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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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5회

한길석(한철연 회원)

 

철학 및 철학의 역할에 대한 재개념화

1980년대 초 “자리하고 있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이, 특히 칸트와 헤겔에서 정점을 이룬 독일 철학 전통에서 너무나 익숙한 학구적 철학의 역할, 즉 자연 과학이 알 수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적법하게 결정하고 보다 넓은 문화적 학습의 지붕 아래서 어떻게 학문적 지식들이 적법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판정하는 재판관의 권위를 휘두르는 스타일은 더 이상 그럴싸한 것으로 주장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MCCA: 1~21).

하버마스는 근대라는 조건에서는 철학은 좀 더 겸손해져야 하지만 여전히 중대한 포부, 즉 재구성적 사회과학을 위해 “자리를 메워 주는” 포부를 지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이 강한 보편주의적 주장을 지닌 인간 행위에 관한 경험적 이론들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공개적 장소를 열어 유지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구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오늘날의 현안에 있어 겸손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실현 가능한 판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 능력에 관한 이론 같은 것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성의 주권적 힘을 칸트와 헤겔이 그러하듯 권위적으로 간단히 억측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성에 대한 강한 경험적 근거들을 이미 제공하고 있는 인간의 기본적 능력들, 즉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을 책임 능력이 있는 주체들로 간주할 경우 다른 대안적 능력들에는 결핍되어 있는 기본적 능력들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의 주요 후보자들은 분명히 언어와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와 의사소통을 탐구하는 재구성적 과학들이 자기 이론에 함축된 보편주의적 주장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고 널리 전파할 수 있도록 철학이 보조하고 도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충족하고자 하는 철학은 여타 학문들에게 허가장을 발부하고, 이론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합리성에 대한 고유한 주장을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기하는 법(결국 그것이 [경험적 자기 학문 영역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게 하는] 보편적 역량들인 것이므로)을 학습시키는 자기 이해자로서의 역할을 그만둬야만 할 것이다.

 

비판이론의 유산과 변형

이와 같은 입장은 하버마스로 하여금 철학의 자기이해에 대해 두 번째로 수정하게끔 하였다. 즉 철학은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문화적 이해 전체와 적절한 관계를 맺도록 방법을 일러주는 주권자적 판관으로서 자임할 것이 아니라, 재구성적 과학들의 전문화되고 기술적인 언어를 시민들이 매일 수행하는 생활 세계의 “통상적” 담론으로 번역하여 그런 지식들로부터 얻은 통찰을 시민들이 의사소통하게 하는 번역자로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이 과학적 진보에 함의된 규범적이고도 정치적인 함축을 발견하는 것은 민주적 공영역에서 논쟁을 벌임으로써 가능하다.

“자리 지키는 자 및 해석자로서의 철학”의 논의에서 함축된 바는 철학이 간직해야 할 분과 학문적 핵심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등의 병존 분야들과 지속적 대화의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의 목표는 사회이론과의 지속적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일찍이 1950년대부터 하버마스의 고유한 지적 궤적을 안내하고 있는 입장이다.1

유연하고 세심하며 자기 제한적인 철학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하버마스에게서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철학 학위를 받은 후 수년간 언론인 생활을 하던 청년 하버마스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둥지를 튼(비록 편안한 둥지는 아니었지만)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저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사회이론은 하버마스의 사회적 의식이 명확하면서 학제적 특성을 지닌 철학이라는 입장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세워진 사회조사 연구소는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법학자, 정신의학 및 문학도들이 현대적 사회 병리 현상의 구저와 원천을 넓은 범위에서 연구하기 위해 협력 작업을 했던 곳이었다. 1930년대에 이 연구소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감독 아래 불의, 지배 그리고 억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경험적 사회 연구와 철학적 분석을 통합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연구소가 마르크스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구성원 중 공공연한 마르크스주의자는 극소수였다. 호르크하이머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 눈에 띄지 않게 이행시킴으로써 자본주의사회를 생존하게 하는 환상과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비판이론을 발전시킬 것을 서약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통합시키는 추진력을 보여주면서,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허버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프리드리히 폴락과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들은 사회 병리 현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논평하기 위한 독창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다. 즉, 한 편으로는 조작되고 억압된 시민 대중이 자기들의 독립성과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지배에 굴종하도록 만드는 신경증, 정서 및 인지 장애를 개별 주체의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다른 한 편 국가 주도적 시장과 대중의 충성을 강력하게 혼합하여 일당 지배 아래에 둠으로써 약화되던 입헌 민주주의에 대해 제도적 수준에서 연구하였다. 그들은 독일과 미합중국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적 인격”을 분석하고 논평하였다. 이것은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세력화를 가능하게 한 심리적이면서 사회적인 조건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표면상으로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헌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 모두를 부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은 계몽주의적 근대성 속에 내재된 규범적 원천에 경보를 발령하는 일이 거듭되면서 점차 계몽주의적 근대성 기획 전체를 회의하게 되었다. 연구소 구성원들은 1930년대에 이미, 그리고 나치즘의 성공과 세계대전이 코앞에 닥친 게 명확해지던 이후부터 특히 점점 더 암울한 전망의 글을 쓰게 되었다. 전쟁기 저술된 고전적 연구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유럽 계몽주의 전통을 인간 이성의 보편적 형식을 바탕으로 한 정의와 평등의 정치적 요구에 대한 원천으로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다. 대신에 그들은 근대 역사의 시작 이래로, 아니 사실상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성”은 “신화”와 상호 얽힌 상태에서 전개되어왔다고 논평하였다. 자연[혹은 본성]의 힘에 복종하던 주체성을 해방시키도록 독촉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합리성을 계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성은 자연 지배를 통해 인간에게서 자연을 분리시킨 자연에 저항하는 힘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적 환경 및 인간이 지닌 자연적 충동, 욕구 그리고 갈망으로서의 “내적 본성”으로서의 자연을 길들이고 통제하도록 하던 경향성이 점점 더 가혹하고 교묘한 지배 및 통제의 형태로 갱신을 거듭했다는 것이다(Horkheimer & Adorno 2002).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연구소를 재건하던 1950년대에 이 연구소의 작업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연구소와 그 구성원들은 사회적 지배의 사회심리학적 차원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계속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불안정한 정치문화 속에서 진보적 역할을 지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철학에 있어서 그들은 종래에 지녔던 급진 정치적 포부를 포기하였다. 철학은 예전의 보수적인 기능, 즉 진리와 미의 전통적 가치들에 해를 끼치는 근대적 사회 현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수호하는 역할로 회귀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 이후에 있어서는 호르크하이머 자신, 나아가 아도르노조차도 그러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2세대”로 표상되곤 한다. 사회조사연구소의 주요 구성원들의 작업들이 하버마스의 철학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2년 간 아도르노의 조수로서 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비판이론이 그에게 의심할 수 없는 중요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이론의 영향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비판이론이 하버마스의 독창적 이론의 성숙에 있어서 긍정적 영향 못지않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사상이 하버마스에게 이바지한 바는 미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 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주제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 쉘링의 역사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연구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을 마치기도 전에 하버마스는 독일철학이 (나치) 시대에 대한 철저한 진단은 고사하고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자 독일철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급진 철학의 전통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그의 대학 시절에는 전수받지 못했던 전통이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구자들과 당대인들의 핵심 저작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는 물론이고 죄르지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그리고 프랑스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장-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저작들이었다.

1956년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해 아도르노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교수자격논문”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교수자격논문은 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이후에 저술해야 하는 단행본 분량의 논문을 일컫는다. 프랑크푸르트에 머물 무렵, 하버마스와 막스 호르크하이머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르크하이머는 사실 하버마스를 연구소에서 일하도록 초청한 아도르노의 처분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아도르노에게 쓴 편지에서 젊은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너무 급진적이어서 연구소의 구성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의 지도교수가 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은 2년 동안 충돌하였고, 결국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마르쿠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볼프강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하였다. 아벤트로트는 1950년대 중반 서독의 보수적이자 반공주의 분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교수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극소수 학자 중 하나였다.

그의 개인적 어려움과는 별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하버마스의 학문적 관계 역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계몽의 변증법』이 출판되고 나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결국 철학과 경험적 사회학이 상호 보강 및 이의를 제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회비판이론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철학 분야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두 사람은 1968년 독일 대학과 도시들을 휩쓸었던 급진적 학생 운동의 목표와 전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2 하버마스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인간 합리성의 해방적 차원을 거부하는 지구적 흐름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그의 입장은 지성 및 정치적 계몽에 대한 칸트주의에서 발견되는 규범적 요구에 핵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의 회의적 저술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지적 상속자이자 계속적인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하버마스가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생산해 낸 테제는 비판이론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며 표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 [1989]) 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테제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하버마스를 서독에서 가장 유망한 철학자이자 지식인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 책은 그 논지나 방법에 있어서 이성, 자유 그리고 위엄 사이의 내적 연관에 대한 계몽주의의 핵심적 주장—비록 이러한 주장 속에 내재한 철학적 과시물들은 옹호될 수 없는 것이지만—을 보존할 수 있는 사회이론 및 정치 이론을 생산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포부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하버마스는 살롱, 커피하우스, 클럽, 신문과 같은 18세기 유럽에서 정치적 토론을 벌이던 비공식적 장소의 전개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는 제도화된 정치 체계 바깥에 있던 그러한 비공식적 회합장소들에서 시민들이 생활 속 쟁점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쟁점들에 대해 토론하여 정치적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민주적 접근 경로를 통해 정치적 여론을 정치 체계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이런 정치적 여론의 “풀뿌리”적 원천들은 하버마스가 나중에 의사소통 합리성의 핵심 요소로서 분석한 공개적 담론이라는 절차적 원칙들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 공영역에 참여한 화자와 청자들은 담론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으며, 담론 참여자들의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그런 담론 과정을 통해 이룩한] 식견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합의에 이르고자 했다. 그들은 공정한 이해 지향적 관행을 그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보다도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성과 민주주의의 강력한 개념적 상호독립성을 드러내었다는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합리적이고도 민주적으로 담론을 운영하였다. 절차적으로 온당하게 정치적 공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술, 식견 그리고 행동을 요구하였다. 민주적 참여는 근거들을 주고받는 담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거친 합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유럽의 정치적 공영역은 하버마스의 이후 저작이 역사적이기보다는 이론적으로 탐구했던 현상들이었다. 정치적 공영역은 공유된 참여 경험과 태도들이 존재하던 일상적 생활세계와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근대 통치 제도 사이를 비집고 열려진 근대적 참여정치의 공간이다. 이 좁고도 깨지기 쉬운 공간은 시민으로서의 주체들이 이해관계의 공유라는 문제에 대해 논하는 비공식적 담론들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합리적 행위 능력을 단련하는 경연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제목이 함축하듯이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초기 민주적 의사소통의 규범적 토대를 분석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공영역의 쇠퇴에 대해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공영역은 19세기와 20세기 무렵 복잡한 관료행정과 고도로 조직된 국가 기구들이 흥기함에 따라 위태롭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국가 권력과 거대 시장 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적 복잡성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정 매체”가 되었고, 그것들은 발전된 국민국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조정 문제들에 대해 점차 세련되고 효율적인 대응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국가 관료행정과 시장 경제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즉 국가와 시장 사이의 협소한 공적 공간을 폐쇄하게 만들어 능동적 시민들을 관료행정의 수동적 고객이나 시장경제의 고객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3

하버마스의 초기 저작은 전쟁 기간 동안 저술되었던 비판 이론 “1세대”의 저작들에 퍼져있던 사회 병리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근대 민주 사회의 위기 경향과 구조적 결함이 합리성 자체에 내재한다는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효율적 관료 행정 권력을 실현한 계산적 통제의 합리성 유형과 동등한 시민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던 의사소통적 조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근거를 주고받는 능력의 합리성 유형이 확연히 다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의 사명이란 이러한 합리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민주적 생활 형식의 원천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하버마스로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공한 근대성 진단과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위에서 논했던 철학과 재구성적, 경험적 사회과학의 협업을 위해 설정한 방향이었다.

이후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저술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과 여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근대 사회의 병리현상들과 합리성을 탐구하고 합리성의 갱신을 위해 그것에 내재한 잠재성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위한 주된 도구였다.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술인 『인식과 관심』(1968 [1974])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적 인간학, 역사기록학(historiography) 그리고 심지어 정신분석이론을 포괄하는 수많은 기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실현 조건으로 작동하는 “인간학적으로 깊게 자리한” 관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또한 그러한 관심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타당성 조건에 기초하여 인식될 수 있고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관심들은 인류의 자연사적 역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인류에 구현된 다양한 제도들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인식 구성적 관심들은, 화용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간 인식 활동에 연관된 초월적 토대였다.

하버마스는 그러한 관심들이 세 가지로 식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외적 자연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기술적 관심, 상호주관적 이해에 내재한 실천적 관심, 다양한 지배, 강제 및 통제 형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해방적 관심이 그것이다. 기술적 관심은 과학과 기술공학이 복합되면서 그것의 자체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전문지식, 진리, 성공, 진보로 간주되던 것을 통해 근대에서 꽃피웠다. 실용적 관심은 19세기 정신과학 혹은 인문학으로 통합되었던 일련의 해석학적 분과학문들을 발생시켰다. 이런 학문들은 역사기록학, 문예비평, 문화 연구 같은 것으로서, 연구 대상을 제어하거나 예견할 수 없고 연구 참여자들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해방적 관심을 설정한 것은 하버마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공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세 번째 관심, 즉 개방적으로 규범적이며 정치적인 관심을 인식한다는 임무는 기술적인 만큼이나 야심만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도 하버마스가 한 작업은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폭로하고 극복하려는 임무에 헌신하면서 여타 지식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영감을 받은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이 분명한 문제점—(잠재적으로 한 없이 계속되는) 심리치료의 성과가 어떻게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가와 분석 대상자 간의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방의 범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볼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1. 하버마스의 탈초월화된(detranscendentalized) 이성과 탈형이상학적(postmetaphysical) 사유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에 대해서는 이 책의 2장을 보라.

  2. 당시 하버마스가 학생 운동에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3. 이후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들을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용어로 이론화하였다. 이 책의 4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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