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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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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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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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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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언어가 지워버린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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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준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외국유학을 갔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양육의 문제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 후에는 전업주부로 가사와 양육을 도맡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과외지도를 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아이의 학교에서 급식을 나누어주는 자원봉사도 한다.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아직 형편이 어려운 시간강사이다. 일하러 갈 때면 그녀는 이웃에 아이를 맡긴다. 대신 이웃의 아이들에게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다. 부모/시부모가 아플 때 간병을 담당하는 것은 항상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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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주의를 둘러보면 조씨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공식적인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GDP든 GNP든 어떤 경제적 용어도 조씨가 수행하는 종류의 노동을 생산 활동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통상 그녀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화폐의 거래나 공식적 시장과는 상관이 없기에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화폐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외지도 역시 공식적 시장거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씨가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양육, 과외지도, 자원봉사, 품앗이, 간병은 생산 노동이라고,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갖지 못하는 사적인 활동일 뿐인가? 조씨의 노동을 경제와 관계없는 사적인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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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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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굳어진 공/사 구분법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경제적 영역과 비경제적 영역이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봉건시대에 가정은 사회적 신분과 유산이 계승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경제활동의 공간이었으며 여기서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 중심의 임노동 영역으로, 가정은 시장중심의 경제관계 밖에 존재하는 친밀성, 인간관계, 사랑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관계는 친밀관계로부터 분리된다. 경제적 활동은 오직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노동을 사고파는 행위와만 연관되며, 가정은 경제활동이나 이해관계와는 동떨어진 숭고한 친밀성의 영역이 된다. 즉 가정에서의 활동은 노동이기보다 사랑의 표현이며, 가족, 이웃의 관계는 이해관계 중심의 경제적 관계이기보다는 규범적 태도가 중시되는 인간관계로 간주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담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가령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강력한 자본주의가 여성의 가내 노동 및 친밀관계를 자기존립의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시장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활동은 강력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된 것으로 혹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지지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 편으로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을 소비의 공간으로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가정이 자본주의에 의해 식민화되는지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분석은 강력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사적인 인간관계 나아가 사회적인 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의 근저에는 가정 내에서의 활동이 공식적인 경제활동과는 분리된 사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여전히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담론에는 가정에서의 활동이 생산 활동이라기보다는 생산 활동을 보조하는 재생산 혹은 소비활동이며, 이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경제 원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전제들로 인해 자본주의적 시장 밖에 존재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경제적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 수동적 대상이기에 그녀들의 정체성은 공식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맺고 있는 남편의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되곤 하였다.

만약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논리를 조씨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조씨의 다양한 활동은 경제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친밀성의 표현이다.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친밀성의 이름으로,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관계에서의 이러한 희생의 결과는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 한다. 그녀의 애정 어린 봉사와 희생으로 남편의 노동력은 재생산되며, 아이는 미래의 노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경제적 생산자가 아니다. 그녀가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자로서 혹은 소비자로서일 뿐이다. 그녀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할 어떠한 대안적 생산의 힘도 갖지 못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에 의해 이용되고 침탈되는 수동적 대상일 뿐이다.

결국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조씨와 같은 여성을 경제의 언어에서 지우거나 경제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강등시킨다. 이분법을 고수한 채 여성을 사적인 영역으로, 비경제의 영역으로 감금하는 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은 비존재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밀 관계 내에서의 여성 활동은 비경제적 활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분법 안에서 경제는 어떻게 정의되기에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노동으로, 경제활동으로 규정해 줄 수 없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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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본주의적 경제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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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blog.daum.net/yyy8525/124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경제에 대한 관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경제체제란 곧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깁슨-그래함(Gibson-Graham)이 분명하게 지적했듯 주류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도 경제적 분석의 대상은 곧 자본주의였고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유일한 그리고 본질적인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자본중심적 경제일원론으로 인해 여성의 일상적 활동은 경제 언어에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간파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였다. 델피는 논문 「주요한 적」(1980)에서 결혼 내에서 가사노동은 남편의 임금과 함께 가족 생존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상품생산과 관계없다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혹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진단한다.(Christine Delphy, “The Main Enemy”, in Feminist Issues, Summer 1980, p. 26.) 가사 노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모두를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가족 개개인의 고유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그 노동에 대한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는 레오나드와 함께 저술한 1992년의 논문 「가족적 착취: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결혼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서 가내 생산을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경제 일원주의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즉 델피는 “이중 체제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진 입장을 개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외에도 가부장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내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Christine Delphy and D. Leonard, “Familiar Exploitation: a new analysis of marriage”, in Contemporary Western Societies, Cambridge: Polity Press, 1992를 참고하시오.)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가사노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부차적인 체제가 아니라 독자적 관계 즉 가부장적 관계에 따르는 “생산” 양식이다. 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의 경제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델피의 이중 체제론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의 사례를 분석해 보자. 분명한 것은 조씨의 가정 내 노동을 순수 사적인 것 혹은 비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여기서 폐기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씨의 노동은 생산노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의 거래를 전제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생산 활동이다. 조씨가 가족을 위해서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이웃의 아이들에게 수행하는 영어,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그녀는 가내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의식하는 한 자신의 노동이 착취될 때 저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신의 잉여노동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의 모순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 모순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체제론”은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델피는 가부장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양자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만약 델피가 자본주의를 여전히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율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를 벗어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델피는 경제 이원론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당시 자본중심적 경제학에 정향된 경제 일원론자들은 여전히 가내 생산양식을 자본 연관적 이론형식을 통해 설명할 것을 그녀에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요구 앞에서 델피는 어려움을 가졌다. 예를 들어 그녀는 가내 생산양식 역시 자본의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경향을 갖는 경제시스템으로 설명해야한다는 요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즉 그녀는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이 있다는 생각에는 도달하였지만 이 다른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가들의 반론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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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의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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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경제형식과는 다른 경제형식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형식들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형식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내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활동을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야하며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대안적 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가능성을 이론화할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J. K. 깁슨-그래함(Gibson-Graham, 깁슨ㅡ그래함은 캐서린 깁슨(Katherin Gibson)과 줄리 그래함(Julie Graham)이 함께 만든 공동의 필명이다.)이 제안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깁슨-그래함은 그 누구보다도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는 정치경제학 이론들이 가정경제와 같은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들을 이론의 전면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남근중심적(phallocentric) 담론이 남근을 인간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표로 간주하면서 남근과 다른 모든 것들을 타자로, 결핍으로 배제해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이제 타자로 배제되어왔던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론화하고자 할 뿐 아니라 이러한 활동이 갖고 있는 긍정적 잠재력을 발굴하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의 이러한 작업은 델피의 이중 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편으로 그녀들은 델피가 가내 생산양식과 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형식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델피가 또 다른 본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 밖에 존재하는 한 여성은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또 하나의 본질에 따라 파악된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이 보기에 여성들은 가족 관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연루되어 있다. 여성들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은 여성을 가부장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보는 델피의 방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여성은 통일체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깁슨-그래함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여성의 타자성은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이다. 즉 여성의 타자성은 항상 복수이다. 버틀러가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시피, “여성”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수행성의 결과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본질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통일적 실체가 아니다. 이리가레가 여성을 “두 입술”로 비유했던 것도 여성이 단 하나의 매끈한 형태를 갖는 남근과는 다른, 그 자체의 내적 차이를 갖는 여성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어떤 내용적 동일성을 갖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은 단수로서의 여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의 관점에서 기존의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깁슨-그래함은 복수적 타자의 관점을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핵심으로 삼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여성을 가내 생산 양식과 같은 어떤 하나의 타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관련하여 다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의 <표1>을 통해 그녀들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경제형식들을 살펴보자(ibid. p. xiii. 이 표는 가로가 아니라, 세로줄 아래위로 읽는 것이다. 예컨대 비자본주의적 활동도 시장지향적일 수 있다.)

거래

노동

기업

시장

임금

자본주의

대안적 시장

공공재의 판매

윤리적 “공정무역” 시장

지역유통체계

대안 통화

지하시장

협동조합형 교환

물물교환

비공식시장

대안적 지급

자영업

협동조합

기식노동

호혜적 노동

현물지급

복지급여형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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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국영기업

녹색자본가

사회적 책임 기업

비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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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장

가계 흐름

선물

토착적인 교환

국가 할당

국가 전유

이삭줍기

수렵, 어업, 채취

절도, 밀렵

미지급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

마을 노동

자원활동

자기재충전형 노동

노예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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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본주의적

공동체적

독립적

봉건적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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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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