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톡,톡,씨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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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전태일을 잘 몰랐던 20대 청춘이 영화로 전태일을 만나고 돌아본 지금 우리 삶에 대한 단상 – 편집자 주

 

!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도시인

 

아직 11월 말인데 거리는 벌써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길가와 카페를 채우고 방금 커피 주문을 받던 점원은 루돌프 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 데이였는데… 올해 할로윈의 주인공은 조커와 할리퀸이다. 영화의 힘일까? 귀신을 기리지 않고 캐릭터 인기투표의 장이 돼가고 있다.

마침 라떼가 나왔으니, 한잔 들이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겠다. 그때는 세계가 해리포터에 빠졌었다. 모두 마법사 망토를 두르고 나무 막대기를 휘두르며 “윙가르디움 레비오사”라고 외치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처럼 활발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할로윈 데이 때는 다들 해리가 돼 이마 한편에 번갯불을 이고 다녔었다. 그런데 할로윈 데이에 볼드모트 분장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였기에 이름조차 부르면 안 되는 사람 분장을 하는 건 너무 끔찍해서일까?

하지만 이건 내 라떼의 이야기고 요즘 이야기를 하자. 이제 한국은 제법 문화적으로 풍부해진 것 같다. 할리우드,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문화도 수출하고 있다. 가장 잘나가는 것 중 하나가 방탄소년단일 것이다. 여기 카페에서도 방탄소년단의 캐릭터가 새겨진 굿즈를 팔고 있다.

사실 난 보이그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힌 한 장면이 있다. 음악프로에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한 멤버가 말했다. “응! 어서 와~ 방탄은 처음이지?” 남자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여자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매혹적인 표현으로 속삭인다. 그 어떤 자기소개보다 짜릿했다.

 

전태일, 너는 나에게 부담감을 줬어.

 

최근에 본 영화 중 나에게 방탄소년단의 부담스럽고 낯부끄러운 인사와 같은 짜릿함을 준 게 뭘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나에게는 옛사람인 전태일(1948.8.26~1970.11.13)은 한국 현대사에서 큰 인상을 주고 떠나간 사람이지만, 정규 역사 수업에서는 배운 기억이 없다. 어르신들 얘기를 엿듣거나 책이나, 유튜브에서 가끔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클릭해 본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정작 옛날에 뭘 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이러던 내가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에서 말하는 그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 ‘세상과 대척점에 서서 노동자의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희생한 인물’ 물론, 한 인물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건 위험한 일반화지만 이 글은 전태일에 관한 글이 아니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전태일이란 이름을 들으면 볼드모트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뭔가 큰일을 했지만, 지금 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으니까 굳이 그 이름을 꺼내면 안 되는 사람 정도? 이른바 금기어에 갇혔다고나 할까.

어른들이 공통으로 하는 조언 중 하나가 ‘정치·종교·집안 문제는 말하는 게 아니여~’인데, 전태일은 이 중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이야기 주제일 것이다. 이 세 주제는 개인의 바뀔 수 없는 신념과 관련된 문제라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걸까? 반면에 신변잡기 같은 ‘small talk’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이유는 누구에게나 재미있으면서 이렇든 저렇든 누구에게나 큰 상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나누면서 공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모 아니면 도, 아니 마이너스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모든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 대부분이 공감하는, 해야 하는 주제가 있긴 하다. 바로 정치적 올바름(PC)이다.

사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옳지만, 현대에는 약간 변질되지 않았던가. 이 문제의 뿌리는 언어적 제국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함은 옳지만, 왜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금기되어 있다. 강자가 강해진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대까지 살아남은 이데올로기는 생활에 녹아내릴 수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식어버린 체다치즈 감자튀김처럼 우리는 무언가에 둘러싸여 끈끈하게 굳혀졌다.

굳혀진 끈끈함 중 하나는 쉬이 공감 받고 싶은 열망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 나누고 싶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 쉽게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측 가능한 대화들은 늘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갑자기 분위기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와 이병헌을 필두로 <미스터 션샤인>이 대한민국을 휩쓸었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소재인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아주 멋들어지게 드라마는 그려냈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커지고 있는 반일본 정서의 기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에 매료됐던 걸까?

역사적 사건들은 과거의 일이다. 과거의 일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겐 발효된, 묵은 옛날의 이야기다. 그래서 다시 새길만 하다. 시대가 지날수록 정치·사회·문화 모두가 변해가므로 그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진 교두보가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이해하기에 <미스터 션샤인>은 매혹적인 교두보였다. 세대 차이가 나는 현대와 과거의 중간 지점에서 서로를 잊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문화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한다. 조선말부터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부적응의 대가를 너무나도 아프게 치러왔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지 않고 지금 현실의 삶에 만족한다고 대화의 구심점이 되는 주제가 무미건조하게 언제나 듣기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게 과연 우리 자신에게 좋을지 의구심이 생긴다.

금기어라고 느낄 수 있는 토론 논제가 어쩌면 우리 생활에서 서로를 단절하고 고립시키는 깊숙이 박힌 악순환의 고리와 맞물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다고 말하는 피드백을 동반한다.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이해심과 스스로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 금기어는 누군가에겐 상처일 수 있는 민감한 소재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만심만으로 대화를 만들어가는 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지금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사실 너무나도 많다. 비싼 점심 메뉴, 비싼 커피값, 의미 없는 학교 수업, 실업 문제 등 과연 지금 우리의 생생한 삶을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아주 많다. 코를 뚫은 남자, 무릎 꿇고 구걸하는 걸인, 어제 세상을 떠난 누군가를 보라. 생각보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 한 가지 문제만 골라보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자. 내 의견뿐만 아니라 구글 선생님에게도 물어보고 책도 읽어보자. 겹겹이 자료를 쌓고 준비가 끝났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응! 어서 와~ 볼드모트는 처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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