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나카마사 마사키) [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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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긺,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arte, 2017.

1957년 스푸트니크가 지구 밖으로 쏘아올려졌다. 이제 인간이 지구 밖으로 나갈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지금이야 별일이 아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딘 것(p. 18)이나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로서 한나 아렌트에게 이 문제는 어쩌면 ‘인간의 조건’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으로 비쳐졌을지 모른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 작업, 활동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해 세계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미래에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하지 않거나 변경될 것이다. 일단 아렌트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그 성격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아렌트에게 ‘노동은 생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이고 ‘작업’은 인간이 공작물을 만들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이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삶은 끝나도 이 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행위로 보았다. 그리고 ‘활동이란 이 공작물을 이용하면서 ‘정치체’를 만들어 유지해가는 것이다. ‘정치체’ 안에 사람들이 존재했던 증거가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이다(p. 43).

 

여기서 ‘활동’은 하나의 목적을 갖지 않는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목적 지향성을 비판한다. 목적은 그 목적을 향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아렌트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항상 자유를 향한 ‘활동’을 중시(p. 59)한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맺는 ‘활동’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없다는 것이 아렌트의 입장이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노동, 작업, 활동 중 타자의 존재, 복수성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은 ‘활동’ 뿐이다(p. 82). 아렌트는 이 복수성을 균질화하면 대중사회가 되고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의 기원‘이 된다고 본다(p. 99). 아렌트에 의하면 대중사회의 대중은 똑같이 행동하도록 압력을 받아 그저 떠내려가는 것일 뿐, 자발적으로 ‘활동’하려고 하지 않는다(p. 132). 근대는 공적 영역의 ‘활동’이 의미를 잃고 모든 인간 행위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p. 182).

 

노동만을 중시하게 된, 근대인이 지향하는 ‘부’는 자기를 재생산하려는 생명을 중시하는 것일 뿐 시민에게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서사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세계’를 짓밟고 부서뜨린다는 게 아렌트의 진단이다(p. 204). 근대인은 ‘사적’인 일에 집중하면서 ‘공통세계’로부터 소외되었다(p. 209).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 본질이라 했지만 아렌트는 노동을 통한 생명의 무한 증식과, 부는 인간을 공통세계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p. 218). 기술이 진보하고 노동이 기계화되는 시대에는 더욱 인간이 자발성을 발휘할 여지는 줄어든다(p. 219).

 

기계에 의해 노력할 여지가 없어지면 이제 인간은 그저 생명과정으로 회귀해갈 것이며 소비 욕구만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소비의 가속화에 의해 진행되는 상품사회에서 사물은 내구성을 잃게 되고 점점 공통세계는 해체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요 논지이다(p. 229).

 

상품 사회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p. 297).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가 지배적이라고 비판했던 마르크스에 대해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공적 영역’을 거부한 것은 아니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p. 307). 아렌트는 노동보다 ‘언론’과 ‘활동’을 인간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p. 333).

 

언론과 활동은 사회를 전제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정치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활동과 언론의 의미를 공동체 안에서 전승해 가는 역할을 맡는 것은 예술작품이다(p. 368). 아렌트는 노동은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동하는 인간은 세계에서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지며 고독한 대중이 될 뿐이다. 이것을 아렌트는 ‘세계 소외’라 부른다(p. 442). 뿐만 아니라 기계화, 자동화는 세계의 해체를 촉진하고 있다. 기술과 과학의 세계는 개개의 가설이나 명제가 어디에 도움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치 않고 체계와의 정합성이 있냐, 만이 중요할 뿐이다(p. 459). 수학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공통세계’가 나올 리가 없다(p. 465). 근대의 합리성, 즉 과학과 수학의 세계는 세계와의 접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기 안에 틀어박힐 수 밖에 없었고 인간은 자신이 만든 것만을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로 축소되었다(p. 485). 이런 존재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공리주의에서 ‘행복’이라 말하는 것은 각 개체의 생명이 촉진되고 인간의 생명력이 촉진되고 번식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함을 뜻한다. 활동이나 작업 등 인간의 고유의 능력은 더 이상 상관이 없다(p. 497). 근대는 이렇게 생명과 노동을 중시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능력은 쇠퇴해 예술가에게만 한정되어 있다(p. 502).

 

한나 아렌트의 근대성 비판은 지금 보아도 유의미한 것 같다. <인간의 조건>을 실제로 읽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이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오늘날의 대중 사회를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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