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 19세기 동아시아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2)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 두 번째 글
19세기 동아시아
박영미(한철연 회원)
- 새로운 시대
동아시아의 근대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밀접하게 연관되어 한 국가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또한 한 중 일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근대의 모습은 함께 봤을 때 우리 자신을 보다 잘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근대를 이야기 하면 항상 전제되는 물음이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사실 이 두 물음은 하나이다. ‘근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로부터 ‘근대의 시작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동아시아 근대에 관한 이야기를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지는 않겠다. 『코렐젝의 개념사 사전』 서두에서 수십 년간의 개념사 연구에서 ‘근대’ ‘근대적’ ‘근대성’처럼 자주 다루어졌던 개념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근대’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고 그만큼 그 정의가 매우 넓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개념으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으려 한다. 시대에 대한 규정으로부터가 아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건들과 사유들을 읽고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연재의 마지막쯤에 우리의 근대에 대해 얼마간 정리해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서양이 가진 물리적 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의 출현과 그들과의 충돌(전쟁)이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예외 없이 근대의 기점을 서양과의 충돌에 두고 있다. 1840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1853년 일본에 대한 미국 페리함대의 개항 요구, 1860~70년대 한국과 프랑스 미국 일본의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다. 특히 함선에 포함된 거대한 철제 증기선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배였다. 일본에서는 이 배를 ‘흑선黑船’이라고 불렀다. ‘검은 배’라는 명명은 단순히 색을 묘사한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 즉 거대한 힘을 목도한 후의 무서움과 그 힘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었다. 각기 시기는 달랐지만 한 중 일이 경험한 사건은 동일했다. 그러나 대응은 동일하지 않았다. 공포는 동일했지만 그 배경과 강도는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힘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에 더 두려워했고, 중국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한국은 무지했거나 중국에 기댈 수 있다고 믿고 아무런 대비 없이 문을 걸어 잠갔다.
-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과 전면적으로 충돌 한 것은 중국이었다. 아편 매매를 둘러싼 중국과 영국의 대립은 결국 1840년 아편전쟁을 야기한다. 중국은 광주부터 영파 상해에 이르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한 후 마침내 1942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에 조인하고 개항을 한다. 이후 청조 타도를 외친 태평천국운동(1851~1864)에 의한 내적 충돌과 두 번째 아편전쟁(1860)으로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북경의 원명원이 불타는 외적 충격을 겪고서야 중국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1860~90년대 초반의 양무洋務운동과 1890년대 중반 이후의 변법變法운동을 통해 본 중국의 서양 수용과 변화의 양상은 비교적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다. 양무운동은 체제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제한적인 서양의 기술의 수용과 변화만을 허용했고, 서구 열강의 지배가 가속화되고 결국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한 후에야 서양과 같은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서양의 수용과 개혁이 시도되었다. 이때 양무운동을 이끈 집단은 청조의 관료들이었고, 변법운동을 이끈 집단은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변법운동도 결국 실패했지만 이들의 도전과 한계는 중국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기를 꿈꾸고 실행한 혁명(신해혁명)을 배태한다.
중국이 개항과 그 이후에도 서양과 계속 충돌했던 것에 반해 일본의 개항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1853년 에도 만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현한다. 페리는 이듬해 초 다시 와서 국교를 수립할 것과 기항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막부는 요구를 수용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당사자였던 청이나 조선에 비해 일본은 큰 위기의식을 가졌다. 당시 국제 정세 정보를 수집하면서 서구 열강의 움직임과 아편전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농민 분규와 재정 악화로 어려움에 직면했던 막부는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결정한다. 그리고 적극적 개국開國론자들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는 양이攘夷론자들에 의해 빠르게 변화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250여 년간 유지되었던 막부체제에서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고, 막부-번 체제의 한 축이었던 지방 권력과 무사 중심의 신분 제도 및 징병 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곧바로 서구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문명을 직접 보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구상한다(이와쿠라 사절단). 1889년 메이지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한 후, 러일전쟁 한국병합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길을 걷는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조선은 뒤늦게 서양과 여러 차례 충돌하고 일본에 문을 연다.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1864년 압록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했고, 1866년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병인교난에서 이루어진 선교사 살해의 책임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프랑스 해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한다(병인양요). 같은 해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서양 군대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서양의 기술을 통한 군비강화를 꾀한다. 그렇지만 1871년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조선군은 구식 총포와 활로, 무기가 없는 자는 맨주먹으로 싸웠다(신미양요). 이때는 중국은 자강自强을 위해 양무운동에 힘쓰고,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바꾸던 시기였다.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쇄국을 유지하던 조선의 대외정책은 비로소 변화했고, 1876년 일본 1880년대 서양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체결하며 굳게 닫혔던 문을 연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한 거대한 변화는 이미 임계점에 이른 내부의 문제들을 증폭시켰다. 내적 외적 갈등은 계속 중첩되었고(임오군란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은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문제들이 무엇인지, 그 해결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뒤늦게 변화의 필요를 자각하고 여러 집단에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위태롭게 서 있다 미끄러지기 시작한 한국은 멈추지 못하고 피식민被植民에 이른다.
- 시대를 이끈 힘에 관한 단상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을 한 걸음 물러서 보다보면 이 시대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일본은 흑선에 가졌던 공포가 컸던 만큼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빠르게 정치체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1871년에는 미국과 유럽에 조약 개정 교섭과 시찰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한다. 목표했던 조약 개정은 실패했지만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서양 12개국을 돌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보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건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국가를 기획했다. 100여 명의 사절단에는 젊은 관료들뿐 아니라 46명의 유학생이 포함되었다(여성 5명). 그 다음으로 눈이 가는 것은 중국의 변법운동이다. 청일전쟁의 패배, 일본의 근대적 발전에 자극 받은 강유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지식인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운동을 비판하며 서양의 정치와 사상의 수용을 통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1898년 무술변법으로 실현되었으나 결국 보수파에 의해 좌절된다. 변법운동은 좌절됐지만 이후 강유위 엄복 양계초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국가가 주도했고 변법운동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능동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는 점은 같다.
한국에도 이들과 동일한 인식과 실천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눈에 띄는 것은 동학농민전쟁이다. 새로운 시대의 한 축을 관료나 지식인뿐 아니라 농민도 담당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농민 반란의 빈번한 발생은 동아시아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전쟁처럼 농민이 전면에 나와 국가와 충돌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동학농민전쟁과 자주 비교되는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은 농민이 주도하지는 않았다). 종교적 성격과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반박도, 이전의 농민 반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박도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서양과의 충돌이라는 외부적 요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이 내부적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은 외적 요인을 시대의 중심에 놓고 이를 통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농민들에게 이와 같은 해결 방식은 너무 요원했고 상황은 절박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은 직접 교조 신원부터 그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요구 그리고 척왜양斥倭洋까지 주장했다. 이는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과는 분명 다른, 자생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체득하고 실천한 아래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
▪ 우리 근현대의 공간2 : 인천 개항 박물관
인천 개항 박물관은 개항기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여러 근대문물과 관련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바로 옆 건물이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이고, 멀지않은 곳에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