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유를 위하여[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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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혼자 하는 사랑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절대로 이별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기에는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이별 따위는 절대 끼어 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이별의 상황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하더라도 강제적이며 급작스러운 이별은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보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머니에게는 마쓰시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마쓰시타는 어쩌면 괴로움 속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처음 읊은 시 속에서 첫사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기억이었다. 깊은 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nogada4723/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시 <여름밤>의 부분-

 
할머니의 사랑은 그랬다. 6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오직 혼자 알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리워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밤이 되면 우는 풀벌레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립다 말하지 못하고 홀로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또 다른 죄의식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는 “나한테 참 잘했어. 내가 아무리 성질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그리 화를 안 내대.”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참 똑똑했다. 시대만 잘 만났으모 한 자리 했을 끼다. 뭘 해도 뭘 맡아도 똑 부러졌거든.”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살아온 정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따뜻하고 깊어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검은 돌과 흰 돌처럼 확연하게 구분하여 정의내릴 수 없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마쓰시타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가면을 쓴 집착이었을까? 18살 어린 나이에 만나 19살이 되어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20살에 헤어진 사람을 81세가 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면 무엇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착하며 고통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60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자꾸 끌고 간 것이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할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치마 밑으로 발이 나오면 애써 치마를 끌어당겨 발을 감추곤 했다. 진물이 묻어 있는 할머니의 발을 볼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자유의지로 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80평생을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몸을 자기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을까? 마쓰시타와의 사랑이 종말을 고한 그 시점까지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집착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여
양손을 꼭 잡고
철로길을 걸으며 뛰며
동심에 싸여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운 걸 모르더라.
-시 <사랑>의 부분-
 
서로가 웃으며 변치 말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맹세도 하였더라.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속삭임이었더라.
-시<첫사랑 이야기 1> 부분-
 

애당초 나와 마쓰시타는
맺어질 사랑이 아니었구나.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
-시<첫사랑 이야기 2>부분-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시<눈 내리는 날> 부분-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약속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따뜻했던 정으로 이어진다. 사랑에 대한 약속도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비록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였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하며 체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와 있다.
 

내게도 행운이 있었던가
김철수라는 청년을 알아서
60년 동거생활하며 그 안에서
예쁜 딸을 선물로 하나 받았더라.
-시<내 인생길> 부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표현하며, 딸은 선물로 여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21살 때 만난 청년 김철수로 호칭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세월을 ‘결혼생활’이라는 말 대신 ‘동거생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불쑥 나오는 언어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결혼이 아닌 동거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과 이별이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할아버지와의 결혼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일본에서 온 용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 간 결과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결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노라고 이미 수차례 되뇌었다.

살면서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록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켜 보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귀한 인연이었지만, 그 결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 헤어진 이후의 60년은 온전히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살았노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선택의 자유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정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60여 년을 찾아 헤맨 것은 삶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였다.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으로 낭비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자유의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도 자유의지로 나를 맞이해 주었지만, 두 자유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내 연구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는 삶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올가미를 만들고 덫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했는지, 그리고는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했는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각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도 외압에 의해 뺏기고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60년 동안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랑과 슬픔을 시로 읊었다. 비록 자유롭게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선택한 것이 나와의 만남이었다. 선택의 자유, 온전한 자유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에 의해 내일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애써 일구어 왔던 꿈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의 자유에 의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할머니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열어야 할 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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