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⑮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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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340c]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의 설전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는 강자의 이익이란 말을 클레이토폰처럼 이해하건 그냥 원래대로 이해하건,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οὐδέν διαφέρει’고 말한다. 그런 연 후 트라쉬마코스에게도 ‘강자의 이익’이란 말이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이라고 생각된 것’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δοκοῦν εἶναι τῷ κρείττονι을 뜻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 아마도 트라쉬마코스는 클레이토폰의 제안을 듣고 속으로 “실수로 법을 잘못 제정했을 경우 법을 다시 고치면 되는데 웬 호들갑인가. 결국 다 강자의 이익이기는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최상급의 부정의한 자는 실수를 능히 바로잡을 수 있는 자임이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서도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361a-b) 게다가 클레이토폰의 제안은 자기주장과 달리 ‘통치자에게 이익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지 꼭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먼저 ‘그 둘은 아무 것도 다를 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트라쉬마코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내를 들켜버린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이제 그러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클레이토폰의 말처럼 ‘이익으로 생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펄쩍 뛰며 ‘천만에요ἥκιστά, 실수를 저지른 사람을 제가 더 강한 자로 부를 것으로 생각하시나요?’라고 반문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어떤 점에서는 실수도 저지른다고 동의했을 때(339c) 그런 뜻으로 말한 걸로 생각했다”고 트라쉬마코스의 달라진 태도를 지적한다. 이 말 또한 트라쉬마코스의 심기를 건드린다.

 

[340d]

* 트라쉬마코스는 이 말에 더욱 자존심이 상해 소크라테스를 곡해자(궤변가)συκοφάντης라고 힐난하고, 이제 더 이상 당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자신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확신이라도 심어주려는 듯이 길게 펼쳐 내 보인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그를 자신이 원하는 논박의 장으로 더욱 한 발짝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앞서 폴레마르코스가 자기가 생각한 친구와 진짜 친구를 구별하지 않은 채 느슨하게 친구를 정의했다가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하는 경우를 지켜보았다. 그랬던 터라 트라쉬마코스는 이제 폴레마르코스와 비슷한 처지에 몰리자, 금방 태도를 바꾸어 자기가 먼저 자신이 말한 통치자를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로서도 잘못된 정의관을 제대로 검토하려면 엄밀함이 수반되는 기술의 측면에서 논증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들고 나온 트라쉬마코스를 굳이 막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이러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다큐멘터리가 아닌 플라톤의 창작물임을 고려하면 논박의 국면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긴장감 있고도 주도면밀하게 이끌어가는 플라톤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 여기서 곡해자의 원어는 συκοφάντης(sykophantēs)이다. sykophantēs는 원래 소송 관련 용어로서 상대방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며 소송을 거는 무고자(誣告者)를 나타내는 말이다. 어원적으로는 ‘무화과 열매(sykon)를 보이게 하는(phainō)자’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나뭇잎이 커서 흔들릴 때나 열매가 보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 말은 부유층을 비롯한 소송 상대자를 협박하여 숨긴 재산을 뜯어내려는 무고자의 뜻도 갖게 되었다. 트라쉬마코스 같은 소피스트들이 무고자들과 결탁하여 그들의 무고행위를 돕거나 앞장섰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이 늘 일상으로 무고를 일삼다가 정작 수세에 몰리다보니 소크라테스의 정당한 지적도 무고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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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와 그것이 미친 아테네 말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의 <그리스 문화사>(Grichische Kuturgeschichte, Darmstadt 1956) Vol. 1, s.225-233 참고. <e시대와 철학>, [시철북&아카데미], ‘그리스 문화 대탐험’ 제14강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서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 중후반 아테네가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과 분열에 처하고 경제적으로도 궁핍해지자 부유층을 상대로 하는 무고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나라 또한 그들을 구제하기 힘들고 민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하층민들도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 아테네에는 아예 무고를 전문적으로 일삼는 직업도 생겨났고 반대로 돈 받고 무고를 막아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이런 다툼과 소송이 많아질수록 소피스트들로선 나쁠 것이 없었다. 무고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소송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소송 당사자들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금품을 대가로 상호협상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소피스트들의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정치가들 또한 민회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수수방관하거나 거꾸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러한 무고자들의 횡포를 재제할 장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무고자가 자기가 고소한 소송에서 적어도 배심원의 5분의 1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경우 벌금을 물게 했지만 그 정도의 배심원을 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설사 벌금을 물게 되었을 경우에도 그대로 버티기 일 수였다. 뤼시아스의 시대에 연체된 미납액이 1만 드라크마나 되었던 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배심원으로서 출석하고, 민회에도 얼굴을 내밀면서 여전히 모든 종류의 나랏일과 관련한 소송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끊임없이 이런 무고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노예를 1000명이나 갖고 있었던 니키아스도 일생동안 무고자를 두려워해 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고자에 시달리던 크리톤도 무고자를 막아 줄 사람을 돈으로 끌어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충고를 받아들여 힘센 무뢰한을 고용하여 무고를 면했다고 한다.(<소크라테스 회상(Memor.)> II, 9, 1) 민주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30인 참주들은 다수의 무고자들을 잡아 사형에 처했지만 그러나 무고자들은 민주정이 회복된 후에 다시 또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이를테면 테오크리네스(Theokrines)는 친 형제의 살해자들로부터 금품을 받고 소송을 철회하고 있다.(데모스테네스의 <테오크라테스 논박>(in Theocrin.)] p. 1331) 이처럼 죄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 선동정치가들과 무고자들간의 거래와 타협 같은 악취 가득한 행태들은 공공 생활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 상당수의 양식 있는 시민들로 하여금 공공 생활로부터 남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등을 돌리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이 최선의 안전책이었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추첨으로 어떤 직무에 선임된 사람이 최종 합격을 위한 심사(dokimasia)를 받아야할 경우 무고자는 즉시 그 개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이권이 생기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무엇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그런 짓을 하며 삶을 영위했다. 그래서 이 무고자 집단은 끊임없이 사람들 곁에 서서 사람들로 하여금 무고에 대해 어떻게든 ‘입을 다물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착실한 사람들은 무고를 당하면 어떻게든 힘을 다해 소송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무고자들 또한 소송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막상 소송에 말려 들어갔을 경우 소송 경비에서 기소인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적절히 사전에 타협을 해 소송을 중도에 취하하게 했을 경우에는 별도의 금품을 뜯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신을 모독하였다는 협의로 고소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아마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낼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테네를 떠나 칼키스(에우보이아)로 피해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 일과 관련하여 그는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보낸 편지에다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알키노오스(Alkinoos)의 정원과 같이 무화과가 우거진 마을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무화과(sykon)는 무고자(sykophantēs)의 어원이 된 말로서 여기서는 무고자들을 비유한 말이다) (부르크하르트 <그리스 문화사> 1권 p.225-233. e시대와 철학, 그리스 문화 대탐험 14 참고)

* 그런데 아테네는 이런 종류의 무고자들을 조력자로 이용하여 정적을 제거하거나 제국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동기로 작용하여 아테네에서는 어떠한 범죄이든 간에 일단은 국가에 대한 위협, 국가의 안보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의심되기 일 수였다. 그에 따라 군사독재 시절 우리나라의 경우 혹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때처럼 소송의 성격이 정치적인 것으로 급변하는 경향이 자주 있었다. 게다가 아테네인들에게 제국은 거의 종교로까지 받들어졌던 터라 형벌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을 훼손한 대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테네의 형벌이 비정상적으로 엄중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벌금형과 시민권 박탈과 함께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었던 사형이 전혀 중대하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서마저 국사범이라는 이유로 집행되는 일도 생겨났다. 게다가 소송 과정에서 피고발인에 대한 잔인한 고문이 아테네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포키온(phokion) 35) 이러한 고문행위는 노예를 고문하던 주인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 유사물이었으나 사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이래 아테네가 견지하고 있었던 패권주의 이념과 그것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민중들 그리고 민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던 선동적 정치가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즉 투퀴디데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아테네는 대외적으로는 명실공한 폭압적 참주의 나라였고 대내적으로는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눈이 먼 선동정치가들과 그들을 지지한 민중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테네 민회는 일단 자국의 국가주의적 이익과 관련된 사안의 경우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면 오늘날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연법적 이념과 상관없이 그 어떤 것이든 어떤 수단이든 다 승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 결국 아테네는 전성기 시절에는 속국들의 공물로 특권을 누리는 제국이었고, 기원전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무고자들이 횡행하고 권력자들과 민중들 모두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을 정도로 아주 오랜 동안 혼란과 내분으로 점철된 이른바 자유방임의 나라였다. 이런 이유로 아테네 민주정은 플라톤의 비판 이래 중우(衆愚) 정치로 폄하되기도 했고, 아테네 민중 역시 피착취 기층 민중이 아닌, 속국들의 민중들에 대한 착취자이자 자국의 노예들에 기생한 소수의 완전 시민들이었다는 점에서 사이비 민주정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테네 민주정은 고대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랜 동안 아테네의 중심적인 정치체제로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오면서, 민중의 정치의식은 물론 개인에 대한 의식을 고양시키고 각성케 하여, 전성기 아테네의 문화적 성취와 역동성의 기반이 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아테네 민중들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피착취 민중이자 국제주의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니고 노예들과 거류외인들을 포함하는 아테네인들 대다수도 아니었지만(이것은 아테네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 모두에 해당된다), 동서양의 역사를 막론하고 민중이 그것도 거의 1세기에 걸쳐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해온 경우는 아테네 민주정이 유일무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 또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테네 민주정은 그 자체로 오늘날 민주주의 이념의 고전적 전거이자 반성적 지표로서 여전히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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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곡해자라고 힐난한 후,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가 왜 실수하지 않는 통치자인지 설명하기 위해 의사ἰατρός. 계산 전문가λογιστής, 문법가γραμματιστής 등의 예를 끌어들인다.

 

[340e]

* 그는 어떠한 종류의 전문가도 엄밀한 뜻에 따라κατὰ τὸν ἀκριβῆ λόγον 말한다면 그가 전문가인 한에서는 결코 실수ἁμαρτία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실수를 하는 사람은 그의 지식이 모자라 실수를 하는 것이므로 그는 전문가가 아니다. 이처럼 그 어떤 통치자도 그가 통치자인 때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면서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앞서 통치자가 실수를 한다고 대답했던 것은 사람들이 보통 그런 말을 하는 그런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양해도 빼놓지 않고 덧붙인다.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341a]

*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통치자는 가장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앞에서 말한 대로 그가 통치자인 한에 있어서는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결코 실수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정하고 피지배자는 법 준수 의무에 따라 그것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강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강자의 이익을 이행하는 것’δίκαιον,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ποιεῖν συμφέρον이다.

*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는 그 자신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나오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추궁에 트라쉬마코스가 내몰려 답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논박이 낳은 하나의 성과로서 내용적으로도 엄밀한 통치자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말한 내용에 대해 따로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곡해자(무고자)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만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고 행위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혐오하는 소피스트들이나 일삼는 일인데 그 짓을 자신이 했다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두고 둘 사이에서 짧지만 날선 공방이 오간다. 두 사람이 구사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대화가 단순히 말의 곡해 차원의 것이 아니라 무고 행위라는 소송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계획적으로ἐξ ἐπιβουλῆς 곱새기기 위해서 질문한 것으로 생각하시오.’라는 말은 무고자들이 무고할 때 철저히 사전 계획을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고,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빤히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라든지 ‘논의에 의해서 꺾을 수도 없다οὔτε βιάσασθαι τῷ λόγῳ δύναιο’는 말 또한 소송 관련 말투로서 무고가 트라쉬마코스 자신에게 얼마나 익숙한 일인지를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을 꺾을 수 없다(승소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341b]

*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신은 곡해 따위는 하지 않으며 트라쉬마코스 당신이나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치자의 의미를 확정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곱새겨보려면 곱새겨보라는 듯 자신 있는 말투로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 역시 ‘가장 엄밀한 뜻으로 통치자τὸν τῷ ἀκριβεστάτῳ λόγῳ ἄρχοντα ὄντα.’인 자라고 답을 확언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신은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논박을 당했던 폴레마르코스의 전철은 결코 밟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341c]

* 이러한 확언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 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또한 트라시마코스를 사자에 비유해 그의 자신감을 부추겨 새로운 논박의 장을 펼쳐 그의 주장을 제대로 검토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깔린 말이리라. ‘사자의 수염을 깎는 정도로’ὥστε ξυρεῖν ἐπιχειρεῖν λέοντα라는 말은 무모한 행동을 일컫는 그리스의 속담이다.

* 그리하여 이제 트라쉬마코스의 정의관에 대한 엄밀론에 입각한 새로운 검토가 시작된다.

검토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첫 질문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전문가로서 예를 든 의사를 소재로 삼아 의사가 돈별이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환자를 돌보는 사람인지를 묻고 이어서 키잡이(선장κυβερνήτης)가 선원들의 통솔자인지 선원인지를 묻는다.

* 단도직입적으로 둘 사이의 주제인 통치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의사나 키잡이 등 구체적인 관련 사례를 먼저 예시하는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검토 방식에서 자주 눈에 띄는 방식이다. 특히 의술과 키잡이 기술은 통치 기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기술이다.

[341d]

* 트라쉬마코스가 각각에 대한 환자를 돌보는 사람, 선원들의 통솔자라고 답을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불리는 까닭이 다름 아니라 의사와 선장 각각의 기술τέχνη에 있음을 밝히고 그 기술이란 의술의 경우 환자에게, 키잡이 기술의 경우 선원에게 ‘각각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ἐπὶ τῷ τὸ συμφέρον ἑκάστῳ ζητεῖν τε καὶ ἐκπορίζειν;임을 밝힌다. 그런 연후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 ἔστιν τι συμφέρον ἄλλο ἢ ὅτι μάλιστα τελέαν εἶναι;

 

[341e]

* 여기서 ‘기술이란 기술의 대상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 제공하기 위한 것 아니겠소?’라는 첫 번 째 물음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으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이익이 되는 게 있는가요?’라는 두 번 째 물음은 무엇을 묻는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 트라쉬마코스도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를 못하여 ‘무슨 뜻으로 그걸 물으시죠?’πῶς τοῦτο ἐρωτᾷς;라고 되묻는다. 그러면 ‘각각의 기술에도 그것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란 무슨 말일까? 일단 이 말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기술의 대상인지 기술인지 헷갈릴 수 있지만 원문은 그것이 기술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니까 그 말은 ‘각각의 기술에’ ‘도’까지 붙어 ‘각각의 기술에도’καὶ ἑκάστῃ τῶν τεχνῶν”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기술의 대상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대상의 이익이듯이 각각의 기술도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술의 대상이 갖는 이익의 경우를 몸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즉 몸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몸의 존속을 위해 그 부족을 채우는 것이 이익이고 기술은 그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몸은 기술 즉 의술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기술 즉 의술은 무엇에 의해 최대한 완벽하게 되어 그 기술의 이익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뜻밖의 말을 마주한다.

 

[342a]

* 소크라테스의 말은 모두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논의의 편의상 그 말을 그의 의도에 따라 긍정문으로 풀어 설명해보자. 우선 소크라테스는 의술(기술)은 몸과 달리 그 의술 자체로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결함πονηρά이 없으며 그래서 어떤 기술이건 훌륭한 상태ἀρετῆ를 결핍하고 있지 않다고 말을 한다. 우선 이 말부터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모든 기술에는 부족한 점이 있고 그에 따라 그 기술 스스로의 결핍을 보완하여 기술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 기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은 트라쉬마코스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만을 가지고 논의하기로 한 그 연장선상에서 제시되고 있는 ‘기술 그 자체’로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다.

342b에서도 기술을 엄밀한 뜻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있고 342c에서는 이에 따라 ‘의술 그 자체’를 그냥 ‘의술’로 표현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 즉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자기 기능에 결핍이 없으므로 결핍을 미리 생각할σκεψομένης 필요도 없고 제공해 줄ἐκποριούσης 도움도 없다. 만약 현실의 기술처럼 결핍이 있다면 그러한 기술은 그 기술의 이익을 살펴 줄 다른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은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면서 그런 사태가 끝없이ἀπέραντος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기술들은 그 자체 뭔가로 한정될 수 없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스스로 미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엄밀한 의미의 기술은 그 자체 아무런 결함πονηρία도 과오ἁμαρτία도 없고 온전하고ὅλος 틀림없고ὀρθός 훼손도 없고ἀβλαβὴς 순수한ἀκέραιός 것이기 때문이다.

 

[342b]

*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말은 앞서(341d) 그 자신이 한 말 즉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이익’이라는 말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기술은 결함이 없는 것 즉 이미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따로 살피고 제공할 이익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이 그 기술의 이익이라는 것일까? 이 의문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해소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기술에도 결함이나 과오란 전혀 없어서 기술로서는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이 되는 것을 찾는 것ζητεῖν은 합당치προσήκει 않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술 그 자신은 이미 완벽하므로 자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을 찾아 그 대상에게 제공하는 것이야 말로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42c]

*그러므로 의술의 경우 엄밀한 의미의 의술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술(馬術) 또한 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생각하지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완벽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 없으므로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계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ἄρχουσί καὶ κρατοῦσιν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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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기술에 관한 주장에서 그가 말하는 기술의 완벽성은 그 기술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인 한에 있어서 다시 말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자신의 고유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한에서 갖는 그 기술의 완벽성이다. 즉 완벽성이 그 기술이 그 기술로 불리어지는 조건인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기술이란 말 대신 기술자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를테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당 분야 기술자를 불렀는데 그가 만약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당신 기술자 맞아?’라고 비난하곤 한다. 그 기술에 무능함 내지 결함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미 기술자가 아닌 것이다.

* 그런데 기술의 완벽성을 위와 같은 기술의 조건과 정의 차원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일상적인 생각으로는 아무리 엄밀한 의미로 기술을 정의한다 해도 그 기술 자체는 보다 발전된 다른 형태의 기술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구멍을 뚫는 기술에서 나무를 뚫는 것보다는 쇠를 뚫는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고 계산 기술에서도 주판 기술보다는 전자계산 기술이 더 발전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같은 기술이 아니라 이미 다른 기술이다. 왜냐하면 그 기술이 구비하고 있는 기능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술 내부의 속성이 아니라 기술 외부에서 그 기술에 대한 기술 사용자의 관심과 평가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자계산기가 주판보다 계산이 빨라도 그것은 이미 다른 기술이고, 설사 같은 기술이라 해도 전기가 없는 곳에서는 주판에 뒤지는 것이고 또 아무리 전동 드라이버 기술이 좋더라도 수동 드라이버를 쓰는 것이 보다 섬세한 작업을 위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플라톤이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기술의 완벽성은 기술의 조건이나 정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갖고 있는 고유 기능과 관련한 자체 기능상의 완벽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무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쇠를 뚫는 기술(기술자)도 모두 각기 그 용도에 딱 맞는 일이 있고 그런 일에 있어서는 그 각각의 기술은 그 자체로 타 기술과 비교하여 부족함이 없는 최선을 제공하는 기술(기술자)인 것이다. 즉 모든 기술은 서로 다르고 기술의 우열이 있다면 같은 기술 내에서 이루어질 뿐, 다른 기술과의 관계에서 비교 우위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기술은 각각 다른 기술과 구별되는 고유의 탁월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술 사용자는 기술 각각의 고유성이 갖는 경계 내지 ‘한계’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제2권에서 트라쉬마코스를 대변하는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전문가는 자기 기술 수준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어 가능한 것들만 붙들고 불가능한 것은 내버려 두는 식으로 기술의 완벽성을 기한다고 말하고 있다. (360e-361a) 요컨대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이 갖는 고유성 내지 내적 규정성(한계peras)을 아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도 기술은 지식인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기술 관련 논의는 곧바로 기술과 전문 지식 또는 기술자와 지식인의 가장 바람직한 쓰임새 내지 행위 기준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어떤 대상에 대해 행위와 기능이 갖추어야 할 고유한 적합성의 의미를 갖는 적도(適度to metrion) 개념과도 연계되고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정의론과 관련하여 고유한 직분, 몫과도 연계되면서 소크라테스 사상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 그런데 왜 플라톤은 기술을 논의함에 있어 현실의 기술이 아닌 이러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상의 논의만 보더라도 플라톤이 정의의 문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외도 없이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려고 하는지가 실감나게 전해진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그는 엄격주의와 완벽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당대의 혼란스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동떨어진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러한 엄밀론의 배경에는 당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인식을 넘어서는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치열하고도 냉철한 비판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오히려 플라톤이 살던 당대의 시대 상황이 그것도 일부 시기가 아니라 거의 그의 전 생애동안 그야말로 극도의 혼란기였다는 사실은 그가 왜 이토록 엄격하게 흔들리지 않는 도덕과 정의의 기준을 세우려 했는지를 충분하게 웅변해 준다. 물론 격동기라고 해서 다 플라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그 혼란을 극복하려하기보다는 그 혼란을 시대의 자연스런 변화 또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그것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례이고 또 어떤 사악한 일부의 사람들은 그 혼란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플라톤은 결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도 타협할 수도 없었다. 어떤 부조리 어떤 혼란 어떤 독단도 나라와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 것인 한, 모두 이성의 빛 아래 낱낱이 폭로되어야 하고 최소한 정의와 이성이 우주와 자연, 나라와 개인의 본성을 관통하는 지고의 원리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혹한 현실과 현존하는 시대의 모순과 무지에 맞서 목숨 바쳐 싸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정의에 대한 사색과 논증은 정의를 처절하게 갈망하는 자에게 그 갈망하는 만큼 더욱 치열하고 엄격하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정의에 관한 논증을 검토함에 있어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편에 서서 생각해야 하는지는 그가 내세우는 철학 정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할 것이다. 설사 우리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입장의 강건함과 실천력을 보전하기 위한 대안 구축의 동기이자 발판으로서만 유효할 뿐이다. 입장의 순수함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 이와 같은 기술 자체의 고유성에 관한 논의는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둘러싼 논란과도 연관이 있다. 오늘날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기술은 그야말로 기술이 가지고 있는 기능 차원에서 그 기술의 가치를 이야기해야지 그 이외의 가치판단을 개입시켜 그 기술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입장은 이곳에서 기술의 이익이란 기술 자신이 아닌 대상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술은 고대의 기술과 달리 기술개발에 엄청난 자본이 투여되므로 기술자체는 비록 자본과 무관하다 할지라도 그 기술의 쓰임새, 목적은 기술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본 투자자의 이익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기술의 고유성과 가치는 자본 투자자들에 의해 창출되고 그들의 가치판단에 따라 기술의 완벽성이 평가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술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주장하는 사람의 동기에 관계 없이 자본 투자자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 또한 플라톤의 기술에 관한 입장은 기술과 욕망에 관한 철학적 문제와도 관련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기술은 그 기술의 대상이 갖는 결핍 혹은 문제를 해결하여 최선의 상태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결핍과 문제가 기술의 기원이다. 그러나 결핍과 문제는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의 관계 하에서 주어진다. 오늘날 수많은 결핍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는 그것은 인간에게 결핍이거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욕망이 숙명을 넘어서는 순간 결핍이 생겨나고 기술이 발생한다. 이 말은 기술의 발전이 거듭될수록 그만큼 욕망 또한 다양해지고 증대하며 그만큼 수많은 결핍이 생산되고 증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결핍과 문제의 해소가 행복이고 결핍과 문제의 발생이 기술의 기원인 한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곧 인간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다만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숙명 안에 가두어지지 않고 늘 그것을 넘어서려한다는 점이다. 특히나 기술 경쟁을 통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그 속도와 깊이, 크기와 종류에 비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욕망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게다가 그 기술력을 자본이 뒷받침하는 한, 기술력의 배분 또한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여 불공정하게 되고 양극화된다. 한도와 척도에 관한 플라톤의 논의는 이러한 무한 욕망, 무한 기술 경쟁의 시대인 현대사회의 정황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이고 낭만적이기 그지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 주도하는 기술관은 이미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철학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무한 탐욕이 그 크기와 깊이를 더해갈수록 그것의 크기와 깊이 이상으로 그 모순을 혁파해내기 위한 비판을 끊임없이 수행해왔고 가히 시대착오로 불릴 만큼의 치열한 철학적 상상력과 도전 정신을 통해 그 극복의 근본 방향을 제시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만큼 과학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측면에서도 기술이 지향해야할 이익에 대한 성찰 즉 앎이자 도덕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플라톤의 통찰은 오히려 과학 기술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자 목표가 될 수 있다. 요컨대 과학 기술을 추동하는 욕망 이상으로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숙명이 아닌 비판과 지적 도전의 과제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철학적 욕망이 있는 한, 인류에게는 늘 새로운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 모순에 대한 반역’인 것이다.

*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펼치는 엄밀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 부분 플라톤의 형상론적 시사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기술을 전문적 지식ἐπιστήμη과 등치시키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심증에 더욱 다가가게 만든다. 이 ἐπιστήμη(epistēmē)라는 말은 참된 실재로서 이데아에 대한 앎을 나타낼 때도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논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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