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Spread the love

이병태

 

‘대학로’는 정확하게는 종로 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길을 일컫는다. 글쓴이에겐 이래 저래 인연이 많은 곳이다. 장장 두 세기(世紀)에 걸쳐 인근의 학교를 다녔을 뿐 아니라, 원천징수가 이뤄지는 첫 직장도 같은 동네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닌 곳임을 기려 ‘대학로’란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강변하고 싶지만, 탄핵 당한 대통령은 자신을 희생하여 기면(嗜眠)에 빠진 우리의 역사 의식을 일깨운 큰 스승이라 지껄이는 것만큼이나 공분(公憤)을 살 일이니 자제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 동네에는 여러 대학들이 몰려 있고 문화·예술 관련 기관이나 공연장도 많아 대학생들이나 청년층 유동인구가 압도적이다. 그러니 ‘대학로’는 꽤 어울리는 명칭이다. 하지만 ‘대학로’의 ‘대학’은 그 뿌리를 더듬을 때 사실 ‘경성제국대’다. 1960년대 지역명이 결정될 무렵엔 이 지역에 서울대학교가 자리잡고 있었고 이 학교의 이미지가 ‘대학로’란 명칭에 가장 강하게 녹아 있긴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터와 건물을 비롯하여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고스란히 경성제국대학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민족 지사들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단번에 좌절시키면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이렇듯 일개 지명 속에서도 여전히 유령처럼 떠돈다.

(사진 1: 경성제국대학의 모습. 본관 등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도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은 한국지성사의 지평에서 되돌아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유구한 지적 전통을 삽시간에 뒤흔들어 무너뜨린 까닭이다. 제국 권력의 공식적인 학문·교육 기관이 탄생하면서 한국지성사는 그 정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학문과 교육의 중심이던 지적 전통은 순식간에 시대착오적이며 구태의연한 것으로 위축되었으며, 일본을 경유한 서구발(-發)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식민화의 쐐기랄 수 있는 이 사건에는 피한방울 튀지 않았지만, 참혹하기가 포연 자욱한 전장 못지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인재들은 이제 경전을 덮고 사각모를 쓰기 위해 앞 다퉈 제국의 대학에 입학하려 했지만, 그곳에는 이들을 자기부정으로 이끌 기만의 논리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새롭고도 휘황찬란해 보이는 과학·기술·이론들 이면에는 ‘굴욕’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거나 억압과 굴종의 심화를 ‘진보’와 ‘계몽’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숙명이라 강변하는 목소리가 항상 함께 했다. 더욱이 제국이 저작(咀嚼)하여 다시 내뱉은 설익은 서구의 이론들을, 녹녹찮은 지적 전통 위에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좇던 인재들이 속속 받아 삼키고 있었다.

탕건 자국이 문신처럼 남아있을 정도로 한학을 깊이 공부한 학생들이 많아 당시 한문 교수였던 다카다 신지(高田眞治)의 실수를 바로잡아준 일화나, 또 다른 한문 교수 다다 세이지(多田正知)가 성균관 후신인 경학원의 대제학 정봉시(鄭鳳時)에게 몰래 과외를 받다 정봉시의 친척이었던 학생에게 들켰던 일 등은 제국대학 설립 이전 조선의 지적 전통이 그 공과를 차치하고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는지 잘 말해준다. 당시 경성제대 입학생 가운데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1/3~1/2 정도였는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새로운 이론에 젖어들면서도 제국의 논리에 완전히 공감하거나 동화되지는 않았다. 물론 학문권력의 중심지에 몰려든 이들이 대체로 영달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적 지성사에서 현실의 질곡에 맞서도록 이끌 단초를 애타게 찾았으며 이는 당연히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겠지만 일정 정도는 옛 지적 전통의 잔향(殘響)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신남철은 1927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이였다. 그의 삶 전체에서 특별히 전통적인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고 여길만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그의 조선인 동학(同學)들 일부에게 공통적이었던 시대적 정향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외려 더 뚜렷했다. 그가 가장 집요하게 매달린 학문적 주제는 ‘역사’였고, 그의 주저 역시 ‘『역사철학』’임은 우연한 사실이 아닌 셈이다. 그는 현실의 억압을 딛고서는 인류의 시간을 집요하게 응시했던 것이다.

(사진 2 : 동아일보 1939년 1월 1일자 ‘新建(신건)할 朝鮮文學(조선문학)의 性格(성격)’이란 기사에 실린 신남철의 사진)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그와 같은 신남철의 시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서구 사조였다. 당시 그가 받아들여 체화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모국 또는 대국들이 정식화한 역사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하는 실천적 노선과 다르다는 점에서 ‘수정주의적’이라거나 ‘자유주의적’이라는 수사(修辭)를 받곤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는 교조적 이론의 기계적 수용과 적용보다 현실을 고려한 창조적 수용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같은 변용은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고뇌의 무게나 상상력의 깊이 없이 불가능함에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이 무기를 평생 갈고 닦았던 것인데, 그에게 처음 이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는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또는 미야케 로쿠지죠, 三宅鹿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남철은 반(反)‘제국’적 사유의 토대를 ‘제국’ 대학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야케는 1928년 4월 18일부터 1934년까지 법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를 담당했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수업을 통해 주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신남철은 물론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해방정국의 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그의 수업을 들었으며,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 인 이재유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 당시 이재유가 탈옥했을 때 미야케는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발각되어 급기야 이 일로 파면된다. 미야케의 진심, 그리고 그와 인연이 있던 모든 이들의 열정은 차치하고, 이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지점은 제국을 향한 이론적 무기가 ‘제국’의 대학을 통해 전달되는 이 ‘어긋남’이 신남철은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진 3 :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이재유 탈옥 및 은닉 사건 기사에 실린 미야케의 사진)

 

신남철은 우리에게 주로 ‘철학’의 권역에 속하는 이로 기억된다. 팔이 안으로 굽기도 하거니와 어쨌거나 ‘철학’과 졸업생인 까닭에 이 특출한 지식인을 ‘철학사’ 또는 ‘철학’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기란 철학도로서 일단은 마뜩잖다. 하지만 신남철을 철학의 영역에만 배타적으로 귀속시키는 일이 개운치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대단히 ‘문학’적인 인물이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신남철의 글은 현재 『역사철학』(김재현 해제, 2010)과 『신남철 문장선집』 I, II(정종현 엮음, 2013)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역사철학』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신남철 문장선집』’은 한 지식인의 글모음집 치고는 제목이 좀 어색하지 않은가? 조선시대 지식인도 아니고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후까지 활동했던 이의 글을 모아 놓고 ‘문장선집’이라 했으니 말이다.

엮은이의 말로는 『역사철학』의 경우 해제도 그렇고 완성도가 높은 판본이 김재현에 의해 이미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한 모든 글을 수록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집’이라 하기는 어려우니 『신남철 선집』 정도면 무난할 것이다. 그럼에도 ‘문장선집’이라 이름 한 까닭을 엮은이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신남철은 철학, 역사, 문학의 인문학과 마르크시즘을 위시한 당대의 사회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자신의 지식을 형성하고 실천하고자 한 종합지식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종합적인 인문지식과 실천을 추구했던 동아시아의 지식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의 제목을 ‘문장’ 선집이라 명명했다.”

신남철은 우리 역사에서 ‘철학’을 ‘전공’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상술했듯이 일정하게 옛 지적 전통의 간접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의분에 찬 역사 인식과 실천 외에, 이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전공의 벽에 갇혀 있지도 않았거니와 그러기에는 문학적 감수성과 지적 호기심 또한 깊고 또 폭넓었던 까닭이다. 개인적 성향과 지성사적 특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는 창조적인 상상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거침없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삶 속에 삽입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러한 기질은 그를 북으로 이끌었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급진의 붉은 빛이 선명했음에도 그의 사유와 삶은 구와 신, 남과 북, 식민지와 제국, 이론과 실천, 정통과 이단, 타협과 저항 사이에 가로 놓여 동요했고, 이 떨림은 다시 ‘전공’과 ‘강단’의 병속에 갇힌 이 시대의 학문과 지성에게 출구를 가리키는 애절한 손가락임에 틀림없다.

(사진 4 : 경성제국대학 예과학생들이 발행한 문학잡지 『文友』 5호. 신남철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출처 : 아단문고 웹사이트)

 

 

블로그분과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