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의 허구 [최종덕의 책과 리뷰]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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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스트롱맨의 허구

 

책 『파퓰리즘』에 대한 서평 : Cas Mudde and C.R. Kaltwasser, Populism, Oxford, 2017

 

1. 파퓰리즘이라는 책

 

최근 들어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정치권에서도 가끔 들려온다. 요즘 그런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대체로 자기와 다른 입장의 정치인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파퓰리즘의 말이 그만큼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는 다음의 세속적 어투에 연관되어 있다. 먼저 첫째 대중에 영합한다는 어투를 상징한다. 둘째 대중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다는 정치가의 권력을 은유한다. 셋째 파퓰리즘은 대중에 따라한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그 반대로 대중과는 격이 다른 정치엘리트만의 권력양상임을 은근히 함의한다. 이런 나의 직관적 이해가 맞는지 틀리는지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요사이 출간된 책 한권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파퓰리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그래서 그 책을 소개할 겸 이렇게 리뷰를 하게 되었다. 그 책 이름은 이 쪽 분야를 오랜 동안 연구해온 조지아대학교 머디 교수가 펴낸 『파퓰리즘』이다.

 

파퓰리즘의 정치인이라면 대뜸 유럽의 우파 지도자나 남미의 죄파 출신 대통령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 정치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그만큼 파퓰리즘이라는 용어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의미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파퓰리즘이라는 말은 오히려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언어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파퓰리즘의 고유한 의미는 없다는 사회과학적 입장도 강한데, 어쨌든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서 파퓰리즘의 정치 양상을 일반적 정치 특징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어서 파퓰리즘을 단박에 이해하려고 했던 나의 의도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해소의 실마리를 찾았다.

 

2. 해방적 파뮬리즘

 

파퓰리즘은 인민the people과 엘리트the elite 계층을 구분하는데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파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좁은 의미로 정의할 때 파퓰리즘이란 부패한 기존의 엘리트 집단에 대항할 수 있는 대중의 일반의지가 자생적으로 집결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이다.(p.6) 인간과 사회의 특성에 대한 규범화된 신념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면 파퓰리즘도 충분히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갖을 수 있다. 파퓰리즘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간주했지만, 파시즘이나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와 같은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수준에 있다. 저자의 구분을 서평자 마음대로 다시 번역해 본다면, 파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고체성 이데올로기thick-centered ideology라고 붙일 수 있고, 파퓰리즘의 이데올로기는 액체성 이데올로기thin-centered ideology로 비유될 수 있다(p.6).

 

파퓰리즘의 원형은 봉건제 왕권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하고자 했던 i) 해방전선이었으며 독재로부터 대중의 인권을 보호하려했던 ii) 투쟁기반 역할을 했었다. 독재저항에 나섰던 아르헨티나 정치이론가 라클라우(Ernesto Laclau)도 말하기를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파퓰리즘을 이 책의 용어와 무관하게 해방적 파퓰리즘이라고 부르려 한다.

 

우리에게 해방적 파퓰리즘은 조선말 농민혁명으로 시작한 동학과 조선후기 양명학과 대종교 등 일제 강압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형이었다.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독재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은 대부분 해방적 파퓰리즘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전제주의가 무너지는 19세기 말과 민주주의가 들어서는 20세기 초를 연결하는 데 있어 파퓰리즘의 역할은 큰 의미를 지녔다. 이 책의 저자 역시 파퓰리즘과 민주주의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19세기 말부터 확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p.40) 불행히도 20세기 중후반 소위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이 휘날리면서 파퓰리즘은 다른 색깔로 드러나게 되었다.

 

3. 폐쇄적 파퓰리즘nationalist populism

 

파퓰리즘의 시작은 억압된 피플(백성, 국민, 민중, 인민, 대중)을 해방시킨다는 아젠다에서 출발한다. 반면 요즘 거론되는 파퓰리즘은 정치시스템의 한 양상으로 간주되곤 한다. 파퓰리즘이 이미 현대 미디어와 정치에 제한된 규범적 용어라는 입장을 이 책은 제시한다(p.6)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라는 말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상황에 더 잘 사용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은(4쪽)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유민주주의 범주는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사회적-정치적 양상이라고 보아도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구시대의 왕권형 권위주의에서는 벗어났지만 오히려 사회적 민주주의보다 퇴보한 형태로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나도 동의한다. 저자가 말하는 파퓰리즘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현존하는 파퓰리즘은 외국인 혐오증과 반이민 정책과 연관된 유럽의 파퓰리즘과 파벌주의와 경제적 파국에 연관된 남미의 파퓰리즘을 연상하게 한다.

 

엘리트들이 민중을 위험하고 부정직하며 상스럽다고 믿으며, 동시에 엘리트는 도덕적으로 민중들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성에서도 우월하다고 믿는다.(p.7) 따라서 엘리트 정치가는 대중을 조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엘리트 정치가들이 나서서 대중을 조정하는 정치는 대부분 독재정치로 이어진다. 엘리트 정치인들은 자신의 일방적 독재 정치양식을 변명하기 위하여 파퓰리즘을 선전도구로 악용한다. 엘리트 정치인 혹은 정치집단이 대중 일반을 잘 살게 해줄 수 있다고 호도한다. 자본의 권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엘리트 정치집단과 엘리트 경제집단이 결탁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상호 결탁된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와 권력의 잔여물을 대중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유지하고 확장한다. 이러한 환상의 기대치를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라고 한다. 엘리트 정치와 낙수효과가 서로 상생하여 오도된 파퓰리즘이 형성된다.

 

이러한 엘리트중심 파퓰리즘은 해방적 파퓰리즘이기보다는 정반대의 폐쇄적 파퓰리즘에 가깝다. 이 책도 그런 폐쇄적 파퓰리즘을 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파퓰리즘은 대체로 두 가지 형태에 있다. 첫째 1970년대 한국의 군사혁명, 태국의 친위혁명, 남아메리카의 해방혁명 등으로 새로 형성된 신생 독립국가와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파퓰리즘이다. 둘째 최근 전세계적 빅이슈가 되고 있는 IS 테러와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오는 무슬림 난민에 대응하는 정치적 양식으로서 파퓰리즘이다. 둘째 파퓰리즘은 최근의 난민증가에 대한 반작용이지만, 그 단초는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독일 통일이 된 1989년 이후 유럽국가의 변화에 있다. 이 책은 2017년 초 출간되었지만, 초고는 트럼프 대통령 이전 시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트럼프 정권의 파퓰리즘에 대해서 다룬 것은 별로 없다. 지난 2012년 미국 대선 공화당 예비후보였던 사라 페일린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조금 언급했을 뿐이니, 이 책의 시의성은 미흡한 것으로 판단된다. 폐쇄된 파퓰리즘은 내가 붙인 이름이고, 학술적으로는 주로 민족주의 파퓰리즘natioalist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혹은 국가주의 파퓰리즘으로 번역해야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유럽국가나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다중민족으로 형성된 미국에서는 민족주의 개념이 무의미하거나 국가주의로 변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America First” 라는 구호가 보여주듯이 트럼프는 극단의 국가 이기주의를 채택했다. 결국 그가 대중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어쨌든 트럼프는 충분히 파퓰리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트럼프의 파퓰리즘은 전형적인 폐쇄적 파퓰리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4. 파퓰리즘 정치가의 세 가지 형태

 

파퓰리즘의 정치가(파퓰리스트)는  3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소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외부 파퓰리스트, 내부 파퓰리스트 그리고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의 세 형태를 말한다. 이들의 차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범례를 통해 그 차이를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4.1 외부 파퓰리스트 : 외부 파퓰리스트는 주류 혹은 엘리트 정치그룹과 연관성이 전혀 없었던 정치 신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치 비주류였지만 기존 정치세력에 신물이 나거나 폐해를 입었던 대중들에게 큰 호감도를 갖고 인기를 얻으면서 주도적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는 경우이다. 전반적으로 드문 현상이기는 하지만, 차베스나 후지모리가 그 사례였다. 칠레의 후지모리 대통령(1990-2000)은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학총장 출신이었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1998-2012)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다. 진정한 외부 파퓰리스트는 정당정치와 제도정치로 안착된 서구유럽에서는 드물고 라틴아메리카처럼 개인적이고 유동적인 정치시스템에서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독재자로 낙인찍혀서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p.74)

 

4.2 내부-외부 파퓰리스트 : 이들과 다르게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는 정치적 엘리트는 아니었지만 그들과 강한 연관성을 가졌던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외부 파퓰리스트보다 정치적 성공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전후 최장기 오스트리아 수상이었던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1970-1983)의 정치적 제자인 하이더 카린티아 주지사(Jorg Haider, 1999-2008)는 국민들의 강력한 인기를 받아 스스로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수상이 되고자 했다.(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으면서 수상이 되지 못했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당시 대선 공화당 후보였던 맥케인John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추천되어 인기 급부상한 사라 페일린과 당시 이탈리아 수상과의 친분관계로 나중에 이탈리아 수상까지 한 미디어 제왕 베르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2008-2011)이 전형적인 내부-외부 파퓰리스트들이다.(p.75)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3 내부 파퓰리스트 : 원래부터 정치적 엘리트 핵심이었던 파퓰리스트도 있다. 저자는 이들은 내부 파퓰리스트라고 표현했다. 내부 파퓰리스트는 원래 정당정치인이다. 처음에는 정치적 인연이 없었다가 개인적 등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외부 혹은 외부-내부 파퓰리스트와 다르게 내부 파퓰리스트는 대중정당을 만든 후에 포퓰리스트로 전환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태국의 부수상 출신 탁신은 자신의 대중정당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수상까지 했다. 스위스 보수당 SVP 출신으로서 반이민정책과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대중영합의 인기를 통해 극우대중정당을 만들어 스위스 연방위원장이 되었던 블로커(Christoph Blocher, 2004-2007), 그리고 보수당에서 우파 대중정당을 창설하여 헝가리의 민족주의 파퓰리즘을 내세운 헝가리의 오르반(Victor Orbán) 수상(2010-현재)이 전형적인 내부 파퓰리스트의 사례이다.(p.76)

 

5. 파퓰리즘과 민주주의

 

파퓰리즘은 정치의 본질로서만이 아니라 해방의 권력이라는 라클라우(Ernesto Laclau)의 말은 파퓰리즘의 이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파퓰리즘은 대의민주주의 절차와 이상을 무너트리는 것이다”라고 프랑스 주지주의 사회과학자 로잔발롱(Pierre Rosanvallon)은 말한다.(p.79) 앞서 많은 사례에서 보여주었듯이 1980년대 이후 전세계의 파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많다. 민주주의와 파퓰리즘을 연결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견해와 민주주의를 보완한다는 견해는 그 어느 것도 틀리거나 맞다고 할 수 없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파퓰리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파퓰리즘은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하지만 부정적 영향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p.84) 그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의 내용을 저자는 표로 만들었는데, 저자가 만든 표를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파퓰리즘의 부정적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민주주의의 존속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서유럽이나 미국에서처럼 파퓰리즘은 난민과 무슬림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합법화하고 있다. 최근 한국 정치파동에서 속살을 드러낸 폐쇄적 파퓰리즘은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처럼 동원된 파퓰리즘이라는 최악의 병증을 드러냈다. 역사에서 드러났듯 세기말 동학운동과 같은 해방적 파퓰리즘에서부터 <촛불>이라는 자생적 파퓰리즘에 이르기까지 우리 내부에서부터 대중적 공감성이 되살아나 폐쇄적 파퓰리즘의 병증을 겨우 치료했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항상 불완전하며, 언제든지 개선될 수 있지만 거꾸로 쇠퇴될 수도 있다. 폐쇄적 파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덮으면 미래는 암울할 것이며 해방적 파퓰리즘이 건재하면 민주주의는 더 건강해 질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통치 그 자체만이 아니라 민주화를 이뤄가는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도 강조한다.(p.86)

 

6. 스페인, 프랑코 스트롱맨 정권과 그를 수용한 철학자 가세트의 이중성

 

6.1 박정희, 전두환과 맞먹는 프랑코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을 독일 나치의 도움을 받아 공화파 전선을 물리치고 자신의 승리로 가져가면서 정권을 장악한 1939년부터 그가 죽을 때(1975)까지 대통령과 총리 그리고 사라진 전제주의 왕까지 겸비한 총통의 자리를 차지한 전형적인 독재자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적극적인 부역으로 파퓰리즘 형태의 압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코가  30만에 가까운 유아납치, 언론장악, 정적 제거를 하면서도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이 대중을 강제로 동원하여 자기지지를 하도록 유도해 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대중 지지를 이끌어 낸 결정적인 배후세력은 카톨릭 교회였다. 불행하게도 점에서 프랑코 정권을 파퓰리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스페인 근대사를 몇몇 문장으로 아래처럼 상징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 1920년대 카톨릭 교회가 전국토의 93%를 소유했을 정도로 빈부차가 극심했다.
  • 왕정과 기득권 부패에서 해방하려는 시도가 제2 공화정을 탄생시켰지만 곧 무너졌다.
  • 그 결과가 당시 식민지반란군을 제압했던 떠오르는 별 프랑코(당시 대령)군부와 프랑코 군부를 신의 계시인 십자군이라고 치켜세운 카톨릭 교회 및 극우반공산당파가 한 축의 세력이며, 반대 축으로 공화파-좌파-국민세력 사이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 1939년 프랑코 정권은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확장했다. 여전히 파퓰리즘의 이름을 도용했다.
  • 블랙리스트의 한국 문화계처럼 영화, 예술, 등의 문화정책에서 강력한 문맹정책을 시행했다. 상당 부분 프랑코 입장에서 성공적이었다고 그들은 자평했다.(각주1)
  • 프랑코 독재일당은 나중에(1949년) 당명을 민족해방당(Movimiento Nacional)으로 개칭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민족주의 파퓰리즘의 시효라고 본다.
  • 1975년 프랑코의 죽음으로 비로소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각주2)

각주1) 대표적인 사례가 No-Do(영화 시작 전에 정권홍보상영) 강제시행 등.

각주2)  1975년 이후 스페인 민주화 이행과정이 평화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많으나 실제로는 상당한 적폐 청산과정과 사회적 부작용을 거쳤다. 1975년부터 80년 사이 민주화운동으로 63명의 거리 시위자가 사망하였고, 약 400명이 내부 테러로 희생되었다.(Paloma Aguilar Fernández, “Justice, Politics, and Memory in the Spanish Transition”, in The Politics of Memory, p. 97.)

 

6.2 이를 바라본 철학자 가세트 :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é Ortega y Gasset, 1883-1955) 스페인 ‘생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각주3) 가세트는 대중의 반란(La rebelión de las masas)이라는 책에서 대중을 복종과 예속에 적응된 계층으로 묘사했다 물론 가세트는 대중을 말하면서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의 부류로 규정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잠재적인 인간의 존재성으로 말했다. 즉 대중은 경제적 계층이나 사회적 계층이 아닌 일종의 정신적 상태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대중이 될 수 있으며, 거꾸로 누구나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가세트가 대중을 복종의 당사자며 엘리트를 지배의 주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입장과 견해가 없는 자는 입장과 견해가 분명한 집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 대중철학의 핵심이다. 가세트가 말한 대중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대중은 1) 자신의 의견과 입장이 없으며 2) 권력에 대체로 추종하며 3) 사회문제에 참여하지 않으며 4) 자신의 사람에 치명적인 위해가 느껴지지 않는 한 지배체제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가세트는 말한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가세트가 말하는 대중은 전적으로 엘리트 계층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세트의 대중은 평균화된 존재(평균대중)들이다 그래서 대중 개인의 의견과 주장은 대중 안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 대중은 원래 비속하고 나태하여 이성적인 문제해결에 약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을 잘 이용하는 집단이 바로 엘리트의 폐쇄된 파퓰리즘이다. 대중은 본래의 지배적 권위의 소유자인 엘리트(選良)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대중 스스로 엘리트의 지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가세트의 기괴한 대중론이다. 이러 생각은 프랑코 정권의 무자비한 통치에 대중이 숨죽여만 생존했던 당대의 기억에서 나온 관념적 소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각주3)  오르테가가 <생의 철학>에서 말하는 실재는 물리학의 실재(reality)가 아니며, 수학에서 의미하는 실재도 아니며, 플라톤 실재론 철학의 실재도 아니고, 관념론 철학의 관념생성의 실재인 자아(ego)도 아니다. 그의 생의 실재는 인간의 사람 자체이다.

 

7. 스트롱맨의 등장 : 파퓰리즘의 콘트롤센터

 

중남미 정치권에서 보듯 대중과 직접 연계하면서 권력을 집중하는 소위 강한 카리스마 이미지의 정치가들의 출현을 파퓰리즘이라고 한다. 파퓰리즘은 카리스마 지도자를 수반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카리스마 지도자로부터 파퓰리즘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p.97) 이들은 대중과의 연결을 중시하지만 반대자들을 단절시키는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파퓰리스트는 일부 자연사한 사람들 말고 대부분 끝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다.(p.4)

 

스트롱맨의 사례로서 칠레 피노체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칠레의 폭정 피노체트(Augusto Pinochat) 대통령(직위,1973-1990)은 민주화운동 인사 3,000명 이상을 납치 살해했던 박정희이나 전두환과 맞먹는 독재자였다. 피노체트는 1970년 민주의 봄이 피던 당시의 칠레에서 3만여 명 이상의 민주인사들을 살해하면서 정권을 탈취했다. ‘산티아고’의 봄은 정말 짧았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이라는 민중가요로 잘 알려진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Víctor Lidio Jara Martínez, 1932-1973)의 기타치는 손목을 잘라버린 피노체트의 악명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악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위선이 끼어있었다. 미국정권이 피노체트를 오랜 동안 지원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는 점이다. 피노체트 역시 스트롱맨의 철권정치를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군중을 동원하여 자기 지지를 표방하도록 하는 폐쇄적 파퓰리즘을 간판으로 세웠다. Gamal Abdel Nasser 이집트 대통령(1956-1970), 리비아의 Muammar al-Gaddafi(1969-2011), 이스라엘의 장기집권자 Benjamin Netanyahu, 헌법까지 마음대로 바꾸면서 장기독재를 기획한 터키의 현재 대통령 Tayyip Erdogan을 들 수 있다(p.39).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박정희와 전두환이 빠지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흔적이 강한 경우 그 친족인 박근혜 같은 사람도 ‘그냥’ 정치를 향유하게 되는 우스운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의 트럼프나 그를 흉내내는 홍준표의 스트롱맨 양태는 그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거짓말을 동원해야 한다. 그 거짓말의 양상은 독재권력기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스트롱맨 초기에 기만적이었다가 스트롱맨 후기에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전환된다. 자기기만의 스트롱맨 권력기에는 대체로 대중들의 삶의 고통은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다.

 

스트롱맨의 파퓰리즘은 아래의 현상을 드러낸다.

 

  • 조작된 군중동원을 항상 기획하며, 실제로 군중집단유도에 강하다.
  •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확보에 주력한다. 사전 이미지 확보가 안 되었거나 새로운 권력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하여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 이런 미디어 장악이 안 되는 경우 미디어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 기존 정치 이데올로기나 경제구조와 이론을 무시하고 그만의 이기주의 기반 정책을 기획한다.
  • 강한 카리스마를 내세워 독단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하려 한다. 그들의 권위는 대중으로부터 우러난 존경심으로서 권위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한 i) 공포심 조장에 기반한 권위이거나 혹은 ii) 대자본에 의한 낙수효과로서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스트롱맨의 동원된 형태의 권위는 독재권력으로 귀착될 뿐이다. (커크 호킨스)
  • 개인성향을 정치권력에 그대로 반영한다.(personalization; p.77) 권력의 개인적 특성이 현대정치의 일반적 경향이지만 스트롱맨의 개인 특성은 개인의 우상화로 연결될 우려가 높다.
  • 필리핀 두테르테나 미국 트럼프처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기초헌법을 무시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들처럼 파퓰리즘이 권력화되면서 사법권을 무시한 조폭형 정치가 일상화된다.(p.38)
  • 스트롱맨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서열과 계층구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스트롱맨 정권은 원천적으로 평등정책을 거부한다.(각주4)
  • 스트롱맨의 정치는 최후에 원칙이 없어지고 인물만 남는다.
  • 스트롱맨의 정치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엘리트는 항상 적대적 관계를 욕망하고 적 진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스트롱맨의 특징은 어떤 형식의 이기주의 집단과 결합한다.

각주4)  폐쇄적 파퓰리즘은 보수주의 정치양태의 하나로 드러난다. 폐쇄적 파퓰리즘은 말이 파퓰리즘이지 대중 혹은 서민이나 민중의 입장이 아닌 정치엘리트와 경제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행태를 보인다.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과 권력 중심으로 개편되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개악시키거나 단절하고자 한다. 건강보험이나 실업수당 혹은 경제 소외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줄이거나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우주의들의 파퓰리즘을 말한다.

 

파퓰리즘을 해방적 파퓰리즘과 폐쇄적 파퓰리즘의 두 양상이 있다고 앞서 말했다. 해방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주체성 혹은 선천적 양심성을 근간으로 한다. 반면 폐쇄적 파퓰리즘은 대중의 예속성을 파고들면서 대중 혹은 집단화된 개인의 이기주의에 근간을 둔다. 파퓰리즘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중의 개념도 단박에 정의되기 어렵다. 굳이 말한다면 해방적 파퓰리즘의 주체는 피플(인민)이며, 폐쇄적 파퓰리즘의 대상은 대중mass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의미는 주로 종속적이거나 예속적이든지 아니면 집단 내 개인의 정체성도 없고 개인이 모인 집단의 정체성도 없는 경우, 그런 집단을 대중이라고 한다. 대중은 무질서를 지향한다는 것이 서구일반의 설명이다. 반면에 피플은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집단의 목적지향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그런 집단을 피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트롱맨은 대중을 통제하는 데 주로 문맹정책 등의 문화적 조정구조를 사용하며, 피플을 통제하기 위하여 무력이나 공포정치를 이용한다.

 

엘리트정치의 부작용인 스트롱맨 출현은 대중의 부정적 의미 즉 예속적이고 무질서 지향의 집단을 통제하며 훈육하고 종속시킬 수 있다는 권력의 형성을 의미한다. 스트롱맨의 특징은 그들의 이기주의에 대중의 욕망을 조정하는 데 있다. 스트롱맨 일반이 보여주는 마조키즘이나 훈육주의는 한 사회의 퇴행성으로 가는 잣대가 된다.

 

피플people과 대중mass의 문제점을 상쇄하고 조절하며 전통 스피노자 철학에서 도입한 개념인 다중multitude 개념은 해방적 피플과 예속적 대중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 많이 회자된다. 이탈라이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가 창의한 다중 개념이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성 집합성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나왔지만, 과연 파퓰리즘의 피플을 대체할 수 있는 지는 독자가 평가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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