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내가 읽는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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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즐겁게 돈을 벌 수 없을까?

 

최재식 (경희대 철학과)

 

사회 대부분의 거래에 돈을 사용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돈은 중요하다. 돈이 많으면 좋다. 돈이 많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욕심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은 먹어야만 살 수 있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모두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돈벌이를 스스로 못하는 사람이 다 큰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이유도 이런 돈의 중요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막상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 돈 버는 일이 즐거운지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부양해야 할 사람의 안녕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지 돈 버는 일 자체가 즐겁지는 않다. 당장 내 주위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겠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님도 가족 부양을 위해서 돈을 번다고 말씀하시지 그 자체가 즐겁다는 이야기는 안 하신다. 엄청 중요한 돈인데, 왜 막상 그 중요한 돈을 버는 과정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일까?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돈 버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돈 버는 사람 중 절대다수는 임금노동자이거나 소상공인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판매하고 그 대가로 돈을 번다. 자신의 노동력과 돈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과 돈의 교환은 다른 교환과는 좀 다르다. 즐겁게 돈을 벌 수 없는 이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과정을 살펴보자.

 

교환은 왜 발생할까? 교환은 나에게는 쓸모없지만 남에게는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나에게는 필요하지만 남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가지기 위해 발생한다. 마르크스는 이걸 좀 어려운 말로 “모든 상품은 그 소유자에게는 사용가치가 아니고,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용가치다.”1라고 표현했다. 쌀농사를 짓는 나에게는 남아있는 쌀이 필요가 없지만 닭이 필요하고, 닭을 기르는 옆집 사람은 닭고기가 질려서 쌀이 필요하다면, 나와 옆집 사람은 자연스럽게 쌀과 닭을 교환할 것이다.

 

이런 교환이 누적되다 보면 사람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쌀을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보니, 쌀을 원하는 옆집 사람이 아니면 바로 교환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나는 옷이 필요한데 만약 옷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쌀이 아니라 생선을 원하면 나는 옷을 구하기 위해 쌀이 필요한 어부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겪어야 한다. 사람들은 교환에 사용하는 상품들 전부의 가치 측정수단으로서 화폐(돈)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화폐가 등장하고, 교환과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화폐가 집적되어 자본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돈을 번다.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상품은 원소유자에게는 쓸모가 없기에 교환과정에 들어가 상품이 되어 돈과 교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서 남에게는 쓸모 있는 그런 상품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많이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밖에 팔 게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임금노동자가 되고, 소상공인이 된다. 문제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력의 원천은 어디인가? 노동력은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온다. 죽은 사람은 일을 할 수 없다. 노동력은 인간의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실상 자신에게 매우 필요한 생명력을 파는 일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와 상관없이 당장 먹고사는 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당장 나와 내가 부양하는 사람들의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팔아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상품이지만, 다른 상품들과는 다르게 원소유자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돈을 버는 걸 즐거워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뇌와 근육을 원하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고 본인의 바람과 관계없는 곳에 써야 하는 현실이 우리가 오늘도 아침부터 출근이 싫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그 사이의 간극에서 당장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의 정신적·육체적 능력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이 소유한 공장, 상점, 사무실에서 소모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지루해지는데,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기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까?

 

물론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대 문명이 발생하기 전부터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농사를 짓거나 수렵채집을 해야 했다. 또 인간은 자신이 살 집도 지어야 했고 자신이 입을 옷도 만들어야 했다. 아마 모든 노동을 로봇이 수행하고 그 과실을 온전히 인간이 향유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행해야 하는 노동은 너무하지 않은가? 자급자족 사회,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산발적인 교환만이 존재했던 사회는 지금보다 풍요롭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노동이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다시 한 번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렇다. “상품에 지출된 인간노동은, 타인에게 유용한 형태로 지출된 경우에만, 유효하게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노동이 과연 타인에게 유용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그 생산물이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않느냐는 오직 상품의 교환만이 증명할 수 있다.”2 내가 일을 해서 만들어낸 물건으로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게 나에게 만족을 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에게 필요한지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살아가는 지금 사회에서 내 노동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곧 자본이 그 노동을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노동이 자본에게 유용해야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대가로 임금을 받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보다 자본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맞춘다. 우리 주변만 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직장 일정에 자신의 하루 계획부터 연간 계획까지 맞춰야 하는 직장인,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 미래 노동력을 더 잘 팔기 위해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다.

 

자본은 사회 전체의 공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관심사 밖의 일이다. 자본은 인간 개인이나 사회보다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에, 가치 증식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래서 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불리는데 필요한 인간 노동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투기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보다 사회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공공부문 노동자나 기간산업 종사자보다 더 보상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자본 증식에 대한 기여도가 그러한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땀 흘리는 일상의 노동은 그 보상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하는 ‘가변자본’에 불과하다. 땀, 심지어 피를 흘린다 할지라도 이런 노동에 대해 기적과 같은 대가는 없다. 그나마 그런 노동의 기회조차 부여잡기 힘든 시대. 여기에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본래 우리 인간이 교환을 시작한 이유는 사실 우리 인간에게 그 교환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그 과정을 통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역으로 인간이 자본의 필요에 따라 교환과정에 종속되기 시작한다. 주식시장의 흐름에 따라 사회 전체가 출렁이는 지금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이런 현실이 과연 긍정적인 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지금의 현실은 꾀 안 부리는 사람들이 힘들여 일해서 생산하는 재화와 가치들을 자본의 하수인들이 복잡하고 어려우며 자신의 손해를 남에게 떠넘기는 금융상품을 통해 갈취하는 지옥도이다. 그래서 나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이다.

 

착취론 같은 거창하게 들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우리 주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열심히 팔아 모은 돈을 어디다 쓰는지 생각해보면 왜 이 사회를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사회라고 표현했는지 감이 올 것이다. 죄다 집세 내느라 부동산 투기자본한테 피땀 흘려 번 돈을 뜯기고, 어쩌다 돈 좀 모아 주식 몇 주 사면 투기세력의 시장 널뛰기로 혼란한 시장 틈바구니에서 투자금을 투기세력들한테 다 뜯기는 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현실이다.

 

그럼 거꾸로 우리가 즐겁게 돈을 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돈벌이가 즐거울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공공복리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이익만을 위해 투기를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면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보람차게 돈벌이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간극을 줄이고, 그 간극을 교란하는 불로소득을 최소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그 중요한 돈을 즐겁게 벌 수 있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을 읽고 쓰는 글이지만 『자본론』에 구체적이고 세세한 답이 있진 않다. 이 연재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본론』이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자본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사회였던 때에 나온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지금의 사회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가치하다고 규정짓는 건 과도한 처사이다. 오히려 『자본론』의 서술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더욱 놀랍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수천 년의 인류 문명을 기초부터 지탱해온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명력과 노동력을 온전히 자신과 우리 모두의 공영을 위해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새 세상을 꿈꾼다. 언젠가 새로이 도래할 일하는 자들의 세상을 위해, 그리고 그 세상의 주인 중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자본론』을 펼친다.


  1.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2. 칼 마르크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Ⅰ 상』, 비봉출판사, 2015,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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