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1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요구하는 문제는 나에게는 진리에 대한 칸트와 헤겔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1.2. 그들은 말한다. 진상 조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필요하다.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특별법 속에 정립해야 한다.
1.3. 칸트는 말한다. 진리를 알 수 있느냐의 문제는 먼저 인식 주체인 우리 자신의 능력 여부를 알아야 한다. 주체의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가 진리 탐구의 전제이다. 그런데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경험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모른다면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2. 헤겔은 칸트의 이런 물음을 간단히 일축한다. 내가 수영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는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 한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수영 능력이 가능한지 안 한지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레닌도 비슷하게 말한다. 말을 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말을 타봐야 안다고…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말을 타보지도 않고 가능한지 안 한지를 따지는 것은 공허한 형식주의 논쟁이다.
2.1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물 속을 들어가봤다고, 이미 말을 타봤다고. 조사권만 가졌던 과거사 진상조사위가 무기력하게 벽에 부딪혀 보지 않았냐고. 그래서 더 ‘성역없는’ 수사권이 필요하지 않는가고.
2.2 과거사 진상 조사위하고,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특검이 동일한 것인가?
2.3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초헌법적이라는 발상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반민특위가 가져보지 않았냐고.
2.4 반민특위는 그런 ‘성역없는’ 수사권으로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들은 경험을 경험했는가?
3.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면서 ‘성역 없는’ 조사권과 수사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칸트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들에겐 애시당초 참사의 진상은 알 수 없는 X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조건의 가능성 여부만이 관심사인지 모른다. 가능성의 조건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진상규명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실제 수사를 하면서, 재판을 하면서, 대책을 수립하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진상에 대한 접근은 형식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상 조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내용의 문제가 아닌가?
3.1 그들이 말하는 ‘성역없는’이 법리로 가능한가? 모든 ‘성역’은 정치 논쟁, 정치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3.2 한 시인은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선다. 그들이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곳에서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완전한’ ‘진실한’ 등 일련의 형용사들의 간계를 조심하지 않은 까닭에, 젊은이들의 정신이 정체하거나 부패하는 수가 있다. 힘겨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지구력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용사들을 미끼로 문제를 농담으로 유인해들이는 것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4. 아마도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능성의 조건만을 따지면서 벌이는 무한한 스콜라적인 신학 논쟁, 말하자면 공허한 정치 투쟁이 본질인지 모른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 목소리를 키우고, 맹주 역할을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5. 헤겔은 비판한다.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식을 도구로 간주하는 형식주의일 뿐이라고. 하지만 인식이라는 사고의 도구는 인식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에 관한 법률 조항도 현실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1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이 정신의 힘이다. 이러한 머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꾸는 마법의 힘이다.(헤겔)
6. 인식의 이런 선험주의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세상 안에서, 아니 세상 밖에서라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 기초) 이 착한 마음은 현실의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감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행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양심의 윤리이다. 하지만 그가 따르는 도덕법칙은 얼마나 공허한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 속의 의심할 수없는 양심! 엄숙주의와 자폐증, 또 이런 선은 얼마나 추상적이고 독단적인가?
7. 헤겔은 말한다. 양심과 추상적 선의 무기력을, 엄숙한 도덕적 주체의 공허함을…이 공허함과 부정성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노예의 종속 상태로 자신을 비하시키게 될 객관성에의 동경을…그들은 어떤 확고한 지주나 권위를 붙잡고자 한다(헤겔)! 교황을 열광하던 그 마음과 그 태도들을 보라.
8. 이제 우리는 더는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9. 마르크스는 말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생명력을 실천에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을 떠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리학적인 문제이다.”(포이에르바하 테제)
10. 노자는 말한다. “挫其銳(좌기예)하며, 解其紛(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며, 同其塵(동기진)이니라.”(도덕경)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헤치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진흙 구덩이 속에 함께 하라고…그렇다.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는가?
11. 이들의 말은 모두 한결같다. 직접 현실로 뛰어 들라고, 그 현실 속에서 풀어 헤치라고, 그 현실 속에서 확인하라고. 그 현실 속에서 바꾸라고…벌써 세월호 참사가 몇 개월이 지났는가?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끊이지 않는 형식주의 논쟁, 도덕적 엄숙주의, 종교적 순결 외에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는가? 그 끝은 어디로 가는가?
12.다른 시인은 말한다. “이 비정한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 많은 진단과 분석, 나라를 개조하자던 다짐들은 어디로 가고…증오와 불신과 비어들만 거리마다 넘치는가”(도종환, 광화문 광장에서) 혹시 그들은 이제 이처럼 희망을 상실한 비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우리는 스스로 만든 관념의 노예가 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들은 파리통 속에 빠진 파리들이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13. 특검은 구성도 못했는데, 정작 검찰과 법원은 수없이 조사하고 판단들을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판단들을 내렸다가 나중에 다 다시 뒤집으려는가?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의 판단…무한한 퇴행!
14. 나는 나의 이런 말들이 질주하는 욕망의 비계 덩어리들, 영혼이 없고 창이 없는 독단의 황제를 두둔하는 말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미워한다. 나의 말들은 다만 내 친구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어서 사라진 어린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사고를 싫어하고, 오직 편들기에만 열중하는 시대에 나도 내 말이 무익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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