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사유하기 (3) : 쇼트(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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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일단 이 문장의 의미는, 영화에서 모든 중요한 물음은 언제나 쇼트와 관련되며 그렇기 때문에 쇼트(들)을 이해하는 것이 영화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쇼트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카메라의 움직임, 쇼트의 크기, 길이 등을 파악한다는 것인가? 만일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건 누구든 측정하고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카메라 움직임, 쇼트의 크기와 길이 그리고 앵글 등을 파악하는 것은 영화 이해에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안다고 영화가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 특정한 움직임과 크기, 길이, 앵글을 가진 쇼트가 특정 영화의 특정 부분에 등장해야 했는지 이유를 알아야 쇼트를 다루는 방식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쇼트를 다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또한 그것이 영화에서 어떤 중요성과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쇼트’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쇼트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당한 개념 규정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쇼트를 다룬다는 말의 의미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쇼트’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우리는 대체로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와 관련된 모든 곳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게 사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개념에 대해 정말 우리는 익숙한만큼 잘 알고 있을까? 영화 이론가, 영화사가, 영화 편집인, 영화 감독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영화학의 기본 단위를 쇼트로 정하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쇼트는 같은 개념도 아니며, 따라서 같은 기본 단위도 아니다. 프랑크 베버의 <영화미학용어사전>에 의하면, 쇼트란 카메라가 작동되는 순간부터 멈추는 순간까지 한 장면이나 사물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것이다. 이 정의는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의 시간적 길이인 ‘테이크(take)’ 개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내릴 경우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클로즈 쇼트’ 등은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된다. 이런 구분은 ‘하나의 쇼트는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하에서 카메라와의 거리에 따라 기록된 짧은 장면’이라는 <라루스 영화사전>에 제시된 공간적 정의로서의 쇼트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일단 두 개의 개념 정의만 비교해 봐도 쇼트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정의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두 가지 정의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적용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두 가지 개념 정의를 잘 결합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대답부터 하자면 ‘아니다’이다. 두 가지 개념 정의를 결합하면, ‘등장인물들이 같은 프레임화와 각도, 그리고 동일한 카메라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연속적으로 촬영된 필름 단편’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쇼트인가? 물론 이 정의에 부합되는 쇼트들도 있다. 하지만 이에 부합되지 않는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대체로 사람의 얼굴만 화면에 포착되었을 경우 클로즈 쇼트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다르의 영화 <그녀의 삶을 살다 Vivre sa Vie>의 한 장면처럼 얼굴이 아주 작게 화면의 하단에만 등장하고 화면의 다른 부분은 텅 비어 있다면 이 쇼트를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책상 위의 유리잔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여 카메라가 끊김없이 이동을 하여 미디엄 쇼트, 롱 쇼트 크기로 각기 다른 대상들을 포착할 경우, 이를 무슨 쇼트라고 부를 것인가. 이런 사태에 대해 영화 이론가 앙드레 바쟁은 ‘쁠랑세깡스(plan-sequence, sequence shot)’라고 불렀고, 이에 대해 장 미트리는 시간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을 뒤섞은 말도 안되는 개념이라며 비판했던 사례 역시 쇼트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몇몇 사례들만으로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쇼트에 대한 개념 규정들이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쇼트에 대한 시공간적 개념 규정들을 조합하는 것 역시 충분한 개념 규정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영화에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명하기 곤란한 쇼트들이 빈번히 나타난다. 또한 새로운 방식의 쇼트의 등장이 새로운 영화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러한 사건들이 영화의 역사에서 비정상적 상황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대체 쇼트 개념은 무어란 말인가. 어쩌면 고정된 의미로 쇼트를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임무 mission impossible’는 아니었을까. 혹은 쇼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잘못 제기된 물음은 아니었을까.

쇼트 개념 정의에 대해 이렇게 비관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쇼트를 촬영상의 기술적인 요소들만을 가지고 정의하고자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쇼트란 카메라가 그 앞에 있는 대상들을 촬영한 필름 단편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쇼트는 단순히 카메라를 통해 만들어진 특정한 크기와 길이를 가진 필름 단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제시되는 영화 전체의 부분들로서의 쇼트이다. 영화를 촬영된 단편들의 집합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영화를 어떤 흐름을 가지는 하나의 전체로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쇼트 개념의 이해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들뢰즈는 움직이는 이미지들로 관객에게 주어진 영화 전체라는 관점에서 쇼트에 접근한다. 아무리 정적인 영화라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는 영화는 없다. 대상의 커다란 움직임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다 하더라도 아주 미세한 눈빛의 떨림이나 미묘한 빛의 움직임이라도 있다. 다시 말해 영화는 관객에게 운동으로서의 이미지, 즉 ‘운동-이미지’를 준다. 이 ‘운동-이미지’라는 개념은 베르그손의 철학을 바탕으로 들뢰즈가 제안한 개념이다. 운동-이미지 개념 자체를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쇼트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맥락에서의 이 개념의 의미는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선지식이 없더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무엇인가가 운동한다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지속을 함축하는 것이다. 즉 운동한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특정한 길이의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것이 런닝타임이든 아니면 디제시스적 이야기의 시간이든 혹은 그것과 함께 호흡하는 관객의 시간이든 아니면 시간 자체에 대한 사유이든간에 말이다. 그래서 운동은 이러한 시간의 한 부분이지만, 이 부분은 시간의 흐름에서 무 자르듯 잘라내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위적으로는 나누어질 수도 없고 굳이 나눈다면 그 본성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부분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음악의 제일 좋아하는 부분을 컷팅하여 핸드폰 벨소리로 지정했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처음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좋아하는 음악이 울리니까 좋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고 듣기 싫어졌던 경험은 아마 누구나 해봤을 것 같다. 분명 좋아했던 음악인데 왜일까. 우리가 어떤 음악의 어떤 부분을 좋아했던 이유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앞뒤 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부분이 마음에 충격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동과 지속하는 전체와의 관계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음악에서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의 차이와 변화를 표현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동-이미지란 지속하는 전체의 어떤 변화를 표현하며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지속하는 전체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쇼트를 운동-이미지라고 말한다. 운동-이미지로서의 쇼트는 데쿠파주(d?coupage: ‘오려내기’라는 의미의 용어로서, 시나리오를 분석하여 촬영대본으로 옮기는 과정을 의미한다. 영화 전체의 시나리오가 전제된 상태에서 쇼트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지시하는 것으로서,, 프레이밍뿐만 아니라 한 쇼트의 지속 시간, 미장센 등이 포함된 개념이다. 그러므로 데쿠파주에 따라 각 쇼트가 구성되고 촬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데쿠파주는 단순한 커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에 의해 한정된 것으로서, ‘닫힌 체계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운동 규정’이다. 운동은 대상들 사이의 상대적인 이동 운동이지만 동시에 이 운동은 지속하는 전체의 절대적 변화를 표현한다. 이 두 측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쇼트는 지속하는 ‘전체의 움직이는 단면(coupe mobile d’un tout)’으로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이 변화는 집합의 부분들 사이의 위치변경과 같은 상대적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쇼트 안에서의 대상들의 위치변화를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은 영화 전체의 질적 변화의 흐름을 드러내어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쇼트가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쓸데없는 쇼트이고, 편집에서 삭제되어야 할 쇼트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쇼트는 프레임(닫힌 집합)과 몽타주(열린 전체)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정의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쇼트는 이러한 추상적 정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측면을 끊임없이 오가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쇼트는 집합을 구성하는 대상들에 따라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면서 동시에 이러한 하부 지속들을 하나의 지속 안으로 재통합한다.

그런데 집합의 차원과 전체 지속의 차원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부분들을 전체의 지속에로 결합시키는 운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conscience)’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우리가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지각할 때 개입되고 또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곁에 수없이 펼쳐진 이미지들 중 우리는 부분만을 지각한다. 지각에서 작동되고 있는 선택과 배제는 나의 필요나 관심 혹은 기억 등 주관적인 요소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관적 요소의 개입은 단순히 부과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이미지들 중 일부분을 선택할 때 나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 어떤 절단면이 형성되며, 그렇게 선택되어 베어내어지는 지각된 물질의 면이 물질적 우주 전체에서 분리되는 바로 그 순간 지각하는 의식도 발생한다.(여기에서 절단면이 쁠랑plan, 즉 쇼트이다. 프랑스어에서 쁠랑은 영어의 shot, plan, plain 등으로 번역되며, 그림에서 전경, 중경, 후경을 구분해서 말할 때의 경(景)에 해당된다.) 물질에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던 의식은 지각의 순간에 현실화되어 나타나며, 그 의식은 나의 몸을 꼭지점으로 둥글게 말려 들어가며 우리 의식의 내면을 형성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물질 역시 우주 전체의 지속에 약하게나마 참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에는 의식이 내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데, 특정한 방식으로 지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물질의 흐름 중 일부를 나의 몸을 중심으로 하는 범위로 한정하며 나를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나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이 만나 특정한 지속의 흐름이 형성되며, 특정한 리듬을 가진 지각된 물질 세계의 부분이 바로 쁠랑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쁠랑이란 나의 의식의 지속과 대상의 지속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특정한 지속의 리듬이고 그로부터 의식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전체의 지속과 부분으로서의 쁠랑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나눔과 통합의 역할을 한다. 이 부분, 즉 의식으로서의 쁠랑(쇼트)의 의미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와 세계가 만나는 지점으로 말이다.

들뢰즈는 영화에서 이러한 나눔과 통합의 운동을 하는 의식이란 감독도 주인공도 아닌 카메라라고 말한다. 감독이 아닌 카메라가 영화적 의식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사람이 카메라를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지각과 카메라의 지각은 다르다. 들뢰즈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적 지각에서는 시선의 정지, 정박, 고정된 점 또는 분리된 시점 등이 개입하지만, 카메라를 통한 영화의 지각은 정지들마저도 통합하는 오로지 즉자적인 진동일 뿐인 단 하나의 운동으로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인간의 지각이 나의 몸을 중심으로 만곡된 거의 순간적인 쁠랑들의 집합인데 비해, 영화의 지각은 지속적인 중심점의 재설정으로 인하여 연속적인 재중심화가 이루어지며 이는 탈중심화에 이르게 된다. 결국 감독이 미리 계산하여 쇼트를 구성한다 하더라도, 인간과 카메라의 지각 중심의 차이로 인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쇼트는 주관적 구성물의 범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시각적 무의식’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보다 쉬울 것이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마치 무의식의 영역처럼 신체적 한계, 감정,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억압되어 보이지 않던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이 카메라를 통해서는 드러난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들뢰즈의 영화적 지각이 인간의 지각과 다르다는 점이 좀 더 이해될 것이다.

카메라를 중심으로 데쿠파주된 움직이는 쇼트는 마치 의식처럼 영화 전체의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영화 전체로 재통합시키는 운동을 통해 영화 전체의 변화를 부분 속에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들은 영화 전체와 공명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이해는 쇼트가 무엇인지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해준다. 영화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대상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개별 영화들마다 다른 방식의 쇼트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전체와 공명하며 대상들의 리듬을 포착해내는 쇼트가 영화의 분석단위로 등장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쇼트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인가. 들뢰즈는 ‘운동의 통일성’이 바로 쇼트를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말한다. 쇼트의 통일성은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체에 의거하여 변이하지만, 동시에 그 상관적 다양체의 통일성이기도 하다. 결국 물리적으로 커트된 필름 단편 혹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 등과 같은 기술적인 기준들은 더 이상 유효한 것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쇼트에 대한 기술적 개념 규정을 벗어나는 모든 쇼트들까지도 우리가 쇼트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운동의 통일성 때문이며, 그는 운동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네 가지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첫째, 각도나 시점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카메라가 하나의 연속적 운동을 하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카메라의 연속적 운동이 쇼트의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둘째, 물리적으로는 구분된다 하더라도 쇼트들의 연결이 갖는 속성에 의해 쇼트들이 완벽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통일적인 운동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경우 여러 개의 쇼트로 나누어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유명한 예로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에서 카메라가 집의 담을 넘어 지붕의 천창으로 진행하다가 마치 창문을 뚫고 실내의 여자에게 다가가는 경우 두 개의 필름 단편은 하나의 완벽히 통일된 운동을 보여준다. 셋째, 시야심도(profondeur de champ)를 가진 쁠랑-세캉스의 경우이다. 이 경우는 그저 하나의 쇼트로 여겨질 경우도 있으나, 들뢰즈와 보니체르는 물리적인 쇼트들의 연결만이 몽타주가 아니라 한 화면 내에서 면들의 중첩이 깊이로 포개어져 있는 경우 역시 쇼트들의 연결로 이해하고 있다. 잘라 붙인 쇼트들의 수평적인 연결이 아니라, 한 화면 내에 수직적으로 쇼트들이 중첩되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공간의 깊이감이 깊게 나타나 있다고 이 중첩된 면들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의 가느다란 실에 의해 전경-중경-후경이 운동의 통일성으로 연결되었을 경우 하나의 쇼트로 파악할 수 있다. <시민 케인>에 많이 등장하는 심도 깊은 쇼트들이 그 예이다. ‘화면영역의 깊이는 세계로 열려진 지평선이 아니라 쇼트들의 배열’이라는 보니체르의 언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넷째, 평면적인 쁠랑-세캉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든 공간적인 쇼트들이 여러 프레이밍을 통과하는 재화면잡기를 통해 구성되는 다양체로서, 이 경우 쇼트의 통일성은 완전한 평면성으로 나타난다. 마치 흐르는 듯 매끄러운 유형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의 ‘운동의 통일성’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 목록은 결코 완결된 목록이 아니다. 운동의 통일성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유형의 쇼트들을 추가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경우에서 쇼트란 운동의 통일성의 차원에서 고찰되고 있다는 점이다. 쇼트의 통일성은 단지 물리적으로 커트되지 않았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물리적으로 나누어진 쇼트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경우도 운동의 통일성이 있을 경우에는 하나의 쇼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몽타주는 쇼트들을 잘라서 이어붙인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시야심도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수직적으로 화면 영역 안에 중첩되어 제시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쇼트와 몽타주는 실천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면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개념으로서 이러한 쇼트와 몽타주에는 이미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레임-쇼트-몽타주는 모두 지속하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 이미지의 두 경향성과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 세 개념을 기술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쇼트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영화 미학적 단위로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다양체로서의 운동 이미지가 부분 및 전체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다양체가 가지는 운동의 통일성이라 할 수 있다.

쇼트를 운동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서명과도 같은 특정한 운동의 스타일을 통해 작품이나 작가를 분석해야 한다는 들뢰즈의 주장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쇼트의 운동은 전체와 부분 사이를 오가며 분할과 통합을 행하는 영화적 의식이므로 쇼트를 분석하게 되면 전체가 부분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그러한 방식으로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로서의 쇼트는 단순히 기술적인 것일 수 없다. 영화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미학적 단위로서의 쇼트는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운동의 통일성에 따라 쇼트를 규정하는 것은 영화 분석을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운동의 통일성이라는 구체적인 기준을 통해 재정의된 쇼트 개념은 영화 분석의 중요한 기본 단위로서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쇼트란 영화가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을 어떠한 흐름을 가진 것으로 파악했는지를 포착한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고 있는지, 그 사유의 궤적을 이해하게 해 준다. 특히나 다른 시각 예술들이 성취해 낼 수 없었던 운동의 흐름과 운동의 단편들을 통해, 카메라-의식이 그것이 속해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쇼트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쇼트야말로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특수성을 통한 사유방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마주치는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핸드폰이나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기 위해, 장면을 정지화면으로 캡춰하는 경우가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그토록 아름답던 장면의 느낌이 확 죽어버리는 경우들이 있다. 처음엔 내가 잘못된 지점을 캡춰해서 그런걸까 의심하면서 여기저기 다시 캡춰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뭘까. 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화의 경우 당연히 움직임과 정지는 너무 다르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가 되지만, 실은 내가 캡춰하려 했던 영화들은 빠른 속도감은 커녕 나뭇잎만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 상당히 정적인 영화들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어떤 장면이 너무 좋다고 느낀 것은 단순히 훌륭한 미장센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어떤 대상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총체적으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를 통해 특정한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과 같이 호흡하고, 움직이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쇼트는 바로 그러한 대상의 흐름을 절단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화면으로는 그 움직임과 시간의 느낌들을 결코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옆의 사진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단편 영화 <엉클분미께 보내는 편지 A Letter to Uncle Boonmee>의 한 장면이다. 너무나도 멋진 장면이었는데, 정지화면으로 캡춰한 순간 그 호흡, 빛, 공기가 다 사라져버렸다. 이 장면의 호흡은 영화를 직접 봐야지만 알 수 있다. (온라인 상영관 주소 : http://www.animateprojects.org/films/by_date/2009/a_letter_to)

영화의 역사를 훑어보면 알 수 있듯,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쇼트는 기술적인 규정들로 한정될 수 없는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지니며 나타나곤 했다. 새로운 쇼트의 등장에 뒤늦게 이론가들은 쇼트 개념을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쇼트들은 계속해서 출현했다. 이제 보니체르의 “모든 문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쇼트 혹은 쇼트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아는데에 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윤곽이 그려진다. 결국 영화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화가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사유했는지를 쇼트들이 다루어진 방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쇼트가 무엇이며 각 영화마다 쇼트가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적 사유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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