.(516d-e)

q) 그리하여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동굴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시 동굴로 내려가 예전의 그 자리에 다시 앉을 경우 그는 태양으로부터 갑자기ἐξαίφνης 왔기 때문에 눈ὀφθαλμός이 어둠σκότος으로 가득 차게 되어 눈이 익숙συνήθεια해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516e)

r) 만약 그의 눈이 적응되기 전 침침한 상태에서 계속 수감 돼 있던 자들과 다시 그 그림자들을 분간하는γνωματεύοντα 시합을 벌인다면διαμιλλᾶσθαι 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위에 올라가더니 눈을 망쳐가지고 돌아왔으며, 올라가는 일은 시도해볼 가치조차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을 풀어주고λύειν 위로 데려가려는ἀνάγειν 사람은 어떻게든 손으로 붙잡아 죽일 수 있다면 죽일 것이다.ἀποκτεινύναι(517a)

*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이 동굴의 비유를 들어 그곳에 갇혀 사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풀려나와 태양을 보고 다시 내려간 사람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마친 후에 이제 이 비유εἰκών 전체를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에 적용해야προσαπτέον 한다고 말한다.(517a) 즉 ‘시각을 통해 보이는 곳’을’δι᾽ ὄψεως φαινομένην ἕδραν ‘감옥의 거처에’τῇ τοῦ δεσμωτηρίου οἰκήσει 대응시키고ἀφομοιοῦντα, ‘감옥에 있는 불빛을’τὸ δὲ τοῦ πυρὸς ἐν αὐτῇ φῶς ‘태양의 힘에’τῇ τοῦ ἡλίου δυνάμει 대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위로ἄνω 올라가는 것’ἀνάβασις과 ‘위에 있는 것들을 구경하는 것’θέαν τῶν ἄνω을 영혼이 가지적인 영역νοητὸν τόπον으로 등정ἄνοδος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517a)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는 경우 내가 추측(기대)하는 바ἐλπίς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추측하는 것이 실제로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렇게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 다름 아닌 ‘알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가장 마지막에 겨우 볼 수 있는 것’ἐν τῷ γνωστῷ τελευταία ἡ τοῦ ἀγαθοῦ ἰδέα καὶ μόγις ὁρᾶσθαι으로서 좋음의 형상‘이다.(517b)

* 좋음의 형상을 보고 나면, ‘모든 경우에 그것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의 원인’πᾶσι πάντων αὕτη ὀρθῶν τε καὶ καλῶν αἰτία이며,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κύριος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자신이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ἀλήθειαν καὶ νοῦν 제공하며, 또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ἢ ἰδίᾳ ἢ δημοσίᾳ. ‘지각 있게 행동할’ἐμφρόνως πράξειν 사람은 그것을 보아야만 한다.ἰδεῖν’(517c)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51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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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의 비유에서 묘사되는 지하 동굴은 위 쪽(입구 쪽)으로 거칠고 가파른 경사길 형태이지만 설명에 따라 횡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위 정리 글에 나오는 다섯 단계(C1, C2, C3, C4, C5)는 플라톤이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동굴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을 보면 아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앞서 살핀 선분의 비유에서 거론되는 대상들에 국한해서 보면 거의 상응하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비유들을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것들 간의 상응 관계를 단계별로 구분해 연구해 왔고 우리 논의 또한 설명의 편의상 그간 대체로 합의된 구분에 따른 것이다. 다만 C5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동굴의 비유에서 좋음의 이데아가 각별하게 언급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따로 구분해 표시한 것이다.

선분의 비유 L1 L2 L3 L4
영상 실물 도형들 형상들
동굴의 비유 C1 C2 C3 C4
모형들 그림자 모형들(인형들) 실물의 그림자 실물들

 

* 그러나 그 상응관계에 대한 이해가 비유들 전체 또는 플라톤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 비유들에 나타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상응시켜 통일적으로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다. 플라톤이 세 가지 비유를 든 것 자체가 이미 각 비유 나름의 특징과 취지가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각기 다른 성격을 갖고 제시된 비유 상의 모든 표현을 등치적인 관점에서 어떻게든 상응시켜 보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비유의 진의를 왜곡시킬 수 있다. 게다가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와 달리 인식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그 외에 수감자들과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풀려난 수감자를 이끌고 가는 사람과 그 등정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갈등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다소 도식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선분의 비유에 비해 동굴의 비유가 좀 더 다각적이고도 풍부한 요소들을 두루 포함하면서 기술 또한 매우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동굴의 비유가 포함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에 상응하는 것들을 구성요소가 단순한 다른 비유들에서 일일이 찾아내 꿰맞추기란 처음부터 불가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러한 요소들 전부를 어떻게든 선분의 비유에 상응시켜 꿰맞추려 하는 경우 플라톤의 진의는 당연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나중 또 거론되겠지만 미리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이를테면 선분의 비유에서 L2가 L1의 상위 인식 단계이듯이 동굴의 위 방향이 진리 인식에 가까운 쪽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C2에서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까지 모형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C1에 나오는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상위의 사람들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동굴의 비유에서 수감자와 모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선분의 비유에서처럼 명백성을 기준으로 한 인식 능력상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위계로 말하자면 계급적 신분적 차이만 가질 뿐이다. 차츰 드러나겠지만 온갖 모형들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정보를 왜곡하고 선동하는 정치 권력자들과 그들에 부역하는 지식인들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들은 풀려난 수감자들이 다다라야 할 인식 상 상위 단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피해가야 할 사람들이다. 설사 앎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그들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결코 지자(智者)가 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만 한정해야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확대해서 추정할 것까지는 없다.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과 관련하여 선분의 비유와 상응하는 단계가 있다면 오직 오름길의 과정에서 인식 상태가 변화 발전하는 수감자들의 경우뿐이다. 굳이 동굴의 비유에서 모형을 들고 가는 사람들에 비교되는 사람을 들자면 수감자를 바깥 세계로 이끌고 가는 그 누군가를 꼽을 수 있다. 전자는 동굴 속에 머물러 있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선동 정치가들이나 소피스트들이고 후자는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고 진리에 다가서려는 자들 즉 철학자들이다.

* 이 점을 기본적으로 고려하면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에 앞서 각 단계별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플라톤 스스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할 때 밝혔듯이 동굴의 비유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 사항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과 교육받은 사람들의 본성과 관련한 상태의 변화라는 점이다.

 

<C1> 다리와 목이 결박되어 동굴 벽면 그림자들만 바라보는 상태

a) 이곳 수감자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결박되어 갇힌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수감자들을 ‘우리와 비슷한 자들’(515a)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겪는 특수한 수감 상태를 플라톤은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비유는 비유자의 생각을 좀 더 잘 드러내기 위해 비유와 관련한 전체 상황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만 한정하여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플라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교육받지 못한 본성의 상태와 교육받은 본성의 상태를 그리고 있음을 고려하면 비유 상 수감의 상태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컨대 이곳에서 말하는 수감 또는 결박의 상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릇된 정보와 편견에 사로잡힌 채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본성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일상의 표현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편견에 빠져 있는 경우들을 표현할 때 ‘사로잡혀 있다’, ‘갇혀 있다’는 말을 쓰곤 한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의 경우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경우 ‘우리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b) 514b ‘위쪽으로’ἄνωθεν : 이 표현은 플라톤이 교육의 방향을 표현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 특히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자가 누군가를 위쪽으로 이끄는 모습’(175b)은 <국가>에서 자신이 그렸던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동굴 바깥쪽으로 끌고 나가는 모습’(<국가> 515e)을 연상하며 쓰기라도 한 듯 내용이 아주 똑같다.(<소피스트> 216c, <파이드로스> 109a ff, 키케로 <신들의 본성>de nat. deor. II 95, 아이스퀼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447—453도 참고) 그러나 앞서도 살폈듯이 불빛과 수감자들 사이 가로로 난 길을 모형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은 수감자들 위쪽에 있으나 그들이 수감자들보다 인식의 위계 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고 앞서 비유들 사이의 상응 관계를 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을 거론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도 어떤 연구자들은 C1의 수감자들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말과 그 사람들이 ‘그림자를 참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지나치게 연관하여 C1과 L1의 상응관계가 갖는 한계와 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분의 비유에서 우리 일상의 사람들은 그림자가 아닌 실물들을 참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은 동굴의 비유에서 C1이 아니라 그림자의 원본 즉 모형들이 있는 C2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L1과 C1의 상응관계는 앞서도 살폈듯이 인식 대상의 명백성을 기준으로 가장 낮은 단계인 L1 영상에 상응하여 모형의 그림자가 있는 C1을 상응시킨 것뿐이다. 그러한 비판은 비교의 중심축을 필요 이상으로 사람에까지 확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분의 비유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특정의 사람이 논의의 요소로 등장하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낮은 인식 단계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플라톤이 우리 일상인들 모두가 그림자들만 보고 산다고 여겼을 리도 만무하다. 이 모두 어떻게든 두 비유 간의 상응관계를 모든 요소나 모든 정황에 다 꿰맞추어 보려는 무리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C1에서 C2로 고개를 돌려 불빛을 보고 눈부셔하는 것과 달리 선분의 비유 상 L1 영상에서 L2 실물을 볼 때 누구도 눈부셔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살폈듯이 선분의 비유 상 L1과 L2와 동굴의 비유 C1과 C2의 상응 관계는 인식의 대상들 즉 그림자와 모형들의 인식론적 차별성에 주목하여 적용한 것이지 굳이 무리해서 적용 범위에 사람이나 정황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크게 보면 C1이건 C2이건 간에 그것들 모두 인식의 대상의 측면에서 차별을 가질 뿐 그곳의 정황 모두는 선분의 비유 상 가시적인 세계 즉 믿음(doxa)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에서 인식과 진리의 위계상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어쨌거나 각 비유들은 나름의 각기 다른 비유 목적을 갖고 말 그대로 비유로 표현된 것들을 일일이 다 논리적인 언어로 환원하여 어떻게든 연결 상응시키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영미 분석철학 중심의 일부 연구 경향들이 그러하듯 생동하는 대화로 구성된 플라톤의 텍스트나 비유들을 미시적인 관점에서 갈가리 찢어가며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나름대로 장점도 있겠으나 그곳에만 매달리면 배가 산으로 오르듯 정작 핵심을 벗어날 수 있다. 마치 유행이라도 하듯 호메로스 시가에 대한 분석적 미시적 접근이 초래한 폐해를 반성하여 <Who killed Homer>(V. D. Hanson, J Heath, 2001)란 책이 출간되었듯이 머지않아 비슷한 취지에서 <Who killed Plato>란 책이 출간될지도 모른다.

c) 인형극에서처럼 가림막 담장 위로 모형을 들고 소리 내며 오가는 사람들은 왜곡된 정보와 사실을 생산하고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당대 기득권자들과 선동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영합하고 부역하는 소피스트들 내지 가짜 철학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감자들은 이들의 선동에 사로잡혀 사물과 사태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정보로 서로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일삼는 대다수의 사람들, 플라톤의 표현대로 ‘우리와 비슷한 자들’을 가리킨다.

d) 이곳에 그려진 수감자들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의심이 증폭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일방적으로 지배층이 만들어 유포한 정보만을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한 사실로 믿고 살아가는 당대 아테네 대중들을 표현한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대중의 집단 심리를 이용한 권력자들의 현란한 수사술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과 합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내지 의욕 자체를 상실한 채, 거짓과 편견, 독단과 아집으로 분열과 혐오의 언어들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나라와 서로를 파괴하는 이기적 송사와 분열에 매몰되어 있었다.

e) 맞은편에서 울리는 메아리, 벽면 그림자가 내는 소리는 모두 직접적인 정보가 아니라 2차적으로 전달된 간접적인 정보들이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이 보고 듣고 의존하는 정보 대부분은 간접 정보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정보들의 진실 여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같은 처지에 사람들이 서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그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함께 의심도 하고 대화도 해가며 서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 그러한 소통과 대화의 여유조차 갖기 힘든 대중들이 그러한 소통 능력을 함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정치 권력자들은 대중의 소통 능력을 그들 자신에 대한 비판 능력으로만 여겨 되레 그 능력의 신장을 방해하기 일쑤이다. 사실 대규모로 정보 생산 능력을 갖춘 일부 특정 집단이 자기 이익에 맞추어 정보를 가공하여 나라 전체가 울릴 정도로 대규모로 소리 내어 유포할 경우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달리 생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나라에서 대중들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여 주류 언론집단과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을 뚫고 무도하기 짝이 없는 권력자를 끌어내린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515c ‘다음과 같은 일이 본성에 맞게 일어났을 때’ : 이곳에서 ‘본성에 맞게physei 일어났을 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실제로 결박으로부터 풀려났을 때’로 볼 수 있고(Ast, Stallbaum), 수감자가 언젠가는 풀려난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연스런 진행 과정에 따라 풀려났을 때’(J. Schneider, 박종현) 또는 ‘아무도 모르게’(J. Nettleship)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플라톤의 의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수감자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앞서 살폈듯이 독단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리들 비슷한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면 수감 상태에서 풀려난 것을 곧이곧대로 실제 죄수로 감옥 생활을 하다가 만기 등의 이유로 석방되는 상황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기서 동굴의 비유를 시작하면서 플라톤이 그 비유가 ‘교육받지 못한 자와 교육받은 자의 본성physis의 상태를 닮은 것’이라고 한 말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수감 상태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만기출소같이 어떤 수동적인 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감자 자신 어떤 일을 계기로 수감 상태가 본성에 맞지 않음을 깨닫고 그 미망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이때 수감자가 맞이한 어떤 계기란 이를테면 플라톤 자신이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건 누구의 소개로건 소크라테스 같은 선생을 만나 철학을 접하고 무언가 자신의 상태가 무언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상황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어둠 속에서 빛과 진리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본성에 거스르는’(para physin)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의 풀려남은 그들의 본성에 부합하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암학당 역본(2025년 말 출간 예정)은 ‘결박에서 해방된 상태가 그들의 본성에 맞는다’는 취지에서 phsei를 ‘본성에 맞게’로 번역하고 있다. 이후 수감자는 이같이 수감 상태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누군가에 의해 갑자기 강제되기에 이르는데 이 상태가 곧 철학 교육이 개시되는 상태 즉 이어지는 C2의 상태라 하겠다. 빛을 향한 오름길에서 교육적 당위를 처음에 강제로 느끼는 것이나 이내 그것을 감내하려 마음을 먹는 것 모두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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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랍게도 2,500년 전에 기술된 플라톤의 동굴 속 장면은 오늘날 누군가가 제작한 특정 내용이나 스토리를 담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 스크린에 상연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을 관객들이 몰입해서 바라보는 현대 극장의 모습과 거의 그대로 닮아있다. 물론 우리는 극장을 나와 실제 일상의 생활을 보내지만, 일상에서조차 대부분 정보는 대자본을 토대로 세워진 정보 통신업체가 제작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 등 사이버 문화에 크게 의존해 있다. 그리고 유튜브나 SNS 매체 등 개인이 정보를 생산하는 장치가 크게 발전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들 대부분은 그곳을 통해 균형 있는 정보를 얻기보다는 어떤 형태로건 이미 형성된 신념을 배타적으로 더 강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도권도 별 차이는 없지만, 특정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음식점이든 공공장소든 불문하고 특정 종편 방송만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있고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일이 거의 일상화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서 평생 발과 목이 묶인 채 벽면에 비친 모형들의 그림자와 그곳에서 반향된 소리들만을 보고 들으며 그것들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수감자들이 이러한 상태를 정상으로 여기고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고 있는 한,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재료들로 모형을 만들어 그림자들을 비추어내는 사람들의 행태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수감자들의 그러한 상태를 보다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더 정교하고 그럴듯한 모형들을 좀 더 많은 공과 땀을 들여 제작하는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이고 수감자들은 그것들에 사로잡힌 그만큼 더 많고 큰 규모로 왜곡된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북한과 문화교류를 증진하는데 앞장섰던 우리나라 어느 문화인류학자조차 북한을 극장국가로 칭하고 있는 것도(『극장국가 북한』, 권헌익·정병호 공저, 창비, 2013) 그리고 우리 사회 주류 언론인 조중동과 그들의 기득권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종편들 그리고 혐오와 분노만을 부추기는 극우 유투버들 모두가 가히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가짜 뉴스와 정보조작의 온상으로 전락한 것도 플라톤이 그토록 우려했던 동굴 속 정황과 하나같이 일치하고 있다. 실로 그것은 20세기 나치즘과 파시즘의 광기 어린 프로퍼갠더 정책은 물론 오늘날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 문화와 정보 사회가 갖는 어두운 면들을 자연스레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것들 모두 반지성과 대중의 집단 심리의 허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라는 점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한 플라톤의 성찰은 오늘날 우리들 역시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매우 유효하고 적확한 비판이자 진심 어린 충고라 아니할 수 없다.

* 동굴의 비유를 선분의 비유와 연관해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무지 상태에 대한 비판이 먼저 떠오르지만, 위와 같이 동굴 속 상태 일반을 정치적 사회적 나아가 종교적 지평에로까지 확장해서 음미해보면 동굴의 비유는 오늘날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은 물론 종교 철학과 문명 비판, 정신 분석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하고 극복해야 할 철학적 난제들과 문제의식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앞으로 C2 단계에서 C5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동굴의 비유 내용을 살펴가며 그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어가기로 한다.    – 동굴의 비유 계속 –

 

다음 강해 :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I)

<C2> 결박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리고 걸어가 빛을 보도록 강제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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