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d~521c] 좋음의 이데아,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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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좋음의 이데아

 

[502d] 남아있는 논의 : 정체의 보존자들이 어떻게 생기게 되는지, ①방법 ②교과(학문) ③활동 ④어떤 연령의 사람들이 그 각각에 관여할 때 생기는지

[502d~503d] 이 부분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앞서 건드리기 어려워 주저하고 있었던 문제에 관해 논한다. 처음 논의는 통치자 아내들의 소유에 관한 문제이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아내들의 소유에 관한 문제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것이고 실현되기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처음부터 추구하듯, 추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도 다시금 강조한다. 첫째로 통치자는 괴로운 일?즐거운 일을 겪더라도 나라를 사랑해야한다. 둘째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끝으로 이러한 원칙을 잘 지킨 통치자에 대해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예와 상을 주어야하고 살아서는 위의 원칙을 따르는 사람을 통치자로 옹립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위의 기본적 자세를 가진 자들을 옹립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즉, 철학자들이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선 철학자에 대한 성향(자질)들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그 성향을 모두 가진 이(철학자)가 드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철학자의 기본성향은 ①쉽게 배우고 ②기억력이 좋고 ③재치 있고 ④민첩하고 ⑤여타의 다른 성향들도 활기차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의 민첩한 성향은 그것에 의해 다른 성향들이 활기차게 하고 당당하게 한다. 혹여 그와 반대되는 ①조용함 ②안정됨 ③절도 있게 살아감 같은 성향들은 철학자에게는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민첩함이라는 성향이 그들을 스스로 이끌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철학자의 성향이 소수만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그 성향(자질)이 천성으로 결합된 상태에서 자라기는 힘들고 그 각각의 성향들마저도 대부분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들’이 소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503d] 앞서 설명한 철학자의 성향과 반대되는 ①조용함 ②안정됨 ③절도 있게 살아감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성격들이기에 그들은 믿음직한 진술들로 쉽게 이용되게 된다. 그들은 설령 전쟁에 대해서도 믿음직한 진술들에 의해 설득 당하게 되어 좀처럼 동요하지는 않지만, 배움에 임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인다. 즉, 그들은 배움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느끼는 경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라고 해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양쪽 성향을 훌륭히 겸비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교육/명예/통치 그 어떤 것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말한다. 아마도, 교육/명예/통치 와 같은 부분은 통치자가 관여해야할 부분이기에 진정한 통치자는 양쪽 성향을 모두 가져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503e]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자가 될 인물들이 가장 중요한(최고의) 학문들을 감당가능한지 시험하고 살펴보기 위해 그들에게 노고, 두려움, 쾌락 등을 시험해야하고 많은 교과 들을 통해서도 단련을 받아야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양쪽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504a~505a] 이 부분부터 ‘중요한(최고의) 학문’들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본격적인 선에 이데아에 관한개념이 등장한다. 우선 최고의 학문이란 것은 좋음의 이데아를 지칭한다. 구체적으로 이 부분은 [503e]에서 소개한 최고의 학문을 감당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왜 노고, 두려움, 쾌락을 시험받고 많은 교과들로 단련 받아야하는지 이유에 대해 말한다. 본질적으로 혼의 3요소인 절제, 용기, 지혜와 같은 것들을 훌륭하게 더 잘 알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다르며, 피해 돌아가야 하는 즉, 더 어려운 길을 거쳐야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길을 돌아옴으로써 척도(metron)가 실재에 미치게 하고자 함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개인이 가진 여러 가지 기준들(척도)이 좋음의 이데아(실재)에 다가가게 하기 위하여 어려운 방법으로 훈련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국가와 법률의 수호자(통치자)는 다양한 교과를 공부하는 것처럼 어려운 방법으로 시험받지 않는 다면 그들이 가지는 척도(metron)는 좋음의 이데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신체단련 못지않게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504e~505d] 우선 [504e~505a]에서는 좋음의 이데아가 ‘가장 큰(중요한) 배움’이자 이것 덕분에 올바른 것들과 그 밖의 다른 것들이 유용하고 유익한 것들도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것의 궁극적 원리(arche)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혹시 자네는 소유가, 정작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가? 혹은 ‘좋음’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아름다운 것이나 좋은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다도 그렇겠는가?”(국가, 429)

 

라는 질문을 글라우콘에게 던진다. 아마도 이 질문은 ‘좋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철인에게만 가지고 있는 관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지혜를 좋다고 생각하는 세련된 사람들이 그들도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좋음에 대한 지혜라고 말하는 점이나, 쾌락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다중들이 쾌락에는 나쁜 쾌락도 있음을 동의하는 데에서 보건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매우 부분적이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구체적인 좋음에 대한 정의(쾌락이나 지혜와 같은 정의)를 논할 때 달리하게 되고 단순히 좋음에 대한 것이라고 정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여겨지는(판단되는) 것들’(doxa의 것들)을 행하고, 소유하고, 택하겠지만 실제로 ‘좋은 것’들은 ‘doxa의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사실로 그런 것들’(ta onta)을 추구하기에 즉, ‘좋은 것’들은 실재의 세계(이데아계)의 것들을 추구하기에 의견(판단: doxa)를 경멸하게 된다.

[505e~506b]여기에서는 앞서 제시 미약한 정의들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공통된 ‘좋음’에 관한 속성을 종합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 정의를 도출한다. 좋음의 이데아라는 것은 모든 혼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좋음의 이데아가 있는지 혼은 예감은 하면서도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당혹해한다. 또한 그것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확고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이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원인 때문에 혼은 다른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좋음의 이데아를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즉, 지도자들이 그런 것들을 몰라서는 안 되며, 지도자들이 그것을 모를 경우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를 대단치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수호자가 이것을 제대로 아는 상태에서 정체(국가)를 다스린다면 그 정체(국가)는 완벽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506b~506e]글라우콘은 이때까지의 논의를 진행해오면서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신념 즉, 다른 사람들의 의견(doxa)을 논의에서 다뤄 왔지만 정작 자신의 신념(dogma)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의견(doxa)를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인식(앎: episteme)가 결여된 의견(판단:doxa)는 설령 그것이 가장 인식에 가까웠을 지라도 창피스런 것이라 말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눈은 멀었어도 길을 바로 가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글라우콘의 생각을 한 번 더 지적한다. 또한 ‘밝고 아름다운 것들을 남들한테서 들을 수 있으면서도, 창피스럽고 맹목적이며 일그러진 것들을 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그는 인간의 참된 것을 아는 인식(episteme)의 능력의 가능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의견(판단:doxa)의 것들로 빠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아마도 이러한 언급은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무지의 언명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어지는 글라우콘의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구체적인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자신 또한 좋음 자체를 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기에 불가능하다고 말하나 좋음의 소산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할 때 그것 자체를 설명해주기 보다 그와 가장 비슷하게 여겨지는 태양을 통해서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한다. 그리고 글라우콘은 진정한 ‘좋음’에 대해 설명 받지 못한 것을 아버지는 나중에 받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헬라어에서 소산이라는 말이 이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빗대어 원금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소크라테스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음에도 좋음에 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가 가진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무지의 언명에 따른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라 파악해야한다.

 

2.2. 태양의 비유

 

[506e~509c]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한 태양의 비유가 언급된다.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것들’(ta aistheta)은 각각 다른 감각(aisthesis)들로써 지각한다. 만일 보는 것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게 될 물체들과 눈이 가지는 능력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시각과 물체 사이에는 제 3의 것이 필요하게 된다. 즉, 우리가 눈으로 물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인 시각과 물체가 보이게끔 하는 힘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시각과 물체(보이는 것) 사이에는 왜 빛이란 것이 필요할까? 그것은 빛이 없을 때의 가정을 들어보면 적당하다. 예를 들어 빛이 없는 상황에서는 눈은 시각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둠이 가득하기 때문에 볼 수 없으며, 사물은 색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어둠에 의해 즉, 빛이 없기 때문에 색을 가질 수 없다. 이와 같이 빛은 능동적인 인지자로 하여금 최대한 잘 보게끔 해주며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즉 사물에 대해서는 최대한 잘 보이게끔 만들어준다. 그리고 빛 중에서도 가장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태양이다. 이에 따라 이 비유를 태양의 비유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기관은 그 고유의 능력만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눈은 시각을 귀는 청각을 코는 후각을 담당하는 것을 들어볼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기관들 중에서도 태양과 가장 닮아 있는 기관은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인 눈일 것이다. 하지만 눈도 그것의 능력인 시각도 태양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다른 감각기관들에 비해서 가장 많이 닮아 있기에 눈은 그 힘인 시각을 태양으로부터 받게 된다. 따라서 태양은 시각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각의 원인이다. 그렇기에 태양 또한 시각에 의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양과 눈, 시각 그리고 각기 다른 물체들의 관계는 좋음의 이데아와 혼, 지성(정신:nous) 그리고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ta nooumena)과 그 관계가 대응될 수 있다. 단, ‘좋음’이란 것은 ‘지성에 의해서[라야]알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고 각각의 것들은 이데아를 상정한다. 이에 반해 앞의 것들은 ‘눈에 보이기는 하나 지성에 의해 알려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전자의 것들과 후자의 것들은 각각의 영역을 달리하는 것이다.

위의 비유를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면 혼은 진리와 실재가 비추는 곳에 갈 때에는 지성에 의해 그것을 알고 인식하게 되며 결국은 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만일 ‘어둠과 섞인 것’에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에 다르게 말하면 현상계에 혼이 가게 될 경우 ‘의견’(판단:doxa)를 갖게 되고 의견을 바꾸어 가지면서 혼은 더욱 침침한 상태로 빠지게 된다. 이렇게 침침한 상태의 혼은 지성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좋음의 이데아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인식되는 것들에는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제공한다. 하지만 태양과는 다르게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착오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식과 진리 그리고 좋음의 이데아는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인식과 진리는 ‘좋음’과 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만 어느 것 하나가 곧 ‘옳음’이라고 해서도 안 되며 그 훌륭함에 있어서도 더 월등하기에 ‘좋음’ 그 자체의 상태에 관해서 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 말고도 좋음의 이데아는 그 자체는 생성되는 것(genesis)은 아니지만 생성과 성장에 영향을 준다. 즉, 좋음의 이데아는 물체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체가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실재성:ousia)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즉 그 것은 지위와 힘이 ‘존재’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다.

 

2.3. 선분의 비유

 

[509b-511e]

508a 인식과 진리가 이데아를 구분, 이데아는 그것들 보다 훌륭한 것이다. 이데아를 태양으로 비유하지만 태양으로 믿는 것이 옳지 않듯, 좋음이라 말하는 것을 그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바르지 않음. 이데아는 그것보다 더 귀중한 것임. 이데아 그 자체는 인식과 진리를 제공하지만 그것 자체는 아름다움을 뛰어 넘어선다.

509b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태양이 생성과 성장 그리고 영양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태양 그 자체는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인식대상물들이 인식가능하게 되는 것은 좋음으로 인해서일 뿐아니라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본질(실재성 : ousia)을 갖는 것도 그것에 의해서이다. 따러서 좋음이란 것은 그 지위와 힘이 존재를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509c~e 여기서 플라톤은 가시적인 것과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을 구분했다는 앞선 논의의 결론을 재조명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두 부류를 같은 비율로 나누고 각각이 상대적인 명확성과 불명확성이 드러난다. 즉 명확성의 부류에 의해서 그림자나 매끄러운 표면에 비춰진 상들과 같은 불명확한 것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510a 그리고 나서 우리주변의 동식물 및 인공적인 물건들을 그림자와 같은 부류(영상 : eikon)로 간주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의견의 대상인 것(to doxaston)과 ‘인식 가능한 것(인식 대상 : to gnoston)’의 관계처럼 닮은 것과 닮음의 대상으로 된 것이 같은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510b소크라테스는 이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것(to noeton)의 부분을 어떻게 분할 할 것인지 고찰한다. 그는 그 구분을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혼이 영상들을 이용하여 결론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탐구이고 즉, 연역적인 탐구와 다른 하나는 무가정 원리 즉, 영상들이 없이 형상들 자체를 이용하여 나아가는 탐구이다. -선분의 비유는 인식의 분할에 관해 논하는 것이다.

510c~e 이 부분에서는 위에 제시된 두 가지 탐구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다. 그것들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탐구원리와 같다. 홀수와 짝수 도형, 세 종류의 각과 같은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서 가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명백한 것으로 설명이 필요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들을 고찰하여 나오게 된 결론은 일관성이 있다.(즉, 모순이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추론적 사고에 의하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511a 소크라테스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noeton) 것이라 말한 종류의 탐구들은 어쩔 수 없이 가정을 이용하게되고 원리(근원)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가정을 벗어나서 탐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정들은 아래의 것들 즉, 가시적이거나 감각적인 것들에 비해서 명백한 것으로 판단되고 존중되기 때문에 그것을 모상으로 이용한다.

511b 다음으로 소크라테스는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종류의 또 다른 한 부분으로 ‘이성 자체가 변증술적 논변의 힘(능력)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을 제시한다. 이 때의 가정들은 앞서와 같이 원리로서가 아니라 무가정의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의 근원(좋음의 이데아)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 발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탐구도 형상들 자체만을 이용하여 형상들을 통해서 탐구에 들어가며 또한 끝을 맺는다.

511c~e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암시하는 변증술적 논변의 학문과 기하학이나 그와 비슷한 학문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것에 긍정하며 다음과 같이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정리한다.

 

 

 

 

-다음의 표는 509d~511e에 걸친 인식론적 업급을 도표로 만든 주석(책 441페이지)을 인용한 것이다.
가시적인 것들(ta horata)

감각 대상들(ta aistheta)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들

(ta noeta)

대상들
상(영상, 모상), 그림자
실물들(동식물들 및 일체의 인공물들)
수학적인 것들(도형들 홀수, 짝수 등)
이데아 또는 형상들

주관의 상태들
상상,짐작

(eikasia)
믿음, 확신

(pistis)
추론적 사고

(dianoia)
지성에 의한 앎, 인식

(noesis, episteme)

의견, 판단(doxa)
지성에 의한 앎 (이해) (noesis)

2.4. 동굴의 비유

 

[514a~521b]동굴의 비유는 교육(paideia) 및 교육 부족(apaideusia)과 연관되는 성향을 나타낸 것이다.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동굴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강한 빛에 노출된 입구를 지닌 지하 동굴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 이들은 사지가 결박당하고 목과 얼굴은 동굴의 안쪽 벽면에만 고정되어 그곳만을 응시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 죄수들의 행렬 뒤로는 담장이 세워져 있고 그 위로는 인형들을 올려 죄수들에게 그림자 인형극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수들은 그 그림자로 비춰진 상들만을 바라보며 서로가 서로를 보지도, 혹은 뒤를 돌아보지도 못한다. 이렇게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죄수들은 벽면에 있는 그림자들만이 실재들(ta onta)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듣는 목소리는 오로지 벽면에서 울리는 메아리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죄수들은 그림자와 메아리에 익숙해져 감정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진실 된 것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러한 죄수들 중 어느 하나가 결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어, 불빛을 쳐다보는 것을 강요받고 바깥에 있는 빛의 세계로 끌려나온다면 어떠할까? 설령 그 과정이 눈에 광휘로 가득차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이전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짜증이 났겠지만 차차 빛의 세계에 익숙하게 되면서 그는 그 태양에 관해 자신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것’(aitios)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동굴 안에 있었던 동료들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그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광휘의 세계에 있었던 탓에 그는 어둠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아 앞을 분간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그가 이끌어 가려고 했던 동료 죄수들은 그의 능력에 관해 경합을 요구한다면, 조롱과 야유를 받기도 하고 자칫하면 죽임까지도 당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등장하는 ‘오름’(anabasis) 즉, 동굴 밖으로 나옴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세계를 넘어서서 ‘지성에 의해서[라야] 알 수 있는 영역’으로 향하는 혼의 등정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어려운 등정 끝에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가 되는 것이다. 앞서 태양의 비유의 결론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이 이데아는 가시적 영역에서의 것들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비유에서는 그림자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동굴 밖의 광원인 것과 같이 이 이데아는 현실세계의 원인되는 그 무엇에 해당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굴의 비유는 교육에 관한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교육이란 동굴 속에서 어둠으로만 향해있던 몸의 방향을 빛의 세계로 돌리듯, 혼 전체를 생성계(현상계)에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보는 능력자체는 지니고 있지만 그 방향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진정한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 혼의 능력중 하나인, 똑똑함의 ‘훌륭함’(덕:arete)들 유용하고 유익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용하고 해로운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못된 사람들이 그것을 ‘나쁨’에 이용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며 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쾌락들이 그 눈길을 아래로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성향(자질)을 지닌 자들에게 좋음의 이데아가 무엇인지 아는 배움에 이르도록 강제해야한다. 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성향을 지닌 자들이 그 좋음의 이데아를 보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그들이 그것만을 보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즉, 동굴의 비유에서 한 죄수가 연민을 느끼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다른 죄수동료들을 구출해내려 하듯 그러한 능력을 지닌 자들도 올바르지 못한 방향을 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도와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법(nomos)에 의해서 강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은 나라에 있어서 한 부류만이 잘 살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좋음의 이데아가 실현되도록 관심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아는 자들이 단지 앎 그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자들에 대한 앎의 재분배를 강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국가는 안정되고 단합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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