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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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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