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②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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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제 소개

 

그런데 기원전 1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문법학자인 트라쉴로스(Trasyllos)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을 그냥 <폴리테이아>가 아니라 <폴리테이아, 혹은 정의에 관하여. 정치적 대화편>(politeia ē dikaiou, politikos, Diog. L. III. 60)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그의 <정치학>에서 플라톤의 그 책을 <폴리테이아>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라쉴로스가 뒤에 붙인 <정의에 관하여>라는 제목은 나중에 붙여진 제목이자 일종의 부제로서, <국가>의 내용과 관련하여 원제목이 가지고 있는 부족함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덧붙여진 것이라 하겠다.1)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의 기본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정의’(dikaiosynē)라는 개념 자체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내용상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최선의 균형과 조화 그리고 질서를 구현해내는 기능(ergon)이자 덕(aretē)으로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최소한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그 두 가지 제목의 실질적 차이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다 할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는 이상국가의 ‘폴리테이아’ 즉 시민적 생활 방식은 나라일의 측면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의 측면에서건 결국 각 기능의 최선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덕이자 원리로서 ‘dikaiosynē’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2)

참고로 이러한 <국가>의 제목과 부제와 관련한 문제는 일찍이 고대 시절부터 논쟁이 되어 왔는데 프로클로스(Proklos)가 전하고 있는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국가>의 제목과 관련한 프로클로스의 논의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의 <국가>의 제목에 ‘정치체제’와 ‘정의’가 병기된 이래 일찍이 기원 후 5세기경부터 그 두 가지 제목 중 어느 쪽이 <국가>의 진정한 주제(ho skopos, ē prothesis)인가에 대해서 고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크게 논쟁이 되었다. 5세기의 신플라톤 학파의 철학자 프로클로스(Proclus de Lycie 412년-485년)가 남긴 플라톤의 <국가>에 관한 주석서3)에는 그 양쪽 주장과 프로클로스 자신의 견해가 간명하게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국가>의 요체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프로클로스는 우선 <국가>의 주제를 ‘정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점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이 대화편 제1권에서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코스, 트라쉬마코스가 처음 제기되고 있는 물음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2) 이에 비해 ‘정치체제’에 관한 고찰은 그러한 ‘정의’에 대한 고찰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 나중에 도입된 것이다. 즉, ‘정의’와 ‘정치체제’라는 두 개의 논제 가운데, 전자는 목적(ou heneka)이고 후자는 수단(heneka tou)이다. (3) 대화 인물 소크라테스 자신 또한 본래의 문제가 ‘정의’에 대한 것임을 수차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420 b-c, 427d, 434d-435a, 445a-b, 427b, 484a-b, 548d, 588b 참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정치체제’가 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프로클로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분명히 문제 제기의 순서는 ‘정의’ 쪽이 앞서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도적인 문제라서가 아니라 ‘정치제제’에 관한 고찰에 앞서 미리 길을 열어주고 그곳으로 이끄는 예비적 역할을 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다. (2) <폴리테이아>라는 제목(ē epigraphē)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밖의 사람들의 저술에도 인용되어 있듯이 극히 오래된 유래를 갖고 있고, 플라톤 자신이 붙인 제목이다. 그리고 그것은 <파이돈>,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인물 이름에서 따온 것도 아니고 <향연>과 같이 상황으로부터 따온 제목도 아니며, <소피스테스>나 <정치가>와 같이 다루어지는 주요 문제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이다. 이것은 이 대화편에서 주도적으로 추구되는 문제가 ‘정치체제’에 대한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밖에 (3) <법률>(739b 이하)이나 <티마이오스>(17b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도 그 점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면 이러한 두 개의 입장을 두고 프로클로스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말하길, “이상과 같은 사안에 대해 이 양자는 각기 다르게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양쪽 사람들의 주장 모두를 함께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견해는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책이 목적으로 하는 주제는 ‘정의’임과 동시에 ‘정치체제’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이것은 주제가 두 개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이것들 두 개는 서로 동일한 사안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 정의로운 것은 잘 통치된 국가에 있어서 정의로운 정치체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고 정의로운 정치체제 또한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의 정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프로클로스가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의 3계층과 영혼의 3구분이라고 하는, 국가와 개인 영혼과의 구조상의 대응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정치제제’에 대해서 말하게 되어있고, 제대로 ‘정치제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개인 안에 내재된 politeia로서 ‘정의’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또 논자들이 문제 삼고 있는 ‘정의’로부터 ‘정치체제’로의 화제 이행에 관한 해석과 관련해서도 “그 이행은 결국 ‘정치체제’의 문제로부터 ‘정치체제’로의 이행 즉, 개인 내부에서 고찰되는 ‘정치체제’로부터 다수 대중에서 고찰되는 ‘정치체제’로의 이행이며, 그리고 ‘정의’의 문제로부터 ‘정의’의 문제로의 이행 즉, 소규모의 ‘정의’로부터 보다 분명한 ‘정의’로의 이행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 쪽이 주도적(proēgoumenon)이고, 다른 한 쪽이 부수적으로 딸려가는(empipton) 것이라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폴리테이아’라는 제목과 ‘정의’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 것은 서로 적절히 합치(ounadein)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politeia라는 제목에는 분명 ‘정의’의 본질 그 자체가 다름 아닌 ‘올바른 이치에 따라 사는 영혼의 정치체제’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론으로 제목이 붙여지지 않았던 것은 단지 politeia라는 말 쪽이 dikaiosynē(정의)라는 말보다 더 잘 알려져(gnōrimōteron) 친숙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일 뿐이라고 프로클로스는 결론짓고 있다.

물론 프로클로스의 결론이 플라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정의’와 ‘정치체제’라고 하는 두 개의 논제가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것이 곧 양자가 – 나라에서건 개인의 영혼에서건- 서로 동일한 것임(allēlois ta auta)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진정한 주제가 ‘정의’인가 ‘정치체제’인가에 대한 물음은 영혼과 결부된 그의 정의에 관한 주장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들과의 연관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 지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각주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보면 “플라톤의 <politeia>”로만 나온다. (<Politica> B1, 1261 a6, B5. 1264b29, E10. 1316a1, Θ7. 1342b32 Δ5. 1293b1, <Rhetorica> Γ 4. 1406b32) 로마 시대에서는 이 politeia를 그대로 로마자로 옮겨 politia라고 부르고 의미상으로는 라틴어의 respublica 및 civitas로 풀었다.(cf. Cicero, De divinitatione I. 29, II. 27).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영어, 불어권의 제목 ‘The Republic’, ‘La République’은 피치노(Marsilio Picino) 이래 근세 라틴어 역본에서 많이 쓰인 Republica를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한 학자들(G. A. F. Ast, G. Stallbaum)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Civitas로 번역한 학자들(C. E. C. Schneider)도 있었다. 그리고 독일어 역본에서는 Der Staat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국가’라는 제목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또 “공화국”이라는 호칭은 영역본을 보고 번역한 데서 온 것으로서 원제목의 의미와도 책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 제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울루스 겔리우스(Aulus Gellius)의 <앗티카의 밤(Noctes Atticae>(13,3)에서 이 책은 <국가 통치의 최선의 형태에 관하여>(de optimo statu reipublicae divitatisque administrandae)라는 이름으로 “플라톤의 저작”이라고 소개되고 있고, 플라톤 자신도 <법률> V. 739b에서 “첫 번째(이상적인) 국가와 정치제제, 최선의 법률”이라는 말로 이 <국가>에 실린 이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각주 2) 그런데 우리가 사용할 우리말 텍스트 <국가>를 옮긴 박종현 선생과 일부 연구자들은 이 책의 부제로도 쓰인 ‘정의’ 즉 dikaiosynē가 앞서 살폈듯이, 사회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적 영혼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dikaiosynē를 사회적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우리말 ‘정의’(正義)로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dikaiosynē는 <국가>에서 나라가 그 고유한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게 만드는 기능(ergon)의 의미와 함께 개인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게 만드는 덕(aretē)과 그 덕이 실현된 훌륭한(agathon) 상태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도 dikaiosynē는 ‘정의’라는 역어보다는 훌륭한 상태 일반으로서 순수 우리말인 ‘올바름’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dikaiosynē는 나라는 물론 강도 집단이 자신들의 고유한 일을 잘 해내게 만드는 경우에도 요구되는 덕목이라는(351c)는 점에서도 정의라고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에서 dikaiosynē가 근본적으로 정치생활과 시민생활을 동일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시민적 덕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다가, dikaios하다고 일컬어지는 개인의 내면적 삶의 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사회적 삶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그러한 내적 통일성이야말로 플라톤의 dikaiosynē가 갖는 매우 핵심적이고도 고유한 특징이라고 본다면, ‘올바름’이란 말로 그 특징과 의미를 온전하게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정의라는 말이 우리말에서는 개인의 내면적 덕성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말 또한 일정 부분 모자람이 있으나,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에게 있어 개인의 삶 자체가 사회적 삶과 불가분의 연계를 갖는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도 ‘정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 강사는 dikaiosynē를 ‘정의’로 옮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강도 집단과 관련해서도, 해당 내용은 기본적으로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 결국 ‘합심과 우애’가 무너져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문맥에서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다른 어떤 집단(351c)’이란 표현 속에 포함되어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정의가 갖는 ‘덕’과 ‘지혜’의 측면보다는 집단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합심과 우애’(homoia kai philia)의 측면을 드러내기 위한 차원에서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라는 역어를 배제해야하는 결정적인 근거로까지 여겨지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말 ‘의리(義理)’라는 말에도 ‘옳을 의(義)’자는 들어있듯이 아마 플라톤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사 강도들이라도 그들이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한, 합심과 우애로서의 최소한의 정의는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사례의 하나로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강도단은 불법적 집단이라서 ‘정의’라는 말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올바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강도들 또한 올바른 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올바름’이란 말은 나라나 개인 모두에 두루 사용할 수 있고 덕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고 그래서 매우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의도한 dikaiosynē의 사회 통합적 성격을 부각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앞에서 ‘폴리테이아’의 의미가 우리말로 온전히 옮기기 힘든 것처럼, dikaiosynē 역시 플라톤이 의도한 바를 우리말로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다면, 그래서 어차피 역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안전하지만 너무 포괄적인 우리말 ‘올바름’ 보다는 플라톤의 근본 의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의’라는 역어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학술 연구사적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이른바 ‘정의’, ‘justice’ 관련 문제를 다룬 최고의 고전이자 최초의 고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어 dikaiosynē의 특징적 의미를 살린다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적 조회를 위한 개념어 차원에서도 ‘정의’라는 역어가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dikaiosynē’라는 말에는 전쟁과 정치투쟁으로 점철된 그리스 사회에서 그리스인들이 흘린 피의 냄새가 깊숙이 배어있다. 그러나 본 강사가 보기에 최소한 그것을 절감함에 있어 ‘올바름’이란 역어는 ‘정의’라는 역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무려나 어떤 역어가 더 원래 의미에 가까운가의 문제는 <국가>를 우리말로 옮기는 역자들의 관점과 선택의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고, 박종현 선생의 역본 또한 앞으로 나름의 독보적인 관점과 가치를 하나같이 보전하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본 강좌에서는 우리말 텍스트로서 박종현 선생의 <국가>를 선택하여 진행하되 – 천병희 역본은 <국가>의 문학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 있고, 박종현 역본은 <국가>의 철학적인 의미를 보다 잘 살려낸 역본으로 판단된다. 정암학당 역본은 그 두 개의 장점을 모두 담아내기를 기대한다. – dikaiosynē’의 역어만은 ‘정의’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각주 3) Proclos, In Platonis Rempublicam, ed. G. Kroll, vol. I, pp. 7-14

 

 

  1. 집필시기

 

<국가>는 단지 분량만 보아도 버넷(J. Burnet, 1902)판 텍스트로 396쪽, 스테파누스(Stephanus 1578)판 쪽수로 294쪽을 상회하는 장편이고 그 내용의 풍부함, 사상의 힘은 물론 생동감 있는 필치까지 함께 어우러져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작품들 가운데 가히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국가>가 쓰여 진 시기가 연대 상으로 정확히 몇 년쯤인지 즉 플라톤이 몇 살 때쯤 이 대화편을 저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또 이 대화편이 장편인 만큼 특정 부분, 특히 제1권의 경우 문체론적으로 전기 대화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전기 대화편을 닮아 있어, 아예 집필 연대가 다른 별개의 독립적인 대화편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혹은 플라톤이 <국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일부 내용을 고쳐 <국가>라는 하나의 대화편에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가설들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상당한 객관성을 표방하고 있는 오늘날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우리가 읽고 있는 <국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우 긴 대화편이어서 당연히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저작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377-367년 무렵, 그러니까 플라톤의 나이 50-60세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그러니까 관례에 따라 플라톤의 저작을 전기, 중기, 후기로 크게 나누면 <국가>는 중기의 저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국가>의 집필 시기로 거론되는 이 시기는 플라톤이 이탈리아와 시켈리아 여행에서 아테네에 돌아와 아카데메이아를 창설(기원전 388/7년 경 플라톤 나이 40세 무렵)한 지 10 여년 이상이 경과한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세력이 패권을 다투면서도 최소한의 공존을 유지하였던 이전 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리스 사회 전체의 역량이 크게 약화되면서 내부적으로 큰 혼란과 분열로 치닫고 있었던 때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이후 장벽과 제해권을 잃었음은 물론 인구 또한 전쟁 이전의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어 60여 년 후 338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혼란스런 민주정 치하에서 내분을 거듭하며 재기가 쉽지 않았고, 스파르타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힘이 다 소진되었음에도 과도한 확장욕으로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어 기원전 395년부터 9년간의 코린토스 전쟁을 치르며 더욱 수렁에 빠져 들었다. 스파르타는 이후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테베에 패배함으로써 결국 지역 군소 국가로 전락,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기원전 377년 제2아테네 동맹(델로스 동맹 100주년) 이후 테베가 새로운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하였으나 기원전 362년 펠레폰네소스 원정 중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점차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라와 세력들마다 궁지에 몰리면 페르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 사회의 내분과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는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신흥 강국으로 떠올라 남진함에 따라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세력에 의해 유지되던 전통 그리스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해체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절대 절명의 시대에 플라톤은 당면한 아테네의 비극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앞장서 갑론을박하던 이소크라테스와 데모스테네스와 달리 아카데메이아에 쳐 박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이상 국가를 써 내려 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나중에 그의 대화편에 나타나 있는 사상 내용과 플라톤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플라톤이 왜 아테네와 그리스 사회가 몰락에 접어든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국가>와 <법률>을 집필하게 되었을까 혹은 집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과 근거들을 살펴보게 볼 것이다.

각주 4) <국가> 제1권이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된 대화편으로서 <카르미데스>, <라케스>와 같은 시기에 쓰여 졌다고 보는 학자들은 아래와 같다. K. F. Hermann, F. Dȕmmler, H. von Armin, P. Friedlȁnder 등이 있다. 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가 나오기 이전에 기원전 388/7년경에 별도의 다른 <국가> 이를테면 <국가>초벌본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학자(M. Pohlenz)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설들에 대해서 J. Adam, A. E. Taylor, P. Shorey 등은 하나같이 반대 혹은 강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각주 5) 젤러(E. Zeller)는 기원전 375년경으로 추정하고 있고 빌라모비츠(Wilamowitz)는 기원전 374년 혹은 그보다 약간 뒤로 추정하고 있다. 테일러(A.E. Taylor)는 <일곱번째 편지>에 철인왕 사상이 표명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40세가 된 직후 즉 기원전 383년 전후에 쓰여졌다고 주장하지만 필드(G.C. Field), 로스(W. D. Ross), 디에스(Diés)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쇼리(P. Shorey)는 기원전 380-370년 사이에, 디에스는 기원전 375년 전후에, 필드(G.C. Field)와 크로스, 우즐리(R. C. Cross & A. D. Woozley)도 기원전 375년 경 집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 대화 상정 시기

 

그런데 플라톤은 이 <국가>를 집필하면서 극중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언제로 상정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19세기 초 베크(A. Boeckh)가 일찌기 <국가>의 대화 상정 연대를 기원전 410년 또는 411년으로 추정한 이래, 죠위트(B. Jowett)와 캠벨(M. Campbell), 아담(J. Adam), 쇼리(P. Schorey) 등 유수 플라톤 학자들이 그에 찬동하면서 410-411년 설은 꽤 유력한 가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국가>에 담겨 있는 시대 관련 언급들, 등장인물들의 역사적 활동 그리고 관련된 기타 전승들이 전하는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 이후 <국가>의 대화 상정 시기는 기존의 410년 설에서부터 멀리는 430년 설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 <국가>에 담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내용만 보더라도 그 시기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최소한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던 시기 또는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케팔로스가 아직 생존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 또 플라톤 자신의 언급으로만 보자면 최소한 기원전 425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타고라스와 프로디코스도 아직 생존인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600c,d) 그리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메가라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 메가라 전투가 언제 벌어진 전투인지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자신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아 앞서 간 사람들한테서 그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장면(328e)은 본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아직 60세에 가까운 고령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등 등은 모두 대화상정 시기를 확정하는데 논란의 요소들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해도 그 대안들이 가리키는 시기는 모두 고대 그리스 사회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기간의 한 가운데이었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오랜 기간 그 전쟁이 야기한 그리스 사회의 내분과 혼란상은 물론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가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참혹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대화상정 시기로 개연성이 높은 410년~420년 전후의 상황 이를테면 기원전 416년 멜로스 시민에 대한 인종 청소급 대학살에 대한 아테네 주변국들의 공포와 불신, 특히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에 따라 추진되었다가 그의 배반과 민회의 판단 착오로 결국 4만 여명의 병력과 아테네 5년 예산 정도의 재정을 일시에 날려 버린 기원전 413년 시칠리아 원정의 참담한 실패, 그 이후 기원전 412년 아테네 동맹군의 반란, 기원전 411년 일시적인 과두정의 등장과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후 벌어진 섣부른 장군들의 처형, 기원전 404년 식량 공급 항로의 차단에 따른 굴욕적인 항복에 이르기까지 근 10 여 년 동안의 기간은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게 그 이전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극도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히스테리, 경제적 피폐함을 안겨다 준 그야말로 가장 엄혹하고도 비참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플라톤은 그런 시기의 온갖 혼란상을 겪어가며 청년으로 자라났고 또 여전히 내분과 혼란이 거듭되던 중년 시절 그 혼란의 시기를 되돌아보며 그 시기를 배경으로 <국가>를 저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약사(기원전 431~404)

 

*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양대 세력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패권을 다툰 전쟁으로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이자 그리스 사회를 몰락으로 이끈 전쟁.

* 전쟁 발단의 배경 – 페르시아 전쟁 승리(기원전479년) 이후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제국화하며 급속하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의 반발. 특히 아테네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아테네의 민주정이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소수의 귀족들이 다수의 헤일로타이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던 스파르타에게 큰 위협이 됨.

* 아테네 동맹 – 에게 해 동북부 해안 주변 섬나라와 연안 국가로 이루어진 아테네 제국

* 펠로폰네소스 동맹 – 스파르타의 주도하에 결성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내륙지방 강국들의 군사 동맹.

연 도

(BC)

일어난 사건
480 아테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 격파
479 페르시아 전쟁 종결. 479 아테네, 스파르타 연합군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
475 테미스토클레스 아테네 성벽 재건
470 반스파르타파 데미스토클레스 도편 추방, 친스파르타파 키몬 정권
461 급진 민주주의자 에피알데스 암살, 페리클레스 부상, 키몬 도편추방
465 스파르타, 헤일로타이 반란. 동맹군 소집, 아테네 중장보병 4,000명 파견하였으나 반란 지원 의심하여 귀환조치. 아테네, 도망 헤일로타이 나우팍토스에 정착시킴.
460 아테네에 두려움 느낀 아이기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입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사(前史)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460-446)
458 아테네 코린토스 지협 봉쇄. 스파르타, 도리스 지원 차 도해(渡海) 했다가 해로 차단당함. 스파르타 방향을 바꾸어 테베의 지원을 받아 보이오티아 지역 타나그라 공격. 타나그라 전트에서 스파르타 승리했으나 큰 피해입고 육로로 철수
457 페리클레스 실권 장악, 아테네 오이노피타 전투 테베 격퇴 후, 테베 제외한 보이오티아 대부분을 아테네 속국화. 아이기나 항복, 아테네와 페이라이에우스 외항 장성 건설, 아테네 공세 강화.
454 460년 이후 진행된 이집트 반란 지원 차 떠난 원정 실패(이집트, 페르시아 지원으로 이미 반란군 진압, 이후 페르시아 군에게 포위당한 후 패배. 델로스 동맹에 충격, 내부 단속.
451 도편추방 당했던 키몬 귀환, 스파르타와 휴전 협정, 페르시아와 전쟁 재개, 키프로스 전쟁 승리, 이후 키몬 전사
447 테베, 재기하여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에 승리 후 보이오티아 전체 수복. 이후 에우보이아 반란. 아테네가 진압하려 간 사이 메가라 반란. 코린토 지협 봉쇄 해제. 아테네 에우보이아 철수
446 스파르타 아테네 침탈 후 복귀하자, 페리클레스(495-429), 에우보이아 잔혹 진압.

페리클레스 주도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30년 평화 조약

443 아테네 페리클레스 장군직 임명, 내치에 주력. 이후 12년 아테네 문화적 전성기
440 사모스, 델로스 동맹 반란, 스파르타, 협정에 따라 불개입
436 에피담노스(이오니오스만 서북쪽,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민중파(현재 식민지배 코르퀴라)가 귀족파(식민 건설자인 코린토스파) 추방하자 귀족파 요청으로 코린토스 개입 후 코르퀴라와 코린토스 간 분쟁 일어남.
433 아테네가 전략적 요충에 위치한 코르키라 민중파 지원 -> 코린토스군 철수.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등 그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침략 행위를 비난. 아테네 코린토스 식민시 포테이다이아 압박. 포테이다이아, 스파르타에 구원 요청
432 코린토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소집 요구, 페리클레스 양보 거부, 분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도 모두 실패. 스파르타 대 아테네 전쟁 결의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431 마침내 스파르타의 동맹국 테베,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이를 공격 전쟁 시작. 플라타이아 아테네 지원 요청하고 결사 항전 했으나 지원이 늦어져 함락, 플라타이아 시민 학살. 아르키다모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동맹군이 아티카를 침공. 페리클레스, 우세한 동맹군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아테네 시를 굳게 수비하면서 우세한 해군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적의 해안과 선박을 집요하게 공격. 페리클레스 소개 작전.6) 페리클레스 전몰자 추모 연설.
430 아테네 역병(페스트? 장티푸스?) 발생
429 페리클레스역병으로 사망. 민간인만이 아니라 군인의 대다수도 전염병에 희생.

스파르타 그리스 서부에 있는 아테네의 기지들을 공격 격퇴 당함. 바다에서도 패배.7)

428 아테네의 속국들 반란 진압, 레스보스 섬의 수도 미틸레네를 장악- 남자들을 학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기로 의결, 이튿날 마음을 돌려 반란 지도자들만 처형
425 아테네 시칠리아 지원군 폭풍으로 스파르타 인근 필로스 정박 후 요새 구축. 스파르타 필로스 탈환 작전 중 정규시민(전체 3500명) 120명 포함 440명 스팍테리아섬에 같힘. 스파르타 위축.8)
424 델리온 전투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 칼키디케에서 중요한 승리. 트라케 지역 아테네 사령관 투퀴디데스 추방 당함, 아테네 속국들 잇따라 반란
422 클레온 트라케 진격,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브라시다스와 아테네의 지도자 클레온 양 강경파 모두 전사. 온건파 니키아스가 평화조약 제안.
421 니키아스 평화조약. 이후에도 양국은 작은 도시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씀, 그 수 외교적 책략에서 소규모 군사작전. 불안정한 평화
419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평화 협정 종료,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엘리스 등과 스파르타 무력화 시도.
418 아르고스 동맹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패배.
416 아테네 멜로스 재공격, 시민 학살.9)
415 * 아테네 시칠리아 원정10) 시켈리아 소도시 세게스타의 구원 요청을 명분 삼아 주전파 알키비아데스 선동.

* 원정 전날 헤르마(헤르메스신을 새겨 넣은 사각 열주) 다수 파괴, 알키비아데스를 음해, 출정 후 궐석재판에서 신성모독죄로 소환.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 망명.

* 시라쿠사, 스파르타군의 도움(열등자 모타게스 출신 활약)으로 아테네의 봉쇄 뚫고 전열 정비 반격.

*스파르타 공식적으로 전쟁 선포, 니키아스 평화조약 깨짐

413 아테네 증원된 뒤에도 다시 패배. 라마토스 전사, 해군마저 참패, 후퇴하다가 전멸, 니키아스 포로로 잡혀 처형, 7,000명 포로 노예화(함선 216척, 병력 4만명, 5년 예산 4500달란트 망실), 스파르타 알키비아데스 조언으로 아테네 북방 데켈레이아 요새 구축하여 북방 식량 보급로 제압. 아테네 시민 25,000명에서 9,000명 수준으로 축소, 함선 100척 수준.
412 * 아테네 동맹시들의 반란, 아테네 레스보스, 사모스 반란 진압 식량 보급 해로 유지11) 스파르타 페르시아 지원 받아 로도스 등 동맹시로 편입
411 * 아테네 정치적 혼란, 과두정 쿠데타. 과두 정치체제 온건 정권으로 바뀐 후 실각 민주정 회복.12)

* 아테네 해군 식량보급해로 확보 위해 헬레스폰토스 파견 키노세마 해전, 아비노스 해전 승리, 퀴지코스 해전 승리하여 보급로 확보 성공. 양측 모두 군사적 큰 손실. 퀴지코스 해전 이후 스파르타 평화협정 제안, 아테네 거부. 알키비아데스 귀환,

407 스파르타 뤼산드로스 페르시아 총독 지원을 받아 함대 90척 복구, 총 170척 규모 구축.
406 *스파르타, 노티움 해전에서 아테네 알키비아데스 함대 격파

*스파르타의 칼리크라티다스, 아테네 코논의 70척 함대 격파.

*미틸레네항에 고립된 코논을 구하기 위해 100척 함선 급조하여 총 155척 출동

* 아테네 해군과 스파르타 칼리크라티다스 120척 함대, 아르기누사이 해전. 아테네 대승(25척 상실, 70척 격파).

* 승전 후 시신 수습 방기 사유로 아테네 장군 8명 중 6명 처형(페리클레스 아들 페리클레스 포함) 유능 해군 지휘관 축소. 전의 위축

405 스파르타 뤼산드로스 복귀 후 페르시아 키로스 왕자의 후원을 받아 해군 재건. 헬레스폰토스 해협 해상로 확보, 아테네 식량 보급 해로 확보 위해 아이고스포타모이로 파견 했으나 대패. 165척 함선 상실, 12척만 탈출.
404 아테네, 스파르타 해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멜로스에서 아테네가 자행한 학살 떠올리며 6개월간 공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조건 수용 항복. 조건 : 장성 해체, 함대 해체, 제국해체, 이후 30인 과두정 수립, 테베와 코린토스 등 구 동맹국들 스파르타의 전후 아테네 처리에 불만. 아테네 민회참석 자격 시민 15,000명으로 감소,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도 25,000 정도 복구.(전쟁 이전의 3분의 1정도로 인구 축소)
<전쟁 이후>

스파르타 아테네 제국 흡수하였으나 제국 유지용 공물로 제국 구성 도시로부터 반발 삼. 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로 내부 계층 분화 가속화

각주 6)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아티카 반도 침공하여 아테네 인근 농지를 유린하고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아테네 주작물인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는 훼손 되었다 다시 살아나 쉽사리 황폐화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의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헤일로타이(스파르타의 국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아티카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군의 아티카 원정은 가장 길었을 때도 고작 40일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모든 농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대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하기로 하는 전략을 세웠다. 비록 스파르타군이 아테네 주변의 농지를 약탈했지만, 강력한 아테네 해군이 해운을 통한 식량 공급선을 지켜주었고, 또한 항구에서 하역된 식료품은 항구부터 아테네 도심까지 세워진 장벽을 따라 안전하게 운반되었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초토화 작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각주 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좁은 시내로 몰리자 위생 상태와 영양상태가 모두 악화되어 BC 430년 아테네에 수차례 역병이 발생하여 아테네 주민의 1/3 가까이(7~8만명)가 사망했다. BC 429년에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BC 429년 나우팍투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바다에서는 해상권을 유지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는 주전파인 클레온이 실권을 잡아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된다.

각주 8)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질병과 재정 악화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BC 427년 플라타이아이 시를 점령한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 오히려 그 후 몇 년 동안은 아테네인들이 더 공세적이었다.

각주 9)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들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 후 시민들 대부분을 죽이고 여성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는 결국 시민 대부분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아 넘겼다.

각주 10)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웠지만, 시칠리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이었다. 시라쿠사에게 위협을 받던 작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강력한 아테네를 끌어들여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아테네에게 있어서도 시라쿠사는 언제든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었기에, 아테네가 전쟁 중에 이곳에 진출할 이유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각주 11) 이 와중에 에우보이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까지 반란에 가세했다. 아테네는 전쟁 초기에 자신들의 재산과 가족을 에우보이아로 상당수 이주시켰기 때문에 에우보이아의 반란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아테네의 식량보급항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각주 12) 아테네 상류층은 아테네에 민주정이 들어선 이후 지난 100년간 민주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류층 출신인 페리클레스 사망 이후 하층민 출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부자들의 전쟁 부담금을 급격하게 올리자 결국 불만이 폭발하였다. 쿠데타 후 무보수로 일하는 400명이 권력을 독점하였는데 이는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집중도를 두고 과두파 내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소수에 의한 통치를 고집하는 급진파와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를 원하는 중도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당시 아테네의 가장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던 사모스 섬의 아테네 함대는 쿠데타 소식을 듣자 민주정을 지지하고 스파르타와 계속 전쟁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만류로 아테네 함대가 본토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스파르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중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급진파는 스파르타에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동시에 항구에서 농성을 했는데, 결국 중도파에게 격파되어 추방당했고, 이로 인해 짧았던 400인 과두정은 막을 내렸다. 한편 아테네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과두정 쿠데타를 지원했지만, 쿠데타 이후에는 오히려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모스 민중에 영합하여 사모스 함대 사령관이 되어 이후 BC 406년 노티움 해전까지 아테네 함대를 지휘하였다.

 

 

  1. 등장인물

 

소크라테스(Sokratēs)기원전 469-399년)

이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1인칭으로 전날 있었던 대화를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발언 순서대로 살펴보면 폴레마르코스의 시종, 폴레마르코스,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케팔로스, 트라쉬마코스, 클레이토폰이 있으며 발언은 하지 않지만 대화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으로서는 뤼시아스, 에우튀데모스, 카르만티데스 등이 거론되고 있다(328b)

 

케팔로스(Kephalos)

폴레마르코스, 뤼시아스 및 에우튀데모스의 아버지이다. 시켈리아 섬 시라쿠사이에서 뤼사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페리클레스의 상업 장려 정책에 따라 아테네로 이주하여 이후 30년간 부유한 거류외인으로서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살았다.(cf. Lysias 12. 4) 그의 재산은 반 정도는 상속한 것이고 반 정도는 자신이 벌어들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330b) 그는 아테네 굴지의 재산가로 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무기(방패) 제조업을 경영하면서 120명의 종업원을 고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정도의 고용 규모는 당대 최대 규모로 평가된다.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은 없지만 기원전 404년에는 이미 고인이었던 게 확실하다. 케팔로스는 대략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서 역병이 유행할 때 죽었으며 폴레마르코스 형제가 투리오이로 이주한 것은 그 이후로 추정된다.(Pauli-Wissoa, Realenziclopedie. s.v. Polemarchos) 이 대화편에서 케팔로스는 고령의 인물로서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 노년에 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등장인물로서 상공인이자 거류외인으로서 케팔로스 만큼 비중 있게 그려진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당대의 신흥 상업 세력을 대표하는 케팔로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유발시켜 <국가> 전체 논의의 주제를 구성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미 고인이 되었음이 분명한 그를 정의라는 주제를 풀어가는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로까지 무리해서 등장시킨 까닭이 따로 있는 것일까? 그 또한 우리의 흥미를 끈다.

 

폴레마르코스(Polemarchos)

케팔로스의 장남이자 뤼시아스와 에우튀데모스의 형(328b)이다. 뤼시아스의 생존 연대는 통상(플루타르코스, <10명의 연설가들의 생애> Vitae Decem Oratorium, III Lysias 835c, sqq. 및 Dionys, Halicarn., Lysias 1. 참고) 기원전 459-378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형인 폴레마르코스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460년 정도로 잡으면 소크라테스보다 나이가 9살 정도 적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뤼시아스의 연대에 관해서는 아주 다른 견해가 있어서(Fr. Blass, Attische Beredsamkeit I, 341 sqq 참고) 그것에 의거하여 폴레마르코스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450년경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Th. Lenscchau, in Pauli-Wissoa, s,v, Polemarchos) 그의 부친 케팔로스는 시켈리아 섬 시라쿠사이 사람이었지만 아테네로 이주하여 아테네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에 살았다. 거류외인으로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큰 부를 이루었기 때문에 폴레마르코스도 윤택한 환경에서 아테네의 훌륭한 청년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친의 사후 동생들과 이탈리아 남부 신흥도시 투리오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토지와 시민권을 얻어 살았지만 아테네 군의 시켈리아 원정 실패(기원전 413년)로 더 이상 투리오이에 머물기가 어려워 기원전 412년에 아테네로 돌아와 가업을 다시 경영하며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이 안타깝게도 그를 파멸로 이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패전 후에 들어선 30인 과두 정권이 재정의 궁핍함을 타개하기 위하여 강력한 조치의 일환으로 폴레마르코스를 체포하여 처형한 후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간신히 생명을 건진 동생 뤼시아스가 노년에 행한 연설(Lysias XII : Contra Eratosthenem 8-19)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잘 따랐다는 것은 <국가> 서두 부분을 봐도 짐작이 된다. 대화 역시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 자신도 아버지 케팔로스의 뒤를 이어받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331e-336a) 그 후 트라쉬마코스와 소크라테스가 서로 논쟁할 때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동조하여 트라쉬마코스 편에 서 있는 클레이토폰과 말씨름도 잠깐 벌인다.(340 a-b) 게다가 제5권 도입부에서는(449b) 아데이만토스와 귓속말을 나누면서 논의 주제를 부인과 자식들에 관한 문제로 전환시키는 역할도 한다. 동생 뤼시아스가 연설가로 나오는 <파이드로스>에서는 뤼시아스와 대조를 이루면서 “마침내 철학 쪽에 마음을 두는”(257b)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Thrasymachos)

흑해 입구에 있는 칼케돈 출신의 연설가이자 소피스트이다. 연대는 뤼시아스와 비슷하다고 언급되고 있지만(Dionysios, Halicarn., Lysias 6) 뤼시아스가 태어난 해가 기원전 459년인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고 약간 시대가 아래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소크라테스보다는 최소한 10살 이상 아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가운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 <잔치꾼들>Daitaleis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작품이 427년 공연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학자들은 그가 그 시기 전후에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가르쳤음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 게다가 당대 연설기술과 관련한 여러 책에서 그의 이름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당시 그 수사학 분야에서 상당히 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설기술 비판을 주제로 하는 <파이드로스>에서도 비록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를 아테네에서 성공한 연설가라고 언급하고 있고(261c, 266c-d, 269d, 271a),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피스트 논박>에서 그가 수사학 이론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그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수사학의 시초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수사학 전체에서 아주 적은 부분만을 발전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씩 발전시켰던 여러 사람들의 계보 말하자면 후계자들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러한 상태에까지 그것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즉 최초의 발견자 다음에 티시아스가 오고, 트라쉬마코스는 티시아스 다음에 오고 그리고 테오도로스는 트라쉬마코스 다음에 계속 이어갔지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사학에 대해서 각자 많은 기여를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이 못되는 것이다.”(183b 31-32, <소피스트 논박> 김재홍 역, p.239)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도 트라시마코스가 재치 있는 직유법에 능하다고 언급하고 있고(III 11, 1413a5-10), 헤로디코스라는 사람이 그에 대해 ‘이름 그대로(thrasys) 논쟁에서 늘 건방졌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II. 23, 1400b17-23)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도 아이올리스의 소도시 퀴메(Kymē)에서 민주정을 전복시킨 사람으로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시기 관련한 전후 내용의 맥락상 우리가 말하는 같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V. 1304b-1305a)

이밖에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뉘시오스는 트라쉬마코스가 ‘다양한 수사적 기술을 가졌고 순수하고, 섬세하며,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전하면서도 그가 소책자나 과시용 연설문 외에 후세에 남길만한 어떤 책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리하고 똑똑한 뤼시아스에는 못 미치는 2급 연설가’라고 평하고 있다.(<peri Isaeos> 20) 그리고 그는 트라시마코스가 아테네의 보수적인 상류층 한 젊은이를 위해 써준 연설문의 서두로 보이는 제법 긴 조각글 하나를 전해 주고 있기도 하다(Fr. 85B1 DK). 그리고 비잔틴의 <수다>(Suda)에는 그가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전승에도 불구하고 그곳 어디에서도 <국가> 제1권에 실린 정의에 관한 그의 대담한 주장과 연관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어쩌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이 반드시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의 하나가 소피스트들인 한, 그 대표로서 기원전 5세기 대화상정 시기 전후해서 이름을 날리던 트라쉬마코스를 소환했을지도 모른다.

 

클레이토폰(Kleitophōn)

아리스토뉘모스의 아들이며 아테네 정계에서 활동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 체제>(Athēnaiōn politeia)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의 아테네 정치 정황과 관련한 그의 행동에 대해 두세 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곳에 나타난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넓은 의미에서 민주파에 속하면서 그 중에서 보수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에서 그는 트라쉬마코스를 지원하여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폴레마르코스와 맞서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에 관한 그의 입장은 <클레이토폰>에서도 드러나 있다. 기원전 405년에 상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 에서 아이스퀼로스와 논전을 벌이던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에게서 섬세하고 정치한 교양을 배우는 “나의 제자”로서 클레이토폰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글라우콘(Glaukon)

아리스톤의 아들이자 플라톤의 형, 아데이만토스의 남동생이다. 아데이만토스와 함께 본 대화편의 주요한 등 인물로 등장하며 특히 제2권의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이래 끝까지 아데이만토스와 교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상대역을 맡고 있다. 덧붙여 이 두 명의 형제는 <파르메니데스>의 서두 부분에도 나오고, 그들의 의붓 형제(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안티폰을 소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글라우콘의 생존 연대에 관해서는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가>에서(368a) 그는 아데이만토스와 함께 메가라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다는 경력이 언급되고 있다. 이 메가라 전투는 투퀴디데스(<역사> 제4권72)에 기록되고 있는 기원전 424년의 전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담(368a의 주)과 그 밖의 사람들이 말하듯이, 디오드로스(13의 65)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원전 409년의 메가라 전투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건 당시 벌써 병역에 복무하여 무훈을 세울 정도의 나이였다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막내 동생 플라톤과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컸다고 생각된다. 이 메가라 전투에 대해 기원전 424년 설을 취할 경우 플라톤은 아직 3살 무렵이 되고, 기원전 409년 설을 취할 경우라 해도 플라톤은 18살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라우콘은 매우 조숙하여 약관의 나이 20세 무렵 친구나 집안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참가하여 의회에서 연설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를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디어 생각이 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추억> 306). <국가>에서도 그는 “만사에 대해 언제나 제일 담대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357a), 그 점은 그가 경쟁심(philonikia)이 있다는 점에서 명예정적인 경향에 가깝다는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다.(548d) 이 밖에 그의 성격이나 인품에 대한 언급으로서는 글라우콘이 시가에 대해 능히 말할 수 있는(398c) 자라는 부분도 있고, 사랑에 민감한 사람(474d)라는 부분도 있다. 게다가 459a에는 “내가 자네 집에서 사냥개들과 굉장히 많은 혈통 좋은 새들을 보았다”라는 말도 나온다.

3세기에 저술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2의 124)에는 ‘아테네인 글라우콘’이 9개의 대화편이 실린 한 권의 책과 그 밖에 위작으로 보이는 32개의 대화편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인물은 <국가>에 나오는 글라우콘과 동일인물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저작(대화편)이나 그 외의 철학적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아데이만토스(Adeimantos)

아리스톤의 아들, 플라톤의 맏형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법정에 온 몇 명 가운데 한 명으로서 아데이만토스와 그의 남동생 플라톤을 언급하고 있다.(34a) 아데이만토스는 맏형으로서 아마도 어린 동생 플라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플라톤이 어린 시절 죽었다.) 글라우콘을 소개할 때 언급했듯이 플라톤과 연령 차이가 상당히 크다.

제1권이 끝남과 동시에 그때까지 활발하게 논의에 참가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제5권 앞부분 작은 막간 장면에 잠간 등장했다가 이후 모두 조용히 듣기만 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에 따라 제2권 이후 소크라테스를 상대하는 사람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불필요한 논의 전개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자신의 주요 사상을 방해받지 않고 전개 해 나가기 위해 소크라테스에게 ‘호의와 격려로 다른 사람들보다 적합한 답변을 해주는’(474a-b)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와 친한 이 형제를 대화상대로 특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플라톤 역시 그 자신 어떤 논지를 펼치든 이의를 달지 않고 품어줄 인물로 가족을 염두에 두었고 결과적으로도 이 기념비적 대작을 통해 형들의 이름을 명예롭게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 대화 상정 시기를 410년쯤으로 잡으면 소크라테스(469년생)는 59세, 트라쉬마코스(455년생, 459년생?)는 40대 중반, 글라우콘(445년생. 440년생?)은 35, 30세?, 폴레마르코스(최대 460년생, 최소 450년생?) 최대 50세, 최소 40세, 플라톤(427년생)은 17세

 

* 대화 상정시기를 420년으로 잡으면 소크라테스(469년생) 49세, 트라쉬마코스(455년생, 459년생?) 35세, 글라우콘(445년생, 440년생?) 25세, 20세?, 폴레마르코스(최대 460년생, 최소 450년생?) 최대 40세, 최소 30세, 플라톤(427년생)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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