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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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4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1장 역사적인 그리고 지성적인 맥락

 

맥스 펜스키(Max Pensky)

하버마스의 역사적이고도 지적인 영향들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하는 것은 철학자의 작업에 대한 위의 수정된 관점을 바탕으로 삼아 이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반세기를 거쳐 온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위에서 내가 논한 두 번째 유형, 즉 현실 참여적 범형의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게 맥락 초월적 진리 혹은 주장과 규범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그러한 주장과 규범들이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회적 세계의 맥락 내재성 간의 변증법적 관계는 사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임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버마스가 의식적으로 모으고 개조했던 수많은 다양한 지적 영향과 원천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가 다음과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그는 현대에 요구되는 철학함의 적절한 역할과 범위는 철학자가 속한 시대, 지적 분야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포괄적인(overarching) 전망-누군가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전망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몇몇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하버마스가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다양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는 점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 점은 그가 저술한 철학적 저작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저작에서 활용하는 자료들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 어떤이들은 그가 동원하는 자료들과 영향력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불평을 늘어놓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자가 속한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철학자의 중심적 업무-철학적 활동의 부산물로서가 아니라-로 삼는 게 하버마스의 철학적 의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광범위한 작용력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하버마스의 전기는 독일이 0년(“Stunde null”)에 머무르던 시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시기는 1945년 종전 후 독일 문화와 사회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폐허의 상태에 있게 된 때였다. 하버마스는 1929년 국가 사회주의의 “일상”이 뿌리내린 굼머스바흐라는 작은 지방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입회를 당하여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몇 달 간 잠시 방공포병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던 16살 때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의 본성과 규모 그리고 그가 따르던 나치 지도 체제의 도덕적 타락을 폭로한 뉘른베르크 재판 라디오 방송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1929년이라는 출생년도는 하버마스로 하여금 전후 독일 문화와 정치에서 독특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매우 특별한 세대의 구성원이 되게끔 하였다. 한 편으로, 하버마스와 동세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기억을 갖거나 국가 사회주의 체제가 초래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질만큼의 일을 벌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다른 한 편, 그들은 독일 사회의 끔찍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에 대한, 총력전이라는 최후 단계에 참여했던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산산조각 난 사회를 재건하는 거대 과업을 직접 보았던 노골적이고도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을 만큼의 충분한 나이는 먹고 있었다.

이 세대에게 독일의 정치적 미래, 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 미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독일은 파시즘의 폐허에서 벗어나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민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돌무더기 속에서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독일 문화의 핵심 요소들 -정치적이고도 도덕적인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 무엇보다도 칸트와 괴테, 쉴러와 바흐와 같은 계몽의 전통 –을 골라 내 새로운 사회 질서의 기틀로 포함시킬 수 있을까? 사회 재건과 재발명이라는 거대 과업을 스스로의 도전적 과제로 자기 의식적으로 인식했던 세대는 현대에서는 거의 찾기 어렵다. 하지만 독일은 철학적 활동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으며, 자기네 철학 전통을 집단 정체성과 자기 이해의 주요 원천으로 받아들이던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들이 자기네 철학 유산의 집단적 재정향을 사회적 재탄생의 과업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50년대 초 마르틴 하이데거에 깊은 감화를 받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철학과 대학원생이었던 하버마스는 독일 철학의 고유한 유산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그려보는 세대적 과업이 사실상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신에 그가 당시에 대해 매섭게 기록했듯이 전후 독일 학계의 뿌리 깊은 보수주의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은 채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고자 하는 문화를 후원하고 있었다. 이 문화는 독일이 자행했던 직전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보다는 그것을 억누르고 침묵시키려 하는 전후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와 제휴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하버마스를 가르쳤던 몇몇 교수들을 비롯해 저명한 교수들은 과거사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폭로하지도 않았다.

독일적 재난에 응하면서 철학은 변화해야 한다는 발상은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전후 독일의 현실에서 철학은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그리고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고려대상에서 간단히 제외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실망과 좌절을 느낀 이는 하버마스가 유일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철학은 칸트와 헤겔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마르크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일 철학의 전통은 보수학계만으로 이루어진 협량한 전통뿐만 아니라 이에 대해 내적 비판을 가하는 전통도 포함한다. 게다가 계몽의 유산은 철학적 통찰과 내가 앞에서 논했던 진보적 사회 개혁에 대한 요구 사이의 변증법 속에 핵심을 두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저자일 뿐만 아니라 “물음에 대한 답변: 계몽이란 무엇인가?”(1996: 11~22)라는 글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공적 논증, 탐구 그리고 관용 개념-칸트 철학은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인지 능력이라고 보았다-이 사회 일반과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연방공화국 초기 하버마스 및 그와 뜻을 같이 하던 철학적 동료들이 직면했던 문제는 18세기의 지적 정치적 계몽의 전통이 유례없는 손상을 당한 사회의 요구에 어떻게 적절히 봉사할 수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세속주의, 합리성, 관용, 대의적 공화정, 보편적이고도 평등한 도덕 및 법적 권리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 포용력 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헌신하던 계몽주의가 어떻게 당대의 요구와 공명하면서 재전유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무척 복잡하기는 하지만 다음의 세 가지 연관된 주장들로 알맞게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가치를 만회하고 전후 세계에 적합하게 촉진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기존 철학이 담당하던 역할, 즉 선험적이고도 토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에 특화되어 학문적 받침돌의 역할을 하던 것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그만두고, 좀 더 겸손하게, 그렇지만 좀 더 사회적으로 중대한, 세속적이고 “탈형이상학적”이며 민주적인 사회의 가치와 도전들에 특히 잘 들어맞는 역할을 담당하라고 주문한다. 둘째,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철학, 무엇보다도 독일 대학에서 발전해 왔던 편협하기로 악명높은 철학이 전통적으로 멀리하던 새로운 인접 학문들과 생산적이고도 호혜적인 대화에 실질적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하버마스는 이미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를 위한 주요 후보를 지목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특히 정치적 사회학을 구성하고 있는 분야들이 그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것을 “재구성적” 과학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그에 따르면 재구성적 과학은 보편적이라고 추정될만한 주장을 담지한 인간 상호작용의 측면들이 무엇인지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셋째, 하버마스는 전후 독일(혹은 더 적절하기로는 유럽) 철학이 이와 병존하던 철학 전통들, 특히 철학과 민주주의 간의 생산적 관계를 가장 기본적 문제로 취급했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의 영향에 열려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버마스는 유럽 철학이 너무도 철저히 다루어 고갈시켜 버린 이론적 모델들-즉 철학적 분석의 “기본 단위”로서의 고독하고도 자율적인 자아 그리고 이러한 자아가 자기자신 및 외적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식 철학적 모델-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안과 문제들을 보게 되었다.

이후부터 나는 우선 하버마스가 새롭고 겸손하며 상호작용적인 철학 모델에 어떻게 천착했는지에 대해 몇 가지 간략한 설명을 제공하겠다. 그리고 철학과 재구성적인 비판 사회 과학들 간의 열린 대화라는 하버마스의 기획에 대해 좀 더 길게 논하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초기 하버마스가 전후 프랑크푸르트 비판 이론 학파의 그 대표자들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및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협력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주체 철학과 의식 철학 모두와 확실히 절연해야 한다는 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버마스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개했던 언어적 능력 및 의사소통 합리성에 관한 이론적 작업으로 선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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