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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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을 들어야 했던 철학자의 운명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임화가 1952년 7월에 쓴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의 한 구절이다.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상황에서 그는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인 남로당 인민유격대 지휘관으로 전사한 동지들의 서늘한 이름을 불러 본다. 다음 해에 비극적으로 마감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임화도 예감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휴전 이후 숙청되는 박헌영과 남로당계의 몰락은 마치 예정된 일처럼 진행되었다.

 

<숭실전문학교 시절의 박치우(왼쪽), 행적을 알 수 없는 그의 부인과 함께(오른쪽)>

 

“약 2주일 전 태백산 전투에서 적의 괴수 박치우를 사살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12월 4일자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된 신태영 육군참모총장의 이 말이 조선인 ‘서양철학 1세대’의 대표적 인물인 박치우(朴致祐, 1909~1949)의 마지막 행적이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잔존하는 오늘날의 남쪽은 물론이고 북쪽의 ‘혁명렬사릉’에도 그의 묘비는 없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동학이자, 일제의 ‘교육칙어’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태로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朴鍾鴻, 1903~1976)과 달리 그는 남과 북 모두에서 오랜 동안 잊혀졌다. 다만 월북하기 직전에 출간한 유일한 저서 『사상과 현실』만이 박치우가 분투한 실천적 사유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미군정의 체포령이 떨어진 와중에 그는 일제말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발표한 글과 해방 직후에 발표한 원고를 급히 모았다.

 

<『사상과 현실』 초판(백양당 1946년 11월 20일 간행) 및 재간행본들>

 

1930년대 중반 한 때 언론지면에서 고상한 인문평론가로 활동하던 이 젊은 철학자는 이제 해방공간에서 ‘좌익 언론’ <현대일보>의 발행인 겸 주필이자 남로당의 핵심적인 이론가가 되어 있었다. 남쪽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가혹한 탄압과 우익단체의 무분별한 테러가 자행되던 1946년 말에서 1947년 초에 그는 북으로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이 월북하기 이전 평양에서 김일성과 진행한 일곱 번의 비밀회동에 네 차례 배석한 박치우였지만, 다시 어떤 모습으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8.15’와 함께 그어진 ‘38선’은 1년 사이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경계이자 생사를 오가는 전선(戰線)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2. 해방공간 민주주의 담론의 현재성

 

한국전쟁 중 김책시(金策市)로 이름이 바뀐 함경북도의 항구 도시 성진(城津)에서 목사 박창영(朴昌英)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고 스무 살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던 박치우. 이후 몸담고 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자진 폐교와 <조선일보>의 폐간을 거치고, 일제 말기 중국에서 5년간 망명 생활 후에 돌아 온 고국에서도 그가 ‘말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일간지 <현대일보>는 “자유조선의 소리, 세계민주주의의 전령, 새 나라 건설의 전령”을 천명하며 창간되었는데, 일요일에도 발행할 만큼 당시 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좌익 활동 탄압 및 민생정책의 무능, 그리고 우익의 파시즘적 행태를 가감 없이 비판했던 이 신문은 6개월도 가지 못해 강제폐간 당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 다른 여러 민주주의‘들’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남북에 각각 정부가 세워지고 미국과 소련에서 이식된 분단국가주의적 민주제가 시작된 이후, 이 땅에서 도달 가능한 ‘인민의 자기 통치’로서 민주주의의 시간은 지속적으로 유예되었기 때문이다.

 

박치우는 해방공간의 민주주의 논쟁에 참여하면서 박헌영이 ‘8월 테제’에서 현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제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적 달성을 우선 지지했다. 그런데 그가 궁극적으로 해방 조국의 새로운 민주주의로 품고 있던 이상은 자유민주주의가 주장하는 형식적·사적소유중심적 시민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인민민주주의였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며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근로인민’이 바로 민주주의의 주권자이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다가가는 것이 ‘인주주의(人主主義)’의 토대가 되는 민주주의로서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낳은 근대 시민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가 원했던 새로운 한반도는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실현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주는 민주국가였다.

 

이후의 역사에서 ‘현실 사회주의’ 또는 ‘역사적 공산주의’가 단지 구호로만 표방했던 인민민주주의의 독재적이고 독단적인 제도화가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의 말을 사회주의적 이상의 원형 속에서 다시 보자.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기 자신의 주의와 주장에 철저하려면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주저앉지 말고 다수자인 근로인의 현실적인 일대일의 요구를 강력히 보증할 수 있는 근로 인민 민주주의에까지 자신을 진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되고야 말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예측 내지 각오할 줄 모르는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벌써 민주주의가 아니라 ‘금(金)’주주의나 ‘물(物)’주주의 혹은 ‘지(地)’주주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중)

 

박치우는 일제말기부터 새로운 독립 조국의 미래상을 고민하던 실천적 ‘지식인’이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조금이라도 굴려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자신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혁명가’였다. 그는 해방 조국이 무엇보다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원했고, 그 길을 넓혀가기 위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넓게 ‘연대’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는 파시즘이다’를 목놓아 외치고 싶어도 반대로 말하고 써야했던, 고통스러운 식민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자, 언제든 얼굴을 바꿔 도래할 수 있는 파시즘의 망령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역사가 강요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굴복 요구에 맞서, 그는 총을 드는 것으로 응전했고 철학자로서 ‘당파성’을 당당히 옹호했다. 당시 그가 고민했던 문제들, 즉 반민족세력에 대한 처벌, 통일국가의 형성,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점진적 혁신과 사회적 연대, 시민사회의 모순과 이율배반의 극복, 변증법적 현실 인식의 정치적·실천적 가능성 등은 사실 당시 기준에서만 유효한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천으로서의 이론이자 이론으로서의 실천을 지향했던 그의 ‘철학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요구되는 인문학 연구자들의 학문적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박치우는 단지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숨어서 읽던 사상가로만 추억될 수 없다. 1945년의 고민, 즉 진정한 독립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냉전의 종식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 체제로서 유지되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민주주의 같은 주제는 그와 오늘날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박치우가 남긴 짧은 글 속에서 그는 언제든 살아 돌아와 묻는다. “철학은 오늘, 이 땅, 우리에게 있어서 마땅히 무엇이어야만 될 것인가.”

 

언젠가 박치우가 분단국가의 남쪽에 머물 수 있었다면, 이후 한국의 철학계와 한국의 진보 정치는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 적이 있다. 지배 체제가 부여하는 권위와 권력을 비웃으며 시대의 모순을 비판하고 비합리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꼬장꼬장한 서양철학 1세대 선배들의 모습.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모습이 ‘우리 현대 철학’의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후대에 전해지면 좋겠다는, 오래된 기대가 내게도 있기 때문일 게다.

 

3.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의 역사적 고통과 철학함의 과제

 

박치우가 월북한 이후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처음엔 정치 활동에 필요한 인쇄물을 공급하는 해주인쇄소를 설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이후부터는 월북한 남로당 잔존 세력을 교육하여 유격대로 양성하기 위한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을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리의 탄광촌에 마련된 그곳은 당원들을 재규합하고 사상을 벼리고 무장투쟁을 교육하기 위한 군사학교였다. 박치우는 사상과 역사 교육을 전담하는 정치부원장으로서 2년여 간 이곳을 관리했다.

 

하지만 자신과 월북한 좌익이 곧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일 것을 그는 직감했다. 1948년 8월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 이후에도 수세에 몰린 남로당 세력은 1949년 9월 총봉기를 통해 강동정치학원생들로 구성된 유격대를 남파했다. ‘여순반란’ 사건 이후 입산한 세력과 더불어 그들은 이미 6월부터 400여 명이 오대산 지구로 투입되었다. 분단국가 내부 권력 투쟁의 희생양들은 처절한 전쟁을 통해서만 독재적 지배체제의 구축이 가능함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전쟁이 얼마 남지 않은 1949년 가을, 박치우와 그의 동지들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론 우리가 아는 분단의 역사는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사람들의 실상을 기록하지도, 고통을 기억하지도,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했다.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 빨치산> (출처: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태백산 지구로 투입된 박치우의 1군단은 군경합동 토벌대에 의해 와해되고, 잔류병들은 제3군단 김달삼(金達三) 부대와 합류하여 끝까지 저항했지만 끝내 박치우는 태백산 인근에서 주검도 없이 산화했다. 제주 ‘4.3’을 주도했던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지명에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공식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죽은 어느 빨치산 대장의 ‘잘린 모가지’는 왜 중요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무고를 증명하고 부락민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민초들의 마음이 읽힌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못했고, 서로를 절멸시키려고 했던 상처는 두터운 피딱지가 되어 말라버렸다.

 

1928년 이른 봄, 경성역에 내린 축구를 좋아하던 스무 살의 수재 박치우는 가히 짐작이나 했을까. 사상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회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여 역사의 운명 같은 것을 감내해야 한다고. 기실 philosophy라는 서양의 학문전통을 최초로 수학했던 이들은 ‘실천으로서의 철학함’이라는 문제의식을 기저에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철학적 실천 방향에 따라 1세대의 삶과 후대의 영향은 크게 달라졌다. 그들의 시대와 정치공동체가 요구했던 민족사적 과제는 결국 독립 이후 특정한 이념을 지향하는 국가의 건설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단국가는 냉전시대를 거쳐 오며 공생적 적대관계, 적대적 유사체제를 구축해야 했고 그들의 운명은 결국 당대 지배 권력의 필요와 요구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박치우는 경성제대 졸업논문에서 연구한 신칸트주의 철학자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나 지도교수 미야모토 와키치(宮本和吉)보다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더 오래도록 살아남아 현재진행형의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1936년 ‘아카데미즘’ 중심의 철학을 벗어나며, 그는 과거에 철학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지금 여기에서 ‘나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진정한 철학의 과제라고 썼다. 박치우의 그 생각은 살아있는 ‘우리철학’을 고민하는 후학들에게 작은 이정표로 남아 있다. 바로 시대의 모순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스스로,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적으로’ 극복해 나가라는 메시지이다. 아니, 사실 그것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함의 본령이었다.

 

기고자: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한반도의 역사와 시대정신에서 발현된 문제의식을 통해 정치철학과 한국현대철학을 공부하려고 하는데, 그 동안 게으르게 지내서 반성하며 살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건국대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공립도서관에서 다양한 주제의 인문학과 통일학을 강의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B급 철학』, 『통일인문학』, 『통일담론의 지성사』 등이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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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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