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외국인 범죄자=짐승’? 당신도 폭력의 공모자![철학자의 서재]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박사 과정)
*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1.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별다른 일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친구를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이었기에 수다도 금세 시들해졌고, 우리는 각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그만 집에 가는 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만 난데없이 눈물이 났다. 정말,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우는 나를 보며 친구는 몹시 당황했고,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눈물의 이유를 찾아야 할 텐데, 이유라고 할 만한 게 당최 없는 것이다.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애꿎은 책을 탓했다.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짜증도 나고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거라고,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바로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양효실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펴냄)이다. ‘최악의 저자 상’을 받을 정도로 문체가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한 버틀러이니만큼, 책이 어려워서 짜증이 났다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질질 짜면 어떻게 하냐는 둥, 서른 넘어 주책이라는 둥 핀잔을 주고받으며, 나와 친구는 그렇게 그 순간을 넘겼다.
그런 일이 있었던 지도 벌써 며칠이다. 그 사이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넘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삶>은 이해불가인 채로 있다. 그럼에도 감히,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울었던 그날, 하필 읽고 있던 책이 그 책이었고, 책을 덮기 전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65쪽)”라는 문장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고, 눈물이 터져 나온 건 아마도 그 순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2.
그 문장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울컥하게 만든 것일까? 겨우겨우 책을 읽고 난 뒤 이걸 확 던져버릴까 하다가 마침 그 일이 생각나서, 그 문장을 다시 찾아보았다. 삶이 애도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전혀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할 것이고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자격”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때문인 것 같다. “그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아”라든가, “내가 과연 이런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라고 말할 때처럼, 어떤 자질이나 능력, 조건 등을 평가할 때 “자격”이라는 낱말을 쓰는 게 아니던가? 혹시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자격(資格)
【명사】
1.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
2.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
역시,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다. “자격”이라는 낱말은 “과연 그럴 만한가?”를 물을 때 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그래서인지 “삶으로서의 자격”이라는 구절이 영 마뜩치 않다. 삶에 대해 자격을 운운하는 게 과연 말이나 되는가? 삶의 자격을 따지는 것은 누군가의 삶은 살 만한 삶이고 누군가의 삶은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판단 자체는 가능할 수 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묻는 것, 그것이 삶으로서의 자격을 따지는 거라면, 삶에 대해 자격 운운하는 것도 말은 되는 것 같다.
그래도 뭔가 찜찜하다. 삶에 대해 자격을 논할 수 있다고 치자. 어떤 삶이 자격을 갖춘 삶인지 판단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판단의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너에게는 삶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너의 삶은 살 만한 삶이 아니다. 너는 살아서는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은 누가 갖는 것인가? 그러한 “자격”을 갖춘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상황을 그려보았다. 나만의 상상이니 조금은 낯간지러워도 남에게 귀감을 주는 삶으로 평판이 자자한 그런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으련만, 한낱 가십거리밖에 안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 먼저 떠오른다. “걔 아직도 여전하다며?” “어머 어머, 그 나이 처먹도록 뭐 하고 살았다니?” 수군수군 수군수군.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거나, 큰 죄를 지었다거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도 누군가 내 삶을 비웃지는 않을까,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이 빠진다.
아마도 스스로가 “일반적인 삶의 패턴“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에 “일반적인 삶의 패턴”이라고 할 만한 게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평범한 삶, 보통의 삶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모델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사회지표를 나타내는 통계청 자료만 봐도 어떤 삶이 보통의 삶인지가 금방 드러난다. 2012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균 여성”은 29.1세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에 첫 아이를 낳는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5세~29세가 71.4퍼센트로 가장 높고, 30세~39세는 “결혼·육아 등으로” 55퍼센트 대 수준으로 크게 하락하였다가 40대 초반부터 다시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여성인구가 증가한다.
“평균 여성”의 삶에 비추어 보자면, 30대 초반인 나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한 명 키우고 있어야 하며,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거나 휴직을 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집에서 용돈을 받아쓰는 처지였다. 지금이야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고 있지만, 매달 40만 원의 월세는 아직도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다. 아이는커녕 아직 결혼도 안 했고 향후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평균 여성”의 삶에서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자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괴감을 키우고 스스로 위축된다. 삶에 떳떳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내가 꿈꾸는 “다른 삶”을 위한 준비 기간이 긴 것뿐이라고 자위해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이내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그 “다른 삶”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함을 들키기 싫어 괜히 센 척을 해본다. 내 삶이 아무리 비루해도, 그건 당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뭐람! 너나 잘 하세요!
3.
“자격”이란 말에 너무 발끈한 나머지, 정작 <불확실한 삶> 얘기를 못했다. 이 책은 버틀러가 2001년에 일어났던 전대미문의 사건인 9.11 이후에 쓴 다섯 편의 논문을 묶은 것이다. 9.11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매스컴을 통해 사건의 현장을 본 다른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충격과 공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폭력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 멀리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던 건 선정적으로 보도를 한 언론의 탓도 크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12쪽)”이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도 분명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든 예기치 못한 폭력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다.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슬픔에 젖게 만들기도 한다.
슬픔에 잠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버틀러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논문 중 특히 2장의 논문 ‘폭력, 애도, 정치’에서 그 주장이 강하게 드러난다. 어떤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 어떤 슬픔은 사유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세계 무역 센터의 희생자들은 말 그대로 “무고한 희생자”로 애도되고 신성하게 된다. 반면 미국의 “공정한 전쟁”에서 살해된 이들은 알려지지 않고, 따라서 애도되지 않는다. 애도될 수도 없다.
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인가? 누구의 삶이 삶다운 삶인가? 목적의 왕국의 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할진데, 어째서 누군가는 애도되고 누군가는 애도 받지 못하는 걸까?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런 서사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사람들과 나란히 사라진 삶 역시 인간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터넷에 올라오고 주로 이메일 접촉을 통해 유포되었던 몇몇 보도를 제외한다면 어딘가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된 아랍인들의 삶을 다룬 서사를 공적 매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애도할 수 있는 삶이 어떤 조건하에서 확립되고 유지되는지, 어떤 배제의 논리를 통해서, 그리고 어떤 삭제와 탈명사화(denominalization)의 실천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물어야 한다.(69~70쪽)”
이런 대답이 가능할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애도가 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배타적인 “인간”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시킨다.
우리나라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반응과,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가하는 차별만 봐도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특히 그 범죄가 살인 등의 강력 범죄였을 경우 그 사람은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묘사된다. 특정 개인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외국인 범죄”로 기술됨으로써 불특정 외국인에 대한 불안과 분노가 가중된다. 특히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은 모두 “한층 강화된 감시의 대상이 된다(71쪽).”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애도될 수 없기에 인간이 아니며, 인간이 아니기에 애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불안과 공포를 쉽게 그들에게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아무런 형태도 없는 인종차별주의,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게 된다.(71쪽)”
4.
예기치 못한 폭력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 자체로 공포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 드러나게 됐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살아가면서 상처를 피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처받기 쉽다는 취약성, 폭력에 노출되기 쉽다는 이 취약성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주는 건 아닐까? 이 취약성으로부터 배타적이지 않은 “인간” 개념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나는 “평균적인 삶”에서 먼 삶을 산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고백했다. “자격”이라는 단어에 너무 꽂힌 나머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 하지만 그때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 어쩌면 삶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피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취약성, 폭력에 대한 공포.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훅 밀려온 것이다.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러나 애도될 수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그 삶에 폭력이 가해진다고 한들 그것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자기-방어’의 요청에 의해 합리화되는 인종차별주의”가 쉽게 만연하듯이 말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폭력을 당했는데 나의 삶이 삶다운 삶이 아니어서 그 폭력이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 폭력을 당했는데, 누구도 내가 당한 폭력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을 해보자.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공포와 슬픔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무기력해지는데, 버틀러는 바로 그 슬픔을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자고 말한다.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50쪽)”
다른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의 운명이 당신의 운명과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횡단하는 것은 우리가 쉽게 반대 논증을 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49~50쪽).” 이러한 관계성,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49쪽)”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인간 공통의 취약성”이다.
인간 공통의 취약성은 “나”의 형성에 선행하는 조건, “우리가 붙잡고 논쟁할 수 없는, 처음부터 우리는 벌거벗은 상태였다는 조건이다.(61쪽)”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의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윤리적인 책임감, 즉 “우리가 직접 겪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다른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게 만들 원칙(60쪽)”이 나오는 것이다. 슬픔이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슬픔을 통해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이 제안하고자 한 것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폭력과 공모하는 우리,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 결과로서의 애도의 과제, 이런 조건에서 공동체의 토대를 찾는 것, 이 모두와 연관이 있는 정치적 삶의 차원을 고려하자(45쪽)”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슬픔이 정말 정치를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속 시원히 대답까지 해주면 좋으련만, 버틀러는 역시나 친절하지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 다른 사유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의 슬픔, 나의 불안, 나의 공포, 이 모두가 떨쳐버릴 수 없는 나의 취약성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제쳐두는 대신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보자. 그것이 다른 사유를 위한 첫걸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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